자유로운 야단법석

연꽃이 법우님의 질문에 답하지 못한 것들

실론섬 2014. 5. 15. 15:01

연꽃님의 글중에서 어느 법우님이 아래와 같은 질문을 한 것을 보았다. 그런데 명쾌하게 대답을 하지 못하고 얼버무리며 블로그 검색창을 두들겨 보라고 친절하게(?) 설명한 것을 보았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질문중의 하나인 윤회에 대해서 길고 장황하게 말을 늘어 놓았는데 초보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이야기보다는 몇번이나 반복한 단멸론에다가 경전을 무조건 믿어라고만 한다.


1) 불교는 맹신의 종교가 아니다

붓다는 결코 무조건 믿어라고 한 적이 없다. "와서 보라 그리고 직접 확인하고 내 말이 틀림없고 옳게 생각되면 그때 받아 들여라"라고 했다. 왜냐하면 지혜가 없는 맹목적인 믿음은 결국 맹신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불교는 맹신의 종교가 아니다. 처음 불교를 접할 때 꼭 읽어봐야 하는 경전이 세가지가 있다. 말룽카뿟따 경(10무기), 가미니 경(기도에 대하여) 그리고 깔라마 경(버리고 받아들임의 기준)이다. 이중 깔라마 경은 흔히들 '붓다가 말한 것이라도 그대로 믿지 말라고 했다'라고 헛되게 오해를 하는 분들이 많은데 깔라마 경은 '받아 들여야 하는 기준과 버러야 하는 기준'에 대해서 명쾌하게 설명해 놓은 경전이다.   


2) 인도및 스리랑카의 달력

인도와 스리랑카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발생한 별자리 점성술이 민간에 뿌리깊게 박혀있다. 특히 '해,달,화성,수성,목성,금성,토성,라후(일식을 신격화),게투(월식을 신격화)'라는 아홉행성을 기준으로 한 점성술이다. 그 이외에도 힌두력이나 태음력 태양력등이 다양하게 섞여 있다. 특히 new year 는 4월 13/14일에 걸쳐 있는데 이것은 힌두 력에 따른 날짜이다. 


또한 불교나 일반생활에는 태음력(월력)이 쓰이는데 모든 불교 행사는 인도의 태음력을 기초로 한다. 매월 보름날을 poya day(full moon day)라고 하여 12 poya day 가 각각의 불교적 의미를 가지고 행사를 한다. 특히 태양력으로 5월달에 있는 보름날은 석가의 탄신일/성도일/열반일로 흔히 wesak poya day 라고 하여 일주일간을 축제를 한다.  


그렇다면 정말 이날이 붓다가 탄생하고 성도하고 열반한 날일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렇다이다. 왜냐하면 붓다의 45년 안거기록이나 그외 탄생/성도/열반일은 아무렇게나 정한게 아니다. 오래전부터 전해내려오는 전승과 각종 주석서 그리고 경전을 면밀히 검토하고 연구한 끝에 내린 결론이기 때문이다. 


중국과 스리랑카의 불교 경축일이 다른 것은 인도 음력과 중국 음력의 차이점에도 원인이 있지만 옛날 중국 황제들이 불교의 경축일을 자기들 입맛대로 만든 것도 큰 영향을 끼쳤다(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3) 연꽃님이 대답을 못한 아래 질문에 대해서 나름대로 답글을 달아본다. 

이런 질문들은 불교에 관심있는 분들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보편적인 의문점이라고 생각해서이다. 꼭 정답은 아니더라도 나름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으로 믿는다.


1. 석가모니가 말한 '깨달음'이 곧 지금의 불교교리(백과사전이나 책 등에서 설명하고 있는)와 일치한다고 볼 수 있습니까?

붓다가 보름날 보리수 아래에서 깨친 것은 무엇일까? 무엇이 그분으로 하여금 7주간이나 법열과 희열에 휩쌓이게 했을까?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연기법"이다. 경전에도 나와 있지만 붓다는 초저녁 한밤중 새벽녘에 걸쳐서 연기의 법칙을 순관과 역관으로 완벽하게 깨닫는다. 더 나아가 그분은 사성제를 깨달아서 12연기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완벽하게 알았다. 결론적으로 불교는 연기법이며 그 연기에서 벗어나는 사성제와 무아 무상 고를 말한다.   


2. 불교의 궁극적 목적은 해탈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것과 열반의 차이점은 무엇이며, 해탈을 하면 마치 초월자가 된 듯한 묘사를 하고 있는데, 진정한 해탈은 어떠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까?

해탈과 열반은 같을까 다를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보통 일반인들은 해탈과 열반을 동의어로 사용하지만 엄격하게 따지면 해탈과 열반은 다르다. 두 용어는 불교이전의 우파니샤드 철학에서 이미 사용되어 왔던 개념이다. 이것을 불교가 끌어다 쓴 것이다. 


해탈이란 빠알리어로 위뭇티(vimutti)라고 한다. 해방.자유. 속박에서 풀려남등의 뜻이다. 쉽게 말해서 인간이 번뇌(온갖욕망)에서 벗어나 윤회를 멈추는 것을 의미한다. 해탈에는 세가지가 있다고 한다. 즉 심해탈/혜해탈/양분해탈이다. 이중에서 혜해탈과 양분해탈만이 열반과 동등한 의미로 사용되며 심해탈은 열반(아라한과)이라고 보질 않는다. 좀더 엄격하게 말하면 심해탈과 헤해탈을 모두다 얻은 양분해탈만이 열반이라는 것이다. 참고로 구차제정 중에서 8가지를 전부다 해탈로 설명하기도 한다.


열반이란 닙바나(nibbana )로서 불이 꺼진 상태를 말한다.쉽게 말해서 탐진치 삼독심이 일어나지 않는 경계이다. 사성제와 연결되어 있는 개념이기도 하다. 불사(不死)라고도 표현하며 이는 우리들의 언어나 관념이나 상상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세계라고도 한다. 물론 굳이 엄격하게 머리 아프게 따질 이유는 없다고 본다. 해탈이 곧 열반이라는 일반적인 개념으로 생각해도 크게 틀린 것은 아니다.


열반은 말 그대로 삼독심의 번뇌가 끊어진 상태 즉 마음이 평온하고 적정의 상태이다. 당연히 초월적이고 우리들의 상상을 뛰어넘는 경계이다. 진정한 해탈이란 평온 안락 행복 적정이다. 


3. 불교의 교라(상좌부, 대승...)가 너무 많습니다. 다 떠나서, 현재 석가모니께서 당대에 친설하신 내용이라고 가장 신뢰되는 것은 무엇이며 제가 어디서 접하거나 볼 수 있겠습니까?

불교는 역사적으로 초기불교 - 부파불교 - 대승불교 - 밀교순으로 발전을 거듭하면서 교리가 폭넓게 확장되고 철학적으로도 깊이가 깊어졌다. 그 가운데서 친설이라면 당연히 빠알리어 경전이다. 한국에서는 각묵스님과 전재성 박사님이 번역한 경전이 있으면 구해보면 좋을 것 같다.


4. 석가모니께서 현실적 깨달음 이외에 초월적 존재들이나 비현실적 세계에 대해서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혹은 그것을 말씀하셨다 하시면 비유적 표현입니까 아니면 정말로 그런게 있다고 하신것입니까?(ex 석가모니 본인 이외의 부처들, 보살들, 팔부신중, 천왕등...윤회,33천,, 극락 등등)

불교의 세계관은 욕계 색계 무색계등 33천을 말한다. 이것이 불교의 세계관이다. 토를 달거나 이의를 제기할 이유가 없다. 다시말해서 불교는 인간계 이외의 또다른 세계를 인정하는 종교이다. 


밝은 대낮에 하늘을 올려다 보면 별이 안 보인다. 그렇다고 별이 하늘에 없는게 아니다. 햇빛때문에 우리가 별을 못 볼 뿐이다. 하지만 햇빛이 사라진 저녁이 되면 우리는 낮에 못봤던 별을 볼 수 있다. 그별이 어디서 새롭게 나타난게 아니다. 이처럼 무명(햇빛)이 걷히면 우리들은 별을 보듯이 우리 인간계 경계밖의 진리를 볼 수 있다고 한다.


불교 경전에 묘사되어 있는 많은 천신들이나 마라들은 거의다가 비유적으로 사용되었다고 보면 된다. 인간 중심의 종교이고 인간의 고를 없애는 것이 붓다의 최대 목적이었는데 굳이 신이니 악마니 하는 실체들을 등장시켜 설법을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특히 마라(악마)는 번뇌 망설임 불선업등의 나쁜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악마에게 마음이 사로잡혔다는 것은 다시말해서 나쁜 생각들로 마음이 가득찼다라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그이외에 대승불교의 다불사상(수많은 부처님 등장)과 보살사상 그리고 대승불교의 각 종파에서 만들어 낸 극락이니 하는 용어들은 지면상 생략하고 다음 기회로 미루고자 한다. 


흔히들 윤회의 증거가 뭐냐고 묻는다. 이에 대한 가장 명쾌한 정답은 다음과 같다. "우리들은 태어날 때 각각의 모습이 다른만큼 환경과 삶이 제각각이다. 잘살고 못살고 건강하고 허약하고 일이 잘되고 안되고... 수많은 모습들로 태어나서 살고 죽는다. 왜 그럴까? 왜 어떤 사람은 부유하고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고 어떤 사람들은 가난하고 못 생기고 허약하게 태어날까? 우스개 이야기로 어떤 단멸론자는 로또복권식으로 당첨되어 이렇게 태어난다는 허망한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정말 로또 복권식으로 이렇게 태어나는게 인생이라면 이건 정말 너무 허무하지 않은가? 


과거에 내가 지은 업의 결과라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합당하고 이치에 맞는 말이다. 이렇듯 우리들은 단 한시도 업보와 그 업보에 따른 윤회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것이다.


5. 이 세상에는 수많은 사상과 종교가 존재합니다. 다른 종교와 사상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 생각에는 현실적 관점으로 봤을 때 각자의 것을 믿으면서도 공존하면서 돕는것이 옳은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타종교에 대한 붓다의 입장은 어떠했을끼? 범망경(Brahmajala sutta)에는 62가지 외도들의 사상을 나열하고 있다. 이들중 대표적인 것을 육사외도라고 통칭한다. 불교와 마찬가지로 이들 외도들도 자신들의 가르침이야말로 최고라고 주장했다. 불교도 수많은 논쟁에 휩쌓이기도 했고 비방과 비난에 직면하기도 했다. 그럴때 붓다는 뭐라고 했을까?


"외도들의 비방에 분노하거나 싫어하지 말라"라고 제자들에게 간곡하게 당부한다. 비방과 비난에 분노하거나 싫어하는 마음을 낸다면 그것이 장애가 된다고 하면서 또한 비난과 비방에 분노하면 옳고 그름을 제대로 분간할 수 없다고 했다.


붓다는 또한 "칭송에도 즐거워하거나 기뻐하지 말라고 했다". 다시말해서 비방이나 칭찬 모두에도 반응하게 되면 그것은 수행에 장애가 될뿐 아니라 나아가 마음의 평정을 잃어 버리고 옳고 그름을 분간하지 못하여 옳다고 말해야 할 때 말하지 못하고 틀렸다고 지적해야 할 때 틀렸다고 지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붓다는 냉정하게 비방이나 칭찬에 휘둘리지 말고 옳다고 하는 것은 옳다고 하고 틀리다고 하는 것은 '그런것은 우리들에게 이런 것은 없고 알려지지 않은 것'이라고 말하라고 한 것이다.


또한 범망경이나 기타 경전에 묘사되어 있는 외도들에 대한 비판은 대외용이라고 보다는 대내용 즉 수행승들을 위한 옳고 그름을 판별하기 위한 교육용이라고 보면 된다. 외도들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 목적이 아니라 외도 사상들의 문제점을 소상하게 파악하여 제자들이 그릇된 길로 빠지는 것을 예방하고자 했던 것이다.


붓다는 타종교를 배타적으로 배척하지 않았다. 포용력과 자비심으로 대했다. 그들이 원하면 언제든지 정법에 입각하여 가르쳐 주었고 올바른 길로 이끌어 주었다. 붓다는 또한 결코 불교를 믿으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와서 보고 듣고 확인하고 그런다음에 옳다고 생각하면 그때 믿으라고 했을 뿐이다.

 

6.석가모니께서 생존에 근본주의를 불식시키려고 많은 노력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말씀하신 근본주의와 데바닷타의 근본주의는 어떻게 다릅니까? (A 법우님)

데바닷타를 불교 근본주의로 이해한다니 나도 깜짝 놀랐다. 데바닷타는 결코 악인이 아니었다는 글도 올려 놓았지만 붓다와 데바닷타는 사촌간이면서 결과적으로 불교를 두개로 나뉘는 엄청난 사건을 겪었다. 가장 큰 이유는 5가지로 요약된다(글에 나와있음). 쉽게 말해서 데바닷타는 좀더 근본주의적이고 고행주의를 택했다. 하지만 붓다는 동의하지 않았다. 올바른 길을 가르치는 붓다 입장에서는 고행도 쾌락도 모두다 수행에 도움이 안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현실적이고 합리성을 붓다는 더 추구했다. 결과적으로 놓고보면 붓다의 선택이 옳았다고 보여진다. 데바닷타 계통의 불교는 결국 사라졌지만 붓다의 가르침은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4) 연꽃님은 초기불교를 대기설법이라고 천명한다. 과연 그럴까?

대기설법(對機說法)이란 상대에 따라 바뀐다는 뜻이다. 또는 병에 따라 약을 투여한다는 응병여약(應病與藥)이니 하고 불린다. 과연 법이 장소에 따라 또는 대중의 수준 여하에 따라 변용되었거나 바뀌는 것일까? 즉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식으로 설법해도 되는 것일까?


붓다가 설법하신 법은 일찌기 단 한번도 때와 장소를 따라 또는 대중들의 수준에 따라 바뀌거나 변용된 적이 없다. 그것은 항상 일정했다. 왜냐하면 붓다의 법은 붓다가 발명한게 아니라 발견한 것이기 때문에 설사 붓다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변용시킬 권한이 없는 것이다. 한국 사람들에게는 연기가 연기이고 인도인들에게는 연기의 진리가 또다른 법으로 통할까? 


법은 그것을 받아 들이는 사람들의 능력.이해력등은 일정치가 않다.똑같은 연기를 설법해도 10개 모두를 받아 들이고 이해하거나 5개만 받아 들이고 이해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경전에는 연못에 무수한 청.홍련이 있고 잠겨 있거나 떠 있거나 하는 등 그 수준이 다르다고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이말은 붓다의 설법은 그러한 각 중생들의 근기를 배려하여 가장 알맞는 다양한 "점진적 체계적인 법문"을 하신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붓다는 대중들에게 설법을 하실 때 의례 베품의 보시와 공덕 계행 인괍버 출가의 공덕등을 차례로 설법하시고 각 중생들의 마음에 이러한 원리들이 깊이 받아 들여졌을때에 비로소 사성제 연기법등의 높은 단계의 법을 설법해 주셨던 것이다. 


대상과 상황에 따라 그때 그때 행해졌다하여 이름 붙여진 응병여약의 대기설법은 대승불교에서 하나가장 큰 장점이자 특징으로 홍보되고 인식되어 왔지만 이는 초기불교의 "점진적 체계적 설법"을 상당히 왜곡하게 만든 주된 요인이기도 하다. 오늘날 불교 교리나 깨달음의 자의적 해석이 난무하는 부정적인 현상들도 따지고 보면 붓다의 가르침을 "점진적 체계적 설법"이라는 성격을 벗어나 대기설법이라는 측면에서만 강조하고 이해한 결과일 것이다.


구구셈도 제대로 못하는 학생들에게 선생님이 인수분해 문제 가져와서 풀어보라고 한다. 그리고 그것을 푸는 방법을 가르친다고 할 때 과연 구구셈도 못하는 학생이 인수분해를 백년이 간들 풀 수 있을까? 온갖 대기설법 응병여약을 투여한다고 가능할까? 도대체 구구셈도 못하는 학생에게 인수분해를 풀기위해서 어떤 대기설법 응병여약이 있단 말인가? 그것이 정말 궁금하다. 결론은 가르치는 것도 엉터리고 듣고 이해하는 것도 엉터리고 답도 엉터리로 나올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5) 방편이란 무엇인가?

붓다의 교설중 특히 연기는 결코 쉽게 이해되는게 아니다. 이는 붓다의 말씀이나 제자들과의 문답에도 잘 나타나 있다. 그래서 경전에서 설해진 다양한 설법들은 그렇듯 어려운 깨달음을 중생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마련된 방편 시설이다. 방편이란 '가까이 가 알아내게 하다. 가까이 다가간다'라는 뜻이듯이, 그 속에는 초보적인 가르침으로부터 심심미묘한 경지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이 체계적으로 설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붓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의 법과 율에서도 점진적인 학습과 점진적인 실천과 점진적인 방법을 설정할 수 있다""나는 단번에 완성된 지혜를 획득할 수 있다고 결코 주장하지 않는다. 점진적인 학습과 점진적인 실천과 점진적인 방법에 의해 지혜는 완성되고 획득되는 것이다"   


경전은 6근.12처등 범부의 상식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것부터 5온.사성제.12연기등 높은 단계의 성인이나 가능한 부분까지 다양한 설법들이 정교하게 체계적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가르침이 선.후 관계를 이루며 점차 깊어지고 지혜가 획득되는 이러한 점진적 설법의 구조야 말로 무명에 쌓이고 미혹한 중생에게 궁극적인 진리를 깨닫게 하기 위한 불교의 가장 큰 특징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