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야단법석

연꽃님의 글 “불행·가난한 사람을 보면 우리도 한때 ..." 를 비난함

실론섬 2015. 3. 8. 14:11

행복하기를!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진흙속의연꽃’의 불교이야기] 7. 자애와 연민은 어떻게 엮어져 있을까?

“불행·가난한 사람을 보면 우리도 한때 저러한 사람이었다고 관찰하라”


불교를 자비의 종교라 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사랑’을 말한다. 사랑과 자비는 다른 말임에도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자비(慈悲)의 의미를 제대로 몰라서 일 것이다.

 

자비(慈悲)가 뭐냐고?

 

자비는 자애와 연민의 준말이다. 그래서 한자어로 자비라 한다. 이렇게 자애와 연민의 복합어로 되어 있는 자비에 대한 기사를 보았다. 미디어붓다에 선일스님에 대한 기사를 말한다. 꽤 긴길이의 인터뷰기사에서 자비와 관련된 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다.  

 

오늘날 한국불교계에 자비라는 명칭을 차용한 수행법 종류가 많이 회자되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스님은 따끔한 일침을 가한다. 그런 분들에게 ‘자(慈)’는 뭐고 ‘비(悲)’는 뭐냐고 물으면 이런 것이고, 저런 것이라고 장황하게 설명하지만, 막상 그 둘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이냐고 재차 물으면 대개가 멍하니 말문이 막힌다는 것이다. 예컨대 ‘자비라는 것은 <메따수따>(자애경)에 있는 것인데, <메따수따>에는 자비가 어떻게 설명되어 있나요?’ 라고 한 단계 더 물어 들어가면 대개가 답변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붓다의 원음 듣고싶으면 화운사로 오세요”, 미디어붓다 2015-02-06) 

 

이 기사를 보면 자비에 대한 문제를 제기 하고 있다. 자비라는 말을 많이 하지만 정확하게 어떤 것인지 알고나 쓰는 것인지에 대하여 묻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답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자애경을 언급하며 자비가 어떤 것인지 알아 보라는 뜻으로 숙제를 던지고 있는 것 같다.

 

자애경을 열어보니

 

자비를 뜻하는 자애(慈) 와 연민(悲)의 뜻은 무엇일까? 그리고 자애와 연민은 어떤 관계일까? 자애와 연민의 복합어 자비는 어떻게 엮어져 있을까? 이에 대하여 알기 위하여 자애경(Sn1.8)을 열어 보았다. 열어보니 자애와 연민과 관련된 게송을 발견할 수 있었다.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거나, 

멀리 사는 것이나 가까이 사는 것이나, 

이미 생겨난 것이나 생겨날 것이나, 

모든 님들은 행복하여지이다. (stn147)

  

서로가 서로를 헐뜯지도 말지니, 

어디서든지 누구든지, 

분노 때문이든 증오 때문이든 

서로에게 고통을 바라지 않나이다. (stn148) 

 

자애경(Metta Sutta)은 테라와다 불교의 예불문이자 동시에 수호경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테라와다 불자들이 마치 우리나라 불자들이 조석으로 천수경을 독송하듯이 자애경을 독송한다고 한다.

 

경에서 “모든 님들은 행복하여지이다.”라는 문구가 보인다. 이 문구는 빠알리어로 “sabbe sattā bhavantu sukhitattā”이다. 직역하면 “모든 존재들이 진정으로 행복해지기를!”라고 번역할 수 있다. 여기서 ‘진정으로’에 해당되는 말이 ‘tattā’이다. tattā는  ‘the real nature; reality, 本性, 眞實(truth)’의 뜻이다. 이렇게 본다면 모든 중생들이 단순히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뜻에서 ‘수키땃따(sukhitattā)’라 하였을 것이다.

 

자애의 의미는 모든 존재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그것도 진실(tattā)로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연민은 어떤 것일까? 자애경을 보면 “서로에게 고통을 바라지 않나이다 (nāññamaññassa dukkham iccheyya)”라 하였다. 하지만 이 문구는 연민에 대한 내용이라기 보다 자애의 설명에 대한 연장선상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연민에 대하여 한마디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연민과 관련하여 청정도론을 찾아 보니

 

연민과 관련하여 청정도론을 찾아 보았다. 청정도론 거룩한 마음가짐에 연민수행에 대한 것이 있다. 이중 핵심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어떻게 비구가 한 방향에 연민과 함께한 마음을 가득 채우고 머무는가? 마치 고통에 빠져있고 불운이 닥친 어떤 사람을 보고 연민이 가듯이 이과 같이 모든 중생들에 대해 연민을 가득 채운다.”라고 『위방가』에서 설했기 때문에 우선 제일 먼저 볼품없고, 고난에 빠져있고, 고통에 빠져있고, 불운이 닥쳤고, 거지 신세이고, 손발이 잘렸고, 걸식할 밥그릇을 앞에 놓은 채 빈민 구제소에 앉아있고, 손발에 구더기가 끊고, 신음하는 어떤 불쌍한 사람을 보고 ‘이 중생이 고난에 빠져있구나, 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를!’하고 연민을 일으켜야 한다. 이런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죄를 지은 사람이 비록 행복해보일지라도 그를 사형선고 받은 사람에 비유하여 연민을 일으켜야 한다.

(연민수행, 대림스님역 청정도론 171p)

  

청정도론에서는 ‘위방가’를 인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고통에 빠져 있고 불운이 닥친 사람이 대상임을 말한다. 그래서 “이 중생이 고난에 빠져있구나, 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를!”라고 연민을 일으켜야 함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연민이란 한마디로 “모든 중생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이라고 말할 수 있다.

 

BTN ‘붓다의 제자들’에서

 

불교의 키워드 중의 하나가 자비이다. 자비를 실천하는데 있어서 매우 짧은 구호를 든다면 앞서 언급한대로 자애에 대해서는 “모든 중생들이 진실로 행복하기를!”라고 자애의 마음을 내는 것을 말하며, 연민에 대해서는 “모든 중생들이 진실로 고통에서 벗어나기를!”이라고 연민의 마음을 내는 것이라 말 할 수 있다. 그런데 잘못 연민의 마음을 내면 오해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왜 그럴까?

 

인터넷을 이용하여 불교TV사이트를 종종 본다. 올려져 있는 수많은 법문과 강좌가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중에 일부 법문이나 강좌, 토론프로에 공감한다. 그런 프로 중에 ‘전재성’ 박사가 출연한 프로가 있다.

 

BTN에 ‘붓다의 제자들’이라는 프로가 있다. 법담스님이 진행하는 프로이다. 열악한 환경속에서도 불국토를 꿈꾸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기 위하여 고분분투 하는 21세기 부루나를 소개하는 프로이다. 이 프로에서 ‘한국빠알리성전협회’의 전재성 박사 편을 보았다. 

 

잘못 연민의 마음을 내면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사람들은 무언가 해야 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고통이 따를 수 있다는 사실이다.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위하여 ‘운동’을 하고 ‘투쟁’을 하여 감옥에 가게 되었을 때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왜 이런 결과가 생긴 것일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 박사는 번역을 하면서 나중에 부처님 가르침에서 크게 깨달았다고 하였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연민의 방법’에 대한 것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을 대하면 어떤 생각을 해야 할까? 그리고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그냥 불쌍하다고 여기면 안된다’는 것이다. 

 

만일 내가 상대방을 불쌍하게 여긴다면 상대방은 어떤 마음이 들까? 아마 상대방은 ‘불쌍함을 당한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이런 방식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바른 방식일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마음의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어떤 생각을 해야 하느냐? 서양철학의 많은 선지자들이 써 놓은 책을 보아도 해답이 없어요. 정말 초라하고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이 지나가면 어떤 마음을 내야 내가 죄를 짓지 않은가? 그것이 상윳따니까야에 나옵니다. 

 

제가 번역을 하다가 너무너무 감탄했어요. 부처님의 제자가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이 지나갈 때 어떤 마음을 내야 하느냐고 물어 봅니다. 이에 부처님은 ‘과거 오랜 세월을 나도 한때 그와 같은 사람이었다.’라고.” 

(21세기 부루나 붓다의 제자들, 제18회 전재성 박사 (한국빠알리성전협회), 불교TV 2014-10-16)


전재성 박사에 따르면 가난하고 볼품없고 불쌍한 사람이 지나갈 때 단순하게 ‘불쌍하다’라는 마음을 내면 ‘마음의 죄’를 짓는 것이라 하였다. 대신 “나도 한 때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라고 마음을 내는 것이 ‘정답’이라 한다. 이런 마음을 내야 마음에 부담이 없다고 한다. 마음이 평정하여 유리알처럼 맑게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부자가 지나가도 똑같은 마음을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부자를 대하는 태도

 

사람들은 부자에 대하여 시기와 질투심을 갖는다. 그리고 동시에 열등감도 갖는다. 이는 죄악이다. 왜 죄악인가? 미세한 죄악을 쌓아 가다 보면 나중에 큰 죄악이 되기 때문이다. 

 

시기와 질투, 열등감은 버려야 할 오염원으로 본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나보다 더 넓은 평수에 산다거나 더 좋은 승용차를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마음속에서 은근하게 시기와 질투가 일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그러나 아무리 부자가 지나가도 아무리 잘난 사람이 지나가도 “나도 한 때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라고 마음을 낸다면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이건 부자이건 “나도 한 때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라고 마음을 내여야 함을 말한다. 이것이 만고 불변의 진리이고 마음이 맑아지고 마음이 평정하게 되는 것이라 한다. 이런 가르침이 니까야안에 들어 있음을 말한다.

우월감, 동등감, 열등감

 

가난한 자를 대하였을 때와 부자를 대하였을 때 ‘한때 나도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라고 마음을 내라고 하였다. 그렇게 하지 않고 불행하고 가난한 자를 보았을 때 단지 동정심, 연민, 측은한 마음으로 본다면 마음의 죄를 짓는 것이라 하였다. 또 행복하고 부유한 사람을 보았을 때 시기와 질투를 느낀 다면 역시 마음의 죄를 짓는다고 하였다. 왜 그런가? 

 

나보다 못한 자를 보았을 때 ‘우월감’이 일어난다. 반면 나보다 나은 자를 보았을 때 ‘열등감’이 생겨난다. 나와 같은 처지라면 ‘동등감’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이 세 가지는 모두 버려야 할 마음의 오염원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자기를 남과 비교하여 

동등하다거나 열등하다거나 우월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Stn799)

 

“사람이 ‘동등하다’든가 ‘우월하다’든가 

‘열등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그 때문에 다툴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 가지에 대해서 흔들리지 않는다면 

그에게는 ‘동등하다’든가 ‘우월하다’는 것이 없습니다.” (Stn842)

 

“그 때문에 ‘우월하다’든가 ‘열등하다’든가 

혹은 ‘동등하다’라고도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여러 가지 형태로 영향을 받더라도, 

자기를 내세우는 허구를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Stn918)

 

숫따니빠따에 실려 있는 가르침이다. 가르침에 따르면 우월감, 동등감, 열등감을 내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그 때문에 다툼이 일어 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허구를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부처님 당시 숫따니빠따에서 4품과 5품을 주석한 사리뿟따의 ‘닛데사’에 따르면 “자기의 존대(尊大)를 망상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는 “자기에 대한 정신적인 이미지를 형성하지 말아야 한다” 또는 “자기를 찬양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설명된다. 

 

아홉 가지 자만

 

우월감과 동등감, 열등감은 왜 일어나는가? 그것은 나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나를 기준으로 내 세웠을 때 사람들은 “나는 ~이다(I am)”라 한다. 나보다 못한 자를 보면 “나는 누구 보다 낫다”라고 생각하며 우월감을 갖는다. 나와 동등한 자를 한 자를 만나면 “나는 누구와 동등하다”라고 생각하며 동등감을 갖는다. 나보다 나은 자를 만나면 “나는 누구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며 열등감을 갖는다.  이런 우월감, 동등감, 열등감은 모두 아홉 가지 형태로 분류할 수 있다. 이를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1) “나는 누구 보다 낫다”고 생각하며 다른 자에게 우월감을 갖는다.

2) “나는 누구와 동등하다”고 생각하며 다른 자에게 우월감을 갖는다.

3) “나는 누구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며 다른 자에게 우월감을 갖는다.

4) “나는 누구 보다 낫다”고 생각하며 다른 자에게 동등감을 갖는다.

5) “나는 누구와 동등하다”고 생각하며 다른 자에게 동등감을 갖는다.

6) “나는 누구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며 다른 자에게 동등감을 갖는다.

7) “나는 누구 보다 낫다”고 생각하며 다른 자에게 열등감을 갖는다.

8) “나는 누구와 동등하다”고 생각하며 다른 자에게 열등감을 갖는다.

9) “나는 누구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며 다른 자에게 열등감을 갖는다. 

 

삼개조로 된 아홉 가지 형태를 보면 공통적으로 나를 기반으로 한다. 그래서 “나는 누구보다 ~하다”형태로 나타난다. 이렇게 나를 기반으로 하였을 때 우월감, 동등감, 열등감이 생겨 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와 같은 우월감, 동등감, 열등감 모두에 대하여 ‘자만(māna)’으로 보았다. 그래서 “현명한 자라면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희론적 개념의 뿌리를 모두 제거하십시오. (Stn916)”라 하셨다. 이렇게 본다면 자만은 “내가 있다(asmi)”라는 자아관념에 기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열등감도 자만이다

 

일반적으로 자만은 우월감에만 있는 것으로 안다. 우월한 위치에 있는 자들은 열등한 위치에 있는 자들을 얕보고 깔보고 무시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열등감이나 동등감도 자만이 있다는 사실이다. 열등한 자가 우월한 자에게 느끼는 질투나 시기 역시 자만으로 보기 때문이다. 

 

모임에 참석해 보면 갖가지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우월적 자만과 열등적 자만 또는 동등적 자만이 혼재하여 있다는 사실이다. 순수한 종교모임은 물론 동창들 모임에서 조차도 볼 수 있다. 비록 직접적인 표현은 볼 수 없을지라도 참석을 하지 않는다든가 침묵하는 것도 어쩌면 우월감이나 열등감, 동등감에 따른 일종의 의사 표시로 볼 수 있다.

 

자신과 비교하여 남을 평가 할 때 우월의식이나 열등의식이 생겨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어떤 이가 크게 성공을 하여 고급승용차를 몰고 왔을 때 내차와 비교하면 이때 열등감을 느낄 것이다. 이럴 때 시기와 질투가 작렬하여 “불법과 탈법, 불로소득으로 이룬 거겠지”라며 평가절하한다면 열등감에 따른 자만일 것이다. 

 

스님들이 법문 할 때 종종 타종교의 급속한 신장을 부러워하면서도 한편으로 ‘교리적으로 불교만 못하다’고 말한다. 또 어떤 스님에 따르면 ‘예수는 마구간에서 태어났는데 부처님은 왕자로 태어났다’고 말한다. 불교가 타종교에 비하여 여러 모로 열세이다. 그럼에도 불교가 교리적으로 타종교 보다 훌륭하고 더구나 1700년의 전통을 가졌다고 이야기 하며 타종교와 비교하는 것은 열등감에 따른 자만의 발로가 아닐까?

 

우월적 자만 세 가지

 

세 가지 자만 중에서도 우월감에 따른 자만이 가장 마음의 죄를 많이 짓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우월한 자의 자만은 어떤 것이 있을까? ‘생활속의 아비담마’에 따르면 태생이나 계급에 자만을 뜻하는 ‘자띠마나(jati-māna)’, 부자의 자만을 뜻하는 ‘다나마나(dhana-māna)’, 그리고 교육받은 사람들의 자만을 뜻하는 ‘빤냐마나(paññā-māna)’ 이렇게 세 가지 우월적 자만이 있다. 

 

태생이나 계급의 자만이라 무엇일까? 좋은 가문에서 훌륭한 부모를 잘 만나 남보다 뛰어난 용모나 신체적 조건을 갖는 경우를 말한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잘난 체하고, 떠벌리고, 남들을 열등하게 생각 하거나, 천하게 보는 계급적 시각을 가지고 있다.

 

부자의 자만이 있다. 기본적으로 많이 가지고 있는 데서 오는 자만이다. 이런 부자는 자신이 노력을 하여 부를 일구었기 때문에 노력하지 않거나 열심히 일하지 않는 자들을 경멸한다. 게을러서 가난하게 산다고 생각한다.

 

배운자의 자만은 무엇일까? 자신의 학력과 학식이 높다고 생각하는 자는 못 배우고 우둔한 사람을 만나면 잘난체하고 우쭐해 하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 못 배운 자를 깔보기 까지 한다. 

 

우월적 자만은 기본적으로 “내가 누군데!”라 여긴다. 이는 “나는 ~이다(I am)”라고 우월감에 따른 자아에 기반한다. 따라서 우월적 자만을 가진 자는 남을 얕보고 깔보고 무시하기 쉽다. 이는 불선업을 짓는 원인이 된다. 자만이라는 것 자체가 해로운 마음이기 때문에 자만이 쌓이고 쌓이면 그 과보로서 악처에 태어나거나 인간으로 태어나더라도 지위가 낮게 태어날 수 있다. 이는 다름 아닌 ‘파멸’이다. 

 

우월적 자만은 결국 자신을 망치고 파멸로 이끌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우쭐 하다면, 파멸의 장에 들어선 것입니다. 자만하고 교만한 것을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Stn830)”라고 말씀 하셨다.

 

초기경전은 삶의 지침서

 

전재성박사가 생각하는 초기경전은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하여 ‘way of life’라 한다. 초기경전은 철학도 아니고 종교도 아니고 우리의 삶을 행복으로 이끌어 가는 삶의 지침서라 한다. 삶의 지침서로서 초기경전에 쓰여 있는 연민의 마음에 대하여 두 가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가 없다. 무명에 덮인 뭇 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가 없다. 수행승들이여,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을 보면 그대들은 ‘이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우리도 한때 저러한 사람이었다.’ 라고 관찰해야 한다.”(S15.11)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가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가 없다. 수행승들이여, 행복하고 부유한 사람을 보면 그대들은 ‘이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우리도 한때 저러한 사람이었다.’ 라고 관찰해야 한다. (S15.12) 

 

부처님은 가난한 자나 부자에 대하여 대하는 태도에 대하여 공통적으로 하신 말씀이 있다. 그것은 “이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우리도 한때 저러한 사람이었다. (amhehipi evarūpaṃ paccanubhūtaṃ iminā dīghena addhunā)”라고 관찰해야 함을 말한다. 이것이 사람들을 대하는 가장 바른 태도라는 것이다. 이런 태도야말로 어떤 종교에서도 찾아 볼 수 없고 어떤 철학자도 말하지 않았던 불교만의 진리임을 말한다. 이와 같은 평등심의 바탕 하에 연민의 마음을 내었을 때 마음은 유리알처럼 맑아 청정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자애와 연민은 어떻게 엮어져 있을까? 

 

한때 ‘나도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라는 정형구는 가난한 자나 부자에게만 적용되는 것일까? 아니다. 모든 사람에게 모두 다 적용될 수 있다. 지금 인기 절정의 연예인이나 스포츠스타, 유명정치인, 예술인 등 지금 잘 나가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을 부러워 하지만 ‘나도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라는 정형구를 적용하면 한량없는 윤회의 과정에서 ‘나도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라는 것이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한때 나도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라는 사실을 확장 시키면 어떻게 될까? 이에 대하여 초기경에서는 무명에 덮인 뭇 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가 없다고 하면서 “이렇게 오랜 세월을 통해서 일찍이 한번도 어머니가 아니었던 사람을 쉽게 찾을 수 없다.”라 하였다. 어떤 존재이든지 한번쯤 나를 낳아준 어머니이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이는 아버지, 형제, 자매, 아들, 딸도 마찬가지이다. 

 

초기경에 따르면 일체중생이 한번쯤 나의 아버지 이었고, 형제이었고, 자매이었고, 아들이었고, 딸이었다. 이렇게 일체중생이 나의 어머니, 아버지, 형제, 자매, 아들, 딸 이었다면 자연스럽게 자애의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모든 존재들이 진실로 행복하기를!”라고 바라는 마음이 일어날 것이다. 또 모든 존재들이 불행에 빠져 있을 때 “모든 존재들이 진실로 고통에서 벗어나기를!”라고 바라는 연민의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모든 뭇 삶들에 대한 자애를 실천하면 연쇄반응을 일으킨다. 자애(metta)를 실천하여 자애가 생겨나면 마치 어머니가 하나뿐인 아들을 생각하듯이 “모든 뭇삶들이 행복하기를!”라 할 것이다. 또 연민(karuna)을 실천하여 연민이 생겨나면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보았을 때 “모든 존재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라 할 것이다. 이렇게 자애와 연민, 즉 자비의 마음의 바탕에서 다른 사람의 성공과 복지와 행복을 축하하고 그것에 공감한다면 이는 ‘기쁨(mudita)’이고, 인생의 모든 파란과 곡절에서도 침착과 평정(upekkha)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네 방향을 닦아 적의가 없이 

무엇이나 얻은 것으로 만족하고, 

온갖 위험을 극복하여 두려움 없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stn42) 

 

“해탈로 이끄는 자애와 연민과 기쁨과 평정,

올바른 때에 실천하며 

모든 세상으로부터 방해 받지 않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stn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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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붓다에 올려져 있는 연꽃님 글 전체를 옮겨왔다. 불교의 자비라는 것에 대해서 나름대로 논리를 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초기불교에서 대승불교까지 그리고 인도불교에서 중국불교 그리고 한국불교에 이르기까지 모든 불교를 일관하는 덕은 "자비"였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자비는 붓다께서 가지신 가장 큰 무기였다. 화난 코끼리를 순하게 하고, 999명을 죽인 앙굴리말라를 굴복시킨 것은 다름아닌 자비라는 무기였다. 이러한 자비에 대해서 다름대로 개인적인 시각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1) "자.비.희.사" 를 초기불교에서는 사무량심이라고 한다. 이것에 대해서는 "고요한 소리"에 가면 사무량심에 대한 설명이 잘되어 있으니 참조하길 권한다.


2) 자비의 단어적 어원을 따지면 "자"는 metta 라고하며 이는 진정한 우정을 나타내는 말이며, "비'는 karuna 라고 하여 동정.연민이 뜻이다. 그리고 이러한 본래의 "자.비"라는 말은 세월이 지나면서 모든 중생(사람.동물)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이 자(慈)이며, 모든 중생들을 위해 그 괴로움을 제거하는 것이 비(悲)라는 해석이 일반화하여 흔히 부모의 자식에 대한 순수한 사랑이 자비의 비유로 인용되고 있다.


자비는 모든 사람들에게 작용해야 한다. 상대가 자기에게 이익을 주니까 그 상대를 사랑하고 위한다면 그것은 타산적인 이해관계에서 나오는 속된 행위임에 불과하다. 그러나 무연(無緣. 아무 관계없는)의 상대에게까지 무의식중에 손을 뻗칠 수 있는 곳에 자비가 지니는 진정한 불교의 덕목이 있다.


진정한 자비심은 괴로워하는 자를 만났을 때 저절로 우러나오는 연민과 동정심으로 "신.구.의" 삼행의 행동으로 실천되어야 한다. 즉 마음속으로만 불쌍하게 여기고 실제 행동이 없다면 그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도 아니면 자비행도 아니다. 


초기불교(경전)는 자비심을 몸에 체득하는 많은 가르침과 수행법이 자세히 나와있다. 하지만 그 주요 욧점은 자기 자신이 평정심을 갖고 성내지 않는 마음의 소유자가 되는 것이었다. 연꽃님의 글에서도 인용되고 있지만 불쌍한 사람을 만났을 때 "나도 한때는 저런 사람이었다"라고 동정심을 내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라는 것에 한정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붓다께서는 자비를 설하시고 그리고 그것을 실천적인 행동으로 모범을 보여주었다. 또한 붓다의 여러 제자들은 탁발시 가능하면 가난한 집이나 길거리 부량자에게조차 탁발을 하여 복을 짓도록 하는 자비심을 보였지만 붓다께서 입멸후에 세월이 가면서 자비란 덕목이 결과적으로 자신의 수행과 마음을 다스리는 것으로 고착화되어 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초기불교의 자비의 관념은 결과적으로 대승불교에 와서 아라한 대신에 보살이라는 새로운 가치관을 주장하는 단초를 제공했다. 그리고 대승불교에서는 자비란 적극적으로 남에게 자애를 베풀고 상대의 입장이 되어 동정하는 일이라고 주장되었다. 즉 "상대의 괴로움을 없애고 그에게 즐거움을 주는 일(拔苦與樂.발고여락)"이 자비행의 본 뜻이라고 해석되었다. 다시말해서 소극적인 자세에서 발고여락(拔苦與樂)의 이타행(利他行)의 표번으로 보살사상을 주장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서 지나가다 거지를 봤을 때 "나도 한 때 저런 사람이었다"라는 연민의 마음을 내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도 한 때 저런 사람이었다"라는 마음과 함께 동전이라도 한닢 건네주는 적극적인 행동이 진정한 자비심의 발로라고 했던 것이다.


굳이 여기서 대승불교의 보살이나 보살행에 대해서 장황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만 대승불교의 원래 뜻이 "붓다의 원음으로 돌아가자"라는 것을 상기한다면 연꽃님 자신부터 자비라는 개념이 어떤 것인지 재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아무런 이유없이 대승불교가 일어난 것이 아니며 아무런 사상적 근거도 없이 보살사상이 탄생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3. 한국불교에서의 관념불교의 폐해중 대표적인 것이 있다면 바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라는 말을 유행가 가사만큼이나 즐겨 쓴다는 것이다. 연꽃님도 자비라는 글을 왕창 올려놓고 맨 마지막에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게송을 두 편 올려 놓았다. 이곳 토론방에도 "붓다는 혼자서 가라고 말하지 않았다"라는 글을 올려 과거의 연꽃님의 글을 비판했지만 연각승은 불교의 덕목이 결코 아니며 가르침도 아니다. 빠알리어 니까야 중 4부 경전에는 그 어느곳에도 연각승의 코뿔소 이야기는 없다. 숫타니파타에 나오는 연각승의 게송은 아난다 존자의 질문에 대하여 붓다께서 연각승이라는 분들이 있었다고 소개를 한 것에 불과하다. 연각승의 가장 큰 단점은 홀로 깨달았기 때문에 결코 중생들에게 설법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나홀로라는 것이다. 


경전에는 수행이나 열반으로 가는 길목에서 가장 큰 첫번째 덕목으로 선우(善友)을 꼽고 있으며 좋은 도반은 수행의 절반이 아니라 수행의 전부라고 붓다께서 분명하게 훈계하고 있다. 불교는 나홀로 종교가 아니다. 


연꽃의 글을 비난하는 이유가 여럿 있지만 바로 이런 허무맹랑한 것을 들고 와서 자신의 글의 정당성을 주장할려고 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경전을 보는 안목도 없고 지혜도 없기 때문이다. 불교의 자비와 연각승이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불행·가난한 사람을 보면 우리도 한때 저러한 사람이었다고 관찰하라'가 아니다. 자비의 본 뜻은 

“불행·가난한 사람을 보면 우리도 한때 저러한 사람이었다고 관찰하고 그들의 괴로움을 제거하고 함께 기쁘하라"이다. 그것이 불교가 오늘날 우리 중생들의 세간에 던져주는 메세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