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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상윳따 - 마음챙김의 확립 상윳따(Satipaṭṭhāna-saṁyutta) - 제1장 암바빨리 품(SN47:1-SN47:10. Ambapāli-vagga)

실론섬 2014. 7. 22. 20:46

제47주제(S47) 마음 챙김의 확립 상윳따
Satipaṭṭhāna-saṁyutta


제1장 암바빨리 품

Ambapāli-vagga (SN 47.1-10)

 

ambapālisuttaṃ (SN 47.1-암바빨리 경)
367.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웨살리에서 암바빨리 숲에 머물고 계셨다. 거기에서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라고. 그러자 비구들도 받들었다. '세존(존귀하신)이시여'라고.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테라가타 주석서」에 의하면 암바빨리(Ambapali)는 전생에 닦은 공덕의 힘으로 스스로 화현하여(opapatika) 웨살리의 왕의 정원에 나타났다고 한다. 정원사가 그녀를 망고 나무 아래서 발견하였기 때문에 암바빨리라고 이름을 지이서 그녀를 기녀(ganika)로 만들었다고 한다.(ThigA.207)
세존의 재가신도였던 그녀는 세존께서 마지막 여정에 웨살리를 방문하셨을 때 바로 이 망고 숲을 기증하여 승원을 만들었다.    
암바빨리에게는 위말라 꼰단냐(Vimala-Kondanna)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빔비사라 왕과의 사이에서 난 아들이라고 한다.(ThagA.i.156) 그는 출가하여 아라한이 되었다. 그녀도 후에 아들의 법문을 듣고 출가하였다고 한다. 그녀는 자기 자신의 몸이 늙어가는 것에 대해서 무사함을 절감하였으며, 그래서 삼계의 모든 법이 무상하고 괴롭고 무아인 것을 통찰하는 위빳사나를 닦아서 아라한과를 얻었다고 한다.(ThigA.213) 그녀가 지은 18개의 게송이 「장로니게」(Thig) [252-270]으로 전해온다.  

“비구들이여,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사념처.四念處)이라는 이 길은 중생들의 청정을 위한, 슬픔(수.愁)과 비탄(비.悲)을 건너기 위한, 괴로움(고.苦)과 고뇌(우.憂)를 소멸하기 위한, 올바른 방법을 얻기 위한,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유일한(하나의) 길이다. 어떤 네 가지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몸에 대해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몸을 이어보면서 몸에 머문다). 열렬함(노력함, 근면함)과 알아차림( 正知)과 마음챙김(念)을 지니고서, 세간에 관련한(세상에 대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 머문다. 느낌에 대해서에  느낌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니고서, 세간에 관련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 머문다. 마음에 대해서 마음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 지니고서, 세간에 관련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 머문다. 법에 대해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니고서, 세간에 관련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 머문다.  

비구들이여,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사념처.四念處)이라는 이 길은 중생들의 청정을 위한, 슬픔(수.愁)과 비탄(비.悲)을 건너기 위한, 괴로움(고.苦)과 고뇌(우.憂)를 소멸하기 위한, 올바른 방법을 얻기 위한,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유일한(하나의) 길이다." 

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세존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비구들은 기뻐하여 세존께서 설하신 것을 찬탄하였다.

satisuttaṃ (SN 47.2-마음챙김 경)
368. 한 때에 세존께서는 웨살리에서 암바빨리 숲에 머물고 계셨다. 거기에서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라고. 그러자 비구들도 받들었다. “세존(존귀하신)이시여.”라고.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비구는 마음 챙김을 가진 자, 바른 앎(분명히 알아 차리면서)을 가진 자로 머물러야 한다. 이것이 그대들을 위한 나의 간곡한 부탁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는 마음 챙김을 가진 자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몸에 대해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 正知)과 마음챙김(念)을 지니고서, 세간에 관련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 머문다. 느낌에 대해서 느낌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니고서, 세간에 관련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 머문다. 마음에 대해서 마음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 지니고서, 세간에 관련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 머문다. 법에 대해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니고서, 세간에 관련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 머문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비구는 마음챙김을 가진 자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비구는 어떻게 바른 앎을 가진 자인가?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나아갈 때도 물러날 때도 바른 앎을 가진 자로 행한다. 앞을 볼 때도 돌아볼 때도 바른 앎을 가진 자로 행한다. 구부릴 때도 펼 때도 바른 앎을 가진 자로 행한다. 가사.발우.의복을 지닐 때도 바른 앎을 가진 자로 행한다. 먹을 때도 마실 때도 씹을 때도 맛볼 때도 바른 앎을 가진 자로 행한다. 대소변을 볼 때도 바른 앎을 가진 자로 행한다. 걸을 때도, 설 때도, 앉을 때도, 잠들 때도, 깨어있을 때도, 말할 때도, 침묵할 때도, 바른 앎을 가진 자로 행한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비구는 바른 앎을 가진 자이다. 


비구들이여, 비구는 마음 챙김을 가진 자, 올바른 앎을 가진 자로 머물러야 한다. 이것이 그대들에게 주는 나의 간곡한 당부이다(가르침의 근본이다).”

bhikkhusuttaṃ (SN 47.3-비구 경)
369. 한 때에 세존께서는 사밧티의 젯타 숲에 있는 아나타삔디카 승원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어떤 비구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후 한 쪽에 앉았다. 한 쪽에 앉은 그 비구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간략하게 법을 설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세존의 법을 들은 뒤에 홀로 외딴 곳에서 방일하지 않고 노력하고 단호한 의지를 가지고 머물고자 합니다.” 
“이렇게 여기 어떤 쓸모없는 자는 나에게 청하기만 한다. 법을 설하여 주면 나를 따라야 한다고만 생각한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제게 간략하게 법을 설해 주십시요. 선서께서는 제게 간략하게 법을 설해 주십시요. 참으로 저는 세존께 말씀하신 의미를  이해할 것입니다. 참으로 저는 세존의 말씀의 상속자가 될 것입니다."  
“비구여, 그렇다면 그대는 유익한 법들에서 출발점을 청정히 해야 한다. 그러면 어떤 것이 유익한 법들의 출발점인가? 계(戒)의 청정과 견해의 올곧음이다. 비구여, 계(戒)가 청정헤 지고 견해가 올곧아질 때, 비구여, 그대는 계를 의지하고 계에 확고히 섰기 때문에 네 가지 마음챙김을 삼중(三重)으로 닦을 수 있다.  

*이 비구는 세존께 명상주제를 설해 주시기를 간청해놓고는 여기저기로 배회하면서 몸으로만 홀로 조용히 머물며 몰두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그를 제지하시기 위해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그를 제지하시기 위해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SA.iii.199)   
*'올곧은 견해(ditthi ujuka)'란 업이 자신의 주인임에 대한 견해이다.(SA.iii.199) 다시 말하면, 업과 과보에 대한 믿음, 즉 윤회에 대한 믿음을 말한다. 여기서 세존께서 아주 청정한 계와 올곧은 견해를 말씀하시는 것은 팔정도의 첫 번째인 바른 견해와 세 번째부터 다섯 번째까지에 해당되는 바른 행위야말로 마음챙기는 닦음의 토대가 됨을 강조하시는 것이다.  

어떤 네 가지인가? 여기, 비구여, 그대는 안으로 몸에 대해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러야 한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닌 자는 세간에 관련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 머문다. 밖으로 몸에 대해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러야 한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닌 자는 세간에 관련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 머문다. 안팎으로 몸에 대해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러야 한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닌 자는 세간에 관련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 머문다. 안으로 느낌에 대해서 느낌을 ··· 밖으로 느낌에 대해서 느낌을 ··· 안팎으로 느낌에서 느낌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러야 한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닌 자는 세간에 관련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 머문다. 안으로 마음에 대해서 마음을 ··· 밖으로 마음에 대해서 마음을 ··· 안팎으로 마음에 대해서 마음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러야 한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닌 자는 세간에 관련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 머문다. 안으로 법에 대해서 법을 ··· 밖으로 법에 대해서 법을 ··· 안팎으로 법에 대해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러야 한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닌 자는 세간에 관련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 머문다. 비구여, 계를 의지하고 계에 확고히 서서 이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을 이렇게 삼중으로 닦을 때, 비구여, 그대는 밤이 오건 낮이 오건 유익한 법들에서 쇠퇴가 아니라 오직 향상을 기대할 수 있다.”  

그 비구는 세존의 말씀을 기뻐하고 감사드린 뒤 자리에서 일어나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후 존경의 의미로 오른쪽으로 돌아 물러갔다. 그리고 홀로 외딴 곳에서 머물며 방일하지 않고 노력하고 단호한 의지를 가지고 머문 그 비구는 오래지 않아 좋은 가문의 아들들이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하는 목적인 그 위없는 청정범행의 완성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하여 머물렀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이루어졌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알았다. 그 비구는 아라한들 중의 한 분이 되었다.   

 

sālāsuttam (SN 47.4-살라 경)
370.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 꼬살라에서 살라라는 바라문 마을에 머물고 계셨다. 거기에서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라고. 그러자 비구들도 받들었다. “세존(존귀하신)이시여.”라고.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새로 출가했고 근래에 이 법과 율에 들어온 신참 비구들이 있다.
비구들이여, 그 비구들을 네 가지 마음 챙김의 확립을 닦고 많이 실천하는 것에 대해서 격려해 주어야 하고 인도해 주어야 하고 확고하게 머물도록 해 주어야 한다. 무엇이 넷인가?

 

'오시오, 도반들이여. 그대들은 몸에 대해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위해 몸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앎을 위해 집중되고 깨끗한 마음으로 삼매를 닦아 평온한 마음으로 머무시오. 느낌에 대해서 느낌을 따라가며 보면서 ,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위해 몸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앎을 위해 집중되고 깨끗한 마음으로 삼매를 닦아 평온한 마음으로 머무시오. 마음에 대해서 마음을 따라가며 보면서,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위해 몸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앎을 위해 집중되고 깨끗한 마음으로 삼매를 닦아 평온한 마음으로 머무시오. 법에 대해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위해 몸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앎을 위해 집중되고 깨끗한 마음으로 삼매를 닦아 평온한 마음으로 머무시오.'라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위없는 유가안온(瑜伽安穩. 열반) 갈망하며 머무는 구경의 마음을 이루지 못한(아라한과를 얻지 못한) 유학(有學)들도 몸에 대해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위해 몸에 대한 완전한 지혜를 위해 집중되고 깨끗한 마음으로 삼매를 닦아 평온한 마음으로머문다. 느낌에 대해서 느낌을 따라가며 보면서,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위해 느낌에 대한 완전한 지혜를 위해 집중되고 깨끗한 마음으로 삼매를 닦아 평온한 마음으로 머문다. 마음에 대해서 마음을 따라가며 보면서,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위해 마음에 대한 완전한 지혜를 위해 집중되고 깨끗한 마음으로 삼매를 닦아 평온한 마음으로머문다. 법에 대해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위해 몸에 대한 완전한 지혜를 위해 집중되고 깨끗한 마음으로 삼매를 닦아 평온한 마음으로머문다.

 

비구들이여, 번뇌를 부수고, 청정한 삶을 성취하고, 해야 할 일을 마치고, 짐을 내려놓고,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고, 윤회의 결박을 끊어 버리고, 올바른 궁극의 지혜에 의해서 해탈한 아라한들도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니고서 몸에 의한 묶임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집중되고 깨끗한 마음으로 삼매를 닦아 평온한 마음으로 머문다. 느낌에서 느낌을 따라가며 보면서,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니고서 느낌에 의한 묶임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집중되고 깨끗한 마음으로 삼매를 닦아 평온한 마음으로 머문다. 마음에서 마음을 따라가며 보면서,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니고서 마음에 의한 묶임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집중되고 깨끗한 마음으로 삼매를 닦아 평온한 마음으로 머문다. 법에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니고서 법에 의한 묶임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집중되고 깨끗한 마음으로 삼매를 닦아 평온한 마음으로 머문다. 

 

비구들이여, 새로 출가했고 근래에 이 법과 율에 들어온 신참 비구들이 있다. 비구들이여, 그 비구들을 네 가지 마음 챙김의 확립을 닦고 많이 실천하는 것에 대해서 격려해 주어야 하고 인도해 주어야 하고 확고하게 머물도록 해 주어야 한다."

 

*신참 비구의 경우에는 몸 [등[을 ‘있는 그대로 알기 위해서’ 머문다고 표현하였고, 유학의 경우에는 몸 [등]을 ‘철저하게 알기 위해서(완전한 지혜)’ 머문다고 표현하였으며, 아라한(무학)의 경우에는 몸 [등]에 ‘초연한 채로’ 머문다고 표현하고 있다.

 

akusalarāsisuttaṃ (SN 47.5-해로움의 덩어리 경)

371. 사왓티에서 설해짐.거기서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해로움의 덩어리’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 바르게 말하는 사람은 다섯 가지 장애를 말해야 한다. 참으로 비구들이여, 다섯 가지 장애는 전적으로 해로움의 덩어리이다. 어떤 다섯가지 인가? 감각적 쾌락에 대한 탐냄 의 장애, 성냄의 장애, 해태와 혼침의 장애, 들뜸과 후회의 장애, 의심의 장애이다. 비구들이여, ‘해로움의 덩어리’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 바르게 말하는 사람은 다섯 가지 장애를 말해야 한다. 참으로
비구들이여, 다섯 가지 장애는 전적으로 해로움의 덩어리이다.

 

비구들이여, ‘유익함의 덩어리’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 바르게 말하는 사람은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를 말해야 한다. 참으로 비구들이여,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은 유익함의 덩어리이다. 어떤 네 가지인가? 비구는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이어 보면서)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니고서, 세간에 관련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 머문다. 느낌을 ··· 마음을 ··· 법에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니고서, 세간에 관련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 머문다. 비구들이여, ‘유익함의 덩어리’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 바르게 말하는 사람은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을 말해야 한다. 참으로 비구들이여,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은 전적으로 유익함의 덩어리이다.”

 

sakuṇagghisuttaṃ (SN 47.6-매 경)
372. “비구들이여, 옛날에 매가 쏜살같이 내려와 메추리를 낚아챘다. 그러자 비구들이여, 메추리는 매에 잡혀가면서 이렇게 울부짖었다.
‘우리의 영역이 아닌 남의 세상에서 사는 우리는 참으로 불행하구나(보호받지 못하는구나). 우리의 공덕은 작구나. 오늘 만약 우리가 영역인 우리 아버지의 세상(고향 동네)에서 살았다면 이 매는 싸움에서 나를 낚아채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면 메추리여, 어떤 것이 그대에게 영역인 그대 아버지의 세상인가?’

‘흙덩이로 덮여 있는 쟁기질한 저 들판입니다.’
그러자 비구들이여, 매는 자기의 힘에 대해 교분고분하지 않고 자기의 힘에 대해 믿지 않는 메추리를 
‘가라, 메추리여, 거기로 가서도 그대는 나에게서 벗어나지 못한다.’라고 하면서 놓아주었다.

 

그러자 비구들이여, 메추리는 흙덩이로 덮여 있는 쟁기질한 들판으로 가서 큰 흙덩이 위로 올라가서 매에게 ‘매여, 이제 내게로 오시오. 매여, 이제 내게로 오시오.’라고 하면서 서 있었다. 비구들이여, 그러자 매는 두 날개를 접고 자기의 힘에 대해 고분고분하지 않고 자기의 힘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메추리에게 쏜살같이 내려왔다. 메추리는 ‘ 이 매가 내게로 가까이 왔다.’라고 알았을 때, 비구들이여, 그 흙덩이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비구들이여, 매는 흙덩이와 부딛혀서 바로 그 자리에서 가슴이 찢어져 버렸다. 비구들이여, 영역이 아닌 남의 세상에서 사는 자는 참으로 이러하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영역이 아닌 남의 세상에서 살지 말라. 비구들이여, 영역이 아닌 남의 세력 세상에서 사는 자에게서 마라는 기회를 얻을 것이고 마라는 대상을 얻을 것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비구에게 영역이 아닌 남의 세상인가?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에 묶인 것이다. 어떤 다섯 가지인가?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쾌락을 불러 일으키고 환락을 야기하는 눈으로 인식되는 형상들 ··· 귀로 인식되는 소리들 ··· 코로 인식되는 냄새들 ··· 혀로 인식되는 맛들 ···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쾌락을 불러 일으키고 환락을 야기하는 몸으로 인식되는 감촉들이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자신의) 영역이 아닌 남의 세상이다.

 

비구들이여, 영역인 자기 아버지의 세상에서 살아라(물려 받은 영역에서 다녀라). 영역인 자기 아버지의 세상에서 사는 자에게 마라는 기회를 얻지 못할 것이고 마라는 대상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비구에게 영역인 자기 아버지의 세상인가?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이다. 어떤 네 가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이어 보면서)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니고서, 세간에 관련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 머문다. 느낌에서 느낌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니고서, 세간에 관련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 머문다. 마음에서 마음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니고서, 세간에 관련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 머문다. 법에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니고서, 세간에 관련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 머문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비구에게 영역인 자기 아버지의 세상이다.”

 

makkaṭasuttaṃ (SN 47.7- 원숭이 경)
373. “비구들이여, 산의 왕 히말라야에는 원숭이도 다닐 수 없고 사람도 다닐 수 없는 험난하고 울퉁불퉁한 지역이 있다.
비구들이여, 산의 왕 히말라야에는 원숭이는 다닐 수 있으나 사람은 다닐 수 없는 험난하고 울퉁불퉁한 지역이 있다. 비구들이여, 산의 왕 히말라야에는 원숭이도 다닐 수 있고 사람도 다닐 수 있는 평탄하고 아름다운 지역이 있다. 거기서 비구들이여, 사냥꾼들은 원숭이를 포획하기 위해서 원숭이가 다니는 길에 송진 칠을 한 덫을 놓는다. 

 

그러면 어리석지 않고 욕심이 없는 원숭이들은 그 송진을 보고 조심하여 그것을 멀리한다. 그러나 어리석고 욕심이 생긴 원숭이는 그 송진에 다가가서 손으로 거머쥔다. 그러면 거기에 달라붙어 버린다. 그는 ‘손을 빼내야겠다.’라고 하면서 다른 한 손으로 그것을 거머쥔다. 그러면 그것도 거기에 달라붙어 버린다. ‘양손을 다 빼내야겠다.’라고 하면서 그는 한 발로 그것을 거머쥔다. 그러면 그것도 거기에 달라붙어버린다. ‘양손도 빼내고 한 발도 빼내야겠다.’라고 하면서 그는 나머지 발로 그것을 거머쥔다. 그러면 그것도 거기에 달라붙어버린다. 그는 ‘양손과 양발을 다 빼내야겠다.’라고 하면서 주둥이로 그것을 잡는다. 그러면 그것도 거기에 달라붙어 버린다. 이처럼 비구들이여, 그 원숭이는 다섯 곳이 덫에 걸려 비명을 지르며 덫에 걸려 거기에 누워 있다. 그는 곤경에 처하고 재앙에 처하였으며, 사냥꾼은 자기가 하고자 하는 대로 할 수 있게 되었다. 비구들이여, 사냥꾼은 그 원숭이를 찌른 뒤 그 나무토막에 묶어서 그가 원하는 곳으로 간다. 비구들이여, 영역이 아닌 남의 세상에서 사는 자는 참으로 이러하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영역이 아닌 남의 세상에서 살지 말라. 비구들이여, 영역이 아닌 남의 세상에서 사는 자에게서 마라는 기회를 얻을 것이고 마라는 대상을 얻을 것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비구에게 영역이 아닌 남의 세상가?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에 묶인 것이다. 어떤 다섯 가지인가?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쾌락을 불러 일으키고 환락을 야기하는 눈으로 인식되는 형상들 ··· 귀로 인식되는 소리들 ··· 코로 인식되는 냄새들 ··· 혀로 인식되는 맛들 ···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쾌락을 불러 일으키고 환락을 야기하는 몸으로 인식되는 감촉들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비구에게 영역이 아닌 남의 세상이다.

 

비구들이여, 영역인 자기 아버지의 세상에서 살아라. 비구들이여, 영역인 자기 아버지의 세상에서 사는 자에게 마라는 기회를 얻지 못할 것이고 마라는 대상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영역인 자기 아버지의 세상인가?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이다. 어떤 네 가지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이어 보면서)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니고서, 세간에 관련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 머문다. 느낌에서 느낌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니고서, 세간에 관련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 머문다. 마음에서 마음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니고서, 세간에 관련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 머문다. 법에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니고서, 세간에 관련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 머문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비구에게 영역인 자기 아버지의 세상이다.”

 

sūdasuttaṃ (SN 47.8-요리사 경)
374.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어리석고 배우지 못하고 능숙하지 못한 요리사가 왕이나 왕의 으뜸 신하에게 신 것, 쓴 것, 자극이 있는 것, 단 것, 매운 것, 맵지 않은 것, 짠 것, 싱거운 것 등 여러 맛을 갖춘 국을 올릴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런 그 어리석고 배우지 못하고 능숙하지 못한 요리사는 자기 주인의 표정을 읽지 못한다. ‘오늘은 이 국이 내 주인의 입맛에 맞았다. 이것에 손이 갔다. 이것을 많이 집었다. 이것을 칭찬했다. 오늘은 신 것이 내 주인의 입맛에 맞았다. 신 것에 손이 갔다. 신 것을 많이 집었다. 신 것을 칭찬했다. 오늘은 쓴 것이 ··· 오늘은 자극이 있는 것이 ··· 오늘은 단 것이 ··· 오늘은 매운 것이 ··· 오늘은 맵지 않은 것이 ··· 오늘은 짠 것이 ··· 오늘은 싱거운 것이 내 주인의 입맛에 맞았다. 싱거운 것에 손이 갔다. 싱거운 것을 많이 집었다. 싱거운 것을 칭찬했다.'라고.

 

비구들이여, 그런 그 어리석고 배우지 못하고 능숙하지 못한 요리사는 하사품을 얻지 못하고, 급료를 받지 못하고, 선물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것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렇게 비구들이여, 그 어리석고 배우지 못하고 능숙하지 못한 요리사는 자기 주인의 표정을 살피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어리석고 배우지 못하고 능숙하지 못한 비구는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이어 보면서)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니고서, 세간에 관련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 머문다.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무는 그의 마음은 삼매에 들지 못하고 오염원들은 제거되지 않는다. 그는 그 표상을 얻지 못한다. 느낌에서 느낌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 마음에서 마음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 법에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니고서, 세간에 관련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 머문다. 법에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무는 그의 마음은 삼매에 들지 못하고 오염원들은 제거되지 않는다. 그는 그 표상을 얻지 못한다.

 

*여기서 '표상'은 nimitta를 옮긴 것인데 본경에서 '주인의 표정'으로 옮긴 표정과 같은 단어이다. 같은 단어가 요리사의 비유와 수행에서 핵심 단어로 쓰이고 있다. 명상 주제에 대한 익힌 표상(uggaha-nimitta)을 취하고 이것은 닮은 표상(patibhaga-nimitta)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삼매수행의 핵심인데 본경도 이를 잘 설명하고 있다. 
한편 주석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표상을 취하지 못한다(nimittam na ugganhati)'는 것은 나의 이 명상주제는 수순(anuloma)이나 종성(種姓,gotrabhu)에 도달하여 머문다고 알지 못한다. 자신의 마음의 표상(cittassa nimitta)을 취할 수가 없다는 뜻이다.(SA.iii.201)   
여기서 수순과 종성은 욕계의 마음이 禪이나 출세간도에 들기 직전의 욕계의 마지막 마음의 순간들을 뜻한다. 물론 여기서는 선에 들기 직전을 뜻한다. 선과 수순과 종성에 대해서는 「아비담마 길라잡이」의 설명을 참조할 것.   

 

비구들이여, 그런 그 어리석고 배우지 못하고 능숙하지 못한 비구는 지금·여기에서 행복한 머묾을 얻지 못하고, 마음챙김과 바른 앎을 얻지 못한다. 그것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렇게 비구들이여, 그 어리석고 배우지 못하고 능숙하지 못한 비구는 자기 마음의 표상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현명하고 배웠고 능숙한 요리사가 왕이나 왕의 으뜸 신하에게 신 것, 쓴 것, 자극이 있는 것, 단 것, 매운 것, 맵지 않은 것, 짠 것, 싱거운 것 등 여러 맛을 갖춘 국을 올릴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런 그 현명하고 배웠고 능숙한 요리사는 자기 주인의 표정을 읽는다. ‘오늘은 이 국이 내 주인의 입맛에 맞았다. 이것에 손이 갔다. 이것을 많이 집었다. 이것을 칭찬했다. 신 것이 내 주인의 입맛에 맞았다. 신 것에 손이 갔다. 신 것을 많이 집었다. 신 것을 칭찬했다. ··· 오늘은 쓴 것이 ··· 오늘은 자극이 있는 것이 ··· 오늘은 단 것이 ··· 오늘은 매운 것이 ··· 오늘은 맵지 않은 것이 ··· 오늘은 싱거운 것이 내 주인의 입맛에 맞았다. 싱거운 것에 손이 갔다. 싱거운 것을 많이 집었다. 싱거운 것을 칭찬했다.'라고.

 

비구들이여, 그런 그 현명하고 배웠고 능숙한 요리사는 하사품을 받고, 급료를 받고, 선물을 얻을 것이다. 그것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렇게 비구들이여, 그 현명하고 배웠고 능숙한 요리사는 자기 주인의 표정을 읽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현명하고 배웠고 능숙한 비구는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니고서, 세간에 관련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 머문다.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무는 그의 마음은 삼매에 들고 오염원들은 제거된다. 그는 그 표상을 얻는다. 느낌에서 느낌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 마음에서 마음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 법에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니고서, 세간에 관련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 머문다. 법에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무는 그의 마음은 삼매에 들고 오염원들은 제거된다. 그는 그 표상을 얻는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그 현명하고 배웠고 능숙한 비구는 지금·여기에서 행복한 머묾을 얻고, 마음챙김과 바른 앎을 얻는다. 그것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렇게 비구들이여, 그 현명하고 배웠고 능숙한 비구가 자기 마음의 표상을 취하기 때문이다.”

 

gilānasuttaṃ (SN 47.9-병 경)
375.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웨살리에서 벨루와가마에 머물고 계셨다.
거기에서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오라,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벗을 의지하거나(따르거나) 친구를 의지하거나 후원자를 의지하여 웨살리 전역에서 각자 안거를 하여라. 나는 여기 이 벨루와가마에서 안거를 할 것이다.”라고. 그 비구들은 “알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세존께 대답한 뒤 벗을 의지하거나 친구를 의지하거나 후원자를 의지하여 웨살리 전역에서 각자 안거를 하였다. 세존께서는 거기 벨루와가마에서 안거를 하셨다.

 

세존께서는 안거 중에 혹독한 병에 걸려서 죽음에 다다르는 극심한 고통이 생기셨다. 세존께서는 마음챙기고 바르게 알아차리면서 흔들림 없이 그것을 감내하셨다. 그때 세존께 이런 생각이 일어나셨다.  
'내가 재가신도들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비구 승가에게 알리지도 않고 반열반에 든다면, 그것은 나에게 옳지 않다(여래가 취할 행동이 아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이 병을 정진으로 다스리고 생명의 형성작용을 유지하며(굳세게 하여) 머물러야겠다.'라고. 
세존께서는 그 병을 정진으로 다스리고 생명의 형성작용을 유지하며 머무셨다. (그래서 세존에게 그 병은 가라앉았다.)

 

*'생명의 형성작용을 굳세게 하여(jivita-sankharam adhitthaya)'라고 하셨다. 여기서 생명 자체가 생명의 형성이다. [생명은 자기 존재가 무너지게 하지 않고 계속 형성하게 하기 때문이다.-SAT} 혹은 과의 증득이라는 법이 생명의 형성이다. 이것 때문에 [지금 세존의] 생명은 형성되고 유지되고 연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후자의 뜻이다. 간략하게 말하면, '나는 생명을 지속시킬 수 있는 과의 증득에 들 것이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병은 과의 증득에 의해서 가라앉았고 반열반 하시기 전의 10개월 동안 일어나지 않았다.(SA.iii.202) 

 

병에서 회복한 세존께서는 얼마 되지 않아서 승원의 그늘에 마련된 자리에 앉으셨다. 그때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아서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에게 세존께서는 편안해 보이십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께서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께서 감내하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께서 삶을 지탱하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세존이시여, 세존의 병 때문에 저의 몸은 마치 술에 취한 것 같았고, 방향감각을 잃어버렸고, 어떠한 법들도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래도 제게는 ‘세존께서는 비구 승가와 관련하여 아무런 말씀도 없이 반열반에 들지는 않으실 것이다.’라는 어떤 안심과 믿음이 있었습니다.”

 

“아난다여, 이제 비구 승가는 나에 대해서 무엇을 더 바라는가? 아난다여, 내가 설한 법은 안과 밖을 만들지 않는다(안과 밖이 다르지 않은 법을 설하였다). 아난다여, 여래가 가르친 법들에는 스승의 움켜쥔 주먹과 같은 것이 없다. 참으로 아난다여, ‘나는 비구 승가를 거느린다.’거나 ‘비구 승가는 나의 지도를 받는다.’라고 생각하는 자는, 아난다여, 비구 승가와 관련하여 어떤 것을 말할 것이다. 그러나 아난다여, 여래는 ‘나는 비구 승가를 거느린다(돌볼 것이다).’라거나 ‘비구 승가는 나의 지도를 받는다(나를 존경한다).’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난다여, 그런 여래가 비구 승가와 관련하여 무엇을 말한단 말인가? 아난다여, 이제 나는 늙고 연로하고 노쇠하고, 수명의 절반이 지나 노년에 이르러, 내 나이가 여든이 되었다. 예를 들면, 아난다여, 낡은 수레가 가죽 끈에 묶여서 유지된다. 이처럼, 아난다여, 생각건대 여래의 몸은 가죽 끈에 묶여서 유지된다. 

 

"안과 밖이 없이 – 주석서에서는 법과 사람 둘 다에 안과 밖을 두지 않으신 것을 뜻한다고 설명한다. 즉 법을 남김없이 드러내셨을 뿐만 아니라.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법을 설하셨다는 말이다.(DA.ii.547~548;SA.iii.203)
*'스승의 주먹은 acariya-mutthi 를 직역한 것이다. ‘붓다의 가르침에는 스승의 움켜쥔 주먹이 없다.’는 이 말씀은 중요하다. 인도의 전통적인 「우빠니샤드」의 가르침은 비밀리에 전수함[秘傳]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붓다께서는 이러한 비전을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이다. 당당하게 눈 있는 자는 와서 보라고 숨김없이 설하셨다는 뜻이다. 한편 주석서에서는 ‘외도들에게는 스승의 움켜쥔 주먹이 있다. 젊었을 때는 설하지 않다가 노년이 되어 마지막 침상에 누워서 좋아하는 측근 제자에게 말해주는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DA.ii.548)

 

아난다여, 여래가 모든 표상들을 마음에 기울이지 않고, 어떤 느낌들의 소멸로부터 표상 없는 마음의 삼매에 들어 머물 때, 아난다여, 여래의 몸은 더욱 편안해진다. 그러므로 아난다여, 여기서 그대들은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의지처)로 삼아 머물고,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말라.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말라.

 

그러면, 아난다여, 어떻게 비구는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는가?
여기, 아난다여, 비구는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니고서, 세간에 관련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 머문다. 느낌에서 느낌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니고서, 세간에 관련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 머문다. 마음에서 마음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 正知)과 마음챙김(念)을 지닌 비구는, 세간에 관련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 머문다. 법에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닌 비구는, 세간에 관련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 머문다.

 

이처럼, 아난다여, 비구는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으며,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는다. 누구든지 지금이거나 내가 죽은 뒤에라도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으며,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으면서 정진하는 비구들이 나에게 수승한 제자가 될 것이다.”

 

bhikkhunupassayasuttaṃ (SN 47.10-비구니 거처 경)
376. 그 무렵 아난다 존자는 오전에 옷차림을 바르게 하고 발우와 가사를 지니고 어떤 비구니 처소로 갔다. 가서는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그때 많은 비구니들이 아난다 존자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아난다 존자에게 경의를 표하고 난 후 한 쪽에 앉았다. 한 쪽에 앉은 비구니들은 아난다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기, 아난다 존자시여,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에 잘 확립된 마음으로 머무는 많은 비구니들은 뛰어나게 전후를 다르게 인식합니다.”

“그렇습니다, 누이들이여. 그렇습니다, 누이들이여. 누이들이여, 네 가지 마음 챙김의 확립에 잘 확립된 마음으로 머무는 비구거나 비구니라면 누구에게나 뛰어나게 전후를 다르게 인식할 것이 기대됩니다.”

 

*'뛰어나게 전후를 다르게 인식한다(점진적으로 고결해지는 특별한 경지,ularam pubbenaparam visesam)'이란 이전의 특별한 경지(pubba-visesa)보다도 나중의 더 고결한 특별한 경지(ulara-visesa)를 말한다. 여기서 근본물질을 파악하는 것은 이전의 특별한 경지이고 파생된 물질을 파악하는 것은 나중의 특별한 경지라 한다. 전체 물질을 파악하는 것은 이전의 특별한 경지이고 정신(비물질, arupa)을 파악하는 것은 나중의 특별한 경지라 한다. 물질과 정신을 파악하는 것은 이전의 특별한 경지이고 조건을 파악하는 것은 나중의 특별한 경지라 한다. 조건과 더불어 정신과 물질을 보는 것은 이전의 특별한 경지이고 [무상.고.무아의] 삼특상을 제기하는 것은 나중의 특별한 경지라 한다.(SA.iii.205)   


아난다 존자는 그 비구니들에게 법의 이야기로 가르치고 격려하고 분발하게 하고 기쁘게 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서 돌아갔다. 그리고
사왓티에서 탁발을 하여 공양을 마치고 오후에 탁발에서 돌아온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후 한 쪽에 앉았다. 한 쪽에 앉은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여기, 세존이시여, 저는 오전에 옷차림을 바르게 하고 발우와 가사를 지니고 어떤 비구니 처소로 갔습니다. 가서는 마련된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때 많은 비구니들이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와서는 저에게 경의를  표하고 난 후 한 쪽에 앉았습니다. 한 쪽에 앉은 그 비구니들은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난다 존자시여,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에 잘 확립된 마음으로 머무는 많은 비구니는 뛰어나게 전후를 다르게 인식합니다.'라고. 이렇게 말했을 때, 세존이시여, 저는 그 비구니들에게 ‘그렇습니다, 누이들이여. 그렇습니다, 누이들이여. 누이들이여, 네 가지 마음 챙김의 확립에 잘 확립된 마음으로 머무는 비구거나 비구니라면 누구에게나 뛰어나게 전후를 다르게 인식할 것이 기대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참으로 그러하다, 아난다여. 참으로 그러하다.
아난다여. 아난다여,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에 잘 확립된 마음으로 머무는 비구거나 비구니라면 누구에게나 뛰어나게 전후를 다르게 인식할 것이 기대된다. 무엇이 넷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는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이어 보면서)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니고서, 세간에 관련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면서 머문다.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몸에 머무는 그에게 몸을 대상으로 하여 몸에 열기가 생기거나, 정신적으로 태만해지거나, 밖으로 마음이 흩어진다. 그러면 그는 무언가 믿음을 고취하는 표상으로 마음을 향하게 해야 한다. 무언가 믿음을 고취하는 표상으로 마음을 향하게 하는 그에게 환희가 생긴다. 환희하는 자에게 희열이 생긴다. 마음에 희열이 있는 자의 몸은 고요해진다. 몸이 고요한 자는 행복을 경험한다. 행복한 자의 마음은 삼매에 들어진다. 그는 이렇게 숙고한다. ‘나는 어떤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마음을 향하게 하였다. 나에게 그 목적이 성취되었다. 이제 나는 거두어 들인다.’라고. 그는 거두어들이고 생각을 일으키지 않고 숙고를(고찰을) 하지 않는다. ‘나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고 숙고를 하지 않는다. 안으로 마음챙김을 지니는 나는 행복하다.’라고 분명히 안다.

 

*'몸을 대상으로 하여(kay-arammana)'란 몸을 관찰할 때 그것을 대상으로 하여 오염원의 열기가 생기는 것을 말한다. '밖으로 마음이 흩어진다(bahiddha va cittam vikkhipati)'는 것은 밖에 있는 일상적인 대상에 대해서 마음이 일어나서 흩어지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이 오염원의 열과 게으름과 밖으로 흩어짐이 생길 때 그러한 오염원에 물들지 말고 청정한 믿음을 고취하는 어떤 다른 곳에, 예를 들면 부처님 등과 같은 곳에 명상주제의 마음을 놓아야 한다.(SA.iii.205)  

*'거두어 들인다'라는 것은 나는 이제 청정한 믿음을 고취하는 대상으로부터 거두어들여서 원래의 명상주제로 향하게 할 것이라는 뜻이다. (SA.iii.205)  

*'생각을 일으키지 않고 고찰을 하지 않고'란 오염원의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로써 생각하지 않고 고찰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SA.iii.206) 이것은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없는 제2선에 도달했음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시 아난다여, 여기 비구는 느낌에서 느낌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 마음에서 마음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 법에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니고서, 세간에 관련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면서 머문다. 법에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법에 머무는 그에게 법을 대상으로 하여 몸에 열기가 생기거나, 정신적으로 태만해지거나, 밖으로 마음이 흩어진다. 그러면 그는 무언가 믿음을 고취하는 표상으로 마음을 향하게 해야 한다. 무언가 믿음을 고취하는 표상으로 마음을 향하게 하는 그에게 환희가 생긴다. 환희하는 자에게 희열이 생긴다. 마음에 희열이 있는 자의 몸은 고요하다. 몸이 고요한 자는 행복을 경험한다. 행복한 자의 마음은 삼매에 든다. 그는 이렇게 숙고한다. ‘나는 어떤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마음을 향하게 하였다. 나에게 그 목적이 성취되었다. 이제 나는 거두어 들인다.’라고. 그는 마음을 거두어들이고 생각을 일으키지 않고 숙고를 하지 않는다. ‘나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고 숙고를 하지 않는다. 안으로 마음챙김을 지니는 자가 되어 행복하다.’라고 분명히 안다. 아난다여, 이렇게 향하게 하면서 닦는다.

 

*‘[다른 대상으로] 향하게 하는 닦음’은 주석서는 내려놓은 뒤에 하는 수행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마치 사탕수수를 정제공장으로 나르는 사람이 때때로 쉬어가면서 사탕수수를 내려놓고 그것을 먹어가면서 계속해서 길을 가는 것과 같이 아라한과를 얻기 위해서 명상주제를 들고 있는 자가 몸이 피곤하거나 하면 들고 있는 명상주제를 내려놓고 붓다의 공덕 등을 계속해서 생각하여 마음에 청정한 믿음이 생기게 하여 수행하기에 적합하게 만든 뒤에 수행을 계속하는 것과 같다.”(SA.iii.206)    

 

아난다여, 그러면 어떻게 (다른 대상으로는) 향하게 하지 않으면서 닦는가?
아난다여, 비구는 마음을 밖으로 향하게 하지 않으면서 ‘나의 마음은 밖으로 향하지 않는다.’라고 분명히 안다. 그리고 앞과 뒤가 '수축하지 않고, 풀려났고(해탈), 향하지 않았다.’라고 분명히 안다. 다시 그는 ‘나는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위해 노력하는 나는 행복하다.’라고 분명히 안다.

 

아난다여, 비구는 마음을 밖으로 향하지 않게 하면서 '나의 마음은 밖으로 향하지 않는다.'라고 분명히 안다. 그리고 앞과 뒤가 '수축되지 않고, 풀려났고, 향하지 않았다.'라고 분명히 안다. 다시 그는 ‘나는 느낌에서 느낌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위해 노력하는 나는 행복하다'라고 분명히 안다.

 

아난다여, 비구는 마음을 밖으로 향하지 않게 하면서 ‘나의 마음은 밖으로 향하지 않는다.’라고 분명히 안다. 그리고 앞과 뒤가 '수축되지 않고, 풀려났고, 다른 대상으로는 향하지 않았다.’라고 분명히 안다. 다시 그는 '나는 마음에서 마음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위해 노력하는 나는 행복하다'라고 분명히 안다. 


아난다여, 비구는 마음을 밖으로 향하지 않게 하면서 ‘나의 마음은 밖으로 향하지 않는다.’라고 분명히 안다. 그리고 앞과 뒤가 '수축되지 않고, 풀려났고, 다른 대상으로는 향하지 않았다.’라고 분명히 안다. 다시 그는 '나는 법에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위해 노력하는 나는 행복하다.’라고 분명히 안다.
아난다여, 이렇게 향하게 하지 않으면서 닦고 익힌다.


아난다여, 이처럼 나는 향하게 하여 하는 닦음도 설하였고, 향하게 하지 않는 닦음도 설하였다. 아난다여, 제자들을 위해 베푸는 자인 스승이 행해야 하는 것을, 연민하기 때문에, 나는 그대를 위해서 했다. 
아난다여, 여기 나무 밑이 있다. 여기 빈집들이 있다. 선(禪)을 하라. 방일(放逸)하지 마라. 나중에 뉘우침이 있게 하지 마라. 이것이 그대에게 주는 나의 간곡한 당부이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세존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아난다 존자는 기뻐하며 세존께서 설하신 것을 찬탄하였다.

 


제1장 암바빨리 품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