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 논문및 평론/교리 및 수행

두 가지 해탈(解脫)의 의미에 대한 고찰/정준영

실론섬 2015. 4. 7. 07:41

두 가지 해탈(解脫)의 의미에 대한 고찰

- 니까야(Nikāya)를 중심으로 -

정준영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1. 들어가는 말

2. 초기경전에서 나타나는 vimokkha에 대하여

   1) 세 단계의 vimokkha

   2) 여덟 단계의 vimokkha

3. 초기경전에서 나타나는 vimutti에 대하여

   1) 심해탈

   2) 혜해탈

   3) 양분해탈

4. 마치는 말

 

1. 들어가는 말

 

불교는 ‘해탈(解脫)’을 위한 종교다. 하지만, 불교수행의 목표인 해탈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정의 내려지지 않은 것 같다. 본고는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이해되는 해탈을 역사적으로 구분하기에 앞서, 초기불교를 기준으로 해탈의 의미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해탈로 번역되는 빠알리(pāli)어는 ‘vimokkha(vimokha)’, ‘vimutti’, ‘vimutta’, ‘mutti’, ‘mutta’, ‘mokkha’, ‘parimutta’, ‘parimutti’등이 있다. 이들은 대부분 초기경전에서 다양한 용례로 활용되나 ‘해탈’이라는 공통된 번역어를 사용한다. 따라서 이와 같이 동일한 번역어의 사용은 이들이 모두 윤회로부터 벗어나는 해탈, 즉 불교수행의 최종목표인 열반(涅槃)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불교수행의 목표인 해탈은 이처럼 다양한 용어로 표현되는 바와 같이, 여러 단계 혹은 중의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예상할 수 있다. 이에 본고는 초기경전에 자주 등장하는 위목카(vimokkha, 解脫)와 위뭇띠(vimutti, 解脫)라는 두 가지 해탈을 통해, 해탈로 번역되는 용어들이 경전에서 어떤 의미로 사용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본고는 크게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선정(禪定, jhāna)의 단계와 같이, 해탈의 성취과정을 나타내는 vimokkha에 대한 용례를 살펴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집중과 지혜의 작용으로 나타나는 vimutti 즉, 심해탈, 혜해탈, 그리고 양분해탈의 관계를 살펴보는 것이다. 그동안 해탈에 대한 연구는 Lily De Silva, Richard Gombrich, Alexander Wynne 그리고 雲井昭善 등이 심도 있게 진행해왔다. 특히, Lily De Silva는 초기경전을 바탕으로 세 가지 해탈(vimutti)의 활용과 의미를 보여줌으로써, 그동안 다양하게 이해되었던 해탈의 의미를 보다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해탈을 얻도록 이끌어주는 사마타(止)와 위빠사나(觀)수행의 관계에 대해서는 충분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본고는 vimokkha의 단계적 해탈뿐만 아니라, vimutti로 나타나는 심해탈, 혜해탈, 그리고 양분해탈의 분석을 통해, 해탈을 위해 어떤 과정의 수행이 필요한지, 그리고 이들은 서로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살펴볼 것이다. 이러한 연구는 해탈의 의미뿐만 아니라, 오늘날 논서와 주석서에 의지하는 상좌부 전통의 수행이 초기경전에서 설명하는 해탈을 위한 수행에 얼마나 많은 준거가 될 수 있는지 살펴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 

 

2. 초기경전에서 나타나는 vimokkha에 대하여

 

해탈로 번역되는 빠알리어 ‘위목카(vimokkha)’는 기본형 ‘√muc (to unloose, 풀다)’에서 파생된 남성명사로, 그 의미는 ‘해탈’, ‘해방’, ‘자유’ 등을 나타내고 ‘deliverance’, ‘release’, ‘emancipation’ 등으로 영역된다. 즉, 인간이 세속적(世俗的)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되는 상태를 말한다. 초기경전에서 ‘위목카(vimokkha)’는 크게 두 가지로 보여 진다. 하나는 세 가지 단계를 통하여 선정의 성취와 관련하여 설명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팔해탈(aṭṭha vimokkha, 八解脫)을 통하여, 물질, 무색계 선정 그리고 상수멸정과 관련하여 설명하는 것이다. 

 

1) 세 단계의 해탈(vimokkha)    

「웨다나 상윳따(Vedanāsaṃyutta)」는 해탈(解脫, vimokkha)의 점진적인 단계에 대해서 세 가지로 설명한다. 경전은 해탈을 ‘세간적[육체적]인(sāmisa)’, ‘출세간적[정신적]인(nirāmisa)’ 그리고 ‘그보다 더 출세간적[정신적]인(nirāmisa nirāmisatarā)’이라는 세 단계로 분류하고, 이들을 희열(pīti, 喜), 즐거움(sukha, 樂), 평정함(upekkhā, 捨)과 연관하여 설명하고 있다. 첫 번째로, 사람은 오근(五根)과 관련된 다섯 가지의 감각적 욕망(pañcime kāmaguṇā)을 통해 ‘육욕(肉慾)에 집착’을 지니고, 마음에 들고, 매력 있고, 욕심과 탐심을 일으키게 된다. 따라서 이처럼 감각적 욕망을 벗어나 물질(rūpa, 色)의 영역과 함께 조건 지어진 해탈을 세간적[육체적]인 해탈(sāmisa vimokkha)이라고 한다. 

 

 수행자는 첫 번째 해탈을 통해, 육욕(肉慾)에 대한 집착이나 감각적 욕망으로부터 벗어나, 수행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법을 멀리하게 된다. 예를 들어, ‘출세간적인 희열(nirāmisa pīti)’은 감각적 욕망으로부터 벗어나 초선(初禪)을 거쳐 이선(二禪)에 머무는 것이고, ‘출세간적인 즐거움(nirāmisa sukha)’은 삼선(三禪)에 머무는 것이며, 그리고 ‘출세간적인 평정함(nirāmisa upekkhā)’은 괴로움도 즐거움도 없고, 주시(sati)가 평온과 함께하는 청정한 사선(四禪)에 머무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두 번째 해탈은 이러한 세간적인 선정마저도 벗어나, 비물질(arūpa, 色)의 영역과 함께 조건 지어진 해탈을 ‘출세간적[정신적]인 해탈(nirāmiso vimokkha)’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보다 더 출세간적[정신적]인(nirāmisa nirāmisatarā)’ 해탈은 세간과 출세간을 벗어나, 번뇌를 완전히 소멸하는 것을 말한다(khīṇāsava). 즉, 비구가 탐욕(rāgā), 성냄(dosā), 그리고 어리석음(mohā)으로부터 벗어난 마음을 관찰할 때, 그보다 더 출세간적인 해탈이라고 부른다. 다시 말해 첫 번째 해탈은 오근(五根), 혹은 육체와 관련하여 감각적 욕망으로부터 벗어나 색계와 조건 지어진 것을 의미하고, 두 번째 해탈은 색계선정을 지나 무색계와 조건 지어진 것을 말하며, 세 번째 해탈은 탐, 진, 치로부터 벗어나 아라한이 되는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처럼 경전은 해탈(vimokkha)을 세 단계로 나누어 색계와 무색계 선정 그리고 탐진치의 완전한 소멸상태인 열반으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2) 여덟 단계의 vimokkha (八解脫)

또한, 해탈(vimokkha)은 팔해탈이라는 이름으로 초기경전에서 여러 차례 나타난다. 「마하사꾸루다이경(Mahāsakuludāyisutta)」,「마하니다나경(Mahānidāna sutta)」그리고「앙굿따라니까야(Anguttara Nikāya)」는 여덟 단계의 해탈(vimokkha)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나는 나의 제자들에게 여덟 가지의 해탈을 계발할 수 있도록 그 길을 설한다. 우다인이여, 이 세상에 수행자는 

1) 물질[을 지닌 자가]로 물질들을 본다. 이것이 첫 번째 해탈이다. 

2) 안으로 물질들을 지각하지 않으며, 밖으로 물질들을 본다. 이것이 두 번째 해탈이다. 

3) 실로 청정하다고 확신한다. 이것이 세 번째 해탈이다. 

4) 물질에 대한 지각을 모두 벗어남으로, 감각적인 영향의 지각이 사라짐으로, 다양한 지각에 주의    하지 않음으로, ‘무한한 공간’을 알고 ‘무한한 공간의 영역’(ākāsānañcāyatana, 空無邊處定)에    들어가고 머문다. 이것이 네 번째 해탈이다. 

5) ‘무한한 공간의 영역’을 모두 벗어남으로, ‘무한한 의식’을 알고 ‘무한한 의식의 영역’(viññāṇañ     cāyatana, 識無邊處定)에 들어가고 머문다. 이것이 다섯 번째 해탈이다. 

6) ‘무한한 의식의 영역’을 모두 벗어남으로, ‘아무 것도 없음’을 알고 ‘아무 것도 없는 영역’(ākiñca     ññāyatana, 無所有處定)에 들어가고 머문다. 이것이 여섯 번째 해탈이다. 

7) ‘아무 것도 없는 영역’을 모두 벗어남으로,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영역’(nevasaññā    -nāsaññāyatana, 非想非非想處定)에 들어가고 머문다. 이것이 일곱 번째 해탈이다. 

8)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영역’을 모두 벗어남으로, ‘지각과 느낌의 중지’(saññāveday     itanirodha, 想受滅定)에 들어가고 머문다. 이것이 여덟 번째 해탈이다.         

 

Ven. Vajirañāṇa Mahāthera는 주석서에 준하여 이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 번째 해탈[Rūpi rūpāni passati, 內有色想觀外色解脫]의 의미는, 수행자가 자신의 몸을 대상으로 하여 물질에 집중해 얻은 것으로, 그는 내부뿐만 아니라 외부적인 대상에 대해서도 푸른색 등의 까시나(kasiṇa, 遍處)의 물질을 禪의 눈(jhāna-cakkhu)으로 보게 된다. 그런 후에, 그는 같은 물질의 외부적인 대상을 응시하여 표상을 얻게 된다[patibhāga-nimitta, 닮은 표상].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모든 내적, 외적의 대상들을 통하여 선정을 얻고 경험하게 된다. 머지않아 수행자는 표상을 통한 집중을 충분히 확신하게 되고 장애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그러므로 이를 첫 번째 해탈라고 부른다. 두 번째 해탈[Ajjhattaṃ arūpasaññi bahiddhā rūpāni passati, 內無色想觀外色解脫]은 수행자가 내적으로 가진 물질(rūpa)을 인식하지 않고, 이들을 외적으로만 보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수행자가 외적인 대상[kasiṇa]을 통하여 선정을 얻는 경우를 말하는 경우라고 볼 수 있다. 세 번째 해탈[Subhaṃ iti eva abhimutto hoti, 淨解脫身作證具足住]은 수행자가 오직 [kasiṇa의] ‘청정함, 맑음, 밝음’ 등에 확신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마음이 청정한 상태는 모든 존재에 향하여 사랑, 연민, 동정 그리고 평정심을 실천한 결과로 나타나게 된다. 결국, 이 상태는 맑고 즐거운 생각에만 전념하게 되는 것이다. 네 번째 해탈에서 일곱 번째 해탈은 무색계 선정의 요소와 같으며, 여덟 번째 해탈은 想受滅定의 상태와 같다. 이처럼 해탈에는 8가지 단계가 있으며 이들은 서로 다른 상승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다. 즉, 팔해탈은 물질과 비물질의 단계를 초월하여 열반의 상태로 묘사되는 중지(滅)까지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세 가지 단계의 해탈과 팔해탈은 색계, 무색계, 열반이라는 의미에서 유사한 구조를 지닌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팔해탈과 팔선정(八禪定)이 여덟 가지라는 점에서 같지만, 내용 면에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첫 번째로부터 세 번째 해탈(vimokkha)과 첫 번째로부터 네 번째 선정(jhāna)은 이름과 의미에 있어 서로 다른 상승적 구조를 지닌다. 그리고 팔선정이 非想非非想處定으로 마무리되는 반면에, 팔해탈은 想受滅定으로 마무리되고 있다. 상수멸정이 사마타와 위빠사나의 병행을 통하여 얻어지는 불교수행만의 특징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상수멸정을 여덟 번째 해탈로 담고 있는 팔해탈의 실천이 非想非非想處定을 마지막으로 가지는 팔선정에 비해 불교의 수행단계에 가깝다고 가정할 수 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팔선정의 성취를 장려하고 스스로 실천하셨기에, 해탈은 선정의 성취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마하니다나 경(Mahānidāna sutta)」은 팔해탈과 더불어 양분해탈의 중요성을 설명한다. 

 

‘아난다여, 어떤 비구는 이러한 여덟 가지 해탈(aṭṭha vimokkha)을 순서대로, 역순으로, 순서대로 역순으로 얻어 그 안에 머문다. 그가 원할 때,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만큼 언제든지 이[해탈]에 들어가고 이로부터 나온다. 그는 모든 번뇌를 제거하고 번뇌가 없는 심해탈과 혜해탈을 지금 여기에서 높은 지혜(abhiññā)와 함께 성취하여 머무른다. 아난다여, 이것을 양분해탈(ubhatobhāgavimutti)이라고 부른다. 아난다여, 이 양분해탈보다 더 높고 뛰어난 양분해탈은 없다.’      

 

경전은 팔해탈과 더불어 심해탈, 혜해탈, 그리고 양분해탈을 통한 번뇌의 소멸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즉, 초기경전에서 vimokkha라는 해탈은 번뇌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상태뿐만 아니라 단계적으로 번뇌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수행자는 이 과정을 통해 vimutti라는 해탈을 얻게 된다.  

 

3. 초기경전에서 나타나는 vimutti에 대하여

 

해탈로 번역되는 빠알리어 ‘위뭇띠(vimutti)’ 역시, ‘√muc’에서 파생된 여성명사로서 ‘위목카(vimokkha)’와 마찬가지로 ‘해탈’, ‘해방’, ‘자유’ 등의 의미를 지니고, ‘release’, ‘deliverance’, ‘emancipation’ 등으로 영역된다. 즉, vimutti는 묶이거나 구속된 상태로부터 [집중과 지혜를 통해] 자유롭게 벗어나거나, 풀려나는 것을 의미한다. 「마하삿짜까경(Mahāsaccaka sutta)」에 따르면, 부처님께서는 사선정을 성취한 이후에, ‘전생에 대한 기억(pubbe-nivāsānussati, 宿住智)’을 첫 번째 지혜로, ‘신의 눈(dibba-cakkhu, 天眼通)’을 두 번째 지혜로, 그리고 ‘번뇌의 소멸(āsavakkhaya, 漏盡智)’을 세 번째 지혜[三明]로 얻는데, 이때 漏盡智와 함께 세 가지 vimutti를 얻게 된다. 이들은 ‘[감각적]욕망의 번뇌(kāmāsava)’로부터 마음을 vimutti하고, ‘존재의 번뇌(bhavāsava)’로부터 마음을 vimutti하고, ‘무지의 번뇌(avijjāsava)’로부터 마음을 vimutti하는 것이다. 즉, 부처님께서는 세 가지 vimutti를 ‘번뇌를 소멸하는 지혜’로써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아나빠나상윳따(Ānāpānasaṃyutta)」는 호흡에 대한 주시(sati)와 집중(samādhi)을 통하여 사념처(四念處)를 원만히 수행하면, 칠각지(七覺支)가 생기고 이를 통해 진정한 지혜(vijjā)와 vimutti를 완성한다고 한다. 즉, vimutti는 정념(正念)과 정정(正定)수행 모두를 통하여 얻을 수 있다. 또한, 초기경전에서 vimutti는 마음, 지혜 등과 함께 복합어의 형태로 자주 등장한다. 이들은 심해탈(心解脫, cetovimutti), 혜해탈(慧解脫, paññāvimutti), 그리고 양분해탈(兩分解脫, ubhatobhāgavimutti)이다. 심해탈은 일반적으로 ‘마음의 풀려남’, 혜해탈은 ‘지혜의 풀려남’ 그리고 양분해탈은 ‘양쪽 길의 풀려남’을 의미한다.1)

1) 본고에서는 해탈이라는 한역을 공용한다. 하지만, 경전연구소는 해탈(解脫)의 우리말 
   번역어로 ‘풀려남’을 시도해보았다. 풀려남(해탈)은 vijjā와 함께 자주 나타나는데 ‘[진
   리를] 앎과 풀려남’(vijjā-vimutti)은 초기 불교 수행의 마지막 경지를 의미한다. ‘호흡
   에 대한 마음챙김경’(ānāpānassati-sutta)(M. III. 82)에 의하면 ‘입출식념 → 사념처 → 
   칠각지’를 순차적으로 닦아서 결과적으로 vijjā-vimutti를 갖추게 된다. 칠각지를 갖춘 
   다음에 vijjā-vimutti를 갖추는 이야기는 ‘주제로 모은 가르침’ 「覺支相應」(S. V. 73), 
   「入出息相應」(S. V 329, 333, 335) 등에 제시되어 있다. 「覺支相應」에서는 ‘감각기관의 
   제어(indriyasaṃvara) → 세 가지 선행(tīni sucaritāni) → 사념처 → 칠각지 → vijjā-
   vimutti의 순서로 제시되어 있다. Th v. 60, A. V. 114, 118의 주석설명에 의하면 vijjā는 
   삼명(三明), vimutti는 마음의 [뛰어난] 풀려남과 열반 또는 아라한과(阿羅漢果)라고 한
   다. (SV. III. 984, SV. III 1057) ‘두 법을 직접 경험해야만 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 [진리
   를] 앎과 풀려남이다. 이 두 법을 직접 경험해야 한다.’ (D. III 274) ‘비구들이여, 입출식
   념을 닦고 자주 실천함으로써 사념처가 갖추어진다. 사념처를 닦고 자주 실천함으로써 
   칠각지가 갖추어진다. 칠각지를 닦고 자주 실천함으로써 지혜와 해탈이 갖추어진다.’
   (M. III 82) 참고) DA. I. 313, III. 879, MA. I. 165, SA. II. 175.

 

1) 심해탈(心解脫, cetovimutti)

세 가지 해탈 가운데 혜해탈과 양분해탈은 불교수행의 최종목표인 열반을 의미하지만, 모든 심해탈이 열반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심해탈은 혜해탈과 함께 성취되었을 경우와 ‘흔들리지 않는 심해탈(akuppā cetovimutti, 不動心解脫)’을 얻은 경우에 열반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해「다숫따라경(Dasuttara sutta)」에서 사리불(사리뿟타)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어떤 한 가지 법을 실현해야 하는 것입니까? 흔들리지 않는 심해탈입니다. 이 한 가지 법을 실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들 열 가지 법은 사실이고, 옳고, 진실이고, 거짓이 아니며, 그렇지 않은 것이 아니며, 바르고, 여래께서 깨달으신 것입니다.’ 

 

또한,「초전법륜(Dhammacakkappavattana sutta)」에서 ‘흔들리지 않는 심해탈’은 윤회 없는 부처님의 깨달음으로 묘사되고 있다. 초기불교는 심해탈에 대해 크게 두 가지 종류로 설명하는데, 이들은 ‘일시적으로 기쁨이 수반되는 심해탈’과 ‘흔들리지 않는 심해탈’이다. 여기서 일시적인 해탈은 다양한 종류와 단계로 구분된다. 심지어 도덕적으로 완전하게 갖추어지지 않은 사람의 경우에도 일시적인 심해탈을 얻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수행자가 즐거움을 탐닉하지 않고 홀로 지낸다면 심해탈을 성취할 수 있으며, 이러한 해탈은 머지않아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리고「앗타까나가라경(Aṭṭhakanāgara sutta)」은 초선에서부터 심해탈의 성취가 가능한 것으로 설명한다. 이처럼 심해탈은 聖人의 과정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 수행자가 경험하는, 고귀한 삶을 통해서 얻어지는 마음의 해방을 의미한다. 

 

「마하웨달라경(Mahāvedalla sutta)」은 이처럼 다양한 심해탈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들은 네 번째 선정을 성취하여 얻는 ‘괴로움도 즐거움도 없는 심해탈(adukkhamasukhā cetovimutti)’, 무표상에 마음을 기울여서 얻는 ‘표상이 없는(無相) 심해탈(animittā cetovimutti)’, 사무량심을 통해 사방으로 한량없는 마음을 채우는 ‘[네 가지] 한량없는(無量) 심해탈(appamāṇā cetovimutti)’, ‘무한한 의식의 영역(viññāṇañcāyatana, 識無邊處定)’을 극복하여 성취하는 ‘아무것도 없는(無所有) 심해탈(ākiñcaññā cetovimutti)’, ‘자아나 자아에 속하는 것은 없다’라고 성찰하여 얻는 ‘비어있는(空) 심해탈(suññata cetovimutti)’, 그리고 ‘표상이 없는 심해탈’ 가운데 ‘흔들리지 않는 심해탈’이다. 특히, ‘흔들리지 않는 심해탈’은 이들 중에 최상의 상태라고 설명한다. 경전을 통하여 더욱 선명해지는 것은 심해탈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며, 이들은 다양한 수행 방법에 의해서 성취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심해탈과 비교되는 다른 해탈을 살펴보면 심해탈의 특징은 명확해진다. 초기경전에서 혜해탈과 양분해탈의 경우에는 각각 혜해탈자(慧解脫者)와 양분해탈자(兩分解脫者)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이는 혜해탈과 양분해탈을 얻은 사람이 있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심해탈의 경우 심해탈자(心解脫者)라는 용어는 찾아보기 어렵다. 따라서 경전 상에서 등장하는 다양한 심해탈 중에 ‘흔들리지 않는 심해탈’을 제외한 심해탈은 독자적으로 아라한을 의미한다고 보기 어렵다. 그러므로 모든 해탈이 탐, 진, 치로부터 벗어난 열반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며, 해탈과 열반을 동의어로 사용하는 것 역시 재고의 여지를 남긴다. 물론 심해탈이 다른 해탈과 조화를 이루는 경우는 다르다.「앙굿따라니까야(Anguttara Nikāya)」는 심해탈과 혜해탈의 이익에 대해, 사마타(止)와 위빠사나(觀)와 관련하여 설명한다.2)  

2)「끼따기리경(Kitāgiri sutta, M. I. 477)」은 이 세상에서 보이는 7가지 종류의 수행자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이들은 1) 양분해탈자(ubhatobhāgavimutto) : 고요한 해탈
   (vimokkha)을 몸으로 체험하고, 지혜로 모든 번뇌를 소멸한 아라한(無學), 2) 혜해탈자
   (paññāvimutto) : 고요한 해탈을 몸으로 체험하지 않고, 지혜로 모든 번뇌를 소멸한 아
   라한, 3) 몸으로 체험한 자(kāya-sakkhī) : 고요한 해탈을 몸으로 체험하고, 지혜로 번
   뇌의 일부를 소멸한 有學, 4) 견해를 성취한 자(diṭṭhippatto) : 고요한 해탈을 몸으로 체
   험하지 못하고, 지혜로 번뇌의 일부를 소멸하고, 여래의 말씀을 잘 아는 有學, 5) 믿음
   으로 해탈한 자(saddhāvimutto) : 고요한 해탈을 몸으로 체험하지 못하고, 지혜로 번
   뇌의 일부를 소멸하고, 믿음을 지닌 有學, 6) 법을 따르는 자(dhammānusārī) : 고요한 
   해탈을 몸으로 체험하지 못하고, 지혜로 모든 번뇌를 소멸하지 못하고, 五力을 지닌 
   有學, 7) 믿음을 따르는 자(saddhānusārī) : 고요한 해탈을 몸으로 체험하지 못하고, 
   지혜로 모든 번뇌를 소멸하지 못하고, 여래를 믿으며 五力을 지닌 有學이다. 비고) 
   Gombrich 1997. p.101, M. I. 435. A. IV. 422f, A. V. 34f, M. I. 350f, A. V. 141f.

 

‘비구들이여, 사마타 수행을 하면 어떤 이익을 얻습니까?’ ‘마음(citta)이 계발됩니다.’ ‘마음이 계발되면 어떤 이익을 얻습니까?’ ‘탐욕(rāga)이 제거됩니다.’ ‘비구들이여,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어떤 이익을 얻습니까?’ ‘지혜(paññā)가 계발됩니다.’ ‘지혜가 계발되면 어떤 이익을 얻습니까?’ ‘무지(avijjā)가 제거됩니다.’ ‘비구들이여, 탐욕에 의해 오염된 마음은 자유롭지 못하고 무지에 의해 오염된 지혜는 계발되지 않습니다.’ ‘비구들이여, 탐욕에서 벗어남으로 심해탈을 얻고 무지에서 벗어남으로 혜해탈을 얻습니다.’ 

 

심해탈은 사마타 수행을 통하여 얻어지는 집중과 관련이 있으며, 이를 통해 탐욕으로부터 벗어나고, 혜해탈은 위빠사나 수행을 통하여 얻어지는 지혜와 관련이 있으며, 이를 통해 무지로부터 벗어난다. 사마타 수행의 목적은 심해탈이고, 위빠사나 수행의 목적은 혜해탈을 의미한다. 결국, 이들의 조화가 탐욕과 무지를 제거하는 요인이 된다는 것이다. 상기 경전에서 언급된 두 용어, 탐욕과 무지는 모두 10가지 속박(Samyojana)에 공통적으로 해당한다.「마할리경(Mahāli sutta)」은 이러한 10가지 속박을 설명한다. 이들은 5가지 낮은 속박과 5가지 높은 속박으로 구성되어 있다. 5가지 낮은 속박(orambhāgiya-samyojana, 五下分結)에는 1) 유신견(有身見, sakkāya-diṭṭhi), 2) 회의적 의심(vicikicchā), 3) 계율이나 의식에 대한 집착 (silabbata-parāmāsa, 戒禁取見), 4) 감각적 욕망(kāma-rāga), 5) 성냄(byāpāda, 악의)이 있고, 5가지 높은 속박(uddhambhāgiya-samyojana, 五上分結)에는 6) 色界에 대한 욕망(rūpa-rāga), 7) 無色界에 대한 욕망(arūpa-rāga), 8) 아만(我慢, māna), 9) 들뜸(uddhacca) 그리고 10) 무지(avijjā)가 있다. 경전의 설명에 따르면, 수행자가 예류과를 얻으면 ‘사견’, ‘회의적 의심’,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인 1)~3)의 속박이 사라진다. 두 번째로 수행자가 일래과를 얻으면 예류과에서 제거한 더 이상의 어떤 속박도 제거하지 못하지만 남은 오염 4)~5)을 약화시킨다. 세 번째로 수행자가 불환과에 들면 4) 감각적 욕망과 5) 성냄이 완전하게 제거된다. 이로써 1)~5)의 ‘오하분결’이 모두 제거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라한이 되면 6)~10)번의 나머지 모든 속박이 사라진다. 

 

이들 10가지 속박 가운데 상기 경전에서 언급된 탐욕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하나는 낮은 속박의 감각적 욕망(kāma-rāga)이고, 다른 하나는 높은 속박의 色界와 無色界에 대한 욕망이다. 낮은 속박의 감각적 욕망은 심해탈을 통하여 벗어나고, 높은 속박의 무지는 혜해탈을 통해 벗어날 수 있다. 즉, 혜해탈을 통해 무지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심해탈보다 높은 위치라는 것이다. 물론 높은 속박의 요소 안에도 色界와 無色界의 욕망이 들어있다. 따라서 낮은 속박의 욕망은 심해탈을 통해서, 높은 속박의 욕망과 무지는 심해탈과 혜해탈의 조화를 통하여 벗어난다고 유추할 수 있다. 결국, 심해탈과 혜해탈로 이끄는 사마타와 위빠사나의 조화로운 수행을 통하여 모든 종류의 탐욕과 무지를 제거하고 최종의 열반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자료를 통해, 심해탈은 사마타 수행을 통해 얻어지고, 또한 사마타를 통한 심해탈만으로는 완전한 해방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三學의 定만으로는 최종의 목표인 열반에 도달하는 데 충분하지 못하다. 집중의 계발은 혜해탈과의 조화를 통해 수행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것이다.「마하마룬끼아경(Mahāmālunkya sutta)」은 이와 같은 사실을 선명하게 나타내고 있다.3) 수행자는 사마타 수행을 통하여 선정의 성취와 심해탈을 얻고, 심지어 선정도 변화한다는 무상함의 혜해탈을 통해 아라한을 성취한다. 사마타 수행이나 심해탈의 성취는 수행자를 완전한 깨달음으로 이끄는 데 충분하지 못하다. 하지만, 사마타의 지원 없이 지혜를 갖출 수 있는지, 그리고 그렇게 얻은 지혜만으로 최종의 목표를 성취하는 데 충분한지에 대해서는 신중한 고찰이 필요하다.「앙굿따라니까야」에서 사리뿟따는 ‘존자여, 실로 지혜와 실천을 제외하여, 실천(caraṇa, 德行)에 실패한 凡夫는 있는 그대로 알지도 보지도 못한다. 그러나 실천을 지닌 자는 있는 그대로를 알고 본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그는 고통을 제거하는 데 ‘지혜(vijjā, 明智)’만으로 충분하다는 견해를 부정하고 있다. 즉, 지혜만으로는 부족하고 충분한 실천과의 조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세카경(Sekha sutta)」은 바람직한 깨달음의 과정을 지혜와 실천으로 나누고, 실천의 방법으로 禪定의 계발을 포함시킨다.

3) M. I. 437 : 아난다여, … 첫 번째 선정을 성취하여 머문다. … 그는 거기에 서서 번뇌의 
   소멸을 얻는다. 만약 번뇌의 소멸을 얻지 못하면, 법에 의한 애착과 법에 대한 기쁨을 
   지니고, 5가지 낮은 속박의 요인을 제거하여 홀연한 존재(化生)로 태어난다. 거기에서 
   돌아오지 않는 不還으로 바로 반[완전한]열반에 든다.「마하마룬끼아경(Mahāmālunkya 
   sutta)」)

 

마하나마여, 또한 고귀한 제자가 계를 갖추었다면 이것은 그의 실천입니다. ……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 즐거움으로 머무르는 사선정을 뜻대로, 어려움 없이, 성취한다면 그것이 그의 실천(caraṇa)입니다. …… 그곳에서 죽은 뒤에 여기서 태어났다라고 그는 자신의 전생에 대해서 여러 가지 삶을 자세히 기억한다면 이것은 그의 지혜입니다. …… 그는 여기서 번뇌 없는 심해탈과 혜해탈을 스스로 알고 깨달아 성취한다면 이것은 그의 지혜(vijjā)입니다. …… 지혜와 실천을 갖추었다고 부릅니다.            

 

이처럼 심해탈 자체만으로는 최종의 해방을 얻는 데 충분하지 못하다. 이는 혜해탈과 함께 조화를 이루게 되었을 때, 지혜와 실천의 완전함을 누리는 붓다와 아라한의 공통적 성질 안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살레야까경(Sāleyyaka sutta)」역시 심해탈과 혜해탈의 조화를 통한 번뇌의 소멸을 설명하고 있다. 또한,「마하왓차곳따경(Mahāvacchagotta sutta)」에서 부처님은 제자들 중에 500명 이상이 심해탈과 혜해탈을 얻어 번뇌를 제거했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심해탈과 혜해탈의 조화가 열반으로 이끈다는 것은 여러 자료들을 통해서 선명해졌다. 그러나 여기서 다시 고려해봐야 할 문제가 있다. 과연 이들의 조화 없이도 아라한의 성취가 가능한가이다. 이것은 심해탈의 성취 없이 혜해탈의 성취가 가능한 것인지, 심해탈을 얻지 않은 혜해탈자가 있는지에 대한 문제로 대두된다. 

 

2) 혜해탈(慧解脫, paññāvimutti)

혜해탈은 ‘지혜를 통한 해탈’이라는 의미로 초기불교 해탈론 중 가장 중요한 개념이다.「마하니다나경(Mahā-Nidāna sutta)」은 7가지 ‘의식이 머무는 곳(viññāṇaṭṭhiti)’4), ‘지각이 끊어진 존재(asaññā-satta)’ 그리고 ‘非想非非想處’의 일어남과 사라짐, 이들의 매혹과 위험에 더 이상 집착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분명하게 알아 해탈하는 것이 혜해탈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이 경의 주석서인 「수망가라위라시니(Sumaṅgala-Vilāsinī)」는 혜해탈자들을 5가지로 구분하는데, 이들은 선정을 경험하지 않는 건관행자(乾觀行者, sukkha-vipassaka)와 네 가지 색계선정까지만 경험하는 혜해탈자(慧解脫者)들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주석서를 통하여 선정을 체험하지 않는, 사마타 수행이 없이도 아라한이 되는 혜해탈자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순수 위빠사나 수행자(純觀行者)인 건관행자의 등장은 오늘날 남방 상좌부전통의 위빠사나 수행을 정의하는 데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몇몇 연구자에 의해 초기경전을 통한 순수 위빠사나의 가능성이 제시되고 있다. 하지만, 건관행자 역시 5가지 혜해탈자들 중의 한 부류임은 분명하다. 따라서 혜해탈이 기본적으로 색계선정 즉, 사마타를 필요로 하고 있음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므로 건관행자의 출현으로 인해 모든 혜해탈자들이 선정의 성취가 없다고 보는 견해는 수정되어야 한다. 혜해탈자와 관련하여 한 가지 특이한 것은「앙굿따라니까야」에 색계선정뿐만 아니라 모든 무색계선정과 상수멸정을 경험하는 9가지의 혜해탈자들이 설명된다는 것이다. 이는 경전을 통하여 혜해탈의 범위가 대폭 확대되는 예로,「마하니다나경」에서 설명하는 혜해탈자들의 구분과 차이를 보인다.  

4) 7가지 의식이 머무는 곳은 1) 인간, 신, 악처, 2) 초선을 얻고 범중천, 3) 광음천, 4) 변정천,

    5) 공무변처, 6) 식무변처, 7) 무소유처이고 2가지 영역은 8) 無想有頂天, 9) 非想非非想處
   이다. 비구 보디의 설명에 따르면, 1), 2)[일부]는 欲界, 2), 3), 4), 8)은 色界, 그리고 5), 
    6), 7), 9)는 無色界를 말한다. 참고) Bhikkhu Bodhi 2000. p.109 ‘The Great Discourse 
    on Causation’ BPS

 

초기경전을 통해서, 주석서의 설명처럼 사마타수행 없이 혜해탈로 열반을 성취한다고 인용되는 경전은「수시마경(Susīma sutta)」이다. 이 경전에는 5가지 높은 지혜(五神通, abhiñña)5)를 경험하지 않고, 어떤 무색계의 해탈도 경험하지 않은 혜해탈의 아라한들이 나타난다. 어떠한 해탈(vimokkha)에 대한 실질적인 경험이 없이도, 5가지 높은 지혜에 대한 완성이 없이도, 연기를 깨닫고, 무리(蘊, khandas)에 대한 진정한 모습을 이해한다면 열반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경전에서 등장하는 아라한들은 삼명 중에 모든 ‘번뇌의 소멸(āsavakkhaya, 漏盡)’ 지혜를 얻지 않았다는 얘기는 찾아볼 수 없다. 왜냐하면, 경전은 5가지 높은 지혜의 부재만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경전에 대해 Bhikkhu Bodhi 역시 ‘이 경전은 신통과 無色의 부족함에 대해서만 설명하고 있을 뿐, 4가지 선정의 유무에 대한 언급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므로 수시마의 질문이 선정의 문제까지로 확대되지 않았다는 것은 중요하다’라고 설명한다. 경우에 따라 다르겠지만,「찹비소다나경(Chabbisodhana sutta)」6)의 설명에 따르면 모든 ‘번뇌를 소멸하는 지혜’는 4번째 선정을 얻은 후에 성취하게 된다. 즉, 번뇌를 소멸하는 지혜를 계발하기 이전에 5가지 높은 지혜를 모두 성취해야만 하는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5가지 높은 지혜를 성취하지 않고 혜해탈을 얻었다는 설명만으로, 선정의 성취가 없다는 견해는 무리가 따를 수 있다. 왜냐하면, 수행자에게 신통의 능력이 없다는 것이 ‘번뇌를 소멸하는 지혜’를 얻는 데, 사마타가 불필요하다고 이해 되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5) Abhiññā는 ‘높은 지혜’, ‘신통(神通)’, ‘[6가지]초월의 힘’ 또는 ‘비범한 지혜’라는 의미이다. 
   정신집중의(samādhi) 완성을 통하여 얻어지는 세간적인(lokiya) 힘 5가지와 내적통찰
   (vipassanā)을 통하여 얻어지는 초세간적인(lokuttara) 힘 1가지. 즉, ‘번뇌의 소멸
   (āsavakkhaya, 漏盡)’, 다른 말로 아라한의 깨달음을 말한다. 이들은 (1) 여러 종류의 
   신통(iddhi-vidhā, 마법의 힘), (2) 신의 귀(dibba-sota, 天耳), (3) 다른 사람의 마음을
    꿰뚫는 지혜(ceto-pariya-ñāṇa, 他心通), (4) 신의 눈(dibba-cakkhu, 天眼), (5) 전생
   에 대한 기억(pubbe-nivāsānussati, 宿住智), (6) 모든 번뇌의 소멸(āsavakkhaya, 
   漏盡)으로 구성되어있다. 특히, (4)~(6)번째의 지혜들은 ‘세 가지 높은 지혜(te-vijja, 
   三明)’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참고) D. 34, M. 4, 6, 77, A. III. 99 ; V. 23 ; 
   S. XV. 9 그리고 Pug. 27, 239. 비고) Nyanaponika. 1998. ‘Buddhist Dictionary’ p.2
6) 이 경전은 사선정의 성취 이후, 삼명 중 ‘신의 눈(天眼)’, ‘전생에 대한 기억(宿住智)’이 
   생략되고, ‘번뇌를 소멸(āsavakkhaya, 漏盡)하는 지혜’만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길로 설명되어 있다. 또한, 이를 통해 수행자는 [감각적]욕망의 번뇌(kāmāsava)로부터 
   마음을 해탈하고, 존재의 번뇌(bhavāsava)로부터 마음을 해탈하고, 무지의 번뇌
   (avijjāsava)로부터 마음을 해탈한다는 지혜를 얻는다. (M. III. 36) 비고) M. I. 249
  「찹비소다나경(Chabbisodhana sutta)」)

 

3) 양분해탈 (兩分解脫, ubhatobhāgavimutti)

혜해탈에 대하여 특별한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는 이유는, 초기경전에 또 다른 해탈인 양분해탈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양분해탈은 심해탈과 혜해탈을 모두 성취하고, 최종의 열반을 얻은 것을 말한다. 경전의 설명처럼, 만약에 해탈자들의 구분 안에 양분해탈자가 존재한다면 심해탈이나 혜해탈 중, 어느 하나만 성취하고도 열반을 얻는다고 가정할 수 있게 된다.「마하니다나경(Mahānidāna sutta)」은 양분해탈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아난다여, 어떤 비구는 이러한 여덟 가지 해탈(aṭṭha vimokkha)을 순서대로, 역순으로, 순서대로 역순으로 얻어 그 안에 머문다. 그가 원할 때,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만큼 언제든지 이[해탈]에 들어가고 이로부터 나온다. 그는 모든 번뇌를 제거하고 번뇌가 없는 심해탈과 혜해탈을 지금 여기에서 높은 지혜(abhiññā)와 함께 성취하여 머무른다. 아난다여, 이것을 양분해탈(ubhatobhāgavimutti)이라고 부른다. 아난다여, 이 양분해탈보다 더 높고 뛰어난 양분해탈은 없다.’

 

이 설명에 따르면 양분해탈자는 각각의 선정과 상수멸정(想受滅定)을 모두 완전하게 완성한 자로, 이들을 경험하고, 그가 원하는 때,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시간만큼 능숙하게 머무를 수 있는 능력이 갖춰진 자이다. 또한, 그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내적통찰까지 지니고 있다. 이러한 특징을 살펴볼 때, 양분해탈이 혜해탈보다 넓고 능숙한 지혜를 지니고 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혜해탈과의 사이에서 고통의 소멸이라는 최종의 목표에 대한 차이점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왕기사상윳따(Vaṅgīsasaṃyutta)」의 설명에 따르면, 500명의 아라한들 중에 혜해탈자들은 320명이고 양분해탈자들은 60명에 불과했다. 즉, 부처님 시대에 많은 비구들은 무색계 선정을 필요로 하는 양분해탈을 체험하지 않고도 열반을 성취했다는 것이다. 또한, 주석서인「수망가라위라시니(Sumaṅgala-Vilāsinī)」는 양분해탈을 5가지로 구분하고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양분해탈이란 두 가지 부분으로 해탈한 것이다. 무색계를 성취함으로 물질의 몸(rūpa-kāyato)을 해탈하고, 도에 의해 정신의 몸(nāma-kayāto)을 해탈한 것이다. … 또한, 양분해탈은 공무변처 등의 다른 [선정]상태로부터 출정하여 아라한이 되는 것 그리고 불환과가 된 후에, 중지[想受滅定]로부터 출정하여 아라한이 되는 것. 모두 5가지가 있다. 

     

이들 다섯 가지 양분해탈자들은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을 얻은 자, 식무변처정(識無邊處定)을 얻은 자,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을 얻은 자,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을 얻은 자 그리고 상수멸정(想受滅定)을 얻은 자이다. 다시 말해, 양분해탈자가 되기 위해서는 색계 선정을 완성하고 무색계 선정과 상수멸정 중 어느 하나에 능숙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와는 상대적으로 혜해탈은 무색계가 아닌, 색계의 첫 번째 선정만으로도 성취가 가능하다고 한다. 이처럼 수행자들은 각각 그들의 근기(根機, 성향)에 의해 각각 다른 경험을 하고 해탈을 성취하게 된다. 「마하마룬끼아경(Mahāmālunkya sutta)」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존자여, 이와 같이 다섯 가지 낮은 속박을 제거하기 위한 길이 있는데 왜 어떤 비구는 심해탈을 얻고, 어떤 비구는 혜해탈을 얻습니까?’ ‘아난다여, 나는 그들의 근기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경전은 수행자 각각이 다른 근기에 의해 다른 해탈을 경험하는 것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K. N. Jayatilleke는 이 경구를 해석함에 있어 ‘오직’이라는 부사를 첨가하였다. ‘왜 어떤 비구는 오직 혜해탈만을 얻는 동안, 어떤 비구는 심해탈을 얻습니까?’ Jayatilleke는 이 문장의 번역을 통하여 혜해탈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떠한 선정의 성취도 필요하지 않다는 뉘앙스를 담으려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오직’은 첨부된 것으로 경전에는 나타나지 않는 용어이다. 경전은 단지 심해탈과 혜해탈을 얻는 자들이 있다는 설명을 할 뿐이다. 이처럼 논란의 여지가 있는 해탈에 대해서 Kheminda Thera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누군가 사마타(고요함)의 방법으로 나아간다면, 그는 마음의 집중에 무게를 둘 것이다. 그를 마음에 의해 해탈한 자라고 부른다. 그리고 누군가 위빠사나(내적통찰)의 방법으로 나아간다면, 그는 지혜에 무게를 둘 것이다. 그를 지혜에 의해 해탈한 자라고 부른다. 여기 선행자에게 의심의 여지는 없다. 이들은 단지 기능의 상태일 뿐이다. 그러나 실제로 고요함(사마타)의 방법으로 나아가는 자들이 있을 때, 누구는 마음에 의해 해탈한 자라고 부르고, 누구는 지혜에 의해 해탈한 자라고 부른다. 그리고 지혜에 의한 방법으로 나아가는 자들이 있을 때에도 역시, 누구는 지혜에 의해 해탈한 자라고 부르고, 누구는 마음에 의해 해탈한 자라고 부른다.       

 

이 설명에 따르면 심해탈과 혜해탈이라는 두 용어는 각각의 수행자에 의해 얻어진 해탈들 중에 단지 현저하게 나타나는 부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이들이 서로 분리되어야만 성취된다거나, 혹은 수행자에게 양립할 수 없는 해탈이 아니라는 것이다.「마하마룬끼아경」의 부처님께서는 이들의 현저함의 차이가, 성취자 각각의 근기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고 설명을 하신 것이다. 예를 들어, 사리뿟따(舍利弗)존자는 지혜제일의 혜해탈자이고 목갈라나(目健連)존자는 신통제일의 심해탈을 얻은 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이 사리뿟따 존자는 선정수행을 하지 않았고, 목갈라나 존자는 위빠사나 수행을 하지 않았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7) 이들은 단지 현저하게 드러나는 특징에 대하여 지혜제일과 신통제일로 구분되었을 뿐이다. 

7) 아누빠다경(Anupadasutta, M. III. 28f)의 주석 설명(Papañcasūdanī. IV. 91)에 따르면, 
   사리뿟따 장로는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통하여 불환과를 성취한 후에 상수멸정을 경험하
   고 아라한과를 얻는다. 이는 번뇌의 완전한 제거 이전에 상수멸정을 얻었다는 설명으로 
   볼 수 있다. 즉, 사리뿟따는 선정과 무색계선정을 모두 성취하였다. 참고) Bhikkhu Bodhi. 
   1995. 1,316쪽. Notes no. 1,052.

 

이와 관련하여「앙굿따라 니까야」는 4가지 형태의 수행자를 설명한다. 이들은 1) 괴로운 느린 직관[초월적 지혜]실천(dukkhā dandhābhiññā, 遲通行), 2) 괴로운 빠른 직관실천(dukkhā khippābhiññā, 涑通行), 3) 즐거운 느린 직관 실천(sukhā dandhābhiññā), 4) 즐거운 빠른 직관실천(sukhā khippābhiññā)이다. 여기서 괴롭고 즐겁다는 의미는 선정의 성취여하에 달려있다. 수행자가 사선정을 성취한 경우에는 즐겁다는 표현이 붙고, 선정을 성취하지 않은 경우에는 괴롭다는 표현이 붙는다. 그리고 느린 직관과 빠른 직관은 五根의 조절능력에 달려있다. 다시 말해, 身根, 精進根, 念根, 定根, 慧根에 대한 조절기능이 우수하면 빠른 직관이고, 오근에 대한 조절기능이 더디면 느린 직관이다. 그러므로 네 가지 수행의 형태는 선정의 성취여부와 오근의 조절능력에 달렸다.    

 

禪定      五根의 기능     수행의 4가지 실천

없다      느리다           괴로운 느린 직관

없다      빠르다           괴로운 빠른 직관

있다      느리다           즐거운 느린 직관

있다      빠르다           즐거운 빠른 직관

 

이미 언급한대로 경전에서, 사리뿟따는 지혜제일이고 목갈라나는 신통제일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왜냐하면 사리뿟따는 매우 빠른 직관을 가지고 있으며, 부처님께서 직접 지혜를 지닌 자들 가운데 최고라고 공표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목갈라나는 뛰어난 초월의 힘을 지녔으며 출가 후 7일 만에 아라한이 되었다. 이러한 자료를 통해 사리뿟따는 혜해탈자로, 목갈라나는 선정의 성취와 더불어 심해탈을 얻었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경전에서 설명하는 사리뿟따와 목갈라나의 대화를 통해 우리는 조금 다른 내용을 만날 수 있다.   

 

목갈라나 존자여, 여기 4가지 실천이 있습니다. 존자는 4가지 실천 중에 어떤 방법을 실천했습니까? …… 사리뿟따 존자여, 나는[목갈라나] 괴로운 빠른 직관을 실천했습니다. 나는 이것을 실천하여 취착이 없고 번뇌로부터 마음을 해탈했습니다. …… 목갈라나 존자여, 나는[사리뿟다] 즐거운 빠른 직관을 실천했습니다.     

 

여기서 목갈라나는 스스로 ‘괴로운 빠른 직관’을 실천했다고 말하고, 사리뿟따는 스스로 ‘즐거운 빠른 직관’을 실천했다고 말한다. 이는 매우 흥미로운 내용으로 이 설명에 따르면, 목갈라나는 사선정을 성취하지 않았고 사리뿟따는 사선정을 성취했다. 여기서 사리뿟따가 사선정을 성취했다는 것과 목갈라나가 선정을 성취하지 않았다는 얘기는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목갈라나는 선정을 통해 얻어지는 신통의 이행으로 매우 유명하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있어 경전편집자가 두 가지의 記述을 실수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기 어렵다. 하지만, 경전의 주석서인 「마노라타뿌라니(Manorathapūraṇī)」역시, 경전과 같이 목갈라나는 ‘괴로운 빠른 직관’을 실천했고, 사리뿟따는 ‘즐거운 빠른 직관’을 실천했다고 설명하기에 편집자의 실수라기보다는 의미에 대한 정확한 파악이 중요할 것이다. 또한, 주석서의 설명에 따르면, 이들이 모두 낮은 단계에 있을 때는 ‘즐거운 빠른 직관’을 실천했다고 한다. 다시 말해, 목갈라나가 ‘괴로운 빠른 직관’을 실천했다고 해서 선정의 성취가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아라한이 되기 이전에 낮은 3가지 단계에서 이미 다른 방법으로 선정을 성취했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리뿟따가 혜해탈자로 설명되는 경우도, 그가 선정의 성취가 없이 아라한이 되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초기경전에서 어느 수행자가 심해탈을 얻은 자이든, 아니면 혜해탈자이든 이들에게는 모두 선정의 성취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무슨 이유로 혜해탈자가 모든 색계, 무색계 선정과 상수멸정까지 성취하고 혜해탈을 얻는다는 설명이「앙굿따라니까야」에 나왔는지 이해할 수 있다. 

 

「칸다상윳따(Khandhasaṃyutta)」의 설명에 따르면, Tathāgata(如來), Arahant(應供), Sammā-Sambuddha(正等覺者)등을 혜해탈자라고 부른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이미 색계와 무색계 선정에 능통하신 분이다. 따라서 경전에서 혜해탈이라는 용어는 양분해탈과 비교되는 의미가 아닌, 지혜를 통하여 해탈했다는 광의(廣義)의 의미로 활용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사리뿟따가 혜해탈자로, 목갈라나가 심해탈을 얻은 자로 설명되는 것은 사리뿟따가 선정의 성취가 없다거나, 목갈라나가 위빠사나를 모른다는 의미가 아니라, 각각의 해탈이 성취자의 근기에 따라 두드러지는 특징으로 부각된다는 것이다.              

 

4. 마치는 말

 

지금까지 초기경전에서 나타나는 위목카(vimokkha)와 위뭇띠(vimutti)를 통해, 이들이 해탈이라는 의미로 어떻게 사용되는지 살펴보았다. vimokkha는 색계와 무색계 그리고 탐진치의 완전한 소멸상태인 열반으로 구분되는 세 단계의 해탈로 설명될 뿐만 아니라, 물질과 비물질의 단계를 초월하여 想受滅定까지 포함하는 八解脫의 의미로도 설명되고 있었다. 이들 세 가지 단계의 해탈과 팔해탈은 색계와 무색계, 그리고 열반이라는, 점진적 해탈의 과정에서 유사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이를 통해서 분명해지는 것은 해탈이 선정의 성취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해탈에는 다양한 수준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vimutti는 정념(正念)과 정정(正定)수행 모두를 통하여 얻을 수 있었다. 마음, 지혜 등과 함께 복합어의 형태로 나타나는 vimutti에는 심해탈, 혜해탈, 그리고 양분해탈이 있는데, 이들은 각각 구분되어 있기보다 서로 보완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들의 관계를 통하여 해탈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다양한 해탈의 구분에 앞서, 해탈과 열반을 무조건 동의어로 사용하는 것은 재고의 여지를 남긴다. 그리고 오늘날 남방 상좌부 전통의 순수 위빠사나 수행을 정의하는 데 적잖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혜해탈은 초기경전에서 광의(廣義)의 의미로 활용되는 경우가 많고, 협의(狹義)의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도 기본적으로 색계선정 즉, 사마타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건관행자의 출현으로 모든 혜해탈자들에게는 사마타 수행이 없어도 된다는 견해는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 심해탈, 혜해탈, 그리고 양분해탈이라는 3가지 해탈을 이해할 때, 이러한 구분은 표면적으로 두드러지는 기능을 나타내는 것이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관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깨달음의 과정에서 각각의 해탈은 서로 보완의 관계에 있다. 그러므로 심해탈과 혜해탈의 조화는 매우 중요하다. 다시 말해, 수행자는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의 조화를 통하여 보다 완전한 해탈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논의된 것처럼, 오늘날 수행에 대한 이해와 결과는 진행방식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해탈과 그 과정의 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경전의 가르침에 대한 많은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