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야단법석

자등명 법등명이 불교에서 말하는 믿음이라고?

실론섬 2014. 8. 18. 11:55

왜 삼보가 귀의처가 되는가?

1) 부처님은 어떤분 이시기에 중생들의 귀의처가 되는가?  그 이유는 바로 아래와 같이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 입니다.

 

(1) 아라항(Araham. 應供)

      모든 번뇌로 부터 벗어 난 분. 번뇌의 적을 모두 죽인 분. 번뇌가 있을 때 나쁜 습관을 모두 죽인 분

(2) 삼마 삼붓도(Samma Sambuddho. 正等覺者)

     모든 법을 바르게 직접 스스로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신 분

(3) 위짜짜라나 삼빤나(Vijjacaranasampanna. 明行足])

     지혜와 수행을 다 아시는 분. 지혜와 덕행을 함께 갖추신 분

(4) 수까또(Sugato. 善逝)

      잘 가시는 공덕을 지니신 분. 붓다가 가시는 길은 깨끗하여 허물이 없어서 적당 하시다.

      알맞은 성스러운 道(도)로써 가시기 때문에 열반(닙빠나)에 집착없이 가신다.

(5) 로가까위두(Lokavidu.世間解 )

     중생들 세간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

(6) 아눗따로(Anuttaro. 無上士)

          위 없으신 분. 붓다보다 공덕이 더 큰 이는 없기 때문이다.

          붓다의 지계 공덕보다 더 넘치는 이는 없다.

          붓다의 선정 공덕보다 더 넘치는 이는 없다.

          붓다의 지혜 공덕보다 더 넘치는 이는 없다.

          붓다의 번뇌 벗어남의 공덕보다 더 넘치는 이는 없다.

          붓다의 자비 공덕보다 더 넘치는 이는 없다.

(7) 뿌리사 담마 사라티(Purisadhammasarathi. 調御丈夫)

     어리석은 자를 으뜸되게 잘 다스리는 분. 거친 이를 제도하여 잘 삶하게 하시는 분

(8) 삿타데와마누상(Satthadevamanusam. 天人師)

     모든 천인과 인간의 스승이신 분

(9) 붓도(Buddho. 覺者)

     깨달으신 분. 존재의 실상을 깨달으신 분

(10) 바가와(Bahgava.世尊 )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신 분 

 

2) 법(붓다의 가르침)은 어떠한 가르침이기에 중생들의 귀의처가 될 수 있는가? 바로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기 때문에 모든 중생들의 귀의처가 되는 것 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거룩하시고 존경 받는 붓다께서 잘 설하는 가르침은

 

현세에 유익한 가르침이며,(현재에서 증명되며)

시간을 초월하는 가르침이며,(때와 상관없이 과보가 있으며) 

와서 보라는 가르침이며,

(열반에의) 길로 이끌어 주며,

지혜 있는자 누구나 스스로 증득 할 수 있는 것이다.

Svaakkhaato bhagavataa dhammo, sanditthiko, akaariko, ehipassiko, opanayiko,

paccattam veditabbo vi~n~nuuhi ti.

 

3) 승가는 어떠한 분들이 모여 있는 곳이기에 중생들의 귀의처가 될 수 있는가? 승가의 모임은 바로 다음과 같기 때문에 모든 중생들의 귀의처가 되는 것 입니다

 

붓다의 제자이신 스님들은

 

길을 잘 걷고 있으며

길을 바르게 걷고 있으며,

길을 지혜롭게 걷고 있으며,

길을 충실하게 걷고 있으니

저 네 쌍의 분들, 여덟 단계에 계신 분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붓다의 제자분들은

 

공양을 올려 마땅하며,

시중들어 마땅하며,

보시하여 마땅하며,

합장드려 마땅하며,

이 세상에 다시없는 복전(福田)이다.  

 Supa.tipanno bhagavato saavakasangho, uujupatipanno bhagavato saavakasangho, ~naayapa.tipanno bhagavato saavakasangho, saamicipatipanno bhagavato saavakasangho, yadidam cattaari pursayugaani atthapurisapuggalaa esa bhagavato saavakasangho, aahuneyyo, paahuneyyo, dakkhi.neyyo, a~njalikara.niiyo anuttaram. pu~n~nakkhettam lokassaa ti.


불교에서 믿음이란 무엇인가? 

이것에 대해서는 여러번 글을 올려 놓았다. 여기서는 불교의 믿음과 관계된 빨리어 술어들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1) 빠사다(pasādā): ‘깨끗한 믿음’으로 번역되는 빠사다는 마음이 가라앉은 상태, 즉 ‘고요함, 편안함’을 나타낸다. 아울러 그런 고요함처럼 깨끗한 믿음을 뜻한다. 오까빠나(okappana)와 동의어이다.

 

(2) 삿다(saddhā): ‘믿음’으로 번역되는 삿다는(saddha)는 전통적으로 srad(가슴)+√dha(놓다)로 분석한다. 그래서 ‘마음을 어떤 대상에 놓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믿음은 부처님의 깨달음을 믿고 삼보에 귀의할 때 생긴다. 하지만 이 믿음은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라 조사와 탐구를 통한 합리적인 이해에 기반을 둔 확신을 뜻한다. 그래서 영어권에서도 faith, belief보다는 confidence로 많이 번역한다.

 

전통적으로 이 삿다는 모든 선법(kusala-dhamma)의 씨앗이라 불린다.(Sn.77) 주석서의 설명에 따르면 그 이유는 깨끗한 믿음(okappana/pasāda)과 신해(adhimokkha)가 마음에 일어나도록 고무하여 윤회의 폭류를 건너기 위한 여정(pakkhadhana)을 떠나도록 하기 때문이다. 또한 믿음은 다섯 가지 기능(五根, panca-indriya)과 다섯 가지 힘(五力, panca-bala) 중의 하나이다.

 

(3) 아디목카(adhimokkha): ‘확신, 결단, 결심’으로 번역되는 아디목카는 adhi(향하여)+√muc(벗어나다. 해탈하다)에서 파생된 명사로 ‘해탈을 향한다는 것’이 그 기본의미이다. 즉 불·법·승 삼보에 확신을 가지는 것은 곧 해탈로 향하는 기초가 완전히 다져졌다는 의미라 할 수 있다. 이 용어는 경에서보다는 논서에서 많이 나타나는데, 믿음의 요소로 나타날 때는 삿다(saddhā)와 빠사다(pasādā)에 바탕한 확신이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중국에서는 신해(信解)라고 옮겼다.

 

이처럼 불교에서 말하는 신앙은 합리적인 이해와 통찰에 기반을 둔 것으로 ‘와서 보라(ehipassika)’는 것이지 ‘와서 믿으라’는 것이 아니다. 무조건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고 와서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이다. 빨리 경 도처에서는 깨달음을 일컬어 ‘티 없고 때 묻지 않은 법의 눈(法眼, dhamma-cakkhu)이 생겼다.(S.V.423)'라고 묘사하고 있고, 지혜인 냐나(nāṇa)와 봄(dassana)의 합성명사인 냐나-닷싸나(智見, nāṇa-dassana)라는 용어가 중요한 술어로서 많이 나타난다. 그만큼 불교에서는 맹목적 믿음보다는 보고 아는 것을 중요시하고 이것을 신행(信行)의 출발로 삼고 있다. 


자신을 섬으로 하고 의지처로 하라는 뜻은?

이 부분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여러 불자들에게 많은 해석상의 오류와 혼돈을 가져오는 부분이다. 불교는 무아와 무상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자신을 의지처나 섬으로 삼으라고 한다면 이건 자아를 인정하고 무상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뭔가 변하지 않고 고정된 것이 있는냥 오해를 하는 것이다. 한국불교는 법등명자등명을 유아론적 입장에서 설법하고 말하는 것을 보게 된다. 정확한 붓다의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오해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렇다면 자등명 법등명이 나오는 대반열반경의 전문을 한번 살펴보자.


아난다여, 그러므로 여기서 비구들은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말라.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말라(Tasmatihananda, attadipa viharatha attasarana anannasarana, dhammadipa dhammasarana anannasarana)


아난다여, 그러면 어떻게 비구는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는가? 어떻게 비구는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는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세상에 대한 탐욕과 근심을 초월하여 알아차리고 마음새기는 자 되어 머문다(마음 새김을 확립하여 머문다).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며 머문다. 세상에 대한 탐욕과 근심을 초월하여 알아차리고 마음새기는 자 되어 머문다.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며 머문다.세상에 대한 탐욕과 근심을 초월하여 알아차리고 마음새기는 자 되어 머문다.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문다.세상에 대한 탐욕과 근심을 초월하여 알아차리고 마음새기는 자 되어 머문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비구는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며,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으며,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는다.


아난다여, 어떤 비구가 누구든지 내가 죽고 난 다음일지라도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마 머물고,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으며, 법을 섬을 삼고, 법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으면서 수행과 정진을 하는 비구는 남들보다 수승한 자가 될 것이다. 


이 붓다의 가르침에 대해서 더이상 설명이 필요할까? 한마디로 방일하지 말고 사념처 수행을 하며 "깨어있는 자"가 되라는 것이다. 자아나 유신견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태반의 사람은 '자신을 귀의처로 하라' 고 해놓고서는 어떻게 자신을 귀의처로 하는게 붓다의 가르침인가라는 부분을 쏙 빼먹어 버린다. 앞뒤 말을 짤라 버리고 전혀 다른 의미로 제멋대로 짜집기 하고 설법하는 것이다. 전부다 자아나 유신견쪽으로 흐른다. 불자라는 작자들이 이게 도대체 무슨 해괘망칙한 행동들인가? 


연꽃의 자등명과 불교의 믿음


다른 것에 의지 하지 말라 하였는데 

"부처님의 가르침은 매우 다양하다. 그리고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다. 그래서 전승되어 온 경전의 문구 하나하나 마다 주옥 같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녹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가르침을 알려 줄 사람이 없다면 전승된 경전에 의존해야 한다. 

불자가 된다는 것이 불, , 승 삼보에 의지 하는 것이다. 따라서 가르침에 의지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종교경전을 무조건 다 믿는 것은 광신이라느니, “부처님 말씀(불경에서 그렇다고 주장하는)이라서 무조건 옳은 것이 아니라 현대과학과() 부합하고 위배되지 않으므로 옳은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상 부처님 가르침을 부정하는 말과 같다. 이런 말은 개인적인 견해(私見)’에 지나지 않는다. 더 나아가 삿된 견해(邪見)’가 되기 쉽다. 그러나 부처님가르침에 근거한 말이나 글은 정견(正見)이다. 

불자들은 사견을 믿을 것인가 정견을 믿을 것인가? 분명한 사실은 부처님은 다른 것에 의지 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자신을 섬으로 하고 자신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 가르침을 섬으로 하고 가르침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S22.43)”이라 하여 다른 것에 의지 하지 말것을 분명하게 말씀 하신 것이다."


이 작자의 글을 보면 위 대반열반경에서 붓다께서 말씀하신 '자심을 섬으로 하고...'라는 말을 자기 멋대로 왜곡하여 말하고 있다. 자등명 법등명과 도대체 믿음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건가? 불교에서 귀의처(피난처)는 곧 삼보이다. 왜 중생들의 귀의처가 되는가는 윗글에서 밝혀 놓았다. 그리고 그러한 귀의심과 함께 믿음을 어떻게 내야 하는가에 대해서 이미 설명해 놓았다. 한마디로 말해서 자등명법등명이라는 것이 귀의처나 믿음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왜 이런 엉터리 작자들이 불자라는 허울 쓰고 나타나서 설쳐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