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법(諸法)은 인(因)에서 생긴다 붓다는 6년간의 고행끝에 네란자라 강가의 보리수 아래서 7일간의 선정에 들어 마침내 정각(正覺)을 얻는다. 이때의 모습을 자설경(우다나)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 세존께서 원만한 깨달음을 막 증득하시고서 우루벨라의 네란자라 강 언덕의 보리수 아래에 머무르고 계셨다. 그 때 세존께서는 해탈의 기쁨을 맛보면서(체험하면서) 이레 동안(7일동안) 가부좌 자세로 앉아계셨다. 그리고 세존께서는 7일의 마지막 날에 삼매에서 나오셔서 그 밤의 마지막 시각에조건적 발생의 법칙인 연기에 대하여 순관과 역관으로 이치에 맞게 마음을 기울였다. ‘이것이 있을 때(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남(일어남)으로 저것이 생겨난다.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고(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다), 이것이 사라짐(소멸)으로써 저것이 사라진다. 5. 곧, 무명을 조건으로 행이 생겨나고, 행(형성)을 조건으로 식이 생겨나며, 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나고, 명색을 조건으로 여섯 감각기관(6입처) 생겨나며, 여섯 감각기관을 조건으로 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수(느낌)가 생겨나며, 수를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나고, 갈애를 조건으로 취(취착)가 생겨나며, 취를 조건으로 유(존재)가 생겨나고, 유를 조건으로 생(태어남)이 생겨나며, 생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생겨난다. 이와 같이 해서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이 생겨난다.‘ 그러나 무명이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면, 행이 소멸하고, 행이 소멸하면, 식이 소멸하며, 의식이 소멸하면 명색이 소멸하고, 명색이 소멸하면 여섯 감각기관이 소멸하며, 여섯 감각기관이 소멸하면 촉이 소멸하고, 촉이 소멸하면 수(느낌)가 소멸하며, 수가 소멸하면 갈애가 소멸하고, 갈애가 소멸하면 취가 소멸하며, 취가 소멸하면 유(존재_가 소멸하고, 유가 소멸하면 생(태어남)이 소멸하며, 생이 소멸하면 늙음과 죽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소멸한다. 이와 같이 해서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이 소멸한다.‘"
경전은 내용을 다시보면 7일간에 걸친 황홀한 법열(法悅)에서 깨어나셔서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체계적으로 공식적으로 정리를 했다는 것이다. 그 깨달음은 곧 연기(緣起)이다. 상윳따 니까야는 이 부분을 다시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나는 정각을 이루지 못한 구도자였을 때 이렇게 생각했다. '참으로 세상은 고통에 차 있다.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어서는 다시 태어난다. 그러면서도 이 고통을 벗어날 줄 모르고 이 늙음과 죽음을 떠날 줄 모른다. 참으로 언제가 되어야 이 고통을 떠나는 법, 이 늙고 죽음을 떠나는 방법을 알수 있을까"라고. 비구들이여, 나는 그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무엇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늙음과 죽음이 있는 것일까. 무엇 때문에 늙고 죽음이 있는 것일까' 라고. 비구들이여, 그때 나에게 바른 사유에서 생겨난 지혜에 진리를 알았다. '태어남으로 인해 늙음과 죽음이 있다.'라고." 붓다의 십대 제자중 상수(上首. 첫번째)제자였던 사리뿟다는 원래 불가지론(不可知論)을 펴던 산자야 벨랏티뿟따(Sañjaya Belaṭṭhiputta)의 제자였다. 그가 불교로 출가하여 개종하게 된 것은 최초의 다섯 비구중 한분이었던 아삿지(Assaji)비구의 청정한 탁발모습을 보고 그분에게 이야기를 건넨 것에서 시작된다. "벗이여, 그대는 누구 밑에서 출가하고, 누구를 스승으로 받들고 있습니까?" "벗이여, 나는 샤카족에서 출가한 세존을 우러러 출가했으며 세존을 스승으로 모시고 세존의 가르침을 받들고 있습니다." "벗이여, 그분께서는 어떤 법을 설하십니까?" "벗이여, 나는 나이 어리고 출가한 지도 얼마 안 됩니다. 그 법을 자세히 설명드릴 수는 없습니다." "벗이여, 괜챦습니다. 저는 다만 그 법의 본질을 알고 싶을 뿐 입니다." 앗사지 비구는 다음과 같이 붓다의 가르침을 전해주었다. "벗이여, 제법(諸法)은 인(因)에서 생긴다. 여래는 그 인(因)을 설하신다. 그리고 그것들의 멸(滅)도 설하신다. 위대한 그분은 이것을 설하신다." 이 말을 들은 사리뿟다는 바로 그 자리에서 "무릇 모든 생겨난 존재는 모두 멸해 갈 존재이구나" 라고 청정한 진리의 눈이 생겼고 수다원과를 얻었다. 그리고 그는 친구인 목갈라나에게 이 게송을 전해줌으로써 목갈라나도 수다원과를 얻었다. 그리고 250여명의 사람들과 함께 붓다를 찾아와 출가하고 불교로 개종을 한다. 불교는 왜 신을 부정할 수 있을까? 연기(paticcasamuppada)를 한마디로 딱 잘라 말하면 그것은 "조건에 의한 발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세상의 일체의 사물은 어느 하나도 자체 안에 자기발생의 원인을 지니고 있는 것이 없으며, 조물주나 절대자(신)에 의해 창조되거나 만들어 진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불교가 다른 종교와 달리 절대자나 조물주 신(神)을 부정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조건 발생적 연기를 주장하기 때문이다. 만약에 불교가 "모든 것은 조건따라 생기고 조건따라 소멸한다" 는 이 단순하면서도 명쾌한 연기법을 버린다면 신을 부정할만한 뚜렷한 근거나 논리적인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일체는 생겨나고 소멸한다. 그리고 생(生)에는 인(因)이 있고, 멸(滅)에도 인(因)이 있다. 이 단순 명쾌한 진리를 불교는 거듭 거듭 말하고 강조한다. 그럼으로써 세상의 모든 존재는 인과관계(因果關係)와 상의관계(相依關係)에 있고 이러한 인(因)과 연(緣)의 바탕위에 우리의 존재와 삶, 하나하나의 행위가 있음을 뼈저리게 느끼기에 조물주나 절대자를 부정할 수 있는 것이며 마침내 꿰뚫어 통찰하여 열반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세간속의 삶에서 연기란 무엇인가? 우리들은 흔히 일체는 신의 창조물이라고 생각하거나 또는 자신이나 다른 것을 영원하고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인냥 유신론(有身論), 자아관을 고집하고 돈 권력 부귀영화등에 집착하고 감각적 쾌락에 탐닉을 한다. 그러나 오온이란 색수상행식이 중연화합하여 일시적으로 모여있는 상태이며 내가 영원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존재들도 조건이 모여 그런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며 그 조건이 바뀔때 그것은 소멸한다는 것을 통찰한다면 집착과 탐욕이 자연스럽게 소멸하고 줄어들 것이다. 일단 사리뿟다가 그의 친구에게 이야기한 것을 기록해 놓은 상윳따니까야의 내용을 살펴보자. "벗이여 사리뿟다여, 그것은 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되겠는가?" "벗이여, 이를테면 여기에 두 묶음의 갈대단이 있다 하자. 이 갈대단들은 서로 의지하고 있을 때는 서 있을 수가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것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있는 것이며, 저것이 있음으로 하여 이것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두 개의 갈대단 중에서 어느 하나를 치워버린다면 다른 갈대단도 따라서 넘어질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는 것이며, 저것이 없으면 이것도 있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우리들 삶은 인과관계(因果關係)와 상의관계(相依關係) 위에 존재한다는 것을 위에서 잠시 언급을 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세상에는 나홀로 독불장군은 없다는 것이다. a와 b의 관계는 다시 b와 c의 관계이고 c 는 다시 a와의 관계로 인드라망처럼 얽혀 있는게 세간사이다. 나는 타인에게 영향을 주고 타인이 주는 영향을 나는 알게 모르게 받는다. 행복도 고통도 모두다 원인이 있기에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한 결과는 모두다 스스로의 행위에 따른 결과이며 이것은 모두다 상의관계 위에 존재하는 것이다. 왜 보시를 하고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가? 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그것에 대한 해답은 우리들은 모두다 상의관계 위에 존재하고 행동하고 살아가기 때문이라고 대답하면 정답일 것이다. 그래서 불교는 나의 행복이 남의 불행이며, 남의 불행이 곧 나의 행복이다라는 것을 배척한다. 우리 모두가 서로 상관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이라고 생각한다면 인류의 평화는 훨씬 빨리 현실화 될 수 있다. 사리뿟다가 친구에게 갈대단을 비유하여 말한 것은 이러한 존재의 얽힌 관계를 적절하게 설명한 것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불교의 어떠한 가르침이든 그것이 우리들 세간의 삶에 도움이 안되는 것이라면 그러한 것을 버리든가 아니면 타종교로 개종을 해야 할 것이다. 불교의 진리는 한갓 몇몇 무지한 중생들의 세치 혀 끝의 궤변의 놀이거리가 아니다. 우리들은 연기적 존재이고 연기적 관계위에서 삶을 살기에 나홀로 잘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다 잘되게 염원하고 십선행을 행해야 하는 것이다. 내 삶이나 존재가 마주보고 기대어 서있는 또다른 하나의 갈대단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들 삶은 훨씬 청정해지고 악하고 불건전한 생각이나 욕심도 탐욕도 쉽게 버려질 것이다. 붓다는 결코 연기 = 중도라고 말하지 않았다 문자(언어)는 그 의미가 사용되는 것에 따라서 달라지는 경우가 많다. [눈]이라는 단어를 예를 들어 보자. "직접 눈(eye)로 보니 정말 장관이다." 또는 "밤새 눈(snow)이 많이 왔다." 라고 한다. 같은 [눈]이라는 단어를 쓰지만 180도 다른 것이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직접 눈(snow)으로 보니 장관이다"라고 하거나 또는 "밤새 눈(eye)이 많이 왔네"라고 한다면 미친놈 취급 받을 것이다. 이렇듯 같은 [눈]이라는 단어를 쓰더라도 그 의미를 알아차리는 것이 지혜로운 자이다. 햇갈리거나 왜곡하거나 엉터리로 말하면 머리가 일곱조각으로 쪼개어지는 길 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 경전을 나름대로 다시 해석해 보았다. "비구들이여, 감각적 쾌락도 고행도 버려야 한다. 나는 이 두 가지 방법을 떠나서 중도를 깨달았다. ((비구들이여, 내가 말하는 중도란 세간에서 흔히 말하는 삼차선의 중간 차선이나 또는 세 가닥의 밧줄 중에서 두개를 버린 하나의 밧줄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 내가 말하는 중도란 바로 팔정도를 말하는 것이다. ((즉 다시 말해서 눈이라고 했지만 '눈(snow)으로 직접 보니 장관이네'라고 엉뚱하게 알아듣지 말고 '눈(eye)으로 직접 보니 장관이네'라고 알아 들어야 한다))" "... 나는 중도로써 법을 설한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 태어남을 조건으로 생이 있고..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이다. ((외도여, 나는 영원론이나 단멸론적인 이분법적인 것으로 법을 설하는게 아니라 중도(올바른 길, 연기)로써 법을 설한다. 여기서 내가 중도라는 것은 눈(snow)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눈(eye)를 말하는 것인지 똑똑이 알아 들어야 한다. 내가 말한 중도라는 것은 올바른 길/연기를 중도라는 단어를 동원하여 사용했을 뿐이다)) 경전을 보면 알겠지만 붓다는 제자들에게 팔정도나 연기를 설할 때 결코 중도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중도로써 사정근을 설한다. 중도로써 오력을 설한다. 중도로써 칠각지를 설한다. 중도로써 사성제를 설한다. 중도로써 사념처를 설한다" 라고 하지 않았다. 왜 그런가 ? 아래에서 글을 계속한다. 불교의 수행에는 중도가 없다. 중도론자들은 "중도 = 양극단을 여윈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양극단을 여윈 것이란 무엇인가? 라고 묻는다면 참으로 애매모호하여 지게 된다. 삼차선의 중간차선과 같은 것이라고 한다면 당장에 그럼 '쾌락도 고행도 아닌 곧 적당한 쾌락과 적당한 고행이 뒤섞인 짬뽕과 같은 것이다'라는 자기모순과 당착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고육지책으로 연기를 끌어다 놓는다. 즉 조건따라 발생하고 소멸하는 것이 중도라고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조건따라 생멸을 하는 것이 어떻게 두 극단의 양변을 여읜 중도인가? 불교는 열반에 이르는 수행법으로 사성제 사념처 오력 사정근 칠각지 팔정도등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경전은 이렇게 말한다. 빠알리어 니까야의 1/3 정도가 여기에 할애를 하고 있을 정도이다. '비구들이여, 탐욕, 성냄, 무지, 악하고 불건한 마음을 최상의 지혜로 알기 위해서는.. 철저히 알기 위해서는..버리기 위해서는.. 소멸시키기 위해서는... 바른 노력을 해야 한다. 열심히 닦고 많이 학습하여 능숙하게 하여야 한다..." 그 어디에도 양그단을 여읜 중도라는 말은 없다. 왜냐하면 불교의 수행은 yes 또는 no 두 가지 길 밖에 없기 때문이다. 십선행의 반대말은 십악행일 뿐이지 그 중간은 없다. 옳고 바른 길과 틀리고 잘못된 길 딱 두 가지뿐이다. 팔정도의 여덟가지 수행 그 어디에 양극단을 버린 중도라는 개념이 들어 갈 수 있는가? 바른 견해가 아니면 사견이다. 바른견해도 아니고 사견도 아닌 어정쩡한 애매모호한 견해도 있단 말인가? 청정범행이 아니면 불건전한 행이 있을 뿐이다. 청정한 범행도 버리고 부정한 범행도 버리는 즉 청정하기도 하고 부정하기도 한 그런 중도의 범행이 있단 말인가? 아니면 청정하지도 않고 부정하지도 않은 그런 범행이 있단 말인가? 빠알리어 니까야에 표현된 다양한 중도사상이라고? 빠알리어 니까야에는 중도사상을 말한게 한 글자도 없다. 백번을 양보하더라도 중도 = 팔정도이다. 그런데 이들 머리가 일곱조각으로 쪼개어질 외도들은 중도 = 연기를 끌어다 놓고 설명을 하고 있다. 언제부터 중도 = 팔정도가 아닌 중도 = 연기가 되었는가? 그 외도들의 해괘망측한 괘변을 일일이 반박해 보겠다. 1. 유무중도(有無中道) : "모든 것은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극단이요,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도 또 하나의 극단이다" 라고 경전적 근거를 들이대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붓다의 교설은 연기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존재의 생성과 소멸의 원리에서 본다면 원인없이 존재하는 것도 없으며 또한 원인없이 소멸하는 것도 없다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조건에 따라 생멸(生滅)하기에 유(有. 있다)와 무(無. 없다)라는 이분법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게 연기인가 아닌가? 2. 자타중도(自他中道) : "세존이시여, 괴로움은 자신이 만들거나, 남이 만들거나 또는 자신이 만들기도 하고 남이 만들기도 합니까? 괴뢰움은 자신이 만든 것도 아니고 남이 만든 것도 아닌 원인없이 생겨난 것입니까?" "깟사빠여, 그렇지 않다." 라는 것을 경전의 근거로 내세우고 있다. 이는 곧 존재가 조물주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냐 또는 홀로 내가 스스로 만든 것이냐를 묻는 것에 대해서 붓다는 단호하게 "아니다"라고 대답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는 신을 부정한다. 오온은 색수상행식의 다섯가지가 중연화합하여 끊임없이 생멸을 거듭하며 흘러가는 존재라고 말한다. 그 어디에도 조물주나 홀로 스스로 자기발생적 존재를 말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존재의 조건지워짐 즉 원인이 있기에 결과가 있고, 원인이 소멸하면 그 존재도 소멸한다는 연기를 말하고 있을 뿐이다. 이게 연기인가 아닌가? 3. 단상중도(斷常中道) : "행위하는 자와 받는 자가 동일하다고 하거나, 행위하는 자와 받는 자가 다르다고 한다면 이것은 상주론과 단멸론을 말하는 것이다." 라고 경전은 말하고 있는 것을 근거로 가져왔다. 본인은 여러번 '업을 짓는 자도 받는 자도 없다'라거나 '고정된 존재없이 어떻게 윤회가 가능한가'라는 글에서 이 부분에 대해서 나름대로 주장을 하였다. 불교는 상주론도 단멸론도 모두다 외도로 본다. 즉 업을 짓는 자도 업을 받는 자도 동일하다고 한다면 이는 상주론이다. 왜냐하면 변하지 않고 고정된 존재가 다음 세계로 간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하지만 윤회는 재생을 이야기하는 것이지 재육화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즉 오온과 무아를 이야기하는 불교에서 고정된 존재라는 개념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그리고 반대로 업을 짓는 자와 업을 받는 자가 다르다고 한다면 이는 단멸론이다. 왜냐하면 업을 지은 자가 별도로 있고 업을 받는 자가 별도로 있어야 한다는 즉 두 개의 존재가 별도로 존재해야 한다는 전제가 성립되어야 한다. 불교는 자업자득 인과응보이며 내가 지은 업에서 도망갈 곳은 어디에도 없다거나 스스로는 업의 상속자라고 대못을 밖아 놓고 있다. 그런데 상주론도 아니고 단멸론도 아니면 뭐란 말인가? 이에 대한 설명은 '우유가 변하여 버터가 되거나, 번데기가 변하여 나방이 되는 것'에 비유를 할 수 있다. 우유와 버터 또는 번데기와 나방은 전혀 다른 것이다. 하지만 버터는 우유에서, 나방은 번데기에서 온다. 그래서 불교는 '업을 짓는 자도 받는 자도 다른다. 하지만 그 업은 죽은자로부터 온다'라고 하는 것이다. 나가세나 스님은 이것을 등불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고정된 존재가 다음 세계로 건너가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업의 계승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어릴 때의 나와 지금은 다르다. 그렇다고 하여 전혀 딴 사람인 것도 아니다. 이처럼 존재는 끊임없이 생멸을 거듭하고 변화하며 흘러간다. 오온 그 어디에도 고정되고 항상하는 존재는 없다. 이것이 연기이다. 그런데 황당하고 어처구니가 없는게 중도론자들의 설명을 보면 "중도는 이런 것이다라고 해 놓고 한다는 말이 '연기법에서 영원주의(상주론)와 허무주의(단멸론)은 모두 부정된다.'라고 뻔뻔스럽게 자다가 봉창 뜯는 소리를 하고 있다. '중도 = 양 극단을 여읜 것'이라고 해놓고 '중도 = 연기'라고 말하는 자가당착적인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 말대로 중도 = 양극단을 여읜 것이라면 상주론이면서 단멸론적인 존재나 상주론과 단멸론을 반반씩 섞어 놓은 존재를 설명해야 할 것이다. 붓다는 상주론도 아니고 단멸론도 아닌 제삼의 존재 즉 연기적 존재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올바른 존재의 모습을 yes 또는 no 로 분명하게 밝혀 놓은 것이다. 그래서 불교는 연기적 존재라고 하지 결코 중도적 존재라고 존재의 모습을 설명하지 않는다. 4. 일이중도(一異中道) : "비구여, 영혼과 육체는 서로 같다거나 서로 다르다거나 하는 견해를 가지면 청정한 삶을 살지 못한다...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이 있다..." 라는 것을 경전의 근거로 가져오고 있다. 그러면서 일이중도라고 설명한 부분은 "인과의 동일론과 차별론은 부정된다. 현상계가 동일하다거나 차별적이라고 한다면 인과성의 원리는 성립될 수 없다" 라고 궤변을 늘어 놓고 있어서 너무 가관이라서 차마 언급할 가치도 없다. 세상의 존재는 빵틀에서 구워내듯 일관성과 동일성을 갖지 않는다. 그건 상식이다. 우리들 얼굴이 모두다 복사기로 복사한 듯이 동일한가? 각각의 다양한 조건따라 발생하는 것이 어찌 빵틀에서 구워낸 붕어빵처럼 동일하거나 같을 수가 있는가? 또한 몸과 마음이 같다거나 틀리다거나 할 수도 없다. 12연기는 ..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나며 명색을 조건으로 여섯감각기관이 생겨나며... 라고 설명한다. 오온은 색(물질)과 정신(수상행식)의 화합물이다. 정신은 몸 안에 존재한다. 몸이 없으면 수상행식도 존재할 수 없다. 즉 연기적 존재인 것이다. 그러기에 같다거나 다르다거나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색수상행식의 중연화합에 의해서 존재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5. 거래중도(去來中道) : "밧차여, 그대 앞에 불이 꺼진다면 그 불은 동서남북 어느 방향으로 간 것인가?라고 묻는다면 그대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라는 것을 경전의 근거로 들고 있다. 이 말은 고정된 어떤 실체가 있어서 몰래 숨어 있다가 나타난다거나 또는 고정된 실체가 몰래 어디로 사라진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불교는 조건발생의 연기를 말하고 있다. 조건이 있으면 나타나는 것이고 조건이 소멸하면 사라지는 것이다. 어디 고정된 존재가 숨바꼭질하듯 숨었다 나타났다 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이걸 거래중도라고 하면서 들고 나오고 있다.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이 없다. 6. 생멸중도(生滅中道) : 우다나(udana. 자설경8.1)에 보면 Prinibbana. 반열반)에 대한 붓다의 설명이 있다. 이는 열반의 세계에 대해서 가장 완벽하게 붓다께서 설명해 놓으신 것이다. 물론 열반의 세계는 우리들 상상이나 지식으로 알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세계는 아니다. 하지만 붓다는 중생들을 위해서 그러한 열반의 세계에 대해서 혼신의 힘을 다하고 동원할 수 있는 단어는 모두 동원하여 알아 듣도록 설명해 놓은 것이다. 본인은 '열반 세계의 존재유무'라는 글에서 열반세계가 어떤 것인지 주장하여 놓았다. 그런데 중도론자들은 이러한 열반세계의 설명을 중도라고 억지를 부리면서 자기 멋대로 설명하고 인용하고 있다. 무덤 속의 붓다가 벌떡 일어날 일이다. 그들 말대로라면 이제 중도 = 연기도 부족하여 중도 = 열반세계란 말인가? 열반세계가 중도의 세계인가? 불교는 유위법(조건지워져 있는 법. 세간법)과 무위법(조건지워지지 않는 법. 열반)을 이야기한다. 딱 두가지 뿐이다. 열반은 조건지워지지 않은 세계이다. 따라서 생멸중도라는 말자체가 성립이 안된다. 그것은 머리가 일곱조각으로 쪼개어지는 그들만의 논리일 뿐이다. 7. 고락중도(苦樂中道) : 초전법륜경을 근거로 들이대고 있다. 위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그들 말대로 쾌락과 고행을 떠난 수행법이 있다면 그건 쾌락도 적당히 하고 고행도 적당히 하는 수행법일 것이다. 흔히들 밤새우거나 너무 놀거나 하지 말고 적당히 하라는 말들을 한다. 중도론자들 말대로라면 적당히 하는 수행법이 곧 고락중도일 것이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그런 수행법은 없다. 붓다는 쾌락도 고행도 아닌 제 삼의 길을 제시한 것이다. 즉 올바른 길을 제시한 것이다. 쾌락도 틀린 것이고 고행도 틀렸다는 것이다. 그것을 적당히 섞는 것도 틀린 것이다. 팔정도라는 올바른 길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게 어떻게 중도적 수행인가? 일곱조각으로 머리가 쪼개어지지 않을려면 붓다는 중도를 주장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극단의 양변을 여읜 것"이 중도라고 말한 적도 없다. 붓다는 오직 연기법을 설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러한 연기법이 부파불교/대승불교에 오면서 중도는 "양극단을 여읜 것"이라고 전제를 하면서 밑도 끝도 없이 연기법을 들이다 대 놓고 그게 중도란다. 다시말하지만 중도라는 사상은 초기불교 사상이 아니다. 그걸 억지춘향격으로 초기불교의 연기와 접목할려는 모습이 솔직히 안쓰럽기만 하다. 백번을 양보하더라도 연기법은 연기법이고 중도사상은 중도사상일 뿐이다. 그 둘 사이에 어떠한 비슷한 점이나 동일성은 없다. 차라리 중도사상을 배우고 싶다면 그냥 중도사상 그것 자체를 배우면 된다. 대반열반경에 나오는 아래 가르침이 오늘따라 새삼스럽다. 붓다께서 열반의 장소로 가시면서 남겨 놓으신 소중한 가르침이다. 재삼 되새겨 본다. 팔정도의 첫번째 덕목이 올바른 견해이다. 올바른 견해가 확립되지 않으면 그것은 곧 사견이고 사견은 외도이며 외도는 머리가 일곱조각으로 쪼개어질 뿐이다. "수밧다여, 법과 율을 설한다 하더라도 그 가운데 '여덟가지 성스러운 길' 이라는 실천덕목이 없으면 거기에는 사문이 없다. 거기에는 두 번째 사문도 없다. 거기에는 세 번째 사문도 없다. 거기에는 네 번째 사문도 없다. 반대로 수밧다여, 설하는 법과 율 가운데 '여덟가지 성스러운 길'이라는 실천덕목이 있으면 그 가르침 가운데에 사문은 추구할 수 있고 또 제2사문, 제3사문, 제4사문도 추구할 수 있느니라. 그리고 수밧다여, 내가 설한 법과 율에는 '여덟가지 성스러운 길'이라는 실천덕목이 있느니라. 그러므로 여기에는 사문이 있고, 또 제 2사문. 제3사문, 제4사문도 있느니라. 수밧다여, 내용이 없는 공허한 논의 따위는 사문에게는 무관한 것이니라. 수밧다여, 비구들이 이 여덟가지 성스러운 실천덕목을 가지고 바른 수행을 하면 세상에는 아라한이 텅비지 않을 것이다. 수밧다여, 나는 29세가 되어 무엇이 유익함인지를 구하여 출가하였다. 수밧다여, 이제 51년동안 출가생활을 하면서 바른 방법과 법을 위해서 여러 지방에 머물렀다. 이밖에는 사문이 없다. 두 번째 사문도 없다. 세 번째 사문도 없다. 네 번째 사문도 없다. 수밧다여, 비구들이 이 여덟가지 성스러운 실천덕목을 가지고 바른 수행을 하면 아라한(존경받을 만한 이)이 텅비지 않을 것이다." 이 경전은 팔정도를 실천덕목이라고 했고 올바른 길이라고 했다. 그 어디에도 중도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이제라도 존경받을 만한 이가 텅비지 않는 불교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팔정도가 없는 다른 교설을 지닌 종교들은 사문들이 텅비어 있다. 명심했으면 좋겠다. 긴 글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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