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알리어 경전/앙굿따라 니까야

여섯의 모음 - 3. 위 없음 품(Anuttariya-vagga. AN6.21-30)

실론섬 2014. 7. 29. 14:32

제3장 위없음 품 Anuttariya-vagga (AN 6.21-30)

 

sāmakasuttam (AN 6.21-사마까 경)

21. 한 때에 세존께서는 삭까에서 사마가마까의 호수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밤이 아주 깊었을 때 어떤 천신이 멋진 모습을 하고 온 호수를 환하게 밝히면서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곁에 섰다. 천신은 한 곁에 서서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세 가지 법은 비구를 쇠퇴로 인도합니다. 무엇이 셋인가요? 

잡다한 일(세속적인 일)하기를 좋아하는 것과 말하기를 좋아하는 것과 잠자기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러한 세 가지 법은 비구를 쇠퇴로 인도합니다.”
천신은 이와 같이 말하였고 스승께서는 그것에 동의를 하셨다. 천신은 ‘스승께서 나의 말에 동의를 하셨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공경의 의미로 세존의 오른쪽으로 돌아 거기서 사라졌다.


세존께서 그 밤이 지나자 비구들을 불러서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어젯밤 밤이 아주 깊었을 때 어떤 천신이 멋진 모습을 하고 온 호수를 환하게 밝히면서 나에게 다가왔다. 다가와서는 나에게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곁에 섰다. 한 곁에 서서 천신은 나에게 이와 같이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세 가지 법은 비구를 쇠퇴로 인도합니다. 무엇이 셋인가요? 잡다한 일하기를 좋아하는 것과 말하기를 좋아하는 것과 잠자기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러한 세 가지 법은 비구를 쇠퇴로 인도합니다.’천신은 이와 같이 말하였고 나는 그것에 동의를 하였다. 천신은 ‘스승께서 나의 말에 동의를 하셨구나.’라고 생각하면서 나에게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오른쪽으로 돌아 거기서 사라졌다. 

비구들이여, 천신들조차도 선한 법들로부터 쇠퇴하게 된다고 인정하는 그런 것들은 참으로 그대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 없고 손해가 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나는 쇠퇴로 인도하는 세 가지 다른 법을 더 설하리라. 이제 그것을 들어라. 듣고 마음에 잘 새겨라. 나는 설할 것이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비구들은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떠한 세 가지가 쇠퇴하는 법인가?

무리 짓기를 좋아하는 것과 훈계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과 나쁜 친구와 교제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세 가지가 쇠퇴하는 법이다.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과거에 선한 법들로부터 쇠퇴한 자들은 모두 이러한 여섯 가지 법 때문에 쇠퇴하였다.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미래에 선한 법들로부터 쇠퇴할 자들은 모두 이러한 여섯 가지 법 때문에 쇠퇴할 것이다.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현재에 선한 법들로부터 쇠퇴하는 자들은 모두 이러한 여섯 가지 법 때문에 쇠퇴한다.”

aparihāniyasuttam (AN 6.22-쇠퇴하지 않음 경)

22. “비구들이여, 여섯 가지 쇠퇴하지 않는 법을 설하리라. 이제 그것을 들어라. 듣고 마음에 잘 새겨라. 나는 설할 것이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비구들은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여섯 가지 쇠퇴하지 않는 법인가?
잡다한 일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 말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 잠자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 무리 짓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 훈계를 잘 받아들이는 것, 좋은 친구와 사귀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여섯 가지 쇠퇴하지 않는 법이다.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과거에 선한 법들로부터 쇠퇴하지 않은 자들은 모두 이러한 여섯 가지 법 때문에 쇠퇴하지 않았다.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미래에 선한 법들로부터 쇠퇴하지 않을 자들은 모두 이러한 여섯 가지 법 때문에 쇠퇴하지 않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현재에 선한 법들로부터 쇠퇴하지 않는 자들은 모두 이러한 여섯 가지 법 때문에 쇠퇴하지 않는다.”

bhayasuttaṃ (AN 6.23-두려움 경)

23. “비구들이여, 두려움이라는 이것은 감각적 쾌락을 말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괴로움이라는 이것은 감각적 쾌락을 말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병이라는 이것은 감각적 쾌락을 말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종기라는 이것은 감각적 쾌락을 말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결박이라는 이것은 감각적 쾌락을 말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진흙탕(수렁)이라는 이것은 감각적 쾌락을 말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왜 두려움이라는 이것이 감각적 쾌락을 말하는 것인가?

비구들이여, 감각적 쾌락에 빠지고 탐욕에 묶여서 사람들은 금생에도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내생에도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비구들이여, 두려움이라는 이것이 감각적 쾌락을 말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왜 괴로움이라는 이것이 감각적 쾌락을 말하는 것인가? 비구들이여, 욕탐(慾貪)에 오염되고 욕탐에 묶인 이 사람은 지금·여기에(금생에) 속한 두려움으로부터도 벗어나지 못하고, 다음 생에(내생에) 속한 두려움으로부터도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두려움이라는 이것이 감각적 쾌락을 말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왜 괴로움이라는 이것이 감각적 쾌락을 말하는 것인가? ··· 병이라는 ··· 종기라는 ··· 결박이라는 ···진흙탕이라는 감각적 쾌락을 말하는 것인가? 비구들이여, 욕탐에 오염되고 욕탐에 묶인 이 사람은 지금·여기에 속한 진흙탕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다음 생에 속한 진흙탕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진흙탕이라는 이것이 감각적 쾌락을 말하는 것이다."

 

두려움, 괴로움, 병, 종기, 결박, 진흙탕 모두는

이것들은 감각적 쾌락이라고 불린다. 여기에 범부 중생들은

 

생(生)과 사(死)를 생겨나게 하는 집착에서 두려움을 본 뒤에,

생(生)과 사(死)의 부숨 위에서 집착하지 않고 해탈한다.

 

모든 원망과 두려움을 지나, 안온(安穩)을 얻고, 지금·여기에서 평화로운
그 행복한 사람들은 모든 괴로움을 건넜다.

 

himavantasuttam (AN 6.24-히말라야 경) 

24. “비구들이여, 여섯 가지 법을 갖춘 비구는 산의 왕 히말라야를 부수어버리나니 하찮은 무명이야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무엇이 여섯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삼매의 들어감에 능숙하고, 삼매에 머무는데 능숙하고, 삼매에서 출정하는데(삼매에서 깨어나는데) 능숙하고, 삼매의 즐거움에 능숙하고, 삼매의 영역에 능숙하고, 삼매로 마음을 기울이는 것(삼매를 이끌어 내는 것)에 능숙하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여섯 가지 법을 갖춘 비구는 산의 왕 히말라야를 부수어버리나니 하찮은 무명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우리가 알고 있는 히말라야에 대한 빠알리어 표기는 히마완따(Himavanta,눈을 가진 것)이다. 

*'삼매의 증득에 능숙하다(samadhissa samapatti-kusalo hoti)'는 것은 적당한 음식과 적당한 체온을 취하여 삼매를 증득하는 것에 능숙하다는 것이다. '삼매에 머무는데 능숙하다(samadhissa thitilkusalo)'는 것은 삼매를 지속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삼매의 출정에 능숙하다(samadhissa vutthana-kusalo)'는 것은 한정한 시간에 출정할 수 있다는 뜻이다. '삼매의 즐거움에 능숙하다(samadhissa kallita-kusalo)'는 것은 삼매의 마음에 미소 짓고 즐거워할 수 있다는 뜻이다. '삼매의 영역에 능숙하다(samadhissa gocara-kusalo)'는 것은 삼매에 적당하지 않고 도움 되지 않는 법을 버리고 삼매에 적당하고 도움 되는 법을 가까이 하는 자를 이르기도 하고, '이것은 삼매의 표상의 대상이고, 이것은 특징의 대상이다.'라고 아는 자를 이르기도 한다. '삼매로 마음을 기울이는 것에 능숙하다(samadhissa abhinihara-kusalo)'는 것은 더 높은 증득을 얻기 위하여 초선, 2선, 3선, 4선으로 마음을 기울일 수 있는 자를 이른다.(AA.iii.354-355)

 

anussatiṭṭhānasuttaṃ (AN 6.25-계속해서 기억함(생각함)의 토대 경)

25. “비구들이여, 여섯 가지 계속해서 기억함(생각함)의 토대가 있다. 무엇이 여섯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제자는 여래를 계속해서 기억한다(생각한다).

‘이렇게 그분 세존께서는 아라한[araham]이시며, 모든 법을 바르게 완전히 깨달은 분(samma sambuddho)이시며, 명지와 실천을 구족한 분(vijjacaranasampanna)이시며, 열반으로 잘 가신 분(sugato)이시며, 중생들의 세간을 잘 알고 계신 분(lokavidu)이시며, 위 없으신 분(anuttaro)이시며, 어리석은 사람을 잘 길들이는 분(purisadhammasarathi)이시며, 하늘과 인간의 스승(satthadevamanusam)이시며, 깨달은 분(buddho)이시며,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신 분(세존)(bahgava)이시다.’라고.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제자가 여래를 계속해서 기억할 때 마음은 탐욕이 스며들지 않고, 성냄이 스며들지 않고, 어리석음이 스며들지 않는다. 그때 마음은 올곧아지고, 갈망(욕심)으로부터 떠나고, 풀려나고, 벗어난다. 비구들이여, '갈망'이란 것은 이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에 묶인 것을 말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런 대상을 계속해서 기억함을 원인으로도 이렇게 여기서 어떤 중생들은 청정해진다.

 

다시,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제자는 법을 계속해서 기억한다.

‘법은 세존에 의해 잘 설해졌고, 현재에서 증명되는 것이며, 때를 가리지 않고 과보가 있는 것이며, 와서 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며, 잘 열반으로 인도하는 것이며, 지혜 있는 자 누구 스스로 증득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제자가 법을 계속해서 기억할 때 마음은 탐욕이 스며들지 않고, 성냄이 스며들지 않고, 어리석음이 스며들지 않는다. 그때 마음은 올곧아지고, 갈망(욕심)으로부터 떠나고, 풀려나고, 벗어난다. 비구들이여, '갈망'이란 것은 이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에 묶인 것을 말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런 대상을 계속해서 기억함을 원인으로도 이렇게 여기서 어떤 중생들은 청정해진다.   

 

다시,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제자는 승가를 계속해서 기억한다.

‘세존의 제자들의 모임인 승가는 길을 잘 걷고 있으며, 길을 바르게 걷고 있으며, 길을 지혜롭게 걷고 있으며, 길을 충실하게 걷고 있느니, 저 네 쌍의 분들이요[四雙] 여덟 단계에 계신 분[八輩]들이시다. 이러한 세존의 제자들의 모임인 승가는 공양을 올려 마땅하고, 시중들어 마땅하고, 보시 하여 마땅하고, 합장 드려 마땅하며, 이 세상에 다시없는 복전[福田]이다.’라고.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제자가 승가를 계속해서 기억할 때 마음은 탐욕이 스며들지 않고, 성냄이 스며들지 않고, 어리석음이 스며들지 않는다. 그때 마음은 올곧아지고, 갈망(욕심)으로부터 떠나고, 풀려나고, 벗어난다. 비구들이여, '갈망'이란 것은 이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에 묶인 것을 말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런 대상을 계속해서 기억함을 원인으로도 이렇게 여기서 어떤 중생들은 청정해진다.     


다시,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제자는 
‘깨지지 않고, 끈어지지 않고, 얼룩지지 않고, 구속되지 않고, 현자들이 칭찬하고, (성취한 것을) 움켜쥐지 않고, 삼매로 인도하는' 자신의 계들을 계속해서 기억한다.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제자가 계를 계속해서 기억할 때 마음은 탐욕이 스며들지 않고, 성냄이 스며들지 않고, 어리석음이 스며들지 않는다. 그때 마음은 올곧아지고, 갈망(욕심)으로부터 떠나고, 풀려나고, 벗어난다. 비구들이여, '갈망'이란 것은 이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에 묶인 것을 말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런 대상을 계속해서 기억함을 원인으로도 이렇게 여기서 어떤 중생들은 청정해진다.    

 

다시,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제자는 자신의 보시를 계속해서 기억한다.

'참으로 나에게 이익이다. 참으로 나에게 큰 이익이다! 나는 인색의 때에 오염된 사람들 가운데서 인색의 때에서 벗어난 마음으로 아낌없이(자유롭게) 보시하고, 손은 깨끗하고, 주는 것을 좋아하고, 다른 사람의 요구에 부응할 준비가 되어있고, 베풂과 나눔을 좋아하며 재가에 산다.'라고.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제자가 보시를 계속해서 기억할 때 마음은 탐욕이 스며들지 않고, 성냄이 스며들지 않고, 어리석음이 스며들지 않는다. 그때 마음은 올곧아지고, 갈망(욕심)으로부터 떠나고, 풀려나고, 벗어난다. 비구들이여, '갈망'이란 것은 이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에 묶인 것을 말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런 대상을 계속해서 기억함을 원인으로도 이렇게 여기서 어떤 중생들은 청정해진다.      

 

다시,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제자는 천신을 계속해서 기억한다.

‘사대왕천의 신들이 있고, 삼십삼천의 신들이 있고, 야마천의 신들이 있고, 도솔천의 신들이 있고, 화락천의 신들이 있고, 타화자재천의 신들이 있고, 범신천의 신들이 있고, 그보다 높은 천(天)의 신들이 있다. 이런 신들은 믿음을 갖추어 여기서 죽은 뒤 그곳에 태어났다. 나에게도 그런 믿음이 있다. 이런 신들은 계를 갖추어 여기서 죽은 뒤 그곳에 태어났다. 나에게도 그런 계가 있다. 이런 신들은 배움을 갖추어 여기서 죽은 뒤 그곳에 태어났다. 나에게도 그런 배움이 있다. 이런 신들은 보시를 갖추어 여기서 죽은 뒤 그곳에 태어났다. 나에게도 그런 보시가 있다. 이런 신들은 지혜를 갖추어 여기서 죽은 뒤 그곳에 태어났다. 나에게도 그런 지혜가 있다.’라고.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제자가 그 천신들의 믿음과 계와 배움과 보시와 지혜를 계속해서 기억할 때 마음은 탐욕이 스며들지 않고, 성냄이 스며들지 않고, 어리석음이 스며들지 않는다. 그때 마음은 올곧아지고, 갈망(욕심)으로부터 떠나고, 풀려나고, 벗어난다. 비구들이여, '갈망'이란 것은 이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에 묶인 것을 말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런 대상을 계속해서 기억함을 원인으로도 이렇게 여기서 어떤 중생들은 청정해진다.      

 

비구들이여, 이런 여섯 가지 계속해서 기억함의 토대가 있다.”

 

mahākaccānasuttaṃ (AN 6.26-마하깟짜나 경)

26. 거기에서 마하깟짜나 존자는 비구들에게 말했다. “비구들이여.”라고. 그러자 비구들도 대답했다. “도반이시여.”라고. 마하깟짜나 존자는 이렇게 말하였다. 
“참으로 경이롭습니다, 도반들이여. 참으로 놀랍습니다, 도반들이여. 아시는 분, 보시는 분,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에 의해 장애 가운데서 중생들의 청정을 위한, 슬픔(수.愁)과 비탄(비.悲)을 건너기 위한, 고통(고.苦)과 고뇌(우.憂)를 사라지게 하기 위한, 방법을 얻기 위한,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기회의 얻음이 이만큼 알려졌으니, 여섯 가지 계속해서 기억함의 토대입니다. 무엇이 여섯입니까?”

 

여기, 도반들이여, 성스러운 제자는 여래를 계속해서 기억합니다.

‘이렇게 그분 세존께서는 아라한[araham]이시며, 모든 법을 바르게 완전히 깨달은 분(samma sambuddho)이시며, 명지와 실천을 구족한 분(vijjacaranasampanna)이시며, 열반으로 잘 가신 분(sugato)이시며, 중생들의 세간을 잘 알고 계신 분(lokavidu)이시며, 위 없으신 분(anuttaro)이시며, 어리석은 사람을 잘 길들이는 분(purisadhammasarathi)이시며, 하늘과 인간의 스승(satthadevamanusam)이시며, 깨달은 분(buddho)이시며,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신 분(세존)(bahgava)이시다.’라고. 도반들이여, 성스러운 제자가 여래를 계속해서 기억하는 그때 마음은 탐욕이 스며들지 않고, 성냄이 스며들지 않고, 어리석음이 스며들지 않습니다. 그때 마음은 올곧아지고, 갈망으로부터 떠나고, 풀려나고, 벗어납니다. 도반들이여, '갈망'이란 것은 이 다섯 가지의 감각적 쾌락을 말하는 것입니다. 도반들이여, 이런 성스러운 제자는 광대하고, 숭고하고, 무량하고, 악의 없고, 해치고자함이 없는, 온전히 허공과 같은 마음으로 머뭅니다. 도반들이여, 이런 대상을 계속해서 기억함을 원인으로도 이렇게 여기서 어떤 중생들은 청정한 존재들이 됩니다.

 

다시, 도반들이여, 성스러운 제자는 법을 계속해서 기억합니다. 
‘법은 세존에 의해 잘 설해졌고, 현재에서 증명되는 것이며, 때를 가리지 않고 과보가 있는 것이며, 와서 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며, 잘 열반으로 인도하는 것이며, 지혜 있는 자 누구 스스로 증득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도반들이여, 성스러운 제자가 법을 계속해서 기억하는 그때 마음은 탐욕이 스며들지 않고, 성냄이 스며들지 않고, 어리석음이 스며들지 않습니다. 그때 마음은 올곧아지고, 갈망으로부터 떠나고, 풀려나고, 벗어납니다. 도반들이여, '갈망'이란 것은 이 다섯 가지의 감각적 쾌락을 말하는 것입니다. 도반들이여, 이런 성스러운 제자는 광대하고, 숭고하고, 무량하고, 악의 없고, 해치고자함이 없는, 온전히 허공과 같은 마음으로 머뭅니다. 도반들이여, 이런 대상을 계속해서 기억함을 원인으로도 이렇게 여기서 어떤 중생들은 청정한 존재들이 됩니다. 

 

다시, 도반들이여, 성스러운 제자는 승가를 계속해서 기억합니다. 
‘세존의 제자들의 모임인 승가는 길을 잘 걷고 있으며, 길을 바르게 걷고 있으며, 길을 지혜롭게 걷고 있으며, 길을 충실하게 걷고 있느니, 저 네 쌍의 분들이요[四雙] 여덟 단계에 계신 분[八輩] 들이시다. 이러한 세존의 제자들의 모임인 승가는 공양을 올려 마땅하고, 시중 들어 마땅하고, 보시하여 마땅하고, 합장드려 마땅하며, 이 세상에 다시 없는 복전[福田]이다.’라고. 도반들이여, 성스러운 제자가 승가를 계속해서 기억하는 그때 마음은 탐욕이 스며들지 않고, 성냄이 스며들지 않고, 어리석음이 스며들지 않습니다. 그때 마음은 올곧아지고, 갈망으로부터 떠나고, 풀려나고, 벗어납니다. 도반들이여, '갈망'이란 것은 이 다섯 가지의 감각적 쾌락을 말하는 것입니다. 도반들이여, 이런 성스러운 제자는 광대하고, 숭고하고, 무량하고, 악의 없고, 해치고자함이 없는, 온전히 허공과 같은 마음으로 머뭅니다. 도반들이여, 이런 대상을 계속해서 기억함을 원인으로도 이렇게 여기서 어떤 중생들은 청정한 존재들이 됩니다.   

 

다시, 도반들이여, 성스러운 제자는 '깨지지 않고, 끊어지지 않고, 얼룩지지 않고, 구속되지 않고, 현자들이 칭찬하고, 성취한 것을 움켜쥐지 않고, 삼매로 이끄는' 자신의 계들을 계속해서 기억합니다. 도반들이여, 성스러운 제자가 계를 계속해서 기억하는 그때 마음은 탐욕이 스며들지 않고, 성냄이 스며들지 않고, 어리석음이 스며들지 않습니다. 그때 마음은 올곧아지고, 갈망으로부터 떠나고, 풀려나고, 벗어납니다. 도반들이여, '갈망'이란 것은 이 다섯 가지의 감각적 쾌락을 말하는 것입니다. 도반들이여, 이런 성스러운 제자는 광대하고, 숭고하고, 무량하고, 악의 없고, 해치고자함이 없는, 온전히 허공과 같은 마음으로 머뭅니다. 도반들이여, 이런 대상을 계속해서 기억함을 원인으로도 이렇게 여기서 어떤 중생들은 청정한 존재들이 됩니다.   

 

다시, 도반들이여, 성스러운 제자는 자신의 보시를 계속해서 기억합니다. 

‘참으로 나에게 이익이다. 참으로 나에게 큰 이익이다! 나는 인색에 오염된 사람들 가운데서 인색의 오염을 떠난 마음으로 아낌없이 보시하고, 손은 깨끗하고, 주는 것을 좋아하고, 다른 사람의 요구에 부응할 준비가 되고, 나눔과 베풂을 좋아하며 재가에 산다.'라고. 도반들이여, 성스러운 제자가 보시를 계속해서 기억하는 그때 마음은 탐욕이 스며들지 않고, 성냄이 스며들지 않고, 어리석음이 스며들지 않습니다. 그때 마음은 올곧아지고, 갈망으로부터 떠나고, 풀려나고, 벗어납니다. 도반들이여, '갈망'이란 것은 이 다섯 가지의 감각적 쾌락을 말하는 것입니다. 도반들이여, 이런 성스러운 제자는 광대하고, 숭고하고, 무량하고, 악의 없고, 해치고자함이 없는, 온전히 허공과 같은 마음으로 머뭅니다. 도반들이여, 이런 대상을 계속해서 기억함을 원인으로도 이렇게 여기서 어떤 중생들은 청정한 존재들이 됩니다.   

 

다시, 도반들이여, 성스러운 제자는 천신을 계속해서 기억합니다. 

‘사대왕천의 신들이 있고, 삼십삼천의 신들이 있고, 야마천의 신들이 있고, 도솔천의 신들이 있고, 화락천의 신들이 있고, 타화자재천의 신들이 이고, 범신천의 신들이 있고, 그보다 높은 천의 신들이 있다. 이런 신들은 믿음을 구족하여 여기서 죽은 뒤 그곳에 태어났다. 나에게도 그런 믿음이 있다. 이런 신들은 계를 구족하여 여기서 죽은 뒤 그곳에 태어났다. 나에게도 그런 계가 있다. 이런 신들은 배움을 구족하여 여기서 죽은 뒤 그곳에 태어났다. 나에게도 그런 배움이 있다. 이런 신들은 보시를 구족하여 여기서 죽은 뒤 그곳에 태어났다. 나에게도 그런 보시가 있다. 이런 신들은 지혜를 구족하여 여기서 죽은 뒤 그곳에 태어났다. 나에게도 그런 지혜가 있다.’라고. 도반들이여, 성스러운 제자가 자신과 그천신들의 믿음과 계와 배움과 보시와 지혜를 계속해서 기억하는 그때 마음은 탐욕이 스며들지 않고, 성냄이 스며들지 않고, 어리석음이 스며들지 않습니다. 그때 마음은 올곧아지고, 갈망으로부터 떠나고, 풀려나고, 벗어납니다. 도반들이여, '갈망'이란 것은 이 다섯 가지의 감각적 쾌락을 말하는 것입니다. 도반들이여, 이런 성스러운 제자는 광대하고, 숭고하고, 무량하고, 악의 없고, 해치고자함이 없는, 온전히 허공과 같은 마음으로 머뭅니다. 도반들이여, 이런 대상을 계속해서 기억함을 원인으로도 이렇게 여기서 어떤 중생들은 청정한 존재들이 됩니다.   

 

참으로 경이롭습니다, 도반들이여. 참으로 놀랍습니다, 도반들이여. 아시는 분, 보시는 분,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에 의해 장애 가운데서 중생들의 청정을 위한, 슬픔과 비탄을 건너기 위한, 고통과 고뇌를 사라지게 하기 위한, 방법을 얻기 위한,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기회의 얻음이 이만큼 알려졌으니, 여섯 가지 계속해서 기억함의 토대입니다.

 

paṭhamasamayasuttaṃ (AN 6.27- 경우 경1)
27. 그 무렵 어떤 비구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아서 그 비구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마음(의.意)를 닦는 비구를 만나러 가기 위한 얼마나 많은 경우가 있습니까?”라고.
“비구여, 마음을 닦는 비구를 만나러 가기 위한 이런 여섯 가지 경우가 있다. 어떤 여섯인가?

 

여기, 비구여, 비구가 욕탐이 스며들고 욕탐에 묶인 마음으로 머물고, 일어난 욕탐의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할 때 마음을 닦는 비구에게 다가간 뒤에 이렇게 말해야 한다.

‘도반이여, 저는 욕탐이 스며들고 욕탐에 묶인 마음으로 머물고, 일어난 욕탐의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합니다. 존자여, 저에게 욕탐을 버리기 위한 법을 설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라고. 

그에게 마음을 닦는 비구는 욕탐을 버리기 위한 법을 설한다. 비구여, 이것이 마음을 닦는 비구를 만나러 가기 위한 첫 번째 경우이다.

 

다시, 비구여, 비구가 성냄이 스며들고 성냄에 묶인 마음으로 머물고, 일어난 성냄의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할 때 마음을 닦는 비구에게 다가간 뒤에 이렇게 말해야 한다. 

‘도반이여, 저는 성냄이 스며들고 성냄에 묶인 마음으로 머물고, 일어난 성냄의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합니다. 존자여, 저에게 성냄를 버리기 위한 법을 설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라고. 

그에게마음 닦는 비구는 성냄를 버리기 위한 법을 설한다. 비구여, 이것이 마음을 닦는 비구를 만나러 가기 위한 두 번째 경우이다.

 

다시, 비구여, 비구가 해태와 혼침(혼침과 졸음)이 스며들고 해태와 혼침에 묶인 마음으로 머물고, 일어난 해태와 혼침의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할 때 마음을 닦는 비구에게 다가간 뒤에 이렇게 말해야 한다. 

‘도반이여, 저는 해태와 혼침이 스며들고 해태와 혼침에 묶인 마음으로 머물고, 일어난 해태와 혼침의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합니다. 존자여, 저에게 해태와 혼침을 버리기 위한 법을 설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라고.  

그에게 마음을 닦는 비구는 해태와 혼침을 버리기 위한 법을 설한다. 비구여, 이것이 마음을 닦는 비구를 만나러 가기 위한 세 번째 경우이다.

 

다시, 비구여, 비구가 들뜸과 후회가 스며들고 들뜸과 후회에 묶인 마음으로 머물고, 일어난 들뜸과 후회의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할 때 마음을 닦는 비구에게 다가간 뒤에 이렇게 말해야 한다.

‘도반이여, 저는 들뜸과 후회가 스며들고 들뜸과 후회에 묶인 마음으로 머물고, 일어난 들뜸과 후회의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합니다. 존자여, 저에게 들뜸과 후회를 버리기 위한 법을 설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라고. 
그에게 마음을 닦는 비구는 들뜸과 후회를 버리기 위한 법을 설한다.
비구여, 이것이 마음을 닦는 비구를 만나러 가기 위한 네 번째 경우이다.

 

다시, 비구여, 비구가 의심이 스며들고 의심에 묶인 마음으로 머물고, 일어난 의심의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할 때 마음을 닦는 비구에게 다가간 뒤에 이렇게 말해야 한다.  

‘도반이여, 저는 의심이 스며들고 의심에 묶인 마음으로 머물고, 일어난 의심의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합니다. 존자여, 저에게 의심을 버리기 위한 법을 설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라고. 

그에게 마음을 닦는 비구는 의심을 저리기 위한 법을 설한다. 비구여, 이것이 마음을 닦는 비구를 만나러 가기 위한 다섯 번째 경우이다.

 

다시, 비구여, 비구가 어떤 표상을 대상으로 하여 그 표상에 주의를 기울인 뒤에 그 표상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하고, 마음을 기울이는 자에게 뒤이어 번뇌들의 부서짐이 있는 표상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할 때 마음을 닦는 비구에게 다가간 뒤에 이렇게 말해야 한다. 

‘도반이여, 저는 어떤 표상을 대상으로 하여 그 표상에 주의를 기울인 뒤에 그 표상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마음을 기울인 자에게 뒤이어 번뇌들의 부서짐이 있는 표상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합니다. 존자여, 저에게 번뇌들의 부서짐을 위한 법을 설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라고.  

그에게 마음을 닦는 비구는 번뇌들의 부서짐을 위한 법을 설한다. 비구여, 이것이 마음을 닦는 비구를 만나러 가기 위한 여섯 번째 경우이다.

비구여, 마음을 닦는 비구를 만나러 가기 위한 이런 여섯가지 경우가 있다."

 

dutiyasamayasuttaṃ (AN 6.28- 경우 경2)
28. 한 때 많은 장로 비구들이 바라나시에서 이시빠따나의 사슴동산에 머물고 있었다. 그 무렵 오후에 탁발을 마치고 돌아와 집회소에 모인 그 장로 비구들에게 서로 이런 대화가 생겼다.  
“도반들이여, 마음을 닦는 비구를 만나러 가기 위한 어떤 때가 있습니까?”라고.

 

이렇게 말하자 어떤 비구가 장로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도반들이여, 마음 닦는 비구가 오후에 탁발을 마치고 돌아와 발을 씻은 뒤에 가부좌를 틀고 몸을 똑바로 세우고 전면에 마음 챙김을 준비한 채 앉아있는 때가 마음을 닦는 비구를 만나러 가기 위한 때입니다."

 

이렇게 말하자 어떤 비구가 그 비구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도반이여, 그때는 마음을 닦는 비구를 만나러 가기 위한 때가 아닙니다. 도반이여, 마음을 닦는 비구가 오후에 탁발을 마치고 돌아와 발을 씻은 뒤에 가부좌를 틀고 몸을 똑바로 세우고 전면에 마음 챙김을 준비한 채 앉아있는 때는 경행 때문에 피곤한 자에게 편안하지 않고, 식후에 피곤한 자에게 편안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때는마음을 닦은 비구를 만나러 가기 위한 때가 아닙니다. 도반이여, 저녁에 홀로 머묾에서 일어난 마음을 닦는 비구가 거처의 그늘에서 가부좌를 틀고 몸을 똑바로 세우고 전면에 마음 챙김을 준비한 채 앉아있는 때가 마음을 비구를 만나러 가기 위한 때입니다." 

 

이렇게 말하자 어떤 비구가 그 비구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도반이여, 그때는 마음을 닦는 비구를 만나러 가기 위한 때가 아닙니다. 도반이여, 저녁에 홀로 머묾에서 일어난 마음을 닦는 비구가 거처의 그늘에서 가부좌를 틀고 몸을 똑바로 세우고 전면에 마음 챙김을 준비한 채 앉아있는 때는 낮 동안 마음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던 삼매의 표상이 남아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때는 마음을 닦는 비구를 만나러가 가기위한 때가 아닙니다. 도반이여, 마음을 닦는 비구가 밤이 지나고 새벽에 자리에서 일어나 가부좌를 틀고 몸을 똑바로 세우고 전면에 마음 챙김을 준비한 채 앉아있는 때가 마음을 닦는 비구를 만나러 가기 위한 때입니다."

 

이렇게 말하자 어떤 비구가 그 비구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도반이여, 그때는 마음을 닦는 비구를 만나러 가기 위한 때가 아닙니다. 도반이여, 마음을 닦는 비구가 밤이 지나고 새벽에 자리에서 일어나 가부좌를 틀고 몸을 똑바로 세우고 전면에 마음 챙김을 준비한 채 앉아있는 때는 몸이 기력이 충만하고, 세존의 교법을 사고하기에 편안합니다. 그러므로 그때는 마음을 닦는 비구를 만나러 가기 위한 때가 아닙니다."

 

이렇게 말하자 마하깟짜나 존자가 장로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도반들이여, 나는 이것을 세존의 면전에서 듣고 세존의 면전에서 받아 지녔습니다.  ‘비구여, 마음을 닦는 비구를 만나러 가기 위한 이런 여섯 가지 경우가 있다.’라고. 어떤 여섯인가?


여기, 비구여, 비구가 욕탐이 스며들고 욕탐에 묶인 마음으로 머물고, 일어난 욕탐의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할 때 마음을 닦는 비구에게 다가간 뒤에 이렇게 말해야 한다.
‘도반이여, 저는 욕탐이 스며들고 욕탐에 묶인 마음으로 머물고, 일어난 욕탐의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합니다. 존자여, 저에게 욕탐을 버리기 위한 법을 설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라고. 그에게 마음을 닦는 비구는 욕탐을 버리기 위한 법을 설한다. 비구여, 이것이 마음을 닦는 비구를 만나러 가기 위한 첫 번째 경우이다.

 

다시, 비구여, 비구가 성냄이 스며들고 성냄에 묶인 마음으로 머물고 ··· 해태와 혼침이 스며들고 해태와 혼침에 묶인 마음으로 머물고 ··· 들뜸과 후회가 스며들고 들뜸과 후회에 묶인 마음으로 머물고 ··· 의심이 스며들고 의심에 묶인 마음으로 머물고 ··· 어떤 표상을 대상으로 하여 그 표상에 주의를 기울인 뒤에 그 표상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하고, 마음을 기울이는 자에게 뒤이어 번뇌들의 부서짐이 있는 표상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할 때 마음을 닦는 비구에게 다가간 뒤에 이렇게 말해야 한다. ‘도반이여, 저는 어떤 표상을 대상으로 하여 그 표상에 주의를 기울인 뒤에 그 표상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마음을 기울인 자에게 뒤이어 번뇌들의 부서짐이 있는 표상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합니다. 존자여, 저에게 번뇌들의 부서짐을 위한 법을 설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라고. 그에게 마음을 닦는 비구는 번뇌들의 부서짐을 위한 법을 설한다. 비구여, 이것이 마음을 닦는 비구를 만나러 가기 위한 여섯 번째 경우이다. 비구여, 마음을 닦는 비구를 만나러 가기 위한 이런 여섯 가지 경우가 있다.

도반들이여, 나는 이것을 세존의 면전에서 듣고 세존의 면전에서 받아 지녔습니다. ‘비구여, 마음을 닦는 비구를 만나러 가기 위한 이런 여섯 가지 경우가 있다.’라고."

 

udāyīsuttaṃ (AN 6.29-우다이 경)
29. 그 무렵 세존께서는 우다이 존자에게 “우다이여, 몇가지 기억의 토대가 있는가?”라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하자 우다이 존자는 침묵했다. 두 번째도 세존께서는 우다이 존자에게 "우다이여, 몇 가지 기억의 토대가 있는가?"라고 말씀하셨다. 두 번째도 우다이 존자는 침묵했다. 세 번째도 세존께서는 우다이 존자에게 "우다이여, 몇 가지 기억의 토대가 있는가?"라고 말씀하셨다. 세 번째도 우다이 존자는 침묵했다. 

 

그러자 아난다 존자가 우다이 존자에게 “도반 우다이여, 스승께서 그대에게 말씀하십니다.”라고 말했다. 
“도반 아난다여, 나는 세존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여기
세존이시여, 비구는 전생의 여러 가지 삶의 형태를 기억합니다. 즉 한 생, 두 생, 세 생, 네 생, 다섯 생, 열 생, 스무 생, 서른 생, 마흔 생, 쉰 생, 백 생, 천 생, 백 천생, 수많은 무너지는 겁(세상), 수많은 이루어지는 겁, 수많은 무너지고 이루어지는 겁에 대해 기억합니다. '거기에서 이름은 이러했고, 가문은 이러했고, 피부색(종족)은 이러했고, 음식은 이러했고, 즐거움과 괴로움의 경험은 이러했고, 목숨의 마침은 이러했으며, 그와 같이 그곳에서 죽어 저곳에 태어나 거기에서의 이름은 이러했고, 가문은 이러했고, 피부색(종족)은 이러했고, 음식은 이러했고, 즐거움과 괴로움의 경험은 이러했고, 목숨의 마침은 이러했으며, 그와 같이 거기에서 죽어 다시 태어났다'라고. 이처럼 특징을 지닌, 내력을 지닌, 다종 다양한 전생의 거처를 기억합니다. 이것이, 세존이시여, 기억의 토대입니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아난다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아난다여, 나는 '이 쓸모없는 우다이는 높은 마음에 전념하여 머무르지 않는다.'라고 알고 있었다. 아난다여, 몇 가지 기억의 토대가 있는가?”

“세존이시여, 다섯 가지 기억의 토대가 있습니다. 어떤 다섯입니까?

 

여기, 세존이시여, 비구는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멀어지고 선하지 않은 법으로부터 멀어져, 거친 사유(일으킨 생각.尋)와 미세한 사유(지속적인 고찰.伺)을 지닌, 분리됨으로부터 생겨난 기쁨[喜.희열]과 즐거움[樂.행복]이 있는 초선(初禪)에 들어 머뭅니다. 여기 비구는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가라앉아, 안으로 고요해지고, 마음이 한 곳에 고정되어(心一境性),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없는 삼매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제2선(二禪)에 들어 머뭅니다. 여기 비구는 기쁨을 떠나 평정이 머무는, 마음챙김과 알아차림(正念.正知)을 지녀, 즐거움을 몸으로 느끼는, 거룩한 이들이 말하는 바, '평정과 마음챙김을 지녀 즐거움이 머문다.'고 하는 제3선(三禪)에 들어 머뭅니다. 세존이시여, 이렇게 닦고 이렇게 많이 행한 이 기억의 토대는 지금·여기의 행복한 머묾으로 이끕니다.

 

다시, 세존이시여, 비구는 광명(光明)의 상(想)에 마음을 기울입니다. 낮처럼 밤에도, 밤처럼 낮에도, 낮의 상을 확고히 합니다. 이렇게 열려고 덮여있지 않은 마음으로 빛이 함께하는 마음을 닦습니다. 세존이시여, 이렇게 닦고 이렇게 많이 행한 이 기억의 토대는 앎(지.知)과 봄(견.見)의 얻음으로 이끕니다.

 

다시 세존이시여, 비구는 발바닥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며, 그리고 머리털에서부터 아래로 내려가며, 이 몸은 피부로 둘러싸여 있고 여러 가지 부정(不淨)한 것들을 관찰합니다. ‘이 몸에는 머리털∙몸털∙손발톱∙이∙살갗∙살∙힘줄∙뼈∙골수∙콩팥∙염통∙간∙지라∙허파∙창자∙장간막∙위∙똥∙쓸개즙∙가래∙고름∙피∙땀∙굳기름∙눈물∙[피부의] 기름기∙침∙콧물∙관절활액∙오줌이 있다.’라고. 세존이시여, 이렇게 닦고 이렇게 많이 행한 이 기억의 토대는 욕탐의 버림으로 이끕니다.

 

다시, 세존이시여, 비구는, 예를 들면, 묘지에 버려진, 하루나 이틀 또는 사흘된, 부풀고 검푸르게 되고 고름이 가득한 시체를 볼 것입니다. 그는 오직 이 몸을 비교합니다. ‘이 몸 또한 이런 것이고, 이렇게 될 것이며, 이것을 극복하지 못하리라.’라고.

 

예를 들면, 까마귀 쪼아 먹고, 솔개가 쪼아 먹고, 독수리가 쪼아 먹고, 개가 뜯어먹고, 호랑이가 뜯어먹고, 표범이 뜯어먹고, 자칼이 뜯어먹고, 온갖 벌레들이 파먹는, 묘지에 버려진 시체를 볼 것입니다. 그는 오직 이 몸을 비교합니다. ‘이 몸 또한 이런 것이고, 이렇게 될 것이며, 이것을 극복하지 못하리라.’라고.

 

예를 들면, 비구는 살과 핏기가 없는 채로 힘줄로 연결된 채 묘지에 버려진 시체를 볼 것입니다. ···  해골이 살은 다 떨어지고 피만 묻은 상태로 힘줄로 연결된 채 ··· 해골이 되어 살과 피는 다 떨어지고 힘줄로 연결된 채 ··· 뼈들이 흩어져서 여기에는 손뼈, 저기에는 발뼈, 또 저기에는 정강이뼈, 저기에는 젋적다리뼈, 저기에는 엉덩이뼈, 저기에는 등뼈, 저기에는 갈비뼈, 저기에는 가슴뼈, 저기에는 팔뼈, 저기에는 어깨뼈, 저기에는 목뼈, 저기에는 턱뼈, 저기에는 두개골 등이 사방에 널려있는 ··· 비구는 뼈가 조개껍질 색깔같이 하얗게 된 ···  뼈가 일년도 더 되어 더러운 무더기로 쌓여 있는 ··· 뼈가 삭아서 분말이 된, 묘지에 버려진 시체를 볼 것입니다. 그는 오직 이 몸을 비교합니다. ‘이 몸 또한 이런 것이고, 이렇게 될 것이며, 이것을 극복하지 못하리라.’라고. 세존이시여, 이렇게 닦고 이렇게 많이 행한 이 기억의 토대는 ‘나는 있다.’라는 자아의식을 뿌리 뽑게 됩니다.

 

다시, 세존이시여, 비구는 즐거움이 끊어지고 괴로움이 끊어져, 이전의 기쁨과 근심이 사라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평정(upekkha.捨)을 통한 마음챙김의 청정 [捨念淸淨]을 지닌 제4선(四禪)에 들어 머뭅니다. 세존이시여, 이렇게 닦고 이렇게 많이 행한 이 기억의 토대는 다양한 요소들을 철저히 알게 됩니다.

이것이, 세존이시여, 다섯 가지 기억의 토대입니다.”


“훌륭하고 훌륭하다, 아난다여. 그렇다면, 아난다여. 그렇다면 이것도 여섯 번째 기억의 토대로 명심하라. 여기,
아난다여, 비구는 마음 챙기면서 나아가고, 마음 챙기면서 물러나고, 마음챙기면서 서고, 마음챙기면서 앉고, 마음챙기면서 눕고, 마음챙기면서 행동을 결정한다. 아난다여, 이렇게 닦고 이렇게 많이 행한 이 기억의 토대는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으로 이끈다.”

 

anuttariyasuttaṃ (AN 6.30-위 없음 경)

30. “비구들이여, 이런 여섯 가지 위없음이 있다. 어떤 여섯인가? 

봄의 위없음, 들음의 위없음, 얻음의 위없음, 공부(닦음)의 위없음, 섬김의 위없음, 기억의(계속해서 생각함)의 위없음이다.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봄의 위없음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상보(象寶)를 보러 가고, 마보(馬寶)를 보러 가고, 보배보(寶具寶)를 보러 가고, 여러 가지 다른 것을 보러 가고, 삿된 견해를 가지고 삿된 실천을 하는 사문이나 바라문을 보러 간다. 비구들이여, 이런 봄이 있다. '이런 것은 없다.'라고 나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비구들이여, 이런 봄은 저열하고, 천박하고, 범속하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가져오지 않고, 싫어하여 떠남으로, 탐냄의 떠남으로, 소멸로, 고요함으로, 철저한 앎으로, 바른 깨달음으로, 열반으로 이끌지 않는다. 그런데 비구들이여, 분명하고 완전한 흔들림 없는 믿음을 가진 자는 여래나 여래의 제자를 보기 위해서 간다. 비구들이여, 분명하고 완전한 흔들림없는 믿음을 가진 자가 여래나 여래의 제자를 보기 위해서 가는 이것이 봄 가운데 위없는 것이다. 중생들의 청정을 위한, 슬픔과 비탄을 건너기 위한, 고통과 고뇌를 소멸하기 위한, 방법을 얻기 위한,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봄의 위없음이라고 불린다. 이렇게 봄의 위없음이 있다.

 

그러면 어떤 것이 들음의 위없음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북소리를 들으러 가고, 류트 소리를 들으러 가고, 노래 소리를 들으러 가고, 여러 가지 다른 것을 들으러 가고, 삿된 견해를 가지고 삿된 실천을 하는 사문이나 바라문의 법을 들으러 간다. 
비구들이여, 이런 들음이 있다. ‘이런 것은 없다.'라고 나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비구들이여, 이런 들음은 저열하고, 천박하고, 범속하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가져오지 않고, 싫어하여 떠남으로, 탐냄의 떠남으로, 소멸로, 고요함으로, 철저한 앎으로, 바른 깨달음으로, 열반으로 이끌지 않는다. 그런데 비구들이여, 분명하고 완전한 흔들림 없는 믿음을 가진 자는 여래나 여래의 제자가 설하는 법을 듣기 위해서 간다. 비구들이여, 분명하고 완전한 흔들림없는 믿음을 가진 자가 여래나 여래의 제자가 설하는 법을 듣기 위해서 가는 이것이 들음 가운데 위없는 것이다. 중생들의 청정을 위한, 슬픔과 비탄을 건너기 위한, 고통과 고뇌를 소멸하기 위한, 방법을 얻기 위한,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들음의 위없음이라고 불린다. 이렇게 봄의 위없음과 들음의 위없음이 있다. 

 

그러면 어떤 것이 얻음의 위없음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아들을 얻고, 아내를 얻고, 재물을 얻고, 여러 가지 다른 것을 얻고, 삿된 견해를 가지고 삿된 실천을 하는 사문이나 바라문에게서 믿음을 얻는다. 비구들이여, 이런 얻음이 있다. ‘이런 것은 없다.'라고 나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비구들이여, 이런 얻음은 저열하고, 천박하고, 범속하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가져오지 않고, 싫어하여 떠남으로, 탐냄의 떠남으로, 소멸로, 고요함으로, 철저한 앎으로, 바른 깨달음으로, 열반으로 이끌지 않는다. 그런데 비구들이여, 분명하고 완전한 흔들림 없는 믿음을 가진 자는 여래나 여래의 제자에 대한 믿음을 얻는다. 비구들이여, 분명하고 완전한 흔들림없는 믿음을 가진 자가 여래나 여래의 제자에 대한 믿음을 얻는 이것이 얻음 가운데 위없는 것이다. 중생들의 청정을 위한, 슬픔과 비탄을 건너기 위한, 고통과 고뇌를 소멸하기 위한, 방법을 얻기 위한,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얻음의 위없음이라고 불린다. 이렇게 봄의 위없음과 들음의 위없음과 얻음의 위없음이 있다. 

 

그러면 어떤 것이 공부의 위없음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코끼리에 대해 공부하고, 말에 대해 공부하고, 마차에 대해 공부하고, 활에 대해 공부하고, 칼에 대해 공부하고, 여러 가지 다른 것에 대해 공부하고, 삿된 견해를 가지고 삿된 실천을 하는 사문이나 바라문에게서 공부한다. 비구들이여, 이런 공부가 있다. ‘이런 것은 없다.'라고 나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비구들이여, 이런 공부는 저열하고, 천박하고, 범속하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가져오지 않고, 싫어하여 떠남으로, 탐냄의 떠남으로, 소멸로, 고요함으로, 철저한 앎으로, 바른 깨달음으로, 열반으로 이끌지 않는다. 그런데 비구들이여, 분명하고 완전한 흔들림 없는 믿음을 가진 자는 여래가 선언한 법과 율에 서 높은 계를 공부하고 높은 마음을 공부하고 높은 혜(慧)를 공부한다. 비구들이여, 분명하고 완전한 흔들림없는 믿음을 가진 자가 여래가 선언한 법과 율에서 높은 계를 공부하고 높은 마음을 공부하고 높은 혜를 공부하는 이것이 공부 가운데 위없는 것이다. 중생들의 청정을 위한, 슬픔과 비탄을 건너기 위한, 고통과 고뇌를 소멸하기 위한, 방법을 얻기 위한,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공부의 위없음이라고 불린다. 이렇게 봄의 위없음과 들음의 위없음과 얻음의 위없음과 공부의 위없음이 있다.  

 

그러면 어떤 것이 섬김의 위없음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끄샤뜨리야를 섬기고, 바라문을 섬기고, 장자를 섬기고, 여러 가지 다른 사람을 섬기고, 삿된 견해를 가지고 삿된 실천을 하는 사문이나 바라문을 섬긴다. 비구들이여, 이런 섬김이 있다. ‘이런 것은 없다.'라고 나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비구들이여, 이런 섬김은 저열하고, 천박하고, 범속하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가져오지 않고, 싫어하여 떠남으로, 탐냄의 떠남으로, 소멸로, 고요함으로, 철저한 앎으로, 바른 깨달음으로, 열반으로 이끌지 않는다. 그런데 비구들이여, 분명하고 완전한 흔들림 없는 믿음을 가진 자는 여래나 여래의 제자를 섬긴다. 비구들이여, 분명하고 완전한 흔들림없는 믿음을 가진 자가 여래나 여래의 제자를 섬기는 이것이 섬김 가운데 위없는 것이다. 중생들의 청정을 위한, 슬픔과 비탄을 건너기 위한, 고통과 고뇌를 소멸하기 위한, 방법을 얻기 위한,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섬김의 위없음이라고 불린다. 이렇게 봄의 위없음과 들음의 위없음과 얻음의 위없음과 공부의 위없음과 섬김의 위없음이 있다.  

 

그러면 어떤 것이 기억(계속해서 생각함)의 위없음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아들을 얻는 것을 계속해서 기억하고(생각하고), 아내를 얻는 것을 계속해서 기억하고, 재물을 얻는 것을 계속해서 기억하고, 여러 가지 다른 것을 얻는 것을 계속해서 기억하고, 삿된 견해를 가지고 삿된 실천을 하는 사문이나 바라문을 계속해서 기억한다. 비구들이여, 이런 기억이 있다. ‘이런 것은 없다.'라고 나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비구들이여, 이런 기억은 저열하고, 천박하고, 범속하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가져오지 않고, 싫어하여 떠남으로, 탐냄의 떠남으로, 소멸로, 고요함으로, 철저한 앎으로, 바른 깨달음으로, 열반으로 이끌지 않는다. 그런데 비구들이여, 분명하고 완전한 흔들림 없는 믿음을 가진 자는 여래나 여래의 제자를 계속해서 기억한다. 비구들이여, 분명하고 완전한 흔들림없는 믿음을 가진 자가 여래나 여래의 제자를 계속해서 기억하는 이것이 기억 가운데 위없는 것이다. 중생들의 청정을 위한, 슬픔과 비탄을 건너기 위한, 고통과 고뇌를 소멸하기 위한, 방법을 얻기 위한,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기억의 위없음이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이런 여섯 가지 위없음이 있다."

 

봄의 위없음과 들음의 위없을 얻고
얻음의 위없음을 얻으면 공부의 위없음을 즐거워하며 
섬길을 확립하고 기억을 닦고 
떨침과 연결괸, 불사(不死)로 향하는 안온을 닦으며 
불방일에 환희하고 슬기롭고 계로 단속하는 자들
그들에게 참으로 괴로움이 소멸하는 때가 온다.

 

 

제3장 위없음 품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