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 이야기

[각묵스님] 초기 불교의 인간관 - 오온

실론섬 2014. 12. 12. 14:52

오온: 온(蘊, 무더기, khandha)

 

오온(pañca-kkhandha):

 

물질의 무더기[色蘊, rūpa-kkhandha] 

느낌의 무더기[受蘊, vedanā-khandha] 

인식의 무더기[想蘊, saññā-khandha] 

심리현상들의 무더기[行蘊, saṅkhārā-khandha] 

알음알이의 무더기[識蘊, viññāṇa-kkhandha]

 

오온으로 해체해서 보기 

인류가 있어온 이래로 인간이 자신에게 던진 가장 많은 질문은 아마 ‘나는 누구인가’일 것이다. 인간과 신들의 스승이신 부처님께서도 당연히 이 질문에 대해서 대답하셨다. 중요한 질문이기에 아주 많이, 그것도 아주 강조해 말씀하셨다. 그러면 부처님께서는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셨을까. 부처님께서는 초기경 도처에서 간단명료하게 ‘나’는 ‘오온(五蘊, panca-kkhandha)’이라고 말씀하셨다. 나라는 존재는 물질(몸뚱이, 色), 느낌(受), 인식(想), 심리현상들(行), 알음알이(識)의 다섯 가지 무더기(蘊)의 적집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왜 부처님께서는 다섯 가지로 해체해서 대답하셨을까. 그것은 ‘나’ 혹은 자아(아뜨만)라는 고정불변하는 어떤 실체(sara)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이다. 영원불변하는 나를 찾아서 온갖 노력을 다해봐야 그것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얻어진 것처럼 여겨지는 인식(想, 산냐)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의 소의경전인 〈금강경〉도 자아니 영혼(壽者)이니 하는 산냐의 척파를 외치지 않았던가.

 

해체해서 보면 무상/고/무아가 드러난다 

부처님께서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서 ‘오온’이라고 말씀하신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나라는 존재를 몸뚱이와 느낌과 인식과 심리현상들과 알음알이로 해체해서 보게 되면 이들의 변화성과 찰나성 즉 무상(無常)이 극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상하고 변화하는 것은 괴로움(苦)이다. 우리는 변하는 것을 가지고 행복이라 하지 않는다. 행복이란 것도 변하면, 즉시에 괴로움이 되고 만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행복을 괴고성(壞苦性, 변하는 괴로움)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우리는 변하고 괴로운 것을 가지고 나라거나 나의 자아라고 하지 않는다. 이처럼 변화를 통찰할 때 괴로움과 무아도 꿰뚫게 된다. 그래서 초기경에서 오온의 무상.고.무아는 도처에서 아주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어디 초기경뿐인가. 우리가 조석예불에서 정성을 다해서 외는 〈반야심경〉의 핵심도 오온(照見五蘊皆空)이 아니던가.

 

무상/고/무아를 통해 해탈한다 

이처럼 나라는 존재를 오온으로 해체해서 보면 무상과 고와 무아가 극명하게 드러나고 이러한 무상이나 고나 무아를 철견할 때 불가능해보이던 중생의 해탈은 비로소 성취되는 것이다. 그래서 초기경뿐만 아니라 대승경전에서조차 무상(無常)을 통한 해탈을 무상(無相)해탈이라 하고, 고를 통한 해탈을 무원(無願)해탈이라 부르며, 무아를 통한 해탈을 공해탈이라 천명하고 있다. 실체 없는 자아에 계합하는 것이 해탈이 아니라 무상.고.무아에 사무쳐야 해탈이다. 불자가 이 사실을 잊어버리면 그 즉시 외도가 되어버린다.

 

[오온의 무상,고,무아와 염오-이욕-해탈에 대한 경전적 근거]

 

“비구들이여, 물질은 무상하고 느낌은 무상하고 인식은 무상하고 심리현상들은 무상하고 알음알이는 무상하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물질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느낌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인식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의도적 행위들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알음알이에 대해서도 염오한다. 염오하면서 탐욕이 빛바래고, 탐욕이 빛바래므로 해탈한다. 해탈하면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梵行)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으며,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고 꿰뚫어 안다.”(상윳따 니까야 무상 경(S22:12) §3 등)

 

“염오(nibbidā)’란 염오의 지혜(nibbidā-ñāṇa)를 말하는데 이것으로 강한 위빳사나(balava-vipassanā)를 드러내고 있다.”(SA.ī.53 ― 의지처 경(S12:23) §4의 주해)

 

“탐욕의 빛바램(이욕, virāga)’이란 도(magga, 즉 예류도, 일래도, 불환도, 아라한도)이다. ‘탐욕이 빛바래므로 해탈한다’는 것은 탐욕의 빛바램이라는 도에 의해서 해탈한다라는 과(phala)를 설하셨다. ‘해탈하면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다.’라는 것은 여기서 반조(paccavekkhaṇā)를 설하셨다.(MA.ī.115 = 맛지마 니까야 뱀의 비유 경(M22) 29에 대한 주석)

 

또 다른 주석서를 인용하자면, “‘염오(nibbidā)’는 강한 위빳사나(balava-vipassanā)이고 ‘탐욕의 빛바램(virāga)’은 도이다. ‘해탈지견(vimutti-ñāṇadassana)’은 과의 해탈(phala-vimutti)과 반조의 지혜를 뜻한다.”(AA.īi.228) 이 주석서에서는 있는 그대로 알고 봄[如實知見]을 얕은 단계의 위빳사나라고 설명하고 있다.

 

한편 과거/현재/미래 경1(S22:9) 등 온 상윳따(S22)의 도처에서는 오온의 무상/고/무아를 통찰하여 염오-이욕-소멸을 실현하는 것을 설하고 있다. 여기서도 당연히 염오는 강한 위빳사나요, 이욕은 도요 소멸은 아라한과라고 주석서들은 밝히고 있다.

 

[진아란 없다] 

매년 여름과 겨울에 한국의 유서 깊은 명산대찰에서는 각종 수련대회가 열린다. 몇몇 사찰에서는 아예 주제를 ‘나를 찾는 여행’으로 정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명산대찰에서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불교적 대답인 오온을 강조한 곳은 없었던 것으로 안다. 오히려 나를 진아로 추앙하고 대아나 주인공으로 경외하여 부르면서 이러한 영원불변하는 참 나를 찾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불교수행이라고 공공연히 외쳐댔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진아니 대아니 하는 대답이 나오는 한 그것은 불교가 아니다. 불자는 나는 누구인가에 서슴없이 오온이라 답할 줄 알아야 하고, 나를 오온으로 해체해서 살펴보아 오온으로 이루어진 나라는 존재가 무상하고 고요 무아임을 통찰해서 해탈열반을 실현해야 한다. 우리는 언제나 외도이기를 그만두고 진정한 부처님 제자가 될 것인가.

 

(1) 색온 - 물질 - 근본물질과 파생된 물질 

“비구들이여, 그러면 왜 물질이라고 부르는가? 변형(變形)된다고 해서 물질이라 한다. 그러면 무엇에 의해서 변형되는가? 차가움에 의해서도 변형되고, 더움에 의해서도 변형되고, 배고픔에 의해서도 변형되고, 목마름에 의해서도 변형되고, 파리, 모기, 바람, 햇빛, 파충류들에 의해서도 변형된다. 비구들이여, 이처럼 변형된다고 해서 물질이라 한다.”(상윳따 니까야 삼켜버림 경(S22:79) §4)

 

“물질 등은 자아(attā)가 아니고 자아에 속하는 것(attaniyā)도 아니고 실체가 없고(asārā) 주인이 없다(anissarā). 그래서 이들은 공(suññā)하다. 이러한 그들의 성질(bhāva)이 공함[空性, suññatā]이다. 이러한 공함의 특징을 ‘변형됨(ruppana)’ 등을 통해서 ‘보여주시기 위해서’라는 뜻이다.”(SA.ī.210)

 

“변형된다(ruppati)’고 했다. 이것은 물질(rūpa)이라는 것은 차가움 등의 변형시키는 조건과 접촉하여 다르게 생성됨을 두고 말한 것이다.”(SAṬ.ī.210)

 

여기서 변형(ruppana, ruppati)은 변화(viparinnāma)와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변형(變形)은 형태나 모양이 있는 것이 그 형태나 모양이 바뀌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물질만의 특징이다. 느낌, 인식, 심리현상들, 알음알이와 같은 정신의 무더기들은 변화는 말할 수 있지만 변형은 없다. 형태나 모양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변형은 물질에만 있는 성질이다.

 

“법들에는 보편적이고 개별적인 두 가지 특징(lakkhaṇa)이 있다.(중국에서는 보편적 특징을 공상(共相)으로 개별걱 특징을 자상(自相)으로 옮겼다.) 이 둘 가운데서 물질의 무더기를 [변형된다는] 개별적인 특징[自相, paccatta-lakkhaṇa = sabhāva-lakkhaṇa]을 통해서 드러내셨다. [변형되는 것은] 물질의 무더기에만 있고 느낌 등에는 없기 때문에 개별적인 특징이라 불린다. 무상/고/무아라는 특징은 느낌 등에도 있다. 그래서 이것은 보편적 특징[共相, sāmañña-lakkhaṇa]이라 불린다.”(SA.ī.291~292)

 

즉 변형(變形, deformation)은 형체를 가진 물질에만 적용되는 개별적이고 특수한 성질이다. 그래서 물질을 이런 변형이라는 물질에만 존재하는 개별적인 특징을 가지고 설명하셨다는 뜻이다. 느낌, 인식, 심리현상들, 알음알이는 형태가 없기 때문에 변형은 존재할 수 없다.

 

(2) 수온

느낌은 정서적인 측면 이다. 인식은 이지적인 번뇌[見惑=어리석음]와 느낌은 정서적인 번뇌[修惑=탐욕과 성냄]와 관계있다. 느낌은 단박에 정리되지 않는다.

  

느낌이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그러면 왜 느낌이라고 부르는가? 느낀다고 해서 느낌이라 한다. 그러면 무엇을 느끼는가? 즐거움도 느끼고 괴로움도 느끼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것도 느낀다. 비구들이여, 이처럼 느낀다고 해서 느낌이라 한다.”(상윳따 니까야 삼켜버림 경(S22:79) §5)

 

“느낀다(vedayati)’는 것은 여기서 오직 느낌(vedanā va)이 느끼는 것이지 다른 중생(satta)이나 개아(puggala)가 느끼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느낌은 느끼는 특징을 가졌기(vedayita-lakkhaṇā) 때문에 토대와 대상을 반연하여(vatth-ārammaṇaṁ paṭicca) 느낌이 오직 느끼는 것이다. 이처럼 세존께서는 여기서도 [느낀다는] 느낌의 개별적 특징(paccatta-lakkhaṇa)을 분석하신 뒤에(bhājetvā) 설하셨다.”(SA.ī.292)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세 가지 느낌인가?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는 느낌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세 가지 느낌이라 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다섯 가지 느낌인가? 육체적 즐거움의 기능[樂根], 육체적 괴로움의 기능[苦根], 정신적 즐거움의 기능[喜根], 정신적 괴로움의 기능[憂根], 평온의 기능[捨根]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다섯 가지 느낌이라 한다.”(상윳따 니까야 백팔 방편 경(S36:22) §§5~6)

  

느낌에 대한 관찰 

“비구들이여, 즐거움을 느낄 때 탐욕의 잠재성향을 버려야 한다. 괴로움을 느낄 때 적의의 잠재성향을 버려야 한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의 경우 무명의 잠재성향을 버려야 한다.”(상윳따 니까야 버림 경(S36:3) §4)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화살에 꿰찔리고 연이어 두 번째 화살에 또다시 꿰찔리는 것과 같다. 그래서 그 사람은 두 화살 때문에 오는 괴로움을 모두 다 겪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배우지 못한 범부는 육체적으로 괴로운 느낌을 겪을 때, 근심하고 상심하고 슬퍼하고 가슴을 치고 울부짖고 광란한다. 그래서 이중으로 느낌을 겪는다. 즉 육체적 느낌과 정신적 느낌이다.”(상윳따 니까야 화살 경(S36:6))

 

“비구들이여, 비구가 이처럼 마음챙겨, 분명히 알아차리며,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스스로 독려하며 머무는 중에 괴로운 느낌이 일어나면 그는 이렇게 꿰뚫어 안다.

 

지금 나에게 괴로운 느낌이 일어났다. 이것은 조건 지워진 것이며, 조건 지워지지 않은 것이 아니다. 무엇에 의해 조건 지워졌는가? 바로 이 몸에 의해 조건 지워졌다. 그런데 이 몸은 참으로 무상하고 형성되었고[有爲] 조건에 의해서 생겨난 것[緣起, 緣已生]이다. 이렇듯 무상하고 형성되었고 조건발생인 몸에 조건 지워진 이 괴로운 느낌이 어찌 항상할 수 있을 것인가?’

 

그는 몸에 대해 그리고 괴로운 느낌에 대해 무상을 관찰하며 머무르고, 사그라짐을 관찰하며 머무르고, 탐욕이 빛바램을 관찰하며 머무르고, 소멸을 관찰하며 머무르고, 놓아버림을 관찰하며 머무른다. 그가 몸에 대해 그리고 즐거운 느낌에 대해 무상을 관찰하며 머무르고, 사그라짐을 관찰하며 머무르고, 탐욕이 빛바램을 관찰하며 머무르고, 소멸을 관찰하며 머무르고, 놓아버림을 관찰하며 머물면 몸에 대한 그리고 괴로운 느낌에 대한 적의의 잠재성향이 사라진다.”(상윳따 니까야 간병실 경 1(S36:7) §7)

 

즐거운 느낌과 평온한 느낌에 대해서도 같은 방법으로 설하심.

 

 

(3) 상온 

인식은 이지적 번뇌와 관계있고 우리의 사상과 철학과 관계있다. 단박에 전환 가능하다. 유신견과 관계있다. 상락아정이라는 인식의 전도에 빠져서 어리석음[치]로 발전된다.

  

인식이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그러면 왜 인식이라고 부르는가? 인식한다고 해서 인식이라 한다. 그러면 무엇을 인식하는가? 푸른 것도 인식하고 노란 것도 인식하고 빨간 것도 인식하고 흰 것도 인식한다. 비구들이여, 이처럼 인식한다고 해서 인식이라 한다.

                                               ”(상윳따 니까야 삼켜버림 경(S22:79) §6)

 

“푸른 것도 인식하고’라는 것은 푸른 꽃이나 천에 대해서 준비단계(parikamma)의 [인식을] 만든 뒤에 근접단계나 본 단계의 [인식을] 얻으면서 인식한다. 여기서 인식이라는 것은 준비단계의 인식(parikamma-saññā)도 해당되고 근접단계(upacāra-saññā)의 인식도 해당되고 본 단계의 인식(appanā-saññā)도 해당된다. 그리고 푸른 것에 대해서 푸르다고 일어나는 인식도 해당된다. 이 방법은 노란 것 등에도 적용된다. 여기서도 세존께서는 인식하는 특징을 가진(sañjānana-lakkhaṇa) 인식의 개별적인 특징(paccatta-lakkhaṇa)을 분석하신 뒤에 설하셨다.”(SA.ī.292)

 

한편 여기에 나타나는 준비단계와 근접단계와 본 단계는 삼매 수행에도 적용되어서 설명되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아비담마 길라잡이 제9장 §4와 해설 등을 참조할 것.

 

초기경에서 인식(想, 산냐, saññā)은 다양한 문맥에서 나타난다. 가장 많이 나타나는 경우가 오온의 세 번째인 인식의 무더기(想蘊)이다. 오온의 두 번째인 느낌(受, vedanā)이 우리의 예술적이고 정서적인 심리현상들(行)의 단초가 되는 것이라면, 인식은 철학이나 사상과 같은 우리의 이지적인 심리현상들의 밑바탕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버려야할 인식 

인식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대상을 받아들여 이름을 짓고 개념을 일으키는 작용이다. 그런데 이런 개념작용은 또 무수한 취착을 야기하고 해로운 심리현상들(不善法)을 일으키기 때문에 초기경의 여러 문맥에서 인식은 부정적이고 극복되어야 할 것으로 언급되어 있다. 그래서 최초기 가르침인 <숫따니빠따> 제4장에서도 인식은 견해(見)와 더불어 극복되어야 할 것으로 나타나며, 특히 ‘희론하는 인식(papañca-saññā)’을 가지지 말 것을 초기경들은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버리고 극복되어야 할 대표적인 인식으로 <금강경>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즉 자아가 있다는 인식, 개아가 있다는 인식, 중생이 있다는 인식, 영혼이 있다는 인식을 들고 있음은 우리가 잘 알고 있다. 이러한 인식들은 단지 인식에만 머물지 않고 존재론적인 고정관념으로 고착된다고 이해한 구마라즙 스님은 이러한 인식을 상(想)으로 옮기지 않고 상(相)으로 옮겼다.

  

인식의 전도[상전도, saññā-vipallāsa] - 4전도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무아고, 부정한 대상에 대해서 영원하고, 행복하고, 자아고, 깨끗하다고 여기면서 일어나기 때문에 전도라 한다.”(청정도론 XXII.53) 

무상 고 무아 부정을 상락아정(常樂我淨)으로 여기는 것을 인식의 전도라 한다.

  

닦아야할 인식 

한편 남.북방의 아비담마/아비달마와 유식에 의하면 인식은 마음(心)과 항상 함께 일어나는 심리현상(遍行心所)이다. 그러므로 멸진정에 들지 않는 한 우리는 인식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인식이 마음과 함께 일어나기 마련인 것이라면 해탈.열반에 방해가 되는 존재론적인 인식은 버리고 해탈.열반에 도움이 되는 인식들을 개발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초기경에는 제거되어야할 고정관념으로서의 인식만을 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을 증득하고 해탈.열반을 실현하기 위해서 개발하고 닦아야 하는 인식도 나타나고 있다. 특히 앙굿따라 니까야에는 수행자들이 닦아야할 여러 가지 조합의 인식들이 나타나고 있는데 앙굿따라 니까야 인식경2(A7:46)에서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비구들이여, 일곱 가지 인식을 닦고 많이 (공부)지으면 큰 결실과 큰 이익이 있고 불사(不死)에 들어가고 불사를 완성한다. 무엇이 일곱인가? 부정(不淨)이라고 관찰하는 지혜에서 생긴 인식, 죽음에 대한 인식, 음식에 혐오하는 인식, 온 세상에 대해 기쁨이 없다는 인식, 오온에 대해서 무상(無常)이라고 관찰하는 지혜에서 생긴 인식, 무상한 오온에 대해서 괴로움이라고 관찰하는 지혜에서 생긴 인식, 괴로움인 오온에 대해서 무아라고 관찰하는 지혜에서 생긴 인식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아니 대아니 진아니 영혼이니 일심이니 하는 존재론적인 실체가 있다고 희론하는 인식이나 고정관념을 여의고, 5온.12처.18계로 분류되는 존재일반이 모두 무상이요 고요 무아라고 인식하는 습관을 길러 필경에는 무상.고.무아를 꿰뚫는 통찰지(반야, 慧)를 완성해야할 것이다. 이렇게 실천하는 자야말로 해탈.열반의 길을 가는 진정한 부처님의 제자일 것이다. 

 

(4) 행온

초기경에서 행(行, saṅkhāra)는 세 가지 의미로 쓰인다. 이 가운데 행온(saṅkhāra-kkhandha)의 행은 ‘심리현상들’을 뜻한다. 오온의 행온은 항상 복수로 나타난다. 청정도론에서는 느낌과 인식을 제외한 50가지를 들고 있다. 

 

심리현상들이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그러면 왜 심리현상들이라고 부르는가? 형성된 것을 계속해서 형성한다고 해서 심리현상들이라 한다. 그러면 어떻게 형성된 것을 계속해서 형성하는가? 물질이 물질이게끔 형성된 것을 계속해서 형성한다. 느낌이 느낌이게끔 형성된 것을 계속해서 형성한다. 인식이 인식이게끔 형성된 것을 계속해서 형성한다. 심리현상들이 심리현상들이게끔 형성된 것을 계속해서 형성한다. 알음알이가 알음알이이게끔 형성된 것을 계속해서 형성한다. 비구들이여, 그래서 형성된 것을 계속해서 형성한다고 해서 심리현상들이라 한다.”(삼켜버림 경(S22:79) §7)

 

여기서 심리현상들로 옮긴 원어는 상카라(saṅkhārā)이고 중국에서 행(行)으로 옮긴 술어이다. 오온의 문맥에서 나타나는 상카라는 항상 복수형태로 나타나고 있음에 유념해야한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오온의 네 번째인 상카라[行]를 ‘심리현상들’로 옮기고 있다.

 

혹자들은 오온의 행온을 의도적 행위나 업형성(력) 등으로 이해하고 옮기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행온의 한 부분인 cetanā(의도)만을 부각시킨 역어이다. 행온에는 이 의도를 포함한 50가지 심리현상들(느낌과 인식을 제외한 모든 심리현상, 혹은 심소법들)을 다 포함한다는 것이 주석서와 복주서들을 비롯한 아비담마의 한결같은 설명이다.

 

 

행(saṅkhāra)의 세 가지 의미 

옛날 중국에서 역경승들이 행(行)으로 옮긴 범어는 상카라(saṅkhāra, Sk.samskara)인데 이것은 saṁ(함께)+√kṛ(행하다, to do)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행한다는 의미를 지닌 어근 √kṛ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살려서 중국에서 행(行)으로 정착시킨 것이다. 그러나 행이라는 한역 단어만을 가지고 상카라의 의미를 파악한다는 것은 무리라고 할 수 밖에 없다. 그 의미는 초기경들에 나타나는 문맥을 통해서 파악할 수밖에 없는데 상카라는 경들에는 크게 다음의 네 가지 문맥에서 나타난다.

 

첫째, 제행무상(諸行無常)과 제행개고(諸行皆苦)의 문맥에서 제행으로 나타나는데 항상 복수로 쓰인다. 이 경우의 제행은 유위법(有爲法, saṅkhata-dhamma)들을 뜻한다. 즉 열반을 제외한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모든 유위법들을 행이라고 불렀다. 이 경우에 행은 ‘형성된 것들’에 가까운 뜻이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이렇게 통일해서 옮기고 있다. 그 외 목숨의 상카라(ayu-saṅkhara), 존재의 상카라(bhava-saṅkhara), 생명의 상카라(jīvita-saṅkhāra) 등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 경우도 ‘형성된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둘째, 오온의 네 번째인 행온(行蘊, saṅkhāra-kkhandha)으로 나타나는데 이 경우에도 예외 없이 복수로 쓰인다. 오온 가운데서 색(色, 물질)은 아비담마의 색법이고 수상행(受想行)은 아비담마의 심소법(心所法)들이고 식(識)은 아비담마의 심법이다. 그러므로 오온에서의 행은 상좌부 아비담마의 52가지 심소법들 가운데서 느낌[수]과 인식[상]을 제외한 나머지 심소법들 모두를 뜻하는데, 감각접촉, 의도, 주의, 집중, 의욕과 유익한(善) 심리현상들 모두와 해로운(不善) 심리현상들 모두를 포함한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이 경우의 행은 ‘심리현상들’로, 행온은 ‘심리현상들의 무더기’로 옮기고 있다.

 

셋째, 12연기의 두 번째 구성요소인 무명연행(無明緣行)으로 나타난다. 12연기에서의 행도 항상 복수로 나타나는데 청정도론에서 ‘공덕이 되는 행위(punna-abhisankhara), 공덕이 되지 않는 행위, 흔들림 없는 행위’로 설명이 되듯이 이 경우의 행은 ‘업지음들’ 혹은 ‘의도적 행위들’로 해석된다. 이 경우의 행은 업(karma)과 동의어이다. 그래서 서양에서도 kamma-formations(업형성들)로 이해하고 있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의도적 행위들’로 옮긴다.

 

넷째, 몸(身)과 말(口)과 마음(意)으로 짓는 세 가지 행위인 신행(身行, kāya-saṅkhāra) 구행(口行, vacī-saṅkhāra) 의행(意行, mano-saṅjhāra)으로 나타난다. 본서 부미자 경(S12:25) §§8~10과 앙굿따라 니까야 상세하게 경(A4:232) §3 등에서 보듯이 이때의 행은 의도적 행위이다. 그리고 청정도론에서는 이 삼행도 12연기의 행처럼 업형성 즉 의도적 행위로 이해한다.(청정도론 XVII.61 참조) 그래서 신행 구행 의행은 각각 신업 구업 의업의 삼업(三業)과 동의어가 된다.

 

그런데 이 신구의 삼행은 상황에 따라 ‘작용’으로 이해해야 하는 곳도 있다. 예를 들면 이 몸의 상카라(신행)를 들숨날숨으로, 말의 상카라(구행)를 일으킨 생각[尋, vitakka]과 지속적 고찰[伺, vicāra]로, 마음의 상카라(의행)를 느낌과 인식으로 설명하는 경이 몇 군데있다.(본서 까마부 경 2(S41:6) §3이하를 참조) 이 경우에 상카라는 ‘작용’ 정도로 이해해야한다고 본다. 들숨날숨이나 생각과 고찰이나 느낌과 인식은 결코 의도적 행위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행(상카라)은 그 용처에 따라서 그 의미를 각각 다르게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상카라(saṅkhāra)에다 접두어 abhi-를 붙인 아비상카라(abhisaṅkhāra)가 나타나는데 이 경우는 의도적 행위를 뜻한다. 특히 청정도론과 주석서 문헌에서는 거의 예외 없이 의도적 행위를 뜻한다고 보여진다.(본서 부미자 경(S12:25) §8의 주해 참조) 그래서 본서에서 역자는 아비상카라를 ‘업형성’이나 ‘의도적 행위’로 옮기고 있다.

 

한편 청정도론 등의 주석서 문헌과 아비담마에서는 위의 느낌과 인식을 포함하여 모두 52가지의 심리현상들을 들고 있는데, 이들을 다시 공통되는 것들 13가지와 과 해로운 것들 14가지와 유익한 것들 25가지로 분류한 뒤에 이들을 다시 ‘반드시들’과 ‘때때로들’로 나누어서 고찰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아비담마 길라잡이 제2장을 참조할 것.

 

 (5) 알음알이의 무더기

 

알음알이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그러면 왜 알음알이라고 부르는가? 식별한다고 해서 알음알이라 한다.(vijānātīti kho tasmā viññāṇaṁ) 그러면 무엇을 알음하는가? 신 것도 식별하고 쓴 것도 식별하고 매운 것도 식별하고 단 것도 식별하고 떫은 것도 식별하고 떫지 않은 것도 식별하고 짠 것도 식별하고 싱거운 것도 식별한다. 비구들이여, 이처럼 식별한다고 해서 알음알이라 한다.”(삼켜버림 경(S22:79) §8)

 

본경을 위시한 니까야들에서 알음알이는 단지 여섯 감각기능을 통해서 대상을 아는 작용을 뜻한다. 그래서 주석서 문헌에서 알음알이(viññāṇa)와 마음(citta)과 마노[意, mano]는 ‘대상을 아는 것(ārammaṇaṁ vijānāti ― ItA.ī.9; ārammaṇaṁ cinteti ― DhsA.63 등)’으로 정의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아는 작용은 반드시 느낌과 인식과 심리현상들과 같은 심소법들의 도움이 있어야한다고 아비담마는 덧붙이고 있다.

 

 

[왜 오온을 설하셨는가] 

“비구들이여, 물질은 무상하고 느낌은 무상하고 인식은 무상하고 심리현상들은 무상하고 알음알이는 무상하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물질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느낌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인식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의도적 행위들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알음알이에 대해서도 염오한다. 염오하면서 탐욕이 빛바래고, 탐욕이 빛바래므로 해탈한다. 해탈하면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梵行)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으며,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고 꿰뚫어 안다.”(상윳따 니까야 무상 경(S22:12) §3 등)

 

“염오(nibbidā)’란 염오의 지혜(nibbidā-ñāṇa)를 말하는데 이것으로 강한 위빳사나(balava-vipassanā)를 드러내고 있다.”(SA.ī.53 ― 의지처 경(S12:23) §4의 주해)

 

“탐욕의 빛바램(이욕, virāga)’이란 도(magga, 즉 예류도, 일래도, 불환도, 아라한도)이다. ‘탐욕이 빛바래므로 해탈한다’는 것은 탐욕의 빛바램이라는 도에 의해서 해탈한다라는 과(phala)를 설하셨다. ‘해탈하면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다.’라는 것은 여기서 반조(paccavekkhaṇā)를 설하셨다.(MA.ī.115 = 맛지마 니까야 뱀의 비유 경(M22) 29에 대한 주석)

 

또 다른 주석서를 인용하자면, “‘염오(nibbidā)’는 강한 위빳사나(balava-vipassanā)이고 ‘탐욕의 빛바램(virāga)’은 도이다. ‘해탈지견(vimutti-ñāṇadassana)’은 과의 해탈(phala-vimutti)과 반조의 지혜를 뜻한다.”(AA.īi.228) 이 주석서에서는 있는 그대로 알고 봄[如實知見]을 얕은 단계의 위빳사나라고 설명하고 있다.

 

한편 과거/현재/미래 경1(S22:9) 등 온 상윳따(S22)의 도처에서는 오온의 무상/고/무아를 통찰하여 염오-이욕-소멸을 실현하는 것을 설하고 있다. 여기서도 당연히 염오는 강한 위빳사나요, 이욕은 도요 소멸은 아라한과라고 주석서들은 밝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