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 논문및 평론/교리 및 수행

예류과에 대한 고찰 - 초기불전을 중심으로/이필원

실론섬 2015. 4. 14. 18:15

예류과에 대한 고찰

-초기불전을 중심으로-

1)이 필 원/청주대학교 교수

 

[목 차]

Ⅰ.서 론

Ⅱ.향(向)과 과(果)의 문제

Ⅲ.흐름(sota)의 의미

Ⅳ.예류의 성립에 대해서

Ⅴ.맺음말

 

Ⅰ. 서 론

 

예류(預流)란 말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흐름에 참여하다’란 의미가 될 것이다. 이에 해당하는 빨-리어는 sotāpanna이다. 이 단어는 sota-āpanna(āpajjati(획득하다, 도달하다, 들어가다)1) 의 과거분사형)로 이루어진 bahubbīhi 복합어이다. 즉 한역으로 하면, 예류자에 해당하는 말이다. 그런데 sotāpanna외에 sotāpatti란 표현을 우리는 볼 수 있다. 이 단어는 sota-āpatti로 이루어진 6격 tappurisa 복합어이다. sotāpatti의 경우 예류자를 의미하는 단어의 쓰임새는 없다. 따라서, 본고의 주제인 예류과의 고찰은 sotāpanna와 관련된 용례를 중심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1) PD. s.v., āpatti. CPD의 설명을 보면, āpatti는 다만 ‘~상태의 획득’이란 의미가 주된 
   용법이다. 예를 들면, sam-āpatti와 같은 쓰임새를 들 수 있다. 이 단어는 선정의 상태
   를 나타내는 말로 흔히 等至로 한역된다.

 

본고에서 쓰는 ‘예류자’란 표현은 ‘예류과를 획득한 자’란 의미이다. 니까-야에서 볼 수 있는 표현 가운데 sotāpattiphala란 표현이 있는데, 이는 ‘예류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 예류과의 과명(果名)을 나타내는 말이며, 처음으로 흐름을 획득한 과(果)를 의미한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과명을 나타낼 때에만 sotāpattiphala란 표현을 사용할 것이다.

 

또 하나 지적해 두고 싶은 것은, 예류향(預流向)을 나타내는 표현에 관한 것이다. 예류향을 나타내는 표현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sotāpattiphalasacchikiriyāya paṭipanna(예류과를 실현하기 위해서 향해 가는 자)이고, 또 하나는 sotāpattimagga이다. 그러나 후자는 빠-리 논서에서 주로 사용되는 표현으로, 니까-야에서는 사용되지 않는 표현이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예류향을 표현하고자 할 때, 전자의 표현을사용할 것이다.

 

이상 예류를 중심으로 한 표현을 살펴보았다. 예류는 주지하듯이 불교에서 말하는 성인의 단계 중 첫 번째 단계에 해당한다. 그래서 경전의 표현을 빌리자면, 예류자는 최대 7번 생사를 반복하면 열반을 성취할 수 있는 성인의 계위(階位)이다. 또한 예류자는 열반의 성취가 결정된 자이기도 하다. 즉 이 표현은 예류자는 열반 이외에 다른 것을 성취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렇듯 예류자가 된다 함은 불교의 이상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비로소 우리 범부와 구별되는 성자의 반열에 들어섰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상이 예류자에 대한 일반적 이해 내용이다.

 

종래의 연구를 보면, 예류의 기원과 발달 과정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그 결과, 예류의 기원은 dhammasota라는 개념에서 시작되어2), 소박한 사예류지(四預流支)에서 사향사과의 예류설로 전개되었다는점에 일치하고 있다. 또한 일래(一來)와 불환(不還)보다 먼저 성립했다는 것에도 일치하고 있다.

2) 藤田宏達(1959 : 70)는 예류는 사향사과라는 정형이 성립하기 이전에, 단독으로 
   설해진 경우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고, I.B. Honer(1979 : 211) 역시 예류과
   는 다른 과명보다 빠른 시기에 나타났다고 말하고 있다. 또 真野龍海(1972 : 337)
   는 相応部二四 第一預流品 이라든가 相応部五五 預流相応 과 같이 독립해서 설해
   져 있고, 그 다음으로 一来・不還이 계속해서 설해져 있지 않음 으로 가장 먼저 
   성립된 단계의 계위로서 인정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본고는 이상과 같은 이해와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하면서 예류자에 대한 의미규정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형성되게 되었는지를 고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위해서, 필자는 먼저 이른바 운문경전에 나타나 있는 sota3))의 의미를 살펴보고, 그 후에 산문경전의 내용을 고찰하는 방식을 취하고자 한다. 이는 문헌의 성립 순서에 의한 개념의 발전 과정을 살펴보는데 있어, 매우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방법론이기 때문이다.4)

3) 예류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개념이 바로 ‘흐름sota’이기 때문이다. 이 흐름은 문헌에 
   따라 좋은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 사용되는 일반 개념이지만, 예류와 관련되어서는 
   독특한 쓰임의 용례를 갖는다. 
4) 불교의 문헌을 다루는 방법론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대표적으로 모든 것을 
   붇다의 직설로 보는 견해와 붇다가 설한 내용은 없다고 하는 극단적 견 해, 그리고 
   비판적 고찰을 통해 문헌의 성립 과정을 면밀히 조사하면 붇다의 직설, 혹은 직설에 
   가까운 내용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이 가운데 필자는 세 번째 입장에서 
   논술하고자 한다.

 

Ⅱ. 향(向)과 과(果)의 문제

 

예류에 대한 내용을 본격적으로 논하기에 앞서, 일반적으로 사향사과라고 할 때, 향과 과의 성립에 관한 문제를 잠시 짚고 넘어가도록 하자. 이 문제는 기존의 선학들의 견해를 주로 참조해서 성립의 선후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먼저 藤田宏達(1959 : 77, note1)는 “사향설은 사과설이 성립한 후에, 파생적으로 고안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하고 있다. 반면, 三友健容(1979 : 51~52)는 “최고의 경전이라고 하는 숟따니빠-따 에서도 사쌍팔배(四雙八輩)라는 용어가 보이고, 預流・一来・不還・阿羅漢의 네 단계가 향과 과로 나뉘어 논해지고 있기에, 상당히 일찍이 이른바 사문사과의 이론이 성립해 있었던 것 같다.”고 말하고 있다.

 

두 사람 모두 당시의 논문에서는 상세한 논증을 하고 있지 않기에, 우선 Sn(제 2장Cūla-Vagga의 Ratanasutta)의 내용과 SN(sagāthavagga의 Sakka-saṃyutta)의 유게품 의 내용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ye puggalā aṭṭha sataṃ pasatthā / cattāri etāni yugāni honti …(Sn.227)

선인들이 칭찬한 8인, 이들 사람들이 사쌍이다.

Cattāro ca paṭipannā // cattāro ca phale ṭhitā(SN1, p.233)

사향과 사과에 머문 자.

 

위의 Sn의 게송의 게송을 통해서는 사쌍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三友健容가 지적했듯이 사향사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추측은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한편 Sn의 Ratanasutta는 전체가 17게송으로 되어 있는 경전이다. 그리고 붇다에 관한 게송(224, 233, 234, 236, 237, 238)은 모두 6게송인데, 마지막 3게송은 같은 내용을 반복하고 있으므로 엄밀하게 4게송이다. 다음으로, 가르침(dhamma)에 관한 게송(225, 226)은 두 게송이고, 상가에 관한 게송(227, 228, 229, 230, 231, 232, 235)은 7게송이다.

 

그러나 최고층인 제4장과 제5장에는 단 한 번도 상가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는다. 다른 장(1~3)에서도 산문 부분을 제외하고 보면, 2회(550, 569게송) 밖에 나오지 않는다. 또 Dhp에도 3회((190, 194, 298게송)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Ratanasutta에 7회나 상가가 사용되고 있는 것은 다른 경전과 비교해 볼 때, 놀랄만한 회수이다. 아마도 Ratanasutta는 승가가 집단으로 정비된 후에, 혹은 정비되어 가는 과정의 단계에 있는 경전일 가능성이 높다. 참고로 Sn230~231게송에는 예류가 성립한 후의 예류과가 설해지고 있다. 결국 이 경전을 최고의 경전이라고 생각하여, 사향사과가 일찍이 성립했다고 생각한 三友健容의 견해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다음으로 Sakkasaṃyutta의 성립에 관해서는 분명히 말할 수는 없지만, Brāhmaṇasaṃyutta, p.162(붇다의 게송)와 Sakkasaṃyutta, p.222(Sakka의 게송), Thg442(Brahmadatta 비구의 게송)에 나오고 있는 게송이 모두 같으며, 또한 Sakkasaṃyutta, p.233(붇다의 게송)과 Dhp98(붇다의 게송), Thg991(Sāriputta장로의 게송)의 게송이 같다. 물론 어느쪽이인용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荒牧典俊(1982 : 57)의 연구에 의하면,Sakkasaṃyutta는 이른 시기에 속하는 경전이 아니다.

여하튼, Dhp와 Thī 등에 향(向, paṭipanna)에 관한 내용이 보이지 않는 것과 사향사과를 말하고 있는 Sn의 Ratanasutta와 SN의 Sakkavagga의 성립이 Dhp/Thī보다 빠르다고는 할 수 없으며, 오히려 늦게 성립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藤田宏達가 말한바대로 사과(四果,cattāro phalāni)가 먼저 성립하고, 나중의 어떤 시기에 사향(四向,cattāro paṭipannā)설이 파생적으로 고안되었다고 보는 것이 보다 설득력 있는 설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예류 역시 예류과라는 관념이 먼저 생기고, 그 후 예류향이란 관념이 생겼을 것으로 보는 편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럼 본격적으로 예류가 어떠한 과정을 거쳐 개념이 형성되게 되었는지를 고찰해 보도록 하자.

 

Ⅲ. 흐름(sota)의 의미

‘흐름’이 처음부터 예류와 관련해서 사용되었을까? 그렇지는 않다. ‘흐름’은 말 그대로 동사어근 √sṛ(흐르다)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따라서 보통은 일반 명사의 용례가 훨씬 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류’란 개념이 sota를 주 내용으로 하고 있다는 점은 sota에는 일반적인 의미 이외에 독특한 의미를 갖고 있다는 추측을 하게 한다.

따라서 sota의 용례를 정리하여 그 쓰임새를 규명한다면, 우리는 ‘예류’가 갖는 가장 원초적 의미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목적에따라 먼저 Suttānipata(이하 Sn)의 용례를 검토해 본다.

 

acchecchi taṇhaṃ idha nāmarūpe / kaṇhassa sotaṃ dīgharattānusayitaṃ….(Sn355ab)
그는 이 세상에서 명칭과 형태에 대한 갈애를 끊었다. 오래동안 잠재한 악마의 흐름을 [끊어 버렸다].

yassa ca visatā natthi / chinnasotassa bhikkhuno….(Sn715ab)
[번뇌]의 흐름10)을 끊은 비구, 그에게는 집착이 없다.

tesaṃ phassaparetānaṃ / bhavasotānusārinaṃ11)….(Sn736ab)
접촉에 압도되어, 존재의 흐름에 따르는 …

yāni sotāni lokasmiṃ, Ajitā ti Bhagavā sati tesaṃ nivāraṇam, sotānamsaṃvaraṃ brūmi…. (Sn1035abc)
아지따여, 이 세상 가운데에는 [번뇌]의 흐름12)이 있습니다. 바른 지각이 그들 [번뇌의] 흐름들의 장애[이며], 흐름의 억제라고 나는 말합니다.

 

주지하듯이, 마지막의 Sn.1035게송은 최고층이라고 말해지는 Sn.의 제5장에 속한 것이다. 제4장과 제5장에는 sota의 용례가 두 개 밖에 없다. 다른 하나는 아지따의 질문인 1034게송이다. 이상의 용례를 통해서 Sn에서 sota는 ‘악마의 흐름’, ‘번뇌의 흐름’, ‘존재의 흐름’과 같은 쓰임새임을 알 수 있다. 다음은 Dhammapāda(이하 Dhp)의 용례를 검토해 보자.

 

sabbalokādhipaccena, sotāpattiphalaṃ varaṃ(Dhp178)
일체 세계의 지배보다, 예류과가 더 뛰어나다.

yassa chattiṃsatī sotā manāpassavanā bhusā….(Dhp339ab)
어떤 사람에게 즐거움을 [향해] 흐르는 36의 흐름이 강하면 …
5) 藤田宏達(1986 : 402)는 “삼십육종의 번뇌. 注釈書 (IV, p.48)에 의하면 ‘온갖 
   애집의 유동(遊動, taṇhāvicaritāni)으로써, 내적인 것 18, 외적인 것 18, 계 36을 
   들고 있는데, 이것은 원시불전에 설해져 있는 ‘三十六愛行’(chattiṃsa taṇhāvicaritāni)을 
   가리킨 것일 것이다(AN.II, p.212 ; 雑阿含経 984経)”라고 말하고 있다.

 

savanti sabbadhī sotā….(Dhp340a)
온갖 흐름은 모든 곳에 흐른다.

ye rāgarattānupatanti sotaṃ sayaṃ kataṃ makkaṭako’ va jālaṃ (Dhp347ab)
탐욕에 물든 사람들은 거미가 스스로 만든 망에 [따라 가]듯이, 흐름에 [따른다].

chinda sotaṃ parakkamma15) …(Dhp383a)
노력해서 흐름을 끊어라.

 

Dhp.339의 흐름은 ‘감각적인 즐거움의 흐름’이고, Dhp.340은 ‘갈애의 흐름(Nārada[1978 : 24]), 욕애의 흐름(中村元[1984 : 58])’이다. 갈애・욕애의 흐름이 욕정의 덩굴을 만든다고 설하고 있다. Dhp.347은 ‘탐욕의 흐름’이고, Dhp.383도 ‘번뇌의 흐름, 혹은 욕망의 흐름’이란 의미이다.

그러나, Dhp.178게만이 예류과라고 하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이 게송은 제13장(lokavagga)에 속하는 것이다. 세간(世間)의 장(章)16)은 세속에 집착하지 않는 것과 생천(生天)(174, 177게송)을 말하고 있다. 특히, 177게송은 보시와 생천사상의 일면을 볼 수 있다. 세간의 장에는 차제설법(次第説法) 가운데 계론(戒論)만이 빠져 있다. 그러나 사견을 버리고(167게송), 태만하지 않고((168게송), 좋은 행을 실천하라((169게송), 거짓을 말하며 저 세계를 무시하고 있는 사람은 어떤 악이라도 행한다(176게송)라는 내용으로부터, 우리는 계론적인 내용이 설해져 있다고 간주해도 좋을 것이다. 따라서 예류과가 차제설법의 최후에 설해져 있는 듯한 구성이 되어 있어서, 재가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예류과를 설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다음은 Thg와 Thī를 살펴보도록 하자.

 

Ogayhaṭṭhaṇgikaṃ sotaṃ sabbapāpaṃ pavāhayiṃ(Thg349ab)
여덟가지 부분의 흐름에 뛰어들어, 나는 일체의 악을 제거했다.

mā vo naḷaṃ va soto va, māro bhañji punappunaṃ(Thg402ef)
격류가 갈대를 [부수]듯이, 마-라가 당신을 또 다시 부수지 않도록 하시오.

savanti sabbadhi sotā, latā ubbhijja tiṭṭhati, te sote ko nivāreyya(Thg761abc)
온갖 흐름은 모든 곳으로 흐른다. 덩굴풀이 싹이 터서 굳게 서있다.
그 흐름을 누가 막을 수 있을 것인가.

Velaṃ karotha bhaddante, sotānaṃ sannivāraṇaṃ(Thg762ab)
대덕이여, 흐름을 막을 제방을 만드시오.

acchecchi taṇhaṃ idha nāmarūpe, iti Bhagavā kaṇhassa sotaṃ dīgharattānusayitaṃ 
(Thg1275ab)
그는 이 세상에서 명칭과 형태에 대한 갈애를 끊었다. 오랫동안 잠재했던 악마의 흐름을 [끊었다].

Kāmesu ca appaṭibaddhacitto uddhaṃsoto’ti vuccati.(Thī12)
온갖 욕망의 대상에 있어서 마음이 속박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상류라고 말해진다.
6) uddhaṃsota라는 표현은 Dhp와 Thī이외에도 자주 나타나는 표현이다. SN.V, p.205, 
   237 등 ; DN.III, p.237 ; AN.I, p.233 ; AN.II, p.134 ; AN.IV, p.14, 73 등 에서도 확
   인할 수 있다. 특히, AN.IV, p.73 “pañcannam orambhāgiyānaṃ saṃyojanānaṃ 
   parikkhayā uddhaṃsoto hoti”라는 문장으로부터 uddhaṃsota가 의 미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오하분결을 끊는 것에 의해서 상류가 된다고 설 해져 있기에 불환과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에 관해서 出曜經 (T4, p.629b)에서는 ‘上流一究竟者。
   即阿那含是’로 기술하고 있어서 분명히 阿那含 (不還)을 의미하고 있다. 또 Nārada
   (1971 : 187)역시 불환자(the Anāgāmis)를 의 미한다고 해석하고 있다. 그리고 田
   中教照(1993 : 86)는 “여기에서의 상류가 상류불환(上流不還)을 가리킨다고 하면 
   담마빠다 제7장을 아라한의 장 이 라고 말하고 있으므로 담마빠다 는 이미 예류와 
   불환과 아라한이 성립한 단 계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Thg.402의 게송에는 ‘격류=마-라’라는 의미가 엿보인다. Thg.761게송은 Dhp.340과 동일하다. Thg.762게송의 흐름은 ‘마음으로 이루어진 흐름(manomayo soto)’으로써, 격류가 나무를 쓰러뜨려 버리는 것과 같은 흐름이다.

한편, Thg.349게송은 ‘흐름=팔정도’19)를 나타내고 있고, Thī.12게송은 불환을 의미하고 있는 용례이다.(주1) 특히, Thg.349게송은 dhammasota의 의미를 추적해 볼 좋은 용례로 생각된다. 이것은 dhammasota의 의미를 조사할 때, 다시 언급하기로 한다. 마지막으로 SN의 유게품(有偈品)을 살펴보자.

 

bhavasotānusārisu(SN.I, p.15)
존재의 흐름에 따르다

chinda sotaṃ parakkamma(SN.I, p.49)
노력해서 흐름을 끊어라.

paṭisotagāmiṃ nipuṇaṃ // gambhīram duddasam aṇuṃ //(SN.I, p.136)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 깊고 심오하며 미세한 [진리를] 보는 것은 어렵다.

sabbe sotasamāpannā // atiracchānagāmino //(SN.I, p.154)
[그들은] 모두 흐름에 도달한 자이고, 축생으로 이끌리지 않는 자이다.

 

유게품의 마지막 용례는 예류과를 의미하가고 있는 전형적인 형태를 보이고 있다고 생각된다. 藤田宏達(1959 : 472 note3)의 경우, sotasamāpanna를 sotāpanna의 고형태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 이외의 게송은 ‘존재의 흐름’, ‘번뇌의 흐름에 거슬러 올라가다’등의 의미로서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상과 같이 운문 텍스트의 sota의 사용법은 대부분 ‘끊다, 막다’의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팔정도나 예류과를 의미하는 용례를 또한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용례는 일부분에 지나지 않고, 藤田宏達(1959:465)가 말하듯이 sota의 사용법은 예부터 세속이나 번뇌의 흐름을 의미하는 것으로써 주로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sota의 용례이고, sota가 지닌 본래 의미는 아니다. 따라서 sota 자체에는 좋고 나쁨의 의미가 없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운문자료로부터 적은 용례이지만 예류과의 용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단지 예류향을 의미하고 있는 용례는 발견되지 않았다. 또 운문경전에 설해져 있는 sota의 사용법만으로는 예류의 의미를 확정하는 것이 곤란하기에, 산문 경전 가운데 설해져 있는 dhammasota의 용례를 조사한 다음에, 예류와의 관계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ayaṃ vuccati bhikkhave ariyasāvako diṭṭhisampanno iti pi //
dassanasampanno iti pi // āgato imaṃ saddhammam iti pi // passati imaṃ
saddhammam iti pi // sekhena ñānena samannāgato iti pi // sekhāya vijjāya
samannāgato iti pi // dhammasotaṃ samāpanno iti pi //ariyo
nibbedhikapañño iti pi // amatadvāram āhacca tiṭṭhati iti pīti //(SN.II, p.43,45, 58, 59, 80)
비구들이여, 이 성스러운 제자는 ‘견’을 구족한 자라고 말해지고, 바른 진리를 획득한 자라고 말해지고, 바른 진리를 본 자라고 말해지고,유학의 지혜를 갖춘 자라고 말해지고, 유학의 명지(明智)를 갖춘 자라고 말해지고, 붇다의 가르침의 흐름에 든 자라고 말해지고, 성스러운 예리한 지혜를 지닌 자라고 말해지고, 불사의 문을 부수고 서 있는 자라고 말해진다.

 

위의 dhammasota는 예류의 기본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해진다. 즉 dhammasota는 유학의 지혜・명지를 갖춘 자이고, 바른 진리를 획득해서 보는 자이고, 불사의 문을 연 자이다. 그러나 바른 진리(saddhamma)란 무엇인지, 혹은 붇다의 가르침의 흐름(dhammasota)이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히 기술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경전에 보이는 saddhamma와 dhammasota의 구체적인 내용을 조사해서 그 의미를 명확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선 SN.II, Nidāna-saṃyutta의 27경에는 팔정도가 행(saṅkhāra)의 소멸로 이끄는 방법이고, 성제자는 조건(緣, paccaya)의 생기와 소멸을 알고, 조건의 소멸로 이끄는 방법을 알고 있다고 설해지고 있다. 그러므로 diṭṭhi, saddhamma, sekhā ñānā(vijjā), dhammasota의 내용이 팔정도(ariyo aṭṭhaṅgiko maggo)라고 생각할 수 있다.

또 Nidāna-saṃyutta의 33경에는 팔정도가 늙음과 죽음(jarāmaraṇa)의 소멸로 이끄는 방법이고, 성제자에게는 법지(法智, dhamme ñāṇa)가 있어서, 과거와 미래에 대해 인식한다고 설해지고 있다.7) 특히 성제자에게는 미래의 늙음과 죽음을 완전히 아는 유지(類智, anvaye ñāṇa)가 있다고 한다. 따라서 성제자에게는 청정한 법지와 유지가 있다. 그러므로 견(見)을 구족한 자(diṭṭhisampanna) 등이라고 일컬어진다고 한다. 
7) 일반적으로 욕계의 번뇌에 대해서 작용하는 지(智)를 법지라고 하고, 상계(上界)의 
   번뇌에 대해서 작용하는 지를 유지라고 한다(桜部健, 1978 : 129). 그러나 SN.II의 
   경우, 과거의 늙음과 죽음을 인식하는 것이 법지이고, 미래의 늙음과 죽음을 인식
   하는 것이 유지로 정의되고 있다.

 

Nidāna-saṃyutta의 50경에는 성제자는 연기, 곧 세간의 발생과 소멸을 있는 그대로 알고 있기에, 견을 구족한 자(diṭṭhisampanna) 등이라고 일컬어진다고 설해지고 있다.

따라서 용례의 구체적인 내용은 ‘팔정도’이고, ‘연기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외에도, 팔정도를 흐름(dhammasota)로 표현하고 있는 용례가 있다. 이미 고찰한 Thg.349의 게송(여덟가지의 부분의 흐름에 뛰어 들어, 나는 일체의 악을 제거했다)과 예류상응(SN.V, p.347)의 ‘팔정도가 흐름이다(ariyo aṭṭhaṅgiko maggo soto)’라는 표현이 그것이다.

이상 dhammasota의 내용을 팔정도와 연기설의 틀속에서 이해해야 함을 검토했다.

 

Ⅳ. 예류의 성립에 대해서

이상과 같이, 예류는 사과설의 체계속에서 설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처음부터 예류 나름의 독립적인 의미를 형성해 왔다고 말하는편이 좋을 것이다.

예류는 그 형태를 갖추어 가면서, 몇 가지 패턴으로 정리되었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사향사과의 체계속에서 설해지기도 하고, 사예류지(四預流支) 혹은 칠예류지(七預流支)의 형태로 설해지기도 한다. 따라서 예류는 다양한 내용이 첨가되면서 발전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 사향사과의 하나로써의 예류

이 정의 속에는 두 가지의 서술방식이 있다.

 

形式 A :

세 가지 결박(三結)의 소멸로부터, 예류가 되어 ① 악취에 떨어지지 않는 자가 되고, ② 결정된 자가 되고, ③ 최고의 깨달음을 목적으로 하는 자가 된다.

8) tiṇṇaṃ saṃyojanānaṃ parikkhayā, sotāpanno bhavissati avinipāta-dhammo niyato 
   sambodhiparāyano ti. (DN.III, p.132 ; MN.I, p.226, 466 ; MN.III, p.81 ; SN.V, p.357, 
   390 ; AN.IV, p.12 등)

 

形式 B :

세 가지 결박의 소멸로부터, 최대 7회 [다시 태어나는 자가]된다. 최대 7회 천계와 인간계를 유전(流転)하고, 윤회하고 나서 괴로움의 끝을 만든다.

9) so tiṇṇaṃ saṃyojanānaṃ parikkhayā sattakkhattuparamo hoti. sattakkhattuparamaṃ 
   deve ca mānuse ca sandhāvitvā saṃsāritvā dukkhassa antaṃ karoti(AN.I : 233, 235 ; 
   AN.IV, p.381 ; SN.V, p.205). sattakkhattuparama는 보통 ‘극칠반생(極七返生)’으로 번
   역한다. 그러나 극칠반생이란 번역어는 아함경에 는 쓰이지 않는다. 유행경(遊行經) 제2
   (T1, p.26b), ‘極七往返必盡苦際’ 중아 함경 권제54(T1, p.766b) ‘極七往來天上人間。
   七往來已便得苦邊’ 등의 표현이 쓰일 뿐이다. 극칠반생은 현장삼장이 번역한 阿毘達磨
   倶舎論 에 보이는 용어 이다. 다른 표현으로는 極七返, 七返등도 있다.

 

형식 A는 SNV, p.205에 의하면, 육근(六根)의 발생과 소멸, 그리고 좋은 맛과 위험과 해탈을 있는 그대로 알고 있다((Yato kho bhikkhave ariyasāvako imesaṃ channam indriyānaṃ samudayañca atthagamañca assādañca ādīnavañca nissaraṇañca yathābhūtam pajānāti)라는 설명문에 이어져서 설해져 있다.

 

이상에서 A의 경우, ‘악취에 떨어지지 않는 자’는 재가적(在家的)인 사불괴정(四不壊浄)설에 대한, 또 ‘결정된 자’와 ‘최고의 깨달음을 목적으로 하는 자’란 견도적(見道的)인 여실지견(如実知見)설에 대한 배려로부터 설해졌다(藤田宏達, 1959 : 467)고 해석되고 있다. 확실히, ①은 깨달음과는 관계가 없지만, ②와 ③은 깨달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①을 재가적, ②와 ③을 견도적으로 나누어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①은 재가적이면서, 출가적이기도 하다. 사불괴정도 재가・출가, 모두에게 설해지고 있다.   

 

또 A에는 천계와 인간계를 윤회한다고 하는 발상이 전연 없는 반면, B에는 적극적인 윤회관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물론 A에도 악취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는 표현으로부터 윤회의 발상을 엿볼 수 있지만, 윤회를 반복하여 결국 고통을 종식시킨다고 발상보다는 지금이 세상에서 최고의 깨달음을 획득할 수 있는 자가 된다고 하는 발상이 강하다고 생각한다.  

 

또 A와 B의 전후를 구성하고 있는 내용을 보아도, 그 차이가 분명하다. B의 경우, A에는 없는 설명문이 있다. 즉 ‘계를 완전히 구족한자, 定과 慧가 불완전한 자 …’라는 삼학의 설이 보인다. 또 B는 A에는 보이지 않는 5종류의 불환과 함께 설해져 있다. 이것을 통해 B는 A보다 나중에 성립한 정의임을 알 수 있다.10)   

10) A에 관해서는 이미 三友健容(1979:57)는 ‘예류’라는 말이 확정하고 난 뒤의 
    사고방식이라고 주장하고 있고, 藤田宏達(1959:467)는 ‘악취에 떨어지지 않
    는 자’는 재가적인 사불괴정에 대한 배로로서, 또 ‘결정된 자’는 견도적인 여실
    지견설의 배려로서 설해졌다고 밝히고 있다. 두 사람 모두 A는 예류설의 원형
    이 아니라는 생각을 보이고 있고, A보다 먼저 성립한 것은 사예류지라는 견해
    를 보이고 있다.

 

한편 A와 B가 혼합되어 있는 듯한 경문도 있다. 그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ye ariyasaccāni vibhāvayanti, gambhīrapaññena sudesitāni ; kiñcāpi te honti bhusappamattā, na te bhavaṃ aṭṭhamaṃ ādiyanti(Sn.230a~d)

깊은 지혜를 갖고 계신 분에 의해서 잘 설해진 온갖 성스러운 진리를 분명하게 이해한 사람들, 그들은 비록 커다란 게으름에 빠지더라도, 제8의 존재를 받지 않는다.

 

sahāvassa dassanasampadāya, tayassu dhammā jahitā bhavanti ; sakkāyadiṭṭhi vicikicchitañ ca, sīlabbataṃ vā pi yad atthi kiñci, catūhapāyehi ca vippamutto, cha cābhiṭhānāni abhabbo

kātuṃ(Sn.231a~f)

이 지견의 구족과 함께, 그들의 생각은 버려진다. 신체가 있다고 하는 견해(有身見), 의심, 그리고 계율과 맹세의 어떠한 것이 있어도 [버려진다]. 네 가지의 나쁜 장소로부터 떠나고, 또 여섯 가지의 무거운 죄를 지을 수 없다.

 

위의 용례는 Sn의 Ratanasutta에 있는 게송이다. 여기에서는 예류라는 말은 사용되지 않지만, 예류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다. 이 게송은 A와 B가 섞여 있는 듯 한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이러한 기술은 다른 운문 경전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산문경전에서도 각각 다른 경전에서 따로 설해져 있지 함께 설해지지 않는 매우 드문 형식을 취하고 있다.   

 

2.사예류지(四預流支,sotāpattiyaṅga)

사예류지에도 두 가지의 내용이 있다.

 

형식 A :

‘성제자는 붇다에 대해서 불괴(不壊)의 믿음을 구족한다. … 진리에 대해 불괴의 믿음을 구족한다. … 상가에 대해 불괴의 믿음을 구족한다. … 성자에 의해서 칭찬된 계를 구족한다. … 이들 사예류지를 구족한다. … 지옥・축생・아귀의 소멸로부터 예류가 되어, 악취에 떨어지지 않는 자가 된다.’

11) SN.II, p.69~70 ; SN.V, p.343, 396~398. SN의 예류상응(pp. 396~398)에는 
    Kāligodha(39경)와 Nandiya(40경)와의 논의가 있다. Kāligodha는 불법승에 
    대한 불괴의 믿음의 구족에 의해서 예류가 된다고 말하는데 반해, Nandiya는 
    불법승에 계를 더한 네 가지 불괴의 믿음의 구족에 의해서 예류과 된다고 말
    한다. 이에 대해 붇다는 Nandiya의 설을 승인한다는 것이 대략적인 내용이다.

 

형식 B :
‘선사(善士)에 친근한 자가 예류지이고, 정법을 청문하는 자가 예류지이고, 바르게 주의집중하는 자가 예류지이고, 진리와 진리에 속한 것을 실천하는 자가 예류지이다.’  
12) DN.III, p.227 ; SN.V, p.347, 404, 411. Sappurisasaṃsevo sotāpattiyaṅgaṃ 
    saddhammasavanaṃ sotāpattiyaṅgaṃ yonisomanasikāro sotāpattiyaṅgaṃ 
    dhammānudhammapaṭipatti sotāpattiyaṅgaṇ ti 

인용문 가운데, A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이라고 하면, 믿음(信,pasāda)이다. 따라서 A와 B의 내용을 조사하기에 앞서, 니까-야에는 믿음이 어떻게 설해져 있는지를 잠시 살펴보도록 한다. 불교의 믿음이라고 하면, 말할 것도 없이 불법승 삼보에 대한 믿음일 것이다. 그런데 불교는 어떠한 믿음을 참다운 믿음이라고 말하는 것일까.  

A에 대해서 三友健容(1979 : 59)와 真野龍海(1972 : 338)는 예류설의 고형태이고, 초보적임을 지적하고 있다. 확실히, 삼보에 귀의하고 계를 구족한다는 것은 매우 기초적인 것으로 불교에 귀의할 때 반드시 서원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삼보 귀의와 계 구족으로 예류가 된다고 하는 것은 분명 지금껏 고찰해온 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출가자와 재가자가 출가하거나 삼보에 귀의할 때 서원하는 것은 예류와는 관계없이 설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편 B는 출가자만을 대상으로 해서 설하고 있다. 그런데, SN.V, 예류상응 제56경부터 58경에, 이 네 가지 법의 수습이 예류로부터 아라한 까지 이끈다고 하는 내용이 설해지고 있다. 이에 대해서, 三友健容(1979 : 59)는 ‘이 사예류지(四預流支)는 이미 예류과 사상이 완성된 후에 형성된 사고방식으로, 출가생활을 계속해서 득과(得果)해 가는 때에, 항상 마음에 새겨두어야 할 것’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真野龍海(1972 : 338)는 A와 B는 모두 ‘다소 형태를 갖춘 발달한 정형구가 되기 전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B의 경우, AN.V, Yamakavagga의 61경에는 예류와는 관계없이, 출가자가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기본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는 경전도 있다. 그러므로 A와 B는 모두 당시 이미 널리 인정되고 있었던 출가자와 재가자의 기본적인 자세를 강조해 넣은 설로서 인정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이 둘은 모두 예류의 개념이 확립하기 전의 것이라고 생각된다.  

 

3.예류의 별칭
니까-야 가운데는 예류를 의미하는 또 다른 호칭들이 보인다. 일종(一種, ekabījin)과 가가(家家, kolaṃkola)가 그것이다. 이들 일종과 가가는 매우 흥미로운 내용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위에서 본것과같은 예류의 정의와는 매우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도록 한다.     

그는 삼결(三結)을 끊고서, 가가가 되어, 2회 혹은 3회 양가의 집에 유전하고 윤회해서, 고통의 마지막을 짓는다. 그는 삼결을 끊고서 일종이 되어 1회만 인간의 존재를 일으켜서 고통의 마지막을 짓는다.  
So tiṇṇaṃ saṃyojanānaṃ parikkhayā kolaṅkolo hoti dve va tīṇi vā kulāni sandhāvitvā saṃsāritvā 
dukkhassa antaṃ karoti. So tiṇṇaṃ saṃyojanānaṃ parikkhayā ekabījī hoti ekaṃ yeva mānusakaṃ 
bhavaṃ nibbattetvā dukkhassa antaṃ karoti(AN.I, p.233)

이와 같이 일종과 가가는 삼결을 끊은 계위(階位)이다. 삼결을 끊었다는 것은 바로 예류과의 속성이고, 예류과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끊지 않으면 안 되는 번뇌이다. 이 용례에 의해서, 예류에는 최대 7회 윤회하는 자(sattakkhattuparamo)로부터, 2, 3회 다시 태어나는 자도 있고, 마치 일래과(一來果)와 같이 일회만 윤회하는 자도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가가와 일종의 경우는 아라한이 되는 장소가 욕계 가운데에서 인간계임을 분명하게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일종과 가가의 정의가 명확하게 나타나 있는 것은 위의 용례뿐이다. 다른 곳에서는 그 명칭만이 전하고 있다(AN.V,pp.119~120 ; SN.V, pp.204~205). 이 가운데, SN.V의 내용은 오근(五根,pañcannaṃ indriyānam)의 수행정도에 따라서 12단계의 계위가 정해짐을 설하고 있다. 그 가운데 ‘극칠반생’과 ‘일래과’ 사이에 일종과 가가가 위치해 있다.  

그런데 이 일종과 가가의 경우, 그 용례가 적을뿐만 아니라 ‘극칠반생’이라는 개념이 형성된 문헌에서만 보인다. 따라서 예류과를 얻은 사람의 사후에 대해서 단순히 악취에 떨어지지 않는 자라고 하는 개념에서 윤회의 회수에 의해서 예류의 분화가 더욱 진행한 형태로 발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보면 당연한 것이다. 즉 ‘극칠반생’이라고 하는 것은 ‘최대 7회 다시 태어나는 자’임으로, 최대 7회까지 윤회하지 않고도 최후의 고통을 만들 수 있다고 하는 발상이 이미 포함되어 있는 개념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일종’과 ‘가가’는 ‘극칠반생’을 더욱 명확히 구분한 것에 지나지 않는 개념이라고 생각된다.  

한편 이 일종과 가가의 경우, 일래와 관계가 있다고 말해지고 있다. 이 점에 대해서 반드시 집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으나, 다른 논문에서 다루고자 한다.  

Ⅴ. 맺음말

예류설은 하나의 개념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복수의 의미를 갖고 있다. 예류의 성립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서 우선 운문경전에 나타난 sota(흐름)의 용례부터 살펴보았다. 그 결과, 원래 sota의 의미는 예류의 의미를 갖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dhammasota의 등장으로 비로소 예류의 기본적인 의미를 볼 수 있었다.  

한편, 사향은 사과 이후에 파생적으로 고안되었다고 하는 藤田宏達의 설에 근거해서, 운문경전에서 사쌍팔배(四雙八輩)의 용례가 나오는 Sn의 Ratanasutta를 면밀히 고찰, 이 경전이 후대의 경전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고찰했다. 또한, 운문 경전에는 예류향이 없음을 확인했다. 따라서 사향사과가 어느 시점에 일시에 고안된 것이 아니라, 단계적으로 성립되어 후대에 사향사과로 개념화 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이러한 가설에 따르면 예류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예류과가 먼저 성립하고, 나중에 예류향이란 관념이 성립했을 것으로 보아야 할것이다.    

그리고 예류설은 크게 네 단계에 걸쳐 발전했음을 고찰했다. 사향사과의 예류설의 경우, 삼결이라는 번뇌의 표현이 사용되어 있고, 깨달음과 고통의 소멸이 필연적으로 결정되어 있음을 보았다. 그에 반해, 사예류지의 경우는 수행 계위보다 신앙적이고 교훈적인 내용으로서 매우 소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사예류지가 보다 이른 시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그 다음으로 사향사과의 예류(A)가 성립하고, 마지막으로 철저히 윤회사상에 근거한 극칠반생의 예류설이 고안되었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