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야단법석

부처님 탄신일이 아니라 출현일이라고 ?

실론섬 2014. 5. 16. 21:05

1. 연꽃의 글을 보면

 연꽃이 "과거에 부처님들이 여럿 출현한 이유는: 정법은 오래 머물지 않는다"라는 글을 올렸다. 그의 글은 사진까지 곁들여 가면서 땅과 하늘을 오가고 그것도 모자라서 현재와 몇십억겁의 세월을 갔다 왔다 한다. 종횡무진이지만 실로 무엇을 말하고자 함인지 무엇을 위한 글인지 종잡을 수가 없다. 무명과 괴로움에 휩쌓여서 미친 자가 여기저기 배설물을 쏟아 놓고 뒹구는 꼴이 꼭 이렇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2. 정법을 굳건하게 하는 법

비구들이여, 두 가지 법이 있다. 그것은 정법을 어지럽히고 사라지게 한다. 무엇이 둘인가? 단ㅇ와 문장들이 잘못 구성된 것과 뜻이 잘못 전달된 것이다. 비구들이여, 단어와 문장들이 잘못 구성될 때 뜻도 바르게 전달되지 않는다. 이러한 두 가지 법이 정법을 어지럽히고 사라지게 한다.


비구들이여, 두 가지 법이 있다. 그것은 정법을 굳건하게 머물게 하고 어지럽히지 않고 사라지게 하지 않는다. 무엇이 둘인가? 단어와 문장들이 바르게 구성된 것과 뜻이 바르게 전달된 것이다. 비구들이여, 단어와 문장들이 바르게 구성될 때 뜻도 바르게 전달된다. 이러한 두가지 법이 정법을 굳겉히 머물게 하고 어지럽히지 않고 사라지지 않게 한다.


위의 경전 내용은 여러번 연꽃님의 글을 비판하면서 인용하였던 붓다의 가르침중의 하나이다. 우리가 글을 쓸 때는 단어 하나 문장 한줄에도 얼마나 조심하고 어려워하고 숙고해야하는지를 위의 가르침은 일깨워주고 있다. 일반적인 논문이나 산문이나 소설을 쓸 때에도 이러할진데 특히 붓다의 가르침을 전할 때는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연꽃은 그의 글에서 "붓다께서 오셨다"는 틀렸고 "붓다께서 출현하셨다"라고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석가탄신일"이 아니라 "석가출현일"이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부모에게서 태어난게 아니라 부모님에게서 출현했다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붓다께서 어느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지 정반왕과 마야부인을 부모로 두고 태어나고 탄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식이라면 우리들 모두는 하나의 인격체이니 모두다 부모도 없이 땅이나 하늘에서 뚝 떨어져 출현한 것이된다.


하지만 붓다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분은 이렇게 말했다. "태어남이 있으므로써 늙고 죽음이 있으며,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고 죽음이 있다" 라고 했지 출현함이 있으므로 늙고 죽음이 있으며 출현함을 조건으로 늙고 죽음이 있다라고 하지 않았다. 그분은 태어났고 그리고 80세에 죽었다. 붓다 이후 수많은 아라한들이 있었지만 그분들 또한 출현했다고 하지 않는다. 아라한이 태어났다라거나 아라한이 되었다라고 한다. 


그분은 위대하다. 그래서 우리는 '석가생일날' 또는 '석가생일일(석가생신일)'이라고 하지 않는다. 우리는 '석가탄신일'이라고 부른다. 탄신(誕辰)은 위대한 분들의 태어난 날을 가르킨다. 탄일의 높임말이 탄신이다. 이 말은 '위인의 생일날을 기념하고 축하' 한다는 의미이다. 보통의 사람들은 '00선생 탄생 100주년'이라는 말을 쓴다. 이 뜻은 00선생의 생일날을 축하하고 기념하는게 아니라 탄생 그 자체를 축하하고 기념한다는 의미이다. '석가출현일'? 이게 말이 되는가?  


3. 왜 초기불교 하는가?

초기불교 이후 부파불교에 이르러 번쇄한 교리적 논쟁과 사원에 거주하면서 중생들의 구제를 외면한 불교를 비난하고 그 대안으로 내세운 것이 대승불교이다. 오죽했으면 부파불교인들을 소승이라고 하고 아라한까지 비난을 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대승불교의 구호는 한마디로 붓다의 원음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붓다의 원음 즉 그분의 육성 그분의 오리지널 가르침과 목소리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번쇄한 교리논쟁과 출가승위주의 불교나 대중구제를 도외시한 불교는 붓다의 육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 오늘날 우리는 초기불교를 배운다. 왜? 붓다의 육성을 알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신격화되고 형상화된 대승경전은 붓다의 육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대승경전속에서 만들어지고 찬술된 여러 부처님들과 보살님들이 아닌  역사적으로 실존하셨던 "인간 붓다"를 찾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초기불교를 하는 남방권은 대승경전의 부처님도 없고 보살님들도 없다. 오직 붓다 한 분 그분은 바로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태어나셨고 정각을 얻으셨고 45년 설법을 하셨고 80세의 나이로 우리 곁을 떠난 인간붓다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붓다를 찾고자하면서 하늘신이 어떠니 과거불이 어떠니 대지가 진동했느니 팔을 폈다 구부릴 정도의 사이에 가고 왔느니등등의 초월적인 이야기들을 늘어 놓고 그것을 경전 글자 그대로 믿으라고 한다면 그게 과연 초기불교를 믿는 사람의 자세이며 과연 초기불교의 정체성일까? 빠알리어 경전 그 어디 그 어느 귀절에 불교의 궁극적 목표인 열반을 획득함에 있어서 하늘신을 믿고 과거불이니 대지가 진동했으니 하는 말을 믿으라고 한게 있는가? 붓다께서는 우리들에게 보시.자비.사성제,연기등이 우리들을 열반으로 이끈다고 했을 뿐이다. 초기불교를 믿고 따른다는 사람들이 대승경전의 초월적인 이야기보다 더 초월적인 이야기에 매몰되고 그것이 마치 초기불교의 정체성인냥 떠드는 것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까? 정신병자가 아니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작태인 것이다.


경전에 나오는 수많은 하늘나라 신들은 붓다 이전에 인도사회에 널리 믿어져왔던 신들이다. 그 신들을 붓다는 차용을 하여 불교속으로 끌어 들였다. 연꽃 이야기대로라면 그러한 신들도 전부다 불교만의 고유의 신이어야 한다. 아마도 이 작자는 그러한 신들이 모두다 불교에만 존재하는 신들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왜 그러한 타종교나 민간신앙에서 믿어왔던 신들이 불교속으로 들어오고 붓다는 이를 어떻게 방편으로 이용했냐 하는 것은 불교 발전사나 인도철학사 인도사회 역사등을 보면 이해가 간다.   


4, 진리는 늘 그자리에 있을 뿐이다.

붓다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옛날 사람들이 살았던 옛 성과 옛 도시와 예 길을 발견했다.... 나는 그분들이 거닐던 그 옛 길(팔정도)을 따라가 ....깨달은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을 하늘 사람과 인간에게 잘 가르친다면 이 처엉한 삶이야 말로 번영하고 풍성해지고 널리 퍼지고 알려지고 발전할 것이다."


즉 붓다는 진리를 발명한게 아니라는 것이다. 원래부터 있어왔던 그 길이 흙과 정글에 묻혀 있던 것을 발견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무명에 덥힌 중생들이 이 길을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는 붓다가 탄생을 했던 하지 않았든 그 길은 늘 거기에 있다는 것이다. 다만 누군가 발견하느냐 하지 못하느냐의 차이일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 법(길)은 끊어졌다가 새롭게 출현하는게 아니고 없던 길이 새롭게 생겨난게 아니다. 컴퓨터를 만들고 전기를 만들듯이 세상에 없던 것이 새로이 나타난게 아니다. 원래 있었지만 흙에 묻여 발견되지 못한 그 예 길을 찾아냈을 뿐이다. 


5. 붓다는 왜 이 세상에 오셨는가?

다시한번 반복해 보겠다. 역사적으로 실존하셨던 그 분 인간 붓다가 우리 곁에 오신 이유를.

 

여기에 한 사람이 있다.

그분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많은 사람들의 행복과 이익을 위해서이다.

신과 인간의 행복과 이익을 위해서이다.

신과 인간의 행복과 복지와 이익을 위하여

세상에 대한 자비심으로 이 세상에 오신 분이다.

(위의 말은 즉 깨닫고 나신후에 홀로 간직하지 않고 우리를 위해서 설법을 하셨다는 의미임)


그 한 사람은 누구인가?

그분은 여래이시며 아라한이시며 온전히 깨달으신 분이다

이 한 사람의 나타나심은 이 세상에서 보기 어려운 일이다


그 한 사람은 누구인가?

그분은 여래이시며 아라한이시며 온전히 깨달으신 분이다

이 세상에 오신 그 한 사람은 비범한 분이시다


그 한 사람은 누구인가?

그분은 여래이시며 아라한이시며 온전히 깨달으신 분이다

이 한 사람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을 슬프게 한다


그 한 사람은 누구인가?

그분은 여래이시며 아라한이시며 온전히 깨달으신 분이다


이 세상에 오신 한 사람이 있다

그분은 유일하시고 동등한 자가 없고

두 발을 가진 자 가운데 으뜸이시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의미임)


그 한 사람은 누구인가?

그분은 여래이시며 아라한이시며 온전히 깨달으신 분이다.



말이 너무 길어져서 이만 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