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야단법석

연꽃의 글 "진리가 우리를 고귀하게 해' 라는 글을 읽고

실론섬 2015. 3. 27. 19:33

1.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

 

삼보에 귀의 하면 다른 것을 의지처로 삼지 않는다. 이는 ‘자귀의 법귀의’ 법문에서 알 수 있다. 흔히 불자들은 ‘자등명 법등명’이라 말한다. ‘자신을 등불로 삼고 가르침을 등불로 삼으라’는 말이다. 초기불교에서는 ‘자신을 섬으로 삼고 가르침을 섬으로 삼으라’라고 되어 있다. 

 

이렇게 자귀의법귀의를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른 것에 의지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귀의법귀의 다음에 이어지는 구절은 “자신을 섬으로 하고 자신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 가르침을 섬으로 하고 가르침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 (S22:43)”로 되어 있다. 여기서 자귀의법귀의 못지않게 중요한 말이 있다. 그것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anaññasaraṇānaṃ)”라는 말이다. 

 

부처님은 왜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고 하였을까? 이는 삼보 이외에 다른 것에 의지 하지 말라는 것이다. 삼보라 함은 ‘부처님(Buddha)’과 ‘가르침(Dhamma)’과 ‘상가(Sangha)’를 말한다. 이 세 가지 보배 이외 어떤 것도 의지처, 귀의처, 피난처로 삼지 말라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사람’도 해당 된다.

 

부처님이 다른 것에 의지 하지 말라고 하였을 때 사람도 포함 된다. 설령 그가 사쌍팔배의 성자라 할지라도 의지처, 귀의처, 피난처로 삼으면 안 된다. 성스런 상가를 구성하는 성자는 공경과 공양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의지처, 귀의처, 피난처로 삼아서는 안 된다. 만일 성인을 의지처로 삼았을 때 어떻게 될까? 아마 부처님과 동격이 될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삼보는 오로지 부처님 한분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 그리고 가르침을 실천하여 성자가 된 성스런 상가는 모두 동격이다. 따라서 오로지 부처님 한분에만 의지해야 하는 것이다.


2. “불교를 행복의 종교, 계나 지키며 잘살면 그만이라고 한다면 외도”


+++++++


최근 미디어 붓다에 올린 진흙속의연꽃의 글을 읽었다. 하도 잡다한 이야기를 덕지덕지 붙여 놓아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매한가지인 것 같다. 일단 올린 글 중에서 두 가지만 가져와서 연꽃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지적하고자 한다.


1.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고 하면서 올린 내용은 정말 엉터리이다. 왜 그런가 한번 살펴보자.


자신을 섬으로 하고 의지처로 하라는 뜻은?

이 부분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여러 불자들에게 많은 해석상의 오류와 혼돈을 가져오는 부분이다. 불교는 무아와 무상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자신을 의지처나 섬으로 삼으라고 한다면 이건 자아를 인정하고 무상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뭔가 변하지 않고 고정된 것이 있는냥 오해를 하는 것이다. 한국불교는 법등명자등명을 유아론적 입장에서 설법하고 말하는 것을 보게 된다. 정확한 붓다의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오해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렇다면 자등명 법등명이 나오는 대반열반경의 전문을 한번 살펴보자.


아난다여, 그러므로 여기서 비구들은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말라.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말라(Tasmatihananda, attadipa viharatha attasarana anannasarana, dhammadipa dhammasarana anannasarana)


아난다여, 그러면 어떻게 비구는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는가? 어떻게 비구는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는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세상에 대한 탐욕과 근심을 초월하여 알아차리고 마음새기는 자 되어 머문다(마음 새김을 확립하여 머문다).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며 머문다. 세상에 대한 탐욕과 근심을 초월하여 알아차리고 마음새기는 자 되어 머문다.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며 머문다.세상에 대한 탐욕과 근심을 초월하여 알아차리고 마음새기는 자 되어 머문다.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문다.세상에 대한 탐욕과 근심을 초월하여 알아차리고 마음새기는 자 되어 머문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비구는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며,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으며,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는다.


아난다여, 어떤 비구가 누구든지 내가 죽고 난 다음일지라도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마 머물고,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으며, 법을 섬을 삼고, 법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으면서 수행과 정진을 하는 비구는 남들보다 수승한 자가 될 것이다. 


이 붓다의 가르침에 대해서 더이상 설명이 필요할까? 한마디로 방일하지 말고 사념처 수행을 하며 "깨어있는 자"가 되라는 것이다. 자아나 유신견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태반의 사람은 '자신을 귀의처로 하라' 고 해놓고서는 어떻게 자신을 귀의처로 하는게 붓다의 가르침인가라는 부분을 쏙 빼먹어 버린다. 앞뒤 말을 짤라 버리고 전혀 다른 의미로 제멋대로 짜집기 하고 설법하는 것이다. 전부다 자아나 유신견쪽으로 흐른다. 불자라는 작자들이 이게 도대체 무슨 해괘망칙한 행동들인가? 


또한 붓다는 자신을 의지처로 하지 말라고 했다. 박카리경에 나오듯이 


[박카리여, 가만히 누워 있거라. 내가 너의 곁으로 갈 것이다]

붓다께서 박카리를 다시 자리에 눕게하고 거의 옆에 앉으시자 박카리가 말했다.

[대덕(bhadanta)이시여, 저는 이제 곧 죽을 것입니다. 몸은 낫지를 않고 더욱더 나빠지기만 합니다. 그래서 마지막 소원으로 붓다를 우르러뵙고 발밑에 예배드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붓다께서 엄숙하게 말씀하셨다.

[그만 두어라. 박카리여, 이 썩어가는 몸을 보아 무엇하겠느냐. 박카리여,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법을 보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붓다라는 개인에게 종교의 열쇠가 쥐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법을 깨달은 선각자요 앞서 직접 걸어가면서 행동으로 보여주신 스승에 불과하다. 법(진리)는 붓다라는 한 인간의 출현 여부와는 상관없이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붓다는 자신이 법을 발명한 것이 아니라 발견한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이러한 법은 지혜있는 자라면 누구나 붓다처럼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붓다를 예경하는 것은 그분이 신이거나 절대자이기 때문이 아니다. 앞서 걸어가신 스승이기에 그분의 위대한 삶과 발자취를 떠 올리며 그분을 예경하는 것에 불과하다. 연꽃의 말처럼 부처님 한분에게만 오직 의지하라는 이야기는 타종교의 하나님에게 의지하라는 말과 조금도 다름없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2. “불교를 행복의 종교, 계나 지키며 잘살면 그만이라고 한다면 외도”라는 말은 불교의 행복이란 무엇인지를 전혀 모르는 무지의 소치이다. 


불교적 행복이란 무엇인가? 세속적 욕망을 충족하는게 행복이 아니라면 불교에서 말하는 행복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미안하게도 세속적 욕망의 충족과는 전혀 반대되는 것이다. 내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내 것을 내려 놓고 나의 것을 포기하는 것이 불교적 행복을 추구하는 방법이다. 즉 보시와 자비의 행위에 뒤따른 것이 곧 행복이라는 것이다. 보시라는 것은 나의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내 주머니속에 돈 100원을 거지에게 주는 것은 내가 애써 모은 돈을 포기하는 행위이다. 마찬가지로 자비란 나라는 생각을 포기하는 것이다. 전철 안에서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어려운 이웃을 찾아가 도움을 주는 것은 나라는 생각(자아관념)이 강할수록 행할 수 없는 것이다. 


버리고 내 것을 포기함으로써 그 빈자리를 채워주는 안온하고 평온한 감정이 곧 불교적 행복인 것이다. 길거리를 지나가다 거지에게 마음내어 돈을 주거나 또는 무거운 보따리를 머리위에 짊어진 할머니의 보따리를 대신하여 받아서 안전하게 옮겨주고 돌아 온 저녁시간에 가만히 눈감고 있으면 마음 한 구석에서 솟아 오르는 흐뭇한 감정이 바로 불교적 행복이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어떠한 집착도 욕망도 탐욕도 들어설 틈이 없다. 어떠한 세속적 탐욕을 만족시켜주기 위한 불건전한 추구도 개입할 수가 없다. 

이러한 불교적 행복을 추구하는 보시나 자비행이 아무나 되는게 아니다. 불건전한 생각으로 가득찬 마음에서 자비나 보시가 우러나올 수가 없다. 차라리 우물가에서 숭늉찾는게 더 쉽다. 내 마음이 건전하고 선한 생각으로 가득차게 할려면 끊임없는 훈련과 마음을 닦아야 한다. 그 방법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 불교이다. 바로 팔정도인 것이다.

우리들이 세상을 살면서 오계를 지키기가 쉬운가? 마음이 더러우면 오계도 지킬 수 없다. 깨끗한 마음만이 오계중의 하나라도 지킬 수 있다. 계율을 지키는 것은 수행이다. 계율따로 수행따로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