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야단법석

삼보는 왜 의지처가 되며, 붓다는 어떤 마음으로 믿어야 하는가?

실론섬 2015. 3. 28. 21:24

왜 삼보가 귀의처가 되는가?


1) 부처님은 어떤분 이시기에 중생들의 귀의처가 되는가?  그 이유는 바로 아래와 같이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 입니다.

 

(1) 아라항(Araham. 應供)

모든 번뇌로 부터 벗어 난 분. 번뇌의 적을 모두 죽인 분. 번뇌가 있을 때 나쁜 습관을 모두 죽인 분

(2) 삼마 삼붓도(Samma Sambuddho. 正等覺者)

모든 법을 바르게 직접 스스로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신 분

(3) 위짜짜라나 삼빤나(Vijjacaranasampanna. 明行足])

지혜와 수행을 다 아시는 분. 지혜와 덕행을 함께 갖추신 분

(4) 수까또(Sugato. 善逝)

잘 가시는 공덕을 지니신 분. 붓다가 가시는 길은 깨끗하여 허물이 없어서 적당 하시다.

알맞은 성스러운 道(도)로써 가시기 때문에 열반(닙빠나)에 집착없이 가신다.

(5) 로가까위두(Lokavidu.世間解 )

중생들 세간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

(6) 아눗따로(Anuttaro. 無上士)

위 없으신 분. 붓다보다 공덕이 더 큰 이는 없기 때문이다.

붓다의 지계 공덕보다 더 넘치는 이는 없다.

붓다의 선정 공덕보다 더 넘치는 이는 없다.

붓다의 지혜 공덕보다 더 넘치는 이는 없다.

붓다의 번뇌 벗어남의 공덕보다 더 넘치는 이는 없다.

붓다의 자비 공덕보다 더 넘치는 이는 없다.

(7) 뿌리사 담마 사라티(Purisadhammasarathi. 調御丈夫)

어리석은 자를 으뜸되게 잘 다스리는 분. 거친 이를 제도하여 잘 삶하게 하시는 분

(8) 삿타데와마누상(Satthadevamanusam. 天人師)

모든 천인과 인간의 스승이신 분

(9) 붓도(Buddho. 覺者)

깨달으신 분. 존재의 실상을 깨달으신 분

(10) 바가와(Bahgava.世尊 )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신 분 

 

2) 법(붓다의 가르침)은 어떠한 가르침이기에 중생들의 귀의처가 될 수 있는가? 바로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기 때문에 모든 중생들의 귀의처가 되는 것 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거룩하시고 존경 받는 붓다께서 잘 설하는 가르침은 

현세에 유익한 가르침이며,(현재에서 증명되며)

시간을 초월하는 가르침이며,(때와 상관없이 과보가 있으며) 

와서 보라는 가르침이며,

(열반에의) 길로 이끌어 주며,

지혜 있는자 누구나 스스로 증득 할 수 있는 것이다.

Svaakkhaato bhagavataa dhammo, sanditthiko, akaariko, ehipassiko, opanayiko,

paccattam veditabbo vi~n~nuuhi ti.

 

3) 승가는 어떠한 분들이 모여 있는 곳이기에 중생들의 귀의처가 될 수 있는가? 승가의 모임은 바로 다음과 같기 때문에 모든 중생들의 귀의처가 되는 것 입니다.

 

붓다의 제자이신 스님들은

 

길을 잘 걷고 있으며

길을 바르게 걷고 있으며,

길을 지혜롭게 걷고 있으며,

길을 충실하게 걷고 있으니

저 네 쌍의 분들, 여덟 단계에 계신 분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붓다의 제자분들은

 

공양을 올려 마땅하며,

시중들어 마땅하며,

보시하여 마땅하며,

합장드려 마땅하며,

이 세상에 다시없는 복전(福田)이다.  

 Supa.tipanno bhagavato saavakasangho, uujupatipanno bhagavato saavakasangho, ~naayapa.tipanno bhagavato saavakasangho, saamicipatipanno bhagavato saavakasangho, yadidam cattaari pursayugaani atthapurisapuggalaa esa bhagavato saavakasangho, aahuneyyo, paahuneyyo, dakkhi.neyyo, a~njalikara.niiyo anuttaram. pu~n~nakkhettam lokassaa ti.


흔히들 불수념이라고 하여 붓다를 생각하는 수행을 하며 또한 붓다누싸티라고 하여 붓다십호를 계속하여 암송하는 염불수행이 있다. 문제는 붓다를 타종교의 신이나 절대자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붓다를 믿고 의지하는게 아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법과 승가도 마찬가지이다. 불교는 절대로 맹목적인 믿음을 강요하지 않는다. 불교는 "와서 보라"고 할 뿐이지,"와서 믿어라고 하지 않는다". 불교의 믿음은 스스로 알고 보고 의심을 제거했기 때문에 생겨나는 확신에 근거를 두는 것이다. 이부분은 여러번 설명을 했기에 이만 줄이고 그리고 '스승님들의 가르침"이라는 방에 가면 라훌라 스님의 글이 있으니 참조했으면 좋겠다.


경전에 그대로 씌여 있으니 믿어야 한다거나 또는 불자이기 때문에 무조건 붓다나 삼보를 믿어야 한다는 "지혜없는 믿음이 만들어 낸 맹신"을 불교는 믿음이라고 하지 않는다.


붓다(스승)를 믿는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24. 수행승들이여, 믿음을 따르는 님이란 어떠한 자인가? 수행승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이 형상을 뛰어넘고 물질에서 벗어나 고요한 해탈을 자신의 몸으로 체험하지 못하였고, 지혜로서 보아 번뇌를 아직 부수지 못했으나, 여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충만하고 또한 나아가서 믿음의 능력, 정진의 능력, 새김의 능력, 집중의 능력, 지혜의 능력과 같은 원리를 갖추었다면, 수행승들이여, 이 사람을 믿음을 따르는 님이라고 부른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이러한 수행승들에게 나는 ‘방일하지 않음으로써 해야 할 일이 있다.’라고 설한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들 존자들은 적당한 처소를 사용하고 좋은 벗을 사귀고 감각능력을 다스리고 훌륭한 가문의 아들이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한 목적인 최상의 청정한 삶을 지금 여기에서 스스로 곧바로 알고 스스로 깨닫고 성취하길 바라는 까닭에, 수행승들이여, 이들 수행승들이 방일하지 않고 성취해야 할 경지를 보고 그들에게 ‘방일하지 않음으로써 해야 할 일이 있다.’라고 나는 설한다.


25. 수행승들이여, 나는 최상의 지혜가 단번에 성취된다고 설하지 않는다. 수행승들이여, 그와 반대로 오로지 점차적으로 배우고 점차적으로 닦고 점차적으로 발전한 다음에 지혜의 성취가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오로지 점차적으로 배우고 점차적으로 닦고 점차적으로 발전한 다음에 지혜의 성취가 이루어지는가?


26. 수행승들이여, 여기 어떤 자에게 스승에 대한 믿음이 생기면, 그는 스승에게 가까이 간다. 가까이 가서 스승을 공경한다. 스승을 공경할 때에 스승에게 귀를 기울인다. 귀를 기울일 때에 그에게 가르침을 듣는다. 가르침을 들을 때에 그것을 기억한다. 기억할 때에 가르침의 의미를 규명한다. 의미를 규명할 때에 가르침을 성찰하여 수용한다. 가르침을 성찰하여 수용할 때에 의욕이 생긴다. 의욕이 생겨날 때에 의지를 굳힌다. 의지를 굳힐 때에 그것을 깊이 새긴다. 깊이 새길 때에 정진한다. 정진할 때에 몸으로 최상의 진리를 성취하고 지혜로서 꿰뚫어 본다.


27. 수행승들이여, 여기 어떤 자에게 스승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수행승들이여, 참으로 그 가까이 감이 없고, 수행승들이여, 참으로 공경함이 없고, 수행승들이여, 참으로 귀를 기울임이 없고, 수행승들이여, 참으로 가르침을 들음이 없고, 수행승들이여, 참으로 기억함이 없고, 수행승들이여, 참으로 가르침의 의미를 규명함이 없고, 수행승들이여, 참으로 가르침을 성찰하여 수용함이 없고, 수행승들이여, 참으로 의욕이 생겨남이 없고, 수행승들이여, 참으로 의지를 굳힘이 없고, 수행승들이여, 참으로 깊이 새김이 없고, 수행승들이여, 참으로 정진함이 없다.


28. 수행승들이여, 참으로 그대들은 길을 잃었고, 수행승들이여, 참으로 그대들은 잘못된 길에 빠졌다. 수행승들이여, 어리석은 자들이여, 그대들은 가르침과 계율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있는가? 수행승들이여, 네 구절의 진리가 있다. 그것을 외우면, 현명한 사람이라면 재빨리 지혜로써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 수행승들이여, 내가 그대들에게 외워 보이겠다. 그것을 이해하도록 노력하라.”


29. “세존이시여,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세존이시여, 우리가 누구이기에 가르침을 알아야 합니까?”

“수행승들이여, 아무리 물질적인 것들을 중요시하고, 물질적인 것들을 상속자로 하고, 물질적인 것들을 벗으로 하는 스승이라고 하더라도 그에게 이와 같이 ‘우리가 이것을 얻는다면, 이것을 할 것이다. 우리가 이것을 얻지 못한다면, 이것을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따지는 것은 옳지 않다. 하물며 궁극적으로 모든 물질인 것들을 완전히 떠난 여래에게 있어서랴?


30. 수행승들이여, 스승의 가르침을 알려고 열망하는 믿음 있는 제자라면, 이와 같이 ‘세존은 스승이고, 나는 제자이다. 세존은 알지만, 나는 알지 못한다.’라고 실천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31. 수행승들이여, 스승의 가르침을 깊이 알려고 열망하는 믿음 있는 제자라면, 스승의 가르침은 그에게 자양을 주고 스승의 가르침은 그에게 활기를 준다.


32. 수행승들이여, 스승의 가르침을 깊이 알려고 열망하는 믿음 있는 제자라면, 그는 이와 같이 ‘기꺼이 내 몸에 나의 가죽, 힘줄, 뼈만 남아도 좋다. 살과 피는 말라버려라. 그러나 사람의 인내, 사람의 정진, 사람의 용맹으로써 이루어야 할 것을 이루지 못하는 한, 나는 정진을 그만두지 않을 것이다.’라고 실천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33. 수행승들이여, 스승의 가르침을 알고 열망하는 믿음 있는 제자라면 그는 두 가지의 경지 가운데 어느 하나의 경지를 얻을 것이다. 즉, 현세에서 궁극적인 지혜의 경지를 얻거나, 만약 집착이 남아있다면, 돌아오지 않는 님의 경지를 얻을 것이다.”


34. 이와 같이 세존께서 말씀하시자, 수행승들은 세존께서 하신 말씀에 만족하며 기뻐했다.

(맛지마 니까야 70.끼따기리 설법의 경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