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 이야기

[각묵스님] 초기불교에서 본 마음

실론섬 2015. 1. 21. 14:52

마음은 오온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마음은 무상하다. 

마음은 찰나생․찰나멸이다.

마음은 흐름이다.

마음은 대상을 아는 것이다.

마음은 반드시 대상이 있다.

마음은 연이생(緣起, 조건발생)이다.

 

고정불변한 마음은 없다. 그러므로 절대로 마음을 절대화하면 안된다. 그건 불교가 아니고 외도다. 무엇보다도 절대화해버리면 절대로 못깨닫는다. 절대는 복종과 순종과 믿음과 충성의 대상이지 깨달음은 아니다. 불교의 믿음은 불법승계에 대한 믿음으로 족하다.

 

무상․고․무아와 연이생을 보는 것이 해탈이다. 

무상․고․무아는 해탈의 관문(vimokkha-mukha)이다. 

 

[마음의 정의]: 대상을 아는 것

 

여러 초기경에서는 ‘식별(識別, 了別)한다고 해서(vijānāti) 알음알이라한다’고 알음알이[識]를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알음알이가 일어나는 것을 “눈과 형색을 조건으로 눈의 알음알이가 일어난다.(cakkhuñ ca paṭicca rūpe ca uppajjati cakkhuviññāṇaṁ)”(괴로움 경(S35:106) §3) 등으로 경의 도처에서 표현하고 있다. 즉 알음알이는 감각장소와 대상을 조건으로 해서 발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여러 경들에서는 “마노로 법을 안다(manasā dhammaṁ vijānāti).”(S35:70/iv.42)”라고도 설명하는 구절이 나타난다. 이를 종합해보면 ‘감각장소를 통해서 대상을 아는 것’을 알음알이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주석서 문헌에서는 마음(citta)을 “대상을 사량한다고 해서 마음이라 한다. [대상을] 안다는 뜻이다.(cittan ti ārammaṇaṁ cintetīti cittaṁ; vijānātīti attho - DhsA.63)”라거나 는 등으로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초기경전과 청정도론 등의 주석서 문헌뿐만 아니라 북방 아비달마와 유식에서도 심의식은 동의어라고 한결같이 나타나고 설명되고 있다. 이미 초기경전의 몇 군데에서 “마음[心]이라고도 마노[意]라고도 알음알이[識]라고도 부른 것(yam kho vuccati cittam iti pi mano, iti pi viññāṇaṁ)”(배우지 못한 자 경1(S12:61) §4와 주해 참조)이라고 나타난다.

 

그럼 이러한 마음[心], 마노[意], 알음알이[識]에 대해서 유념해야할 몇 가지를 적어보자.

 

첫째, 마음 혹은 알음알이는 조건발생이다. 감각장소와 대상이라는 조건이 없이 혼자 독자적으로 존재하거나 일어나는 마음은 절대로 존재할 수가 없다.

 

둘째, 마음은 단지 대상을 아는 것일 뿐이다. 이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것은 남북 아비담마/아비달마와 유식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유식의 아뢰야식도 반드시 종근기라는 대상을 가진다. 그럼 마음은 어떻게 대상을 아는가? 상좌부 아비담마는 이것을 인식과정으로 정교하게 설명해낸다. 여기에 대해서는 아비담마 길라잡이 제4장을 참조할 것.

 

셋째, 마음은 단지 오온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마음을 절대화하면 절대로 안된다. 마음을 절대화하면 즉시에 외도의 자아이론이나 개아이론이나 영혼이론이나 진인이론으로 떨어지고 만다. 이것이 금강경에 나타나는 산냐의 이론이다. 이것은 우리 불교가 가장 유념하면서 고뇌해야할 부분이기도 하다.

 

넷째, 마음은 무상하다. 그리고 실체가 없는 것(무아)이다. 특히 본 무더기 상윳따(S22) 도처에서 알음알이를 위시한 오온의 무상은 강조되고 있다. 여기에 투철하고 사무쳐야 염오-이욕-소멸 혹은 염오-이욕-해탈-해탈지가 일어나서 깨달음을 성취하고 해탈열반을 성취하고 성자가 된다. 그렇지 않고 마음을 절대화해버리면 결코 깨달음을 실현할 수 없다. 오온을 절대화해버리면 그것을 부처님께서는 유신견이라 하셨고 이것은 중생을 중생이겠금 얽어매는 열가지 족쇄가운데 첫 번째로 초기경의 도처에서 나타나며, 이러한 유신견이 있는 한 그는 성자의 초보단계인 예류자도 되지 못한다.

 

다섯째, 마음은 찰나생․찰나멸이다. 그래서 “비구들이여, 이것과 다른 어떤 단 하나의 법도 이렇듯 빨리 변하는 것을 나는 보지 못하나니, 그것은 바로 마음(citta)이다. 비구들이여, 마음이 얼마나 빨리 변하는지 그 비유를 드는 것도 쉽지 않다.”(앙굿따라 니까야 하나의 모음, A.i.9)라고 앙굿따라 니까야는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주석서와 아비담마에서 카나(khaṇa, 찰나, 순간)로 정착이 된다. 찰나의 규명은 주석서 문헌을 통해서 이루어낸 아비담마 불교의 핵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음을 위시한 법들은 찰나생․찰나멸하는 일어나고 사라짐(기멸)의 문제이지 있다․없다(유무)의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주석서는 더 나아가서 이 찰나도 다시 일어나고 머물고 무너지는(uppāda-ṭṭhiti-bhaṅga) 세 아찰나(亞刹那, sub-moment)로 구성된다고 설명하여 자칫 빠질지도 모르는 찰나의 실재성마저 거부하고 있다.

 

여섯 째, 마음은 흐름(상속, santati)이다. 마음이 찰나생․찰나멸이라면 지금여기에서 생생히 유지되어가는 우리의 이 마음은 무엇인가? 이렇게 명명백백한데 어떻게 없다 할 수 있는가? 초기불교와 주석서에서는 지금여기에서 생생히 전개되는 이 마음을 흐름으로 설명한다. 이를 주석서에서는 심상속(心相續, citta-dhāra, citta-srota, 금강경: 心流注)이니 바왕가의 흐름(bhavaṅga-sota) 등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남북방 불교에서 공히 강조하고 있다. 마음은 마음을 일어나게 하는 근본원인인 갈애와 무명으로 대표되는 탐욕․성냄․어리석음(탐진치)이 다할 때 까지 흐르는[相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