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알리어 경전/상윳따 니까야

제47상윳따 - 제2장 날란다 품(SN47:11-SN47:20. Nālanda-vagga)

실론섬 2014. 7. 23. 00:34

제2장 날란다 품
Nālanda-vagga (SN 47.11-20)

 

mahāpurisasuttaṃ (SN 47.11-대인(大人) 경)

377. 사왓티에서 설해짐. 그 무렵 사리뿟따 존자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후 한 쪽에 앉았다. 한 쪽에 앉은 사리뿟따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대인(大人), 대인’이라고 불립니다. 세존이시여, 어떠 점에서 대인입니까?"라고.
“사리뿟따여, 마음이 해탈했기 때문에 대인이라고 나는 말한다(해탈된 마음의 속성 때문에 대인이라고 나는 말한다). 마음이 해탈하지 못했기 때문에 대인이 아니라고 나는 말한다(해탈되지 않은 마음의 속성 때문에 대인이 아니라고 나는 말한다).

 

*'대인'은 maha-puisa를 직역한 것이다. 「앙굿따라 니까야」 「아누룻다 경」은 여덟 가지 대인의 사유를 들고 있다. 간추리면 ①이 법은 원하는 것이 적은[소욕.小慾] 자를 위한 것이고 ②만족하는[지족.知足] 자를 위한 것이고 ③홀로 머묾을 하는 자를 위한 것이고 ④열심히 정진하는 자를 위한 것이고 ⑤마음 챙김을 확립한 자를 위한 것이고 ⑥삼매에 든 자를 위한 것이고 ⑦지혜를 갖춘 자를 위한 것이고 ⑧분별 없음을 좋아하고 분별 없음을 즐기는 자를 위한 것이라는 여덟 가지이다.

 

사리뿟따여, 어떻게 해탈된 마음을 가진 자가 되는가? 여기, 사리뿟따여, 비구는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니고서, 세상에 대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 머문다.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무는 그에게 마음은 탐욕이 사라지고 집착이 없어져서 번뇌들로부터 해탈한다. 느낌에서 ··· 마음에서 ··· 법에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니고서, 세상에 대한 탐욕과 근심을 극복하면서 머문다. 법에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무는 그에게 마음은 탐욕이 사라지고 집착이 없어져서 번뇌들로부터 해탈한다. 이렇게, 사리뿟따여, 마음이 해탈했기 때문에 대인이라고 나는 말한다. 마음이 해탈하지 못했기 때문에 대인이 아니라고 나는 말한다."  

 

nālandasuttaṃ (SN 47.12-날란다 경)
378. 한때 세존께서는 날란다에서 빠와리까의 망고 숲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사리뿟따 존자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후 한 쪽에 앉았다. 한 쪽에 앉은 사리뿟따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께 분명하고 완전한 믿음이 있습니다. 바른 깨달음에 관한 한 세존을 능가하고 세존을 뛰어넘는 사문이나 바라문은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며, 지금도 없다." 라고.

 

“사리뿟따여, 그대는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께 이런 분명하고 완전한 믿음이 있습니다. 바른 깨달음에 관한 한 세존을 능가하고 세존을 뛰어넘는 사문이나 바라문은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며, 지금도 없습니다.’라고 황소같이 우렁찬 목소리로 말을 하고 확신에 찬 사자후를 토한다. 

 

사리뿟따여, 그대는 ‘그분 세존들께서는 이런 계를 가졌다.'거나 '그분 세존들은 이런 법을 가졌다.'거나 '그분 세존들께서는 이런 혜(慧)를 가졌다.'거나 '그분 세존들께서는 이렇게 머문다.'거나 '그분 세존들께서는 이렇게 해탈을 성취했다.’라고 이렇게 과거에 있었던 아라한·정등각인 그분 세존들 모두에 대해 마음으로써 마음을 잘 이해하여 알아 차렸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사리뿟따여, 그대는 ‘그분 세존들께서는 이런 계를 가질 것이다.'거나 '그분 세존들께서는 이런 법을 가질 것이다.'거나 '그분 세존들께서는 이런 혜(慧)를 가질 것이다.'거나 '그분 세존들께서는 이렇게 머물 것이다.'거나 '그분 세존들께서는 이렇게 해탈을 성취할 것이다.’라고 이렇게 미래에 있을 아라한·정등각인 그분 세존들 모두를 마음으로써 마음을 잘 이해하여 알아 차렸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사리뿟따여, 그대는 ‘세존께서는 이런 계를 가졌다.'거나 세존께서는 이런 법을 가졌다.'거나 '세존께서는 이런 혜를 가졌다.'거나 '세존께서는 이렇게 머문다.'거나 '세존께서는 이렇게 해탈을 성취했다.’라고 지금의 아라한·정등각인 나를 마음으로써 마음을 잘 이해하여 알아 차렸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그런데 사리뿟따여, 참으로 그대에게는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아라한·정등각자들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지혜가 없다. 그런데 사리뿟따여, 어떻게 그대는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께 분명하고 완전한 믿음이 있습니다. 바른 깨달음에 관한 한 세존을 능가하고 세존을 뛰어넘는 사문이나 바라문은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며, 지금도 없습니다.’라고 이처럼 황소같이 우렁찬 목소리로 말을 하고 확신에 찬 사자후를 토하는가?”

 

“세존이시여, 제게는 분명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아라한·정등각들의 마음을 알아 차리는 지혜가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법다운 추론으로 알았습니다. 예를 들면, 세존이시여, 왕의 국경에 있는 도시들은 깊은 해자(垓子)와 튼튼한 성벽과 망루를 가지고 있고, 하나의 대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기서 현명하고 훈련된 지혜로운 문지기가 있어, 알려지지 않은 자들은 제지하고 알려진 자들만 들어가게 합니다. 그는 그 도시의 모든 통로를 다 순찰하면서 성벽의 이음매와 갈라진 틈으로 고양이가 지나다니는 것까지는 보지 않습니다.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들 것입니다. ‘이 도시를 들어오고 나가는 큰 생명체들은(거친 존재들은) 모두 이 대문으로 들어오거나 나간다.’라고. 이처럼, 세존이시여, 저는 법다운 추론으로 알았습니다. 세존이시여, 과거에 있었던 아라한·정등각인 그분 세존들은 혜(慧)를 무력하게 만드는 마음의 오염원인 다섯 가지 장애들을 버리고서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에 잘 확립된 마음을 가진 자로써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들을 있는그대로 닦아서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깨달으셨습니다. 세존이시여, 미래에 있을 아라한·정등각인 그분 세존들도 혜를 무력하게 만드는 오염원인 다섯 가지 장애들을 버리고서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에 잘 확립된 마음을 가진 자로서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들을 있는 그대로 닦아서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깨달으실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지금의 아라한·정등각인 세존께서도 혜를 무력하게 만드는 마음의 오염원인 다섯 가지 장애들을 버리고서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에 잘 확립된 마음을 가진 자로써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들을 있는 그대로 닦아서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깨달으셨습니다.”

 

“훌륭하고 훌륭하다, 사리뿟따여. 그러므로 사리뿟따여, 그대는 이 법문을 자주 비구들과 비구니들과 청신사들과 청신녀들에게 설해야 한다. 사리뿟따여, 여래에 대한 의심과 혼란이 생긴 어리석은 자들에게 이 법문을 들은 뒤 여래에 대한 의심과 혼란이 버려질 것이다.” 

 

cundasuttaṃ (SN 47.13-쭌다 경)
379. 한 때에 세존께서는 사왓티의 제따 숲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사리뿟따 존자는 마가다의 날라까가마까에 머물고 있었는데 중병에 걸려 아픔과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 당시 쭌다 사미가 사리뿟따 존자의 시자로 있었다.

 

거기서 사리뿟따 존자는 그 병으로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 그러자 쭌다 사미는 사리뿟따 존자의 발우와 가사를 가지고 사왓티에 있는 제따 숲의 아나타삔디까 승원으로 가서 아난다 존자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아난다 존자에게 경의를 표하고 난 후 한 쪽에 앉았다. 한 쪽에 앉은 쭌다 사미는 아난다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존자시여, 사리뿟따 존자께서 완전한 열반에 드셨습니다. 이것이 발우와 가사입니다.”
“도반 쭌다여, 이것은 세존을 뵙고 말씀드려야 할 문제입니다. 오십시오, 도반 쭌다여, 세존을 뵈러 갑시다. 가서 이 사건을 세존께 말씀드립시다.”
“알겠습니다, 존자시여.”라고 쭌다 사미는 아난다 존자에게 대답했다.


아난다 존자와 쭌다 사미는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후 한 쪽에 앉았다. 한 쪽에 앉은 아난다 존자는 세존게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쭌다 사미가 ‘존자시여, 사리뿟따 존자께서 완전한 열반에 드셨습니다. 이것이 발우와 가사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사리뿟따 존자가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는 말을 듣고 저의 몸은 무겁기만 합니다. 방향 감각도 잃어버렸고 법들도 제게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습니다.”라고. 

 

“아난다여, 사리뿟따가 완전한 열반에 들면서 그대의 계의 무더기(계온.戒蘊)를 가져가 버리기라도 했는가(사리뿟따가 그대의 계의 무더기를 가지고 완전히 열반하였는가)? 아니면 완전한 열반에 들면서 그대의 삼매의 무더기(정온.定蘊)를 가져가 버리기라도 했는가? 아니면 완전한 열반에 들면서 그대의 지혜의 무더기(혜온.慧蘊)를 가져가 버리기라도 했는가? 아니면 완전한 열반에 들면서 그대의 해탈의 무더기(해탈온.解脫蘊)를 가져가 버리기라도 했는가? 아니면 완전한 열반에 들면서 그대의 해탈지견의 무더기(해탈지견온(解脫知見蘊)를 가져가 버리기라도 했는가?”
“세존이시여. 사리뿟따 존자가 완전한 열반에 들면서 저의 계의 무더기를 가져가 버리지 않았습니다(사리뿟따 존자가 저의 계의 무더기를 가지고 완전히 열반한 것은 아닙니다). ··· 삼매의 무더기를 ··· 지혜의 무더기를 ··· 해탈의 무더기를 ··· 해달지견의 무더기를 가져가 버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세존이시여, 사리뿟따는 저를 이끌어주고 감싸주고 일깨워주고 가르치고 격려하고 분발하게 하고 기쁘게 하였습니다. 법을 가르치기에 피로한 줄 몰랐으며 동료 수행자들에게 큰 도움을 주는 자였습니다. 저희는 사리뿟따 존자가 베풀어준 법의 자양분과 법의 재물과 법의 도움을 기억합니다.”  

 

“참으로 아난다여, 내가 전에 사랑스럽고 마음에 드는 모든 것과는 헤어지기 마련이고 없어지기 마련이고 달라지기 마련이라고 그처럼 말하지 않았던가! 아난다여, 그러니 여기서 그대가 슬퍼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난다여, 태어났고 존재했고 형성되었고 부서지기 마련인 법에 대해 절대로 부서지지 말라고 한다면 그런 경우는 없다. 예를 들면, 아난다여, 속재목[心材]을 가지고 튼튼하게 서 있는 큰 나무의 가장 큰 가지가 부러진 것과 같다. 이처럼, 아난다여, 큰 비구 승가에서 속재목을 가지고 튼튼하게 서 있던 사리뿟따가 완전한 열반에 든 것이다. 아난다여, 그러니 여기서 그대가 슬퍼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난다여, 태어났고 존재했고 형성되었고 부서지기 마련인 법에 대해 절대로 부서지지 말라고 한다면 그런 경우는 없다. 그러므로 아난다여,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말라.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말라.

 

그러면 아난다여, 어떻게 비구는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는가?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는가? 여기, 아난다여, 비구는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이어 보면서)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니고서, 세상에 대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 머문다. 느낌에서 ··· 마음에서 ··· 법에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니고서, 세상에 대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 머문다. 이처럼 아난다여, 비구는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으며,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는다.

아난다여, 누구든지 지금이거나 내가 죽고 난 후에라도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으며,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으면서 정진하는 비구들이 나에게 최고의 제자들이 될 것이다.”

 

ukkacelasuttaṃ (SN 47.14-욱까쩰라 경)
380. 한 때에 세존께서는 왓지에서 욱까쩰라의 강가 강 언덕에 고귀한 비구 승가와 함께 머무셨는데 그것은 사리뿟따와 목갈라나가 완전한 열반에 든 뒤 오래지 않았을 때였다. 그 무렵 세존께서는 비구 승가에 둘러싸여서 노지에 앉아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는 침묵하고 있는 비구 승가를 둘러보신 뒤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주석서에 의하면 목갈라나 존자는 사리뿟따 존자가 열반한지 보름 후에 열반했다고 한다. 사리뿟따 존자는 깟띠까 달(음력10월)의 보름에 열반하였고 목갈라나 존자는 그 다음 달의 초하루에 열반하였다고 한다.(SA.iii.225) 세존의 열반이 웨사카 달(음력4월) 보름이기 때문에 사리뿟따 존자는 세존보다 6개월 먼저 열반하였고 목갈라나 존자는 5개월 보름 먼저 열반한 것이다.    

 

“비구들이여, 사리뿟따와 목갈라나가 열반에 들자 내게는 회중이 텅 빈 것처럼 여겨지지만, 나의 회중은 텅 비지 않았고 사리뿟따와 목갈라나가 머물던 그 방향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이 없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나에게 사리뿟따와 목갈라나가 있듯이, 과거에 있었던 아라한·정등각인 그분 세존들께도 두 상수제자가 있었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나에게 사리뿟따와 목갈라나가 있듯이, 미래에 있을 아라한·정등각인 그분 세존들께도 두 상수제자가 있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제자들은 놀랍다. 비구들이여, 제자들은 신기하다. 참으로 스승의 가르침(법)에 순응하고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행하고, 사부대중 가운데 사랑하고 마음에 들어 하고 존중하고 닦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여래도 놀랍다. 비구들이여, 여래도 신기하다. 이러한 두 제자가 완전히 열반하였는데도 여래에게는 참으로 슬픔과 비탄이 없다.

 

비구들이여, 그러니 여기서 그대들이 슬퍼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비구들이여, 태어났고 존재했고 형성되었고 부서지기 마련인 법에 대해 절대로 부서지지 말라고 한다면 그런 경우는 없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큰 나무의 심재를 가지고 서 있는 더 큰 줄기가 부러진 것과 같다. 이처럼, 비구들이여, 큰 비구승가에서 속재목을 가지고 튼튼하게 서 있던 사리뿟따와 목갈라나가 완전히 열반에 든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니 여기서 그대들이 슬퍼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비구들이, 태어났고 존재했고 형성되었고 부서지기 마련인 법에 대해 절대로 부서지지 말라고 한다면 그런 경우는 없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말라.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말라.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떻게 비구는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는가?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이어 보면서)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니고서, 세상에 대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 머문다. 느낌에서 ··· 마음에서 ··· 법에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니고서, 세상에 대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 머문다. 이처럼 비구들이여, 비구는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으며,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지금이거나 내가 죽고 난 후에라도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으며,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으면서 정진하는 비구들이 나에게 최고의 제자들이 될 것이다.”  

 

bāhiyasuttaṃ (SN 47.15-바히야 경)

381. 사왓티에서 설해짐. 그 무렵 바히야 존자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후 한 쪽에 앉았다. 한 쪽에 앉은 바히야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저에게 간략하게 법을 설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세존으로부터 법을 들은 뒤 홀로 외딴곳에서 방일하지 않고 노력하고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머물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바히야여, 그대는 유익한 법들에서 출발점을 청정하게 해야 한다. 그러면 어떤 것이 유익한 법들의 출발점인가? 계의 청정과 견해의 올곧음이다. 바히야여, 계가 청정해지고 견해가 올곧아질 때, 바히야여, 그대는 계를 의지하고 계에 확고히 섰기 때문에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을 닦을 수 있다. 어떤 네 가지인가?

 

여기 바히야여, 그대는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이어 보면서) 보면서 머물러야 한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닌 자는 세상에 대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 머문다. 느낌에서 ··· 마음에서 ··· 법에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러야 한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닌 자는, 세상에 대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 머문다. 바히야여, 계를 의지하고 계에 굳게 서서 이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을 이렇게 닦을 때, 바히야여, 그대는 밤이 오건 낮이 오건 유익한 법들에서 퇴보가 아니라 오직 향상을 기대할 수 있다."

 

바히야 존자는 세존의 말씀을 기뻐하고 감사드린 뒤 자리에서 일어나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후 존경의 의미로 오른쪽으로 돌아 물러갔다. 그리고 홀로 외딴곳에서 방일하지 않고 노력하고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머문 바히야 존자는 오래지 않아 좋은 가문의 아들들이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하는 목적인 위없는 청정범행의 완성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하여 머물렀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알았다. 바히야 존자는 아라한들 중의 한 분이 되었다.

 

uttiyasuttaṃ (SN 47.16-웃띠야 경)
382. 사왓티에서 설해짐. 그 무렵 웃띠야 존자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후 한 쪽에 앉았다. 한 쪽에 앉은 웃띠야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저에게 간략하게 법을 설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세존으로부터 법을 들은 뒤 홀로 외딴곳에서 방일하지 않고 노력하고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머물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웃띠야여, 그대는 유익한 법들에서 출발점을 청정하게 해야 한다. 그러면 어떤 것이 유익한 법들의 출발점인가? 계의 청정과 견해의 올곧음이다. 웃띠야여, 계가 청정해지고 견해가 올곧아질 때, 바히야여, 그대는 계를 의지하고 계에 확고히 섰기 때문에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을 닦을 수 있다. 어떤 네 가지인가?  

 

여기 웃띠야여, 그대는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이어 보면서) 보면서 머물러야 한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닌 자는 세상에 대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 머문다. 느낌에서 ··· 마음에서 ··· 법에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러야 한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닌 자는, 세상에 대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 머문다. 웃띠야여, 계를 의지하고 계에 굳게 서서 이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을 이렇게 닦을 때, 웃띠야여, 그대는 밤이 오건 낮이 오건 유익한 법들에서 퇴보가 아니라 오직 향상을 기대할 수 있다."

 

웃띠야 존자는 세존의 말씀을 기뻐하고 감사드린 뒤 자리에서 일어나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후 존경의 의미로 오른쪽으로 돌아 물러갔다. 그리고 홀로 외딴곳에서 방일하지 않고 노력하고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머문 웃띠야 존자는 오래지 않아 좋은 가문의 아들들이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하는 목적인 위없는 청정범행의 완성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하여 머물렀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알았다. 웃띠야 존자는 아라한들 중의 한 분이 되었다.

 

ariyasuttaṃ (SN 47.17-성스러움 경)

383. “비구들이여, 이런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을 닦고 많이 행할 때(익힐 때), 그것은 성스러운 것이고 출리로 인도하며, 그리고 그대로 실천하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한다. 무엇이 넷인가? 여기에 한 비구가 있어, 몸에 대해서 몸을 따라가며(이어 보면서)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니고서, 세상에 대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 머문다. 느낌에서 ··· 마음에서 ··· 법에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니고서, 세상에 대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런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을 닦고 많이 행할 때, 그것은 성스러운 것이고 출리로 인도하며, 그리고 그대로 실천하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한다.”  

 

brahmasuttaṃ (SN 47.18-범천 경)
384. 한 때에 세존께서는 처음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하시고 나서 우루웰라의 네란자라 강둑에 있는 아자빨라니그로다(염소치기의 니그로다) 나무 아래에서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세존께서는 외딴곳에 가서 홀로 머무는 중에 문득 이런 생각이 마음에 일어났다. 
‘이 길은 중생들의 청정을 위한, 슬픔(수.愁)과 비탄(비.悲)을 건너기 위한, 고통(고.苦)과 고뇌(우.憂)를 사라지게 하고, 올바른 길에 이르고,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하나의 길이다. 그것은 바로 네 가지에 대한 마음챙김의 확립이다. 어떤 네 가지인가?

 

비구는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이어 보면서) 보면서 머물러야 한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닌 자는 세상에 대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난다. 느낌에서 느낌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러야 한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닌 자는 세상에 대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 머문다. 마음에서 마음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러야 한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닌 자는 세상에 대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 머문다. 법에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러야 한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닌 자는 세상에 대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 머문다. 이 길은 중생들의 청정을 위한, 슬픔(수.愁)과 비탄(비.悲)을 건너기 위한, 고통(고.苦)과 고뇌(우.憂)를 사라지게 하고, 올바른 길에 이르고,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하나의 길이다. 그것은 바로 네 가지에 대한 마음챙김의 확립이다.’라고.  

 

그때 사함빠띠 범천이 세존에 대해 마음으로써 마음을 잘 이해하여 알아 차린 후 마치 힘센 사람이 구부렸던 팔을 펴고 폈던 팔을 구부리는 것처럼 재빠르게 범천의 세상에서 사라져서 세존 앞에 나타났다. 사함빠띠 범천은 한쪽 어깨가 드러나게 윗옷을 입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합장하여 세존께 경의를 표한 뒤에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렇습니다, 선서시여!  이 길은 중생들의 청정을 위한, 슬픔(수.愁)과 비탄(비.悲)을 건너기 위한, 고통(고.苦)과 고뇌(우.憂)를 사라지게 하고, 올바른 길에 이르고,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하나의 길 즉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입니다. 어떤 네 가지입니까?


비구는 몸에 대해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러야 합니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닌 자는 세상에
대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 머뭅니다. 느낌에서 느낌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러야 합니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닌 자는 세상에 대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 머뭅니다. 마음에서 마음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러야 합니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닌 자는 세상에 대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 머뭅니다. 법에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러야 합니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닌 자는 세상에 대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 머뭅니다. 이 길은 중생들의 청정을 위한, 슬픔(수.愁)과 비탄(비.悲)을 건너기 위한, 고통(고.苦)과 고뇌(우.憂)를 사라지게 하고, 올바른 길에 이르고,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하나의 길 즉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입니다."라고. 

 

사함빠띠 범천은 이렇게 말씀드렸다. 이렇게 말씀드린 뒤에 다시 이렇게 말씀드렸다.

 

“태어남의 부서짐의 끝을 보는 사람, 이익과 연민을 위하는 유일한 길을 분명히 압니다.
그들은 이 길을 따라 예전에도 폭류를 건넜고, 이 길을 따라 건널 것이고, 건넙니다.”

 

sedakasuttaṃ (SN 47.19-세다까 경)

385. 한 때에 세존께서는 숨바에서 세다까라는 숨바들의 성읍에 머물고 계셨다. 거기에서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옛날에 대나무타기 곡예사가 곡예용 대나무를 세운 뒤에 제자인 메다까탈리까에게
‘오라, 착한 메다까탈리까여. 그대는 곡예용 대나무에 올라가서 나의 어깨 위에 서라.’라고 말했다. ‘알겠습니다, 스승님.’이라고, 비구들이여, 제자인 메다까탈리카는 대나무타기 곡예사에게 대답한 뒤 곡예용 대나무에 올라가서 스승의 어깨 위에 섰다. 그러자 비구들이여, 대나무타기 곡예사는 제자인 메다까탈리까에게 이렇게 말했다. 

‘착한 메다까탈리까여, 그대는 나를 보호하라. 나는 그대를 보호하겠다. 우리는 이렇게 서로서로를 지키고 서로서로를 보호하면서 우리의 곡예기술을 보여주고 돈을 벌고 안전하게 곡예용 대나무에서 내려 올 것이다.’라고. 
이렇게 말했을 때, 비구들이여, 제자인 메다까탈리까는 대나무타기 곡예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스승님, 이것은 바른 방법이 될 수 없습니다. 스승님, 스승님은 자신을 보호하십시오. 저는 저를 보호하겠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자기 스스로를 지키고 자기 스스로를 보호하면서 우리의 곡예기술을 보여주고 돈을 벌고 안전하게 곡예용 대나무에서 내려와야 합니다.’라고.

 

비구들이여, 제자 메다까탈리까가 스승에게 말한 것이 바로 바른 방법이다. 제자인 메다까탈리까가 스승에게 말한 것처럼, 비구들이여, ‘나는 나 자신을 보호할 것이다.’라고 하면서 비구는 마음챙김의 확립을 닦아야 한다. ‘나는 남을 보호할 것이다.’라고 하면서 비구는 마음챙김의 확립을 닦아야 한다. 비구들이여,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 자가 남을 보호하고, 남을 보호하는 자가 자기 자신을 보호한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떻게 자기 자신을 보호하면서 남을 보호하는가? 행하고 닦고 많이 익힘을 통해서이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자기 자신을 보호하면서 남을 보호한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남을 보호하면서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가? 인욕과 해치지 않음과 자애와 연민을 통해서이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남을 보호하는 자가 자기 자신을 보호한다. 비구들이여, ‘나는 나 자신을 보호할 것이다.’라고 하면서 마음챙김의 확립을 닦아야 한다. ‘나는 남을 보호할 것이다.’라고 하면서 비구는 마음챙김의 확립을 닦아야 한다. 비구들이여,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 자가 남을 보호하고, 남을 보호하는 자가 자기 자신을 보호한다.”

 

janapadakalyāṇīsuttaṃ (SN 47.20-나라의 미녀 경)
386.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숨바에서 세다까라는 숨바들의 성읍에서 머물고 계셨다 거기에서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라고. 그러자 비구들도 받들었다. “세존(존귀하신)이시여”라고.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참으로 ‘나라에서 제일가는 미녀, 나라에서 제일가는 미녀’라며, 비구들이여,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 것이다. 나라에서 제일가는 미녀가 앞에 나와 최고로 춤을 추고, 앞에 나와 최고로 노래한다면, ‘나라에서 제일가는 미녀가 춤추고 노래한다.’라며, 비구들이여,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 것이다. 그곳에 살기를 바라고 죽지 않기를 바라며 행복을 바라고 괴로움을 혐오하는 사람이 거기에 올 것이고, 어떤 사람이 그에게 이렇게 말 할 것이다.

‘여보시오, 그대는 이 기름으로 가득 찬 단지를 저 많은 군중과 나라에서 제일가는 미녀 사이로 날라야 합니다. 칼을 빼든 사람이 그대 뒤를 바싹 따라갈 것이오. 그대가 한 방울의 기름이라도 흘리면 그는 그대의 머리를 잘라버릴 것이오.’라고.

비구들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런데도 그 사람이 그 기름단지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함부로 가져가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여, 이 비유는 뜻을 바르게 전달하기 위해서 내가 만든 것이다. 그 뜻은 이와 같다. 비구들이여, 기름으로 가득 찬 단지는 몸에 대한 마음 챙김을 두고 한 말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이렇게 닦아야 한다. 

‘우리는 몸에 대한 마음챙김을 닦고, 많이 행하고, 정통하고, 철저히 실천하고, 따라 이루고, 축적하고, 노력을 잘 다지리라.’라고.

참으로,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이렇게 닦아야 한다.”

 


제2장 날란다 품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