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불교에서 참여불교로
아놀드 민델(Arnold Mindell)은 그의 저서 『명상과 심리치료의 만남(Working on Yourself Alone)』(학지사, 2002)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동양의 명상은 자기 존재의 본질을 똑바로 꿰뚫어 보는 내적인 자각을 강조하고 있으나 인간관계의 대립이나 커뮤니케이션의 문제는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 인간관계의 번거로운 문제를 피하게 되면 더 깊이 의식의 내면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장점도 있으나, 인간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감정을 억압하게 된다면 현실생활은 결코 원만하게 할 수 없다는 문제가 따른다. 또한 일시적으로 피해 버린 감정은 다시 다른 형식을 빌려 나타나게 됨으로 결과적으로는 대인적인 갈등을 더욱 악화시키게 된다.
이와 같이 명상은 처음부터 자신의 내적인 자각을 강조할 뿐, 인간관계의 대립이나 커뮤니케이션의 문제에는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 다시 말해서 자기의 수행에만 전념하는 사람들은 사회적 갈등이나 공동체의 문제에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자신의 내적 수행에만 전념하다보면, 자연적으로 타인의 행복이나 괴로움 혹은 사회적 문제에는 무관심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자리(自利)와 이타(利他)의 문제로 귀결된다.
대표적인 상좌불교 국가는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이다. 그 중에서도 위빳사나 수행이 가장 성행하고 있는 나라는 미얀마이다. 미얀마에서 위빳사나 수행이 널리 성행하게 되었던 것은 정치적인 배경 때문이었음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미얀마의 군사정권은 고위직 승려들을 통해 모든 불교도들이 위빳사나 수행에 전념하도록 적극적으로 권장했다. 그 결과 반정부 시위나 사회적 불평불만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군사정권이 국가를 통치하기에 최상이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국민들로 하여금 수행이라는 마약에 중독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실제로 위빳사나 수행을 실시해 보면 모든 괴로움의 원인은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순간순간 일어나는 번뇌를 알아차리는 훈련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괴로움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이른바 근본고(根本苦)와 사회고(社會苦)가 그것이다. 근본고는 인간으로서 피할 수 없는 고통, 즉 자연적․생리적인 괴로움이고, 사회고는 사람과 더불어 사는 삶 속에서 생기는 고통, 즉 인위적․윤리적인 괴로움이다. 사회고를 다른 말로 ‘인간에 의한 인간의 고통’이라고 한다.
위빳사나 수행은 인간의 개인적인 문제인 근본고를 해결하는데 크게 도움이 된다. 그러나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사회고는 수행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사회고는 잘못된 제도와 법을 고치지 않으면 결코 해결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간화선 수행자나 위빳사나 수행자들은 수행을 통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간화선이든 위빳사나 수행이든 오직 자신의 수행에만 몰두하는 사람들 중에는 대인관계가 원만하지 못하거나 외골수인 경우가 허다하다. 일반적으로 수행을 하게 되면 인격이 향상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아놀드 멘델이 지적한 바와 같이 명상, 즉 수행은 자신의 내적인 갈등은 어느 정도 조절이 가능하지만, 대인관계에서는 오히려 갈등을 악화시키기 때문이다.
수행자의 결점 가운데 하나는 사회참여의식의 결여이다. 한마디로 수행자는 사회성이 부족하다. 이러한 결점을 보완하기 위해 한때 ‘깨달음의 사회화’를 외친 적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구호는 그 이후에도 참여불교로 연결되지 못했다. 대부분의 선수행자들은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만 해결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부파불교시대의 비구나 비구니들도 이러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다. 대승불교에서 부파불교를 소승이라고 폄하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상좌불교는 대승불교보다도 더 적극적으로 사회참여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붓다시대는 여름 안거 중에도 탁발은 계속되었다. 비록 안거 기간에는 유행이 금지되었지만 일상생활인 탁발을 통해 재가자와의 관계는 지속적으로 유지되었다. 사실 일 년에 두 번의 안거제도를 실시하고 있는 나라는 한국뿐이다. 이것은 한국불교가 그만큼 승가의 대사회적 기능을 다하지 않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행 안거제도는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
최근 국내에서도 위빳사나 수행에만 전념하는 재가신자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불교의 사회참여운동이나 봉사활동 등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또한 이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 자체를 싫어한다. 이런 재가자의 수행불교는 한국불교발전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이들은 법회에 참석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불교와 이웃을 위해 보살행을 실천하지 않기 때문이다.
붓다는 초기경전의 여러 곳에서 모든 사람들이 개인적으로는 ‘사무량심(四無量心’을 닦고, 사회적으로는 ‘사섭법(四攝法)’을 적극 실천하기를 권했다. 붓다는 이 두 가지를 통해 불교의 이상사회를 앞당길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사무량심이란 자(慈) 비(悲) 희(喜) 사(捨)를 말하고, 사섭법은 보시(布施) 애어(愛語) 이행(利行) 동사(同事)를 말한다. 전자의 ‘사무량심’은 자신의 거룩한 마음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자리행(自利行)이고, 후자의 사섭법은 원만한 사회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이타행(利他行)이다. 이 두 가지가 균형을 이루어야만 이상사회를 앞당길 수 있다.
사실 수행이 곧 생활이고, 생활이 곧 수행이 되어야 한다. 수행과 생활을 이분한다는 자체가 붓다의 가르침에 어긋난다. 수행과 생활이 별개라고 생각하는 한 한국불교는 ‘깨달음’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한국불교가 국민들로부터 신뢰받는 종교가 되기 위해서는 수행불교에서 참여불교로 전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마성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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