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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의 모음 - 24. 업 품(Kamma-vagga. AN4.232-242)

실론섬 2014. 7. 4. 19:14

제24장 업 품 Kamma-vagga(AN4.232-242)

 

saṃkhittasuttaṃ (AN 4.232-간략한 경)

232. “비구들이여, 내가 스스로 완전한 지혜로 안 뒤에 실현하여 선언한 네 가지 업(業)들이 있다. 어떤 넷인가? 

비구들이여, 괴로운 과보를 경험하게 하는 나쁜 업(業)이 있다. 
비구들이여, 즐거운 과보를 경험하게 하는 좋은 업이 있다. 
비구들이여, 괴롭고 즐거운 과보를 경험하게 하는 나쁘고 좋은 업이 있다. 
비구들이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과보를 경험하게 하고, 업의 소멸로 인도하는 나쁘지도 좋지도 않은 업이 있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내가 스스로 완전한 지혜로 안 뒤에 실현하여 선언한 네 가지 업(業)들이다.”

 

vitthārasuttaṃ (AN 4.233-상세한 경)

233. “비구들이여, 내가 스스로 완전한 지혜로 안 뒤에 실현하여 선언한 네 가지 업(業)들이 있다. 어떤 넷인가? 
비구들이여, 괴로운 과보를 경험하게 하는 나쁜 업(業)이 있다. 
비구들이여, 즐거운 과보를 경험하게 하는 좋은 업이 있다. 
비구들이여, 괴롭고 즐거운 과보를 경험하게 하는 나쁘고 좋은 업이 있다. 
비구들이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과보를 경험하게 하고, 업의 소멸로 인도하는 나쁘지도 좋지도 않은 업이 있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내가 스스로 완전한 지혜로 안 뒤에 실현하여 선언한 네 가지 업(業)들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괴로운 과보를 경험하게 하는 나쁜 업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은 악의에 찬(성냄을 가진) 몸의 의도적 행위[身行]를 하고, 악의에 찬 말의 의도적 행위[口行]을 하고, 악의에 찬 마음의 의도적 행위[意行]를 한다. 그는 악의에 찬 몸의 의도적 행위를 하고, 악의에 찬 말의 의도적 행위를 하고, 악의에 찬 마음의 의도적 행위를 한 뒤에 괴로운 세상에 태어난다. 이런 괴로운 세상에 태어나 있는 그에게 괴로운 감각접촉[觸]이 닿는다. 괴로운 감각접촉에 닿아있는 그는 오로지 괴로움뿐인 괴로운 느낌을 경험한다. 예를 들면, 지옥에 태어난 중생들이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괴로운 과보를 경험하게 하는 나쁜 업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즐거운 과보를 경험하게 하는 좋은 업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은 악의 없는 몸의 의도적 행위를 하고, 악의 없는 말의 의도적 행위를 하고, 악의 없는 마음의 의도적 행위를 한다. 그는 악의 없는 몸의 의도적 행위를 하고, 악의 없는 말의 의도적 행위를 하고, 악의 없는 마음의 의도적 행위를 한 뒤, 괴롭지 않은 세상에 태어난다. 이런 괴롭지 않은 세상에 태어나 있는 그에게 괴롭지 않은 감각접촉이 닿는다. 괴롭지 않은 감각접촉에 닿아 있는 그는 오로지 즐거움뿐인 즐거운 느낌을 경험한다. 예를 들면, 변정천(遍淨天)에 태어난 중생들이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즐거운 과보를 경험하게 하는 좋은 업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괴롭고 즐거운 과보를 경험하게 하는 나쁘고 좋은 업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자는 악의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몸의 의도적 행위를 하고, 악의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말의 의도적 행위를 하고, 악의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마음의 의도적 행위를 한다. 그는 악의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몸의 의도적 행위를 하고, 악의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말의 의도적 행위를 하고, 악의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마음의 의도적 행위를 한 뒤, 괴로움이 있기도 하고 괴로움이 없기도 한 세상에 태어난다. 이런 괴로움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세상에 태어난 그에게 괴로움이 있기도 하고 괴로움이 없기도 한 감각접촉이 닿는다. 괴로움이 있기도 하고 괴로움이 없기도 한 감각접촉에 닿아 있는 그는 괴로움이 있기도 하고 괴로움이 없기도 한 느낌을 경험한다. 예를 들면, 어떤 인간들과 일부 신들과 일부 악처에 떨어진 중생들이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괴롭고 즐거운 과보를 경험하게 하는 나쁘고 좋은 업이다.

 

*여기서 '일부 신들'이란 욕계의 신들이라고 알아야 한다. 그들은 위력이 더 강한 신들을 보면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고 윗옷을 길게 늘어뜨리고 합장하여 손을 들어 올리는 등을 통해서 때로는 괴로움이 생기기도 하며 천상의 복락을 누리기 때문에 때로는 행복하기도 하다.(AA.iii.213)
*여기서 '일부 악처에 떨어진 자들'이란 천궁의 아귀들(vemanika-peta)라고 알아야 한다. 그들은 끊임없이 어떤 때는 즐거움을 느끼고 어떤 때는 괴로움을 느낀다. 용과 가루다와 코끼리와 말 등은 인간들처럼 즐거움과 괴로움이 섞여 있다.(Ibid)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괴로운 과보도 좋은 과보도 가져오지 않고 업의 소멸로 인도하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업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괴로운 과보를 경험하게 하는 나쁜 업을 제거하려는 어떤 의도와, 즐거운 과보를 경험하게 하는 좋은 업을 제거하려는 어떤 의도와, 괴롭고 즐거운 과보를 경험하게 하는 나쁜 업과 좋은 업을 제거하려는 어떤 의도가 있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과보를 경험하게 하고, 업의 소멸로 인도하는 나쁘지도 좋지도 않은 업이다. 

비구들이여, 내가 스스로 완전한 지혜로 안 뒤에 실현하여 선언한 이런 네 가지 업(業)들이 있다.”

 

soṇakāyanasuttaṃ (AN 4.234-소나까야나 경)

234. 시카목갈라나 바라문이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과 함께 인사를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만한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시카목갈라나 바라문은 세존께 이와 같이 말씀드렸다.

 

“고따마 존자시여, 며칠 전 혹은 더 이전에 소나까야나 바라문 청년이 저에게 왔습니다. 와서는 저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사문 고따마는 모든 업들의 결실 없음을 선언합니다. 모든 업들의 결실 없음을 선언하는 그는 세상의 단멸을 말합니다. 존자여, 이 세상은 업이 진실이고, 업의 활동으로 유지되는 것입니다.’라고.”

“바라문이여, 나는 소나까야나 바라문 청년을 본 것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어디로부터 이런 대화가 있겠습니까? 바라문이여, 내가 완전한 지혜로 안 뒤에 실현하여 선언한 네 가지 업들이 있습니다. 어떤 넷입니까? 바라문이여, 괴로운 과보를 경험하게 하는 나쁜 업이 있습니다. 바라문이여, 즐거운 과보를 경험하게 하는 좋은 업이 있습니다. 바라문이여, 괴롭고 즐거운 과보를 경험하게 하는 나쁘고 좋은 업이 있습니다. 바라문이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과보를 경험하게 하고, 업의 소멸로 인도하는 나쁘지도 좋지도 않은 업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라문이여, 내가 스스로 완전한 지혜로 안 뒤에 실현하여 선언한 네 가지 업들입니다. 

 

그러면 바라문이여, 무엇이 괴로운 과보를 경험하게 하는 나쁜 업입니까?
여기, 바라문이여, 어떤 사람은 악의에 찬 몸의 의도적 행위[身行]를 하고, 악의에 찬 말의 의도적 행위[口行]을 하고, 악의에 찬 마음의 의도적 행위[意行]를 합니다. 그는 악의에 찬 몸의 의도적 행위를 하고, 악의에 찬 말의 의도적 행위를 하고, 악의에 찬 마음의 의도적 행위를 한 뒤 괴로운 세상에 태어납니다. 이런 괴로운 세상에 태어나 있는 그에게 괴로운 감각접촉[觸]이 닿습니다. 괴로운 감각접촉에 닿아있는 그는 오로지 괴로움뿐인 괴로운 느낌을 경험합니다. 예를 들면 지옥에 태어난 중생들입니다. 이것이, 바라문이여, 괴로운 과보를 경험하게 하는 나쁜 업입니다.

 

그러면 바라문이여, 무엇이 즐거운 과보를 경험하게 하는 좋은 업입니까?
여기, 바라문이여, 어떤 사람은 악의 없는 몸의 의도적 행위를 하고, 악의 없는 말의 의도적 행위를 하고, 악의 없는 마음의 의도적 행위를 합니다. 그는 악의 없는 몸의 의도적 행위를 하고, 악의 없는 말의 의도적 행위를 하고, 악의 없는 마음의 의도적 행위를 한 뒤, 괴롭지 않은 세상에 태어납니다. 이런 괴롭지 않은 세상에 태어나 있는 그에게 괴롭지 않은 감각접촉이 닿습니다. 괴롭지 않은 감각접촉에 닿아 있는 그는 오로지 즐거움뿐인 즐거운 느낌을 경험합니다. 예를 들면, 변정천(遍淨天)에 태어난 중생들입니다. 이것이, 바라문이여, 즐거운 과보를 경험하게 하는 좋은 업입니다.

 

그러면 바라문이여, 무엇이 괴롭고 즐거운 과보를 경험하게 하는 나쁘고 좋은 업입니까?
여기, 바라문이여, 어떤 자는 악의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몸의 의도적 행위를 하고, 악의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말의 의도적 행위를 하고, 악의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마음의 의도적 행위를 합니다. 그는 악의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몸의 의도적 행위를 하고, 악의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말의 의도적 행위를 하고, 악의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마음의 의도적 행위를 한 뒤, 괴로움이 있기도 하고 괴로움이 없기도 한 세상에 태어납니다. 이런 괴로움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세상에 태어난 그에게 괴로움이 있기도 하고 괴로움이 없기도 한 감각접촉이 닿습니다. 괴로움이 있기도 하고 괴로움이 없기도 한 감각접촉에 닿아 있는 그는 괴로움이 있기도 하고 괴로움이 없기도 한 느낌을 경험합니다. 예를 들면, 어떤 인간들과 일부 신들과 일부 악처에 떨어진 중생들입니다. 이것이, 바라문이여, 괴롭고 즐거운 과보를 경험하게 하는 나쁘고 좋은 업입니다.

 

그러면, 바라문이여, 무엇이 괴로운 과보도 좋은 과보도 가져오지 않고 업의 소멸로 인도하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업입니까?
여기, 바라문이여, 괴로운 과보를 경험하게 하는 나쁜 업을 제거하려는 어떤 의도와, 즐거운 과보를 경험하게 하는 좋은 업을 제거하려는 어떤 의도와, 괴롭고 즐거운 과보를 경험하게 하는 나쁜 업과 좋은 업을 제거하려는 어떤 의도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라문이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과보를 경험하게 하고, 업의 소멸로 인도하는 나쁘지도 좋지도 않은 업입니다. 
바라문이여, 내가 스스로 완전한 지혜로 안 뒤에 실현하여 선언한 이런 네 가지 업(業)들이 있습니다.”

 

paṭhamasikkhāpadasuttaṃ (AN 4.235-학습계율 경1)

235. “비구들이여, 내가 스스로 완전한 지혜로 안 뒤에 실현하여 선언한 네 가지 업들이 있다. 어떤 넷인가?

비구들이여, 괴로운 과보를 경험하게 하는 나쁜 업(業)이 있다. 비구들이여, 즐거운 과보를 경험하게 하는 좋은 업이 있다. 비구들이여, 괴롭고 즐거운 과보를 경험하게 하는 나쁘고 좋은 업이 있다. 비구들이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과보를 경험하게 하고, 업의 소멸로 인도하는 나쁘지도 좋지도 않은 업이 있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괴로운 과보를 경험하게 하는 나쁜 업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자는 생명을 해치는 자이고, 주지 않는 것을 가지는 자이고, 음행에 대해 삿되게 행하는 자이고, 거짓을 말하는 자이고, 술과 발효액 등 취하게 하는 것 때문에 방일하게 머무는 자이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괴로운 과보(報)를 경험하게 하는 나쁜 업(業)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즐거운 과보를 경험하게 하는 좋은 업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자는 생명을 해치는 행위로부터 멀리 떠난 자이고, 주지 않는 것을 가지는 행위로부터 멀리 떠난 자이고, 음행에 대해 삿된 행위로부터 멀리 떠난 자이고, 거짓을 말하는 행위로부터 멀리 떠난 자이고, 술과 발효액 등 취하게 하는 것으로 인한 방일한 머묾으로부터 멀리 떠난 자이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즐거운 과보를 경험하게 하는 좋은 업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괴롭고 즐거운 과보를 경험하게 하는 나쁘고 좋은 업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자는 악의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몸의 의도적 행위를 하고, 악의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말의 의도적 행위를 하고, 악의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마음의 의도적 행위를 한다. 그는 악의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몸의 의도적 행위를 하고, 악의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말의 의도적 행위를 하고, 악의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마음의 의도적 행위를 한 뒤, 괴로움이 있기도 하고 괴로움이 없기도 한 세상에 태어난다. 이런 괴로움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세상에 태어난 그에게 괴로움이 있기도 하고 괴로움이 없기도 한 감각접촉이 닿는다. 괴로움이 있기도 하고 괴로움이 없기도 한 감각접촉에 닿아 있는 그는 괴로움이 있기도 하고 괴로움이 없기도 한 느낌을 경험한다. 예를 들면, 어떤 인간들과 일부 신들과 일부 악처에 떨어진 중생들이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괴롭고 즐거운 과보를 경험하게 하는 나쁘고 좋은 업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괴로운 과보도 좋은 과보도 가져오지 않고 업의 소멸로 인도하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업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괴로운 과보를 경험하게 하는 나쁜 업을 제거하려는 어떤 의도와, 즐거운 과보를 경험하게 하는 좋은 업을 제거하려는 어떤 의도와, 괴롭고 즐거운 과보를 경험하게 하는 나쁜 업과 좋은 업을 제거하려는 어떤 의도가 있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과보를 경험하게 하고, 업의 소멸로 인도하는 나쁘지도 좋지도 않은 업이다. 

비구들이여, 내가 스스로 완전한 지혜로 안 뒤에 실현하여 선언한 이런 네 가지 업(業)들이 있다."

 

dutiyasikkhāpadasuttaṃ (AN 4.236-학습계목 경2)

236. “비구들이여, 내가 스스로 완전한 지혜로 안 뒤에 실현하여 선언한 네 가지 업들이 있다. 어떤 넷인가?
비구들이여, 괴로운 과보를 경험하게 하는 나쁜 업(業)이 있다. 비구들이여, 즐거운 과보를 경험하게 하는 좋은 업이 있다. 비구들이여, 괴롭고 즐거운 과보를 경험하게 하는 나쁘고 좋은 업이 있다. 비구들이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과보를 경험하게 하고, 업의 소멸로 인도하는 나쁘지도 좋지도 않은 업이 있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괴로운 과보를 경험하게 하는 나쁜 업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자는 어머니의 목숨을 빼앗고, 아버지의 목숨을 빼앗고, 아라한의 목숨을 빼앗고, 타락한 마음으로 여래의 몸에 피를 나게 하고, 승가를 분열시킨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괴로운 과보를 경험하게 하는 나쁜 업이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즐거운 과보를 경험하게 하는 좋은 업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자는 생명을 해치는 행위로부터 멀리 떠난 자이고, 주지 않는 것을 가지는 행위로부터 멀리 떠난 자이고, 음행에 대해 삿된 행위로부터 멀리 떠난 자이고, 거짓을 말하는 행위로부터 멀리 떠난 자이고, 이간하는 말을 하는 행위로부터 멀리 떠난 자이고, 거친 말을 하는 행위로부터 멀리 떠난 자이고, 꾸며대는(잡담) 말을 하는 행위로부터 멀리 떠난 자이고, 간탐하지 않는 자이고, 악의에 찬(성냄의) 마음을 가진 자가 아니고, 바른 견해를 가진 자이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즐거운 과보를 경험하게 하는 좋은 업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괴롭고 즐거운 과보를 경험하게 하는 나쁘고 좋은 업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자는 악의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몸의 의도적 행위를 하고, 악의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말의 의도적 행위를 하고, 악의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마음의 의도적 행위를 한다. 그는 악의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몸의 의도적 행위를 하고, 악의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말의 의도적 행위를 하고, 악의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마음의 의도적 행위를 한 뒤, 괴로움이 있기도 하고 괴로움이 없기도 한 세상에 태어난다. 이런 괴로움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세상에 태어난 그에게 괴로움이 있기도 하고 괴로움이 없기도 한 감각접촉이 닿는다. 괴로움이 있기도 하고 괴로움이 없기도 한 감각접촉에 닿아 있는 그는 괴로움이 있기도 하고 괴로움이 없기도 한 느낌을 경험한다. 예를 들면, 어떤 인간들과 일부 신들과 일부 악처에 떨어진 중생들이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괴롭고 즐거운 과보를 경험하게 하는 나쁘고 좋은 업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괴로운 과보도 좋은 과보도 가져오지 않고 업의 소멸로 인도하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업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괴로운 과보를 경험하게 하는 나쁜 업을 제거하려는 어떤 의도와, 즐거운 과보를 경험하게 하는 좋은 업을 제거하려는 어떤 의도와, 괴롭고 즐거운 과보를 경험하게 하는 나쁜 업과 좋은 업을 제거하려는 어떤 의도가 있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과보를 경험하게 하고, 업의 소멸로 인도하는 나쁘지도 좋지도 않은 업이다.  

비구들이여, 내가 스스로 완전한 지혜로 안 뒤에 실현하여 선언한 이런 네 가지 업(業)들이 있다."

 

ariyamaggasuttaṃ (AN 4.237-성스러운 길 경)

237. “비구들이여, 내가 스스로 완전한 지혜로 안 뒤에 실현하여 선언한 네 가지 업들이 있다. 어떤 넷인가?
비구들이여, 괴로운 과보를 경험하게 하는 나쁜 업(業)이 있다. 비구들이여, 즐거운 과보를 경험하게 하는 좋은 업이 있다. 비구들이여, 괴롭고 즐거운 과보를 경험하게 하는 나쁘고 좋은 업이 있다. 비구들이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과보를 경험하게 하고, 업의 소멸로 인도하는 나쁘지도 좋지도 않은 업이 있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괴로운 과보를 경험하게 하는 나쁜 업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은 악의에 찬 몸의 의도적 행위[身行]를 하고, 악의에 찬 말의 의도적 행위[口行]을 하고, 악의에 찬 마음의 의도적 행위[意行]를 한다. 그는 악의에 찬 몸의 의도적 행위를 하고, 악의에 찬 말의 의도적 행위를 하고, 악의에 찬 마음의 의도적 행위를 한 뒤 괴로운 세상에 태어난다. 이런 괴로운 세상에 태어나 있는 그에게 괴로운 감각접촉[觸]이 닿는다. 괴로운 감각접촉에 닿아있는 그는 오로지 괴로움뿐인 괴로운 느낌을 경험한다. 예를 들면, 지옥에 태어난 중생들이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괴로운 과보를 경험하게 하는 나쁜 업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즐거운 과보를 경험하게 하는 좋은 업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은 악의 없는 몸의 의도적 행위를 하고, 악의 없는 말의 의도적 행위를 하고, 악의 없는 마음의 의도적 행위를 한다. 그는 악의 없는 몸의 의도적 행위를 하고, 악의 없는 말의 의도적 행위를 하고, 악의 없는 마음의 의도적 행위를 한 뒤, 괴롭지 않은 세상에 태어난다. 이런 괴롭지 않은 세상에 태어나 있는 그에게 괴롭지 않은 감각접촉이 닿는다. 괴롭지 않은 감각접촉에 닿아 있는 그는 오로지 즐거움뿐인 즐거운 느낌을 경험한다. 예를 들면 변정천(遍淨天)에 태어난 중생들이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즐거운 과보를 경험하게 하는 좋은 업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괴롭고 즐거운 과보를 경험하게 하는 나쁘고 좋은 업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자는 악의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몸의 의도적 행위를 하고, 악의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말의 의도적 행위를 하고, 악의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마음의 의도적 행위를 한다. 그는 악의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몸의 의도적 행위를 하고, 악의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말의 의도적 행위를 하고, 악의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마음의 의도적 행위를 한 뒤, 괴로움이 있기도 하고 괴로움이 없기도 한 세상에 태어난다. 이런 괴로움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세상에 태어난 그에게 괴로움이 있기도 하고 괴로움이 없기도 한 감각접촉이 닿는다. 괴로움이 있기도 하고 괴로움이 없기도 한 감각접촉에 닿아 있는 그는 괴로움이 있기도 하고 괴로움이 없기도 한 느낌을 경험한다. 예를 들면 인간들과 일부 신들과 일부 악처에 떨어진 중생들이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괴롭고 즐거운 과보를 경험하게 하는 나쁘고 좋은 업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괴로운 과보도 좋은 과보도 가져오지 않고 업의 소멸로 인도하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업인가?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생계, 바른 행위, 바른 노력, 바른 사유, 바른 삼매이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과보를 경험하게 하고, 업의 소멸로 인도하는 나쁘지도 좋지도 않은 업이다. 
비구들이여, 내가 스스로 완전한 지혜로 안 뒤에 실현하여 선언한 이런 네 가지 업(業)들이 있다.”

 

bojjhaṅgasuttaṃ (AN 4.238-깨달음의 구성요소 경)

238. “비구들이여, 내가 스스로 완전한 지혜로 안 뒤에 실현하여 선언한 네 가지 업들이 있다. 어떤 넷인가?
비구들이여, 괴로운 과보를 경험하게 하는 나쁜 업(業)이 있다. 비구들이여, 즐거운 과보를 경험하게 하는 좋은 업이 있다. 비구들이여, 괴롭고 즐거운 과보를 경험하게 하는 나쁘고 좋은 업이 있다. 비구들이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과보를 경험하게 하고, 업의 소멸로 인도하는 나쁘지도 좋지도 않은 업이 있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내가 스스로 완전한 지혜로 안 뒤에 실현하여 선언한 네 가지 업(業)들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괴로운 과보를 경험하게 하는 나쁜 업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은 악의에 찬 몸의 의도적 행위[身行]를 하고, 악의에 찬 말의 의도적 행위[口行]을 하고, 악의에 찬 마음의 의도적 행위[意行]를 한다. 그는 악의에 찬 몸의 의도적 행위를 하고, 악의에 찬 말의 의도적 행위를 하고, 악의에 찬 마음의 의도적 행위를 한 뒤 괴로운 세상에 태어난다. 이런 괴로운 세상에 태어나 있는 그에게 괴로운 감각접촉[觸]이 닿는다. 괴로운 감각접촉에 닿아있는 그는 오로지 괴로움뿐인 괴로운 느낌을 경험한다. 예를 들면 지옥에 태어난 중생들이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괴로운 과보를 경험하게 하는 나쁜 업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즐거운 과보를 경험하게 하는 좋은 업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은 악의 없는 몸의 의도적 행위를 하고, 악의 없는 말의 의도적 행위를 하고, 악의 없는 마음의 의도적 행위를 한다. 그는 악의 없는 몸의 의도적 행위를 하고, 악의 없는 말의 의도적 행위를 하고, 악의 없는 마음의 의도적 행위를 한 뒤, 괴롭지 않은 세상에 태어난다. 이런 괴롭지 않은 세상에 태어나 있는 그에게 괴롭지 않은 감각접촉이 닿는다. 괴롭지 않은 감각접촉에 닿아 있는 그는 오로지 즐거움뿐인 즐거운 느낌을 경험한다. 예를 들면 변정천(遍淨天)에 태어난 중생들이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즐거운 과보를 경험하게 하는 좋은 업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괴롭고 즐거운 과보를 경험하게 하는 나쁘고 좋은 업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자는 악의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몸의 의도적 행위를 하고, 악의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말의 의도적 행위를 하고, 악의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마음의 의도적 행위를 한다. 그는 악의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몸의 의도적 행위를 하고, 악의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말의 의도적 행위를 하고, 악의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마음의 의도적 행위를 한 뒤, 괴로움이 있기도 하고 괴로움이 없기도 한 세상에 태어난다. 이런 괴로움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세상에 태어난 그에게 괴로움이 있기도 하고 괴로움이 없기도 한 감각접촉이 닿는다. 괴로움이 있기도 하고 괴로움이 없기도 한 감각접촉에 닿아 있는 그는 괴로움이 있기도 하고 괴로움이 없기도 한 느낌을 경험한다. 예를 들면, 어떤 인간들과 일부 신들과 일부 악처에 떨어진 중생들이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괴롭고 즐거운 과보를 경험하게 하는 나쁘고 좋은 업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괴로운 과보도 좋은 과보도 가져오지 않고 업의 소멸로 인도하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업인가?
그것은 마음 챙김의 깨달음의 구성요소, 법을 간택하는 깨달음의 구성요소, 정진의 깨달음의 구성요소, 희열의 깨달음의 구성요소, 편안함의 깨달음의 구성요소, 삼매의 깨달음의 구성요소, 평온의 깨달음의 구성요소이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과보를 경험하게 하고, 업의 소멸로 인도하는 나쁘지도 좋지도 않은 업이다. 
비구들이여, 내가 스스로 완전한 지혜로 안 뒤에 실현하여 선언한 이런 네 가지 업(業)들이 있다."

 

sāvajjasuttaṃ (AN 4.239-결점 있음 경)

239. “비구들이여, 네 가지 법을 갖춘 자는 운반되듯 지옥에 놓인다. 어떤 넷인가?

결점이 있는 몸의 행위(업), 결점이 있는 말의 행위, 결점이 있는 마음의 행위, 결점이 있는 견해이다.

비구들이여, 이런 네 가지 법을 갖춘 자는 운반되듯 지옥에 놓인다.

 

비구들이여, 네 가지 법을 갖춘 자는 운반되듯 천상에 놓인다. 어떤 넷인가?

결점이 없는 몸의 행위, 결점이 없는 말의 행위, 결점이 없는 마음의 행위, 결점이 없는 견해이다.

비구들이여, 이런 네 가지 법을 갖춘 자는 운반되듯 천상에 놓인다.”

 

abyābajjhasuttaṃ (AN 4.240-악의 없음 경)

240. "비구들이여, 네 가지 법을 갖춘 자는 운반되듯 지옥에 놓인다. 어떤 넷인가?

악의에 찬 몸의 행위(업), 악의에 찬 말의 행위, 악의에 찬 마음의 행위, 악의에 찬 견해이다.

비구들이여, 이런 네 가지 법을 갖춘 자는 운반되듯 지옥에 놓인다.

 

비구들이여, 네 가지 법을 갖춘 자는 운반되듯 천상에 놓인다. 어떤 넷인가?

악의 없는 몸의 행위, 악의 없는 말의 행위, 악의 없는 마음의 행위, 악의 없는 견해이다.

비구들이여, 이런 네 가지 법을 갖춘 자는 운반되듯 천상에 놓인다.”

 

samaṇasuttaṃ (AN 4.241-사문 경)

241. “비구들이여, 오직 여기에 사문이 있다. 여기에 두 번째 사문이 있고, 여기에 세 번째 사문이 있고, 여기에 네 번째 사문이 있다. 다른 교설들에는 사문들이 텅 비어 있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이 바른 사자후를 토하라.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자가 첫 번째 사문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세 가지 족쇄가 완전히 부서졌기 때문에 흐름에 든 자[預流者예류자]여서, 악취에 떨어지지 않는 자, 해탈이 확실하며, 정등각으로 나아가는 자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첫 번째 사문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자가 두 번째 사문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세 가지 족쇄가 완전히 부서지고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엷어졌기 때문에 한 번만 더 돌아올 자[一來者일래자]이니, 한 번만 이 세상에 온 뒤에 괴로움을 끝낸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두 번째 사문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자가 세 번째 사문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오하분결.五下分結)가 완전히 부서졌기 때문에 (정거천에) 화생하고, 거기서 완전히 열반하니, 그 세계로부터 돌아오지 않는 존재[不還者불환자]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세 번째 사문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자가 네 번째 사문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모든 번뇌가 다하여 아무 번뇌가 없는 마음의 해탈[心解脫]과 지혜에 의한 해탈[慧解脫]을 바로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하여 머문다.[阿羅漢아라한] 비구들이여, 이것이 네 번째 사문이다.

 

비구들이여, 오직 여기에 사문이 있다. 여기에 두 번째 사문이 있고, 여기에 세 번째 사문이 있고, 여기에 네 번째 사문이 있다. 다른 교설들에는 사문들이 텅 비어 있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이 바른 사자후를 토하라.”

 

sappurisānisaṃsasuttaṃ (AN 4.242-고결한 사람의 이익 경)

242. “비구들이여, 고결한 사람을 의지할 때 네 가지 이익이 기대된다. 어떤 넷인가?

성스러운 계에 의한 이익이 증장한다. 성스러운 삼매에 의한 이익이 증장한다. 성스러운 지혜에 의한 이익이 증장한다. 성스러운 해탈에 의한 이익이 증장한다. 비구들이여, 고결한 사람을 의지할 때 이러한 네 가지 이익이 기대된다.”

 

 

제24장 업 품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