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 논문및 평론/교리 및 수행

관(純觀, suddha-vipassanā)에 대하여/김 재성

실론섬 2015. 3. 26. 03:30

순관(純觀, suddha-vipassanā)에 대하여

- 남방상좌불교 수행론의 일고찰 -

김 재 성/고려대장경 연구소

 

Ⅰ. 서 론

 

1. 문제의 소재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전통적인 한국불교 선(禪) 수행법인 임제선 계통의 화두선과는 다른 전통의 여러 가지 수행법이 소개되고 있다. 그 가운데 남방상좌불교 Theravāda 계통의 수행법으로 미얀마의 마하시 계통의 수행법과 인도의 고엔카 계통의 수행법이 있다. 

 

이 두 가지 수행법의 전통은 모두 위빠사나(또는 비파사나, 觀法)라고 불리고 있으며, 팔리어로 전해지는 남방상좌불교의 초기경전과淸淨道論. Visuddhimagga 등의 논서에 근거를 두고 20세기 중반 이후에 미얀마, 태국, 스리랑카 인도 등지를 중심으로 세계적으로 보급되어 있는 수행법이다. 

 

본고에서 필자는 이러한 위빠사나 수행법의 연원을 초기경전과 팔리주석문헌을 중심으로 밝혀 보고자 한다. 위빠사나 수행 가운데에서도 특히 사색계선(四色界禪)이나 사무색계선(四無色界禪) 등의 선정 수행을 닦지 않고 곧 바로 대상에 대한 관찰을 하도록 지도하고 있는 마하시 계통의 수행법에 대한 팔리주석문헌 전통에서의 이해를 찾아보고자 한다.

 

선정(禪定)의 준비 과정 없이 바로 위빠사나를 닦는 수행법을청정도론(淸淨道論)등의 주석문헌에서는 순관(純觀, suddha-vipassanā) 또는 건관(乾觀, sukkha-vipassanā)이라고 한다. 순관 또는 건관이라는 용어는 초기 경전에서는 나오지 않으며, 청정도론(淸淨道論)을 위시로 한 팔리주석문헌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따라서 이 용어가 사용되는 용례와 그 의미를 고찰해 보면서, 위빠사나 수행에 대한 이론적인 이해를 찾고자 하는 것이 본고의 목적이다.

 

2. 선행 연구

불교 수행론에 대한 연구 성과 가운데 선정과 지혜 또는 사마타(止)와 위빠사나(觀)에 대하여 주목할 만한 연구 성과로는 下田正弘의 「《さとり》と《救い》-インド佛敎類型論再考」, Bronkhost의 The Two Traditons fo Meditation in Ancient India, Cousins의 “Buddhist Jhāna: Its Nature and Attainment According To The Pāli Sources”, “Samatha-yāna and Vipassanā- yāna”, “The Origins of Insight Meditation,” Griffiths의 “concentra- tion or insight: The Problemetic of Theravāda Buddhist Meditation Theory,” Schmithausen의 “On Some Aspects of Descriptions or Theories of ‘Liberating insight’ and ‘Enlightenment’ in Early Buddhism,” Vetter의 The Ideas and Meditative Practices of Early Buddhism 등을 들 수 있다. 이 연구들은 선정(禪定)과 관수습(觀修習)의 문제에 대한 일련의 연구 성과들로 La Valleé Poussin의 연구 성과인 ‘Musīla et Nārada’를 계승하고 있다. 최근에 국내에서도 초기불교의 지관에 대한 연구 성과가 발표되어 활발한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특히, Cousins 교수는 “Samatha-yāna and Vipassanā-yāna”라는 논문에서 사마타 수행과 위빠사나 수행의 특징에 대해서 잘 정리하고 있으며, 특히 본 논문에서 문제 삼고 있는 순관(純觀) 또는 건관(乾觀)에 대해서도 청정도론(淸淨道論)을 인용하면서 설명하고 있다.

 

Cousins 교수의 최근의 연구인 “The Origins of Insight Meditation”에서 교수는 현재의 남방상좌불교 수행전통에 대해서 소개하면서, 스리랑카, 태국, 미얀마의 수행전통에 대해 개괄하고 있다. 위빠사나 수행전통의 모델로는 마하시 사야도(Mahasi Sayadaw, 1904-1982)의 수행법을 소개하고 있다. 이 부분에서 마하시 수행법의 특징인 刹那三昧(Khaṇika-samādhi)를 기반으로 한 위빠사나 수행법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Cousins 교수의 비판 내용은 마하시 방식의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수행을 할 때, 세 단계의 삼매 가운데 가장 약한 형태인 찰나삼매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고 하는 데, 실제로 刹那三昧(Khaṇika-samādhi)라는 용어는 붓다고사가 그리 자주 사용한 용어가 아니라는 점과 이 삼매가 위빠사나의 선행하는 단계로 제시된 것은 붓다고사에 의해서라는 점이라고 하면서 찰나삼매가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찰나삼매를 제외한 근접삼매(根接三昧)와 안지삼매(安止三昧)는 주석서에 많이 등장하고 있는 점을 보면, 찰나삼매는 여기저기서 일어나는 감각적인 인식과 함께 일어나는 근접삼매의 하나로 보고 있다. 그리고 Cousins 교수는 마하시 수행법에 비판적인 스리랑카의 학승들의 입장을 소개한다. 이 입장은 적어도 출세간의 깨달음(출세간도, lokuttaramagga)을 이루기 위해서는 최소한 초선을 얻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입장이며, 이러한 입장에서 초선이 아닌 찰나정에 의해서 출세간의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한 마하시 수행법을 비판하였다. 이러한 비판과 마하시 측에서의 답변은 Myanaung U Tin 이 편집한 Satipaṭṭhāna Vipassanā Meditation : Criticisms and Replies에 잘 정리되어 있다. 마하시 수행법(修行法)에 대한 비판과 응답으로 구성된 이 책은 스리랑카의 학승들의 비판과 미얀마 측의 답변이 제시되어 있어 찰나삼매에 근거한 마하시 수행법의 입장을 잘 알 수 있는 자료집이다.

 

필자는淸淨道論における刹那定と近行定 - SamathayānaとVipassanā- yāna에서 사마타 수행과 위빠사나 수행이 서로 중요한 점에서 만나게 되어 상호 보완적인 역할을 한다고 밝힌 적이 있다. 그리고 「四界差別について-南北兩阿毘達磨の修行道における位置づけ-」에서는 순수 위빠사나 수행에서 사용되는 수행법의 예로써 계차별(界差別, dhātuvavatthāna)을 들어 남북 아비달마에서의 전개양상을 밝혀보았다. 

 

이와 같은 종래의 연구 성과들을 바탕으로 하여 본 고에서는 순관(純觀)/건관(乾觀)의 의미에 대해서 밝혀보고자 한다.

 

Ⅱ. 본 론

 

1. 선정(禪定)과 지혜(智慧) 또는 지(止)와 관(觀)

초기불교 이래 불교의 수행법은 크게 나누어 선정(禪定, jhāna)과 지혜(智慧, paññā) 또는 지(止, samatha)와 관(觀, vipassanā)으로 대표된다고 볼 수 있다. 초기불교 이래 수행법의 기본적인 범주로 제시되고 있는 계정혜(戒定慧, sīla-samādhi-paññā)의 삼학(三學)에서 윤리 규범인 계를 바탕으로 선정과 지혜는 제시되어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선정과 지혜는 순서적으로 말하면 선정을 바탕으로 지혜가 이루어진다는 도식으로 이해되어 왔고, 이러한 이해는 초기불교와 남방상좌불교 그리고 북방 설일체유부의 전통적인 입장에서도 기본적으로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본고의 논의의 중심이 될淸淨道論은 계청정(戒淸淨, sīla-visuddhi), 심청정(心淸淨, citta-visuddhi), 혜청정(慧淸淨, paññā-visuddhi)이라는 계정혜 삼학의 구조 하에 집필되어 있고, 혜청정에 해당하는 부분이 다시 다섯 가지로 세분되어 7청정으로 제시되어 있다.1)

1) 삼학과 7청정의 구조는 戒淸淨은 戒學, 心淸淨은 定學 그리고 見淸淨․度疑淸淨․道非道
   智見淸淨․行道智見淸淨․智見淸淨의 5청정은 慧學으로 되어 있다. 7청정 즉, 戒淸淨
   (sīla-visuddhi)․心淸淨(citta-visuddhi)․見淸淨(diṭṭhi-visuddhi)․度疑淸淨(kaṅkhāvitaraṇa
   -visuddhi)․道非道智見淸淨(maggāmaggañāṇadassana-visuddhi)․行道智見淸淨
   (paṭipadañāṇadassana-visuddhi)․智見淸淨(ñāṇadassana-visuddhi)은 涅槃에 이르
   는 7단계의 수행도로서 中部 ?轉車經? Rathavinīta-sutta(MN I, 147-148.)에 나오는 
   수행도이며,「淸淨道論」은 이 경전에서 제시된 7청정을 기본 구조로 채택하고 있다.

 

청정도론에서는 정학(定學)에 해당하는 심청정(心淸淨)에 제시되어 있는 선정을 여러 방식으로 정의하고 있으며, 특징적인 선정론으로 세 가지 선정을 제시하고 있다.2) 세 가지 선정이란, 완전히 집중에 몰입되어 있는 상태인 안지정(安止定, appanā-samādhi), 안지정에 가까이 접근한 상태인 근행정(近行定, upacāra-samādhi), 마음이 순간적으로 집중해 있는 상태인 찰나정(刹那定, khaṇika-samādhi)이다. 이 세 가지 선정 가운데 안지정과 근행정을 먼저 수습(修習)하는 수행자를 止行者(samathayānika)라고 하며, 찰나정에 의해 마음이 安定되어(cittaṃ samādhiyati), 심신(心身)의 여러 현상들을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로서 관찰하는 수행을 하는 자를 觀行者(vipassanāyānika)라고 한다. 찰나정은 바로 순관행자가 의지하는 선정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2) 金宰晟, 「淸淨道論 における刹那定と近行定 - SamathayānaとVipassanāyāna」 p.4의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淸淨道論 등의 주석문헌에서 세 가지 선정설을 도입한 이유는, 처음부터 특정한 선정을 
   미리 닦지 않고 위빠사나를 수습하는 순관행자의 경우 觀의 근거가 되는 선정이 있어야 
   된다는 점이 문제시되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대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기 위해서
   는 마음집중(定)이 없으면 안 된다는 것이 불교의 전제이기 때문이다. 즉 지혜는 선정의 
   토대가 요구되어진다는 의미이다. 이 전제는 禪定과 智慧의 관계에 대하여 잘 알려져 있
   는 다음 경전에서 확인이 된다.
   比丘들이여, 마음集中(三昧, samādhi)을 수습하라.
   比丘들이여, 마음이 집중되어 있는 比丘는, 있는 그대로 안다.(SN III, 13)
   samādhiṃ, bhikkhave, bhāvetha
   samāhito, bhikkhave, bhikkhu yathābhūtaṃ pajānāti.
   이 경전에서 우리는 선정에 근거해서 智慧가 생긴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 경전은 淸淨道論에서는, 禪定의 功德을 설명할 때 인용하고 있다. 선정에 의해 얻어
   지는 공덕의 하나가 vipassanā이고(Vism 371) 이 vipassanā는, 如實知(yathābhūtaṃ 
   pajānana)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수행자 가운데에는, 수행의 시작부터 선정 
   수행을 닦지 않고, 觀修習을 행하는 純觀行者도 있기 때문에, 이들에게 智慧의 前提가 
   되는 禪定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純觀行者가 智慧를 얻을 수 있다면, 그들도 어떤 형
   태이든지 선정에 근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이 純觀行者가 의지할 선정이 문제
   가 되어, 淸淨道論을 위시로 한 팔리주석문헌에서 세 가지 선정이 설해진 것이라고 생
   각된다. 따라서 止行者(samathayānika)는, 安止定과 近行定을 먼저 수습한 후에 觀行
   을 닦는 수행자이고, 觀行者(vipassanāyānika) 즉, 純觀行者(suddha-vipassanāyānika)
   는, 처음부터 觀修習을 닦으면서 어느 순간에 刹那定에 의해 마음을 집중시켜 智慧를 
   얻는 수행자라고 할 수 있다.

 

순관(純觀)과 찰나정에 대해서는 3에서 자세히 다룰 것이다.

 

2. 아라한에 이르는 두 가지 길

초기불전에서는 붓다의 제자 가운데 성인(聖人)을 7부류로 분류하고 있다. 즉, ① (무색계선정과 지혜의) 두 가지 길에 의한 해탈자(兩分解脫者, ubhatobhāgavimutto)3), ② 지혜에 의한 해탈자(慧解脫者, paññāvimutto), ③ (선정을) 몸으로 체험한 분(身證明者, kāyasakkhi), ④ (지혜로) 보아서 도달한 분(見到達者, diṭṭhippatto), ⑤ 믿음에 의한 해탈(信解脫者, saddhāvi- mutto), ⑥ 지혜로 불리는 법을 따라 행하는 분(隨法者, dhammānusārī), ⑦ 믿음에 따라 행하는 분(隨信者, saddhānusārī)이다. 이 가운데 아라한과에 이른 성인은 ①兩分解脫者와 ②慧解脫者 뿐이며 나머지 5부류의 성인(聖人) 즉, ③④⑤는 預流道에서 阿羅漢道, ⑥⑦은 預流果를 말하는 유학(有學, sekhā)의 제자들이다. 

3) 兩分解脫者(ubhata-bhāga-vimutta)에 대한 좀더 자세한 해석을 하고 있는 중부 
   주석서에 의해 보충 설명을 하면 다음과 같다.
   양분해탈자는 두 가지 부분에 의해서, 즉 無色定(arūpa-samāpatti)에 의해 色身
   (rūpa-kāya)에서, 道(magga)에 의해 名身(nāma-kāya)에서, 解脫한 자이다. 그
   는, 無色定의 하나하나에서 나와서 諸行을 思惟하여 阿羅漢果를 얻는 네 부류와, 
   또 滅盡定에서 나와 阿羅漢果를 얻는 不還者에 의한 다섯 부류가 있다. 하지만, 
   이것에 대해서 “兩分解脫者란 무엇인가. 여기에, 일부의 사람은 八解脫을 몸으로 
   직접경험하고 지낸다. 하지만 慧에 의해 보고, 그들에게는 모든 煩惱가 소멸되어 
   있다”(人施設論)라는 팔리聖典이 있다. 이러한 論書에서는 팔해탈의 獲得者에 대
   해서 말하고 있다.(MN-a III, 188))
   지혜에 의한 해탈자Vism 660. pajānanto vimutto ti paññāvimutto ti. 중부의 주
   석서의 설명을 보면 다음과 같다. (MN-a III, 188)
   慧解脫者(paññāvimutta)란 慧에 의한 解脫者이다. 그는 乾觀行者(sukkha-vipassaka)
   와 四禪(catu-jhāna)에서 나와 阿羅漢果를 얻은 네 부류가 있다고. 따라서 이들에는 
   5부류가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하여 팔리聖典은 八解脫(aṭṭha-vimokkha)을 거절함에 
   의해서 설명하고 있다. 그 설명은 다음과 같다. “八解脫을 몸으로 경험하지 않고 지낸
   다. 하지만 慧에 의해서 보면서, 그들에게는 모든 번뇌가 소멸되어 있다. 이것이 
   慧解脫人이라고 말한다”(人施設論 pp14, 73).

 

아라한에 ①兩分解脫者와 ②慧解脫의 두 부류가 있다고 한다면, 아라한이 되는 방법에 2가지가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라한이 되는 2가지 길에 대해서는 소부(小部)의 소송경(小頌經, Khuddagapāṭha)의 주석에 간략하게 2부류의 아라한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성문 제자 가운데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무학(無學)의 보배에도 2 부류가 있다. 건관행자(乾觀行者, sukkha-vipassaka)와 지행자(止行者, samatha-yānika)이다.Pj. I, 178. asekkharatanampi duvidhaṃ sukkhavipassakasamathayānikavasena.]

 

이 때 말하는 건관행자 또는 순관행자는 위에서 말한 7 성인 가운데 혜해탈자에 해당하며, 지행자(止行者)는 다름 아닌 양분해탈(兩分解脫)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청정도론에서도 여러 차례 지행자(止行者)와 관행자(觀行者)를 대비시켜 말하고 있다. 

 

또 다른 경전에서는 아라한에 이르는 길에는 4가지가 있다고 한다. 증지부 「行品」 俱存(yuganandha, AN II, 156-7)과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부가된 無碍解道(Paṭis II 92-103)가 그 경전들이다. 그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止를 먼저 행하고 觀을 修習한다(samathapubbaṅgamaṃ vipassanaṃ bhāveti).

② 觀을 먼저 행하고 止를 修習한다(vipassanāpubbaṅgamaṃ samathaṃ bhāveti).

③ 지관(止觀)을 함께 짝으로 修習한다(samathavipassanaṃ yuganandhaṃ bhāveti).

④ 법에 대한 들뜸(dhamma-uddhacca, 法掉擧)에 의해 붙잡힌 마음이 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의 마음이 내면(자신의 心身)에만 올바르게 머무르고, 올바르게 가까이 하여, 하나의 對象(一境)을 향해서 집중할 때, 그에게 道가 생긴다.(dhammuddhaccaviggahitaṃ mānasaṃ hoti. so āvuso samayo, yan taṃ cittaṃ ajjhattaṃ yeva santiṭṭhati sannisīdati, ekodihoti samādhiyati; tassa maggo sañjāyati)

 

증지부와 無碍解道(Patisambhidamagga) 주석서에 의하면, ①과 ②는 지를 먼저 행하는가, 관을 먼저 행하는가라는 순서의 차이가 있을 뿐, 지에서 관으로, 관에서 지로의 수행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며, ③의 길은 초선에서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에 이르기까지 각 선정의 단계에서 경험한 여러 현상들(saṅkharā)을 선정에 들어서는 관찰할 수 없기 때문에(tattha teneva cittena samāpattiṃ samāpajjitvā teneva saṅkhāre sammasituṃ na sakkā, Paṭis-a, 585), 선정에서 나와서 그 현상들을 관찰하면서 보다 높은 단계의 선정으로 진행해 나가는 방법이다. 이는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을 병행한 사리풋타의 수행법을 설명하고 있는 한 경전을 실례로 들 수 있을 것이다.4) 

4) (中部의 제111『不斷經』(Anupada-sutta, MN III, 25-9)은 사리풋타 존자가 15일 만에 
   아라한이 되는 과정인 次第法觀(anupadadhammavipassanā)을 부처님께서 설명하신 
   경전이다. 사선정과 4무색계정에 수반되는 심적인 요소들을 설해놓고 있어 선정을 이해
   하는데 중요한 경전임을 알 수 있다. 여기에 각 선정의 禪支와 동시에 관찰의 대상으로 
   제시되는 심적 요소들은 觸phasso, 受vedanā, 想saññā, 思cetanā, 心cittaṃ, 欲chando,
   信解adhimokkho, 精進viriyaṃ, 念sati, 捨upekhā, 思惟manasikāro가 있다. 사리풋타 
   존자는 초선에서 멸진정에 이르기까지, 각 선정의 구성요소와 함께 이러한 가지가지 
   법의 생멸을 관찰했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멸진정에 들어서 지혜에 의해 보면서 
   번뇌가 모두 끊어 졌다. 이 경전을 선정 체험에 수반되는 심적 요소를 보여줄 뿐만 아니
   라, 각 선정을 얻은 후, 바로 觀을 적용하고 있다는 점도 보여주고 있다. 즉, 초선을 이룬 
   후, 초선에서 경험한 상태를 바로 관찰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 지관을 
   함께 수행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위의 세 가지 아라한이 되는 길은 순서의 차이는 있으나, 지관을 겸수(兼修)하는 입장이라고 생각한다. 이때 닦는 지(止) 수행에 사무색계선(四無色界禪)이 포함되어 있다면, 이 길들에 의한 수행의 결과 얻어지는 아라한은 일곱 성인 가운데 두 가지 길에 의한 해탈자[兩分解脫者]가 될 것이다.

 

마지막 네 번째의 아라한의 길은無碍解道주석서에 의하면, 純觀을 닦는 觀行者의 수행 과정이라고 설명하고 있다.5) 여기에서 말하는 법에 대한 들뜸(法掉擧, dhammuddhacca)에서의 법이란 위빠사나 수행에 전념하는 수행자에게 생기는 10가지 번뇌(dasa-vipassanūpakkilesā)를 말한다. 

이러한 위빠사나 수행에 따르는 10 가지 번뇌[十觀隨染]는 모두 처음 위빠사나 수행을 열심히 하는 수행자에게 생기는 번뇌이다. 

5) 무애해도 Paṭis-a 584.
   메마른 위빠사나를 수행법으로 하는 아라한은 법에 대한 들뜸(法掉擧, dhammud- 
   dhacca)을 먼저 경험하며, 수타원의 道에 도달한 후에, 나머지 도(사다함에서 아라한의 
   도)를 위해서도 오직 메마른 위빠사나에 의해서만 얻어진 아라한의 경지에 도달한다. 
   (이것이) 법에 대한 들뜸(法掉擧, dhammuddhacca)을 먼저 경험하는 길이다.
   sukkhavipassakassa hi arahato dhammuddhaccapubba.ggamaṃ sotāpattimaggaṃ
   patvā sesamaggattayampi suddhavipassanāhiyeva pattassa arahattappatti
   dhammuddhaccapubba.ggamamaggā hoti.
   이 부분을 논평을 통해 지적해준 임승택박사에게 이 자리를 빌려 감사를 표하며, 아울러 
   “결과적으로 ‘법에 의한 들뜸’이라고 하는 ‘순수 위빠사나(純觀)’를 ‘먼저 행한다(先行)’
   는 말은, 그 이후에 혹은 그 중간에 ②와 ③의 사마타가 개입될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하
   는 것이 아닌가 싶다.”라는 논평과 “여기에서 평자(임승택)는 ②[觀을 먼저 행하고 止를 
   修習한다]와 ③[법에 대한 들뜸(法掉擧)에 의해 붙잡힌 마음이 있는 사람의 경우]가 어
   떻게 구분될 수 있는지 아직도 명확한 답을 얻을 수 없다. … 결과적으로 ②와 ③에 실질
   적인 차이가 없어 보인다”라는 논평에 대해 간단히 답변을 정리해본다.
   먼저 위에 인용한 無碍解道 주석서에서 볼 수 있듯이, 처음부터 아라한이 될 때까지 위
   빠사나만을 행하는 순관행자 또는 메마른 위빠사나 수행자에게는 특별한 四禪 등의 선정
   체험이 전제되지 않은 채 수행이 진행되어 수타원에 이르고, 그대로 메마른 위빠사나 수
   행에 의해서만 아라한이 될 수 있다는 점이 분명하게 설명되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刹那定에 의한 위빠사나 수행이 가능하다고 한다면, 법에 대한 들뜸(法掉擧)을 먼저 경
   험한다고 해서 반드시 사마타가 그 다음에 동반될 필요는 없다고 볼 수 있다.
   ② 觀을 먼저 행하고 止를 修習한다라는 길에 대한 해석은 각주 34에서 인용한 Paṭis-a
   (p.585)에 의하면, 위빠사나 수행을 하고 나서 사마타 수행을 한다고 되어 있기 때문에, 
   (vipassanāpubbaṅgamaṃ samathaṃ bhāvetīti vipassanaṃ pubbaṅgamaṃ purecārikaṃ 
   katvā samathaṃ bhāveti) 순서적으로는 위빠사나 수행을 먼저 닦는다 하더라도 사마타 
   수행이 병행되는 수행법임을 알 수 있다. 이 때의 사마타 수행은 四禪이나 四無色界禪이
   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을 먼저 수행하더라도 사마타 수행이 병행된다
   는 점에서 사마타 수행의 매개 없이 진행되는 네 번째 수행법과는 차이가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
   (10가지 위빠사나 수행에 따르는 번뇌에 대해서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자세한 설
   명을 하고 있다.
   ① 마음속에서 강한 빛을 경험하기도 하고[光明 obāsa],
   ② 예리한 이해력이 생겨 경전이나 교리의 깊은 의미를 꿰뚫듯이 이해되기도 하며[知 ñāṇa],
   ③ 몸의 전율을 느끼는 희열이 생기기도 하고[喜 pīti],
   ④ 몸과 마음은 아주 안정되어 편안해지며[輕安 passaddhi],
   ⑤ 마음에서 강렬한 즐거운 느낌을 느끼기도 하며[樂 sukha],
   ⑥ 강한 신심이 생겨나기도 하고[勝解 adhimokkha],
   ⑦ 더욱 더 수행에 전념하여 정진을 하며[努力 paggaho],
   ⑧ 흔들림 없는 마음챙김이 뚜렷하게 항상 자리 잡고 있기도 하고[現起 upaṭṭhāna],
   ⑨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현상들에 대해서 마음은 더욱더 무덤덤해지며[捨 upekkhā],
   ⑩ 이러한 제 현상들에 대하에 미세한 집착과 욕망이 일어난다[欲求 nikanti].
   10가지 위빠사나 수행에 동반되는 번뇌를 좀더 자세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光明․知․
   喜․輕安․樂는 모두 위빠사나 수행을 함으로써 생겨나는 현상이다. 勝解는 강한 믿음이며, 
   노력은 정진(viriya)을 말한다. 現起는 마음챙김[念, sati]이다. 위빠사나와 관련되어 있는 
   흔들림이 없는 마음챙김이 생긴다. 사(捨)는 위빠사나의 捨이다. 이 捨가 생기면, 모든 
   현상[一切行]에 대하여 탐착과 싫어함을 떠난 중간의 입장이 된다(majjhattabhūtā).마
   지막의 욕구는, 광명(光明) 등에 의하여 장엄된 위빠사나에 대해서 집착을 일으켜, 미세
   하며, 고요한 형태를 지닌 欲求를 말한다.(okāsādi- paṭimaṇḍitāya hi 'ssa vipassanāya 
   ālayam kurumānā sukhumā santākārā nikanti upajjati. Vism 636)
   이렇게 10가지 위빠사나 수행에 따르는 번뇌가 생길 때, ‘나는 道를 얻었다. 나는 果를 
   얻었다’라고 도가 아닌 것[非道]을 道라고 집착하며, 깨달음이 아닌 것[非果]을 깨달음
   [果]이라고 집착한다.(maggappatto 'smi! phalappatto 'smīti amaggam eva maggo 
   ti, aphalam eva ca phalan ti gaṇhā ti. Vism 637.) 따라서 10가지 위빠사나 수행에 따
   르는 번뇌에 대해서 견해의 집착[見執, diṭṭhigāha], 나라고 하는 집착[慢執, mānagāha], 
   더욱 갈망하는 집착[愛執, taṇhāgāha]이 생겨나서 30가지 위빠사나 수행에 따르는 번뇌
   [三十觀隨染]가 된다.
   이 30가지 위빠사나 수행에 따르는 번뇌에 대해서, 이것들은 無常하며, 만들어진 것들
   [有爲]이며, 조건에 의해 생겨난 것[緣已生]이며, 소멸해 버리는 현상[滅盡法]이며,사
   라져 버리는 현상[消滅法]이며, 탐착을 해서는 안 될 현상[離貪法]이며, 멸하는 현상
   [滅法]이다고 (anicco saṅkhato paṭiccasamuppanno khaya-dhammo vaya-dhammo 
   virāga-dhammo nirodha-dhammo ti. Vism 637.) 지혜에 의해 고찰해서 이러한 위빠
   사나 수행에 따르는 번뇌에서 벗어나서, 위빠사나 수행에 따르는 번뇌는 非道이며, 바
   른 길로 이끄는 위빠사나의 앎은 道라고 확실하게 이해한다. 이것이 도비도지견청정
   (道非道智見淸淨)이다.

 

위빠사나 수행자에게 생기는 이 10 가지 번뇌에 의해 마음이 뜰 떠 안정이 안 될 때, 마음을 내면(자신의 心身)에만 올바르게 머무르게 하고, 올바르게 가까이 하게 하여, 하나의 對象(一境)을 향해서 집중시킨다는 말은 바로 찰나정(刹那定)이 생겼을 때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 장인 <순관(純觀)과 찰나정(刹那定)>에서 밝혀질 것이다.

 

3. 순관(純觀)과 찰나정(刹那定)

순관(純觀)을 닦기 위해서는 찰나정(刹那定)이라고 하는 선정이 근거가 되어야 한다. 순관과 찰나정과의 관계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청정도론(淸淨道論)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마음을 균등하게 둔다는 것은, 초선(初禪) 등에 의해 대상에 대하여 마음을 균등하게 둔다, 균등하게 머문다는 의미이다. 또는 그 여러 선정에 입정하고 출정하면서, 선정과 동반되어 있는 마음을 '멸하는 것', '사라지는 것'으로서 관찰하는 자에게, 관의 순간(刹那)에 (vipassanākhaṇe)[無常 등의] 특징(相)의 통달에 의해서, [刹那的으로만 존속하는 삼매인] 찰나의 심일경성(心一境性)이 생긴다. 이렇게 생긴 刹那의 심일경성에 의해서, 대상에 대하여 마음을 균등하게 둔다, 즉 균등하게 머문다."

 

여기서는 선정에 들어가고 나오는 마음의 상태가 생멸하는 것을 관찰하는 사람은, 관(觀)의 순간에 찰나정이 일어난다고 한다. 즉, 마음의 생멸하는 변화에 대해 관을 행할 때에 찰나정이 생기며, 이 찰나정에 의해 마음을 균등하게 둘 수 있다는 것이다. 찰나정에도 안지정이나 근행정과 마찬가지로 마음을 균등하게 지니게 하는 기능이 있고, 찰나정은 관수습을 행할 때, 생기는 선정임을 파악할 수 있다. 이처럼 관수습과 동반되는 선정은 찰나정임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찰나정이란 찰나적으로만 존속하는 마음집중이라고 淸淨道論의 주석서인 第一義寶函. Paramatthamañjūsā에서 설명하고 있다. 이 주석서에서 말하는 찰나정에 대한 설명을 좀더 살펴보자. 먼저, 찰나정에 대해 말하고 있는 淸淨道論과 그 주석을 본다.

 

어떤 경우에는, 觀에 의해서만 그 청정도(淸淨道)가 설해진다. 즉 '一切諸行은 無常이라고 지혜에 의해 관할 때, 苦를 싫어한다. 이것이 淸淨에의 道이다'(Dhp 277, Th 676)

 

觀에 의해서만(vipassanāmattavasen'eva)이라는 말은, 한정 강조사(eva)에 의해서 止(samatha)를 제외시킨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止)은 저것(觀)과 對槪念(paṭiyogī)이기 때문에, 戒 等은 해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남아 있는 것을 제외시킨다’는 의미를 지닌 ‘-만’(matta)이라는 말에 의하여, 남아 있는 것인 ‘정(定)’을 제외했던 것이다. 近行(定)과 安止(定)과는 구분되는 관행자(觀行者)에 대한 교설이라는 이유에서, ‘정(定)만’(samādhimattaṃ)이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찰나정이 없이는, 관(觀)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淸淨道論에서 말한 「觀에 의해서만(vipassanāmattavasen'eva)」라는 말에 대한 해석에서, 「-만(matta)」 이라는 말에 의해 제외되는 부분은, 戒와 定이지만, 定은 근행정(近行定)과 안지정(安止定)만이 제외되지, 찰나정은 제외되지 않는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찰나정이 없이는, 觀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며, 이점에서 보면, 관수습에는 반드시 찰나정이 동반된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이 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止行者(samathayānika)에게는, 近行定과 安止定이라는 定이 없이는, 또 한 편(觀行者 vipassanāyānika)에게는 찰나정이 없이는, 다시 (止行者와 觀行者) 양자에게 (無相․無願․空이라는三) 解脫門이 없이는 출세간(出世間)을 얻을 수 없다. 때문에 ‘三昧와 觀을 修習하여’ 라고 말한 것이다."

 

지행자의 경우는, 근행정과 안지정을 수습하여 마음을 집중시킨다. 그런 후에, 관수습에 의해 무상․고․무아의 세 가지 일반적인 특징을 관한다. 관행자의 경우는 찰나정을 수습하여, 마음의 집중을 얻어, 무상․고․무아의 세 가지 특징을 관한다. 양자는 모두 무상․고․무아에 대한 관찰에 의해서 획득되는 삼해탈문(三解脫門)을 통과해야 출세간의 道(magga)와 果(phala)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를 간단하게 도식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止行者》

近行定과 安止定 → 觀修習 → 三解脫門 → 出世間의 道와 果.

《觀行者》

刹那定 → 觀修習 → 三解脫門 → 出世間의 道와 果.

 

선행연구를 검토하는 곳에서, Cousins 교수는 刹那三昧(Khaṇika-samādhi)라는 용어가 붓다고사에 의해 자주 사용된 용어가 아니라는 점과 이 삼매가 위빠사나의 선행하는 단계로 제시된 것은 붓다고사에 의해서라는 점이라면서 찰나삼매가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이야기한다고 지적하였다. 과연 찰나삼매가 붓다고사에 의해서 제시되었다고 할 수 있는가 다른 주석문헌에 나타난 용례를 보면서 이러한 견해의 타당성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Cousins 교수는 찰나삼매라는 용어가 청정도론 이의 주석서에서는 상응부의 주석서에서 단 한번 등장한다고 하였다. 하지만, 실제로 CSCD Vol.3에서 khaṇika-samādhi(刹那三昧)와 이와 같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 khaṇika-samāpatti, khaṇika-cittekaggatā로 검색해본 결과, 이보다 많은 예를 발견할 수 있었다. khaṇika-samādhi는 청정도론과 그 주석서를 제외한 주석문헌 가운데 Cousins 교수가 이미 논문에서 지적한 Dhammasaṅgani 주석서에서 1번, 상응부 주석서에서 1번, 장로게 주석서에서 1번이 있고, 이외에 Mahānāma가 지은 Paṭisambhidāmagga 주석서에서 3번, Upasena가 지은 Mahāniddesa 주석서에서 2번 제시되었고, khaṇika-samāpatti는 장부의 주석서와 상응부 주석서에서 각각 2번이 제시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khaṇika-cittekaggatā는 Paṭisambhidāmagga 주석서와 율장 주석서에서 각각 2번제시되어 있다.

 

여기에서 위에 제시된 세 가지 용어에 대한 용례를 자세히 분석하는 작업은 생략하지만, Cousins 교수가 보고 있는 것처럼 찰나삼매라는 용어가 붓다고사의 창작물이라고 보려고 하는 견해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비록 이 용어들이 사용되는 빈도가 그다지 많다고는 할 수 없지만, 5부 니카야의 주석문헌과 율장, 논장의 주석문헌에서 등장하는 모든 예를 붓다고사에게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것보다는, 붓다고사 이전에 존재했던 주석문헌에서 이 용어들이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찰나삼매라는 개념은 팔리 삼장의 주석문헌을 작성한 상좌불교의 전통에서 성립한 용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마하시 계통의 수행법에서 주로 인용하고 있는 찰나삼매는 주로 청정도론과 그 주석서에 나오는 예이지만, 이는 붓다고사의 개인적인 입장이라기보다는 위에서 제시된 여러 주석문헌의 예와 같이 상좌불교 주석서의 전통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리라 생각한다.

 

4. 혜해탈과 순관

혜해탈은 주로 심해탈과 함께 사용되며, 초기불교 해탈론의 중요한 개념의 하나이다. 필자는 「淸淨道論.における刹那定と近行定 - SamathayānaとVipassanāyāna」(7-8쪽)에서 Sutta-nipāta 725에 나오는 心解脫(cetovimutti)과 慧解脫(paññāvimutti)에 대하여 그 주석서의 해석과 함께 자세히 다룬 적이 있다. 주석서의 설명을 다시 살펴보면서 지혜에 의한 해탈과 순관의 관계에 대하여 좀더 고찰해보고자 한다. 

 

이와 관련해서, 본론의 2. <아라한에 이르는 두 가지 길>에서 언급한 아라한과를 얻은 성인 가운데 혜해탈자에 대한 부분을 연관시켜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먼저 앞에서 언급한 내용이지만, 慧解脫者(paññāvimutto)에 대한 中部의 주석서에 대한 부분을 다시 들어본다. 

 

"慧解脫者(paññāvimutta)란 혜(慧)에 의한 解脫者이다. 그는 乾觀行者(sukkha-vipassaka)와 四禪(catu-jhāna)에서 출정(出定)해서 阿羅漢果를 얻은 네 부류가 있다. 따라서 이들에는 5 부류가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하여 팔리聖典은 八解脫(aṭṭha-vimokkha)을 거절함에 의해서 설명하고 있다. 그 설명은 다음과 같다. “八解脫을 몸으로 경험하지 않고 지낸다. 하지만 慧에 의해서 보면서, 그들에게는 모든 번뇌가 소멸되어 있다. 이것이 慧解脫人이라고 말한다.”

 

위의 주석에 따르면, 혜해탈자에는 5부류가 있는데, 먼저 건관(乾觀)에 의해 아라한과에 이른 혜해탈자와 초선에서 사선에 이르는 각 선정에서 아라한과를 얻은 혜해탈자의 4부류를 합해서 5부류가 된다. 아라한과를 얻은 성자 가운데 양분해탈자는 혜해탈자와는 달리 색계정, 사무량심(四無量心), 사무색계정(四無色界定)과 멸진정(滅盡定)을 내용으로 하는 팔해탈(八解脫, aṭṭha vimokkha)을 모두 거친 후에 지혜에 의해 모든 번뇌를 소멸시킨 아라한을 말한다. 

 

혜해탈을 얻은 아라한이 불타시대에 많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두 경전이 있다. 

 

먼저 많은 수의 아라한이 된 혜해탈 비구는 사선정과 무색계정(한역본) 또는 5신통과 무색계정(팔리경전)을 몸으로 경험하지 않고 모든 번뇌를 소멸한 아라한인 누진자(漏盡者)가 되었다는須深. Susīmo sutta이라는 경전이 있다. 특히 한역에서는 사선(四禪)을 얻지 않고 아라한이 되었다고 설해져 있고, 각주 34번에서 살펴본 팔리경전의 주석문헌에서도 이 경전에서 말하는 혜해탈자를 메마른 위빠사나 수행자로 해석한 것을 보면, 이러한 아라한들은 혜해탈자 가운데에서도 순관행자라고 해석했음을 알 수 있다.6)

6) 먼저 한역 경전은 雜阿含14, ?須深?(No. 347, T2, 96b25-98a12)이며, 해당되는 
   문맥은 아래와 같다.
   “爾時. 世尊知外道須深心之所念. 告諸比丘. 汝等當度彼外道須深. 令得出家. 時. 
   諸比丘願度須深. 出家已經半月. 有一比丘語須深言. 須深當知. 我等生死已盡. 梵行已立. 
   所作已作. 自知不受後有. 時. 彼須深語比丘言. 尊者. 云何. 學離欲. 惡不善法. 有覺有觀. 
   離生喜樂. 具足初禪. 不起諸漏. 心善解脫耶. 比丘答言. 不也. 須深. 復問. 云何. 離有覺
   有觀. 內淨一心. 無覺無觀. 定生喜樂. 具足第二禪. 不起諸漏. 心善解脫耶. 比丘答言. 
   不也. 須深. 復問. 云何. 尊者離喜捨心. 住正念正智. 身心受樂. 聖說及捨. 具足第三禪. 
   不起諸漏. 心善解脫耶. 答言. 不也. 須深. 復問. 云何. 尊者離苦息樂. 憂喜先斷. 不苦
   不樂捨. 淨念一心. 具足第四禪. 不起諸漏. 心善解脫耶. 答言. 不也. 須深. 復問. 若復
   寂靜解脫起色. 無色. 身作證具足. 不起諸漏. 心善解脫耶. 答言. 不也. 須深. 須深復問. 
   云何. 尊者所說不同. 前後相違. 云何不得禪定而復記說. 比丘答言. 我是慧解脫也.” (T2, 97a1-21)
   팔리 경전은 상응부의 인연품(Nidāna-vagga)의 Susīmo sutta(SN II, 119-128)에 같은 
   줄거리의 이야기가 등장하고 마지막으로 한역의 我是慧解脫에 해당하는 부분과 그 주석
   을 보면 아래와 같다.
   paññāvimuttā kho mayaṃ āvuso susīmāti(p.123, l. 26)
   이 부분을 주석서에서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벗이여, 실로 우리들은 혜해탈자들이다’라는 말은, 우리들은 선정수행을 하지 않은
   (nijjhānakā) 메마른 위빠사나 수행을 한 사람들이어서, 지혜에 의해서만 해탈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paññāvimuttā kho mayaṃ, āvusoti, āvuso, mayaṃ nijjhānakā 
   sukkhavipassakā paññāmatteneva vimuttāti dasseti [SN-a, II, 126-127].
   여기에서 ‘nijjhānakā’라는 용어의 해석에 대해서 Bhikkhu Bodhi(Connected Discourses 
   of the Buddha -A Translation of the Samyutta Nikaya, Boston: Wisdom Publications, 
   2000, p.785, n.210)는 ‘선정이 없다’(without jhāna)라는 해석보다는 ‘깊이 사유하다’
   (pondering)라고 해석하여, 四禪이 배제되지 않을 수 있는 해석의 가능성을 남겨 놓고 있다. 
   물론 수시마경과 그 주석서에서 혜해탈을 얻은 비구들이 四禪을 닦지 않았다는 말은 나오지 
   않지만, 적어도 주석서에서 언급하는 메마른 위빠사나 수행자는 사선을 닦지 않고 위빠사나
   를 닦는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nijjhānakā’라는 용어를 ‘선정 수행 없이’라고 해석하거나, 
   ‘깊이 사유하다’로 해석할 경우에는 사선정을 포함시키지 않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고 생각한
   다. 이러한 관점에서 수시마경의 팔리 전통과 설일체유부가 전해온 한역전통은 같은 해석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이 부분에 대한 조준호 박사의 다음의 논평문에 대한 해답도 제시되었다고 생각하며, 
   단순히 한역 잡아함을 인용하여 순수 위빠사나를 통한 혜해탈자의 가능성을 제시한 것은 아
   니라고 답변하고자 한다. 조준호 박사의 아래의 논평을 보고난 후에 상응부의 수시마경에 대
   한 주석서를 자세히 살피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조박사에게 고마움을 표시한다.
   “남방상좌불교의 주석적 설명에 경전적 권위를 획득하려 빠알리 경전이 아닌 이에 대응되는 
   한역 아함경이 이용되었다. 평자는 대응되는 빠알리 경전에는 나타나지 않고 유부 또는 유부
   의 분파에 소속된 잡아함에만 나타나는 이 내용은 부파적 첨가물이라 본다. 따라서 문헌 성립
   과 성격에 관한 고려가 논의되지 않은 채 이러한 시도를 통해 과연 초기불교 시대에 ‘4선을 
   전혀 닦지 않고 찰나정에 의지해서 觀行을 닦아 아라한이 된 순관행자’가 있었음을 그리고 
   현재의 마하시 수행법의 권위를 인정해주는 데는 그 설득력이 있느냐는 재고가 필요하지 않
   나 생각된다”(조준호 논평문).
   조 박사의 논평문에서 말하는 사선정이 배제된 혜해탈이 유부의 잡아함경에만 등장하므로 
   부파적인 첨가물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상응부 주석서도 당연히 부파적인 해석이라고 
   할 수 있는데, 팔리어로 전승된 남방상좌불교와 산스크리트 등으로 전승되어 한역된 설일체
   유부의 수시마경의 혜해탈에 대한 이해가 이처럼 일치하는 것은 결국 純觀 또는 乾觀을 통
   해서도 아라한에 이르는 길이 있음을 양대 부파에서 인정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예라
   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본고에서 다루지 못하였지만, 설일체유부의 논서에서도 초선에 이르
   기 전의 未至定의 상태(남방상좌부의 초선에의 근접정에 해당하는 선정 상태)에서도 성인의 
   길이 열린다고 주장한 부분은 많이 찾아볼 수 있다. 한 예로 ?阿毘達磨大毘婆沙論?에 “미
   지정에 의지하여 정성리생에 들어간다”(依未至定入正性離生, T27, 187b7-8)는 표현을 들 
   수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에 정리하고자 한다.
   남북 양대 부파의 전통에서 혜해탈의 아라한 가운데에는 純觀行者가 있음을 함께 주장하는 
   것은 초기불교에 대해 공유된 이해임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오백 명의 아라한 가운데 三明者․俱解脫者․慧解脫者의 숫자가 설해져 있는 한 경전(雜阿含 1212 自恣T.2, 330a-c, SN I, 190-2, pavāraṇā)이 있는데, 한역 雜阿含經에서는 三明者 90名, 俱解脫者 90名, 나머지는 320명은 모두 慧解脫라고 설해져 있고, 상응부에서는 500名 아라한 비구 가운데, 三明者, 六神通者, 俱解脫者가 각각 60名씩이고 나머지 320명은 慧解脫者라고 한다.

 

이처럼 혜해탈을 통해 아라한이 된 붓다의 제자가 붓다 시대에 많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들 가운데에는 한역잡아함경과 팔리 주석서에서 볼 수 있듯이 사선(四禪)을 전혀 닦지 않고 찰나정에 의지해서 觀行을 닦아 아라한이 된 순관행자도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순관행자란 (네 가지) 선정을 얻지 못한, 건관행자를 말한다. 이처럼 純觀에 의해 아라한과의 성취가 가능하다는 것을 초기경전과 그 주석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7)

7) 淸淨道論 주석서에서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선정을 얻지 못한 사람(無得定者)이 
   순수 관행자(純觀行者) 또는 메마른 관행자(乾觀行者)이다.” ajhānalābhi suddhavipassanāyāniko 
   sukhavipassako va. Vism-mhṭ II, 474.

 

순관(純觀)에 직접 관련이 있는 수행법으로 청정도론(淸淨道論)에서는 40가지 선정 주제 가운데 하나인 사계차별(四界差別)을 제시하고 있으며, 이 사계차별은 계작의(界作意), 계업처(界業處)라고 부르며, 界分別(dhātuppabheda)이라고도 한다.8)

8) 임승택박사의 논평에서 지적된 것처럼, 入出息念(anāpānasati)도 순수 위빠사나의 
   수행법으로 제시되기도 한다. 이는 열여섯 단계의 입출식념의 마지막 법념처와 연
   결된 네 가지 입출식념을 말하는데, 청정도론에서 다음과 같이 설해져 있다.
   ‘네 번째의 네 가지에서, 무상을 거듭 관하면서(aniccānupassi), … 이탐을 거듭 관
   하면서(virāgānupassi), … 소멸을 거듭 관하면서(nirodhānupassi), … 버림을 거듭 
   관하면서(paṭinissaggānupassi) 나는 숨을 들이마시고, 숨을 내쉴 것이라고 익힌다
   고 알아야 한다. … 이 네 번째의 네 가지는 다름 아닌 순수한 위빠사나에 의한 것이
   라고 설해져 있다. 하지만 앞의 세 가지(身, 受, 心과 관련된 세 가지 염처와 관련된 
   입출식념)는 사마타와 위빠사나에 의한 것이다.’
   aniccānupassī ti ... virāgānupassī ti ... nirodhānupassi ... paṭinissaggānupassī 
   assasissāmi passasissāmī ti sikkhatī ti veditabbo. ... idaṃ catutthacatukkaṃ 
   suddhavipasānā vasen' eva vuttaṃ. purimāni pana tīṇi samathavipassanā vasena. 
   evaṃ catunnaṃ catukkānaṃ vasena soḷasavatthukāya ānāpānasatiyā bhāvanā 
   veditabbā.(Vism 290-291)
   이처럼 입출식념과 연관된 법념처 즉, 無常, 離貪, 滅, 버림[捨]을 거듭 관찰하면서 
   입출식념을 닦는 것도 순수한 위빠사나라고 한다는 점을 ?청정도론?을 통해 확인
   할 수 있었다. 여기서 한두 가지 정리되어야 할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身, 受, 
   心과 관련된 세 가지 염처와 관련된 입출식념은 사마타와 위빠사나라고 한다면, 입
   출식념의 마지막 단계에서의 법념처가 어떤 의미에서 순수한 위빠사나인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마지막 단계의 법념처만을 닦을 수 있을 때, 순수한 위빠사나라
   고 하는 것인지, 처음부터 사마타와 위빠사나와 관련되어 있는 身, 受, 心과 관련된 
   세 가지 염처를 닦은 후, 법념처를 닦을 때에도 순수한 위빠사나라고 할 수 있는지 
   좀더 고찰해야 할 여지가 있다.

 

청정도론에서는 사계차별이란 수행도가 지행자뿐만 아니라 순관행자가 선택하는 수행도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純觀行者 또는, 이 止行者는 四界差別에서 설해져있는 각각의 界의 把握門에 의해 간략하게 또는 자세하게 四界를 把握한다."

 

지행자는 사계차별을 통해 초선의 근행정에 이를 수 있으며, 순관행자는 사계차별을 통해 처음부터 위빠사나 수행을 해 나갈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의 논의를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순관행자는 사계차별이라는 수행주제에 닦으며, 사선정이나 사무색계정이 아닌, 찰나정에 의지하여 관수행을 하는 자로 순관행을 통해서 혜해탈자라는 아라한과에 이른다.

 

Ⅲ. 결 론

 

초기불교 이래 기본적인 불교의 수행의 단계는 선정과 지혜 또는 사마타(止)와 위빠사나(觀)가 수레의 두 바퀴처럼 중요시 되어왔다. 있는 그대로 대상을 보고 안다(如實智見)는 의미의 지혜는 선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두 가지 수행법에 기초한 수행자의 부류에는 지행자(止行者)와 관행자(觀行者)가 있다. 

 

청정도론등의 팔리주석문헌에서 찾아볼 수 있는 선정에는 안지정(安止定), 근행정(近行定), 찰나정(刹那定)의 세 가지가 있으며, 근행정이나 안지정 등의 사선정에 근거하지 않는 순관(純觀)의 근거가 되는 선정은 찰나정이며, 반면에 안지정과 근행정을 닦은 후, 관수행을 통해서 아라한과에 이르는 이를 지행자라고 한다.

 

아라한과에 이른 성인(聖人)에는 양분해탈자(兩分解脫者)와 혜해탈자(慧解脫者)가 있다. 양분해탈자는 지행자 가운데 팔해탈을 닦은 후 지혜에 의해 아라한이 된 자를 말하고, 혜해탈자는 팔해탈을 통하지 않고, 찰나정이나 사선정을 의지해서 아라한이 된 자를 말한다. 이 때, 사선정을 닦아 아라한이 되었다면, 이는 지행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안지정과 근행정을 닦은 후, 관수행을 통해서 아라한과에 이르는 이를 지행자라고 하기 때문이다.

 

지행자가 아라한이 될 경우, 양분해탈자와 혜해탈자가 될 수 있으며, 관행자의 경우는 혜해탈자만이 될 수 있다. 

 

초기불전에서는 많은 수의 혜해탈 아라한이 등장하고, 이 가운데에는 순관행자(純觀行者)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순관에 의해 아라한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초기불전 및 상좌불교의 주석서를 통에서 밝혔다고 생각하며, 현재의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수행법 가운데 마하시 계통의 수행법은 『대념처경(大念處經)』과 『淸淨道論』을 문헌적인 자료로 하면서 사계차별(四界差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순관행(純觀行)임을 일러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