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야단법석

좋은 친구를 사귀는 이익

실론섬 2014. 5. 15. 15:12

어느 날 아난다 존자는 이런 생각을 했다.

[나에게 좋은 친구가 있고, 또 좋은 친구와 함께 있다는 것은 수행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아마도 내 수행의 절반은 좋은 친구가 있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아난다 존자의 생각에 대해서는 붓다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그런 말 말라. 왜냐 하면, 순수하고 원만하며 깨끗하고 맑은 범행은, 이른바 선지식·착한 동무·착함을 따르는 것이요, 악지식·나쁜 동무·나쁜 일을 따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착한 벗이기 때문에 중생들은 내게서 <생각의 깨달음 갈래>를 닦아, 멀리 떠남과 욕심 없음과 없앰에 의하여 버림으로 나아간다. 이와 같이, 법가림의 깨달음 갈래·정진·기쁨·쉼·선정·버림의 깨달음 갈래도 멀리 떠남과 욕심 없음과 없앰에 의하여 버림으로 나아간다. 


그러므로 아난다여, 순수하고 원만하며 깨끗하고 맑은 범행은, 선지식·착한 동무·착함을 따르는 것이요, 악지식·나쁜 동무·나쁜 일을 따르는 것이 아닌 줄을 알아야 하느니라.”


또다른 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아, 선지식·훌륭한 동무들·착한 일을 따르는 이것은 아직 생기지 않은 바른 견해는 생기게 하고, 이미 생긴 바른 견해는 거듭 생겨나게 하여 더욱 많아지게한다.

 

외부적 현상 중에, 아직 생기지 않은 착한 법은 생기게 하고, 이미 생긴 착한 법은 거듭 생겨나게 하여 더욱 많아지게 하는 데는, 이른바 선지식·훌륭한 도반·착한 일을 따르는 것 이외에 다른 그 어떤 법도 나는 보지 못했다.  

 

이와 같이 아직 생기지 않은 바른 뜻·바른 말·바른 행위·바른 생활·바른 방편·바른 생각· 바른 선정은 생기게 하고, 이미 생긴 것은 거듭 생겨나게 하여 더욱 많아지게 하느니라. [잡아함 선지식경 726/779)


불교에서는 함께 수행하면서 탁마하는 친구를 각별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이 친구를 도반 또는 선지식이나 선우(善友)라고 부른다. 대승불교에서는 무연(無緣)의 중생들에게조차 자비를 베풀라고 가르친다.  스스로 청하지 않는 벗이 되고 단 한명의 중생이라도 성불하지 않으면 스스로의 성불조차 미루겠다는 보살도 있다. 인드라망처럼 얽혀 있는 세상사에 나혼자란 있을 수 없다. 연기의 법칙에서 본다면 이는 더더욱 극명하게 나타난다. 너와 나의 사이에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담마파다에 이런 귀절이 있다.


Attanameva pathamam   먼저 자신을 바른 곳에 놓고나서

patirupenovesaye          그 다음에 다른 사람을 가르쳐야 한다

athannamanusaseyya   다른 사람들이 비난할 일을 (이런 현자는)

na kilisseyya pandito     지혜로운 이는 아예 하지 않는다 (고뇌에 빠지지 않는다)


Sudassam vajjamannesam    남의 과실은 보기 쉽지만 (남의 허물은 눈에 쉽게 띄지만

attano pana duddasam          자기 과실은 보기 어렵다 (자기 허물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aresam hi so vajjani               사람들은 실로 남의 과실은 겨처럼 흩뿌려 버리지만

opunati yatha bhusam            자신의 허물은 감추려 든다 (자기 과실은 덮어두어 숨긴다)

kalimva kitava satho                마치 도박꾼이 불리는 패를 감추듯이


우리들은 일상생활에서 늘 남과 접촉하게 마련이다. 사실은 일상생활 자체가 남과의 공동생활에서 성립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자칫하면 자기 자신을 보질 않고 남에게만 눈이 팔리기 쉽다. 남의 과실, 남의 행위, 남의 관심과 무관심, 남의 일거수 일투족등 그런 것에 우리들 마음은 질질 끌려 다닌다. 남을 책망하고, 남에게 성내고, 남을 업신여기고, 남을 원망하고, 남을 시샘하고, 남을 부러워하고, 남에게 마음을 뺏긴다. 그런곳에서는 자기 자신은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주체성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붓다께서는 중생들이 일상생활에서의 나와 너라는 관계를 위에 든 시구를 비롯하여 많은 경전에서 반복해서 경계를 하셨다. 여기서 말하는 남이란 단순히 자기 눈앞에 있는 특정한 사람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남은 우리들 주위의 어디에든지 있다. 그것은 다수의 사람일수도 있고, 일정하지도 않고, 집단이기도 하고, 사회나 국가인 경우도 있다. 우리들은 무엇이나 정치가 나쁘다느니 경제의 양극화라느니 하여 모든 책임을 상대쪽으로 돌리기 쉽지만 그런 비판에 앞서 그런 사회 집단 국가에 자기가 소속되어 있으므로 자기에 부과된 책임부터 느끼고 지각있는 행위를 해야 할 것이다.


세상은 홀로 살 수 없다. 연기에 따르면 자기 또한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홀로 떠도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은 어디를 가더라도 주변과 어울리지 못하고 개방된 마음을 가지지 못하고 편협된 사고와 편견된 시각으로 상대방을 바라본다. 스스로 자폐증의 심각한 정신상태임에도 자신은 홀로 고고한척 깨끗한 척 자위를 하고 위안을 삼으면서 지낸다. 물론 인간은 때로 홀로 고독을 즐길 필요도 있다. 자기만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스스로가 편협과 편견과 자폐증으로 자신이 홀로 된 것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세상은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다.

  

부처님 제자 가운데 사리뿟따와 목갈라나는 아주 절친한 친구사이였다. 그들은 좋은 스승을 만나면 혼자만 제자가 되지 말고 같이 가자고 약속했다. 그들은 250명을 데리고 붓다에게 함께 출가하여 개종했다.


붓다의 마지막 여정을 사실적으로 기록해 놓은 대반열반경에서 붓다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를 한다.


비구들이여, 비구들이 서로 삿된 친구가 되지 않고 삿된 동료가 되지 않고 삿된 벗이 되지 않는 한, 비구들에게 번영이 기대될 뿐 퇴보란 있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