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야단법석

불교가 축복의 종교라고?

실론섬 2014. 8. 9. 15:52

연꽃님의 글은 발전상황(?)을 나름대로 순서를 매겨보니 다음과 같다. 1)불교 해탈론 - 2)불교 인식론 - 3)불교 축복론 순이다. 불교가 축복의 종교라고 하면서 불교 축복론을 아마도 한국에서 연꽃님이 제일처음 들고 나온듯 하다. 아니 한국이 아니라 2500년 역사상 남방 북방불교를 막론하고 연꽃님이 제일먼저 입에 담은 듯 하다. 그럼 과연 불교가 축복의 종교이고 축복론이란 말을 사용할 수 있는지 살펴본 다음에 연꽃님의 새로운 주장이 제2의 붓다출현에 버금가는 위대한 선언인지 아니면 악처에 떨어지고 지옥에 태어날 외도의 망발인지 판단해 보기로 하자.


축복이라는 단어는 카톨릭/유대교/무슬림등에서 사용하는 단어임

그가 늘상 사전을 들먹이며 번역문을 비교하듯이 나도 일단 사전에서 '축복'이라는 단어와 그 단어의 사용처를 찾아 보았다.

1) 일반적으로는 다른 사람의 행복을 빌거나 복 받은 사람을 축하한다는 뜻으로 쓰이는 단어. 같은 말로는 강복(降福. 복을 내린다는 의미)이 있다.

2) 종교적 의미로는 일상생활을 할 때 자신들의 행위의 주체자인 신에게 감사를 드리고 신이 자신에게 축복을 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축복의 기도를 하거나 바친다. 카톨릭에서는 개인이 하느님의 뜻 안에서 온전히 쓰임 받기를 비는 청원기도의 하나이다. 종교적 의미로 따지면 축복의 주체는 언제나 신이기 때문에 인간이 인간에게 축복을 줄 수는 없다. 그저 다른 사람에 축복이 내려주시기를 기원할 수 있을 뿐이다. 카톨릭에서는 사제가 직접 인간에게 복을 주는게 아니라 하느님이 사제를 통해 복을 주는 행위이다.(엔하위키미러 참조)


그런데도 불구하고 연꽃님은 불교를 축복의 종교라고 두번세번 자신의 글에서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 근거의 하나로 다음과 같이 길상경(행복경)을 가져와서 망발을 하고 있다.


"etaṃ maṅgalamuttamaṃ.           에땅 망갈라뭇따망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 

 

숫따니빠따 망갈라경(Sn2.4)에 실려 있는 게송이다. 게송에서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 (etaṃ maṅgalamuttamaṃ)”이라 하였다. 여기서 축복이라는 말이 망갈라(maṅgala)이다. 망갈라란은 말은 행복을 뜻하는 수카라는 말과 다르다. 어떻게 다른가? 망갈라(maṅgala)의 뜻은 ‘auspicious(상서로운); royal; lucky; festive. (nt.), festivity; good omen(좋은 징조); ceremony’로 표현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길상(吉祥)’으로 옮겼다."


연꽃님의 옮겨온 사전의 용어대로라면 "이것이야 말로 더 없는 상서로운(좋은 징조)입니다."라고 번역해야 한다. 망갈라라는 뜻 그 어디에도 축복이라는 개념이 들어가 있지 않다. 예전에 그는 망갈라는 행복이 아니고 길상으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한문으로도 길상으로 옮겼고 그러니 행복경이 아니라 길상경이 맞다고 주장했던 작자이다. 그런데 이제와서 축복이란다. 그 자신 스스로 말을 해놓고도 똥 오줌을 못가리고 있다.


망갈라경의 망갈라의 의미는 말 그대로 상서롭고 좋은 징조라는 것이다. 그래서 경전의 뜻을 정확하게 음미한다면 "부모를 모시거나, 법을 듣거나, 열반을 이루는 것은 "좋은 것이다. 즉 상서로운 일이다"라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망갈라경의 귀절은 "... 하니 좋은 일이다, ... 하니 상서로운 일이다."라는 의미이다. 열반을 이루면 좋은 일이고 부모를 모시고 효도하면 좋은 일이고 법을 듣고 보시를 즐겨하며 모두다 좋은 일이다. 이 좋은 일이 스스로에게 축복인가 아니면 행복인가? 누가 누구에게 축복을 내려준단 말인가? 내 스스로의 선한 행위의 결과로 선한 과보가 오니 그게 좋은 일이고 상서로운 일이고 행복한 일이 아닌가? 

 

이어서 그는 다음과 같은 헛소리를 계속하고 있다.


"망갈라는 무엇을 말하는가? 경의 마지막 게송에 실려 있듯이 “모든 곳에서 번영 (Sabbattha sotthiṃ)”하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축복이라는 뜻의 망갈라는 지금 여기에서 행복 뿐만 아니라 ‘미래의 번영’까지 뜻한다. 이렇게 본다면 행복이라는 뜻의 수카 보다 축복이라는 뜻의 망갈라가 더 포괄적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인지 테라와다 불교전통에서는 망갈라경이 예불문으로 사용되고 있다. 동시에 불자들의 수호경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부처님이 ‘수카경’이라 하지 않고 ‘망갈라경’이라 한 이유일 것이다." 


위의 글을 읽어보면 정말 웃겨서 글을 더 쓰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자신 스스로 망갈라가 상서로운,좋은 징조라고 하여 놓고 곧바로 축복이라고 횡설수설하고 있다. 금붕어 머리도 아니고 1초전의 일을 까마득히 잊어버리는 것이다. 상서롭고 좋은 일 = 축복 이라고? 상서롭고 좋은 일은 그냥 상서롭고 좋은 일일 뿐이다. 그게 어떻게 타종교에서 사용하는 축복과 같은 말이 되는가? 차라리 상서롭게 좋은 일 = 행복이라는 단어와 더 일치한다. 그래서 행복경이라고 번역하여도 전혀 무리가 없다. 망갈라 경을 축복경이라고 하든가 아니면 맨 마지막 귀절을 "축복입니다"라고 옮기는 것은 외도의 짓거리일 뿐이다. 절대로 축복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서는 안된다.


그는 또한 늘상 와보고 직접 경험하지도 않았으면서 마치 자신이 경험하고 직접 본것처럼 거짓말을 한다. 즉양심과 부끄러움이 전혀 없다. 그는 말하길 "테라와다 불교전통에서는 망갈라경이 예불문으로 사용되고 있다. 동시에 불자들의 수호경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라고 하면서 마치 자신이 직접 경험하고 본것처럼 단언하고 있다. 진짜로 말을 할려면 "...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라든가 아니면 사용되고 있다고 00에게 들었다"라고 해야할 것이다. 일전에 여러번 본인이 말하길 자비경, 보배경(보석경), 행복경은 일상적으로 암송하는 경전이고 수호경으로 이용된다고 했더니만 마치 자신이 직접 보고 경험한 것처럼 거짓말을 늘어놓고 있는데에는 정말 이 작자의 양심이 어디에 있는지 궁금하기만 하다. 실제 테라와다에서는 예불문에는 이 세가지 경전이 사용되지 않는다. 대신에 회사 개업, 생일, 새집으로 이사등등의 중생들의 일상적인 생활에 사용되는 경전이고 특히 수호경으로는 자비경이 주로 사용된다. 


양심과 부끄러움이 없는 행동은 불교를 퇴보시키는 일곱가지 행위중의 하나라가 붓다께서 엄중하게 경고하셨다. 또한 양심과 부끄러움을 안다면 불.법.승 삼보는 퇴보하지 않을뿐더러 개인적으로는 열반에 더욱더 가까이 다가선 것이라고도 하셨다. 부끄러움과 양심이 없는 인간은 소 개 돼지와 똑 같다.  


불교는 서원.축원.염원등의 말을 사용한다

불교는 축복이라는 단어 대신에 "서원"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일견 축복이라는 단어와 비슷해 보인다고 생각한다면 이건 정말 서글픈 일이다. 전혀 그 의미가 다르다. 오늘날 대승불교에서 부처님이나 보살님들을 마치 절대신인 것처럼 만들어 놓고 그 앞에 무작정 비는 일상적인 모습을 연상하면서 서원이니 축원이니 염원이니하는 단어를 합쳐보기에 그런 서글픈 오해들을 하는 것이다.


참로고 붓다도 서원을 세웠다. 그분의 서원은 "중생들이여, 행복하라 안락하라 편안하라"라는 세가지 서원이다. 그럼 붓다가 절대신에게 이걸 빌었나? 카톨릭처럼 절대자에게 세가지 축복을 달라고 빌었나?


(글이 많이 길어 질 것 같아서 불교에서의 서원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대승불교방에 보시면 제가 글을 올리는 방에 가시면 "대승불교 서원의식의 초기불교적 모습에 대한 일고찰"이라는 글이 있으니 관심이 계시다면 읽어보길 권합니다.)  

 

불교의 행복론 

연꽃님은 불교의 행복론을 그 스스로 인정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걸 인정하는 순간에 지금까지 쓴 글들의 90%는 지워야 하기 때문이다. 예전에 이 작자가 불교의 해탈론을 주장할 때 나는 불교의 행복론을 주장하면서 반박을 했었다. 그리고 불교의 행복이 욕망의 충족에서 오는 만족감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라고 주장을 했다. 


더욱 가관인 것은 불교적 행복과는 전혀 상관도 없는 현법열반론을 들먹이면서 불교의 행복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마치 세속적 욕망의 충족을 행복이라고 하고 있으며 이러한 사람들은 현법열반론자들이라는 등식을 세우는 것이다. 즉 현법열반론 = 세속적 만족과 충족 = 행복 이라고 제 멋대로 등식을 만들어서 의도적으로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의 행복은 보시와 자비 그리고 내 것을 버리고 욕탐을 줄이고 십선행을 행하는 것에서 오는 것이다.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거나 갖고 싶은 물건을 살 수 있어서 오는 충족감이나 만족감에서 오는 감정을 불교적 행복이라고 하지 않는다. 


또한 해탈열반은 지금 바로 여기에서 이루고 획득해야 하는 것이다. 죽어서 얻는게 아니라는 것이다. 죽는다면 다시 태어날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생의 지금 여기 이곳에서 불사(不死)의 문을 여는 것이 열반이라고 한다. 이를 한자어로 번역하자면 현법열반이라고 말한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현생열반, 지금여기서 열반등의 다른 단어로도 번역할 수 있지만 그 의미는 모두다 똑 같다. 


그런데 이 작자는 범망경의 62 외도중의 하나가 불교적 현법열반을 이야기했다고 계속하여 우기고 있다. 즉 그들의 현법열반론과 불교에서 말하는 현법열반론을 햇갈리고 그리고 같은 것이라고 착각을 하는 것이다. 물론 어떤 글에서는 이걸 구별하다가도 또 원위치한다. 한마디로 머리속이 쑤세미처럼 되어 있어서 전혀 개념정리가 안될 뿐더러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공격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과거에 한 말을 하루 아침에 번복하고 표정하나 바뀌지 않고 거짓말을 해대고 있는 것이다. 


범망경에서 붓다는 현법열반론을 주장하는 외도가 왜 같은 단어를 사요하면서도 불교가 아니고 외도인가를 다음과 같이 분명히 밝히고 있다. "바로 이런 자아야말로 지금 여기에서 구경의 열반을 실현한 것입니다." 라고 하기 때문이다. 자아가 아닌 무아를 주장하는 불교의 현법열반론과 자아가 열반을 실현한다고 주장하는 외도들의 현법열반론이 어떻게 다른지 새삼스럽게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불교를 왜곡하는 작자들이 태어날 곳은

돼지에 비단옷이라는 말이 있다. 전혀 어울리지 않을 때 이런 격언을 사용한다. 또한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하고 있네라든가 자다가 봉창 뜯는 소리하고 있네라는 속담도 있다. 얼토당토 않는 말을 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속담이다. 행복경에 보면 자기 분수를 알고 자기 분수대로 사는게 행복이라고 말하고 있다. 읽지도 못하는 영어신문이나 외국어로 된 원서를 옆구리에 끼고 가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이 작자의 글을 보면 늘 오버랩되어 떠 오른다. 


차라리 연꽃이라는 사람이 불교를 접하지 않았다면 또는 자신의 고백처럼 그냥 미션스쿨에 다녔으니 계속하여 기독교라도 믿었다면 악업을 덜 짓는 결과가 되었을 것이다. 불교에서 가장 무거운 죄는 불.법.승 삼보를 비난하고 왜곡하는 것이다. 붓다의 가르침을 왜곡하는 것은 붓다의 얼굴에 침을 뱉는 행위와 똑같다. 어울리지 않는 빠알리어 경전을 집안에 모셔놓고 그것도 모자라서 사전을 가져와서 이리저리 번역 비교하는 그러한 시간에 처자식 위해서 스스로 닭튀김이라도 만들어 주는게 더 복을 짓는 것이고 사람으로 태어난 도리를 조금이라도 하는 것일 것이다. 


양심을 속이고 거짓말을 하고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들이 태어날 곳은 어디인가? 붓다께서는 엄중하게 경고하고 있다. "그들은 마치 누가 데려다 놓는 것처럼 반드시 지옥에 태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