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야단법석

불교와 죽음

실론섬 2014. 8. 2. 09:29

세상을 살다보면 우리들은 사랑하던 이들의 죽음이나 고통에 대한 이야기나 또는 형용 못할 고통과 고난으로 괴로움을 당하는 여러 친척, 가족, 친구들의 소식을 접하곤 한다. 우리 주변을 잠시만 살펴봐도 어디를 보나 비참한 일들이 너무도 많다. 이러한 모든 것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 들이고 있는가? 어찌하여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가?


왜 우리들은 죽음을 두려워 할까

어느듯 여름이다. 하지만 곧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올 것이다. 낙엽이 지고 온 자연계는 죽음에 둘러 쌓인다. 싹이 나고 나무가 자라고 잎이 떨어지고 다시 싹이 나는 자연의 법칙은 하나도 새로울 것이 없다. 하지만 우리들은 이러한 자연의 법칙을 늘상 보면서도 그 법칙을 우리들 삶으로부터 밀쳐내기만 한다. 우리들은 죽지 않는 것처럼, 늙지 않는 것처럼 이 몸뚱이가 내 것이라는 자아관념에 사로잡혀 태어남과 죽음이라는 법칙을 제대로 볼려고 하지도 않고 볼 줄도 모른다. 


우리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가장 큰 이유는 죽음에 대한 정확한 이해의 부족일 것이다. 우리들은 상대에 대해서 모를때 두렵고 어찌할 바를 모르지만 상대에 대해서 정확하게 꿰뚫고 통찰한다면 대처할 수 있고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 붓다의 가르침이나 불교의 수행이 모두다 죽음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게끔 하는 것이다. 죽음을 알고 그것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록 우리들은 "당하는 죽음이 아니라 맞이하는 죽음"을 가질 수 있고 또한 그만큼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죽음에 대해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슬프하지 않으면서 받아 들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들은 생멸(生滅)을 거듭하여 흘러가는 흐름일 뿐 

우리들 오온이라는 존재는 심찰나적으로 생멸을 거듭하여 흘러가는 흐름일 뿐이다. 어릴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고 1초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다. 우리들은 심찰나적으로 생과 멸을 거듭하면서 흘러가는 하나의 흐름이다. 이를 좀더 쉽게 설명하자면 폭포는 하나의 떨어짐으로 보이지만 앞의 물과 뒤의 물이 엄연히 구분된다. 일렁이는 파도는 앞의 파도가 사라지는 순간 뒤의 파도가 뒤따라 일어난다. 흘러가는 강물은 하나의 흐름처럼 보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 보면 앞의 물과 뒤의 물이 엄연히 구분된다. 하지만 그 앞과 뒤는 서로 이어져 하나의 흐름처럼 흘러간다. 이렇듯 생멸을 거듭하며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져 있는게 오온의 삶이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가운데 문이 있고 문을 중심으로 양쪽에 각각 방이 있다. 왼쪽 방의 사람이 문을 열고 오른쪽 방으로 간다고 할 때 그는 나간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오른쪽 방에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왼쪽 방의 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이렇듯 태어남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한가운데 있는 방문을 열고 다른 방으로 가는 것과 같다. 죽음이 곧 태어남이며 태어남이 곧 죽음이다. 우리들은 윤회속에서 이러한 방문을 열고 닫는 행동을 끊임없이 되풀이 할 뿐이다. 그 방을 벗어나는 것이 윤회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두번다시 태어남을 가져오지 않는 불사(不死)가 곧 열반이다.


인간의 슬픔과 괴로움은 어느만큼일까?

경전에는 외아들이나 부모형제들을 잃고 괴로워하고 슬퍼하는 이들에게 주는 붓다의 가르침이 여러번 등장한다. 그 중에서 인간이 살면서 겪을 수 있는 최악의 고통으로 "빠따짜라 여인"의 이야기를 들고 있다. 이 이야기는 법구경 113에 기록되어 있다. 빠따짜라 여인은 두번째 아이를 낳기 위하여 친정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이를 낳는다. 남편은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다니다 뱀에 물려 죽는다. 그리고 두 아이를 데리고 강을 건나다 한 아니는 물살에 휩쓸려 가고 한 아이는 매가 날아와 채가버린다. 그리고 친정집에 가까이 왔을 때 친정집은 화재로 부모와 형제가 모두다 죽어 버린다. 이런 비통과 절말 고통을 겪은 빠따짜라는 마침내 미쳐 버려서 나체를 길거리를 돌아 다녔다. 이러한 실성한 여인을 붓다는 자비로써 감싸주시고 그녀는 마침내 온전한 정신으로 돌아와 출가를 하게 된다. 그때 붓다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중략)..

이런 비통과 절말 고통을 당한 것이 어찌 오늘뿐이겠느냐?

시작도 알 수 없는 윤회를 되풀이 해 오는 동안에 

자식과 사랑하는 이를 잃고 통곡하는 가운데

그대는 사대양의 물보다도 더 많은 눈물을 쏟아 냈느니라


사대양의 물은 오히려 얼마되지 않는다

애간장을 끊어내는 슬픔에 으스러지고 고통에 짓눌려

윤회하면서 지금껏 흘린 눈물에 비하면 ...


많은 불교도인들은 자신이나 주변의 고통을 볼 때 늘 빠따짜라 여인의 이야기를 기억하면서 자신의 고통과 그녀가 실성할 정도로 겪은 비통을 비교하곤 한다. 세상에 빠따짜라 여인이 겪은 비통과 고통보다 더한 것이 있을까? 이 이야기는 이곳에서는 중학교 불교책에서 아이들에게 가르친다.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고통의 깊이를 분명하게 일깨워 주고 또한 붓다의 가르침에서 그 고통을 헤어나게끔 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살면서 고통과 비애와 슬픔을 맛본다. 피가 마르고 애간장이 끊어지는 그 육체적 정신적 고통은 당사자가 아니고서는 모를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불행과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세월이 약이다라느니 그저 참으면서 견뎌라고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비통과 고통에 눈물짓는 사람들에게 한가닥 희망을 주고 빛을 비춰주고 쉽게 알아듣고 다시 용기를 얻어 일어설 수 있는 현실적인 한 마디는 없을까? 


죽음보다 더 슬픈 것은

우리가 사랑하는 하는 사람을 현생에서 잃어 버린 후 돌고도는 윤회속에서 어디서 언제 다시금 만날지 모르니 그게 진짜 슬픈게 아닐까? 


윤회의 삶속에서 죽음이야 늘상 겪는 것이니 

슬픈 것도 어려운 것도 아니다.

다만 내가 슬퍼하는 것은 

지금 여기서 몸이 무너져 흩어지면

돌고도는 윤회속에서 어디서 언제 만날 수 있을 지 

기약할 수 없으니 

그것이 진짜 슬픈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147(불교 죽음의 이해), 188(윤회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라는 글을 이미 올려 놓았다. 불교인이 자신의 죽음과 주변의 죽음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 들이고 그들을 위로할 것인지 스스로 의문이 든다면 빠따짜라 여인의 이야기이나 끼사고따미 여인(법구경 114)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