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야단법석

초기불교에 중도사상은 없다

실론섬 2014. 8. 23. 20:36

중도(中道)라는 단어가 주는 선입견

한자는 표의문자이다. 그리고 한문경전은 산스크리트어를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다. 따라서 번역된 한문의 의미에 치중하여 교리를 해석하거나 사유하다보면 많은 오류에 빠지기 쉽다. 가능하면 원전에 씌여진 단어를 잘 사유하되 기존의 선입견을 버릴 필요가 있다. 많은 사람들은 중도라고 하면 흔히 (中 가운데 중. 道 길 도)라는 한자어의 개념에 사로잡혀서 "중간 즉 삼차선의 가운데 길, 세 가닥의 밧줄에서 바깥쪽 두 개를 버린 중간 밧줄..."등등 중간이라는 개념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또한 우리가 지금 접하는 수많은 중도에 관련된 철학적 개념들은 부파불교 이후에 태생한 것으로써 이는 초기불교의 "올바른 길(중도 = 팔정도)"라는 개념이 상실된 채 관념적인 희론으로 흐르거나 또는 팔정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그야말로 "중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새로운 철학적 개념이나 토론인 것이다. 따라서 팔정도와 부파불교 이후의 "중도론"과는 전혀 관련이 없으며 이는 붓다께서 말씀하신 교리적 가르침도 아니다. 다시 말해서 "팔정도"와 철학적 희론의 "중도"는 전혀 별개의 것이지 같이 생각하거나 연결하여 사용할 용어나 교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초기불교에서 중도 = 팔정도(올바른 길이다). 이것 이외에는 없다. 그리고 부파불교/대승불교등의 중도론은 말 그대로 "양극단을 여읜 중간"이다. 양극단을 여읜 것이 어떤 것이며, 중간이란 무엇인가는 그들만의 논리일 뿐 초기불교에서 거론하고 더우기 초기불교 교리를 갖다놓고 연결시킬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양극단을 여윈 중간"이라는 중도론에는 팔정도라는 성스러운 여덟가지 길의 개념이나 교리적 사상적 내용이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을뿐더러 팔정도 자체가 언급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부파불교나 대승의 논사들은 오히려 분명한 선을 그은듯 하다. 즉 그들이 주장하고 토론했던 "중도"란 팔정도가 무엇인가를 논한것이 아니라 "중간을 여읜 가운데 길"에 대한 토론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초기불교에서는 "중도"라는 개념을 포기하고 버려야 할 것이다. 그런것에 매달리기 보다는 팔정도나 연기를 이야기해야 하는 것이다. 조건따라 발생하고 조건따라 소멸하는 것이 양극단을 여읜 중간 길인 중도라고 본다면 이건 정말 희안한 궤변일 뿐이다. 중도와 연기가 도대체 어떻게 연결이 된단 말인가? 조건따라 생멸하는 것과 양극단을 여읜 것이라는 개념 그 어디에 상호 비슷한 부분이라도 있단 말인가? 


맛지마 빠띠빠다(majjhima-patipada)란 무엇인가?

한자어로 ‘중도(中道)’라 번역되는 맛지마 빠띠빠다(majjhima-patipada)에서 빠띠빠다(paṭipada)는 paṭi(~에 대하여)+√pad(걷다)에서 파생된 여성명사이다. PED에서 ‘means of reaching a goal or destination, path, way, means, method, mode of progress.’라고 설명되듯이, 어떤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한 수단, 길, 방법을 뜻하는 말이다. 그리고 실제로 길 위를(pati) 밟으면서 걸어가는 것(padā)을 의미하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철학이나 관념체계가 아닌 실천체계이다. 다시 말해서 맛지마 빠띠빠다(majjhima-patipada)라는 단어에서 중요한 것은 맛지마라는 첫 단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빠띠빠다라는 단어가 중요한 것이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이 두 가지 극단을 떠나 중도를 깨달았다. 이것은 눈을 생기게 하고 앎을 생기게 하며 고요함과 최상의 지혜와 올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여래가 완전하게 깨달았으며, 눈을 생기게 하고 앎을 생기게 하며 고요함과 최상의 지혜와 올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하는 중도인가?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성스러운 도[八支聖道]이니,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언어), 바른 행위, 바른 생계(생활), 바른 정진, 바른 마음 새김, 바른 삼매이다."(S56:11)

 

이 경전의 귀절을 이해할려면 우선먼저 이 경전이 설해진 장소와 배경 그리고 시간등을 깊이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이 경전은 말 그대로 "초전법륜" 즉 붓다의 최초의 설법이다. 다섯 옛 동료들을 찾아가 그들을 설득하여 마침내 귀를 기울였을 때 붓다께서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설법하신 것이다. 당시 아직은 과거의 잘못된 선입견들이나 수행이나 견해들이 머리속을 꽉채우고 있는 다섯 옛 동료들에게 붓다는 어떻게 하면 이들의 머리속에 불법의 첫 단추를 잘 꿰어 맞추어 자신의 말귀를 알아듣고 따라오게 만들까를 여러날 고심한 끝에 진리의 첫 사자후를 토했던 내용이다. 


따라서 경을 설법식으로 풀어보자면 " 비구들이여, 수행을 하는데 있어서 감각적 쾌락을 즐기는 것도 옳은게 아니고, 그렇다고 스스로를 괴롭히는 고행도 옳은게 아니다. 나는 이 두가지 방법을 떠나서 또 다른 길(올바른 길)을 깨달았다. (아마도 그들을 쉽게 이해시킬려고 양극단을 떠난 중간의 길이라고 했을 것임). 그 또 다른 길이란 바로 팔정도이다. 이 여덟가지 성스러운 방법으로 수행을 하면 열반으로 나아갈 수 있다..." 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듣는 사람이 퍼뜩 쉽게 이해하기 위하여 두 가지 잘못된 방법의 길을 떠난 가운데 길 즉 중도라는 단어를 동원하며 설법을 하면서 혹시나 잘못 알아 들을까봐 얼른 그 중간의 길이란 다름 아닌 여덟가지 방법이다라고 절대적인 명제를 달아 버린 것이 개인적 생각이다.


이후 붓다는 팔정도를 설하는 어느 경전에서도 위와 같은 방법으로 "나는 양극단을 떠나 중도를 깨달았다. 그 중도란 무엇인가..." 라는 형태로 팔정도를 설하지 않는다는 것을 봐도 당시 초전설법에서의 붓다의 단어 선택에 대한 고심을 엿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초기불교에서는 "중도"라는 말을 가능하면 삼가하는게 좋다. 그 대신에 조건따라 생멸을 하는 연기법과 그리고 팔정도는 "올바른 길" "잘못된 길을 버린 올바른 길" "너희들이 말하는 그런 길이 아닌 불교만의 진리길" "잘못된 길이 아닌 또다른 새로운 길"..등등의 개념으로 생각하면 좋겠다.


팔정도가 목적론(구경론)과 실천론(방법론) 두가지가 있다고?

앙굿따라 니까야에는 궁극적 지혜(열반)을 얻기 위해서는 탐.진.치, 불건전하고 해로운 마음을 버려야 하며 이것을 "최상의 지혜로 알고, 철저하게 알고, 버리기 위해서는 "사념처 사성제 팔정도 칠각지 오근 오력 사정근 사무량심등" 닦아야 한다고 반복하고 있다. 아마도 경전의 1/3 분량은 될 듯 하다. 


"비구들이여, 탐욕을 최상의 지혜로 알기 위해서는 일곱가지 깨달음의 고리를 닦아야 한다...

"비구들이여, 탐욕을 최상의 지헤로 알기 위해서는 여덟가지 성스러운 길을 닦아야 한다....." 


다시말해서 불건전하고 해로운 법을 버리고 건전하고 유익한 법을 얻어 궁극의 열반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팔정도등등을 닦으라고 입이 마르도록 훈계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목적과 방법은 무엇무엇일까? 세살짜리 아이도 아는 사실이지만 다시 말하고자 한다. 열반은 궁극의 목적이요 그 열반으로 가는 방법으로 팔정도등등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팔정도가 목적이라면 그럼 팔정도를 완성하기 위하여 열반을 수행법으로 삼아 열반을 닦아야 하나? 이건 붓다의 말씀처럼 머리가 일곱조각으로 조각나어 땅에 떨어질 일이다.


다양한 부처님의 중도사상이라고?

붓다의 중도는 팔정도밖에 없다. 붓다는 중도사상을 내세운 적이 없다. 오직 연기만 이야기 했을 뿐이다. 붓다께서는 이런저런 질문자들의 질문에 대답을 하면서 늘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나는 올바른 길에 의거하여 법을 설한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게 중도인가? 연기인가?


진흙속의연꽃이 "전재성 박사의 초기불교의 연기사상"이라고 해놓고나서 "빠알리 니까야에 표현된 다양한 중도사상"이라고 7가지 예를 들고 있다. 일단 내용에 대한 비판은 접어두고라도 제목부터가 가관이다. 연기사상 = 중도사상 이란다. 위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초기불교에서 "중도사상"은 없다. 그것은 오직 "연기법"일 뿐이다. 연기와 중도는 같은 개념이나 논리가 절대로 아니다. 연기는 조건지워짐과 조건지워지지 않음에 대한 진리이지 결코 "양극단을 여읜 길" 이거나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정쩡한 애매모호한 길"이 아니라는 것이다. 연기는 너무나 명명백백하고 명쾌한 진리이다. 그가 열거하여 놓은 중도라는 것을 보면 내용은 전부다 연기를 말하는 그야말로 언어도단의 잔치이다. 특히 생멸중도라고 하여 우다나(자설경)에서 말씀하신 열반의 세계에 대한 표현은 한마디로 "조건지워지지 않은 세계 = 열반"을 설명하신 것이다. 도대체 열반이 중도란 무슨 상관인가?   


중도와 12연기라고?

연기란 조건발생을 말하는 것이다. 조건이 있으면 발생하고 조건이 없으면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도란 그들이 주장하듯 "양극단을 여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양극단을 여읜 길이 있다는 뜻이다. 그 길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길인라는 말인가? 불교는 어영부영 어정쩡 어물쩡 넘어가는 진리는 없다. "조건이 있으면 발생한다. 조건이 없으면 발생하지 않는다. 세가지 느낌이 있다. 좋은 느낌과 싫은 느낌 그리고 좋지도 싫지도 않은 느낌 세 가지이다". 라고 너무나도 명쾌하게 밝힌다. 


붓다는 결코 침묵하지 않았다라는 글에서도 밝혔지만 흔히들 붓다께서 YES 또는 NO 라고 두가지로 대답하지 않은 것을 10무기라고 한다. 붓다께서 입을 지퍼로 닫았을까? 절대로 아니다. 조건따라 생기고 조건따라 소멸한다고 수만번은 더 경전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조건따라 생멸하는 것을 있다고도 못하고 없다고 못하는 것이다. 딱 부러지게 YES 또는 NO 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붓다는 "나는 올바른 방법으로 이렇게 말한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라고 붓다는 명쾌하게 설명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중도사상은 초기불교의 사상도 아니며 초기불교의 교리적 언어도 아니다. 부파불교/대승불교의 새로운 관념적 사상과 철학일뿐이다. 따라서 초기불교에서 굳이 중도를 논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 중도라는 개념을 초기불교에 적용하는 것은 어리석은 중생들의 작태일 뿐이다. 붓다께서는 '중도'라는 단어를 선택했지만 그것은 '올바른 길'로 생각하면 된다. 내가 만약에 경전을 번역한다면 나는 " 맛지마 빠띠빠다(majjhima-patipada)" 를 올바른 길이라고 번역했을 것이다. 맨 처음 언급을 했지만 이 단어는 앞의 맛지마라는 단어가 중요한게 아니다. 실천을 강조하는 불교라면 당연히 뒷 단어인 빠띠빠다를 중시해야 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산 이라고 했을 때 '산'이 궁극의 의미이지 결코 아름답다거나 벌거숭이라거나 하는 산을 주관적으로 보이는대로 표현한 단어에 의미를 두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붓다께서는 연기를 말했다. 조건지워짐과(유위법) 조건지워지지 않은 법(무위법)을 말했을 뿐이다. 유위법이란 세간법 즉 중생들의 세계이다. 무위법이란 열반을 말하는 것이다. 


올바른 길을 다시한번 되새기며 

부처님께서는 「대반열반경」(D16)에서 반열반(般涅槃)에 들기 직전 수밧다라는 편력수행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수밧다여, 어떤 법과 율에서든 팔정도가 없으면 거기에는 사문도 없다. 거기에는 두 번째 사문도 없다. 거기에는 세 번째 사문도 없다. 거기에는 네 번째 사문도 없다. 수밧다여, 그러나 어떤 법과 율에서든 팔정도가 있으면 거기에는 사문도 있다. 거기에는 두 번째 사문도 있다. 거기에는 세 번째 사문도 있다. 거기에는 네 번째 사문도 있다. 수밧다여, 이 법과 율에는 팔정도가 있다. 수밧다여, 그러므로 오직 여기에만 사문이 있다. 여기에만 두 번째 사문이 있다. 여기에만 세 번째 사문이 있다. 여기에만 네 번째 사문이 있다. 다른 교설들에는 사문들이 텅 비어 있다. 수밧다여, 이 비구들이 바르게 머문다면 세상에는 아라한들이 텅 비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