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알리어 경전의 권위와 전통성
남방불교권을 흔히들 테라와다 불교(상좌부)라고 합니다. 따라서 좁고 엄격하게 말하자면 상좌부 불교는 18-20여개 부파불교중의 일개 종파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 권위와 전통성을 부정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붓다의 육성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빠알리어 경전을 전승하고 보유하고 있는 2500년 불교의 종갓집입니다.
이는 경전결집의 역사와 경전의 전승과정을 보면 확연히 알 수 있습니다. 경전의 결집과 전승내용은 여러번 글로 올려 놓았지만 다시한번 말씀드리자면 지금 우리가 붓다의 육성이 담겨 있는 경전이라고 애지중지 소지하고 공부하는 빠알리 경전의 내용은 아쇼카 대왕 시절에 있었던 3차경전 결집의 산물입니다. 인도 대륙에서 있었던 3차경전 결집은 당시 20여개 부파중에서 그나마 붓다의 전통을 잘 보존하고 있다고 공인된 상좌부가 전승및 보유하고 있던 경전(율장및 경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결집의 내용이 고스란히 당시 실론이라는 이 섬나라로 전승되었던 것입니다.
경전이 실론섬으로 전승된 이후에 불교는 크게 두 갈래로 나뉘어 집니다. 즉 인도 대륙과 그리고 실론섬으로 전승된 불교는 다시 태국 미얀마 라오스등 남방권으로 불교가 전파된 것입니다. 많은 불자분들이 태국이나 미얀마등의 불교가 인도에서 전승된 것으로 오해를 하시지만 실론섬에서 전파가 된 것이지 인도대륙하고는 전혀 상관없습니다. 즉 도표를 그려 보자면
(1) 3차 경전 결집 - 인도대륙 - 대승불교운동 - 쿠산 왕조때 카시미르 지방이 인도에 편입되면서 비로소 카시미르를 통하여 중앙 아시아로 전파 - 중국 - 한국및 일본으로 전파
(2) 3차 경전 결집 - 실론섬으로 전파 - 태국및 미얀마 등지로 전파
다시말해서 인도대륙에서 불교는 3차경전 결집 이후에도 계속하여 흥망성쇄를 거듭합니다. 부파불교들끼리 날밤을 세워가며 논쟁을 벌이고 빠알리 경전은 산스크리트어로 문자화도 되고 또한 대승불교 도 탄생합니다. 대승불교는 자신들의 불교정신을 새로이 주장하기 위하여 많은 대승경전을 산스크리트어로 찬술합니다. 중국으로 전승된 초기경전은 아함경으로 번역이 되고 그외 대승불교의 경전도 모두다 한문으로 번역이 됩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불교가 인도 대륙에서 멸망을 함으로써 지금은 아함경이든 대승경전이든 산스크리트어로 편찬된 원전은 인도 대륙뿐만 아니라 그 어디에서도 찾아보기가 힘들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실론섬으로 전파된 불교는 인도대륙의 불교의 흥망성쇄와 상관없이 홀로 3차경전 결집의 내용을 고스란히 보존되어 싱할라 문자를 이용하여 음사를 하여 문자화가 되고 오늘에 이르게 됩니다. 따라서 그 전통성이나 권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경전의 전승은 승가가 한 것이다
그런데 이 경전을 전승한 집단이 재가자나 제3의 집단이 아니라 승가입니다. 당연히 그럴수 밖에는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이 승가라는 집단만이 경전을 전승하고 보존했기 때문에 경전의 내용은 승가위주로 편찬이 될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붓다의 45년 일생을 되돌아 보면 수행승들 못지않게 재가자들을 위한 설법도 많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경전의 내용은 불행히도 99%가 수행승들에게 설법하는 내용이고 수행승들 위주로 되어 있습니다. 지겹도록 반복되고 같은 내용을 여기저기에 삽입하여 되풀이 하면서도 그 내용은 수행승들의 것이지 결코 재가자들을 위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간의 중생들 99%는 출가를 못합니다. 그렇다고 불교가 재가자를 인정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불교는 엄연히 사부대중이 구성원이라고 못밖아 두고 있습니다. 재가자들 중에서 아라한이 된 분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왜 경전은 수행승 위주로만 되어 있는 것일까라고 상식적인 의문을 가지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또한 재가자들을 위한 가르침이 정말로 그것밖에 없을까 또는 수행승들을 위한 수행법이나 계율들만 이야기 했을까. 절대로 아닙니다. 오늘날의 경전은 그것을 전승한 집단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냉정하게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당연히 승가에 불리하거나 불필요한 내용들은 일부나마 걸려지고 편집이 되었을 것입니다.
불교는 세간사에서 출발을 한 종교이고 세간사의 중생들을 위한 가르침입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중생들을 위한 것도 아니고 죽은 사람들을 위한 것도 아닌 오직 현재를 살아가는 즉 그것이 수행승이든 재가자이든 모든 중생들을 위한 현실적인 가르침입니다.
따라서 재가자들을 재가자들에게 맞는 가르침을 간추려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출가도 안하고 수행승도 아니면서 수행승들을 위한 가르침을 따르고 배우는 것은 맞지 않은 옷을 입는 것입니다. 250여개의 계율을 재가자들이 지키고자 한다면 모두다 출가해야 합니다. 상윳따 니까야에 보면 "꼬살라 사람들의 이야기"에 나오듯이 그것이 바로 재가자들이 빠알리어 경전에서 뽑아내 배우고 익혀야 하는 것들입니다. 그이외에 보시 공덕 믿음등을 뒤따라 배우면 됩니다. 하지만 어줍쨚게 재가자 주제에 수행승 흉내를 내거나 수행승을 위한 가르침을 내세워 자기 주장을 하거나 설법하고자 한다면 이는 가당챦을 뿐더러 어불성설이라는 것입니다.
경전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기독교 같은 경우에는 성서가 구약과 신약이 있습니다. 요즈음은 구약성서는 거의 배제되는 분위기입니다. 그렇다고 구약성서가 그 존재나 가치를 잃어버린 것도 아닙니다. 올바르게 활용하면 되는 것입니다.
불교 경전도 마찬가지입니다. 초월적인 이야기나 천상의 이야기는 그것은 그대로 놔두면 됩니다. 믿으냐 된다느니 거짓말이다 옳다라고 왁자찌껄할 이유가 없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초월적인 이야기보다는 그 속에 담겨져 있는 가르침을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경전에 그렇게 씌여져 있으니 무조건 초월적인 이야기를 믿어야 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자의 표본입니다. 수박겉이 푸르다고 속도 푸르다고 주장하는 바보일 뿐입니다.
500명의 비구가 움직였다느니 500의 소와 500의 양을 도살했다느니 500의 코끼리 위에 500명의 여자를 태워 붓다를 친견하러 갔다느니 이런 것을 도대체 믿고 안믿고 논쟁할 이유가 있는지요. 맞다가 우긴다면 이를 어찌 생각해야 할까요. 하지만 많은 숫자의 비구들이 움직이고 많은 숫자의 소와 양들을 도살했구나라고 이해한다면 이게 틀린 것일까요.
정석보다는 정석의 활용을
경전의 가르침이 세속에서 어떻게 펼쳐지고 있나를 볼려면 2000년을 불교국가로 살고 있는 남방권을 가보면 알게 됩니다. 그들의 승가를 보고 그들의 재가자들의 생활을 보면 붓다의 가르침이 어떻게 세속에서 잘 펼쳐지고 향기를 내고 있는지 알게 됩니다.
한국에서 경전 펼쳐들고 천년을 머리속으로 생각해봤자 관념불교 밖에 못합니다. 머리로만 불교하면 그건 엉터리 외도로 빠지게 됩니다. 지혜없이 믿으면 맹신으로 흐릅니다. 수행승들에게는 불교가 해탈과 열반의 종교일지 모르겠지만 그분들에게조차도 자비와 보시에 의한 인과법을 간과한다면 깨침은 오지 않을 것입니다. 재가자들에게는 불교는 행복을 추구하고 배우는 종교입니다. 물론 불교에서 말하는 행복은 세속적 탐욕의 충족에서 오는 만족감을 말하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고 수백번은 더 강조를 했습니다. 세속을 살면서 오계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재가자 주제에 해탈이니 열반이니 그것이 불교다 라고 한다면 이는 실로 불교를 망치고 훼손시키는 훼불론자에 불과하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불교는 한순간에 깨치는 진리가 아닙니다. 매표소에서 구름타고 정상에 올라가는게 아니라 한발자욱 한발자욱 걸어서 정상에 올라가는 것이 불교입니다. 오계를 지킬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자비심을 내고 '어둠에서 햇빛으로 나아가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면 그 공덕이 쌓이고 쌓여서 윤회속에서 어느 순간에 그림자가 몸을 따라오듯 해탈하고 열반을 획득할 것입니다.
한국에서의 초기불교
오랫동안 대승불교의 가르침과 선불교의 환경에서 살아온 분들에게는 초기불교가 언뜻 쉬워 보일지 모르지만 실상은 몇백배 더 어려운 것이 초기불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불교 역사상 초기불교가 한국에 들어간지가 이제 겨우 십여년을 넘어섰습니다. 그러다보니 실생활에서나 또는 체질적으로 초기불교화가 되어있지 않습니다. 승복이나 사찰이나 불교의례의식등의 겉모습이 다른 것은 둘째 치고라도 불교의 가르침 자체가 판이하게 다릅니다. 대승경전과 빠알리어 경전이 다르듯 교리도 180도 다릅니다.
그리고 요즈음의 초기불교는 사띠수행이나 위빠사나 수행등의 수행 위주로 전파가 되고 있습니다. 실질적인 생활불교의 가르침이 거의 없고 그리고 남방과 한국의 사회구조나 풍습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같은 가르침을 놓고도 우왕좌왕하게 됩니다. 또한 초기불교의 가르침이 우리들을 체질적으로 바꾸기 까지에는 아직도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럴수록 올바른 불자라면 책만 들고 초기불교한다고 외칠 것이 아니라 마음도 생활도 초기불교식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불교에 반발하고 한국불교에 반발하여 초기불교를 선택하다보니 많은 분들은 과거 부파불교의 날밤을 세워가면서 논쟁하는 것 이상으로 교리논쟁을 할려고 합니다. 그리고 청정도론등의 논장을 앞세워 가며 교리를 주장합니다. 각묵스님의 카페에 가서 깜짝 놀란 것이 초기불교 한다고 해놓고 온통 공부 그것도 교리공부만 하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오계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서 청정도론이니 빠알리어 경전이니 해탈이니 열반이니 날밤을 세워가면서 공부한다고 그게 초기불교 하는 것 아닙니다.
초기불교는 인과의 불교이다
초기불교는 관념불교 머리속의 불교가 아닙니다. 불교는 인과의 법칙 즉 업행위를 중시합니다. 우리들 이 일상생활을 하면서 행동하는 하나하나가 업을 잉태하며 그것에 의해서 윤회를 한다는 인과를 말하는 것이 불교입니다. 인과의 법칙을 제대로 알게 된다면 당장이라도 자신의 행동이 고쳐지게 됩니다. 언행을 조심하게 됩니다. 자비의 마음이 저절로 우러나옵니다. 그런 조그만 변화들이 모이고 모여서 우리들을 변화시키고 인생을 변화시키고 삶을 변화시킨다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입니다.
붓다께서는 외도와의 신통과 기적에 관해서 말씀을 하실 때 불교의 최고의 기적은 육신통의 나툼이 아니고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불교의 처음이자 끝입니다. 불교의 기적은 불교의 가르침을 따르면서 몸과 마음이 변화하여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것에 있습니다.
남방권 불자들은 수행승이나 전문 학자가 아니라면 교리를 거의 모릅니다. 배우지도 않습니다. 그런것은 별로 중요치 않습니다. 행하지 않는다면 남의 목장에서 남의 소나 세는 사람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질 않습니다. 자신에게 도움이 되질 않는 불교를 무엇 때문에 믿겠는지요. 도움이란 지식의 증장이 아니라 인과의 증장을 말하는 것입니다.
불교를 제대로 할려면 우선먼저 붓다의 생애부터 배워라
붓다의 생애를 알면 불자들은 99% 불교 완성한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실존하셨던 부처님과 대승경전의 부처님을 분별하여 제대로 설명할 줄 안다면 교리 99% 배운 것입니다. 불교의 교조는 부처님(붓다)입니다. 그분의 일생을 제대로 알기 보다는 책 속의 검은 글자에 함몰되어 버린다면 이는 실로 비극일 뿐입니다.
우리도 "붓다처럼(like) 살자"이지 우리도 "붓다가(same) 될 수 있다"가 아닙니다. 붓다는 천상천하 유아독존 오직 한분 그분 뿐입니다. 우리는 붓다의 마음을 배우고 그분의 자비심을 배워 그분이 앞서 걸어갔던 발자국에 의존하여 그분의 뒤를 따라갈 뿐입니다. 경전에서는 열반을 획득하면 모두다 붓다처럼 아라한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붓다와 아라한이 다른 점은 붓다는 맨먼처 깨친 분이고 그 뒤의 아라한들은 붓다의 깨침을 배우고 그대로 따라가서 아라한이 되었다는 점이 다르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붓다처럼 살 수 있다는 것이지 우리 스스로가 붓다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얼토당토 않은 시건방진 사고방식부터 내려 놓으면 불교가 제대로 보입니다. 그리고 다음생애에는 현재보다 훨씬 좋은 곳에 태어날 것이 분명합니다.
'자유로운 야단법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연꽃님의 글 “불행·가난한 사람을 보면 우리도 한때 ..." 를 비난함 (0) | 2015.03.08 |
---|---|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연꽃의 글을 비판함 (0) | 2015.03.05 |
호잔님의 블로그에서 글을 옮겨와서... (0) | 2015.02.25 |
몸과 마음은 상호의존적일까? ..라는 연꽃의 글을 비판함 (0) | 2015.02.24 |
전도선언이 열반론이라고 ??? (0) | 2014.12.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