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야단법석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연꽃의 글을 비판함

실론섬 2015. 3. 5. 19:40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신분이 확실하지 않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이로 표시됩니다. 방송자막에 나이를 집어넣는 것은 그 사람의 현재위치에 해당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나이가 적으면 적은 만큼 경험이나 지혜가 적을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또 한편 나이가 많으면 경험이나 지식, 지혜가 매우 풍부할 것이라는 것을 암시 합니다. 나이가 그 사람을 평가 하는 일종의 잣대가 됩니다. 그렇다면 나이가 많다고 하여 반드시 경험이나 지식, 지혜가 풍부하다고 볼 수 있을까요? 법구경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습니다. 

 

머리가 희다고 해서

그가 장로는 아니다.

단지 나이가 들었으나

헛되이 늙은이라 불리운다.(Dhp260) 

 

일반적으로 나이가 들면 지혜로워진다고 합니다. 그것은 삶의 과정에서 여러 가지 일을 하였고 그에 따라 다양한 경험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젊은 사람들이 아직 겪어 보지 않은 일을 먼저 겪었기 때문에 나이가 든 이들은 어떻게 보면 ‘인생선배’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젊은이들이 하는 일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 간섭하는지 모릅니다.

 

나이가 들어 노인이 되면 일반적으로 지혜로워 집니다. 살아오면서 산전수전 다 겪었기 때문에 ‘그렇게 살면 안 된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무모한 젊은이들에게 “허황된 꿈을 꾸지 말라”고 충고해주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노인은 어느 면으로 보았을 때 ‘지혜의 상징’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어느 노인은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머리는 허옇게 세어서 겉보기에는 지혜로운 노인처럼 보이지만 하는 행위를 보면 어느 시점에 머물러 있는 것 같은 모습을 볼 때입니다. 그런 경우 흔히 하는 말이 아마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는 말 일 것입니다.

 

법구경 게송에서 “머리가 희다고 해서 그가 장로는 아니다.”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단지 나이가 들었으나 헛되이 늙은이라 불린다.”라 하였습니다. 이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주석에 따르면 “그에게 진정한 의미에서 장로가 될 수 있는 성품이 결여 되어 있기 때문에 헛된 늙은이라고 불린다.(DhpA.III.388)”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성품’이 키워드 입니다. 성품이란 무엇일까요? 다음과 같은 법구경인연담이 잘 말해 줍니다.

 

부처님께서는 그들이 거룩한 경지에 가까이 있다는 것을 보고 “한 장로가 이곳에서 나가는 것을 보았는가?”라고 물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대들은 보지 못했다고?”  

“세존이시여. 한 사미를 보았습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는 사미가 아니라 장로이다.” 

“세존이시여, 지나치게 작았습니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나이가 들었다고 장로라 부르지 않고 장로의 자리에 앉았다고 장로라 부르지 않는다. 진리를 꿰뚫고 많은 사람에 대하여 불살생을 확립하면, 그를 장로라 한다.” (법구경 Dhp260  인연담) 

 

인연담을 보면 파격적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나이가 든 사람을 장로로 여기지만 부처님은 성자의 흐름에 든 자를 장로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나이가 20세도 되지 않은 사미가 성자에 흐름에 들었다면 장로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나이는 단지 숫자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합니다. TV자막에 나이를 표시하지만 70세나 80세가 되었다고 해서 모두 어른은 아닐 것입니다. 어른 같은 행위를 해야 어른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행승들이여, 비록 나이가 들어 여든 살이나 아흔 살이나 백세가 되었더라도 때 맞춰 말하지 못하고, 진실을 말하지 못하고, 의미 있는 말을 하지 못하고, 가르침에 맞는 말을 하지 못하고, 계율에 맞는 말을 하지 못하고, 기억에 남는 말을 하지 못하고, 알맞은 말을 하지 못하고, 이유가 분명한 말을 하지 못하고, 한계가 있는 말을 하지 않고, 내용이 있는 말을 하지 못한다면, 그를 두고 ‘어리석은 장로’라고 한다.”(A4.22) 

 

그러나 나이가 이십대나 삼십대에 불과할지라도 하는 행위가 어른스러우면 ‘어른’ 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행승들이여, 비록 젊고 머리카락이 아주 검고 행복한 청춘을 부여 받은 인생의 초년생일지라도 때 맞춰 말하고, 진실을 말하고, 의미 있는 말을 하고, 가르침에 맞는 말을 하고, 계율에 맞는 말을 하고, 기억에 남는 말을 하고, 알맞은 말을 하고, 이유가 분명한 말을 하고, 한계가 있는 말을 하고, 내용이 있는 말을 한다면, 그를 두고 ‘슬기로운 장로’라고 한다.” (A4.22) 

 

초기경전에 따르면 나이만 많다고 장로는 아닙니다. 성품에 따라 달라 질 수 있음을 말합니다. 성자의 흐름에 든다면 나이와 관계없이 누구나 존경받고 공양 받을 수 있는 장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법구경에서는 이런 게송도 있습니다. 

 

규범이 없고 거짓말을 하면

삭발했다고 수행자가 아니다.

욕망과 탐욕을 지닌다면

어찌 그가 수행자가 되랴? (Dhp264)

 

이 게송을 보면 한국불교의 현실에 대하여 많은 것을 시사해 줍니다. 요즘 권승들이 이곳저곳에서 활개를 치고 있는데, 공통적으로 욕망과 탐욕에 가득한 자들이라 봅니다. 그들은 입장료 수입이 있는 목 좋은 사찰을 확보하여, 축적된 부를 바탕으로 매관매직을 일삼으며 이 땅의 불교를 대표하는 자리에 올라가 있습니다. 또한 그들은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등 오계를 어기는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수행자가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도 “삭발했다고 수행자가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머리가 희다고 하여 모두 지혜로운 노인 또는 장로라 볼 수 없습니다. 삭발했다고 하여 모두 수행자로 볼 수 없습니다. 행위에 따라 성품에 따라 장로나 수행자가 됩니다. 이렇게 본다면 나이는 숫자에 불과 하고, 수행에 승속의 구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누구나 지혜로운 행위를 하면 장로이고, 누구나 수행을 하면 수행자가 됩니다. 

 

나이가 어린 인생의 초년생이라도 지혜롭게 행위를 하면 ‘지혜로운 노인’과 같습니다. 이럴 경우 나이는 숫자에 불과합니다. 나이가 들어 노년이 되었어도 지혜가 없다면 단지 ‘헛되이 나이만 먹은 늙은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럴 경우 나이는 숫자에 불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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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글은 미디어 붓다에 올려놓은 연꽃님의 글이다. 늘상 느끼는 점이지만 앞뒤 글이 맞지 않고 무엇을 주장하고자 하는지 촛점이 흐려있다. 불필요한 부분을 삭제하였다. 그의 글이 왜 잘못 되었는지를 지적해 보고자 한다.


테-라와-다(Theravda)의 테-라(thera)는 「장로(長老), 상좌(上座)」, 와-다(vda)는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으로, 테-라와-다를 직역하면 「장로들의 가르침」이라는 의미가 된다. 장로는 승가(sangha)에서 비구들(bhikkhu)을 지도하는 입장에 있는 분들이다. 상좌는 비구들 중에서 윗자리에 앉아지는 분들을 말한다. 


상가(승가)에 있어서의 「평등」이란 세계 모든 나라. 지역에서 존재하고 있는 사람들의 출신성분이나 혈통에 의거하는 신분 차별 등을 모두 배제한다는 의미이다. 그 사람이 출가 이전에 고귀하고 신분이 높은 지위에 있었다고 해도, 또는 사회로부터 천한 존재라고 차별되었다고 해도, 신체적·정신적으로 건전하고, 부모님의 허가를 얻는 것 등의 조건을 채운 출가희망자는 누구든지 상가의 구성원인 비구가 될 수 있다. 상가에서는 세속 사회에서의 신분적 높고 낮음과 나이 등이 중요하지 않아서, 누구라도 대등한 존재로서 인정받는다. 


이와 같이 상가는 신분으로서의 상하는 없지만, 단지 수계하고 나서의 연수에 의하여 반떼(먼저 출가한 자)와 아우소(뒤에 출가한 자)로 구별되게 된다. 이 수계하고 나서의 연수를 법납이라고 해서, 이 연수가 높은 사람으로부터 순서대로 윗자리가 정해지며, 그 법납이 많은 사람(10년 이상 혹은 20년 이상의 2가지 설이 있음)은 장로(Thera)로 불리우게 된다. 그러나 수계하고 나서의 연수가 상가 구성원 중에서 가장 많은 최상의 장로 비구하고 해도, 개인적인 의견으로 상가에 지시하거나, 독단으로 상가를 움직이는 것 등은 할 수 없다. 다만 지식과 게으르지 않고 실천하는 힘을 갖춘 선배(dhira)로서, 또는 지식을 갖춘 자(Pandita)로서 조언을 하는 정도이다. 상가는 회사의 사장과 같이 그 운영을 혼자서 할 수 있는 지도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굳이 말하라면, 「율」이 상가의 지도자라고 말할 수 있다.


대반열반경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아난다여, 비구들은 지금까지 서로 도반(AVUSO.그대여)'이라는 말로 부르고 있다. 그러나 내가 입멸한 후에는 그대들은 이렇게 불러서는 안된다. 아난다여, 장로비구는 신참비구를 부를 때는 이름이나 성 또는 도반이라는 말로 불러야 한다. 신참 비구는 장로 비구를 부를 때는 존자(BHANTE)라거나 장로(AYASMA.대덕)라고 불러야 한다.]


법구경 260은 장로(테라)라는 단어에 대해서 붓다가 사전적 정의를 내리신게 아니다. 그 깊은 내용은 수행승들에게 훈계.충고를 하신것이다.  당시 붓다를 찾아온 30명의 비구들은 모두다 아라핫따 팔라의 단계에 와 있었던 대덕들이었다. 그래서 붓다는 비구들에게 훈계를 하시면서 "...여래는 다만 사성제의 진리를 깨달아 바르게 이해하여 사람을 해치지 않는 사람을 테라라 부르니라." 라고 하셨다. 즉 장로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 경우 붓다의 설법 대상이 누구인가가 경전을 이해하는 중요한 핵심이다. 법구경 260에 나오는 장면은 일반 재가자들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직 깨달음의 흐름에 들어선 일반 수행승들도 아니다. 수행자중에서도 그것도 아라핫따 팔라의 단계에 도달한 수승한 분들에게 설법을 하신 것이다. 장로라면 수행의 단계가 어디에 도달해 있건 출가한지 10년 이상이고 나이드신 분들이다. 그러한 장로층의 수행자들에게 게으리지 말고 장로답게 즉 출가한지 오래되고 나이도 먹은만큼 아랫사람 보기에 부끄럽지 않게 어서빨리 득도하라는 따끔한 훈계조의 말씀인 것이다.


나이 많은 사람에 대한 존경과 대우는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다름없다. 불교는 특히 연장자를 우대하고 존경하는 종교이다. 따라서 연장자들은 자신의 처신과 배움을 더욱더 깊이하여 신참 비구들의 교훈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는 건방진 사고방식을 가지라고 붓다께서 하신 말씀이 아니라는 것이다. 불교에서 좀 깨달았다고 무지한 늙은이를 깔보는 짓은 악행일 뿐이다. 승가란 "화합"이 최고의 덕목이다. 상대방을 상호 존중하고 인정하지 못한다면 화합이 될 수 없다. 따라서 붓다께서는 "나이는 단지 숫자에 불과하다"라고 서로 깔보고 업신여기라고 하신 적이 없다. 장로들에 대한 훈계의 말씀을 이런식으로 해석하면 안된다. 


손가락이 가르키면 가르키는 목적지를 봐야지 손가락만 본다면 이게 무지의 소치이다. 제가 연꽃님의 글에서 우려를 하는 부분은 만약에 연꽃님의 글대로라만 "불교는 깨치면 아래위도 없다." 라는 식으로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이가 젊어서 깨쳐도 장로에게는 깎듯이 장로급 대우를 해주는 것이 불교의 승가이다. 그러기에 이 설법의 대상은 재가자도 아니고 신참 비구도 아닌 것이다. 이 부분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따라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는 말은 붓다의 설법을 지나치게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멋대로 생각한 것에 불과하다. 자기 스스로 앙굿따라 니까야의 경전문구를 옮겨왔듯이 재가자가 옮겨와야 할 문구나 옮겨오지 말아야 할 문구도 모르고 재가자가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분간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 경전문구를 자랑스럽게 옮겨왔으면서도 스스로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실로 안타까울 뿐이다.


더우기 미디어 붓다가 이게 무슨 대단한 것인냥 대문짝에다 걸어 놓았기에 더더욱 황당하다. 미디어 붓다에 과연 초기불교를 아시는 분들이 얼마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식으로 엉터리 초기불교를 입에 담는 연꽃님의 글을 면밀히 분석하고 검토하지도 않은채 계속하여 게재한다면 스스로 품격을 떨어트리는 꼴이 될것이다. 미디어 붓다도 좀더 활기찬 불교언론이 될려고 한다면 과연 이런 글들이 옳은지 그른지 깊이있게 생각하고 또한 버젓이 대문에 걸어 자랑할 것인지 되돌아 보시길 진심으로 바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