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근본불교) 이야기

빠알리어 경전을 공부하는 기본적 자세

실론섬 2015. 3. 5. 13:42

붓다의 가르침을 담아놓은 경전은 불자의 공부와 신앙심을 받쳐주는 교과서이며 나침판이며 네비게이션이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내용의 교과서이라도 그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한낫 소설책보다 못한 것이 될 것이며, 아무리 좋은 나침판이나 네비게이션도 그것을 조작하는 방법을 모르거나 잘못 활용하면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가게 된다.


마찬가지로 빠알리어 경전을 볼 때 불자들은 특히 그중 초심자들은 경전의 내용이나 의미를 지혜롭게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경전은 붓다의 일생을 기록하고 있을뿐만 아니라 그분의 다양한 가르침을 폭넓게 담고 있기에 그만큼 경전을 보는 눈(眼. 지혜)이 필요함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붓다의 대화방식

붓다의 네 가지 대화방식에 대해서는 이미 "누구든 거짓을 말한 자, 행한 다음에..."라는 글에 올려 놓았다. 경전은 이러한 네 가지 대화방식에 대한 갖가지 실례를 다양하게 담고 있다. 


붓다의 설법방법

흔히들 불자들은 경전을 붓다의 설법을 담아 놓은 것이라고만 단순하게 생각한다. 물론 설법이란 말 그대로 붓다의 말씀이다. 하지만 그 내용을 들여다 보면 붓다의 설법을 다음과 같이 세부적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설법(가르침) : 말 그대로 붓다의 가르침이다. 이는 주로 수행승들에게 행한 교리나 또는 재가자들에게 행한 설법을 통해 나타난다.

2) 교훈, 훈계, 경계등등 : 이는 주로 수행승들의 잘못이나 또는 재가자들에게 올바른 삶의 방법등을 제시하는 설법에서 나타난다.   

3) 반박및 나무람 : 이는 외도들의 주장에 대해서 반박을 할 때 주로 나타난다. 하물며 붓다께서는 "머리가 7조각으로 쪼개져서 떨어질 것이다..."라는 등의 강하게 외도들을 반박하신다.


붓다의 설법대상

붓다께서는 설법을 듣는 대상에 따라서 다양한 방법으로 가르침을 펼쳤다. 수행승들에게는 수행승들에게 알맞는 가르침을, 재가자들에게 재가자들에게 알맞는 가르침을, 왕들에게는 왕들에게 알맞는 가르침을, 외도들에게는 외도들의 주장을 혁파하는 가르침등등을 설법을 듣는 대상자나 장소에 따라서 알맞게 가르침을 펼쳤다.


따라서 경전을 인용하거나 경전의 내용을 옮겨와 자신의 주장을 펼칠때는 그 설법의 대상자나 내용을 우선먼저 잘 파악해서 올바르게 지혜를 얻어야 한다. 예를 들어서 수행승들에게 경계의 말씀을 하신 것을 재가자들에게 그대로 인용하여 말을 하거나, 또는 외도들이나 왕들에게 교훈을 주신 것을 수행승이나 재가자들에게 들이대어 인용하는 하는 경우에는 억지춘향격으로 앞뒤 말이 맞지 않거나 또는 동문서답처럼 되기가 쉽다.


수행승은 수행승 답게, 재가자는 재가자 답게

불교는 사부대중으로 구성된다. 책상의 네 다리와 같은 것이다. 따라서 어느것 하나라도 제 역활을 못하면 책상이 흔들리는 것과 같다. 사부대중의 근본은 수행승과 재가자이다. 수행승은 불법을 보호하고 소지하고 그것을 전승하며 나아가 재가자들의 스승이 되는 것이다. 붓다가 안 계신 지금은 수행승들의 역활은 과거보다 훨씬 중요하다. 그리고 재가자들은 수행승들이 불법을 잘 보호하고 수행에 전념할 수 있도록 그분들을 외호하는 것이 첫 번째 덕목이다.


수행승이 수행승답지 못한 것만큼이나 볼성사나운게 바로 재가자가 재가자답지 못한 행동을 하는 것이다. 승가라는 집단이 흔들리면 재가자가 올바르게 서서 승가를 보호하고, 재가자들이 흔들리면 승가가 앞장서서 재가자들을 보호하는 그런 상호협력의 관계가 올바르게 작용할 때에만 비로소 불교는 청정해지는 것이다.


남방권의 불교가 나름대로 청정을 유지하는 이유는 승가내부의 청정이라는 요소도 있지만 보다 근원적인 것은 재가자들이 재가자의 역활을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재가자들의 공양물을 받아 유지되는 승가는 공양물의 인과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수행승들이 계율을 지키지 않고 게으름을 피울 수가 없는 것이다. 더불어 승가는 청정을 유지할려고 노력하기에 그만큼 재가자들은 수행승을 공경하고 공양을 하는 것이다. 


한국의 초기불교에 나타나는 볼성사나운 모습들

한국에 초기불교가 전파되면서 나타나는 가장 큰 우려점은 바로 재가자들의 재가자답지 못한 모습들이다. 재가자들이 한 소식했다는 것도 모자라서 법사라는 타이틀을 달고 온갖 수행법을 들고나와 그것이 마치 붓다의 원음인냥 주장하는 것이다. 또한 겨우 한글 깨친 정도의 실력으로 번역된 초기경전을 보면서도 마치 대단한 지식이라도 획득한냥 으시대고 우쭐대고 우월감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


이곳 초기불교방에 보면 "재가불자의 조건" 과 "청정도론에서 찾아 본 재가자의 수행" 이라는 두 개의 글이 올려져 있다. 과연 재가자들 스스로 얼마만큼이나 재가자로써 조건을 갖추고 있는지 스스로 되돌아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물론 우리들은 중생들이기에 100% 완벽하지 못하지만 나름대로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의견을 발표할 수 있는 권리는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법담을 주고 받거나 자신의 공부를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그런것이 아니고 재가자 주제에 수행승을 밝고 넘어갈려고 하거나 또는 자신이 최고라는 자폐아적 사고방식에 빠져있다면 이는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김치는 한국에서 담아야 한다.

외국인이 김치를 담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하나는 한국사람에게 직접 배우고 한국에서 각종 재료를 구하여 담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외국에서 한국의 김치 요리책을 보고 스스로 담는 것이다. 그런데 김치에는 필수적으로 젖갈이라는 것이 들어가야 한다. 물론 한국산 고춧가루도 매우 중요한 재료이다. 외국에서 요리책을 보고 담는 경우에는 세계 어느 나라에도 한국의 젖갈이 없다. 따라서 젖갈과 비슷한 피쉬소스(fish source)을 이용하고 고춧가루도 외국것을 사용하게 된다. 김치는 김치이지만 한국의 김치 모양새와 맛을 낸 것에 불과하다. 쉽게 말해서 오리지널을 베낀 짝퉁인 것이다.


이러한 짝퉁을 만들어서 그것이 한국의 김치이고 한국의 김치보다 더 낫다고 주장한다면 모든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살 뿐이다. 진심으로 그가 한국의 김치를 담고 싶다면 한국에 가서 직접 김치 담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김치는 김치뿐만 아니라 그 속에 담겨있는 한국의 역사나 전통이나 풍습등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것이기에 그 모든것을 제대로 알고 마음을 올바르게 내어 김치를 담을 때에만 비로소 김치다운 김치가 탄생을 하는 것이다.


공부는 책이든 tv 이든 비디오등을 통해서 할 수 있다. 하지만 영어를 비디오를 통해서 배우고 아무리 잘해도 외국사람하고 저녁식사 하면서 그들이 주고 받는 유우머나 농담을 이해하고 함께 웃고 박수치지 못하는 것은 반쪽짜리 영어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가 공부를 위해서 외국 유학을 가고 전통이 살아 숨쉬는 본고장에 가서 직접 체험하고 체득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빠알리어 경전은 단순한 책이 아니다

빠알리어 경전은 붓다의 가르침을 모아 놓은 것이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훌륭한 가르침이고 필요한 것들을 대부분 배울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중생들이 경전에서 필요한 것들을 배울 수 있다면 청정도론을 위시한 무애해도나 수많은 논서들이 필요없을 것이다. 또한 주석서나 그 주석서를 다시 주석한 복주석서도 불필요한 것임에 틀림없다. 


세상 어느 누구도 경전만으로 불교를 전부다 완벽하게 올바르게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경전이 미쳐 담아놓지 못한 수많은 뒷 이야기나 또는 경전의 귀절이 내포하고 있는 숨어있는 의미를 파악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전공부를 하는 것이고 경안(經眼)을 얻어 지혜롭게 가르침을 획득하고자 하는 것이다. 


바르게 알면 바르게 실천할 수 있다. 지도책과 나침판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올바르게 보고 작동하는 법을 모른다면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것이다. 오히려 지도를 잘못 이해하고 나침판을 잘못 작동한다면 목적지와는 전혀 다른 곳으로 가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