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 논문및 평론/교리 및 수행

아라한 개념의 발전과 전개/이필원

실론섬 2015. 4. 14. 16:12

아라한 개념의 발전과 전개

-심해탈과 혜해탈을 중심으로-

이필원

 

Ⅰ 들어가는 말. 

Ⅱ 심해탈과 혜해탈.

Ⅲ 맺음말.

 

<요약문> 

초기불교 경전에서 아라한은 수행자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단계를 의미한다. 그러나 문헌 성립을 고려해 보면, 아라한이란 표현은 최고층 문헌이후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는 아라한이 불교 외부로부터 차용된 개념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러나 일단 불교로 받아 들여진 아라한은 불교의 핵심개념 가운데 하나로 정착하게 된다. 본 논문은 아라한을 둘러싼 다양한 논의 가운데, 아라한의 최초 분화와 관련이 깊다고 생각되는 심해탈(Cetovimutti)과 혜해탈(Paññāvimutti)을 중심으로, 이들 개념이 각기 다른 수행법에 의지한 아라한을 의미하기 이전의 쓰임새를 규명한다. 이를 위해, 불교 문헌 가운데 최고층 문헌으로 알려진숟따니빠-따(Sn)의 847게송을 중심으로 그 내용을 분석하여, 심해탈과 혜해탈의 내용을 고찰하였다. 그리고 847게송의 내용을 뒷받침하기 위해, 이후의 운문 경전과 산문 경전의 내용을 분석, 심해탈과 혜해탈의 본래 의미가 해탈한 수행자의 심리 상태(심해탈)와 그에 대한 자각(혜해탈)임을 밝히고자 했다.

 

Ⅰ. 들어가는 말

 

아라한은 빠-리어 arahant(Sk. arhant)의 음사어이다. 이 아라한은 ‘가치 있다, 존경할 만하다’란 의미의 동사어근 √arh에서 파생한 명사이다. 따라서 아라한의 기본적 의미는 ‘존경할 만 한 자’란 의미로 파악할 수 있다. 아라한은 한역 문헌에서 다양하게 번역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應供, 應眞, 上人, 眞人’2)과 같은 말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1) 

1)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維祇難(A.D.224)은 ‘羅漢, 上人’, 法炬·法立
   (A.D.290∼306)은 ‘應真, 上人’, 白法祖(A.D.290∼306)는 ‘應真·阿羅漢’, 佛陀耶
   舍·竺佛念(A.D.413)은 ‘阿羅漢·眞人’, 그리고 僧伽提婆(A.D. 426)는 ‘阿羅訶’로 
   번역하고 있다. 이러한 번역어는 佛陀耶舍 竺佛念 이래, 즉 A.D.413년 이후에는 
   거의가 ‘阿羅漢’으로 통일되어 나타난다.

 

이 아라한은 초기 불교 텍스트에서는 불교 수행자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단계를 의미하며, 또한 붇다의 10대 명호 중 하나이자, 붇다 사후 불교 교단의 실질적 지도자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승단의 리더를 나타낸다. 아울러, 이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또 하나의 의미로는 출가자에게만 이 단어의 사용이 허락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2)

2) 부파불교시대에는 부파간에 재가아라한의 존재 여부를 놓고 치열하게 논쟁하고 
   있음을 Kv나 Mil와 같은 문헌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아라한이란 용어가 언제부터 불교 내에서 활발하게 사 용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확정할 수 없다. 다만 불교 문헌 성립(주1)을 염두에 두고 본다면, 최고층 경전 이후부터 사용되어 졌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아라한이란 용어가 불교 내에서 자생한 것이라기보다는 외부로부터 차용되었을 가능성이 높음을 암시하는 것으로도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다(주2).

(주1)논자는 불교 문헌 성립 문제에 있어서, 荒牧典俊(1982:3)와 並川孝儀(2005:10)의 
   견해에 따른다. 이들에 따르면 불교 문헌은 크게 3층으로 나눌 수 있다고 한다. 제1층은 
  『숟따니빠-따』가운데 제4장과 제5장이 해당되며, 제2층은『상윳따 니카야』의 제1장
   인 Devatāsaṃyutta와 제4장인 Mārasaṃyutta, 그리고『담마빠다』의 Taṇhāvagga와 
   Brāhmaṇavagga이며, 제3층은 Theragāthā와 Therīgāthā가 해당된다고 한다. 물론, 이
   러한 구분에 반대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서는 영국의 R. Gombrich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제7차 세계 산스크리트 대회의 내용을 정
   리한 Schmithausen의 글을 참조하면 좋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또한 이에 대한 내용을 
   알기 쉽게 정리한 것으로는 Bronkhorst(1993 : vii-viii)를 들 수 있고, de Jong의 글을 
   통해서도 그 전체적인 내용을 알 수 있다. de Jong의 글은 강종원(2004 : 222-229)의 
   번역을 보라.
(주2) 이 부분에 대해서는 본 논문의 목적과 관련이 없으므로, 자세한 언급은 피하도록 한다. 
   하지만, 아라한의 어원적 의미의 분석 및 아라한의 용어를 둘러싼 불교와 그 이외의 제 
   종교와의 관계는 면밀히 검토되어질 필요가 있다. 특히 자이나(Jaina)와 아-지-위까
   (Ājīvika)의 용례는 아라한의 의미와 쓰임을 밝히는데 매우 중요하다. 이에 대한 대략적인 
   내용은 Basham(1951)과 Bronkhorst(1993)를 참조하면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아라한이란 용어가 불교 외부에서 들어왔다고 하더라도 아라한이 갖는 불교 내적 중요성이 손상을 입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부파불교 시대까지, 즉 대승불교가 일어난 후에도 아라한은 불교의 핵심 용어 가운데 하나이자, 오랜 기간에 걸쳐 논의의 중심에 놓여 있었던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본 논문은 아라한을 둘러싸고 행해졌던 다양한 논의 가운데에서 특히 ‘심해탈(cetovimutti)과 혜해탈(paññāvimutti)’을 중심으로 고찰하고자 한다3). 이들 두 개념은 초기 경전에서 두 종류의 아라한을 나타내는 술어로써 빈번히 사용되고 있는 술어이다. 본 논문은 이들 두 용어가 각기 서로 다른 수행법에 의지한 아라한을 가리키기 이전의 의미/쓰임새를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3) 초기경전을 보면, 심해탈은 사마타수행에 의해서, 혜해탈은 위빠싸나 수행에 의해서 
   아라한이 된 수행자를 의미한다. 또한 이 두 수행그룹은 갈등관계를 형성하고 있었
   음이 확인된다. 아라한과 수행론과의 관계는 다른 논문에서 다루고자 한다.

 

Ⅱ. 심해탈과 혜해탈

 

서두에서도 언급했듯이, 심해탈과 혜해탈은 아라한의 경지를 나타내는 여러 가지 표현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들 복합어는 각각 ‘마음의 해탈(cetaso vimutti)’과 ‘지혜에 의한 해탈(paññāya vimutti)’로 분석된다(주1). 전자는 ‘이미 해탈된 마음을 지닌 자’를 의미하며, 후자는 ‘지혜를 수단으로 해서 해탈의 상태에 도달한 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이해가 가능하다고 한다면, 전자는 ‘모든 번뇌로부터 해방된 심리적 상태’를, 후자는 ‘지혜를 강조한 이지적 측면이 강조된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우선은 이해해 둘 수 있을 것이다.

(주1) 즉 전자는 6격 tatpuruṣa, 후자는 3격 tatpuruṣa이다. 그러나 이들 복합어가 반드시 
   6격과 3격의 tatpuruṣa로만 분석(vigraha)되는 것은 아니다. 심해탈과 혜해탈의 다양한 
   복합어의 해석 가능성을 검토한 학자로는 일본의 渡辺文麿(1982)를 들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심해탈은 6격외에도 3격을 통한 해석도 가능한 용례가 확인된다고 한다. 즉 
   ‘마음에 의한 해탈’로 해석되는 것이 그것이다. 이렇게 해석될 때의 ‘마음’이 가리키는 
   것은 6격일 때의 의미와는 사뭇 다른 내용을 갖는다. 즉 3격의 마음은 ‘정려/선정’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 해석은 명백히 후대의 해석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삼학의 체계를 
   설명하는 방식-증상계학, 증상심학, 증상혜학-에서도 확인된다. ‘마음’이 ‘정려’와 등
   식관계로 파악된 것은 최고층 및 고층의 문헌에서는 확인되지 않는 쓰임새이다. 따라
   서 心(ceto)=jhāna의 구조로 파악되는 심해탈은 명백히 ‘수행론’의 차이를 암시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즉 이 경우의 심해탈은 ‘정려수행’에 의한 해탈을 의미하며, 혜해탈
   은 ‘위빠사나’에 의한 해탈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본 논문은 ‘수행론’의 차이
   를 일으키기 이전의 심해탈과 혜해탈을 대상으로 하기에, 여기에서는 3격의 쓰임새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는 것으로 한다.

 

그런데 cetovimutti를 cetasā vimutti(마음에 의한 해탈)로 이해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럴 경우, ceto가 의미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이해하는 ‘마음’으로는 해석할 수 없다. 이 복합어 해석은 ‘마음’을 수단으로 해탈에 이르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해는 삼학의 체계와 정려를 의미하는 단어의 쓰임새와 관련되어 있음이 이미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밝혀졌다. 간단히 말하면, 이때의 마음은 ‘정려’혹은 ‘선정’과 동일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선이해를 바탕으로, 먼저 심혜탈과 혜해탈에 관한 가장 오래된 내용을 전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숟따니빠-따』(Suttanipāta, 이하 Sn)에 나오는 saññāviratta의 의미와 paññāvimutta의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자.

1. Sn.847게송에 나타난 saññāviratta와 paññāvimutta의 내용

saññāviratta는 후기 주석서에 의하면, cetovimutti로써 해석되고 있다.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서 논자가 따르는 텍스트의 성립 순서에 비추어 본다면, saññāviratta는 cetovimutti의 가장 오래된 형태로 간주될 수 있다. 먼저 이 개념이 등장하는 Sn.847의 내용을 인용해 보자.

 

saññāvirattassa na santi ganthā paññāvimuttassa na santi mohā. (Sn. 847ab)
생각을 떠난 자에게는 여러 속박이 없다. 지혜에 의해 해탈한 자에게는 헤맴(무지)이 없다.
4) (Pj.II(p. 547)는 “생각(想)의 떠남을 먼저 닦는 자에게는, 욕망 등의 생각을 떠난 
   자에게는 [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에 의해서 구해탈자(倶解脱者, ubhatobhāgavimutto)이고, 
   止(samatha)에 숙달한 자이다[라고], 이해된다.(saññāvirattassa ti 
   nekkhammasaññāpubbaṅgamāya bhāvanāya pahīṇakāmādisaññassa, iminā ubhatobhāgavimutto 
   samathayāniko ca adhippeto)”라고 주석하고 있다. 이 해석에 의하면 saññāviratta는 
   구해탈자이다. saññā에는 여러 의미가 있으나(PTSD, sv., saññā) 가장 기본적인 의미인 
   ‘생각’이란 의미를 취해 번역해 보았다. 이 번역어가 적절한지는 이후의 논의를 통해 
   자연스럽게 해명될 수 있을 것이다.

위의 인용문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saññāviratta를 cetovimutti의 고형태로 볼 수 있느냐는 문제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saññāviratta가 나오는 용례는 Sn.847이외에는 전혀 나오고 있지 않다. 따라서 안타깝게도 다른 용례의 쓰임새을 참조할 수가 없다. 그러면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 것인가. 우선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saññā의 의미를 확정하는 것일것이다.

saññā는 매우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단어이다. 아마도 dhamma와 비견될 만큼 그 의미를 확정하기 어려운 단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 saññā에 대해서는 요한슨(Johansson)의 견해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5) 그러나 요한슨의 견해를 제시하기 전에, 우선 최고층이라 불리는 Sn의 제4장과 제5장에 나오는 saññā의 용례를 검토해 보고 난 후, 그 내용을 선학들의 해석과 비교하여 의미를 확정하고자 한다.
5) Johansson(1985)은 자신의 저서 The Dynamic Psychology of Early Buddhism
   (p. 92ff)에서 니까-야에 나타나 있는 쓰임새를 면밀히 검토하고 있다. 또한 
   Schmithausen(1981)도 요한슨의 견해를 바탕으로 자신의 해석을 덧붙이고 있다.

 

(a) [여러 가지] 생각을 생각하는 자도 없고, 잘못된 생각을 생각하는 자도 없고, 생각하지 않는 자도 없고, 소멸된 생각을 지닌 자도 없다. 이렇게 아는 자에게는 물질적 존재(rūpa)가 소멸한다. 왜냐하면, 허망분별의 나타남은 생각에 의하기 때문이다. (Sn.874)
6) na saññasaññī na visaññasaññī no pi asaññī na vibhūtasaññī evaṃ sametassa 
   vibhoti rūpaṃ saññanidānā hi papañcasaṃkhā. papañcasaṃkhā의 구체적인 내
   용을 엿볼 수 있는 게송으로서는, Sn.916을 들 수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현
   자는 ‘나는 존재한다’라는 허망분별의 뿌리를 모두 뽑아버려라”(mūlaṃ papañcasaṃkhāyā 
   ti bhagavā mantā asmī ti sabbam uparundahe. Sn.916ab) 이 게송에 의하면, 
   papañcasaṃkhā의 의미는 ‘나는 존재한다’라는 유신견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 좋
   을 것이다. 따라서 874게송의 rūpa는 구체적으로 ‘육체’를 의미한다고 이해할 수 있
   다. 並川孝儀(2005:162)는 rūpa를 ‘구체적 존재’, ‘물질적 존재’로 번역하고 있다. 
   또 papañcasaṃkhā을 ‘허망하게 구별을 세워 대상을 파악,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라고 번역하고 있다. 한편 Norman(1984:145)은 ‘diversification’이라고 번역하고, 
   中村元(2002:192)는 ‘ひろがりの意識’라고 번역하고 있다. 또 Norman은 saññā를 
   ‘perception’으로 옮기고 있다.

 

(b) 이 세상에서, [잘못된] 생각에서 [생겨난 오해를] 제외하고, 많은 다양한 영원한 진리는 없다.
na h' eva saccāni bahūni nānā aññatra saññāya niccāni loke (Sn.886ab)

(c) 가장 뛰어난 생각의 해탈에서 해탈된 자, 그는 거기에서 돌아옴이 없이 머물 수 있다.
saññāvimokhe parame vimutto tiṭṭheyya so tattha anānuyāyī (Sn.1072cd)

(d) 밖으로 소멸된 물질적 존재의 생각을 지닌 자의, 그리고 안으로 일체의 몸을 버린 자의 해탈적 지혜를, 석가족의 분이시여, 저는 묻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어떻게 이끌려져야 합니까?
vibhūtarūpasaññissa sabbakāyapahayino ajjhattañ ca bahiddha ca n'atthi kiñci ti passato ñāṇaṃ 
sakkānupucchami kathaṃ neyyo tathāvidho (Sn.1113)

이상의 용례가 최고층인 제4장과 제5장에서 볼 수 있는 saññā의 쓰임새이다. 번역어로서는 일단 통일하여 ‘생각’이라는 단어를 선택했다. 그러나 이들 용례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단순하게 사용하는 ‘생각’과는 차이가 있다. 이러한 용례들에서 생각(saññā)이란 한결같이 초월되어져야 할 것, 부정되어져야 할 것으로 사용되고 있다.

네 가지 용례에서, (a)와 (d)는 일단 같은 의미로 파악된다. (a)의 경우 ‘다양한 생각을 하지 않는 자’에게는 ‘물질적 존재rūpa’가 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고 (d)는 ‘물질적 존재에 대해서 생각이 소멸된 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한편, (b)의 경우는 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하는 ‘다양하고 영원한 진리’는 결국 ‘잘못된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따라서 (a), (b), (d)의 세 용례는 ‘개념/관념 작용’, 다른 말로 ‘이미지화(imagination)’라는 측면에서 saññā가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c)의 경우는 세 용례의 의미로 해석되지 않는다. 여기에서의 saññā는 ‘개념/관념 작용’이 아닌, 보다 초월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즉 일상적인 의식이 아닌, 선정단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c)의 경우는 나머지 셋의 용례와는 그 쓰임새가 전혀 다름을 알 수 있으므로, saññā의 의미를 한정하는데 있어서는 일단 배제하고자 한다.

그럼 최고층의 쓰임새를 염두에 두고, saññā에 대한 Johansson(1985:93)의 견해를 살펴보도록 하자. 그 내용을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예를 들면, 우선 색맹이 아니면 파란 색의 대상을 볼 수 있다. 두 번째는 눈을 감아도 파란 색을 상상할 수 있다. 세 번째는 파란 색을 구체적으로 자각하지 않아도, 즉 파란 것을 보지 않아도, ‘파란 색’ 자체를 생각할 수 있다. saññā는 앞의 두 가지를 의미한다. 영어의 perception은 최초의 경험만을 의미한다. idea는 두 번째와 세 번째를 의미한다. 이 책에서 ‘ideation’은 saññā와 동일한 의미이다. saññā와 ideation은 무엇인가가 존재해서, 구체적인 경험을 의미하거나, 무엇인가 구체적으로 상상되거나 기억된 경험을 의미한다.7) (밑줄은 필자)
7) Schmithausen(1981 : 215. note 51)은 ‘관념작용ideation’이란 번역어를 제안하고 
   있다. 그는 pp. 214~215의 각주 51에서 saññā의 의미에 대해서 상세히 논하고 있
   다. 그는 자신의 번역어가 Johansson(1985: 92-95)의 견해를 따른 것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Schmithausen은 보다 구체적으로 그 의미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다. 
   “saṃjñā/saññā는 ① ‘언제나 대상에 대한 명확한 인식, 혹은 통각, 즉 그 대상의 
   독특한 특성을 정신적으로 이미지의 형태로 표현하거나 이미지화하는, 혹은 취하는 
   측면을 포함하고 있다. ② 개념과 포괄적 개념을 형성하거나 적용하는 측면을 포함
   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Katz(1982 : 75)는 ‘관념(idea)’ 혹은 ‘개념(notion)’이란 
   역어를 제안하고 있다. 그의 역어는 두 사람과 의미상 동일하다고 생각된다.

 

즉 직접 대상을 지각하는 것만이 아니라, 상상과 기억에 의해서 경험하는 것 까지 포함하는 개념으로 saññā를 해석하고 있다. 이 견해를 충실히 따른다고 하면, 우리는 우선 saññā의 의미를 ‘대상에 대한 직접 지각과 이미지화 작용을 포함하는 개념’으로서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각, 혹은 개념/관념 작용을 떠났다(saññāviratta)고 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는 여전히 문제이다. 앞에서 이것을 심해탈자를 의미하는 가장 오래된 예로 들었는데, 과연 그것은 타당한 것일까.

우선 예의 847게송의 ‘생각을 떠난 자에게는 여러 속박이 없다. 지혜에 의해 해탈한 자에게는 헤맴(무지)이 없다’라는 것만을 가지고,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a) 생각을 떠난 자 → 속박이 없다
(b) 지혜에 의해 해탈한 자 → 헤맴이 없다

이것을 보면, ‘생각’이란 것은 ‘속박’의 원인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속박’이 경전속에서 어떠한 맥락에서 쓰이고 있는지를 조사해 본다면, 그것을 통해서 ‘생각’이 의미하는 바를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속박’이 나오는 용례를 제시하면 아래와 같다.

어떤 것에 의거해서 다른 것은 열등한 것이라고 보는 것은 속박이라고 진리에 도달한 사람들은 말한다. 그 때문에 본 것이든, 들은 것이든, 사고한 것이든, 계율이나 금욕이든, 비구는 [그것들을] 의지처로 해서는 안 된다.
taṃ vāpi ganthaṃ kusalā vadanti yaṃ nissito passati hīnam aññaṃ tasmā hi diṭṭhaṃ va sutaṃ 
mutaṃ vā sīlabbataṃ bhikkhu na nissayeyya (Sn.798)

세간을 잘 알아, 최고의 진리를 보고, 격류와 바다를 건너, 속박을 끊고, 어떠한 것에도 의지하지 않고, 유루가 없는 그러한 사람, 그를 현자들은 침묵의 성자라고 안다.
aññāya lokaṃ paramatthadassiṃ oghaṃ samuddaṃ atitariya tādim taṃ chinna-ganthaṃ asitaṃ 
anāsavaṃ taṃ vāpi dhīrā muniṃ vedayanti. (Sn.219)

세상에서 속박은 어리석음에의 길이며, 무지의 벗이며, 의심의 의지처이다.
ye keci ganthā idha mohamaggā aññāṇapakkhā vicikicchaṭhānā. (Sn.347ab) 

이상이 Sn에서 보이는 ‘속박’의 용례이다. 그러나 최고층에 속하는 제4장과 제5장의 용례는 인용에서와 같이 798게송밖에 없다. 798게송의 경우, 만(Māna)의 한 가지를 속박의 예로 들고 있는 듯하다. 나중에 이 만은 근본 번뇌의 한 가지이자, 오상분결(五 上分結)의 한 가지로 분류된다. 또 347게송에는 어리석음, 무지, 의심의 원인으로서 ‘속박’을 들고 있다. 이것에 의하면, 219게송의 ‘속박을 끊고’라는 것은 ‘번뇌를 끊고’라는 것으로서 이해할 수 있 을 것이다. 

 

다음으로, SN의 용례를 살펴보자. 

 

교만을 버린 자에게 속박은 존재하지 않는다.
pahīnamānassa na santi ganthā //SN I, p. 14.(Satti-vagga)

일체의 속박을 끊고, 해탈한 당신에게는 바른 자각이 있다.
sabbaganthapahīnassa // vippamuttassa te sato //SN I, p. 206(Yakkha-saṃyuttaṃ)

세존은 열반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일체의 속박으로부터의 해탈을
nibbānaṃ Bhagavā āhu// sabbaganthappamocanaṃ //SN I, p. 210(Yakkaha-saṃyuttaṃ)

비구들이여, 나에 의해서 네 가지의 속박이 [설해졌다]. 네 가지란 무엇인가. 무명은 신체의 속박이다. 성냄은 신체의 속박이다. 계금취는 신체의 속박이다. 이 경향이 신체의 속박이다.
(cattāro me bhikkhave ganthā // katame cattāro // // Abhijjhā kāyagantho // byāpādo kāyagantho // 
sīlabbataparāmāso kāyagantho // idaṃ saccābhiniveso kāyagantho //SN V, p. 59(Magga-saṃyuttaṃ)

 

이 용례들에 의해서, ‘속박’은 해탈을 방해하는 원인이자, 끊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앞서, saññā를 개념/관념 작용, 혹은 이미지화라는 의미로 파악될 수 있음을 보았다. Sn.847 게송의 ‘생각을 떠난 자에게는 다양한 속박이 없다’의 ‘생각’의 내용을 유추하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 측면이 모두 고려되어야만 할 것이다. 따라서 847게송의 ‘생각’은 게송의 맥락을 중심으로 생각해 보면, ‘잘못된 견해나 정의적 번뇌를 포함한 생각’이란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어서 같은 게송의 “지혜에 의해서 해탈한 자에게는 헤맴(무지)이 없다”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지혜에 의해서’이다. 즉 구체적으로 ‘지혜’란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세존은 답하셨다. 이 세상에서 다양한 번뇌의 흐름, 그것을 방지하는 것은 바른 자각이다. 나는 번뇌의 흐름의 제어를 설한다. 이들 (번뇌의 흐름)은 지혜에 의해서 그칠 것이다.

yāni sotāni lokasmiṃ, Ajitā ti Bhagavā sati tesaṃ nivāraṇaṃ sotānaṃ saṃvaraṃ brūmi paññāy' ete 

pithiyyare. (Sn.1035)

 

위의 게송은 바른 자각(sati)에 의해서, 번뇌의 흐름(sotāni)이 제어된다고 하면서, 나아가 번뇌의 흐름은 지혜(paññā)에 의해서 멈춘다고 하고 있다. 이것을 종합해 보면, paññā와 sati는 동일하게 번뇌의 흐름을 제어/방지하는 기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용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성자가 설하신 가르침을 기뻐하는 사람들, 그들은 말, 마음, 행위에 관해서 최상이다. 그들은 평온과 온화와 삼매(정신집중)에 의해서 확립하고, 학식과 지혜의 핵심에 도달했다.

dhamme ca ye ariyapavedite ratā anuttarā te vacasā manasā kammanā ca te santi-soracca-

samādhisaṇṭhitā sutassa paññāya ca sāraṃ ajjhagū(Sn.330) 

 

나의 바른 자각과 지혜와 삼매는 더욱 확고하게 된다.

bhiyyo sati ca paññā ca samādhi mama tiṭṭhati. (Sn.434ef) 

 

이상의 두 가지 예는 지혜를 삼매(samādhi)와의 깊은 관련 속 에서 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30게송에서는 지혜의 핵심에 도 달하는 전제로서 삼매가 설해져 있고, 434게송의 경우는 바른 자 각, 삼매와 함께 지혜를 들고 있어, 이 세 가지는 깊은 관련을 갖 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상을 종합해 보면, 최고층 문헌에서 ‘지혜(paññā)’는 ‘바른 자 각(sati)’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으며, 직접적인 관계는 인정할 수 없다고 해도, 최소한 바른 자각과 삼매는 서로 깊은 관계 속에 서 이해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8)

8) 최고층 이외의 니까-야에 나타난 지혜(paññā)의 용례는 참고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니까-야에서 paññā는 지혜보다 식별적 통찰의 의미로서 널리 설해져 있어 최고층 
   문헌에서 나오는 paññā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적절치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
   이다. 즉 Vetter(1988 : 35, note 2)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paññā를 이와 같
   이(discriminating insight) 번역한 것은 영원한 것과 무상한 것, 고통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자아와 자아가 아닌 것을 식별하는 능력과 정신적 과정을 가리키고자 하기 
   때문이다. paññā는 보다 간단한 구별, 예를 들면 AN9.1.5와 같이, kusala와 akusala, 
   sāvajja와 anavajja에 관해서도 채택된다. … Sn881과 같은 구절에서, 그것은 지혜
   라고 하는 비교적 일반적 의미를 갖는다. (Aṭṭhakavagga전체에서는 여기에서 식별
   적 통찰이라고 묘사한 것과 상응하는 것은 발견되지 않는다.”

 

이상, Sn.847게송의 ‘saññāviratta’와 ‘paññāvimutta’에 관해서 고찰해 보았다. 그 결과, ‘saññāviratta’는 ‘다양한 번뇌로부터 떠났다’라고 이해할 수 있고, ‘paññāvimutta’의 paññā는 sati와 samādhi와의 깊은 관계를 갖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Sn.847게송과 매우 흡사한 AN의 경문을 소개하고, 이 두 가지의 내용을 비교해 보도록 한다.

 

비구들이여, 탐욕에 의해서 더럽혀진 마음은 해탈되지 않는다. 혹은 무명에 의해 더럽혀진 지혜는 닦여지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들 탐욕 등으로부터 멀리 떠남이 마음의 해탈(心解脫)이고, 무명 등으로부터 멀리 떠남이 지혜에 의한 해탈(慧解脫)이다.

rāgupakkiliṭṭhaṃ vā bhikkhave cittaṃ na vimuccati avijjupakkiliṭṭhā vā paññā na bhāvīyati. imā kho 

bhikkhave rāgavirāgā cetovimutti avijjāvirāgā paññāvimuttī ti. (AN. I, p. 61)

 

위의 내용은 앞에서 살펴 본 Sn.847의 ‘saññāviratta와 paññāvimutta’의 내용과 정확히 일치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최고층 문헌의 쓰임새가 이후의 문헌에서도 계속해서 사용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상 고찰한 것으로부터 ‘saññāviratta’는 ‘心解脱’을 나타내는 가장 오래된 용례로서 간주할 수 있음을 살펴보았다.

 

2. cetovimutti에 대해서

 

cetovimutti의 가장 오래된 형태가 saññāviratta임을 확인했기에, 이제는 니까-야와 아함에서 cetovimutti가 어떻게 설해지고 있는지 고찰해 보고자 한다. 그러나 니까-야, 아함의 기술을 보면 cetovimutti가 단독으로 나오는 용례는 적고, paññāvimutti와 함께 설해져 있는 경우가 특히 많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cetovimutti만의 용례를 찾아, 그 의미를 추적하여, cetovimutti의 구체적인 의미를 파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따라서 paññāvimutti와 함께 설해져 있는 용례는 배제한다.

 

앞에서 보았듯이, 심해탈은 ‘다양한 번뇌로부터 떠났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즉 무루가 곧 심해탈의 특징인 것이다. 이 무루를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갖은 번뇌에 의해 마음이 물들지 않고, 고요하고 평정한 상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의미에서 보면, 우뻭카-(upekkhā)를 심해탈의 내용으로서 생각해 보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우뻭카-의 용례를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Sn의 제 4장과 제 5장에 설해져 있는 우뻭카-에 대해서 간단히 용례를 살펴보도록 한다.

 

평정을 얻고자 집중에 든 자는, 의심의 경향과 후회를 끊으시오.

upekham ārabbha samāhitatto takkāsayaṃ kukkuciy’ ūpacchinde (Sn.972cd)

 

이 용례를 보면, 삼매의 목적은 ‘upekkhā’를 얻는 것이 된다. 또, 삼매에 들어 의심과 후회와 같은 번뇌를 끊음으로써 ‘upekkhā’는 실현한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용례를 보자.

 

진리에 대한 사색을 선행으로 하는 평정과 바른 자각에 의한 청정이 해탈적 지혜에 의한 해탈이고, 무명의 파괴라고 나는 설합니다.
upekkhāsatisaṃsuddhaṃ dhammatakkapurejavaṃ aññāvimokhaṃ pabrūmi avijjāya pabhedanaṃ. 
(Sn.1107)
9) 이것과 관련해서 Vetter(1988 : xxvi, no.9)의 해석은 매우 유익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그 내용을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upekkhāsati-pārisuddhi라고 하는 빠-리어의 복합어를 해석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그
   것은 upekkhā-pārisuddhi와 sati-pārisuddhi로 분석된다. 평정과 자각은 제 3정려에서 
   순서대로 언급되고, 이 단계에서 두 가지 모두 완전한 상태가 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
   이다. Vissuddhimagga 제 4장(p. 136)에, 이 복합어는 ‘평정에서 발생한 자각의 완전함’
   으로서 설명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이 상태에서 평정의 완전함을 결코 배제하지 않는
   다. Pārāyana(Sn1107)의 upekkhā-sati-saṃsuddha라는 복합어도 이것과 관련해서 언
   급해야만 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필자 역시 페터의 해석이 보다 합리적이고 타당하다고 판단, 그의 해석 방식을 따른다. 
   또 이 게송은 제 4정려의 특징을 명확히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후대의 설명 방
   식에 의하면 제 4정려에서 사제가 관찰된다고 하지만, 이 게송을 보면, ‘진리(법)에 대한 
   사색을 선행으로 하는 평정과 바른 자각에 의한 청정’이 되어 있고, 적어도 제 4정려의 
   단계에서는 어떠한 사색도 없는 상태임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덧붙여서, 中村元(2002:234)는 “平静心がまえと念いの清らかさーそれらは真理に関す
   る思索にもとづいて起 るものであるが’라고 옮기고, 荒牧典俊(1986:365)는 ‘根本の無
   知を打破して真理を直接に知ることによって解脱して自由になるこ ととは, まずはじめ
   にさまざまな真理について哲学的に思惟することがあって ···”로 번역하고 있다. 둘 다
   upekkhā-sati-saṃsuddha는 진리에 관한 사색 이후에 일어나는 상태로서 이해하고 있
   는 듯 하다.

 

이 게송은 평정과 바른 자각에 의한 청정이 해탈적 지혜의 내용이고, 해탈은 그것에 의한 것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즉 우뻭카-가 해탈의 중요한 내용임을 나타내고 있다.

 

이 두 용례는 우뻭카-를 무루라는 용어를 직접 사용하여 표현하고 있지 않지만, 무루를 의미하는 내용을 충분히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 외의 용례는 더 이상 발견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니까-야와 아함에서도 우뻭카-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단지, 제 4정려의 불고불락(不苦不楽, adukkhaṃasukhaṃ)을 우뻭카-의 의미로 설하고 있을 뿐이다. 또 四無量心 가운데 捨無量心을 심해탈의 하나로서 설하고 있다. 

 

그러면 심해탈을 설하고 있는 내용을 조사해 보도록 하자. AN II, p. 16431)에는 다음과 같은 표현이 있다.10)

10) 이 경전의 내용은 현재 세상에는 네 부류의 사람이 있고, 그들은 존재하는 신체의 
    소멸을 작의하면서, 그것을 기뻐하는 것 없이, 만족하는 것 없이, 머무는 것 없이, 
    놓아버림 없이 적정의 심해탈을 구족해 머무는 사람과, 존재하는 신체의 소멸을 
    작의하면서, 그것을 기뻐하고, 만족하고, 머물고, 놓아버리고, 적정의 심해탈을 구
    족해 머무는 사람의 두 종류의 인간과, 무명의 파괴를 작의하면서 그것을 기뻐하
    지 않고, 만족하지 않고, 머물지 않고, 놓아버리지 않고 적정의 심해탈을 구족해 
    머무는 사람과 무명의 파괴를 작의하면서 그것을 기뻐하고 만족하고, 머물고 놓
    아버리고, 적정의 심해탈을 구족해 머무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 그래서 합계 
    4종류의 사람이 있음을 설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여기에 어떤 비구는 寂靜의 심해탈을 구족하고 머문다.

idha bhikkhave bhikkhu aññataraṃ santaṃ cetovimuttiṃ upasampajja viharati.

 

여기에서는 심해탈을 적정이라는 말을 사용해 기술하고 있다.

 

나의 심해탈은 부동이고, 이것이 최후의 태어남이고, 이제 재생은 없다.

akuppā me cetovimutti ayaṃ antimā jāti n' atthi dāni punabbhavo ti. (SN.III, p. 28)

 

이 용례는 붇다의 초전법륜을 전하는 빠-리 율장과 MN의 Ariyapariyesanasutta에도 나오고 있다.

SN의 용례33)는 오취온(五取蘊, pañcannam upādānakkhandhānam)을 있는 그대로 

(yathābhūtam) 인식한 후, 부동의 심해탈이 설해지고 있다.

 

또 니까-야에서는 특히 사무량심을 설할 때 심해탈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34) 사무량심이란 자비희사를 말하는 것으로, 정려 수행의 한 가지이기도 하다. MN.I, Mahāvedallasutta라든가 SN.V, Bojjhaṅgasaṃyuttaṃ에서는 사색정(四色定)과 사무색정(四無色定)으로써 사무량심을 닦는다고 설하고 있다. 그러나 사무량심의 심해탈에는 ‘무루(無漏)’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지 않다. 따라서 최고층 문헌의 ‘속박이 없다’와 같은 내용은 설해져 있지 않다. 오히려 심해탈을 불환과로서 설하고 있는 경우가 보이기 까지 한다. 그러나 다음의 용례는 최고층에서 볼 수 있는 우카-의 의미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실로 벗이여, 탐욕의 이 벗어남(출리), 이것이 평정의 심해탈이다.

nissaraṇaṃ hetaṃ āvuso rāgassa yad idaṃ upekhā cetovimutti (DN III, p. 249)

 

이 용례에서는 탐욕으로부터의 벗어남, 즉 무루의 상태가 곧 평정의 심해탈임을 나타내주고 있다. 이러한 예들을 통해서, 우-에 대한 니까-야의 내용은 그 용례가 적을 뿐, 최고층의 의미를 완전히 배제하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아함에서는 심해탈의 용례를 많이 볼 수 있으며, 나아가 ‘모든 漏(루)를 멸한 심해탈’를 설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중 에서도,『中阿含経』「尼乾經」第九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彼便知此苦如真. 知此苦習.知此苦滅.知此苦滅道如真. 亦知此漏如真. 知此漏習.知此漏滅.

知此漏滅道如真. 彼如是知.如是見已. 則 欲 漏 心 解 脫. 有 漏.無 明 漏 心 解 脫. 解脫已. 便知解脫. 生已盡. 梵行已立. 所作已辦. 不更受有. 知如真. (T1, p. 444c)36)

(그는 또한 고, 고의 습, 고의 멸에 이르는 길을 여실하게 알고, 루의 습·루의 멸·루의 멸에 이르는 길을 여실하게 안다. 그가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았을 때, 바로 욕루로부터 마음의 해탈을, 유루와 무명루로 부터 마음의 해탈을 얻어, 해탈되고, 해탈[했음을] 알았다. [그는] 이미 태어남은 다했고, 범행은 섰으며, 해야 할 일은 모두 끝냈고, 다시 후 유를 받지 않음을 여실하게 알았다.)

 

또,『中阿含経』「侍者經」제2에는 아난존자가 붇다의 반열반 이후, 깨달음을 얻는 과정을 기술하면서, 일체의 루를 끊고, 마음의 해탈을 얻었다고 하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

 

尊者阿難知法已. 乃至得阿羅訶. 尊者阿難作是說. 諸賢. 我坐床上. 下頭未至枕頃. 便漏. 

脫. (T1, p. 475a)

(존자 아난은 이미 진리(법)을 알고, 내지 아라한[과]를 얻었다. 존자 아난은 이렇게 설했다. ‘뭇 현인들이여, 나는 평상 위에 앉아, 머리를 숙여 아직 베개에 닿지 않을 때, 돌연 일체의 루를 끊고 마음의 해탈을 얻었다.)

 

이들 용례는『잡아함경』과『증일아함경』에서도 볼 수가 있다. 또,『중아함경』說智經 제1(T1, p. 732a)에는 ‘漏盡心解脫’이란 표현이,『장아함경』小緣經 (T1, p. 39a)와 大緣方便經 (T1, p. 61c)에는 ‘無漏心解脱’이란 표현이 보인다.

 

니까-야와 비교하면 한역 아함은 보다 여러 곳에서 마음의 해탈(心解脱)을 무루를 끊고 얻는 해탈로서 묘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최고층 문헌(Sn.847게송)에서의 마음의 해탈(心解脱)의 의미를 니까-야(빨-리 상좌부)보다 한역이 보다 잘 담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11)

11) 아함경의 소속 부파에 대해서, 水野弘元(1996:364-365)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중의『중아함경』은 설일체유부의 오래된 계통에 속하고,『증일아함경』은 
    대중부 소속이라는 설도 있지만, 그것을 판정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 중에는 
    대승설도 있고, 내용적으로는 빨-리의 경전 주석서(Aṭṭhakathā)에 나오는 듯한 
    새로운 요소를 포함하고 있기에, 한역 4아함 가운데 가장 나중에 성립했다고 생
    각할 수 있다. 그 다음 5세기가 되고 나서 역출된 것이 법장부 소속의『장아함경』 
    22권과 새로운 근본 설일체유부 소속의『잡아함경』50권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계속해서,『잡아함경』의 경우, “조직이 혼란스럽고, 「아육왕이야기」가 
    삽입되거나 해서,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가 역출했던 그대로는 아니라고 여겨진
    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잡아함경』의 소속부파를 유부라고 보고 있다.
    (p. 394) 또 『증일아함경』에 대해서는 “말하자면 한역 『증일아함경』에 대해
    서는 그 소속 부파나 계통이 불명확하며, 거기에 포함되어 있는 경전의 범위나 
    수도 현재의 것과 본래의 것과의 차이등도 불명확하다”(p. 470)고 말하고 있다.

 

3. paññāvimutti에 대해서

 

paññāvimutti는 지혜에 의한 해탈이라는 의미로, 일반적으로 ‘慧解脱(혜해탈)’이라고 한역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 항목에서는 paññāvimutti가 갖고 있는 본래 의미는 무엇인가에 대해서 고찰 해 보고자 한다.  

 

paññāvimutti에 관한 종래의 견해는, ‘분석적 방법’으로 이해하고 있는 듯하다.38) 이러한 해석은 paññā를 사제의 통찰, 혹은 오온을 무아로서 인식하는 것, 혹은 삼학의 체계 속에서의 최후의 덕목으로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39) 또 다양한 경전에서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사제(사성제) 등에 의한 paññā는 루(번뇌)를 소멸시키고, 결과적으로 해탈을 얻게 한다. 따라서 paññāvimtti는 그러한 방법에 의한 것이라고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이해밖에 불가능한 것인가. 또 Sn.847게송을 그러한 의미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인가. 이 점을 검증하기 위해서, paññā의 의미를 찾아보자. 우선, Sn.847게송의 내용을 다시 한 번 확인해 두자.

 

생각을 떠난 자에게는 다양한 속박이 없다. 지혜에 의해서 해탈한 자에게는 헤맴(무지)이 없다.

 

이 게송의 포인트는 ‘혜해탈자에게는 무지가 없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지하듯이 Sn의 제 4장과 제 5장에는 앞서 본 바와 같이 사제라든가 삼학이라든가 오온 무아와 같은 용례가 확인되지 않는다. 따라서 ‘혜해탈’의 ‘혜’를 그것들에 의한 것으로 규정할 수 없다. 이것은 Sn.1107게송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진리에 대한 사색을 선행으로 하는 평정과 바른 자각에 의한 청정이 해탈적 지혜(anna)에 의한 해탈이고, 무명의 파괴라고 나는 설한다.

upekkhāsatisaṃsuddhaṃ dhammatakkapurejavaṃ aññāvimokhaṃ pabrūmi avijjāya 

pabhedanaṃ. (Sn.1107)

12) aññā에 대해서 Vetter(1988:46)의 설명을 소개해 보자. 그는 “해탈하는 것과 함께, 
    ‘(마음이) 해탈했다’ 등의 인식이 발생한다. 이것은 다시 재생하지 않는 것을 확정한 
    아라한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서술의 출발점이 된다. 앞의 2장 주4에서 인용된 정형
    구는 아라한이 유루를 파괴했다고 하는 주장과 함께 시작, aññā에 의해서 해탈했다
    고 하는 주장으로 끝난다. aññā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이러한 인식을 paññā와 
    구분하고자 하는 시도일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Sn.의 게송에서의 aññā와
    paññā를 구분해서 이해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 게송은 평정한 상태인 upekkhā와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sati)이 해탈적 지혜에 의한 해탈이고, 그것이 무명의 파괴임을 분명히 보이고 있다. 즉 지혜(aññā, paññā)의 내용은 다른 수행에 의한 것이 아니라, upekkhā와 sati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것을 염두에 두면서, 니까-야·아함에서 설하고 있는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자. 그러나 혜해탈은 심해탈과는 달리 단독으로 사용된 예가 발견되지 않기에, 양자가 함께 설하고 있는 전형적인 경문을 통해서, 실마리를 찾아보도록 하자.

 

bhikkhu āsavānaṃ khayā anāsavaṃ cetovimuttiṃ paññāvimuttiṃ diṭṭh' eva dhamme 

sayaṃ abhiññā sacchikatvā upasampajja viharati. (AN I, 291, SN V, 266)

聖弟子諸漏已盡. 心解脫.慧解脫. 於現法中自知自覺. 自作證成就遊. (T1, 422b)

비구는 온갖 루(번뇌)의 소멸로부터 무루의 심해탈과 혜해탈을 지금 여기에서 스스로 철저하게 알고, 깨달아, 구족해서, 머문다.

 

이 용례가 심해탈과 혜해탈의 전형적인 형식이다. 물론 이 경문의 앞에는 다양한 표현이 설해져 있다. 예를 들면, 사성제(AN.I,p. 220), 삼학(AN.I, p. 232), 사정려(AN.II, p. 214), 오근(AN.III, p.282), 오근오력(SN.V, p. 220), 칠각지(AN,IV, p. 145), 오온(SN.IV, p. 119), 사신족(SN.V, p. 265) 등이 설해져 있다. 그 형식을 보면, 예를 들면, ‘오근 오력의 수행에 의해서, 온갖 루의 소멸로부터 무루의 심해탈과 혜해탈을 지금 여기에서 스스로 철저하게 알고, 깨달아, 구족해서, 머문다’라는 형식이다. 따라서 앞에서 설해져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이 혜해탈의 혜와는 관계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온갖 루를 소멸시키는 수단을 의미할 뿐인 것이다.

 

그 때문에 심해탈과 혜해탈에 관계하는 것은 ‘무루’만이 된다. 여기에서, 다시 한 번 Sn.847게송의 내용을 보자.

 

생각을 떠난 자에게는 다양한 속박이 없다. 지혜에 의해서 해탈한 자에게는 헤맴(무지)이 없다.

 

속박이 없는 것과 헤맴이 없다고 하는 것은 ‘무루’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혜해탈이란 무루의 심해탈의 상태를 철저하게 인식하는 것으로써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온갖 유루를 모두 소멸시킨 수행자는 마음의 해탈을 얻지만, 유일하게 남는 것은 ‘이것으로 모든 번뇌가 소멸된 상태인가?’라는 확신이 없는 ‘헤맴’일 뿐이다. 그러나 자기의 마음을 잘 관찰한 결과, ‘더 이상 남아 있는 번뇌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알아 확신하는 것과 함께, 최후에 남아 있던 ‘헤맴(무지)’이 없어져, 완전한 해탈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혜해탈의 ‘지혜(慧)’는 사제라든가 오온무아 등의 인식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기 내면을 ‘있는 그대로 본다(yathābhūtañāṇ adassana)’는 것에 의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또 니까-야·아함에 나오는 표현이 반드시 ‘cetovimuttiṃ paññāvimuttiṃ, 心解脱慧解脱’로 되어 있는 것도 마음의 해탈을 얻은 후, 그것을 철저하게 인식하는 것에 의해서 모든 유루가 완전히 사라져,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한편 藤田宏達(1972:307)는 “본래 혜해탈과 같은 의미를 지닌 ‘심해탈’(ceto-vimutti)이 ‘心’, 즉 선정에 의한 해탈이라고 이해되어, 아라한의 최상위는 혜해탈에 이 심해탈을 더한 자라고 생각되어, 이것을 구분해탈자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고찰한 것처럼, 최고층 문헌에서나 초기경전에서도 심해탈이 혜해탈과 같은 의미를 갖고 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또 혜해탈에 심해탈을 덧붙였다고 하는 것은 원래 심해탈이 갖는 의미를 전연 고려하지 않는 견해라고 생각한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심해탈과 혜해탈은 각기 다른 의미를 갖고 있는 표현이며, 더욱이 이것들은 모두 번뇌를 멸한 마음의 상태와 그것을 확인하는 것으로 이해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과 관련해서, 한 가지 제시하고 싶은 표현이 있다. 그것은 ‘vimuttasmiṃ vimuttam iti ñāṇaṃ 

hoti’라고 하는 표현이다.12) vimutta는 vimuccati의 과거분사이고, 이미 해탈한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번역하면 ‘해탈한 사람에게 있어, [해탈에 관해서 자신은 이미] 해탈했다고 하는 앎(智)이 있다’가 된다. 이것은 앞서 해탈을 얻은 후, 그 후 자신은 이미 해탈했다고 하는 확신이 생긴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12) 이 표현이 들어있는 전문은 다음과 같다. vimuttasmiṃ vimuttam it ñāṇaṃ hoti ;
     khīṇā jāti, vusitaṃ brahmacariyaṃ, kataṃ karaṇīyaṃ, nāparaṃ itthattāyāti 
    pajānāti. (MN.I, p. 38 ; AN.I, p. 167 ; DN.I, p. 84 ; SN.II, p. 95 등). 이것에 
    상응하는 한역을 보면 다음과 같다. 已得解脫生解脫智 生死已盡 梵行已立 所
    作已辦 不受後有 (『長阿含經』, T1, 12a) ;『?增壹阿含經』, T2, 563c 등).

 

이것에 관해서, Ergardt(1977 : 49)는 주목할 만한 언급을 하고있다.

 

"vimutta는 개인이 자신의 해탈을 일으키고, 다음으로 관찰로 명확히 하는 것이라는 사실에 있어서 매우 능동적인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동시에, 논리적 관점에서 우리들은 vimutta는 ñāṇa에 있어서의 필요조건이라는 사실을 생각해야만 한다. ‘필요조건’은 심리적 특성의 복잡한 과정을 포함하고 있다. 정신적 발전에서 끊임없이 사람은 뒤돌아 보고, 자기 생각을 증명한다. 언제나 줄어든 욕망과 줄어든 무지 사이에는 변증적인 과정이 있다."

 

‘vimuttasmiṃ vimuttam ~’은 초기 문헌에서 빈번히 볼 수 있는 구문이다. 그러나 이 구문은 어디까지나 최고층 문헌에서는 등장하지 않는 표현이다. 따라서 이를 통해 최고층 문헌의 내용을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따르지만, 이 구문은 필자의 최고층 문헌에 대한 이해가 그릇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유용한 증거로서의 기능은 충분하다고 판단된다

 

Ⅲ. 맺음말

 

지금까지 초기 경전을 중심으로 심해탈과 혜해탈의 의미에 대해서 고찰해 보았다. 본고의 고찰 방법은 앞서 밝혔듯이, 초기불교 문헌 사이에는 선명하지는 않지만 그 성립에 있어서 선후 관계가 존재한다는 앞선 연구자들의 견해를 바탕으로 하였다. 그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본고의 논의는 Sn의 847게송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이는 847게송이 심해탈과 혜해탈의 가장 원초적 의미를 담지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심해탈과 혜해탈은 각기 다른 수행 방법론을 통해 획득한 아라한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본론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847게송은 물론, 이후의 문헌들에 나타나는 심해탈과 혜해탈의 용례 역시, 방법론을 달리하는 이종의 아라한이 아닌, 일련의 사태로서 ‘한 수행자(아라한)’에게 나타난 해탈의 두 양상을 의미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즉 모든 감정적, 정서적 번뇌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것이 심해탈이며, 그러한 해탈의 상태를 획득했음을 있는 그대로(yathābhūtaṃ) 아는 것이 혜해탈의 의미임을 확인했다.

 

그리고 이 해탈의 두 양상의 중심에는 ‘정려/삼매, 평정(upekkhā), 사띠(sati)’가 놓여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는 사마타(혹은 정려)와 위빠사나라고 하는 초기 불교의 양대 수행론이 정립되기 이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 여지를 갖고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추후의 논문에서 다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