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야단법석

62가지 외도들중 하나인 현법열반론이란 어떤 것인가?

실론섬 2014. 8. 9. 15:54

혼자 상상하고 혼자 결론내고 혼자 떠드는 글들

연꽃님은 계속하여 현법열반론을 글에서 들먹이고 있다. 그리고 마치 불교의 현법열반론 = 세속적 행복론 = 외도의 현법열반론과 같다는 등식으로 억지를 부린다. 그는 글에서 끊임없이 행복을 주절거리면서도 결코 불교적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을 하지 않는다. 불교적 행복이 무엇인지 여러번 반박했음에도 이를 의도적으로 애써 무시하고 마치 불교의 행복론을 주장하는 불자들을 세속적 욕망의 충족이 행복인냥 말한다고왜곡하는 이유는 다음 두가지 뿐이다.


1) 불교의 행복이 무엇인지 충분하게 반박하고 그리고 다른 일반인들도 얼마든지 알고 있는 것을 자신만 모른다면 그건 바보 멍청이고 그리고 저열한 작자일 뿐이다. 이런 작자는 불자도 아닐뿐더러 더이상 상대를 가치가 없다. 

2) 불교의 행복이 무엇인지 반박글을 통해서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모른척 한다면 이것은 양심과 부끄러움이 없는 행동이다. 붓다는 불.법.승이 발전하고 향상하는데 7가지 걸림돌중의 하나로 양심과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을 들고 있다. 양심도 부끄러움도 없다면 이건 소 개 돼지와 똑같다. 인간취급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어떤 현법열반론이 외도의 주장인가?

이해를 쉽게하기 위해서 연꽃의 글을 옮겨와 본다.

"1) 지금 여기를 강조하면 현법열반론이 된다. 특히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게 살면 그만이다라는 사고방식을 가졌을 때 그렇다. 흔히 말하는 '행복론'이 현법열반론으로 흐르기 쉽다는 것이다. 

2) 부처님은 '지금 여기에서 즐겨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지금 여기에서 또는 현세를 즐겨라라고 말하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이 아니다."


위와같은 연꽃의 주장이 성립을 할려면 누군가가 불교의 행복이 저렇다고 하고 주장한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저런것을 두고 불교의 행복론을 주장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히려 불교의 행복은 자비 보시행과 그리고 욕심을 줄이는 것에서 오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럼에도 마치 불자라는 특정인 누군가가 불교의 행복이 위의 것이다라고 주장했다는 식으로 억지를 부리고 있다. 아무도 그렇게 말한 사람이 없는데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불자들을 위해서 범망경의 62가지 외도중의 하나인 현법열반론자들이 어떤 것을 주장하는지 살펴보는 뜻에서 경전 전문을 옮겨온다.


지금 여기에서 열반을 실현한다고 주장하는 자들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문.바라문들은 지금 여기에서 열반을 실현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인데 5가지 경우로 지금 여기에서 구경의 열반을 실현한다고 천명한다. 그러면 무엇을 근거로 하고 무엇에 의거해서 그들 사문.바라문 존자들은 지금 여기에서 열반을 실현한다고 주장하는 자가 되어 5가지 경우로 지금 여기에서 구경의 열반을 실현한다고 천명하는가?


1) 지금 여기 - 나는 다섯 가지 감각적 욕망을 마음껏 즐기기 때문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은 이런 주장을 하고 이런 견해를 가진다. '존자여, 이 자아는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을 마음껏 충분히 즐깁니다. 존자여, 이런 까닭에 이 자아는 지금 여기에서 구경의 열반을 실현한 것입니다. 이와같이 어떤 자들은 지금 여기에서 구경의 열반을 실현한다고 천명한다.


2) 지금 여기 - 희열과 행복이 있는 초선을 구족하여 머물기 때문

"비구들이여, 이것을 두고 다른 사람은 이와 같이 말한다. '존자여, 그대가 말한 자아는 참으로 존재합니다. 나는 결코 부정하지 않습니다. 존자여, 그러나 그대가 설한 자아가 실로 그것으로 지금 여기에서 구경의 열반을 실현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무엇때문인가요? 존자여, 참으로 감각적 욕망이란 무상하고 괴로우며 변하기 마련이며 변하고 바뀌는 성질이기 때문에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 절망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존자여, 그래서 이 자아는 감걱적 욕망을 완전히 떨쳐 버리고 불선업을 떨쳐 버린 뒤,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있고 떨쳐버렸음에서 생겼으며, 희열과 행복이 있는 초선을 구족하여 머뭅니다. 존자여, 바로 이런 자아야 말로 지금 여기에서 구경의 열반을 실현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어떤 자들은 지금 여기에서 구경의 열반을 실현한다고 천명한다."


3) 지금 여기 - 3선을 구족하여 머물기에

4) 지금 여기 - 4선을 구족하여 머물기에 .. 중략..."


위 경전의 귀절을 잘 살펴보면 두 가지 특징을 금방 알 수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네 가지 선정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고 그리고 모든 것은 자아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불교의 4선정은 8가지 해탈의 하나이며 또한 신통력을 가질 수 있고 열반에 이르는 구차제정의 순서이기도 하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인가? 경전문구에는 '다른 사람은 이와 같이 말한다. 어떤 자들은 천명한다.' 라는 말로 시작과 끝을 맺고 있다. 즉 4선정을 구족하되 불교의 무아의 개념이 아닌 자아를 전제하고 그 자아가 4선정을 구족하여 머물고 열반을 획득한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을 가르켜 '어떤자, 다른 사람은' 이라고 올바른 4선정과 분명하게 선을 긋고 있는 것이다.


경전은 분명하게 다섯가지 예를 들고 있다. 첫번째를 제외하고는 4선정의 구족을 말하고 있다. 그 어디에 현법열반론 = 세속적 쾌락추구나 욕망충족의 행복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는가? 4선정이 어떤 경지인지 모르는가? 초선만 구족해도 감각적 쾌락을 떨쳐 버리게 된다. 그런데도 연꽃은 5가지 중에서 4가지는 쏙 빼버리고 계속하여 1번째만 들먹이며 현법열반=세속적 행복 이라는 식으로 궤변을 늘어 놓고 있다.


그 어느 경전 귀절에도 지금 여기를 강조하다보면 까딱잘못하면 현법열반론에 빠지거나 세속적 욕망을 충족하는 것을 불교의 행복이라고 오해하기 쉽다는 식의 연꽃과 같은 저열한 사고나 이해를 할만한 구석이 전혀 없다. 오히려 같은 4선정을 획득함에도 불구하고 외도와 불교가 어떻게 다른지를 확연하게 구분하고 알 수 있는 좋은 가르침인 것이다. 


외도들도 비상비비상처를 구족한다

몇번이고 말하지만 외도들도 구차제정에서 초선부터 비상비비상처까지를 구족하고 머물 수 있다. 그들도 신통력을 발휘하고 해탈을 성취한다. 하지만 불교와 다른게 딱 한가지 있다. 그들은 결코 상수멸정에 이르러 열반은 획득하지 못한다. 왜? 그것은 자아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붓다도 출가하여 두명의 요가수행자를 찾아가 비상비비상처까지 획득했지만 결국 그곳을 떠나 6년간의 고행과 네란자라 강가에서 7일간 선정수행후에 마침내 상수멸정에 이르고 열반을 획득한다. 


외도들은 4선정에 이르지만 그것을 자아가 획득하고 구족하여 머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불교는 

자아를 배척한다. 따라서 붓다는 같은 4선정에 이르지만 자아를 전제로 한 4선정이기에 궁극적 경지인 열반에 이를 수 없고 또한 불교와 구분하기 위하여 '어떤자들은, 다른 사람은...' 이라고 분명하게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는 현법열반이다.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불교는 현재 지금 여기를 강조하고 또 강조한다. 과거도 미래에도 매달리거나 갈애를 일으키지 말라고 한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다. 해탈열반이 죽어서 오는게 아니다. 현재 이곳 여기에서 획득하는 것이다. 감나무 밑에서 감 떨어지기만 기다린다고 열반이 오지 않는다. 현생에서 죽으면 어느곳에 태어날지 모른다. 인간의 몸을 받을지 설사 인간의 몸을 받더라도 불교를 다시 접할 수 있을지 그것도 확신할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의 몸을 받은 지금 이곳에서 열심히 선행을 쌓고 수행을 하라고 독려한다.


연꽃은 다음과 같이 경전 문구를 옮겨 와서는 완전히 삼천포로 빠지는 말을 하고 있다. 즉 "지금 여기 이곳에서라는 말은 여기서 쾌락을 즐기고 즐겨라는게 아니고 관찰하라는 것이다."  일견 맞는 말이다. 불교는 사띠를 강조한다. 과거도 미래도 아닌 지금 여기에서 순간순간 일어나고 소멸하는 것을 관찰하고 꿰뚫어 통찰하는 지혜를 가질 것을 누누이 강조한다. 문제는 관찰만 할 것이 아니라 즉 카메라 렌즈가 대상을 파악하는 것에 머물지 말고 그것을 꿰뜷어 통찰하라고 한다. 다시말해서 수행을 강조한다.

 

그리고 현재 일어나는 상태를 

그때 그때 잘 관찰하라

정복되지 않고 흔들림없이 

그것을 알고 수행하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불교는 지금 이 순간을 관찰하라는 것이다." 라고 말을 끊어 버린다. 즉 그 자신이 경전을 옮겨왔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귀절인 "꿰둟어 통찰하고 수행하라."라는 말은 언급을 안한다. 쉽게 말해서 저열한 수준의 이해에서 머물고 만 것이다. 그의 모든 글이나 주장을 보면 과거나 지금이나 단 한치의 나아감을 볼 수 없음을 이번에도 극명하게 알 수 있다. 그는 이어서 "지금 여기 현재를 즐기지 말고 관찰하는게 불교이다."라고 한다. 누가 그게 불교가 아니라고 한 사람이 있는가? 왜 혼자서 말을 만들어 내고 혼자서 대단한 깨달음이라도 얻은냥 결론을 내고 있는가? 한마디로 가관이다. 하기사 짧은 이해력과 쑤세미처럼 얽힌 머리속으로 어떻게 불교의 가르침을 알겠는가? 


불교는 행복을 추구하는 종교이다

세속적 욕망의 충족이나 쾌락의 만족감이 행복이라고 생각한다면 중생들은 끊임없이 그러한 행복을 추구하고 만족할 줄 모르게 된다. 불행한 사람은 그러한 행복을 추구하게 되고 이미 만족한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만족하기 위해서 몸부림치고 갈애를 일으키게 된다. 이건 불교의 행복이 아니다.


하지만 자비 보시 나의 욕망을 줄이고 내것을 들어내 남에게 줄때 그 빈자리를 가득 채워지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불자들은 결코 불교적 행복에 대해서 갈애를 일으키거나 몸부림치지 않는다. 욕심과 탐욕을 버리고 자비와 보시가 일상화될 때 나의 삶은 평온하고 안온하고 행복해진다. 따라서 불교는 오탁악세에 물들어 있는 중생세계를 향하여 "중생들이여, 행복하라, 안락하라, 평온하라"라고 외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