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의 교리를 가장 잘 증명하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 바로 중생들의 갖가지 탄생입니다. 얼굴이 각자 다르듯이 수많은 죽음의 모습이 각자 다르고 태어남도 각자 다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금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나지만 어떤 사람들은 쪽박을 차고 태어납니다. 건강한 사람도 있고 재능이 넘치는 사람도 있지만 애초부터 허약하거나 아무런 재능도 없이 태어났다가 무의미한 삶을 살고 다음생으로 갑니다.
왜 우리들은 각자 다른 모습으로 태어날까? 다시말해서 왜 평등하게 태어나질 못할까? 그것은 바로 내가 과거생에 지은 업대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윤회란 도덕적 인과율 입니다. 즉 내가 신.구.의 삼업으로 행한 도덕적 행위에 대한 결과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윤회가 마치 숙명론이나 운명론으로 받아들여지기 쉽습니다만 윤회는 결코 운명론이나 숙명론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업자득이고 인과응보이지만 도덕적 행위에 대한 결과물을 우리들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바꿀수 있습니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네 가지 중생들의 삶을 이야기했습니다. 어둠에서 어둠으로 가는 삶, 어둠에서 빛으로 가는 삶, 빛에서 어둠으로 가는 삶, 빛에서 빛으로 가는 삶등입니다. 어떤 삶을 살지는 각자의 취사선택이고 자유의지입니다.
밀린다 왕문경에서 나가세나 스님은 내가 행한 선행은 배이며 내가 행한 악행은 돌맹이라고 했습니다. 즉 아무리 작은 돌맹이라도 물 속에 던지면 가라앉지만 아무리 큰 돌맹이라도 배위에 놓이면 강을 건널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선행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아무리 큰 악행의 돌맹이도 거뜬히 감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흔히들 세상의 평등을 거론합니다. 하지만 세상은 결코 평등하지 않습니다. 그게 세간사입니다. 다만 우리들은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보다 나은 세상이란 강자가 약자를 보호하고 부자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보시를 베푸는 세상입니다. 그것이 불국토일 것입니다. 세상을 평등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좀더 살기 좋은 곳으로 즉 모든 사람들이 나름대로 행복을 추구하고 행복하게 사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부자는 부자대로 행복하고,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대로 행복을 만끽하는 세상인 것입니다.
도덕적 윤리적으로 완성되지 않은 사람이 열반을 획득하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불교윤리는 흔히 계율이나 공동체의 규범 정도로 간주되곤 합니다. 그러나 이는 지극히 편협한 이해에 불과합니다. 계율도 다양하고 많지만, 계율 이외에도 십선업, 사무량심, 사섭법, 팔정도, 육바라밀, 10대서원, 삼취정계, 탐진치지멸, 자비, 보살도 등 수많은 실천덕목들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실천의 관점에서 볼 때 일차적으로 자신의 수행과 관계되는 윤리덕목이기도 하고(예컨대 사무량심이나 탐진치지멸), 타인을 위한 실천적 행위에 중심을 둔 윤리덕목이기도 하며 (예컨대 사섭법), 또 양자 모두에 관계된 윤리덕목이기도 합니다(대부분의 덕목들). 윤리는 단순한 계율이나 규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 자기수행이며 외적인 이타행인 것입니다. 윤리는 가장 심층적 차원에서 자기변혁이며 깨달음이며 열반입니다. 불교윤리의 범위는 자신의 내적 수행에서부터 외적 이타행 혹은 작은 실천에서부터 열반에 이르기까지 그 범위가 실로 무한한 것입니다.
불교에서 윤리는 모든 교설과 연관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많은 경우에는 교설자체가 직.간접으로 윤리를 의미합니다. 교설들은 본질적으로 윤리적 실천을 내포하는 것입니다. 모든 교설이 윤리를 전제하며 윤리를 통해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불교윤리는 열반을 지향합니다. 불교윤리는 열반에 어떻게 도달할 것인가에 대한 설명이기도 합니다. 열반은 윤리적 실천을 통한 심신의 올바른 훈육을 통해 얻어지는 것입니다. 윤리의 최고점인 열반에 이르기까지 윤리의 실천덕목들은 몸(身), 말(口), 생각/마음(意)을 통해 습득되고 체화됩니다. 윤리는 특히 생각/마음(의)의 각성을 전제한 여러 실천덕목들의 체화입니다. 신구의 중에서도 의가 갖는 의미가 중요하기 때문에, 윤리는 본질적으로 ‘의’의 문제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의’로부터 ‘신’과 ‘구’가 비롯되며 ‘신’과 ‘구’의 토대가 ‘의’이기 때문입니다. 불교도, 윤리도, 열반도 ‘의’(마음)의 문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불교도들은 과연 지금 마음을 변화하고 있는지요? 초기경전을 들고 있다고 초기불자인지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나를 바꾸어야 합니다. 붓다께서는 불교의 기적은 신통에 있는게 아니라 교설을 듣고 사람이 바뀌는데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세상을 좀더 살기 좋은 곳으로 바꾸는 것이며 또한 불국토를 가꾸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열반에 이르는 길일 것입니다.
불교라면 그저 뭔가 신비롭고 희론적인 중국 조사들의 선문답이 있어야 한다는 서글픈 착각속에 빠져 한국분들에게 불교 윤리/도덕적인 이야기는 너무 낯설고 어떤면에서는 황당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계가 간화선의 화두는 아닙니다. 계율이 "이뭣꼬"라고 하면서 쳐부서어야 하는 의심은 아닙니다. 오직 실천행이며 정진해야 하는 실천덕목들입니다. 그것이 완성되는 끝에는 열반의 문이 활짝 열려 있습니다.
오늘부터라도 진정한 불자라면 자신부터 바꾸어야 나가야 하고 내 일상의 생활이 어제보다는 오늘이 바뀌어야 합니다. 세상은 평등하지 않습니다. 각자가 신.구.의 삼업으로 만드는 업이 각자의 얼굴만큼이나 다르듯이 우리들이 지은 업대로 세간사는 펼쳐집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평등할 수 없는 세간사를 보다 살기 좋은 세상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것은 스스로가 먼저 윤리적 도덕적 삶을 추구할 때 가능해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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