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불교·한국불교 논문및 평론

고(苦)인 것을 낙(樂)이라 하고 낙인 것을 고라 하는 것, 이것은 전도(顚倒)의 법이다

실론섬 2015. 1. 22. 18:51

불교의 최고의 이상이며 궁극적 목적이 닙바나인 것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그런데 이 닙바나는 모든 번뇌와 편견의 초월을 뜻하는 것이기에 결국 영원의 세계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그러면 이러한 영원계인 닙바나는 어떤 양상을 띠고 있는가를 대승경전의 [열반경]에서는 '열반의 삼덕(三德)과

열반의 사덕(四德)'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대승불교 입장에서 영원계인 닙바나의 세 가지 또는 네 가지 특성을 말한 것이어서 주목할만 하다.


열반의 삼덕이란 법신(法身). 반야(般若). 해탈(解脫)을 가리킨다. 법신이란 영원한 이법(理法)을 인격화한 것, 반야란 생사를 구명하는 지혜, 해탈이란 생사의 초월을 말함이다. 결국 진리. 지혜. 초월의 셋이 영원계의 특성인 바, 이 셋은 셋이면서 하나, 하나면서 셋인 불일불이(不一不異)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열반의 사덕이란 상(常).낙(樂).아(我).정(淨)을 말하는 바, 상(常)이란 상주(常住)를 이름이니 시간론에 서서 영원계를 규정한 것이며, 낙(樂)이란 지복(至福)을 뜻하는 것이니 행복관에 의한 규정이며, 아(我)란 자아(自我)니 존재론으로써 내린 규정이며, 정(淨)은 순정(純淨)인 바 윤리관에서 내린 규정이다. 영원의 세계는 상주불멸(常住不滅). 확고부동(確固不動)의 세계요, 지복(至福).순정(純淨)의 세계라는 뜻이다.


그런데 영원계의 특징인 "상.낙.아.정"에 대해서는 범부들도 자기 나름대로 그것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부분이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이다. 즉 미혹(迷惑)된 "상.낙.아.정"이라서 그런 것이다. [열반경]은 이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 고(苦)인 것을 낙(樂)이라 하고 낙(樂)인 것을 고(苦)라 하는 것, 이것은 전도(顚倒)의 법이다. 무상(無常)을 상(常)인 줄 알고 상(常)을 무상(無常)인 줄 아는 것, 이것은 전도의 법이다. 무아(無我)를 아(我)인 줄 알고 아(我)를 무아(無我)인 줄 아는 것, 이것은 전도의 법이다. 부정(不淨)을 정(淨)인 줄 알고 정(淨)을 부정(不淨)인 줄 아는 것, 이것은 전도의 법이다. 이런 네 가지 전도의 법이 있다."


즉 우리의 현실세계는 무상.변화의 지배하에 있으며, 거기에 있는 일체의 존재는 모두 확고부동.독립고정의 실체(自我)가 없고 이 세상은 괴로움에 충만한 데다가 부정(不淨)한 세계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영원한 세계인 양 착각하고, 그 속에 불변하게 존속하는 실체를 구하고 낙(樂)을 희구하고, 청정한 양 보는 것, 이것이 제 一의 사도견(四倒見)이다. 


우리들은 이 세상의 모든 것(諸法)이 영구히 그런 상태로 거기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法我見). 예를 들어 청년은 청춘이, 부자는 재물이, 권력자는 권력이 언제까지나 존속할 것이라는 생각 속에 살아가고 있다. 이같이 사물의 영구성을 바라고 또한 자기 마음에 드는 것을 추구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人我見). 이것이 사도견(四倒見)의 상.낙.아.정의 양상이다. 붓다께서 인생의 무상.무아.고.부정등을 설하신 것도 사실 이러한 사도견(四倒見)을 깨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도된 생각은 이에 그치지 않아 제2의 사도견(四倒見)까지 생겨났다. 그것은 인생이 무상.무아... 하다는 말을 듣고 모든 것을 무(無)로 돌아갈 것이므로 이 세상에는 마음을 붙일 만한 가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에서 행복하고자 하는 의욕을 버리고, 순수한 사랑이니 순정같은 것을 믿으려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는 삶의 의미와 행복을 상실한 허무적인 인생관이며 이를 "무위(無爲)의 사도견(四倒見)"이라 한다. 붓다는 이 사도견을 깨기 위해 영원계의 상.낙.아.정을 적극적으로 설하신 것이다. 따라서 열반의 사덕(四德)으로서의 상.낙.아.정과 제1의 사도견(四倒見)인 상.낙.아.정과는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열반의 四덕으로 제시된 상.낙.아.정은 상견(常見. 영원론)으로서의 제 1의 사도견과 단견(斷見. 허무론)으로서의 제 2의 사도견을 함께 초월한 그것인 것이며 본래는 유무(有無). 생사(生死). 상무상(常無常)의 대립을 넘어선 비유비무(非有非無). 불생불멸(不生不滅), 비상비무상(非常非無常)의 공(空)으로서 파악되는 것이다.


사도품(四倒品) 二 에 다시 사도견이 거론되고 있으며 이를테면 상.무.상에 대해, "무상에 상상(常想)이 있고 상(常)에 무상상(無常想)이 있으니 이를 전도(顚倒)라 이른다."라고 평하면서, "공적(空寂)을 닦지 않고 상주(常壽)를 얻는다 말하는 것은 전도다."라고 설했다. 즉 공(空)이 파악되어 있지 않은 한 영원은 이해되지 않는다는 것, 진정한 영원은 무상에 대한 상(常), 상에 대한 무상을 초월한 공(空)에 있어서만 존재한다는 말이다. 고. 낙에 대해서도 같은 논법으로 설명이 되어있다.


아(我). 무아에 대해서는 "무아에 아상(我想)이 있고 아(我)에 무아상(無我想)이 있으니, 이것을 전도라 이른다."고 평하면서 이같이 설했다. "세상 사람들도 아(我)가 있다 하고 불법에서도 아(我)가 있다고 한다. 세상 사람들은 아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불성(佛性)은 없다. 이것을 일러 무아 속에서 아상(我想)을 품는다고 한다. 이것은 전도의 법이다. 불법에서 아가 있다 함은 즉 불성을 말하는 것이다." 


즉 세상에서 말하는 아(我)는 아집(我執). 아욕(我慾)에 의해 세워진 미상(迷像)이니 진실한 아(我)가 아니라 아(我)가 없는 곳에 만들어진 거짓의 아(我)다. 이에 대해 불교에서 말하는 아는 아집. 아견(我見). 아상(我想)을 초월함에 의해, 그 의미에서 무아가 되는 그것에 의해 파악된 진정한 아(我)라는 뜻이다. 미혹이 불식된 진정한 자기, 진실한 자기인 까닭에 불성이라 하는 것이다. 붓다는 범부들의 망집(妄執)의 아견을 깨기 위해 무아를 설했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한 자기라든가 진실한 의지처 따위가있을수 없다는 부정적. 허무적인 생각과는 다르다. 그런 것은 미혹에서 오는 무아견(無我見)에 지나지않는다. 불성으로서의 아(我)는 아견. 무아견의 양자를 넘어선 곳에 성립하는 것이며 진실한 자기는 아견. 무아견의 허망한 분별을 초월한 무분별의 공(空)에서 파악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