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야단법석

연꽃의 글 "백년도 못살면서 천년만년 살 것처럼"을 읽은 독후감...

실론섬 2015. 3. 16. 15:08

백년도 못살면서 천년만년 살 것처럼


집과 사무실을 오가는 일상이다. 주로 걸어서 이동하지만 날씨가 추울 때는 버스를 타고 간다. 요즘은 버스정류소에는 안내판과 함께 GPS전자서비스 시스템도 갖추어져 있어서 매우 편리하다. 그럼에도 버스를 기다리는 것은 지루하다. 불과 몇 분 간격으로 버스가 오긴 하지만 바쁜 도시에서는 그 시간도 아까운 것이다. 버스안내표지판을 보다가 낙서를 발견하였다. 한문으로 된 시가 있고 바로 그 옆에 한글로 써 있다. 누군가 기다리기 지루하여 써 놓은 듯하다.이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生年不滿百 (생년불만백)   

常懷千歲憂 (상회천세우) 

人生如朝露 (인생여조로) 

人生無常   (인생무상) 

 

“백년도 못살면서

천년의 근심으로 사는구나.

인생은 아침이슬과 같아서 매우 짧다.

인생의 덧없음.”

 

써 놓은 것을 보니 네 구절 중에 첫 번째와 두 번째 구절에 대하여 ‘김삿갓’이라 쓰여 있다. 아마도 김삿갓이 지었거나 인용한 것이라 보인다. 검색해 보니 세 번째와 네 번째 구절은 첫 번째와 두 번째 구절과 전혀 관련이 없는 내용이다. 서로 다른 두 개의 이야기를 하나로 합쳐서 써 놓은 듯하다.    

 

더 검색해 보니 ‘생년불만백 상회천세우’ 구절은 <고문진보>에 나오는 것이라 한다. “사는 햇수 백 년도 채 못 되거늘 천 년의 시름을 항상 품고 있네”라는 내용이다. 이 시에 대한 해석을 보니 “인생은 덧없는 것이므로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좋은 때를 놓치지 말고 후회 없이 즐기라는 것이 이 시의 내용이다.(출처 : 황견 엮음/ 이장우, 우재호, 장세후 옮김, 고시)”라 되어 있다. 

 

‘소욕지족 소병소뇌’에서 ‘소병소뇌’에 대한 뜻이 ‘백년도 못살면서 천년의 근심으로 사는 자’에 대한 반대의 뜻이라 본다. 그런데 버스정류장에 낙서 되어 있는 것을 보면 근심 없이 살자는 것과 인생의 덧없음을 매칭시켜 놓았는데, 고문의 해석을 보면 불교적 가르침과 정반대로 “즐길 수 있을 때 최대한 즐기자!”라는 뜻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불교에서 말하는 소욕지족의 삶과는 다른 것이다.


빠띠뿌지까와 관련된 이야기

 

사람들은 백년도 못살면서 천년 만년 사는 것처럼 착각한다. 이에 대한 법구경 인연담이 있다. 법구경 48번 게송과 관련하여 인연담이다. 전재성님이 ‘법구의석’을 번역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이 시가 설해진 데는 이와 같은 인연담이 있다: DhpA.I.363-366에 따르면, 부처님께서 싸밧티 시에 계실 때, 빠띠뿌지까와 관련된 이야기(Patipujikavatthu)이다.

 

한때 서른 셋 신들의 하늘나라에 말라바린(Malabhalin)이라는 하늘아들이 천명의 선녀들에게 둘러싸여 정원에 들어갔다. 오백 명의 선녀들이 꽃을 따서 던지면 오백 명의 선녀들이 꽃을 주어 하늘아들을 치장했다. 

 

그런데 한 선녀가 나뭇가지에서 떨어져 몸이 등불처럼 꺼져서, 싸밧티 시의 한 고귀한 가문에 태어났다. 그리고는 그녀는 태어나면서부터 전생을 기억했고. ‘하늘아들 말라바린의 아내이다.’라고 회상하며, 자라서는 꽃공양과 향공양을 하면서 전 남편의 곁에 다시 태어나기를 기원했다. 그래서 그녀의 남편을 공경하는 자라는 의미에서 빠띠뿌지까(Patipujika)라고 지었다.

 

그녀는 열여섯에 다른 가문에 시집을 갔다. 그리고 그녀는 수행승들에게 식권으로 먹는 음식과 보름의 음식과 우기의 음식을 공양하며 천상의 남편과 만나길 발원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열 달 후에 한 아들을 낳았고 그 아들이 걸을 만하자 두 번째 아들을 낳았고 그 아들이 걸을 만하자 또 다른 아들을 낳고 해서 어느덧 네 아들을 낳았다. 

 

어느 날 그녀는 공양을 올리고 공덕을 수행승들에게 회향하고 가르침을 듣고 계행을 지키고는 그날 저녁에 갑자기 질병으로 죽어서 다시 천상계에 화생했다. 천상계에서는 여전히 선녀들이 말라바린에게 꽃을 장식하고 있었다. 하늘아들 말라바린이 ‘오늘 아침부터 당신이 안보이던데, 어디 갔다 왔소?’라고 물었다. ‘여보, 저는 죽었습니다.’

 

‘무슨 소리요?’ 

‘주인님, 사실입니다.’  

‘어디서 태어났소?’

‘싸밧티 시의 한 가문에 태어났습니다.’ 

‘얼마나 그곳에서 오랫동안 지냈습니까?’ 

‘주인님, 열 달 만에 저는 어머니의 태에서 나와 열여섯 살에 다른 가문에 시집가서 네 아들을 낳아 기르며, 수행승들에게 공양을 올리고 시중을 들며 다시 돌아오기를 서원하여 당신 곁에 온 것입니다.’  

‘인간의 수명은 얼마나 됩니까?’

‘주인님, 백년입니다.’ 

‘그렇게 짧습니까?’ 

‘주인님, 그렇습니다.’ 

‘인간들이 그렇게 짧은 시간 태어나서 산다면, 시간을 빈둥거리며 방일하게 보냅니까?’ 

‘주인님,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인간들은 늙음과 죽음이 없이 무수한 세월을 사는 것처럼 방일합니다.’

 

그러자 말라바린은 크게 동요하며, ‘당신이 말한 대로 인간들이 태어나 겨우 백년을 사는데(인간의 백년은 서른 셋 신들의 하늘나라의 하루 밤낮에 해당한다. 신들의 수명은 천상 년으로 천년이고, 인간 년으로 환산하면, 3천6백만 년에 해당한다) 빈둥거리며 방일하게 보낸다면, 언제 그들이 괴로움에서 벗어나겠습니까?’ 

 

한편 지상에서 다음날 수행승들은 이 사실을 부처님께 알렸다. 부처님께서는 천상계의 일을 수행승들에게 설명하고 

 

‘이 세상의 모든 뭇 삶의 목숨은 짧다. 

그 감각적 쾌락의 욕망이 

채워지기도 전에 죽는다.’ 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어서 시로써 

 

‘오로지 꽃들을 따는데, 

사람의 마음이 빼앗기면, 

욕망이 채워지기 전에 

악마가 그를 지배한다.’(Dhp48) 라고 가르쳤다. 

 

이 가르침이 끝나자 많은 사람들이 흐름에 든 경지 등을 성취했다.  

(법구경 48번 게송 인연담, 빠띠뿌지까와 관련된 이야기(Patipujikavatthu))

 

인연담에 따르면 삼십삼천의 천녀는 순간의 실수로 인간계에 태어났다. 이에 대하여 “등불처럼 꺼져서”라 하였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을 말한다. 그것도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계에 태어났는데 이후 삶의 과정을 보면 보통사람들의 삶의 방식과 별로 다르지 않다. 여자로 태어나 나이가 차 시집을 가고, 시집에 가서 애를 낳는 과정을 말한다. 그런데 인간계에서 죽어서 다시 천상계에 태어났다. 이는 수행승들에게 공양을 하는 등 공덕을 쌓았기 때문이다. 계를 지키고 보시하면 천상에 태어난다는 ‘시계생천(施戒生天)’의 가르침이 딱 들어맞는다. 

 

다시 천상에 태어났을 때 갑자기 출현 한 것처럼 보인다. 화생한 것이다. 그것도 죽었을 당시 모습이다. 이런 구성에 대하여 누군가는 ‘허구’라 할 것이다. 그러나 ‘픽션’이냐 ‘논픽션’이냐를 따지는 것은 인연담이 전하고자 하는 가르침에서 어긋난다. 그저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일 뿐이다.

  

인연담에 따르면 천상의 하루가 인간의 일생에 해당된다. 그래서 “오늘 아침부터 당신이 안보이던데, 어디 갔다 왔소?”라고 물어 본 것이다. 오전에 자리를 비운 것에 대하여 물어 본 것이다. 

 

오전에 선녀는 인간계에서 일생을 보낸 것이다. 도중에 죽었기 때문에 아침나절 잠깐 자리를 비운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인간의 백년은 서른 셋 신들의 하늘나라의 하루 밤낮에 해당한다.”라고 보충설명을 해 놓았다. 그리고 “신들의 수명은 천상 년으로 천년이고, 인간 년으로 환산하면, 3천6백만 년에 해당한다.”라고 하였다.

 

기대수명이 백세에 육박한다고 하여도


백년도 못사는 것이 인간이다. 기대수명이 늘어 백세에 육박한다고 하여도 백년 안팎의 삶이다. 그런데 인간의 수명은 정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인간은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숫따니빠따에서도 “세상에서 결국 죽어야만 하는 사람의 목숨은 정해져 있지 않아 알 수 없고 애처롭고 짧아 고통으로 엉켜 있습니다.(stn574)”라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인간의 수명은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천상에서는 수명이 보장 되어 있다. 그래서 31개의 세상도표를 보면 욕계천상 이상의 세계는 수명이 정해져 있다. 그러나 인간을 포함하여 인간 이하는 수명이 정해져 있지 않다. 

 

수명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은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왜 인간의 수명은 정해져 있지 않고 언제 죽을지 알 수 없을까? 이에 대하여 어느 법사는 ‘업대로’ 살기 때문이라 하였다. 이전에 지은 행위가 있기 때문에 그 행위에 대한 과보가 언제 익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라 하였다. 

 

신통제일 목갈라나도 이전에 지은 업으로 인하여 제명대로 살지 못하였다. 연쇄살인자 앙굴리말라가 나중에 아라한이 되었지만 이전에 지은 업이 익었을 때 결국 돌에 맞아 죽고 말았다. 이렇게 인간을 포함하여 인간 이하의 축생 등의 세계에서는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인간의 기대수명이 백세가 된다고 하여도 백 살까지 살도록 어느 누구도 보장해 주지 않음을 말한다. 

 

윤회의 두려움을 안다면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것이 인간이라면 오늘 잠들면 내일이 올지 아니면 내생이 시작될지 알 수 없다. 당장 한 두 시간 후도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삶이다. 이렇게 본다면 게으름을 피울 여유가 없다. 그래서 인연담에서는 “빈둥거리며 방일하게 보낸다면, 언제 그들이 괴로움에서 벗어나겠습니까?”라 한 것이다.

 

인연담에서는 천신의 입을 빌어 불방일을 강조 하고 있다. 또 이어지는 부처님의 말씀을 통하여 “이 세상의 모든 뭇 삶의 목숨은 짧다. 그 감각적 쾌락의 욕망이 채워지기도 전에 죽는다.”라 하였다. 짧은 목숨이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감각적 쾌락에 정신이 빠져 있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이어서 “오로지 꽃들을 따는데, 사람의 마음이 빼앗기면, 욕망이 채워지기 전에 악마가 그를 지배한다.”라 하였다. 짧은 인생을 살면서 해야 할 것을 하지 않고 엉뚱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하였을 경우 종국에는 ‘끝장내는 자(죽음의 신)’에게 끌려가는 것이라 하였다. 이는 세세생생 윤회하는 것을 말한다. 

 

윤회의 두려움을 안다면 윤회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정진하는 방법 밖에 없다. 그러나 사성제의 진리를 깨달아 괴로움과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인간 백세는 너무 짧다는 것이다. 더구나 수명이 보장 되어 있지 않아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면 게으름을 피우거나 꽃을 따는 데만 마음이 팔려 있다면 ‘End-Maker(끝장 내는 자, 죽음의 신)’에게 붙들려 갈 뿐이라는 가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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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연꽃의 글에 대해서 닉넴이 초기불교라는 분이 댓글을 달았는데 옮겨왔습니다.

    

초기불자 2015-03-16 13:05:38 답변  삭제  

〈사분율〉 권40.〈십송율〉 권27 등에 의하면 “외도와 구별하고, 도적들로부터 해를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 전답(田畓)모양을 본 떠 조각 옷을 만들도록 아난에게 명” 했다.〈십송율〉 권28에 따르면 “보시 받을 때 비구가 10인 있으면 십분(十分)하고, 100인 있으면 백분(百分)하도록” 돼 있다. 때문에 분소의나 보시의(布施衣)를 막론하고 옷감이 승단에 들어오면 자연스레 스님 수만큼 나눌 수밖에 없다. 자신에게 배당된 여러 조각들을 맞추지 않으면 법복을 짓기 힘들고, 이렇게 만든 가사는 당연히 ‘조각 옷’이 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 법의(法衣)는 맨 위에 입는 ‘승가리’, 그 다음에 입는 ‘울다라승’, 다시 그 안에 받쳐 입는 ‘안타회’로 구분됐다 

불교에서는 재가자에게 정당한 노력 나눔 베풂을 강조하지 소욕지족이라는 말이 없다. 

출가승은 무소유다. 

출가승은 청정범행이지 소욕지족이 아니다. 

출가승은 모든 욕망 분별 집착을 놓고 열반으로 향하며 중생들에게 설법한다. 

재가자는 자리이타의 원력으로 행한다. 

연기된 세계에는 부자도 있고 가난한 자도 있다. 

거지도 많이 가진 자 적게 가진 자가 있다. 

거지 끼리도 나눌 것이 있는 것이다.



초기불교님의 댓글에 덧붙여 저는 다음과 같이 댓글을 달고 또한 감상문을 적어 보고자 합니다.


1) [다시 천상에 태어났을 때 갑자기 출현 한 것처럼 보인다. 화생한 것이다. 그것도 죽었을 당시 모습이다. 이런 구성에 대하여 누군가는 ‘허구’라 할 것이다. 그러나 ‘픽션’이냐 ‘논픽션’이냐를 따지는 것은 인연담이 전하고자 하는 가르침에서 어긋난다. 그저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일 뿐이다.]...과거 연꽃님은 경전의 글자는 한자도 틀리지 않았으니 천상 이야기나 초월적인 이야기라도 그것이 사실이고 100% 그대로 받아 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더니만 글이 많이 바뀌었군요. 아직은 미흡하지만 그런대로 긍정적인 변화입니다. 


2) 연꽃님의 글이 왜 횡성수설이라고 비판을 받느냐하는 것이 이번 글에도 명명백백하게 드러나는군요. 처음에는 인생무상의 한시를 가져오더니만 곧이어 소욕지족에다가 마침내는 법구경의 가르침을 가져 왔습니다. 


언뜻보면 그럴듯해 보이지만 어느것 하나 연결되는 것이 없는 주제들입니다. 법구경의 가르침은 말 그대로 "인생은 짧으니 게으름 피우지 말고 열심히 정진하라"는 것입니다. 인생무상이니 소요지족을 말하는 것이 아니지요. 땜방질로 같다 붙이면 붓다의 가르침에 침을 뱉는 행위에 지나지 않습니다. 


3) 붓다께서 재가자들에 훈계하신 내용들을 보면 "열심히 일해서 돈 많이 벌어라. 그리고 그것을 여법하게 잘 사용해라" 입니다. 흔히 말해서 진정한 보시의 마음을 가지더라도 줄 것이 변변치 않으면 보시도 형편없습니다. 현실적으로 돈이 많으면 많이하게 됩니다. 흔히 말하는 보시는 마음이 중요한 것이지 물질이 중요한게 아니다라는 말은 말 그대로 보시의 정신을 강조한 것입니다. 내 쌀독에 쌀이 없는데 남에게 쌀 나누어 줄 여유가 없게 됩니다. 마음만으로 보시한다고 굶는 사람의 배가 채워지는 것도 아닙니다. 이런말하면 뭐라고 보시운운하면서 어떻게 저를 비난할지 뻔한 내용이라서 대충 줄입니다.


행복경에 보면 "자신의 처지에 알맞는 집에서 살고, 처자식을 돌보는 것이 최상의 행복"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과욕 탐욕을 가지지 말라는 것이지 소요지족을 이야기한 것이 아닙니다. 붓다께서는 불자들보고 가난하게 살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식이라면 불자들은 장사도 회사도 다니지 말고 그냥 가난뱅이로 살아도 된다는 의미로까지 확대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4) "스승님들의 가르침" 방에 보면 라훌라스님의 글이 있습니다. 맨마지막에 장에 보면 "불교와 오늘의 세계"라는 글이 있는데 붓다께서 재가자들에게 경제적 물질적인 부분에서 어떤 가르침을 주셨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한번 읽어 보셨으면 합니다.


다시한번 연꽃님에게 말씀 드리지만 글 쓰실때 잘 가려서 쓰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