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 논문및 평론/교리 및 수행

사띠(Sati) 논쟁의 공과(功過)/김 준호

실론섬 2015. 3. 26. 12:20

사띠(Sati) 논쟁의 공과(功過)

김준호/부산대학교 철학과 강사


1. 여는 말


‘기억 생각 주시 관찰 각성 마음집중 알아차림 마음챙김 주의깊음, 수동적 주의집중, 마음지킴, 마음새김 … ’


앞에 열거한 단어는 모두 사띠 의 번역어로 제시된 말이다. 리즈 데이비즈의 사전에서도 '기억, 인식, 의식, 마음의 주의, 마음의 깨어 있음, 주의깊음, 정신차림, 마음의 평정, 자의식의 의식'등으로 풀이된 점을 보면 하나의 불교술어가 이토록 다양하게 풀이된 예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이다. 그만큼 사띠라는 말이 다의적인 성격을 띠고 있고 초기불교의 수행도를 온전하게 이해하는 데 하나의 중요한 축을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도입부에 제시한 이들 번역술어는 세기에 들어서서 벌어졌던 사띠논쟁의 성과에 힘입은 바가 크다. 사띠논쟁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조준호 선생의 수동적 주의집중과 임승택 선생의 마음지킴이라는 표현은 사띠논쟁 이전에는거론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 논쟁의 위상을 가늠할 수 있다.


이 글은 사띠논쟁에 대한 비판적인 검토이다 그러나 필자는 당시 논쟁에 참여하지 않았으므로 여기서 논쟁의 쟁점이 된 주장이나 주요 논거들에 대해 다시 옹호 또는 반박의 형태로써 각 주장들의 허실을 따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또 적절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따라서 여기서는 사띠논쟁의 배경과 전개과정에서 드러난 문제점을 진단하고 논쟁의 결과가 학계에 끼친 영향을 평가해 보고자 한다. 곧 사띠논쟁이 남긴 과제에 대해 성찰해 봄으로써 지금 불교연구의 현주소를 제대로 짚어 보려는 의도이다.


비판적으로 평가한다는 말 속에는 불교학이 아니라 불교철학의 관점으로 이 논쟁을 검토하겠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불교철학은 불교라는 종교를 비판적이고 합리적으로 해명하려는 태도로 시작하여 종교성에 제한되지 않고 불교가 지향하는 가치와 이론 및 수행의 체계에서 드러나는 전제와 주장을 근본적으로 검토하려는 학문적 시도를 가리키는 말로 정의해 본다. 이러한 정의에 따르면 불교학과 불교철학은 그 토대가 다르다. 불교학이 불교경전 -선불교(禪佛敎)에서는 선장(禪藏)이 포함되겠지만- 에서 발견되는 가르침과 실천의 내용을 체계적으로 풀어내거나 사상사적 발단과 전

개를 드러내는데 주력한다면 불교철학은 부처가 말한 내용의 의미는 물론 그 의의가 지금 여기에서도 여전히 유효한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다시 말하면 부당한 전제를 허용하지 않고 끝까지 의심해 보아 바람직한 의미와 의의가 과연 있는가를 살펴보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사띠논쟁사를 기술하는 데 주력하지 않고 사띠논쟁의 비평에 초점을 모았다.


2. 사띠논쟁의 발단과 전개


1) 발생 배경

위빠사나 명상이 이 땅에 소개된 것은 1991년 거해스님의 『깨달음의 길』, 1992년 김열권의 편저 『위빠사나 1.2』, 1993년 거해스님의 『위빠사나 수행법』 등의 단행본이 출간되면서 부터이다. 게다가 직접 위빠사나 명상법을 체험하고 돌아와 이 땅에 전한 이들의 노력에 의해 대중들에게도 위빠사나 명상이 널리 알려지고 당시 학계에 불고 있던 초기불교 연구에 대한 높은 관심과도 맞물리게 되었다.


지혜의 명상이라 부르는 위빠사나 수행이 크게 주목받은 배경에는 자신의 마음이 곧 부처임을 크게 돌이켜 직시하고 화두를 참구하여 깨달음을 얻는다는 간화선에 비해 접근하기가 쉽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위빠사나 명상법은 자신의 호흡에 주의를 집중하는 방법,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근육의 미세한 움직임에 주의를 기울이는 방법, 감각기관으로 대상을 파악할 때 발생하는 느낌의 질감을 응시하는 방법 등을 통해 감각기관에 포착되는 현상의 발생과 소멸을 제대로 지켜보며 그 속에서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의 이치를 터득하여 지혜를 얻게 된다는 수행의 원리를 이 땅에 제공하였다. 이해하기도 쉽고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직접 체험하기가 어렵지 않다는 장점 때문에 현재 위빠사나 열풍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관련서적의 출판은 물론 직접 수행하는 이들도 늘어나고 있다. 이와같은 시대적 분위기가 학계에 영향을 끼친 것은 당연한 일로 비친다.


그러나 사띠논쟁이 벌어질 수 있었던 것은 초기불교에 대한 축적된 역량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러한 역량은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도서출판 민족사와 경서원을 중심으로 일본학자들의 연구성과가 꾸준히 번역 출판되면서 문헌학으로 대변되는 근대불교학이 국내에 본격적으로 도입된 사실에서 비롯한다.


팔리어 경전을 직접 우리말로 번역하려던 시도가 고요한 소리, 전재성 등에 의해 주도된 일도 빠뜨릴 수 없다. 사띠논쟁이 시작된 2001년에 임승택이 번역한 『빠띠삼비다막가(無碍解道)』를 비롯해서 『쌍윳따 니까야』(전재성, 2002), 『맛지마 니까야』(전재성, 2003), 『숫타니파타』(전재성, 2003) 『위숫디막가. 淸淨道論』(대림스님, 2004)등이 사띠논쟁이 한창 진행되던 때에 봇물처럼 출판되었고 논쟁이 종결된 이후에도 『디가 니까야』(각묵스님, 2006), 『앙굿따라 니까야』(대림스님, 2007) 등 팔리어 4 니까야가 모두 번역・출판되기에 이른다 이들의 노력에 의해 초기불교를 본격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토대가 갖추어진 것이다 사띠논쟁은 이러한 추세에 발맞추어 당시 활발하게 수행되던 위빠사나 명상의 위상을 제대로 세워야 한다는 필요성에 따른 대응이었다.


2) 사띠논쟁의 전개

2000년「한국선학」 및 「불교학연구」에 사마타(Samatha. ). 위빠사나(Vipassana. 觀) 관련 논문 세 편이 잇따라 발표되면서 사띠논쟁이 일어날 분위기가 조성된다 그리고 논쟁의 발단은 당시 졸고를 논평했던 조준호 선생이 그 뒤 다시 한국선학회에서 「초기불교에 있어 止・觀의 문제」 를 발표하면서 시작된다. 그에 따르면 위빠사나 명상의 위상은 이미 초기불전 안에서 충분히 발견되고 집중명상 계열을 대표하는 사마타는 (Samatha 止)위빠사나로 가는 길에 필요한 예비수행에 불과하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사마타와 위빠사나는 동시에 수행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다음 해에 임승택 선생은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동시에 평등하게 수행할 수 있는 근거가 팔리어 니까야에서 발견된다 고 말하면서 사선(四禪)을 닦는 과정 특히 첫 번째 선정의 상태에서 최적의 위빠사나가 이루어진다는 의견을 제시함으로써 조준호 임승택 양자 간에 논쟁이 벌어진다. 곧 사띠논쟁은 사마타, 위빠사나 곧 止・觀의 수행을 놓고 동시적인가(임승택), 차제적인가(조준호)로 시작된 것이다.


쟁점으로 떠오른 문제는 "사선의 단계를 모두 닦은 이후에야 위빠사나가 가능하다"(조준호) 와 "사선을 닦는 과정 특히 첫 번째 선정의 상태에서 최적의 위빠사나가 이루어진다"(임승택)는 주장의 맞섬이었다. 이후 치열한 공방전을 통해 각자의 주장이 정당하다는 논지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곧이어 김재성 선생이 "사마타를 배제한 상태에서도 위빠사나가 가능하다 

"는 주장을 제시하면서 논쟁은 더욱 확대되고 쟁점 또한 첨예하게 맞선다.


조준호의 경우 사마타를 통하여 사띠가 확립된 이후 (곧 사선의 제 4선)라야 위빠사나가 가능하다고 주장하면서 ‘止→觀’ 은 인정되나, 은 인정되나, ‘觀→ 止’는 인정되지 않는다는 견해를 견지한다. 임승택은 온전한 위빠사나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언어적 사유(Vitakka. 尋)가 개입되어야 하므로 사선에서 첫 번째 선정의 상태야말로 위빠사나 수행을 위한 최적의 조건이라는 논지를 견지한다. 김재성은 구차제정(九次第定)의 높은 단계에 이르러서는 물론이고 초선을 얻기 이전의 단계에서도 위빠사나 수행은 가능하며 나아가 집중, 곧 사마타가 배제된 상태에서도 위빠사나는 가능하다는 입장으로 또렷이 구분되었기 때문이다. 


이 논쟁에서 특히 '사마타사띠위빠사나'의 입장(조준호)이나, '사마타(四禪의 첫 번째 단계)위빠사나의 주장(임승택), 그리고 '사마타→위빠사나'의 도식은 인정되지만 선정을 배제한 상태에서도 위빠사나 수행은 가능하다(김재성) 등은 이후 좀더 강화된 논조로 견지되어 간다.


사띠논쟁의 두 번째 쟁점은 사띠의 우리말 번역문제이다. 그러나 논쟁의 진행과정에서 시간적인 선후로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이 문제는 조준호 선생이 2000년에 발표한 글에서 사띠는 현상에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응시하고 지켜볼 뿐이라는 점에 착안하여 “念(Sati)"의 발현과 완성이 다름 아닌 四禪의 최종적인 목적이며 내용이며 성취이며 결과라고 압축할 수 있다" 고 전제하면서, 사띠의 어의에 대해 '수동적 주의집중'으로 정의한데서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이에 대해 임승택은 사띠가 서술된 경전 문구에서는 대부분 정념정지(正念正知)로 표현된다는 점에 착안, 마음지킴(念 )과 알아차림(知)은 곧 위빠사나를 의미하므로 기존의 단행본에서 사띠를 '알아차림',' 마음챙김' 등으로 번역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는 입장을 밝히고, 위빠사나 수행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심리적 여건 또는 양태를 고려하면 사띠를 '마음지킴'으로 번역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견해를 제시하면서, 사마타와 위빠사나의 위상에 대한 해석차이가 사띠의 번역 문제와 맞물려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후 반박. 재반박의 과정을 거치면서도 사띠가 사선의 제 3선에서부터 발현되기 시작하여 제 4선의 단계에 이르러야 捨念淸淨의 형태로 완성되므로 제 4선 이후에야 본격적인 위빠사나 수행이 가능하다는 종래 조준호의 주장은 그대로 견지된다. 이와 같은 추이는 사띠를 '마음지킴'으로 번역하면서, 사선의 첫 번째 선정단계야말로 최적의 위빠사나 수행이 이루어진다는 임승택의 주장에서도 마찬가지로 발견된다. 따라서 이 논쟁의 전개과정을 놓고 '사띠논쟁'이라 해야할지, '사마타-위빠사나 논쟁'이라 해야 할지 애매한 부분이 있지만 여기서는 인지도를 고려하여 '사띠논쟁'이라 부른다.


개인적인 생각을 잠깐 밝힌다면, 사띠를 마음지킴으로 옮기든 수동적 주의집중으로 옮기든 사띠의 어의를 반영하는 것은 사실이나 어느 쪽도 온전한 번역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사띠는 매우 다의적인 개념으로 문헌마다 달리 해석할 여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 사띠

논쟁의 장에서는 사띠를 해석을 둘러싸고 사마타와 위빠사나의 관계설정이나 그 의의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으로 성숙되지 못하고 종전의 주장이 다시 반복되면서 언쟁만 과열되는 인상을 주다가 종결되었다.


3. 사띠논쟁이 남긴 과제


사띠논쟁은 불교학계에 신선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2001~2003년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에 10여 편의 논문이 집중적으로 발표된 사실만 보더라도, 1981년 성철에 의해 시작된 돈점(頓漸) 논쟁 이후 최대의 논쟁이었다고 평가할 만하다. 더구나 돈점논쟁이 특정집단의 정통성 시비가 그 밑바탕에 전제되어 있는 것에 비해 사띠논쟁은 처음부터 특정집단의 이익이 개입되지 않고 순수하게 학문적인 견해 차이로 인해 발생한 논쟁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


소장학자인 조준호, 임승택, 김재성에 의해 주도된 이 논쟁에서는 쟁점이 된 문제를 논증하기 위해 팔리어 경전에 서술된 내용을 구체적인 근거자료로 제시하면서 논의를 더욱 심화시켜 갔다는 점에서도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기에 충분하다. 곧 사띠논쟁을 통해서 원전에 토대한 본격적인 초기불교 연구의 장을 열었다고 평가해도 무리가 없기 때문이다. 한 두 개의 경전내용만 인용하면서 '.. 카더라'이니, '...가 불교이다' 식의 결론을 내리는 논문은 더 이상 주목받지 못하고 특정주제에 대한 논자의 문제의식이 또렷하게 드러나는 연구경향이 제대로 자리잡은 것도 사띠논쟁의 결과에서 파생된 효과로 비친다. 사띠논쟁 이후 초기불교 연구에서 경쟁적으로 팔리어 경전을 엄밀하게 분석하려는 연구경향이 대두한 것도 이 논쟁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위빠사나 수행법이 국내에 도입된 지 8년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논쟁을 통해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었다는 사실에서도 사띠논쟁은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만하다. 현실의 문법을 외면한 채 그저 불교가 최고의 가르침이라는 자위로 그친 것이 아니라 위빠사나에 대한 관심의 고조를 반영하여, 위빠사나라는 방법을 통해서 불교적 이상에 대한 현실적 가치판단을 논의의 쟁점으로 삼았다는 점도 크게 주목할 만하다고 생각된다.


특히 이 논쟁을 통해 명상수행의 의미와 의의가 주목받으면서 본격적인 명상연구의 단초를 마련했다는 사실 또한 지적할 수 있다. 기존의 조사선과 비교연구까지 이루어진 것도 사띠논쟁의 파급효과이다. 당시 사띠논쟁에 참여하지 않았으나 사띠논쟁의 과정을 주시하면서 초기불교의 명상과 관련하여 전공자들이 거의 모두 자신의 견해를 밝히면서 심화연구가 현재에 이르기까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은 사띠논쟁이 가져온 최대의 성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사띠논쟁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문제점도 남겨 놓았다. 이하에서는 사띠논쟁에서 발견되는 문제점을 두 가지로 나누어 정리해 본다.


1) 텍스트와 연구방법

현존하는 초기불교 경전은 팔리어로 쓰여진 <5 니까야> 와 한문으로 번역된 <4 阿含經>이 있다. 한역 『아함경』은 팔리어를 번역한 것이 아니라 사라져버린 산스크리트본 『아함경』의 번역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팔리어 경전 못지않게 한역 아함경도 문헌적인 중요성이 인정된다.


문제는 국내에서 초기불교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팔리어 경전인 니까야에 나오는 내용만을 정전(正典)으로 받들어 한역 아함경을 상대적으로 폄하한 경향이 지배적이라는 사실이다. 사띠논쟁에 참여한 이들은 물론 이후에 나온 논문들에서도 한역 아함경 에 나오는 내용은 거의 무시되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한역 아함경 의 내용을 경전 근거로 삼지 않았다고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일본의 경우 아카누마 치젠(赤沼智善)에 의해 연구된 『漢巴四部四阿含互照錄(1929)이 효시가 되어 팔리어본과 한역본을 대조 분석하는 연구 방법이 확립되어 있다. 그들이 이와 같은 연구방법을 택한 것은 초기불전 속에서 부처의 근본 가르침에 가까운 것으로 인정할 수 있는 부분을 가려내

기 위해서이다. 그 이유는 남북 양전 사이에서 일치되지 않는 내용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서양의 문헌학적 성과를 받아들여 초기불전을 다시 고층(古層)과 신층(新層)으로 나누어 파악하려는 그들의 연구방법론을 받아들이자는 말이 아니다. 남북 양전 사이에서 일치하지 않는 내용 또는 부분이 상

당수 발견된다는 사실이 소홀하게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아카누마의 『호조록』에서 남북 양전 간의 상당한역 및 팔리본으로 제시된 경전을 찾아서 읽어 보면 설법의 대의는 거의 일치하지만 설법배경, 설법주, 청중, 장소, 설법내용, 내용편집 순서, 비유 등의 모든 구성이 완전하게 일치하는 예는 거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를테면 사띠논쟁에서 쟁점이 된 '사마타(Samatha 止), 위빠사나(Vipassana ), 사띠(Sati 念)’ 등의 술어를 남전을 중심으로 놓고 비교 분석하고 다시 북전을 중심으로 놓고 역으로 비교 대조하는 과정으로 분석해 보면, 經證을 통해 하나의 주장을 펴려면 상반되는 반증사례 또한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따라서 어떤 경전의 어느 부분을 인용하여 근거로 삼느냐에 따라서 서로 다른 해석을 제각각 주장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팔리어로 기록된 <5 니까야>가 과연 부처가 가르친 것을 여과 없이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가의 문제가 제기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사띠논쟁에 참여한 이들은 예외 없이 텍스트를 취급하는 본인의 태도 곧 팔리어 경전의 전체 내용을 모두 부처의 말로 확신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하면서 경전의 내용이 모두 佛說이라는 데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나아가 『위숫디막가』나 「니까야 주석서」도 그대로 불설로 받아들이는 연구자도 보인다. 남전이 철저한 암송과 기억으로 구전되었다고 하지만 중간에 유실 또는 편집이 없었다는 사실을 그대로 믿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많다. 하지만 이것은 작은 문제에 불과하다. 


현존하는 팔리어 경전은 스리랑카에 전해지는 남방상좌부에 속한 것이다. 부처가 떠난 뒤에 18~20여 개의 부파로 나뉘어 부처의 말을 각각 조명한 부파불교 시대에 접어들면서 각 부파는 경율론 삼장을 제각각 따로 전하였다고 한다. 이 사실이 거짓으로 판명되지 않는 한 현존하는 <5 니까야>는 한 부파의 불교 해석만을 전하고 있는 데 지나지 않는다. 각 부파는 여전히 불교라는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따로 구전하던 경전의 내용이 완전히 다를 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띠논쟁 과정에서 드러난 것과 마찬가지로 첨예하게 대립되는 이론이나 수행도의 중요성 및 차제관계등의 문제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를 수 있고 또 그것을 기반으로 각 부파가 구전하던 내용에 변화가 없었을 것이라 단정할 수도 없다고 본다.


현존하는 초기불교 텍스트는 부파불교의 산물로써 각 부파의 불교해석이라는 프리즘을 거친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초기불교의 텍스트 속에서 부처의 말이 온전하게 그대로 살아 있다고 믿을 수 없는 것이다. 필자가 초기불교 경전을 '남북전'이라는 용어로 즐겨 표현하는 것은 이와 같은 ’

시각으로 텍스트를 대하겠다는 태도에서 나온다. 부파불교의 해석을 거쳐 나온 결과물인 현존의 초기불전 속에서 부처가 말하려고 하는 바를 찾아내서 그 의미를 제대로 밝히고 이어서 지금 여기서도 의의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를 말하려는 태도야말로 불교학자가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퍼즐 맞추기에 비유해 보자 퍼즐조각이 백 개 이하라면 원 그림을 보고 모양과 색깔의 차이에 토대하여 어렵지 않게 맞출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퍼즐조각이 천 개이고 원 그림이 '백두산 천지의 겨울풍경'이라면 사정은 달라진다. 파란 색깔의 조각은 호수와 하늘에 널려 있고 하얀 색깔의 조각, 또한 구름에도 또 천지 주변의 바위에 내린 흰 눈에도 널려 있다. 이럴 경우 조각의 모양과 색깔에 토대하여 후보군으로 여겨지는 조각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하나하나 대응시켜 맞추어 보려는 수고를 하지 않는 이상 이미 제대로 맞추었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부분과 맞지 않아 석연치 않은 주변을 모조리 들어내는 일을 몇 번이나 반복하는 과정은 필자의 능력 부족에서만 기인하는 현상일까?


물론 남북 양전 사이에 일치하는 내용이라고 해서 부처의 직설이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양전 사이에 존재하는 불일치 사례가 발견되는 이상 하나의 주장을 둘러싸고 각 부파 간에 좁힐 수 없었던 이견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반영되었을 가능성과 더불어 하나의 관점으로 체계화된 교설보다는

여러 가지로 대립된 주장이 혼재된 상태가 오히려 진실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수행도와 관련하여 하나의 주제를 택하여 관련문헌을 분석할 경우 상반되는 주장이 발견될 경우에는 그 문제에 대해 좀더 고심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사마디'를 주제로 잡으면 초기불전에 나타난 수행도가 삼매를 중심으로 구성되고 '사띠'를 중심으로 잡으면 역시 같은 결과를 드러낼 수 있다는 점이다. 곧 특정한 수행법 하나를 놓고 그것이 핵심이라거나 가장 중요한 수행법이라는 주장을 하게 될 경우에는 문헌분석의 방법에 일관된 기준이 적용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논문작성자의 주장에 맞추어 확대해석할 위험은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 때문이다. 문헌분석 작업이 치밀하면 치밀할수록 그와 맞지 않는 사례 또한 발견될 수 있을 가능성은 존재하기 마련인 것이다. 텍스트를 취급하는 연구자의 방법론이 먼저 분명하게 제시될 필요성도 여기서 나온다.


사띠논쟁에서는 텍스트 자체의 문제점을 진지하게 성찰해 보려는 태도가 보이지 않았다. 사띠논쟁에 참여한 이들은 그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해 주는 경증 찾기에 골몰했을 뿐이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실제로 이들의 글에서는 각기'4 니까야, 빠디삼비다막가, 위숫디막가, 니까야 주석서' 중에서 자신이 선호하는 듯한 특정한 텍스트에 치중하여 경증으로 삼고 있는 태도가 발견된다. 사띠논쟁에 참여한 이들의 글 속에서 『담마파다』, 『숫타니파타』 와 같은 운문계 경전들을 전거로써 거론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이를 대변해 준다. 초기불전이라는 텍스트 자체에 이미 다양한 시각과 견해가 함께 놓여 있어 해석의 지평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면 사띠논쟁 과정의 양상이나 그 성과는 매우 달라졌을 것이다.


2) 철학정신의 부재와 수입학

사띠논쟁의 쟁점사항을 다시 언급해 보자. "사선(四禪)을 모두 닦은 이후에라야 위빠사나 수행이 가능하다"(조준호), "사선의 첫 번째 선정의 상태에서 최적의 위빠사나가 이루어진다"(임승택), "사마타 없이도 위빠사나 수행은 가능하다"(김재성). 제각기 다른 주장으로 보이지만 '사마타(止) → 위빠사나()'를 기본 전제로 삼아 사마타의 위상을 임승택(강), 김재성(중), 조준호(약)으로 평가했을 뿐, ‘위빠사나 수행→ 깨달음'의 도식은 기본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문제는 위빠사나만이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위빠사나 자체는 깨달음이 아니라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다 그 자체가 지혜가 아니라 지혜를 얻는 도구이자 방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점은 사마디, 사마타에게도 비슷한 의의를 부여할 수 있다.


사띠논쟁에서 언급된 四禪은 실제 텍스트에서는 양적인 측면에서만 살펴 보아도 '위빠사나'→깨달음'의 도식보다 빈번하게 등장한다. 곧 '사선(사마타 계열) →깨달음'의 도식 역시 경전의 근거를 충분히 확보할 수 있는데도, 사띠논쟁에서는 이에 대한 의의가 축소되고 텍스트에서 발견되는 이러한

異說에 대한 검토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위빠사나의 위상에 대한 기본전제를 비판적으로 검토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기본전제란 무엇인가? 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유일한 방법이라는 생각이다. 이에 해당하는 팔리어는 'Eka yano maggo‘로서 하나의 길로 옮겨도 충분할 터인데 유일한 길로 번역한 태도에서 연구자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위빠사나를 대하는 생각이 잘 드러난다. 물론 사띠논쟁 과정에서 이에 대한 문제의식이 전혀 나타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생각이 메이저리그가 아니라 마이너리그로 취급되었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 위빠사나를 폄하할 의도는 없다. 위빠사나는 초기불교의 명상을 이해하는 핵심 키워드 중의 하나라는 데 필자 역시 이의가 없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관겸수'라는 전제 속에서 가능한 말이다. 나아가 '계정혜' 하나하나에 동일한 무게를 둘 때에만 인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느 하나를 따로 떼어내 강조하는 것까지는 좋지만 그것이 유일하다는 주장은 위험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텍스트 자체 속에 뒤섞여 있는 이설(異說)을 무시하고서 위빠사나가 유일한 수행법이라거나, 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유일한 방법이라는 주장은 어떤 하나의 전통이나 특정한 믿음의 체계에서나 통하는 말로 비친다. 그러한 주장이 가는 길에는 신비와 권위를 강조하는 태도가 예정되어 있지 않을까?


사띠는 몰입명상인가 지혜명상인가 이에 대해 위빠사나 신봉자들의 대답은 간단하다 <디가 니까야(D gha Nik ya)>제 22 『마하사띠빠타나 (Mahā-satipatthana 大念處』경전에 나타난 서술을 근거로 사념처( 四念處. Cattaro satipatthana)는 곧 지혜를 얻는 명상이므로 사띠 또한 위빠사나로 직결되는 수행법이라고 본다. 곧 '사띠 위빠사나 지혜 깨달음'이라는 도식으로 요약되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처럼 『마하사띠빠타나』경에서 '네 가지 수관 (隨觀Anupassati)'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서술에 토대하면 이러한 주장을 충분히 수긍할 수 있다. 그러나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이 내용과 대응하는 북전의 서술을 검토하면 사념처의 위상은 위빠사나에만 제한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띠는 몰입 또는 집중명상의 계열을 뒷받침하는 위상으로도 충분히 설정가능하다. 따라서 사띠는 집중명상의 토대이면서 동시에 지혜명상의 토대로서도 기능하는 것이다. 사띠논쟁의 발단은 사띠가 집중명상 계열에 속하는 것인가, 지혜명상 계열에 속하는 것인가를 놓고 시작된 것이 아니라 위빠사나를 미리 최고의 위치에 자리매김한 상태에서 사마타, 사띠의 관계 또는 의의 정도를 논의한 것에 불과하다는 데 문제가 있다. 곧 사띠논쟁에서 나온 주장들은 선결문제를 엄밀하게 따져보지 않은 채 제기된 부당한 전제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에서 사띠가 사마타인지 위빠사나인지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은 접어둔 채 '(사마타; 사선)  사띠;사념처  위빠사나 ‘ →지혜획득  깨달음'의 도식만이 인정되는 풍토를 낳았다. 따라서 사띠논쟁이 끝나는 시점에서 나올법한 초기불교 명상의 어떤 의미가 이 시대와 소통

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로 확대되지 못했다. 사띠논쟁 이후에도 여전히 “禪과 定”의 차이는 무엇인가? 선정과 삼매는 또 어떻게 다른가? 등의 질문에 대한 명쾌한 해답이 아직 마련되지 못한 사정도 사띠논쟁이 위빠사나 우위의 시각을 미리 전제했거나 반증되는 경증을 간과하고 진행한 결과일 것이다.


4 니까야에 나타난 서술을 부처의 직설 자체로 받아들이더라도 위빠사나 우위의 시각은 남방상좌부 소속의 『마하사띠빠타나』 와 이와 관련되는 경전군에서 강조되는 어디까지나 하나의 시각일 뿐이다. 거듭 말하지만, 'Eka yano maggo’는 여러 가지 길 중에 하나의 길일 뿐인 것이다.


국내에 위빠사나 수행법을 도입하여 소개하는 이들은 각자 스리랑카, 미얀마, 타이 등에서 특정한 위빠사나 수행자에게 배워 온 방법들을 수입하여 그대로 퍼뜨린다. 이들 나라는 공통적으로 자신들의 위빠사나 수행을 부처가 직접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은 방법임에 틀림없다고 확신하는 듯하다.

지금 이 땅의 각처에서 위빠사나를 수행하는 이들에게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이는 미얀마 출신의 마하시 사야도와 그의 직제자인 우 빤디따, 우 실라난다, 우 자나카 등이다. 이들은 호흡으로 배가 '일어남, 꺼짐'을 응시하는 방법, 응시하는 사이에 생각이나 느낌이 일어나면 그 '생각, 느낌'을 정확히 응시했다가 다시 배의 움직임으로 돌아오고, 좌선을 풀고 行禪 할 때에도 다시 발의 움직임을 '듦, 놓음' 하면서 응시하는 방법으로 위빠사나를 가르치고 있다. 이렇게 위빠사나 명상을 체계화시킨 마하시 사야도의 업적을 폄하할 생각은 없다. 오히려 그의 이론과 실천체계가 도입되어 이 땅의 명상문화가 다양하고 풍부하게 꾸려지고 있다는 점은 대단히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마하시의 방법은 남전 『대념처경』에 근거하여 자신들의 불교전통을 되살려 만들어 낸 방법이라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다시 말해 마하시의 방법은 그야말로 지혜를 얻기 위한 하나의 테크닉이다. 테크닉에는 그것을 지탱하는 원리가 있고 테크닉이 지향하는 가치가 있다. 테크닉을 수입하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테크닉을 수용하는 자세에 대해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사띠논쟁에서는 이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가 빠져 있다.곧 위빠사나는 부처가 직접 수행한 유일한 수행법이라는 것도 부당한 전제가 아닌가에 대한 문제의식이 결여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태도에는 현재 스리랑카 미얀마 타이 등지에서 자신들이 만들어 온 불교전통이부처가 가르친 내용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는 그들의 생각을 여과 없이 받아들인 결과이다 곧 사띠논쟁에서 설정한 전제는 남방불교권의 견해를 곧이곧대로 직수입하여 그것이 지향하고 있는 가치와 수행의 원리를 놓고 지금 이 땅에서의 의의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결여되었다는 비판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수입학은 사고의 다양성을 제공하지만 경직성도 함께 남긴다 전제에 대해서 의심하고, 이 땅에서 지니게 될 의미와 의의에 대한 철저한 검토 없이 받아들이기만 하면, 다양한 사고와 가치를 만들어 내는 긍정적인 효과보다는 자체의 문법에만 빠져 경직된 사고와 실천으로 전락할 위험성도 있는

것이다. 중국의 선불교가 이 땅에 수입되어 걸어 왔던 길에 회의를 품는 이가 있다면 현재 위빠사나를 받아들이고 있는 우리들의 태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의심해 보아야 할 것이다. 사띠논쟁에서 명상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통해 논의의 폭을 확대할 수 있는 계기로 삼지 못했다는 점은 아

쉬운 부분이다.


이 땅에서 위빠사나 수행이 주목받은 것은 기존의 조사선이 초기의 역동적인 정신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이유가 크다고 본다. 내 "마음이 그대로 부처다" 라는 가치관은 믿음의 체계에 속한다. 이러한 믿음의 체계를 이루기 위해 제시된 선지식 선문답 화두 할 방 등은 '조사선'이 지향하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자 테크닉이다. 극소수의 몇몇 사례를 제외하면, 이 땅의 조사선은 수입학으로서 원형 그대로를 간직하는 데 충실했을 뿐 조사선의 수행원리와 가치를 제대로 살려내지 못했기에 지금은 그들만의 리그를 운영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교회밖에 구원 없다" 는 말에 분개만 할 일이 아니라 우리들의 문제도 이와 같은 믿음의 체계를 부당한 권위로 강요하고 있지나 않은지 심각하게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 역시 조사선이 걸어 왔던 그 길을 그대로 따라간다면 초기의 건강한 정신은 어느덧 경직되어 버리고, 또 다른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어 낼 것

이라는 생각은 지나친 기우일까? 사띠논쟁에서 발견되는 일방적인 위빠사나 우위론이 논쟁 이후에 발표된 논문에서도 그대로 계속되고 있다는 진단이 필자의 독단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4. 맺는 말


인문학의 힘은 소통에서 나온다고 본다 자신의 생각은 주관에 불과하지만 주관이 다른 이와 소통되는 순간 객관이 되며 다시 그 객관은 또 다른 주관을 낳아 서로 서로 소통될 때 다양한 생각과 가치가 참신한 생각으로 나타난다고 믿는 편이다. 불교학이 인문학으로서 이 땅의 현실과 소통할 의사가 있다면 다양한 생각들에 토대하고 있는 전제를 근본적으로 성찰하는 역할에 소홀해서는 안 될 것이다. 매년 문학, 사학, 철학에 관련된 학술지가 쏟아져 나오는데 불교학 학술지에 이들의 연구성과가 얼마나 반영되고 있는지 먼저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사상의 영역으로 제한하면 불교의 교학이나 실천도에 대해 철학학술지에 실린 글이 불교계 학술지에 인용된 예를 거의 발견하지 못하는 일은 이제 없었으면 하는 바람을 남겨둔다.


지금까지 사띠논쟁의 허실을 짚어 보면서 불교학에 머무르지 않고 불교철학으로서의 연구풍토도 조성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나름의 생각을 정리 해보았다 논쟁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자가 다루기에는 멋쩍은 과제였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사띠논쟁을 넘어서는 좀더 건강하고 생산적인 논쟁이 다시 나타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