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야단법석

고디까, 왁칼라, 찬나 비구는 왜 자살하였냐고?

실론섬 2014. 8. 2. 09:32

연꽃님이 요즈음 두어번 글에 '죽음'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글을 올리고 있다. 최근 그는 "고디까,왁까리,찬나 세 비구는 왜 자살하였나?" 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리고 있다. 불교에서의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정확한 성찰없이 그냥 여기저기서 주워온 글로 짜깁기를 하고 있다. 그의 글을 조목조목 비판해 보겠다.


aa) 불교에서는 수행이 아닌 자살로써 아라한이 되는 방법이 있다고?

연꽃님은 찬나 비구의 자살을 들먹이면서 언급하기를 "초기 경전에서는 선정과 통찰로서 아라한이 된 제자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런데 놀랍게도 자살로써 아라한이 된 이야기도 들어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이야기가 '찬나의 경(S35.87)'이다." 라고 하면서 망발을 서슴치 않고 있다. 즉 선정과 통찰로서 아라한이 되기도 하지만 자살로써 아라한이 되었다는 말도 안되는 헛소리를 하는 것이다. 불교에서 자살로써 아라한이 되는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왜 이런 망발이 쉽게 나올까? 한마디로 빈 깐통이기 때문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찬나 비구는 자살하기 이전에 이미 생사윤회를 초월한 아라한의 지위에 있었다. 격심한 질병으로 인하여 더 이상 생존하려는 마음이 생기지 않았기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것이다. 즉 자살을 함으로써 아라한이 된 것이 아니다. 경전 어디에도 찬나 비구가 자살함으로써 비로소 아라한의 지위를 얻었다는 식의 말은 없다.


bb) 고디까 비구의 경우 - 그도 자살할 때는 이미 아라한이었다.

연꽃님은 다시 고디까 비구의 경우를 예를 들면서 이렇게 망발을 하고 있다. "고디까의 경우처럼 일시적 해탈에 따라 자살을 하는 경우 현상을 알아차려 아라한이 됨과 동시에 완전한 열반에 이르게 될 것이라 한다. 이는 경에서 부처님이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지혜로운 이들은 이처럼 삶에 얽매이지 않고 행동하네. 갈애를 뿌리채 뽑아서 고디까는 완전한 열반에 들었네(S4.23)"


고디까 비구는 심한 병으로 심해탈을 얻고 상실하는 것을 6번이나 반복하였다. 그는 결국 마지막 해탈을 얻었을 때 자살을 한다. 즉 아라한이 된 후에 자살을 한 것이지 자살을 하여 아라한이 됨과 동시에 완전한 열반을 얻은게 아니다. 위에서 언급한 붓다의 말씀은 고디까 비구가 무여의열반을 성취했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확인해 주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cc) 왁칼리 비구 

병으로 격심한 고통에 시달리는 왁칼리 비구를 문병한 붓다는 그 유명한 "여래는 보는 것이 곧 법을 보는 것이고, 법을 보는 것이 곧 여래를 보는 것이다"라는 충고를 한다. 즉 색온등의 오온에 집착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왁칼리 비구는 무상 고 무아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수행하여 아라한이 된 후 바로 자살을 한다. 또한 왁칼리 비구의 경우는 붓다는 "  “밧칼리 비구여! 두려워 마라. 두려워 마라. 너의 죽음은 나쁜 것이 아니다. 너의 운명은 나쁘지 않다" 라고 자살을 방조하거나 허용하고 있는 점이다. 이 부분은 여러 논쟁이 있을 수 있으나 붓다의 진의는 아라한이 된 이후  질병으로 더이상 무의미한 육신의 고통에 휘말려 있을 필요가 없다는 극히 현실적인 판단에 의해서라는 것이다. 


그런데 연꽃님은 자신의 글에서 붓다께서 무아등에 대해서 충고를 " 왁칼리가 자결하였을 때 이 가르침을 실천하여 아라한이 되었기 때문이다." 라고 전혀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다. 그의 글은 자결후에 가르침 실천하고 아라한이 되었다는 것이다. 죽고 난뒤에 아라한이 되었다고 다시한번 헛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dd) 연꽃님의 망발의 극치

"세 빅쿠는 모두 칼로 목을 찔러 자결하였지만 죽는 순간 현상에 대한 통찰지를 얻어서 아라한이 된 것이다. 그리고 육체적 죽음과 함께 완전한 열반에 든 것이다. 이렇게 죽음과 함께 동시에 두 가지가 이루어지는 것에 대해서 사마시시라고 한다" 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세 비구의 예를 들면서 자살을 통하여 아라한과를 성취했다고 완전히 얼이 빠진 사람처럼 되뇌이고 있다. 그는 또한 사마시시(samasisi)를 언급하면서 자살과 동시에 아라한이 되었고 그리고 완전한 열반에 들었으니 두 가지를 성취했고 따라서 세 비구는 사마시시를 성취했다고 얼토당토 않는 소리를 하고 있다.


열반에는 유여의 열반과 무여의 열반이 있다. 아라한이 자신의 육신을 가지고 살아있는 상태를 유여의열반이라고 하고 이를 찌꺼기가 남아 있는 열반이라고 한다. 즉 아직은 육신이 그대로 있는 열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라한이 육신이 무너져 화장을 하고 나면 아무것도 남는게 없다. 이를 무여의열반이라고 하고 완전한 열반이라고 한다. 즉 아라한이 죽음으로써 찌거기가 남아있는 열반에서 육신이 없어졌기에 찌거기가 남아 있지 않은 완전한 열반을 성취한 것이다. 이를 두고 사마시시라고 하는 것이다. 


ee) 전재성 박사님의 잘못된 생각

"부처님 자살을 허용했어요... 그것도 아라한에 한해서 ... 아라한이라면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탐욕이 없고 분노가 없고 미움이 없고 어리석음이 없는 사람에 한해서 허락을 했어요.." 라고 하고 있다. 물론 경전에는 세 비구의 자살 이야기가 나온다. 모두다 아라한이 된 후에 치유할 수 없는 중병에 시달려서 결국 자살을 했기에 비난받을 수 없고 허물없는 자살이라고 한다. 멀쩡한 아라한의 자살이 허용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붓다는 왜 아라한들의 자살을 방조내지 허용했을까?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은 아라한이 자신의 수명을 포기하는 원인에 대해 논하고 있다. “아라한이 스스로 자기가 세상에 머물러도 다른 사람을 이익되게 하거나 안락되게 하는 일이 적음을 관찰한다. 혹은 병 등의 고통이 자신의 육체를 핍박한다.” 정법(正法)으로 중생을 더 이상 요익되게 하지 못하면 이 세상에 더 머물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阿毘達磨俱舍論》(大正藏 29, p.15下). “彼阿羅漢自觀住世於他利益安


스스로 자살하는 경우의 예로 육체의 격심한 질병이 고려되고 있음을 본다. 육체의 질병이 너무 심한 경우, 당연히 중생들에게 설법하기 힘들 것이다. 질병으로 인한 육신의 고통을 제거하기 위하여 아라한이 자신의 목숨을 버림이 허용된다는 것이다. 아라한의 자살 허용은 일차적으로 병고에 근거한 것이지만, 아울러 중생 교화를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사실과도 맞물러 있다. 결론은 아라한의 자살은 중생 교화를 할 수 없는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자리이타의 실천이 어려울 때에 한정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자리이타적인 죽음은 붓다의 전생이야기(《자타카》)에 많이 등장하고 있다. 굶주린 호랑이에게 보살이 자신의 육신을 보시하는 경우나, 허기에 지친 수행자를 위해 보살(토끼로 태어난)이 장작불로 뛰어든 이야기, 자신의 육신을 매에게 보시한 이야기 등은 이른바 종교적인 자살, 보살행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 《자타카》에 나오는 자살은 오로지 깨달음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으로, 그것은 이타적인 성격을 그 특징으로 삼고 있다. 이런 종교적인 자살은 결코 이기적인 것이 아님을 숙지할 필요가 있다.


ff) 왜 니까야가 위대하냐고?

전재성 박사님은 "니까야가 정말 위대하다는 것은 부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솔직하기 때문에 그래요. 아니 부처님 제가 가운데 자살한 사람이 있다고 하면 누가 부처님을 따르겠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다 덮어 놓았을 것입니다. 기록에 안 남겼을 거라구요! 그런데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건 조작된 경전이 아닙니다."


물론 이 말은 니까야가 위대한 경전인 여러 이유중의 하나로 언급할 수는 있다. 그런데 경전에 기록하여 놓은 아라한의 자살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지 않은 듯 하다. 경전의 아라한의 자살에 대한 기록은 앞뒤 전후 사정을 충분히 파악한 후에 언급을 할 사항일뿐이고 더우기 자살을 기록해 놓았다고 하여 니까야 경전이 위대한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런식이라면 바이블은 니까야보다 몇천배 더 위대한 가르침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바이블에는 근친상간도 모자라서 부모형제간의 칼 부림과 수많은 살인등이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다. 전 박사님의 논리대로라면 이런 것을 숨기지 않고 기록해 놓았기에 바이블은 니까야보다 몇천배 위대하다고 주장해도 할 말이 없게 되는 것이다.


더우기 연꽃님 같은 사람들이 붓다의 제자들 자살 허용 이유나 경전 기록등에 대해서 전혀 엉뚱한 망발을 쓸 때 그것을 아무런 생각도 없이 옮겨오는 화를 자초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불교의 자살이나 아라한의 자살에 대한 올바른 것은 제가 글을 올리는 방에 가시면 "누가 허물없이 자살할 수 있는가" 라는 제목으로 글이 올려져 있아오니 관심이 있으신 분은 찾아서 일어 보시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