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인간관이 어떤 것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빠알리어 경전이 전하는 붓다의 모습을 더듬어 보는 것이 첩경이다. 대승경전의 신격화되고 형상화 된 부처님의 모습만 보다가 빠알리어 경전을 접한 후에 그 속에 담겨 있는 인간 붓다의 모습에서 많은 분들이 감동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내 자신도 붓다의 마지막 모습을 하나의 다큐멘터리처럼 사실적으로 기록한 대반열반경을 읽고 사경도 하면서 그분의 인간적인 모습에 감동하여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눈물을 여러번 흘린적이 있으며 지금도 대반열반경을 손에 잡을 때 마다 북받쳐 오르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흘리곤 한다.
붓다는 조물주나 절대자나 신을 거부하였고 인정하지도 않았다. 따라서 이런 붓다께서 자신을 신격화하거나 우상숭배의 대상으로 만들었을리는 만무하다. 붓다는 수행승들이나 재가자들이 붓다 자신을 위해 기도하거나 예배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했다. 그는 한 인간으로서 행동했을 뿐이며 한 인간으로서 살다가 80의 생애를 마감했던 것이다.
빠알리어 경전 여러 곳에는 붓다의 인간적인 모습이 여러곳에 기록되어 있다.
[아난다여, 목이 마르구나. 물을 떠 오너라]
[아난다여, 나는 허리가 아프다. 잠시 누워야 하겠다]
[아난다여, 나는 노쇠했다. 나이 이미 80이다. 이를테면 아난다여, 낡은 수레는 가죽끈의 도움으로 겨우 움직이이거니와 생각하건데 내 몸도 가죽끈의 도움으로 겨우 움직이고 있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붓다를 초인이나 신처럼 알아오던 사람들에게는 위의 모습은 어떠한 진리 이상으로 감동을 안겨주는 말씀일 것이다. 이런 붓다가 제자나 재가자들에게 요구한 것은 자신에 대한 우상화나 신격화가 아니라 법(가르침)에 대한 귀의였다.
경전 곳곳에는 법에 대한 귀의에 대한 가르침이 있거니와 단적인 예로 상윳따니까야의 박카리에 대한 가르침은 좋은 예이다.
박카리라는 비구가 중병에 걸려 죽어가면서 그를 간호하는 사람에게 붓다를 친견하고 싶다고 소원했다. 이 말을 전해들은 붓다는 친히 그 비구가 있는 도공의 집으로 찾아갔다. 붓다께서 오시는 것을 본 박카리는 아픈 몸을 일으켰다.
[박카리여, 가만히 누워 있거라. 내가 너의 곁으로 갈 것이다]
붓다께서 박카리를 다시 자리에 눕게하고 거의 옆에 앉으시자 박카리가 말했다.
[대덕(bhadanta)이시여, 저는 이제 곧 죽을 것입니다. 몸은 낫지를 않고 더욱더 나빠지기만 합니다. 그래서 마지막 소원으로 붓다를 우르러뵙고 발밑에 예배드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붓다께서 엄숙하게 말씀하셨다.
[그만 두어라. 박카리여, 이 썩어가는 몸을 보아 무엇하겠느냐. 박카리여,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법을 보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붓다라는 개인에게 종교의 열쇠가 쥐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법을 깨달은 선각자요 앞서 직접 걸어가면서 행동으로 보여주신 스승에 불과하다. 법(진리)는 붓다라는 한 인간의 출현 여부와는 상관없이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붓다는 자신이 법을 발명한 것이 아니라 발견한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이러한 법은 지혜있는 자라면 누구나 붓다처럼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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