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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의 모음 - 2. 기억해야 함 품(Sāraṇīya-vagga. AN6.11-20)

실론섬 2014. 7. 29. 02:46

제2장 기억해야 함 품 Sāraṇīya-vagga (AN 5.11-20)

 

paṭhamasāraṇīyasuttaṃ (AN 6.11-기억해야 하는 것 경1)

11. “비구들이여, 이런 여섯 가지 기억해야 하는 법들이 있다. 어떤 여섯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가 함께일 때든 혼자일 때든 동료수행자들에 대해서 자비와 함께하는 몸의 업(신업.身業)을 행한다. 이것도 기억해야 하는 법이다.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가 함께일 때든 혼자일 때든 동료수행자들에 대해서 자비와 함께하는 말의 업(구업.口業)을 행한다. 이것도 기억해야 하는 법이다.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가 함께일 때든 혼자일 때든 동료수행자들에 대해서 자비와 함께하는 마음의 업(의업.意業)을 행한다. 이것도 기억해야 하는 법이다.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가 적절하고 정당하고 법답게 얻은 것들은 그것이 비록 나누어 사용하지 못할 만큼 얻어진 발우에 담긴 적은 것일지라도 계를 중시하는 동료 수행자들과 공동으로 사용한다. 이것도 기억해야 하는 법이다.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가 끊어지지 않고, 얼룩지지 않고, 구속되지 않고, 현자들이 칭찬하고, (성취한 것을)움켜쥐지 않고, 삼매로 이끄는, 그런 계들을 함께일 때든 혼자일 때든 동료 수행자들과 함께 갖추어 머문다. 이것도 기억해야 하는 법이다.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가 성스럽고 출리(出離)로 인도하고 그대로 실천하면 괴로움의 소멸에 이끄는 견해에 대해서, 함께일 때든 혼자일 때든 동료 수행자들과 함께 그런 견해를 갖추어 머문다. 이것도 기억해야 하는 법이다.
비구들이여, 이런 여섯 가지 기억해야 하는 법들이 있다.”

 

dutiyasāraṇīyasuttaṃ (AN 6.12-기억해야 하는 것 경2)

12. “비구들이여, 이런 여섯 가지 기억해야 하는 법들은 사랑을 만드는 것이고, 공경을 만드는 것이고, 따르게 함으로, 갈등하지 않음으로, 함께함으로, 일치로 이끈다. 무엇이 여섯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동료 비구들과 함께 머물거나 혹은 혼자 머물거나 그들에 대해서 자비(자애)와 함께하는 몸의 업을 행한다. 이것도 사랑을 만드는 것이고, 공경을 만드는 것이고, 따르게 함으로, 갈등하지 않음으로, 함께함으로, 일치로 이끄는 기억 해야 하는 법이다.

 

다시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동료 비구들과 함께 머물거나 혹은 혼자 머물거나 그들에 대해서 자비와 함께하는 말의 업을 행한다. 이것도 사랑을 만드는 것이고, 공경을 만드는 것이고, 따르게 함으로, 갈등하지 않음으로, 함께함으로, 일치로 이끄는 기억 해야 하는 법이다.

다시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동료 비구들과 함께 머물거나 혹은 혼자 머물거나 그들에 대해서 자비와 함께하는 마음의 업을 행한다. 이것도 사랑을 만드는 것이고, 공경을 만드는 것이고, 따르게 함으로, 갈등하지 않음으로, 함께함으로, 일치로 이끄는 기억 해야 하는 법이다.

다시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적절하고 정당하고 법답게 얻은 것들은 그것이 비록 나누어 사용하지 못할만큼 얻어진 발우에 담긴 적은 것일지라도 계를 중시하는 동료 비구들과 공동으로 나누어서 사용한다. 이것도 사랑을 만드는 것이고, 공경을 만드는 것이고, 따르게 함으로, 갈등하지 않음으로, 함께함으로, 일치로 이끄는 기억 해야 하는 법이다.

다시,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동료 비구들과 함께일 때든 혼자 머물거나, 끊어지지 않고, 얼룩지지 않고, 구속되지 않고, 현자들이 칭찬하고, (성취한 것을)움켜쥐지 않고, 삼매로 이끄는, 그런 계들을 그들과 함께 갖추어 머문다. 이것도 사랑을 만드는 것이고, 공경을 만드는 것이고, 따르게 함으로, 갈등하지 않음으로, 함께함으로, 일치로 이끄는 기억 해야 하는 법이다.

다시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동료 비구들과 함께 머물거나 혹은 혼자 머물거나, 성스럽고 출리(出離)로 인도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자에게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바른 견해를 그들과 함께 갖추어 머문다. 이것도 사랑을 만드는 것이고, 공경을 만드는 것이고, 따르게 함으로, 갈등하지 않음으로, 함께함으로, 일치로 이끄는 기억 해야 하는 법이다.
비구들이여, 이런 여섯 가지 사랑을 만드는 것이고, 공경을 만드는 것이고, 따르게 함으로, 갈등하지 않음으로, 함께함으로, 일치로 이끄는 기억 해야 하는 법이 있다.

 

nissāraṇīyasuttaṃ (AN 6.13-벗어남 경)
13. “비구들이여, 여섯 가지 벗어남의 요소가 있다. 무엇이 여섯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비구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나에게 닦고, 많이 행하고, 정통하고, 철저히 실천하고, 따라 이루고, 축적하고, 노력을 잘 다진 자비에 의한 마음의 해탈[慈心解脫.자심해탈]이 있다. 그러나 나에게 분노는 마음을 사로잡아 머문다.’라고. 그에게 '그러지 마시오!'라고 말해야 한다. ‘존자여, 그렇게 말하지 마시오. 세존을 비방하지 마시오. 세존을 거짓으로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도반이여, '닦고, 많이 행하고, 정통하고, 철저히 실천하고, 따라 이루고, 축적하고, 노력을 잘 다진 자비에 의한 마음의 해탈을 얻은 사람에게 분노가 마음을 사로잡아 머물 것이다.'라는 것은 경우가 아니고, 여지가 없습니다. 이런 경우는 없습니다. 도반이여, 자비에 의한 마음의 해탈, 이것은 분노의 벗어남입니다.’라고.

 

다시,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비구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나에게 닦고, 많이 행하고, 정통하고, 철저히 실천하고, 따라 이루고, 축적하고, 노력을 잘 다진 연민에 의한 마음의 해탈[悲心解脫.비심해탈]이 있다. 그러나 나에게 폭력(잔인함)은 마음을 사로 잡아 머문다.'라고. 그에게 '그러지 마시오!'라고 말해야 한다. ‘존자여, 그렇게 말하지 마시오. 세존을 비방하지 마시오. 세존을 거짓으로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도반이여, '닦고, 많이 행하고, 정통하고, 철저히 실천하고, 따라 이루고, 축적하고, 노력을 잘 다진 연민에 의한 마음의 해탈을 얻은 사람에게 폭력이 마음을 사로잡아 머물 것이다.'라는 것은 경우가 아니고, 여지가 없습니다. 이런 경우는 없습니다. 도반이여, 연민에 의한 마음의 해탈, 이것은 폭력의 벗어남입니다.’라고. 

 

다시,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비구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나에게 닦고, 많이 행하고, 정통하고, 철저히 실천하고, 따라 이루고, 축적하고, 노력을 잘 다진 기뻐함에 의한 마음의 해탈[喜心解脫.희심해탈]이 있다. 그러나 나에게 불쾌는 마음을 사로잡아 머문다.'’라고. 그에게 '그러지 마시오!'라고 말해야 한다. ‘존자여, 그렇게 말하지 마시오. 세존을 비방하지 마시오. 세존을 거짓으로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도반이여, '닦고, 많이 행하고, 정통하고, 철저히 실천하고, 따라 이루고, 축적하고, 노력을 잘 다진 기뻐함에 의한 마음의 해탈을 얻은 사람에게 불쾌가 마음을 사로잡아 머물 것이다.'라는 것은 경우가 아니고, 여지가 없습니다. 이런 경우는 없습니다. 도반이여, 기뻐함에 의한 마음의 해탈, 이것은 불쾌의 벗어남입니다.’라고. 

 

다시,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비구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나에게 닦고, 많이 행하고, 정통하고, 철저히 실천하고, 따라 이루고, 축적하고, 노력을 잘 다진 평정에 의한 마음의 해탈[捨心解脫.사심해탈]이 있다. 그러나 여전히 탐욕은 마음을 사로잡아 머문다.’라고. 그에게 '그러지 마시오!'라고 말해야 한다. ‘존자여, 그렇게 말하지 마시오. 세존을 비방하지 마시오. 세존을 거짓으로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도반이여, '닦고, 많이 행하고, 정통하고, 철저히 실천하고, 따라 이루고, 축적하고, 노력을 잘 다진 평정에 의한 마음의 해탈을 얻은 사람에게 불쾌가 마음을 사로잡아 머물 것이다.'라는 것은 경우가 아니고, 여지가 없습니다. 이런 경우는 없습니다. 도반이여, 평정에 의한 마음의 해탈, 이것은 탐욕의 벗어남입니다.’라고. 

 

다시,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비구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나에게 닦고, 많이 행하고, 정통하고, 철저히 실천하고, 따라 이루고, 축적하고, 노력을 잘 다진 표상 없음에 의한 마음의 해탈[無相心解脫.무상심해탈]이 있다. 그러나 나에게 마음은 표상을 기억하고 있다(표상으로 따르는 의식이 있다).’라고. 그에게 '그러지 마시오!'라고 말해야 한다. ‘존자여, 그렇게 말하지 마시오. 세존을 비방하지 마시오. 세존을 거짓으로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도반이여, '닦고, 많이 행하고, 정통하고, 철저히 실천하고, 따라 이루고, 축적하고, 노력을 잘 다진 표상없음에 의한 마음의 해탈을 얻은 사람에게 마음은 표상을 기억하고 있다.'라는 것은 경우가 아니고, 여지가 없습니다. 이런 경우는 없습니다. 도반이여, 표상없음에 의한 마음의 해탈, 이것은 모든 표상의 벗어남입니다.’라고. 

 

*'표상 없음에 의한 마음의 해탈(animitta cetovimutti)'은 강한 위빳사나(balava-vipassana)를 뜻한다. [디가 니까야]를 암송하는 자들은 아라한과의 증득을 뜻한다고 설명한다. 이것은 탐욕의 표상 등과 형상의 표상 등과 항상함(常.상) 등의 표상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표상 없음(animitta)라고 한다.(AA.iii.347)

 

다시,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비구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나에게 '나는 있다.'가 제거되었고, '나는 이것이다.'라고 관찰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에게는 불확실함(의심)의 화살이 마음을 사로잡아 머문다.’라고. 그에게 '그러지 마시오!'라고 말해야 한다. ‘존자여, 그렇게 말하지 마시오. 세존을 비방하지 마시오. 세존을 거짓으로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도반이여, '나는 있다.'가 제거된 곳에서 '나는 이것이다.'라고 관찰하지 않는 자에게 의심과 불확실함의 화살이 마음을 사로잡아 머물 것이다.'라는 것은 경우가 아니고, 여지가 없습니다. 이런 경우는 없습니다. 도반이여, '나는 있다.'라는 자만의 뿌리 뽑힘, 이것은 의심과 불확실함의 화살의 벗어남입니다.’라고.

 

*'내가 있다(asmi)'는 내가 있다는 자만(asmimana)이다. '이 내가 있다(ayam ahamasmi)'라는 것은 다섯 가지 무더기(오취온)을 두고 '이것이 참으로 내가 있는 것이다.'라고 한다. 내가 있다는 자만이 없는 것과 이 내가 있다고 보지도 않는 것으로 아라한을 설한 것이다.(Ibid) 즉 아라한이 되었음에도 의심의 화살이 마음에 침입하여 사로잡아 머문다라고 비구가 말한 것이고, 그런 경우란 없다고 대답한 것이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여섯 가지 벗어남의 요소들이다.”

 

bhaddakasuttaṃ (AN 6.14-행운 경)
14. 거기에서 사리뿟따 존자는 비구들에게 말했다. “도반 비구들이여.”라고. 그러자 비구들도 대답했다. “도반이시여.”라고. 사리뿟따 존자는 이와 같이 말하였다.

“도반들이여, 비구는 복되게 죽지 못하고 복되게 임종하지 못하는 삶을 거듭 삽니다. 그러면
도반들이여, 비구는 어떻게 북되게 죽지 못하고 복되게 임종하지 못하는 삶을 거듭 삽니까?

여기, 도반들이여, 비구는 (세속적인) 일을 기뻐하고, 일을 즐기고, 일의 기쁨으로 바쁩니다. 말하기(대화)를 기뻐하고(좋아하고), 대화의 기쁨으로 바쁩니다(몰두합니다). 잠자기를 기뻐하고, 잠자기를 즐기고, 잠자는 기쁨으로 바쁩니다. 교제를 기뻐하고, 교제를 즐기고, 교제의 기쁨으로 바쁩니다. 무리 짓기를 기뻐하고, 무리 짓기를 즐기고, 무리 짓는 기쁨으로 바쁩니다. 희론을 기뻐하고, 희론을 즐기고, 희론의 기쁨으로 바쁩니다. 이렇게, 도반들이여, 비구는 복되게 죽지 못하고, 복되게 임종하지 못하는 삶을 거듭 삽니다. 이것이, 도반들이여, ‘비구는 불변하는 자기 존재가 있음[有身, 五取蘊]을 기뻐하고, 바르게 괴로움을 종식시키기 위해서 불변하는 자기 존재가 있음을 버리지 못했다.’라고 불립니다.

 

*'복되게 죽지 못한다(na bhaddalkam maranam hoti)'라는 것은 두려움에 떨면서 죽는 것을 뜻하고, 지옥에 재생연결식을 받는 자는 복되게 임종하지 못한다는 뜻이다.(AA.iii.348)

 

도반들이여, 비구는 복되게 죽고, 복되게 임종하는 삶을 거듭 삽니다. 그러면 도반들이여, 비구는 어떻게 복되게 죽고, 복되게 임종하는 삶을 거듭 삽니까?

여기, 도반들이여, 비구는 일을 기뻐하지 않고, 일을 즐기지 않고, 일의 기쁨으로 바쁘지 않습니다. 대화를 기뻐하지 않고, 대화를 즐기지 않고, 대화의 기쁨으로 바쁘지 않습니다. 잠자기를 기뻐하지 않고, 잠자기를 즐기지 않고, 잠자는 기쁨으로 바쁘지 않습니다. 교제를 기뻐하지 않고, 교제를 즐기지 않고, 교제의 기븜으로 바쁘지 않습니다. 무리 짓기를 기뻐하지 않고, 무리 짓기를 즐기지 않고, 무리 짓는 기쁨으로 바쁘지 않습니다. 희론을 기뻐하지 않고, 희론을 즐기지 않고, 희론의 기쁨으로 바쁘지 않습니다. 이렇게, 도반들이여, 비구는 복되게 죽고, 복되게 임종하는 삶을 거듭 삽니다. 이것을, 도반들이여, ‘비구는 열반을 기뻐하고, 바르게 괴로움을 종식시키기 위해서 불변하는 자기 존재가 있음을 버렸다.’라고 불립니다."

 

희론으로 바쁘고 희론을 좋아하는 어리석은 자는

위없은 유가안온(瑜伽安穩)인 열반을 얻지 못한다.  

희론을 부순 뒤에 희론하지 않는 경지를 즐기는 자는 

위없는 유가안온인 열반을 얻는다.

 

anutappiyasuttaṃ (AN 6.15-후회해야 함 경)

15. 거기에서 사리뿟따 존자는 비구들에게 말했다. “도반 비구들이여.”라고. 그러자 비구들도 대답했다. “도반이시여.”라고. 사리뿟따 존자는 이와 같이 말하였다. 사리뿟따 존자는 이와 같이 말하였다.  

 

“도반들이여, 비구는 죽을 때 후회하는(고통스러운) 삶을 거듭 삽니다. 그러면, 도반들이여, 비구는 어떻게 죽을 때 후회하는 삶을 거듭 삽니까?

여기, 도반들이여, 비구는 (세속적인) 일을 기뻐하고, 일을 즐기고, 일의 기쁨으로 바쁩니다. 말하기(대화)를 기뻐하고(좋아하고), 대화의 기쁨으로 바쁩니다(몰두합니다). 잠자기를 기뻐하고, 잠자기를 즐기고, 잠자는 기쁨으로 바쁩니다. 교제를 기뻐하고, 교제를 즐기고, 교제의 기쁨으로 바쁩니다. 무리 짓기를 기뻐하고, 무리 짓기를 즐기고, 무리 짓는 기쁨으로 바쁩니다. 희론을 기뻐하고, 희론을 즐기고, 희론의 기쁨으로 바쁩니다. 이렇게, 도반들이여, 비구는 죽을 때 후회하는 삶을 거듭 삽니다. 이것이, 도반들이여, ‘비구는 불변하는 자기 존재가 있음[有身, 五取蘊]을 기뻐하고, 바르게 괴로움을 종식시키기 위해서 불변하는 자기 존재가 있음을 버리지 않았다.’라고 불립니다.

 

도반들이여, 비구는 죽을 때 후회하지 않는 삶을 거듭 삽니다. 그러면, 도반들이여, 비구는 어떻게 죽을 때 후회하지 않는 삶을 거듭 삽니까?
여기, 도반들이여, 비구는 일을 기뻐하지 않고, 일을 즐기지 않고, 일의 기쁨으로 바쁘지 않습니다. 대화를 기뻐하지 않고, 대화를 즐기지 않고, 대화의 기쁨으로 바쁘지 않습니다. 잠자기를 기뻐하지 않고, 잠자기를 즐기지 않고, 잠자는 기쁨으로 바쁘지 않습니다. 교제를 기뻐하지 않고, 교제를 즐기지 않고, 교제의 기븜으로 바쁘지 않습니다. 무리 짓기를 기뻐하지 않고, 무리 짓기를 즐기지 않고, 무리 짓는 기쁨으로 바쁘지 않습니다. 희론을 기뻐하지 않고, 희론을 즐기지 않고, 희론의 기쁨으로 바쁘지 않습니다. 이렇게, 도반들이여, 비구는 죽을 때 후회하지 않는 삶을 거듭 삽니다. 이것이, 도반들이여, ‘비구는 열반을 기뻐하고, 바르게 괴로움을 종식시키기 위해서 불변하는 자기 존재가 있음을 버렸다.’라고 불립니다."

 

희론으로 바쁘고 희론을 좋아하는 어리석은 자는
위없은 유가안온(瑜伽安穩)인 열반을 얻지 못한다.  
희론을 부순 뒤에 희론하지 않는 경지를 즐기는 자는 
위없는 유가안온인 열반을 얻는다.

 

nakulapitusuttaṃ (AN 6.16-나꿀라삐따의 경)

16. 한 때에 세존께서는 박가에서 수수마라기리의 베사깔라 숲에 있는 사슴동산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나꿀라삐따 장자가 병에 걸려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자 나꿀라삐따 장자 부인이 나꿀라삐따 장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장자여, 그대는 애착을 가지고 죽지 마십시오(그대는 바라는 자로 죽지 마십시오). 애착을 가지고 죽는 것은 괴로움입니다. 세존께서는 애착을 가지고 죽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장자여, 그대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아내 나꿀라마따는 아이들을 키우고 집안 일을 돌볼 수 없을 것이다.’라고. 그러나, 장자여, 그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장자여, 나는 목화에서 실을 만들고 양털을 땋고 다듬는데 능숙합니다. 장자여, 나는 그대가 죽은 뒤에 아이들을 키우고 집안 일을 돌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장자여, 그대는 애착을 가지고 죽지 마십시오. 애착을 가지고 죽는 것은 괴로움입니다. 세존께서는 애착을 가지고 죽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장자여, 그대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아내 나꿀라마따가 재혼을 할것이다.’라고. 그러나, 장자여, 그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장자여, 우리가 16년을 재가에서 범행을 고르게 실천한 것을 그대도 알고, 나도 압니다. 그러므로, 장자여, 그대는 애착을 가지고 죽지 마십시오. 애착을 가지고 죽는 것은 괴로움입니다. 세존께서는 애착을 가지고 죽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장자여, 그대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아내 나꿀라마따는 세존을 친견하고자 하지 않고 비구 승가를 친견하고자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그러나, 장자여, 그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장자여, 그대가 죽은 뒤에 나는 세존을 더욱 친견하고자 할 것이고 비구 승가를 더욱 친견하고자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장자여, 그대는 애착을 가지고 죽지 마십시오. 애착을 가지고 죽는 것은 괴로움입니다. 세존께서는 애착을 가지고 죽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장자여, 그대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아내 나꿀라마따는 계에 충실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그러나, 장자여, 그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장자여, 그분 세존에게 계에 충실한 흰옷 입은 청신녀가 있는 한 나는 그중의 한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의심이나 혼란이 있다면,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께서 박가에서 수수마라기리의 베사깔라 숲에 있는 사슴동산에 머물고 계시니, 그분 세존에게 가서 질문을 드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장자여, 그대는 애착을 가지고 죽지 마십시오. 애착을 가지고 죽는 것은 괴로움입니다. 세존께서는 애착을 가지고 죽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장자여, 그대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아내 나꿀라마따는 안으로 마음의 사마타를 얻지 못할 것이다.’라고. 그러나, 장자여, 그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장자여, 그분 세존에게 안으로 마음의 사마타를 얻은 흰옷 입은 청신녀가 있는 한 나는 그중의 한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의심이나 혼란이 있다면,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께서 박가에서 수수마라기리의 베사깔라 숲에 있는 사슴동산에 머물고 계시니, 그분 세존에게 가서 질문을 드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장자여, 그대는 애착을 가지고 죽지 마십시오. 애착을 가지고 죽는 것은 괴로움입니다. 세존께서는 애착을 가지고 죽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장자여, 그대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아내 나꿀라마따는 이 법과 율에서 확고함을 얻고, 심오함을 얻고, 위안을 얻고, 의심을 건너고, 불확실에서 벗어나고, 자기 확신을 얻고, 스승의 가르침에서 다른 스승을 의지하지 않고 머물지 않을 것이다.’라고. 그러나, 장자여,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장자여, 그분 세존에게 이 법과 율에서 확고함을 얻고, 심오함을 얻고, 위안을 얻고, 의심을 건너고, 불확실에서 벗어나고, 자기 획신을 얻고, 다른 스승을 의지하지 않고 스승의 가르침에서 머무는 흰옷 입은 청신녀가 있는 한 나는 그중의 한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의심이나 혼란이 있다면,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께서 박가에서 수수마라기리의 베사깔라 숲에 있는 사슴동산에 머물고 계시니, 그분 세존에게 가서 질문을 드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장자여, 그대는 애착을 가지고 죽지 마십시오. 애착을 가지고 죽는 것은 괴로움입니다. 세존께서는 애착을 가지고 죽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장자의 부인 나꿀라마따로부터 이런 말을 들은 나꿀라삐따 장자의 병은 원인으로부터 진정되고, 나꿀라삐따 장자는 그 병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 병에서 일어났다. 나꿀라삐따 장자는 병에서 일어난 뒤  오래지 않아서 병으로 쇠약해진 몸을 지팡이에 의지해서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나꿀라삐따 장자에게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그대에게 연민하고 이익을 바라고 말하고 가르치는그대의 아내 나꿀라마따가 있으니, 장자여, 그대에게 이득이다. 참으로 큰 이득이다. 장자여, 나에게 계에 충실한 흰옷을 입은 청신녀가 있는 한 그대의 아내 나꿀라마따는 그중의 한 사람이다. 장자여, 나에게 안으로 마음의 사마타를 얻은 흰옷을 입은 청신녀가 있는 한 그대의 아내 나꿀라마따는 그중의 한 사람이다. 장자여, 나에게 이 법과 율에서 확고함을 얻고, 심오함을 얻고, 위안을 얻고, 의심을 건너고, 불확실에서 벗어나고, 자기 확신을 얻고, 다른 스승을 의지하지 않고 스승의 가르침에서 머무는 흰옷을 입은 청신녀가 있는 한 그대의 아내 나꿀라마따는 그중의 한 사람이다. 그대에게 연민하고 이익을 바라고 말하고 가르치는 그대의 아내 나꿀라마따가 있으니, 장자여, 그대에게 이득이고, 참으로 큰 이득이다.”라고.

 

soppasuttaṃ (AN 6.17-잠 경)
17. 한 때에 세존께서는 사왓티의 제따 숲에 있는 아나타삔디카 승원에 머물고 계셨다. 저녁에 홀로 머묾에서 나온 세존께서는 집회소로 가셨다. 가서는 마련된 자리에 앉으셨다. 저녁에 홀로 머묾에서 나온
사리뿟따 존자도 집회로 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곁에 앉았다. ··· 마하목갈라나 존자도 ··· 마하깟사빠 존자도 ··· 마하깟짜야나 존자도 ··· 마하꼿티까 존자도 ··· 마하쭌다 존자도 ··· 마하깝삐나 존자도 ··· 아누룻다 존자도 ··· 레와따 존자도 ··· 저녁에 홀로 머묾에서 나온 아난다 존자도 집회소로 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곁에 앉았다. 그리고 세존께서는 밤새 앉아 시간을 보낸 뒤 자리에서 일어나 거처로 돌아가셨다. 세존께서 떠난지 오래지 않아서 그 존자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각자의 거처로 돌아갔다. 그때 출가한지 얼마 되지 않고 근래에 이 법과 율에 들어온 신참 비구들은 해가 떴는데도 코를 골며 잠들어 있었다. 세존께서는 청정하고 인간을 넘어선 신성한 눈[天眼]으로 해가 떴는데도 코를 골며 잠자고 있는 그 비구들을 보셨다. 보고는 집회소로 가셨다. 가서는 마련된 자리에 앉으셨다. 자리에 앉으셔서 세존께서는 그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사리뿟따는 어디에 있는가? 마하목갈라나는 어디에 있는가? 마하깟사빠는 어디에 있는가? 마하깟짜야나는 어디에 있는가? 마하꼿띠까는 어디에 있는가? 마하쭌다는 어디에 있는가? 마하깝삐나는 어디에 있는가? 아누룻다는 어디에 있는가? 레와따는 어디에 있는가? 아난다는 어디에 있는가? 참으로, 비구들이여, 이 장로 제자들은 어디로 갔는가?”라고.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떠난지 오래지 않아서 그 존자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각자의 거처로 돌아갔습니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장로 비구가 아니다. 신참 비구들이 어떻게 해가 떴는데도 코를 골며 잠을 자는가? 그런데 비구들이여,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머리에 의식을 치르고 왕위에 오른 끄샤뜨리야 왕이 원하는 만큼 누워있는 즐거움, 옆구리를 대고 있는 즐거움, 조는 즐거움에 빠져 머무는 데도 죽을 때까지 왕국을 통치하거나, 나라에 사랑하고 마음에 들어하는 사람이 있다(백성들이 사랑하고 마음에 들어 한다).’라고 보거나 들은 적이 있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훌륭하다, 비구들이여. 나도 ‘머리에 의식을 치르고 왕위에 오른 끄샤뜨리야 왕이 원하는 만큼 누워있는 즐거움, 옆구리를 대고 있는 즐거움, 조는 즐거움에 빠져 머무는 데도 죽을 때까지 왕국을 통치하거나, 나라에 사랑하고 마음에 들어하는 사람이 있다.’라고 보거나 듣지 못했다."

 

비구들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왕국의 관리가 원하는 만큼 누워있는 즐거움, 옆구리를 대고 있는 즐거움, 조는 즐거움에 빠져 머무는 데도 죽을 때까지 영지를 관리하거나 ··· 세습 직위를 누리는 자가 원하는 만큼 누워있는 즐거움, 옆구리를 대고 있는 즐거움, 조는 즐거움에 빠져 머무는 데도 죽을 때까지 세습 직위를 누리거나 ···군대의 대장군이 원하는 만큼 누워있는 즐거움, 옆구리를 대고 있는 즐거움, 조는 즐거움에 빠져 머무는 데도 부하들이 그를 따르거나 ··· 촌장이 원하는 만큼 누워있는 즐거움, 옆구리를 대고 있는 즐거움, 조는 즐거움에 빠져 머무는 데도 죽을 때까지 마을을 이끌거나 ··· 조합장이 원하는 만큼 누워있는 즐거움, 옆구리를 대고 있는 즐거움, 조는 즐거움에 빠져 머무는데도 죽을 때까지 조합을 관리하거나, 조합에 사랑하고 마음에 들어하는 사람이 있다.'라고 보거나 들은 적이 있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훌륭하다, 비구들이여, 나도 ‘조합장이 원하는 만큼 누워있는 즐거움, 옆구리를 대고 있는 즐거움, 조는 즐거움에 빠져 머무는 데도 죽을 때까지 조합을 관리하거나, 조합에 사랑하고 마음에 들어하는 사람이 있다.’라고 이렇게 보거나 듣지 못했다.

 

그런데 비구들이여,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원하는 만큼 누워있는(잠자는) 즐거움, 옆구리를 대고 있는 즐거움, 조는 즐거움에 빠져 머물고, 감각기능들의 문을 보호하지 않고, 음식의 적당량을 모르고, 깨어있음에 전념하지 않고, 선법들을 위해 통찰하지 않고, 밤낮으로 깨달음의 편에 있는 법들(보리분법.菩提分法)을 닦지 않는 사문이나 바라문이 모든 번뇌가 다하여 아무 번뇌가 없는 마음의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바로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하여 머문다.’라고 보거나 들은 적이 있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훌륭하다, 비구들이여. 나도 ‘원하는 만큼 누워있는 즐거움, 옆구리를 대고 있는 즐거움, 조는 즐거움에 빠져 머물고, 감각기능들의 문을 보호하지 않고, 음식의 적당량을 모르고, 깨어있음에 전념하지 않고, 선법들을 위해 통찰하지 않고, 밤낮으로 깨달음의 편에 있는 법들을 닦지 않는 사문이나 바라문들이 모든 번뇌가 다하여 아무 번뇌가 없는 마음의 해탈과 지혜에 의한해탈을 바로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하여 머문다.’라고 이렇게 보거나 듣지 못했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이렇게 닦아야 한다. ‘감각기능들의 문을 보호하고, 음식의 적당량을 알고, 깨어있음에 전념하고, 선법들을 위해 통찰하고, 밤낮으로 깨달음의 편에 있는 법들을 닦으며 머물리라.’라고. 참으로,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이렇게 닦아야 한다.”

 

macchabhandasuttam (AN6.18-물고기를 잡음 경) 
18. 한 때에 세존께서는 많은 비구 대중과 함께 꼬살라에서 유행하셨다. 세존께서는 대로를 따라 걷고 계시다가 어느 지역에서 어부가 그물로 물고기를 계속해서 잡아서 팔고 있는 것을 보셨다. 그것을 보시고 길을 벗어나 어떤 나무아래 마련된 자리에 앉으셨다. 자리에 앉아서 세존께서는 비구들을 불러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저 어부가 그물로 물고기를 계속해서 잡아서 팔고 있는 것을 보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어부가 그물로 물고기를 계속해서 잡아서 파는 이러한 업과 이러한 생계 수단으로 코끼리를 타고 다니거나 말을 타고 다니거나 마차를 타고 다니거나 수레를 타고 다니거나 재물을 즐기거나 많은 재물을 축적하면서 산다.’라고 보거나 들은 적이 있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훌륭하다, 비구들이여, 나도 ‘어부가 그물로 물고기를 계속해서 잡아서 파는 이러한 업과 이러한 생계 수단으로 코끼리를 타고 다니거나 말을 타고 다니거나 마차를 타고 다니거나 수레를 타고 다니거나 재물을 즐기거나 많은 재물을 축적하면서 산다.’라고 보거나 들은 적이 없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비구들이여, 죽어가고 죽음으로 내몰린 물고기들을 나쁜 마음으로 쳐다보기 때문이다. 그래서는 그는 코끼리를 타고 다니지도 못하고 말을 타고 다니지도 못하고 마차를 타고 다니지도 못하고 수레를 타고 다니지도 못하고 재물을 즐기지도 못하고 많은 재물을 축적하면서 살지도 못한다.


비구들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소를 도살하는 자가 소를 계속해서 도살해서 파는 ···
‘양을 도살하는 자가 양을 계속해서 도살해서 파는 ··· '돼지를 도살하는 자가 돼지를 계속해서 도살해서 파는 ···  '새를 잡는 자가 새를 계속해서 잡아서 파는 ··· '사슴을 잡는 자가 사슴을 계속해서 잡아서 파는 이러한 업과 이러한 생계 수단으로 코끼리를 타고 다니거나 말을 타고 다니거나 마차를 타고 다니거나 수레를 타고 다니거나 재물을 즐기거나 많은 재물을 축적하면서 산다.’라고 보거나 들은 적이 있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훌륭하다, 비구들이여. 나도 사슴을 잡는 자가 사슴을 계속해서 잡아서 파는 이러한 업과 이러한 생계 수단으로 코끼리를 타고 다니거나 말을 타고 다니거나 마차를 타고 다니거나 수레를 타고 다니거나 재물을 즐기거나 많은 재물을 축적하면서 산다.’라고 보거나 들은 적이 없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비구들이여, 죽어가고 죽음으로 내몰린 사슴들을 나쁜 마음으로 쳐다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코끼리를 타고 다니지도 못하고 말을 타고 다니지도 못하고 마차를 타고 다니지도 못하고 수레를 타고 다니지도 못하고 재물을 즐기지도 못하고 많은 재물을 축적하면서 살지도 못한다. 


비구들이여, 죽어가고 죽음으로 내몰린 동물들을 나쁜 마음으로 쳐다보는 자는 코끼리를 타고 다니지도 못하고 말을 타고 다니지도 못하고 마차를 타고 다니지도 못하고 수레를 타고 다니지도 못하고 재물을 즐기지도 못하고 많은 재물을 축적하면서 살지도 못한다. 그러니 죽어가고 죽음으로 내몰린 인간을 나쁜 마음으로 쳐다보는 것이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비구들이여, 참으로 그에게는 오랜 세월을 해로움이 있고 괴로움이 있으며,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는 괴로운 곳, 비참한 곳, 험난한 곳, 지옥에 태어난다.”

 

paṭhamamaraṇassatisuttaṃ (AN 6.19-죽음에 대한 마음챙김 경1)

19. 한 때에 세존께서는 냐디까에서 벽돌집에 머물고 계셨다. 거기에서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라고. 그러자 비구들도 받들었다. "세존(존귀하신)이시여" 라고.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을 닦고 많이 행할 때(익히면) 큰 결실이 있고, 큰 이익이 있으며, 불사(不死)에 들어가고, 불사가 완성된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을 닦아야 한다."라고. 


이렇게 말씀하셨을 때 어떤 비구가 세존에게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죽음에 대한 마음 챙김을 닦습니다.”

“비구여, 그렇다면 그대는 어떻게 죽음에 대한 마음 챙김을 닦는가?”

“여기, 세존이시여,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밤이나 낮 동안에(하루 밤낮) 죽을지도 모른다. 세존의 가르침을 숙고해야 한다. 나는 많이 행할 것이다.’라고. 이렇게, 세존이시여, 저는 죽음에 대한 마음 챙김을 닦습니다."

 

다른 비구도 세존에게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도 죽음에 대한 마음 챙김을 닦습니다.”

“비구여, 그렇다면 그대는 어떻게 죽음에 대한 마음 챙김을 닦는가?”

“여기, 세존이시여,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낮 동안에(하루 낮밖에) 죽을지도 모른다. 세존의 가르침을 숙고해야 한다. 나는 많이 행할 것이다.’라고. 이렇게, 세존이시여, 저는 죽음에 대한 마음 챙김을 닦습니다."

 

다른 비구도 세존에게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도 죽음에 대한 마음 챙김을 닦고 있습니다.”

“비구여, 그렇다면 그대는 어떻게 죽음에 대한 마음 챙김을 닦는가?”

“여기, 세존이시여,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한 번 탁발 음식을 먹는 사이에 죽을지도 모른다. 세존의 가르침을 숙고해야 한다. 나는 많이 행할 것이다.’라고. 이렇게, 세존이시여, 저는 죽음에 대한 마음 챙김을 닦습니다."

 

다른 비구도 세존에게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도 죽음에 대한 마음 챙김을 닦고 있습니다.”

“비구여, 그렇다면 그대는 어떻게 죽음에 대한 마음 챙김을 닦는가?”

“여기, 세존이시여,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네다섯 숟갈의 음식을 씹고 삼키는 사이에 죽을지도 모른다. 세존의 가르침을 숙고해야 한다. 나는 많이 행할 것이다.’라고. 이렇게, 세존이시여, 저는 죽음에 대한 마음 챙김을 닦습니다."

 

다른 비구도 세존에게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도 죽음에 대한 마음 챙김을 닦고 있습니다.”

“비구여, 그렇다면 그대는 어떻게 죽음에 대한 마음 챙김을 닦는가?”

“여기, 세존이시여,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한 숟갈의 음식을 씹고 삼키는 사이에 죽을지도 모른다. 세존의 가르침을 숙고해야 한다. 나는 많이 행할 것이다.’라고. 이렇게, 세존이시여, 저는 죽음에 대한 마음 챙김을 닦습니다."


다른 비구도 세존에게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도 죽음에 대한 마음 챙김을 닦고 있습니다.”

“비구여, 그렇다면 그대는 어떻게 죽음에 대한 마음 챙김을 닦는가?”

“여기, 세존이시여,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들이쉰 숨을 네쉬거나 내쉰 숨을 들이쉬는 사이에 죽을지도 모른다. 세존의 가르침을 숙고해야 한다. 나는 많이 행할 것이다.’라고. 이렇게, 세존이시여, 저는 죽음에 대한 마음 챙김을 닦습니다."

 

비구들이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리자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어떤 비구는 이렇게 죽음에 대한 마음 챙김을 닦는다. '나는 밤이나 낮 동안에 죽을지도 모른다. 세존의 가르침을 숙고해야 한다. 나는 많이 행할 것이다.’라고.

 

비구들이여, 어떤 비구는 이렇게 죽음에 대한 마음 챙김을 닦는다. '나는 낮 동안에 죽을지도 모른다. 세존의 가르침을 숙고해야 한다. 나는 많이 행할 것이다.’라고.

 

비구들이여, 어떤 비구는 이렇게 죽음에 대한 마음 챙김을 닦는다. '나는 한 번 탁발 음식을 먹는 사이에 죽을지도 모른다. 세존의 가르침을 숙고해야 한다. 나는 많이 행할 것이다.’라고.

 

비구들이여, 어떤 비구는 이렇게 죽음에 대한 마음 챙김을 닦는다. '나는 네다섯 숟갈의 음식을 씹고 삼키는 사이에 죽을지도 모른다. 세존의 가르침을 숙고해야 한다. 나는 많이 행할 것이다.’라고.

 

비구들이여, 어떤 비구는 이렇게 죽음에 대한 마음 챙김을 닦는다. '나는 한 숟갈의 음식을 씹고 삼키는 사이에 죽을지도 모른다. 세존의 가르침을 숙고해야 한다. 나는 많이 행할 것이다.’라고.

 

비구들이여, 어떤 비구는 이렇게 죽음에 대한 마음 챙김을 닦는다. '나는 들쉰 숨을 내쉬거나 내쉰 숨을 들이쉬는 사이에 죽을지도 모른다. 세존의 가르침을 숙고해야 한다. 나는 많이 행할 것이다.’라고. 비구들이여, 이 비구들은 부지런한(불방일.不放逸) 자로 머물고, 번뇌를 소멸하기 위하여 죽음에 대한 마음 챙김을 빠르게 닦는다고 불린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이렇게 닦아야 한다.

'우리는 부지런한 자로 머물 것이다. 번뇌를 소멸하기 위하여 죽음에 대한 마음 챙김을 빠르게 닦을 것이다.'라고.

이렇게,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닦아야 한다."

 

dutiyamaraṇassatisuttaṃ (AN 6.20-죽음에 대한 사띠 경2)

20. 한 때에 세존께서는 나디까에서 벽돌집에 머물고 계셨다. 거기에서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라고. 그러자 비구들도 받들었다. "세존(존귀하신)이시여" 라고.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죽음에 대한 마음 챙김을 닦고 많이 행할 때 큰 결실이 있고, 큰 이익이 있다. 불사(不死)에 들어감이고, 불사의 완성이다. 비구들이여,  죽음에 대한 마음 챙김을 어떻게 닦고 어떻게 많이 행할 때 큰 결실이 있고, 큰 이익이 있으며, 불사(不死)에 들어가고, 불사가 완성되하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낮이 가고 밤이 왔을 때 이렇게 숙고한다.

‘내게 죽음을 가져올 여러 조건이 있다. 뱀이 나를 물 수도 있고, 전갈이 나를 물 수도 있고, 지네가 나를 물 수도 모른다. 그것으로 인해 나는 죽을 수 있고, 그것이 나에게 장애가 될 수도 있다. 발이 걸려 넘어질 수도 있고, 먹은 음식이 탈이 날 수도 있고, 담즙이 불편하게 할 수도 있고, 점액이 불편하게 할 수도 있고, 칼 같은 바람이 나를 불편하게 할 수도 있다. 그것으로 인해 나는 죽을 수 있고, 그것이 나에게 장애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비구는 이렇게 숙고해야 한다. ‘내가 이 밤에 죽게 되면 나에게 장애가 되는 아직 제거되지 않은 악한 불선법(不善法)들이 나에게 있는 것은 아닌가?'라고.


만약, 비구들이여, 비구가 자신을 되돌아 보아 ’내가 이 밤에 죽게 되면 나에게 장애가 되는 아직 제거되지 않은 악한 불선법(不善法)들이 나에게 있다.‘라고 알게 되면, 비구들이여, 그 비구는 그 악한 불선법(不善法)들을 제거하기 위해 특별한 관심과 정진과 분발과 열정과 마음 챙김과 알아차림을 행해야 한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옷이 불타거나 머리가 불타는 사람은 오직 옷이나 머리의 불을 끄기 위해서 특별한 관심과 정진과 노력과 애씀과 열정과 마음 챙김과 알아차림을 행할 것이다. 이처럼, 비구들이여, 그 비구는 오직 그 악한 불선법(不善法)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특별한 관심과 정진과 노력과 애씀과 열정과 마음 챙김과 알아차림을 행해야 한다.

 

만약, 비구들이여, 비구가 자신을 되돌아 보아 ‘내가 이 밤에 죽게 되면 나에게 장애가 되는 아직 제거되지 않은 악한 불선법(不善法)들이 나에게 없다.’라고 알게 되면 그 비구는 희열과 환희로 머물고 선법(善法)들에 대해 밤낮으로 계속해서 닦으면서 머물러야 한다.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밤이 지나고 낮이 돌아왔을 때 이렇게 숙고한다. 

‘내게 죽음을 가져올 여러 조건이 있다. 뱀이 나를 물 수도 있고, 전갈이 나를 물 수도 있고, 지네가 나를 물 수도 있다. 그것으로 인해 나는 죽을 수 있고, 그것이 나에게 장애가 될 수도 있다. 발이 걸려 넘어질 수도 있고, 먹은 음식이 탈이 날 수도 있고, 담즙이 불편하게 할 수도 있고, 점액이 불편하게 할 수도 있고, 칼 같은 바람이 나를 불편하게 할 수도 있다. 그것으로 인해 나는 죽을 수 있고, 그것이 나에게 장애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비구는 이렇게 숙고해야 한다. ‘내가 오늘 낮에 죽게 되면 나에게 장애가 되는 아직 제거되지 않은 악한 불선법(不善法)들이 나에게 있는 것은 아닌가?'라고.

 

만약, 비구들이여, 비구가 자신을 되돌아 보아, ’내가 오늘 낮에 죽게 되면 나에게 장애가 되는 아직 제거되지 않은 악한 불선법(不善法)들이 나에게 있다.‘라고 알게 되면 그는 그 악한 불선법(不善法)들이 제거하기 위해 특별한 관심과 정진과 분발과 열정과 마음 챙김과 알아차림을 행해야 한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옷이 불타거나 머리가 불타는 사람은 오직 옷이나 머리의 불을 끄기 위해서 특별한 관심과 정진과 노력과 애씀과 열정과 마음 챙김과 알아차림을 행할 것이다. 이처럼, 비구들이여, 그 비구는 오직 그 악한 불선법(不善法)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특별한 관심과 정진과 노력과 애씀과 열정과 마음 챙김과 알아차림을 행해야 한다.


만약, 비구들이여, 비구가 자신을 되돌아 보아 ‘내가 오늘 낮에 죽게 되면 나에게 장애가 되는 아직 제거되지 않은 악한 불선법(不善法)들이 나에게 없다.’라고 알게 되면 그 비구는 희열과 환희로 머물고 선법(善法)들에 대해 밤낮으로 계속해서 닦으면서 머물러야 한다. 

비구들이여, 죽음에 대한 마음 챙김을 이렇게 닦고 이렇게 많이 행할 때 큰 결실이 있고, 큰 이익이 있으며 불사로 들어가고, 불사가 완성된다.”


제2장 기억해야 함 품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