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근본불교) 이야기

경전과 재가자들

실론섬 2015. 5. 19. 21:12

빠알리어 경전과 한역 아함경

초기 경전이라고 하면 "5부 빠알리어 니까야" 와 "4부 한역아함경"을 들 수 있다. 빠알리어 경전과 한역 아함경은 내용상 겹치는 부분도 있지만 겹치지 않은 부분도 상당히 있다. 이러한 것은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18-20여개의 부파별로 각각 전승하여 왔던 전통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빠알리어 경전" 은 상좌부의 전통에 의한 경전이고, 한역 아함경중에서 증일아함경은 각 부파의 공통된 전승이고, 장아함경은 설일체유부가, 중아함과 잡아함경도 설일체유부의 전승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러한 연구들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당시 인도의 각 부파들은 나름대로 자신들만의 전통으로 경전을 보존및 전승하여 왔다는 사실이다. 


인도처럼 큰 땅에서 그 옛날 교통과 인적교류가 원활하지 않았던 시절에 각 지역별로 각 부파별로 활발한 교류나 또는 경전의 완벽한 통합이 이루어지기 보다는 각 지역별 부파별로 자신들만의 전통으로 경전을 전승하여 왔으리라는 것이 오히려 상식적인 판단일 것이다.


따라서 빠알리어 경전만이 붓다의 오롯한 육성을 담았다거나 빠알리어 경전 이외에 다른 경전은 별다른 전통적 권위가 없다기 보다는 오히려 빠알리어 경전은 상좌부라는 18-20여개의 부파불교중의 한 종파가 전승한 경전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이 보다 이성적인 판단일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빠알리어 경전의 권위가 낮아지거나 그 전통성이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아함경도 마찬가지이다.


경전이란 무엇인가 

경전이란 엄격하게 말하면 연기. 사성제. 팔정도와 그리고 율장등 이른바 출가 수행자에 대한 이론적/실천적 수행 교설을 집성한 것이다. 다시말해서 출가중심주의에 치우친 교설인 것이다. 그리고 경전을 결집하고 보존및 전승하여 온 집단이 재가자가 아닌 승가이다. 당연히 경전은 출가중심주의가 될 수 밖에 없고 수행승들에게 편리하고 유리한 부분만을 편찬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다시말해서 경전이란 출가중심주의 수행자들을 위한 교설의 모음이지 결코 재가자들을 위한 것은 아니다. 붓다의 45년 생애를 생각할 때 재가자들을 위한 가르침이 결코 수행자들을 위한 가르침보다 적었다고 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전을 보면 교설에 대해서는 지겨울 정도로 같은 내용을 되풀이 반복하지만 재가자들을 위한 가르침은 일부분일 뿐이고 그것도 결코 되풀이 반복되는 부분은 없다는 것을 이를 잘 증명해 주고 있다. 


왜 재가자들이 출가자들의 교설을 들고 나와서 설법아닌 설법을 하는가?

재가자들이 출가자들처럼 살 수는 없다. 오계는 지킬려고 노력할 수는 있어도 250여개에 달하는 계율을 지키며 승가내에서 출가승처럼 수행생활을 할 수는 없다. 불교는 사부대중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지 출가승 단독으로 구성되는게 아니다. 따라서 사부대중은 각자의 역활이 엄연히 있고 그 역활에 충실하는게 첫 번째 덕목이다. 출가승은 출가승의 덕목을 지키고 재가자는 재가자로써 갖추어야 할 덕목을 지키는 것이 불자들이 첫 번째로 할 일이다. 출가승이 출가승 답지 못하거나 또는 재가자들이 재가자 답지 못하면 불교는 혼탁해지기 마련이다. 


한국불교에서 가장 황당한 것은 재가자들이 수행승을 무차별적으로 비난을 하는 행태이다. 물론 수행승들의 잘잘못에 대해서 재가자들이 비판과 비난을 할 수는 있다. 그렇지만 손가락질을 하면 네 개의 손가락은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뒀으면 좋겠다. 다시 말해서 수행승을 비난하는 재가자들은 과연 재가자다운 덕목을 갖추고 있는지를 스스로 되돌아 보라는 것이다. 붓다께서 말씀하신 16가지 재가자의 덕목과 그리고 오계를 얼마나 충실하게 지키는지 되돌아 봐야 할 것이다.


초기경전의 문구를 가져와서 그것도 수행승들을 위한 가르침을 가져와서 재가자들에게 설법하거나 훈계를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러한 가르침은 재가자들을 위한 것이 절대로 아니다. 


재가자들도 수행승처럼 해탈과 열반을 지양하고 온갖 수행으로 공덕을 쌓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그렇다고 재가자 생활을 하면서 수행승들의 가르침에 파 묻혀 마치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냥 행세하는 것은 크게 착각을 하는 것이다. 꿈 속을 헤매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초기경전의 문구를 가지고 왜 대승불교는 비난하는가?

초기불교와 대승불교는 경전이 다르듯 그 모양새도 엄연히 다르다. 그렇다고 초기불교만 불교이고 대승불교는 불교의 가르침이 아니라는 생각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또한 초기불교를 신봉한다면 굳이 대승불교를 쳐다보질 않아도 된다. 중에 싫으면 절을 떠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초기불교의 잣대를 들이대어 대승불교를 보고 손가락질을 하는 것은 마치 돈키호테식의 황당무계한 행동에 지나지 않는다. 초기불교가 좋다면 초기불교를 지양하는 사찰에 가면 된다. 대승불교가 좋다면 대승불교의 사찰에 가면 된다. 


대승불교는 불교의 발전사나 또는 교리/심리학적 측면에서 본다면 사상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고 철학적 깊이를 한층 깊게 한 것임에 분명하다. 


재가자가 먼저 청정해야 한다

불교가 왜 혼탁한가? 그게 모두다 출가승의 잘못인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오히려 불교를 망치고 수행승을 망치는 주범은 바로 재가자들이다. 사이비 재가자들이 불교를 망치고 수행승을 망치고 있는 것이다. "내절 내 스님, 내 복만 받게 해주세요" 라고 기복에 매몰되어 극단적인 이기심으로 불교를 믿는 불자라는 허울을 쓴 사이비들에 의해서 불교가 망쳐지고 있는 것이다. 


코삼비 비구 사건에서 보듯이 수행승이 잘못을 하면 그 수행승을 안 따르면 되고 공양물을 드리지 않으면 된다. 이곳 불교가 나름대로 청정을 유지하는 주요 이유는 바로 계율을 지키지 않으면 재가자들이 공양물을 올리지 않는다. 그럼 굶게 되고 또한 계율을 어긴 수행승을 받아주는 사찰에도 공양물이 들어가지 않는다. 당연히 수행승들이 청정을 유지할려고 노력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굳이 나서서 수행승을 비난하지 않아도 승가는 청정해 진다. 재가자로써 자신 스스로의 덕목만 잘 지켜도 승가의 청정을 유지하는데 크게 이바지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