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야단법석

붓다는 결코 침묵하지 않았다 - 10무기에 대해서

실론섬 2014. 5. 15. 15:05

붓다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무기(無記)를 행한 물음 중의 하나는 사후에 우리의 자아가 존속하는가 아닌가의 물음이다. 즉 몸의 기능이 정지하여 부패하기 시작하는 순간, 우리의 자아, 개체적 목숨도 역시 함께 끝나는가, 아니면 몸과 독립적으로 지속되는가? 자아는 몸과 하나인가, 다른 것인가?


붓다의 무기는 10무기 혹은 많게는 14무기로 정리가 된다. 이런 물음에 대한 무기는 곧 그중 하나를 긍정하는 상견 또는 다른 하나를 긍정하는 단견 사이에서 그 양 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중도에 머무르는 태도로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흔히 붓다의 무기를 상견과 단견 사이의 논쟁 자체가 인간이 근본적으로 알 수 없는 사태에 대한 형이상학적일 뿐이기에 인간의 인식 능력의 한계를 자각한 침묵이라고 해석하지만 붓다의 무기는 결코 인간의 인식 능력의 한계에서 비롯되는 침묵도 아니고, 형이상학적 희론을 벗어나 구체적 인간 삶에 충실하자는 의미의 침묵도 아니다. 


인식 능력의 한계가 고려되었다면, 그것은 그런 질문을 하면서 예나 아니오의 답변을 기대하는 그 질문자의 인식 능력의 한계일 뿐이지, 그 사태의 실상을 파악한 붓다의 인식 능력의 한계는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물음에 대해 몇 차례 무기의 태도를 보인 이후, 누군가가 '왜 답하지 않냐?'고 물으면, 그때 비로소 붓다는 그런 물음이 왜 간단히 예나 아니오로 대답될 수 있는 것이 아닌지, 즉 그런 물음이 무엇을 이미 전제하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그 전제가 어떤 점에서 잘못된 것인지를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물음(질문) 자체가 잘못 설정된 것이기 때문이다. 붓다의 무기는 결코 형이상학적 문제 자체를 무의미하다고 내던져 버리거나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다. 그 물음에 대해 거기 전제된 가정을 분석 비판하면서 예나 아니오가 아닌 새로운 방식으로 문제의 사태를 해명할 때, 세계와 인간에 대한 극히 심오한 형이상학적 통찰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예수는 죽음이 끝이 아니고 신 앞에 심판받기 위해 다시 살아나야 함을 말하고, 공자는 "사후에 우리가 어떻게 됩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생(生)도 모르는데, 어떻게 사(死)를 알겠는가?"라고 하여 그런 물음에 대한 언급을 피한다. 오늘날과 같이 과학으로 유전자를 조작하고 몇억광년 이전의 우주의 역사까지 추적해 알 수 있다고 주장하는 우리들은 우리 자신의 사후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가? 유한한 인간이기에 공자와 같은 태도가 가장 적절한 태도일까? 


붓다의 무기는 알 수 없는 논하지 말자는 그런 의미인가? 그 물음이 인간 이성의 일상적 합리성을 넘어선 형이상학적 물음이기에 그 답을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안다고 해도 우리의 삶에 별로 도움이 될 것이 없어서 대답하지 않은 것인가? 쓸데없이 사후를 논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어떻게 바르게 이끌 것인가를 고민하라는 것인가? 그러나 사(死)를 모르는데, 어떻게 생(生)을 알겠는가? 사후의 물음에 대해 붓다는 세가지 관점의 스승을 구분한다.


"세 종류의 스승이 있다. 어떤 셋인가? (1)어떤 스승은 현재의 세계에 진짜 자아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 자아에 대해 아는 대로 말하지만, 명이 다한 이후에 대해서는 알 수 있는 것이 없다고 말한다. 세간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2)어떤 스승은 현세에 진실로 자아가 있고, 명이 다한 후에도 역시 자아가 있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그 자아에 대해 아는 대로 말한다. (3)또 어떤 스승은 현세에 진짜 자아가 있다고 보지 않으며, 명이 다한 후에도 진짜 자아가 있다고 보지 않는다.


첫번째 스승처럼 현세에 진짜 자아가 있다고 보며 아는 대로 말하는것을 단견이라고 한다. 두 번째 스승처럼 현세와 후세에 진짜 자아가 있다고 보며 아는 대로 말하는 것을 상견이라고 한다. 세 번째스승처럼 현세에 진짜 자아가 있지 않으며, 명이 다한 후에도 역시 자아가 있지 않다고 보는 것을 여래응등정각설이라고 말한다. 현재 존재하는 것에 대해 애착을 끊고, 탐욕을 떠나 열반을 얻기 때문이다." [잡아함 선니경]


만약 죽음 이후에도 자아는 존속하는가?라는 물음이 정당한 물음이라면, 그 물음에 대해서는 자아가 존속한다거나 존속하지 않는다거나 아니면 존속하는지 아닌지 알 수 없다는 세 가지 대답만이 가능할 것이다. 우리가 사후 존재에 대해 물을 때에도 대개 그런 방식으로 생각하면서 묻고, 그에 대한 대답 또한 대개 그런 세가지 방식으로 분류된다. 


인도의 일부 철학자들은 아트만을 주장하는 정통 브라만교는 자아의 존속을 주장하고 유물론적 외도는 자아의 단멸을 주장한 데 반해, 붓다는 인문주의적 관점에서 그에 대해 알 수 없다는 회의론적 태도의 무기를 보인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위의 인용에 따르면 그것은 석가를 제대로 이해한 것이 아니다. 위에서도 언급하였지만 붓다는 자아가 사후에 존속하는지 아닌지 알 수 없다는 관점을 사후 단멸한다는 관점과 함께 단견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현재의 자아가 사후에도 그대로 존속한다고 보는 것이 상견이라면, 그 자아가 사후에 단멸한다든가 아니면 단멸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그것에 대해 전혀 알 수 없다는 관점은 둘 다 단견으로 간주되고 있는 것이다. 자아가 사후에 존속하는지 단멸하는지를 알 수 없다는 주장에도 그 존속 여부를 묻고 있는 자아의 존재는 이미 전제되어 있으며, 더구나 그 자아가 존재가 단멸 가능한 것으로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단견으로 분류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상견도 아니고 단견도 아닌 제삼의 길, 여래응등정각이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


붓다는 사후에 자아가 존속하는가 함께 사멸하는가의 물음에 대해 존속한다는 상견을 제시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함께 사멸해 버린다거나 아니면 알 수 없다는 단견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붓다는 그 물음에 이미 전제되어 있는 자아의 관념을 비판한다. 즉 그 물음은 생전의 자기 동일적 자아를 이미 전제하고 그 자아가 죽음 이후에도 멸하지 않고 동일하게 남는가 아니면 죽음과 더불어 단멸하는가를 묻고 있다. 


그런데 그러한 물음의 대상이 되는 그 자아란 과연 어떤 존재란 말인가? 사후의 존속 여부를 묻게 되는 그 자아를 우리는 어떤 존재로 이해하는가? 붓다는 그 물음이 이미 당연하게 전제하고 있는 바로 그 자아의 존재를 문제 삼으면서, 그런 자기 동일적 자아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생사에 있어서도 자기 동일적 자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죽음을 경계로 그 자아가 존속되는가 아닌가를 묻는 것은 의미가 없게 된다.생전에 자기 동일적 자아로 여겨지는 그 자아가 자체가 허구라면, 그 자아와 사후의 어떤 것과의 동일성 여부를 묻는 것이 어떻게 의미 있게 대답될 수 있겠는가? 생전의 자아와 사후의 그것과의 동일성을 판단할 기준이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이처럼 상견과 단견에 이미 전제된 자기 동일적 자아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붓다는 다음과 같이 묻는다.


"어떤 사람이 한 등에서 다른 등으로 불을 붙인다고 할 경우, 한 등이 다른 등으로 옮겨 간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 물음은 불교가 윤회를 설한다고 해서 자기 동일적 자아의 존재를 전제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반문이다. 또한 여기서 분명한 것은 생전의 자아와 사후의 자아의 동일성 여부를 묻는 것, 따라서 죽음을 경계로 자아가 존속하는가 아닌가를 묻는 것은 예나 아니오 하나로 간단히 대답될 수 있는 그런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문제는 죽음으로 나아가기 이전에 이미 살아있는 동안만이라도 자기 동일적 자아는 존재하는가이다. 자아를 촛불로 볼 경우 다른 초에 붙은 촛불과의 동일성을 묻기 전에 이미 한 초에 있어서나마 촛불의 자기 동일성을 인정할 수 있겠는가? 


"(장로)어떤 사람이 등불을 켠다고 합시다. 그 등불은 밤새도록 탈 것 입니다. 그런데 초저녁에 타는 불꽃과 밤중에 타는 불꽃과 새벽에 타는 불꽃은 같겠습니까? 

(왕)아닙니다. 같지 않습니다. 

(장로)또 밤중에 타는 불꽃과 새벽에 타는 불꽃이 같겠습니까? 

(왕) 같지 않습니다.

(장로)그러면 초저녁의 불꽃과 밤중의 불꽃과 새벽의 불꽃은 전혀 다른 것 입니까?

(왕)그렇지 않습니다. 불꽃은 똑같은 등불에 의하여 밤새도록 탈 것 입니다.


불교가 말하는 일체 존재의 무상성 또는 우리 삶이나 자아의 무상성은 우리 젊음과 청춘이 너무 짧고, 우리의 인생이 너무 짧기에, 단지 7-80년밖에 지속되지 않기에, 언젠가는 죽어야 하기에 무상하다는 것이 아니다. 생명체가 언젠가 죽음을 맞아 죽게 된다거나, 무생물도 시간이 지나면 색이 바래고 닳아 없어지기 때문에 무상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언젠가 존재가 끝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존재의 순간 자체 안에 이미 비존재가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존재 차제 안에 그것을 그것이게끔 하는 존재의 핵이 자리잡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불교는 그것을 실체가 없음이라고 말한다(굳이 다른말로 하자면 공).그러한 존재의 실상 즉 어느 존재도 그 어느 순간도 지속되지 않고 불변하지 않는다는 것, 우리가 매순간 생멸을 거듭한다는 것, 바로 그렇기 때문에 무상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자아는 사후에도 존속하는가, 단멸하는가?의 물음은 이미 자아의 일생 동안의 불변적 자기 동일성을 전제한 물음이며, 이는 곧 "일체는 무상하다"는 일체 존재의 본래적 무상성(anicca)에 어긋나는 것이다. 즉 자아를 무상하지 않은 것, 니카(nicca)로 전제한 후에 그렇게 항상된 자기 동일적 자아가 언제까지나 계속 이어지는가, 즉 불멸하는가, 아니면 어 순간엔가 끊어지는가, 즉 단멸하는가라는 물음을 묻는 것이다.


이처럼 위의 물음에서의 상견과 단견은 둘 다 일정 기간 존속되는 자기 동일적 자아를 전제한다. 이런식으로 지속하는 자아를 전제할 경우에만, 다시 그것이 언제까지나 계속 남아 있는가 아니면 어느 순간에선가 단멸하는가를 물을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그 두 관점은 다 무상하지 않은 자아 존재를 인정하는 유아론에 속한다. 일정 기간 변하지 않은 자기 동일적 자아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유아론적 관점을 붓다는 사견(私見)이라고 말한다. 자기 동일적 자아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자아란 찰나 생멸하는 무상한 존재라는 것이 불교 무아론의 관점이기 때문이다.


붓다는 위의 물음 및 그에 대한 답으로서의 상견과 단견 둘 다가 공통적으로 전제한 고정불변의 항상적인 자아의 존재를 인정하기 않기 때문에, 그 물음에 대해 무기를 취한 것이다. 어떠한 유정도 불변하는 항상된 존재, 자기 동일적 존재로 머물러 있지 않고, 일체는 찰나에 생멸할 뿐이라는 무상성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붓다는 위의 물음에서 왜 한마디로 '자아는 없다'라고 답하지 않았는가? 그렇게 할 경우 우리가 가진 의혹이 더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왜인가? 우리에게는 무상하지 않은 항상된 자아는 없지만, 그래도 무상하게 항상 변화하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로서 연속되는 그런 자아는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붓다가 인정하는 자아, 즉 연기의 자아이며 업의 자아인 오온이다. 그러므로 석가는 앞의 인용에서처럼 자아에 관한 상견과 단견을 모두 비판한 후, 이어 중도의 견해로서 연기와 업을 설한다.


"여래는 그 두 극단을 떠나 중도에서 설한다. 소위 '이 일이 있기에 저 일이 있고, 이 일이 일어나기에 저 일이 일어난다." 가 그것이다.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고, 나아가 생로병상의 근심.슬픔.고뇌와 괴로움이 또한 멸하기도 한다." 

 

[이 글은 이화여자대학교 이 자경 교수의 논문에서 일부 발췌하였음을 알려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