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 논문및 평론/교리 및 수행

남방불교의 수행문화 형성/

실론섬 2015. 5. 2. 22:24

남방불교의 수행문화 형성

정준영_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불교학부 교수

 

목 차

1. 상좌부(上座部, Theravāda)불교의 역사와 흐름

   1) 스리랑카 불교의 역사와 흐름

   2) 미얀마 불교의 역사와 흐름

   3) 태국 불교의 역사와 흐름

2. 상좌부불교의 수행문화

   1) 스리랑카 불교의 수행문화

   2) 미얀마 불교의 수행문화

   3) 태국 불교의 수행문화

 

1. 상좌부(上座部, Theravāda)불교의 역사와 흐름

 

2차 결집을 통해 인도에서 발생한 상좌부 불교는 3차 결집과 더불어 인도의 주변국가에 소개된다. 불멸 218년에 즉위한 아소카왕의 시대는 불교의 세계적 성장시기라고 볼 수 있다. 아소카왕의 대폭적인 지원으로 인도불교 승단은 매우 풍요로웠다. 하지만 승단을 향한 아소카왕의 애정은 양적팽창이라는 아쉬운 결과를 초래했다.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은 안타깝게도 편안한 삶을 추구하는 출가자들을 양성했고, 이들은 수행과 교리에 있어 승단의 혼란을 야기했다. 이에 아소카 왕은 과감한 승단의 정비가 필요했고, 그 당시 가장 명망 높은 목갈리뿟따 팃사(Moggalīputta-tissa)장로를 중심으로 세 번째 결집을 지원하게 된다. 이때 분별설(Vibhajjavāda)을 설정하여 성립된 것이 논사(論事, Kathāvatthu)이다. 제3차 결집은 9개월이란 시간동안 일천 명이 모여 2차 결집의 내용을 정비하고 논사를 포함하는 논장(論藏)을 합송하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목갈리뿟따 팃사는 제3차 결집을 마치고 인도에 인접한 나라에 불교가 전파되도록 노력한다.1)

1) 불법전파를 위해 9개국에 전도단을 파견했다고 한다. 캐시미르, 간다라, 시리아, 이집트, 
   마케도니아(그리스), 스리랑카, 미얀마 등.

 

아소카 왕의 아들인 마힌다(Mahinda) 장로 역시 목갈리뿟따 팃사로부터 비구계를 받고 스리랑카로 불교를 전한다. 이후 아소카 왕의 딸인 상가밋따(Saṅghamitta) 공주는 비구니가 되어 보리수나무를 스리랑카에 전하고, 불치사리 역시 스리랑카로 옮겨지게 된다. 본 장은 오늘날 상좌부 불교국가를 대표하는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의 불교유입과 전개과정을 살펴보면서 상좌부 불교가 오늘날까지 어떤 과정에 의해 유지․보존되어 왔는지 살펴보게 될 것이다.

 

4세기경 인도의 오릿사주 카링가 왕자가 인도로 오면서 여성의 머리카락 속에 붓다의 치아사리를 감추어 가지고 왔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 상상도를 그림으로 그린 것임. 현재 붓다의 치아사리는 캔디의 불치사에 보관되어 있다.

 

1) 스리랑카 불교의 역사와 흐름

상좌부 불교가 스리랑카에 도착한 것은 대략 기원전 250년이다. 아소카 왕의 아들인 마힌다 장로는 불멸 후, 236년 되는 해 음력 6월 보름에 그당시 땀바빤니 섬(Tambapaṇṇi dīpa)이라고 불리던 스리랑카에 다섯 명의 비구와 함께 도착한다.2) 마힌다 장로는 스리랑카의 수도인 아누라다뿌라

(Anuradhapura)에서 동쪽으로 십여 킬로 떨어진 미힌탈레(Mihintale)에서 사냥을 나온 데와남삐야띳사(Devānampiya Tissa) 왕과 첫만남을 가진다.

2) 마힌다 장로와 함께 스리랑카에 온 비구들은 Ittiya, Uttiya, Sambala, Baddasāla와 
   Sumana이었다.

 

왕은 마힌다 장로를 통하여 붓다의 가르침을 듣고 불교에 귀의하게 된다. 마힌다 장로가 소개한 붓다의 가르침은 Majjhima Nikāya(中部)의 27번째 경인 「출라핫띠빠도빠마 숫따(Cūḷahattipodopama Sutta)」라고 한다. 이것이 스리랑카 불교의 시작이다. 스리랑카의 불교는 국가의 후원과 함께 더욱 확고히 뿌리내려 성장했고 민중들 역시 언제나 경건하고 헌신적인 자세로 불교승단을 지원했다. 특히 수도 아누라다뿌라(Anuradhapura)에 대사파(大寺派, Mahāvihāra)라는 종단의 시작은 스리랑카 불교가 상좌부 불교의 중심지로 발전하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하지만 스리랑카는 지리적 여건 때문에 여러 차례 인도의 침략을 겪게 된다. 기원전 1세기 초, 왓따가마니(Vaṭṭagāmaṇī)왕의 치세시절은 스리랑카 승단의 역할이 변화되는 가장 커다란 계기를 맞는다. 이 시기 스리랑카는 인도남부 쫄라(Cola)의 침략으로 불교중심지인 수도를 점령당했고 왕 역시 피해있어야 했다. 국가 전체는 약탈되었고 혼동과 불안 속에서 14년이란 괴로움을 버텨야만했다. 또한 전례 없는 기근을 통해 민중들은 서로를 잡아먹거나 그들이 존경하는 스님조차 잡아먹는 끔찍한 일까지 발생하게 되었다. 많은 출가자들은 승단을 떠나 도망가거나 기아(飢餓)로 죽어 가야만했다. 이러한 혼란에서 스리랑카 불교는 최대의 위기를 맞이한다.

 

더 이상 불교승단을 지원할 수 있는 왕도, 민중도 사라진 것이다. 결국 승단은 구전으로 전승하던 붓다의 말씀인 빠알리 삼장(Ti-piṭaka)이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할 것이라는 위기의식을 느끼게 된다. 승단은 남은 여력으로 불교를 유지하기 위해서 교학(敎學, pariyatti)과 수행(修行, paṭipatti)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하여 총력을 기우려야한다는 기로에 서게 된다. 스님들은 어려운 상황에 불교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붓다의 말씀인 교법을 유지하는 것을 더욱 중요한 사항이라 생각하였고 이러한 선택은 역사상 처음으로 빠알리 삼장을 문자로 기록하는 네 번째 결집이 이루어지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교법을 유지하는 것을 더욱 중요한 사항이라는 승단의 결정은 스리랑카 승단이 오랫동안 수행보다 교법에 치중하는 자연스런 결과를 낳게 하였다. 스님들 사이에서는 경전에 대한 학습이 우선시 되었고 수행은 실천에서 점차 멀어져가게 된 것이다. 결국 스님들은 수행을 익히기 보다는 자연스럽게 교법을 익히기 위해 노력하였고 스님들 사이에서는 교학과 수행의 역할에 따라 마을 거주자(gāma-vāsin)와 숲속 거주자(arañña-vāsin)라는 구분까지 생기게 되었다. 수행하는 스님들이 줄어드는 결과를 얻게 된 것이다. 

 

스리랑카 내에 수행풍토가 점차 사라지는 것은 역사서에서도 보여 지는데, 기록에 따르면 둣타가마니 왕의 시절(Duṭṭhagāmaṇī)에 말리야데와 스님(ven. Maliyadeva)을 마지막으로 아라한(阿羅漢, Arahat)에 대한 기록을 찾아 볼 수 없다. 물론 숲속 거주자(arañña-vāsin)들에 대한 기록은 여러 가지로 남아있으나 수행을 통해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성취한 자에 대한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 반면에 교학을 익히는(gantha-dhura) 자들에 대해서는 많은 기록들이 눈에 띈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은 스리랑카가 불교수행의 중심지가 아닌 불교교학의 중심지로써 명성을 얻고 발전하게 되었는지 보여 준다. 4차 결집과 더불어 패엽경의 형태로 최초로 경전이 쓰인 장소는 스리랑카의 알루비하라(Aluvihāra) 사원이다. 당시 오백명의 비구들이 모여 7년간에 걸쳐 삼장을

문자로 기록했다. 구전되어오던 빠알리 삼장이 최초로 문자로 남게 된 것이다.

 

알루비히라(Aluvihara) 사원의 모습. 기원전 1세기에 세워진 석굴사원이며 스리랑카에서 네 번째로 오래된 사원이다. 사원은 큰 바위를 파내서 만들어졌다.

 

야자수 잎을 무두질하여 말린 후에 그 위에 철필로 글자를 새겨 넣는다. 그런 다음에 재와 식물성 유지를 섞어서 바르고 쌀가루를 덧칠한다. 그런 다음에 깨끗하게 문지르면 글자가 나타난다.

 

스리랑카 상좌부 불교의 역사는 크게 4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는 불교가 유입되고, 4차 결집을 진행하여 경전을 문자화하고, 여러 상좌부 승단이 꽃을 피우는 아누라다뿌라 왕조의 불교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끊어진 불교의 맥을 다시 일으켜 세워 꽃을 피우는 뽈론나루와(Polonnaruwa)왕조의 불교이다. 세 번째는 왕조의 분열과 전쟁 속에서 불교의 맥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캔디(Kandy)왕조의 시대와 외세의 침입시기이며, 마지막으로 네 번째는 영국의 식민지로부터 벗어나 불교부흥운동을 진행하고 있는 현대의 스리랑카 불교이다.

 

아누라다뿌라 시대는 스리랑카 불교의 시작이며, 번성이고, 분열과 소멸을 담고 있다. 왓따가마니 아바야(Vaṭṭagāmaṇi abhaya) 왕이 왕권을 되찾았을 때(29~17 B.C.)에 교단의 첫 분열이 있었다. 이는 대사파(大寺派,Mahāvihāra)와 무외산사파(無畏山寺派, Abhayagiri)[B.C. 1세기]의 분열이

다. 그리고 후에는 기타림사파(祇陀林寺派, Jetavana)[A.D. 3세기]로도 나눠지게 된다. 

 

스리랑카 최초의 사원이자 상좌부 불교를 고스란히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 비구승단의 중심지는 대사파이다. 왓따가마니 아바야 왕은 피신 중에 많은 도움을 주었던 마하띳사(Mahātissa) 장로에게 감사의 표시로 무외산사(Abhayagiri vihāra)를 건립하여 하사한다. 왕과의 잦은 접촉을 갖는 마하띳사 장로에게 불만을 품은 대사파의 승려들은 마하띳사장로를 대사파로부터 축출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불만으로 무외산사파가 형성된다. 이것이 스리랑카 최초의 승단분열이다. 이 분열은 단지 상좌부 불교가 두 개의 종파로 나눠진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분열은 스리랑카 내에 인도문화와 불교의 유입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무외산사는 외국으로부터 오는 새로운 사상을 늘 환영했고, 사상적으로 자유롭고 진보적이고자 노력했으며, 상좌부와 대승적 불교 사상을 함께 연구했기 때문이다. 특히, 대승의 보살 숭배 사상을 받아들이는 등 매우 대중적이고 활발한 활동을 진행했다. 뿐만 아니라, 인도문화와 인도불교의 유입과 함께 산스크리트어가 소개되어 여러 부파들의 견해를 수용하게 되었다. 산스크리트어는 방대한 문학과 매우 다양한 학문적 내용들을 포함하고 있었는데, 종교뿐만 아니라 점성술, 시학, 의학, 문법, 논리, 드라마 등이 여기에 속한다. 반면에 대사파는 보수적이었고 오직 상좌부 불교만 연구했으며, 대승적 불교사상에 지속적인 반대 입장을 취했다. 이러한 분열은 보수파인 전통 상좌부와 외국의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이는 진보파인 대승 상좌부로의 분열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상좌부 불교의 중심지인 스리랑카에 이미 기원전 1세기 이후부터 여러 불교의 가르침이 발전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후에 대사파에 의해 여러 종파가 통일되지만 이는 보수 상좌부의 승리를 의미함과 동시에, 전통 상좌부 불교 안에 인도문화와 불교 사상이 유입된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아바야기리 대탑. 건립 당시는 높이가 110미터에 달했다고 한다. 지금은 높이가 75미터 정도이다.

 

또한 5세기에 들어 아누라다뿌라 시대의 교학은 크게 발전하게 된다. 무엇보다 먼저 오늘날 상좌부 불교의 대표서라고 볼 수 있는 『청정도론(淸淨道論, Visuddhimagga)』이 붓다고사(Buddhaghosa)에 의해 저술되었다. 특히 대사파로부터 인정받은 그는 싱할리어로 남아있는 삼장의 주석서들

을 빠알리어로 번역하였다. 그리고 오늘날 상좌부 불교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역사서인 『마하왕사(Mahāvaṃsa, 大史)』와 『디파왕사(Dīpavaṃsa, 島史)』가 빠알리어로 편찬된 것도 바로 이 시기이다. 결국 이 시기는 상좌부 불교의 역사 속에서 교학에 대한 연구가 가장 활성화되었던 시기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6세기 이후부터 아누라다뿌라 왕조는 급격히 쇠퇴하여 결국 비구승단의 쇠퇴와 더불어 비구니 승단의 소멸에까지 이르게 된다.

 

10세기 말, 아누라다푸라 왕조가 촐라의 침입으로 무너지고 스리랑카의 두 번째 불교왕조가 시작된다. 11세기 무렵 위자야바후 왕은 폴론로나루와에 새로운 도읍을 정하면서 미얀마로부터 구족계를 받아 불교승단의 정비를 시작한다.3) 특히 이 시기에는 아비담마 연구에 집중하여 아누룻다 장로(Anuruddha Thera)에 의해 오늘날 우리에게 잘 알려져있는『아비담맛따상가하(Abhidhammatthasangaha)』가 만들어진다. 또한 대사파에 의해서 다양한 종파가 하나로 통일되고 빨리 삼장 주석서들에 다시 주석을 다는 복주(復註, Ṭīkā)작업이 이루어지는 시기가 폴로나루와 시대이다. 특히, 대사파로 통일된 스리랑카 불교의 구족계를 미얀마(구 버머)에 전하는 시기이다. 이러한 전달은 정통 상좌부가 스리랑카 주변국가로 전달되는 역사적인 계기를 마련한 것일 뿐만 아니라, 후에 스리랑카가 다시 버마로부터 같은 대사파 정통의 상좌부 계맥을 이어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된다. 하

지만 이 시기에 전달된 상좌부에는 이미 대승불교 사상이 유입되어 있었다.

3) 버마의 담마체티(Dhammaceti) 왕은 스리랑카 불교의 구족계 전통을 수입하기 위하여 
   22명의 비구들과 대신들로 구성된 사절단을 파견했다. 스리랑카 상가는 버마의 비구 
   승려들을 위해 켈라니야(Kelaniya) 강의 시마(Sīmā ; 戒壇)에서 구족계 의식을 전해 주었다.

 

힌두교의 침략에 의해 폴로나루와 왕조와 불교는 다시 쇠퇴하게 된다. 폴론나루와 왕조는 14세기에 막을 내리고 나라가 세 왕조로 나뉘어졌다. 스리랑카의 세 번째 불교왕조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것은 꼿떼(Kotte), 시따와까(Sītavaka), 캔디(Kandy) 왕조이다. 이들 중에 꼿떼 왕국의 왕은 포

루투칼과의 연합과 동시에 카톨릭으로 개종하고, 왕궁역시 카톨릭에 헌납한다. 그나마 캔디왕조가 불교를 유지하고자 노력하지만 1721년 스리랑카의 비구승단은 또 다시 소멸한다. 1753년에 우빨리(Upāli) 장로를 위시한 태국 승려들이 스리랑카에 도착하여 태국 승려들로부터 스리랑카 사미승들이 구족계를 받음으로서 스리랑카의 비구 상가는 다시 복원된다. 이때 태국으로부터 받은 구족계는 시암종이며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3)

3) 현재 스리랑카에는 태국으로부터 구족법맥을 받은 시암(Siam-Nikāya)와 미얀마로부터 
   구족 법맥을 받은 아마라뿌라(Amarapura-Nikāya), 라만냐(Rāmañña-Nikāya) 등 3개
   의 종파가 있다. 이들 종파는 구족법맥이 전해져 온 전통에 따라 종파를 구분하고 있으
   며, 소의 경전은 모두다 빠알리 경전이다. 따라서 이들 종파를 두고 하나의 배를 탄 세 
   사람들이라고 표현한다.

 

포루투칼(1505-1658(153년), 네덜란드(1656-1796(140년), 그리고 영국(18115-1948(133년)으로 이어지는 식민통치는 스리랑카의 상좌부 불교에 대한 억압의 역사라고 볼 수 있다. 카톨릭과 기독교로 이어지는 외세의 불교말살 정책은 승단과 재가 사이의 불화를 조장할 뿐만 아니라, 승단의 화합을 깨트리고, 불교교육정책을 말살시키려는 등 불교의 탄압을 지속한다. 인도 힌두교의 지속적인 침략과 더불어 카톨릭과 개신교의 침략으로 확장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를 지키고자 하는 저항운동은 끊임없이 일어났다. 특히, 1873년에 개최되었던 빠나두라 논쟁(Pānadurā Vādaya)은 승려와 목사, 전도사 간에 일주일간 벌어진 종교적 논쟁으로 유명하다. 이 논쟁은 영자신문[The Ceylon Times]을 통해 세계로 소식이 전해졌으며 불교의 승리로 마무리된다. 이 논쟁을 통해 스리랑카의 불자들은 불교에 대한 자긍심과 더불어 불교부흥운동으로 이어지게 된다.15) 식민치하에서도 불자들은 불교의 맥을 유지하고 현대 불교의 중흥을 위하여 노력했다.

 

무엇보다 먼저 불교교육에 희망을 두고 불교학교의 설립과 동시에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4) 결국 1948년 스리랑카는 영국 식민통치로부터 독립한다. 그리고 스리랑카 불교역사의 네 번째 단계로, 불교부흥운동이 시작된다. 스리랑카는 1956년 불기 2,500년 주년 ‘붓다자얀띠(Buddha-Jayanti, 聖年)’ 행사를 실시한다. 이 행사는 붓다의 생애와 관련하여 세계적 표준을 마련하게 된다. 붓다자얀띠와 관련된 모든 사업은 정부에서 지원하는 국가사업으로 진행되었다.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스리랑카 정부는 싱할리어를 국어로 정하고, 불교를 국교로 결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스리랑카 불자들을 위하여 빠알리 삼장의 싱할리어 번역을 시작했다. 불교대백과 사전을 편찬하고 매주 불자들이 절에 가서 불교를 공부할 수 있도록 담마스쿨(Dhamma school)을, 그리고 명상부흥운동을 통해 다양한 불교 수행처들이 설립된다.

4) H. R. Perera(1967) p.67: 1886년 당시 스리랑카의 학교분포를 살펴보면 웨슬리 미션
   스쿨이 206개, 로만 카톨릭이 205개, C.M.S가 224개, 아메리칸 미션스쿨이 133개, 
   침례교 스쿨이 38개, 사립학교 25개, 힌두교학교 5개인데 불교학교 12개에 불과하다.

 

상좌부 불교의 흐름에 있어 스리랑카 불교의 역할은 막중하다. 스리랑카는 인도로부터 상좌부 불교를 받아들인 최초의 국가인 동시에, 상좌부 불교를 꽃피운 나라이기도 하다. 오늘날 상좌부 불교국가에서 통용되는 빠알리 삼장을 처음 문자로 기록․유지할 뿐만 아니라, 주석서, 『청정도론』, 『아

비담맛따상가하』등, 상좌부를 상징하는 모든 문헌이 저술된 나라이기도 한다. 이처럼 붓다의 말씀을 고스란히 간직하고자 하는 스리랑카 승단과 불자들의 노력은 오늘날 전 세계인들이 붓다의 말씀을 전하는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2) 미얀마 불교의 역사와 흐름

미얀마의 상좌부 불교는 오늘날의 미얀마(구 Burma)라는 나라가 세워지기 이전에 이미 미얀마 전역에 알려져 있었다. 특히 몬(Mons)족은 일찍이 인도문화의 영향을 받은 민족으로 상좌부 불자들이었다고 볼 수 있다. 현재의 몬족은 미얀마 몰레미안(Moulmein) 지역 일부와 태국에 소수로 남

아 드물지만, 예전에는 방대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스리랑카 역사서에 따르면 아소카 왕은 불교를 전파하기위해 소나(Soṇa)와 웃따라(Uttara)장로를 ‘황금의 땅(Suvaṇṇabhūmi)’으로 보냈고, 이 나라는 몬족의 나라와 동일시되고 있다. 따라서 스리랑카와 마찬가지로 미얀마에도 아소카 왕에 의해 불교가 전래되었다. 하지만 몬족은 불교로 전향하기보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힌두교 의례나 인도문화와 함께 불교를 소극적으로 받아들였다는 설이 있다. 그리고 3차 결집 이후에 미얀마의 불교전개를 증명하는 고고학적 자료 역시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기원 후 3세기 나가르주나콘다(Naagaarjunakoṇḍa)의 비문에 따르면 남인도의 왕이 비구승단을 방문하게 하고 불교를 전파한 나라들 중에 스리랑카와 더불어 치라따(Cilatas, Kiratas, Prome)라는 나라가 나오며, 역사가들은 이 나라를 미얀마 남부의 몬 주민들이 살던 곳이라고 보고 있다. 남부 미얀마에는 또 다른 민족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퓨(Pyu)족으로 오늘날 현대 미얀마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들은 수도를 스리 세트라(Sri Ksetra)로 정하고 기원후 3세기 중엽 상좌부 불교를 수용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이들의 불교수용에 대한 역사적 증명은 쉽지 않다.

 

9세기 중반(849-850 AD) 만달레이(Mandalay) 주변으로 농경사회가 발달되었고, 미얀마에 살고 있던 퓨족의 거주지인 이라와디강 유역을 중심으로 빠간(Pagan)이라는 왕국이 생성된다. 빠간은 아나야타(Anawratha,Anuruddha)왕에 의해 완성된 미얀마 최초의 통일 왕국이다. 그리고 이 최초의 통일왕국은 11세기 신 아라한(Shin Arahan)이라는 몬족 출신의 비구를 통해 상좌부 불교를 수용한다. 아나야타(Anawratha)왕은 불교를 수용하고 신 아라한을 스승으로 모시고 사원을 건립하는 등의 불교발전에 크게 이바지한다. 무엇보다 그는 붓다의 원전을 신성하게 유지하고자하는 욕망이 있었다. 그리하여 여러 나라를 통해 경전을 복사해 줄 것을 요구했으나 빈번히 거절당했다. 더 이상의 거절을 견딜 수 없었던 그는 군대를 보내어 1057년 타톤(Thaton)을 정복하고 힘으로 빠알리 삼장을 얻게 된다. 또한 퓨족의 수도인 스리 세트라(Sri Ksetra)를 정복하여 붓다의 사리도 얻는다.

 

아나야타(Anawratha,Anuruddha)왕

 

◈ 쉐산도 파고다(Shwesandaw Pagoda) 1057년 아나와타(Anawratha,1044-1077)왕에 의해 건립된 쉐산도 파고다에는 바고왕이 크메르(Khmer)의 침략으로부터 구해준 고마움의 정표로 준 부처님 머리카락이 보관되어있다. 파고다 경내에는 길이 30m의 와불이 있다. 아나와타왕은 타톤(Thaton)을 정복한 후, 웅장한 원형의 파고다를 지었다. 5개의 테라스에는 한때 자타카(Jataka; 부처의 전생에 대한 설화집)로부터 아름다운 장면을 테라스코타에 장식하였다.

 

이 시기에 있어 흥미로운 점은 미얀마의 왕과 스리랑카의 왕 사이에 상좌부 불교가 교류된다는 것이다. 스리랑카는 힌두 쫄라(Hindu Colas)의 반복적인 침략에 의해 반세기 이상 불교가 쇠퇴하게 되었다. 결국 주변국의 도움으로 쫄라의 침략을 벗어나고, 위자야바후 왕은 다시 왕국을 정비한

다. 그는 무엇보다 먼저 불교승단의 정비를 시작하는데, 쫄라를 물리치는데 재정적인 지원을 해준 미얀마의 아나야타 왕에게 스리랑카를 위해 청정한 구족계를 내려줄 수 있는 비구상가를 요청한다. 그리고 미얀마의 아나야타 왕은 삼장에 능통하고 청정한 삶을 사는 비구들을 스리랑카에 보내어 스리랑카의 상좌부 불교의 정비를 돕는다. 또한 스리랑카를 방문한 미얀마의 비구들은 싱할리 삼장을 가지고 돌아와 빠알리 삼장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다. 결국 아나야타 왕은 미얀마뿐만 아니라 주변국으로부터 위대한 불교의 승리자라고 불리게 된다. 이후로 미얀마 상좌부 불교의 번성이 시작된다.

 

왕위를 이어받은 짠지따(Kyanzitta)왕 역시 불교발전에 이바지 한다. 그는 미얀마에 거대한 탑들을 만들고, 인도 보드가야(Bodhgaya) 사원의 수리를 위해 장인과 인력을 지원하는 등, 불교수호를 위해 국내외로 힘을 펼친다. 그는 미얀마의 지리적 환경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들어오는 북인도의

대승불교와 밀교의 영향에 대해 집중적으로 비교 연구한다. 그 과정에서 스리랑카의 대사파로부터 얻은 빠알리 삼장과 고대 몬족이 가지고 있던 빠알리 삼장을 치밀하게 분석함으로써 스리랑카의 불교가 다른 나라의 불교들에 비해 정통성을 가지고 있음을 입증한다. 이처럼 미얀마는 11세기,

왕권의 지원과 스리랑카의 교류와 더불어 상좌부 불교의 정체성을 확립하게 된다.

 

1059년 아나와타(Anawrahta)왕이 건축을 시작하여, 1085년 아나와타왕의 아들인 쟌시타(Kyanzittha)왕에 의해 완성된 쉐지곤 파고다는 그 기저가 약 50m 높이와 폭의 웅장한 건축물로 그 전체가 금박으로 덮혀있는 불탑이다. 이 파고다는 몬(Mon) 건축양식에서 버마 건축양식으로 옮겨지는 시기에 나온 최초의 버마 건축양식의 불탑이다. 고전의 기초 구조에 있어 거의 변화가 없다는 점이 양곤에 있는 쉐다곤 파고다(Shwedagon Pagoda)와 크게 다른 점이다. 아노라타왕이 스리랑카(Sri Lanka)에서 가져온 부처의 치아유골이 탑 내부에 안치되어 있다. 쉐지곤 파고다는 고고학적 유적물로서만이 아니라, 실재 종교적 목적, 순례자의 중요한 목적지로 사용되는 사원이다. 쉐지곤 파고다를 짓기 전, 건물을 지을 땅을 정하기 위해 부처의 치아를 보석상자에 넣고 미얀마인들이 신성시 여기는 흰 코끼리의 등에 얹어 배회케 한 다음 그 코끼리가 휴식을 취한 곳으로 정했다고 한다. 이때 코끼리가 휴식을 취한 이곳이 황금벌 모래 언덕이었기 때문에 '황금모래 언덕'이란 의미를 가진 쉐지곤으로 불리게 됐다.

 

오늘날 미얀마는 상좌부 불교수행의 중심지로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11세기 이전에만 해도 미얀마에 불교수행에 대한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 미얀마는 스리랑카와의 교류를 통해 청정도론을 받아들이게 되고, 삿담마조띠빨라(Saddhammajotipāla)에 의해 청정도론 주석서(Visuddhimagga-ganthi)가 정리되면서 실천이 아닌 이론에서의 수행연구가 진행되기 시작한다.

 

시간이 흘러 빠간왕조는 몽골(Mongol)과의 관계에 의해 그 힘을 잃고 14세기까지 문화․종교적 도시로 남게 된다. 그리고 미얀마는 아와(Ava)를 중심으로 하는 북미얀마와 빠고(Pago)를 중심으로하는 남미얀마로 나눠진다. 몬족을 중심으로 하는 남미얀마에서는 14세기 초반 스리랑카의 전통을

수호하는 대사파의 구족계를 받아들인다.5) 이 사건은 미얀마가 붓다의 시대로부터 부서지지 않고 전수되어온 정통 상좌부 구족계를 받아들인 것을의미한다.

5) 남미얀마에서 가장 큰스님이었던 붓다왐사와 마하나가 장로는 스리랑카의 순례를 통해 전통을
   받아들인 차빠다를 수용하고 그 가르침을 받아들인다)

 

15세기 미얀마의 왕인 담마쩨디(Dhammazedi, 1472-1492)는 미얀마 불교 역사에 새로운 자리를 차지한다. 몬족의 비구출신인 그는 다른 비구들과 함께 제자였던 신사부(Shin Sawbu) 공주를 북미얀마로부터 탈출하도록 돕는다. 빠고로 돌아온 그녀는 곧 남미얀마의 왕이 되고 머지않아, 빠고의 왕권을 담마쩨디에게 넘겨주게 된다. 담마쩨디는 시할라 상가(Sihala Saṇga)로부터 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시할라 상가는 스리랑카 대사파의 정통성만을 고집하는 미얀마의 상가로, 담마쩨디왕이 대사파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왕이 된 그는 23명의 선임비구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몬족의 비구계는 정통성이 없기에 앞으로의 미래를 위해 스리랑카의 구족계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1476년 22명의 선택된 비구를 시작으로 스리랑카 대사파에 지속적으로 비구들을 보내어 구족계를 수지하도록 한다. 그리고 그는 ‘깔야니 시마(Kalyāṇī Sīmā)’홀을 만들어 몬족 출신의 비구들이 스리랑카에서 구족계를 받아온 비구들로부터 정통성있는 구족계를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그를 통해 미얀마 불교는 상좌부 불교의 정통성을 확립하게 된다.

 

담다제디왕에 의해 건립된 짜익푼 파고다.

 

그의 통치에 있어 흥미로운 점은 그가 율장을 어기는 비구들에게 새로운 형식의 벌을 주었다는 것이다. 왕이라고 할지라도 재가자로 환속한 그는 빠라지까(Pārājika)를 어기는 비구를 벌할 수 있는 권한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율장을 지키지 않는 비구들의 부모, 친척, 그리고 후원자들을 벌하는 형식을 빌어 비구들이 율장을 지킬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그는 상가와 함께 국정을 논의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에 의해 승단이 암암리에 권력을 지니는 것에 대해서는 늘 경계하였다. 그가 시작한 불교에 대한 헌신을 이루말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주변의 태국(Thailand) 뿐만 아니라, 북

미얀마, 그 외에 많은 지역 비구들이 몬 비구들로부터 깔야니 구족계를 받기위해 지속적으로 방문하였다.

 

미얀마는 17세기와 더불어 역동적인 불교성장의 역사를 맞이하게 된다. 많은 아비담마와 주석서들이 미얀마어로 번역 및 출간되기 시작한다. 이와같은 작업은 빠알리 학자들의 전유물로 연구되던 불교가 일반 대중에게 미얀마어로 전달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특히, 아비담마의 마지막인

빳타나(Paṭṭhāna)는 붓다의 가장 수승한 가르침으로 인식되게 된다. 대부분의 상가에서는 빳타나를 읽고 암송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마무리 하였으며, 어린 아이들까지도 빳타나의 24가지 조건들을 암송하며 다니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아비담마의 유행은 어려운 개념을 담고 있는 빠알리어를 설명하기위해 미얀마어 역시 대폭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또한 언어의 발달은 미얀마의 문명 역시 발전하고 성숙하도록 이끌었다. 이러한 과정으로 인해 미얀마 인들은 붓다의 가르침을 분석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고, 결국 아비담마를 바탕으로 위빠사나 수행이 자리잡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빠간시대에 자따가(Jātaka)를 통해 붓다의 삶과 역사를 연구했다면, 그 이후에는 빠알리 문법과 율장에 대한 연구가 흥했고, 담마쩨디왕의 시대에 와서는 붓다의 시대로 돌아가자는 정통성 회복운동이 대세였다. 그리고 17세기에 들어 아비담마의 시대가 열린다. 하지만 18세기에 미얀마는 독재정치에 빠진다. 1756년 남미얀마는 자신이 보디삿따(Bodhisatta)라고 믿는 아라웅빠야왕에 의해 정복당한다. 남미얀마는 황폐해지고 많은 몬족들은 태국으로 도망가거나 노예처럼 추방되었다. 아라웅빠야 왕은 제국을 만들고 싶어 했고, 미얀마 내 뿐만 아니라, 아윳타야(Ayutthaya, 태국)등의 주변 국가들에도 군대를 보냈다. 이 시기에 상가 내에서 논쟁에 되었던 것은 비구가 가사를 입고 탁발 할 때에 한 어깨를 가리느냐, 두 어깨를 모두 가리느냐의 문제였다. 아라웅빠야 왕의 다섯째 아들인 보다우빠야(Bodawpaya)왕은 이 논쟁에 대해 모든 어깨를 가리는 것으로 결정한다. 이러한 왕의 결정은 왕에 선택을 받은 비구가 승단의 리더로써 미얀마의 전체 승단을 조절하는 시대가 도래했음을 의미한다.

 

특히, 보다우빠야 왕은 스리랑카에 구족계를 다시 전달해주는 역할을 한다. 이 시기의 스리랑카는 일종의 귀족정치가 시작되어 비구계를 받고싶은 사람이 조건에 의해 구족계를 받지 못하는 일이 생겼다. 특히 낮은 카스트 신분을 가진 자는 비구가 될 수 없었다. 19세기 초반 스리랑카의 비구들은 순수한 수계를 찾기 위해 미얀마 遊行을 시작했고 보다우빠야 왕은 이들은 환대하였다. 현재 스리랑카 내에는 3개의 종파가 있는데 이들은 시암(Siam-Nikāya)종, 아마라뿌라(Amarapura-Nikāya)종, 그리고 라만냐(Rāmañña-Nikaya)종이다. 이들 중에 아마라뿌라종은 보다우빠야 왕에 의해 미얀마의 만달레이(Mandalay)와 아와(Ava) 사이에 만든 수도 아마라뿌라에서 계를 받아서 만들어진 이름이다. 그리고 라만냐종은 담마쩨디왕의 개혁과 몬족에 의해, 비구계를 받은 자들이 태국 남부로 도망가 만든 종파이다. 이 두 종파는 모두 수계에 있어 신분차별을 두지 않는다. 하지만 시암종은 태국의 종파로 여전히 신분차별을 두고 있다. 미얀마의 보다 우빠야 왕은 차별로 인해 비구계를 받지 못하는 출가자들에게 아마라뿌라에서 구족계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으며, 이들은 스리랑카의 또 다른 종파가 되었다. 이처럼 상좌부 불교 국가들은 위기의 순간을 맞이했을 때, 서로 붓다의 가르침과 구족계를 전달하며 상좌부의 전통을 고수해 나아간다. 보다우빠야 왕의 후계자인 바기다(Bagyidaw) 왕은 서구의 침략에 의해 영토를 잃은 첫 번째 왕이다.

 

19세기 후반에 즉위한 민돈(Mindon) 왕의 25년간 통치시기는 미얀마 역사에 있어서 가장 평화로운 시기 중에 하나이다. 민돈왕은 만달레이로 수도를 바꾼다. 그리고 이 도시는 영국과의 합병이 되는 1886년 전까지 존재한 마지막 왕국의 수도가 된다. 민돈왕은 직접 5차 결집을 관장한다. 이 작업은 1868년에서 1871년까지 2,400명의 승려가 만달레이에 모여 빠알리 삼장과 주석서를 정비한다. 그리고 그 내용을 729개의 대리석에 세워 쿠도도 파고다(Kuthodaw Pagoda)를 세운다. 19세기 후반에는 영국 식민통치의 영향으로 승단의 질서가 흐트러지고 여러 종파가 생겨난다. 그

대표적인 종파가 쉐진(Shwegyin)파, 드와라(Dwara)파, 겟트윈(Hngettwin)파이다. 1948년 미얀마는 독립한다. 첫 번째 수상인 우 누(U Nu)는 상가와 불교발전을 위해 많은 개혁을 단행한다. 특히 1954년부터 1956년까지 진행했던 제6차 결집은 불멸 후 가장 최근에 진행된 결집이라고 볼 수

있다.

쿠도도 파고다

 

상좌부 불교의 흐름에 있어 미얀마 불교의 역할은 중대하다. 미얀마는 스리랑카로부터 상좌부 불교를 받아들인 국가인 동시에, 상좌부 불교를 살리고 다시 스리랑카에 전달해준 나라이다. 오늘날 아비담마의 연구에 있어 대표적인 국가일 뿐만 아니라, 붓다의 가르침을 수행으로 실천하는데 있어

서도 상좌부 불교국가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미얀마인이 되려면 불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이는 미얀마 사람들이 불교를 보존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알 수 있는 구절이다. 스리랑카의 불교가 붓다의 가르침을 보호하고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면, 미얀마 불교는 붓다의 가르침을 분석하고 실천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3) 태국 불교의 역사와 흐름

태국은 아마도 왕으로 즉위하기위해 불자라는 조건이 필요한 유일한 나라일 것이다. 태국에 거주하던 원주민들은 몬족이다. 스리랑카 역사서에 따르면 아소카 왕은 불교를 전파하기위해 소나(Soṇa)와 웃따라(Uttara)장로를 ‘황금의 땅(Suvaṇṇabhūmi)’으로 보냈고, 이 나라는 몬족의 나라와 동일시되고 있다. 따라서 스리랑카나 미얀마와 마찬가지로 태국에도 3차 결집 이후에 아소카 왕에 의해 불교가 전래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수완나부미’가 어디인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다. 미얀마의 학자들은 타똔(Thaton)을 수도로 하는 미얀마라고 하고, 태국의 학자들은 나꼰 빠톰(Nakon Pathom)을 수도로 하는 태국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캄보디아와 라오스의 학자들은 그들의 땅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수완나부미’의 정확한 경계에 대한 역사적인 논의는 의미가 없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지역이 미얀마,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를 포함하는 남동아시아를 의미하는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3차 결집 이후에 상좌부 불교가 이 지역에 전해진 것만은 사실이라고 볼 수 있다.

 

11세기 미얀마 빠간의 아나야타(Anawratha, Anuruddha)왕은 불교의 발전을 위해 부단한 노력을 했다. 그 영향으로 태국의 북부지역에도 상좌부 전통이 소개된다. 이 시대에 태국의 남부지역은 롭부리(Lopburi)를 수도로 크메르(Khmer, 캄보디아)의 지배를 받았으며, 이들은 마하야나(Mahāyāna) 불교와 힌두교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었다. 13세기가 되어 라마캄행(Rāma Khamheng) 왕의 수코타이 왕조는 크메르로부터 벗어나 상좌부 불교를 왕국의 공식종교로 삼는다. 라마캄행 왕은 스리랑카로 비구들을 보내어 구족계를 받고 상좌부 불교를 연구하기 위해 유학을 보낸다. 그리고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비구들은 스리랑카의 불교교리 뿐만 아니라, 사리, 탑, 불상 등의 상좌부 불교문화를 함께 전한다. 결국 스리랑카 불교와 문화는 태국 전체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그 영향에 의해 불교건축물들 또한 만들어 졌다. 

 

또한 라마캄행 왕의 손자인 루타이(Lu Thai)는 태국의 상가를 청정하고 강하게 만들기 위해 스리랑카로부터 명망 높은 비구들을 초청한다. 수코타이의 유산은 1350년부터 1767년까지 417년간 유지된 아유드야(Ayudhya, Ayutthaya) 왕조로 연결된다. 이 시기에 캄보디아는 타이왕조에 귀속된다. 하지만 크메르 문화는 타이에 깊은 문화적 원천이 되었다. 아유드야 왕조의 왕들은 불교의 발전과 진흥에 힘을 기울였고, 덕분에 태국불교는 국왕의 보호아래서 안정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18세기 마하 담마라자(Maha Dhammarāja II)왕의 시대에는 아유드야 왕조에서 꽃피운 상좌부의 향기가 스리랑카에 다시 전달된다. 이 시기에 스리랑카는 왕조의 분열과 서양의 침략으로 苦楚를 겪는다. 결국 1721년 스리랑카 내의 비구승단은 소멸하게 된다. 이에 스리랑카의 끼르띠 스리(Kīrti

Srī)왕은 아유드야(태국)에 구족계를 요청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응답으로 1753년에 우빨리(Upāli)를 위시한 태국 승려들이 스리랑카에 도착하여, 스리랑카의 사미승들에게 구족계를 줌으로서 스리랑카의 비구승단은 다시 복원된다. 이때 만들어진 종단이 시암종(Siam -Nikāya)이다. 아유드야 왕조는 1767년 미얀마의 침략으로 멸망한다. 하지만 탁신(Taksin)왕은 태국 왕조를 바로 다시 부흥시킨다. 그는 매남강의 톤부리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한다. 하지만 그는 오늘날 태국의 왕조인 차끄리(Chakri) 왕조의 첫 번째 왕, 라마 1세(Rāma I)에 의해 폐위된다. 라마1세는 수도를 방콕으로

옮기고 불교를 지원하기 시작한다. 

 

차끄리 왕조의 왕들은 불교에 대한 신앙심이 강해 전국에 많은 탑과 사찰을 지원하였다. 그는 라마 4세(RāmaIV)인 몽쿳(Mongkut) 왕으로 즉위하기 전까지 27년간 비구로서 지냈다. 특히 그는 상가의 계율을 엄격하게 지키는 담마윳띠가 니까야(Dhammayuttika Nikāya)를 재구성한다. 이러한 결과로 태국의 상가는 왕실의 지원과 더불어 엄격한 계율을 지키는 종파로 오늘날까지 유지되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특징은 오늘날의 태국불교에 계율을 엄격하게 지키는 전통을 만들어내는 계기가 되었다. 오늘날 태국에는 이 종파 외에도 스리랑카의 승려들에 의해 성립된 다수파인 마하니까야(Mahā Nikāya)가 있다.

 

또한 라마 5세는 1902년에 ‘상가법’을 발표하고 전국의 모든 사원들을 승왕(Sangharāja)의 감독 하에 두는 중앙집권적인 승단을 만들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상가의 보수화를 초래하였다. 그리고 태국은 1932년의 입헌 혁명에 의해서 절대 왕권제가 붕괴된다. 결국 상가에도 민주적인

의회 제도에 의해서 1942년에 상가법이 제2차 개정, 1963년에 제3차 개정 그리고 1992년 제4차 개정을 하게 된다. 태국은 이러한 상가법에 의해 정부가 임명권을 갖는 승왕에 의한 상가의 일원적인 지배가 실현되어 정부에 대한 상가의 종속은 더욱 확고히 진행되었다.

 

태국의 옛 사원

 

단기출가 행사

 

태국 승려들의 탁발 모습

 

2. 상좌부불교의 수행문화

 

앞 서 살펴본 것처럼 상좌부불교는 불교의 맥을 유지하기위해 서로 구족계와 수행문화를 주고받는다. 이들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1세기 무렵 스리랑카의 위자야바후왕은 폴로나루와에 새로운 수도를 만들며 끊어진 불교를 부활시키기 위해 미얀마에 구족계를 요청한다. 미얀마

빠간에 최초의 통일왕국을 만든 아나야타왕은 스리랑카의 요청에 따라 비구들을 보내어 스리랑카에 구족계를 전하고 스리랑카에 보존되어있던 빠알리 삼장을 받아들인다. 미얀마는 기존에 몬족에 의해 유지되던 빠알리 삼장과의 스리랑카의 빠알리 삼장을 분석하고, 스리랑카의 삼장이 상좌부

의 전통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판단한다. 또한 미얀마는 스리랑카의 [대사파 전통수행서] 『청정도론』과 주석문헌을 수용함으로써 불교수행의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한다. 미얀마의 아나야타왕의 영향에 의해 태국의 북부지역역시 상좌부불교를 수용한다.

 

미얀마로부터 구족계를 받은 스리랑카는 대사파의 전통을 부활시키고 불교발전을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폴로나루와 왕조의 불교부활은 주변국인 태국에까지 영향을 준다. 라마캄행 왕에 의한 수코타이 왕조는 스리랑카로 비구를 보내어 유학, 구족계를 받고 상좌부 불교를 왕국의 공식종교로 선포한다. 하지만 스리랑카의 불교를 유지하던 폴로나루와 왕조는 힌두교의 지속적인 침략과 왕조의 분열에 의해 소멸한다. 결국 폴로나루와 왕조는 꼿떼, 시따와까, 캔디왕조로 분열되고 불교의 맥은 캔디왕조를 통해서만 간신히 유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5세기 무렵, 스리랑카 대사파의 구족계는 미얀마로 전달된다. 미얀마의 담마쩨디왕은 미얀마 몬족의 구족계는 정통성이 떨어진다고 판단, 스리랑카에 대사파의 구족계를 요청하게 된다. 그는 스리랑카로부터 전해진 구족계를 통해 율장을 강화하고, 태국과 미얀마 북부지역에 새로운 대사파 전통의 구족계를 확장․전달한다. 이로써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을 중심으로 하는 상좌부 불교는 모두 스리랑카 대사파 전통의 구족계를 수용하게 된다. 상좌부불교의 수행전통 역시 대사파의 수행서인 『청정도론』에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16세기 스리랑카는 포루투칼의 침략을 시작으로 네덜란드와 영국을 거치는 443년간의 식민지배를 받게 된다. 그리고 불교역시 쇠퇴기를 맞이한다. 17세기 미얀마의 불교는 아비담마의 번역과 더불어 역동적으로 성장하는 반면에 스리랑카의 불교는 추락하게 된다. 그나마 캔디왕조를 통해 불교가 유지되고 있었으나, 비구상가는 네덜란드의 억압을 버티지 못하고 1721년 또 다시 소멸한다. 하지만 다시 비구상가를 부활시킨다. 이번에는 태국의 도움을 먼저 받는데, 1753년 우빨리 장로 등의 태국 승려들이 스리은 출가의 자격을 위한 신분을 중요하게 생각하였고, 이와 같은 신분차별에 반발하여 미얀마로부터 아마라뿌라종이 유입되었다. 그리고 라만냐종 역시 생겨났다. 이렇게 부활된 스리랑카의 비구상가는 영국식민지를 거쳐 불교부흥운동과 더불어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특히, 1948년 스리랑카의 독립이후에 진행된 불교부흥운동은 스리랑카의 수행문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1) 스리랑카의 수행문화

스리랑카의 독립 이후에 만들어진 수행처는 다음과 같다. ‘스리 깔야니 요가스라마 삼스타와(Sri Kalyāni Yogāsrama Samsthāva)’는 스리랑카의 수행단체로 1950년에 만들어졌으며 미뜨리갈라(Mitirigala)에 위치한 ‘니싸라나와나야 수행처(Nissarana Vanaya Meditation Center)’가 대표적이

다. 이곳은 “열반 아니면 죽음”이라는 모토를 지니고 스리랑카의 명상부흥운동과 함께 1969년에 설립되었다. 1911년 독일출신의 냐나틸로까 장로가 만든 ‘아일랜드 허미티지(Island Hermitage) 수행처’를 제외한 대부분의 수행처들은 독립이후의 명상부흥운동의 영향을 받아 재건 및 새롭게 설립 되었다. 

 

특히, 미얀마 마하시사야도의 영향으로 전통적인 문헌에서는 조금 벗어나지만 현대인들의 취향에 맞는 위빠사나수행법이 확장된다. 마하시사야도는 스리랑카 전통상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변형된 위빠사나 수행법을 스리랑카에 소개한다. 그는 1956년 수도인 콜롬보에서 멀지 않은 칸두보다 지역에 ‘칸두보다 명상센터(Kandubodha Meditation Center)’를 설립하고 재가불자를 중심으로 가르침을 펼쳐나간다. 그리고 이러한 영향에 의해 콜롬보 시내 중심에 ‘국제위빠사나명상센터(International Vipassana Meditation Center)’가 생기고, 마하시의 방식으로 위빠사나 수행을 진행하는 곳이 늘어나 ‘수마티팔라 나히미 세나순 아란냐(Sumathipala Nahimi Senasun Arañña)’ 등이 만들어 진다. 그 밖에도 1954년 ‘와뚜루윌라 아란냐(Waturuvila Arañña)’, 1979년 ‘닐람베 명상센터(Nillambe MeditationCenter)’ 등이 생겨나 불교수행의 대중화에 기여한다. 특히, 닐람베 명상센터는 재가자에 의해 만들어진 재가자 수행처로 다른 수행처에 비해 계율이 완화된 모습이다. 1992년에는 재가불자인 고엔카에 의해 개량된 위빠사나수행을 진행하는 ‘담마꾸따 위빠사나 명상센터(Dhamma KutaVipassana Meditation Center)’가 설립된다. 그리고 기원전 3세기에 만들어졌지만, 1954년에 새롭게 설립한 나우야나 명상센터(Na Uyana Meditation Center)는 미얀마의 파욱사야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마타수행처로 유명하다.

 

현재 스리랑카에서 진행되는 불교수행의 특징 중의 하나는 빠알리니까야를 수행방침의 기본으로 삼고 있으나, 실질적인 진행방식에 있어서는 『청정도론』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지도방법에 있어서는 미얀마의 마하시와 파옥 사야도의 수행방법 등을 수용하고 있는 곳도

많으며 점차 늘어나는 추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얀마 수행문화와의 차이점이 있다면, 미얀마 수행문화가 대체로 사마타 없이 위빠사나만 진행하는 ‘순수위빠사나’ 쪽으로 기울고 있는 반면에 스리랑카는 사마타의 중요성 역시 강조하는 추세이다. 아마도 많은 불자들이 『청정도론』에 비해 빠알리니까야에 대한 의존도가 높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판단된다. 2600년 불교역사 중에 2300년에 가까운 역사를 지닌 스리랑카 불교지만, 외세의 침략에 의해 끊임없는 수모와 단절을 경험해야만 했다. 다행히도 주변 상좌부불교 국가들의 지원에 의해 불교의 맥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오늘날의 수행문화에 있어서도 영향을 받은 것이 사실이다. 대부분의 수행처는 1948년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이후에 진행된 불교부흥운동에 의해 설립 및 재건되었다.

 

2) 미얀마의 수행문화

미얀마는 영국과 3번의 전쟁에 의해 1886년 식민지화 된다. 그리고 1948년 1월 4일 독립하여 버마연방을 성립한다. 예전의 다른 영국 식민지나 해외 영토와 달리 버마는 영국 연방의 일원이 되지 않았다. 독립 이후에 민주 정치 시대가 유지되는 듯 했으나, 1962년 네윈 장군의 쿠데타로 26년간 버마식 사회주의가 추구된다. 2010년 11월 7일 미얀마 군사 정권은 총선을 통해 민간에 정권을 이양했으나 표면적인 작업이라 비난받고 있다.

 

미얀마 역시 영국식민지로부터의 독립 이후에 수행전통이 부활하게 된다. 오늘날 미얀마의 수행은 마하시사야도의 계열과 레디사야도의 계열로 구분될 수 있는데 이들의 구분이 명확한 것은 아니다. 다만, 마하시 사야도는 『청정도론』과 아비담마를 근간으로 현대인들에게 맞는 수행법을 전

달하고자 노력하였으며, 레디사야도는 빠알리니까야에 준하여 수행법을 창안하고자 노력하였다. 특히, 레디사야도 계열은 레디사야도 이후에 사야텟지(Saya Thetgyi, 1873-1945), 우바킨(U Ba Khin, 1899-1971) 그리고 고엔카지(S.N. Goenka)로 이어지는 재가불자 수행지도자의 전통을 이어갔다. 그러다보니 재가수행자의 수행참여가 늘어났으며, 수행문화 안에서의 차지하는 위치도 확고해졌다.

 

⑴ 마하시 사야도 계통의 수행처에는 마하시 사야도가 선원장으로 1950년 시작한 ‘마하시 사사나 예익타 수행 센터(Mahasi Sāsana Yeiktha Meditation Center)’, 마하시의 제자인 빤디따라마 사야도에 의해 만들어진 ‘빤디따라마 수행 센터(Paṇḍitārāma Shwe Taun Gon Sāsana Yeiktha Meditation Center)’[1990, 1995], ‘찬매 예이타 수행 센터(Chanmay Yeiktha Meditation Center)’[1977], ‘삿담마란시 수행 센터(Saddhammaransi Meditation Center)’[1993] 등이 있다. 이들은 대부분이 좌선 한 시간과 행선 한 시간씩을 병행하고, 인터뷰를 실시하며, 의도적으로 천천히 움직이고, 현상에 명칭을 붙여 집중력을 키우고, 호흡을 통한 배의 움직임을 중심으로 관찰하는 마하시사야도의 위빠사나 수행방식을 따르고 있다. 반면에 1999년에 설립된 ‘쉐우민 수행센터(Shwe oo Min Dhamma Sukha Forest Center)’는 마하시 사야도와 같은 순수위빠사나를 표방하지만 그 방법에 있어 차이점을 지닌다. 마하시 사야도의 수행법이 몸과 마음의 느낌을 중심으로 한다면, 쉐우민 사야도의 수행법은 마음을 중심으로 진행된다고 볼 수 있다. 육근이 대상과의 접촉을 이루고 있을 때 나타나는 마음의 상태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또한 일부러 천천히 움직인다거나, 명칭을 붙이거나, 의도적으로 배의 느낌을 본다거나 등의 인위적인 작업을 내려놓고 메타인지(Meta-cognition)를 이용한다.

 

⑵ 레디 사야도 계통의 수행 도량에는 1951년 설립된 ‘순룬 불교 수행센터(Sunlun Buddhist Meditation Center)’ [Kaba Aye], 파옥 수행센터(Pa-Auk Meditation center)[1926], 모곡 수행 센터(Mogok Meditationcenter), 담마조티 위빠사나 센터(Dhammajoti Vipassanā center)[1993], 국제수행 센터(International Meditation Center(IMC) 등이 있다. 이들은 순수위빠사나 수행처와 사마타-위빠사나 수행처로 구분될 수 있는데 위빠사나를 진행하기에 앞 서 사마타 수행을 선행하거나 사마타적인 집중의요소를 활용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미얀마의 수행문화 역시 『청정도론』에 의존하고 있다. 그리고 다른 상좌부불교 국가에 비해 아비담마에 대한 신뢰도가 상당히 높아, 아비담마가 법(dhamma)보다 뛰어나다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러한 배경에는 17세기 아비담마와 주석서의 미얀마어 번역 및 출간이 많은 영향을 준 것

으로 보인다. 스리랑카가 청정도론과 아비담맛따상가하의 씨앗을 뿌렸다면, 미얀마는 이들의 꽃을 피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미얀마의 경우, 11세기 이전의 불교와 수행문화는 찾아보기 어려우며, 스리랑카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수행처는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이후[1948년]에 진행된 불교부흥운동에 의해 설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빠알리니까야를 기반으로 『청정도론』과 아비담마의 전통에 따라 수행을 소개하지만, 그 실제진행에 있어서는 수행처별로 독창적인 방법을 만들어 내고 있다. 한편으로는 상좌부 전통에서 새롭게 만들어낸 수행법을 니까야와 『청정도론』에 맞추는 형식으로 보이기도 한다. 미얀마는 오늘날[2014년]을 기준으로, 상좌부불교 국가들 사이에서 가장 활발한 수행문화를 지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들의 수행문화는 스리랑카와 태국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와 서양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3) 태국의 수행문화

태국은 스리랑카와 미얀마와 다르게 외국의 식민지생활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학연구과 수행실천에 있어 특별한 역사적 특징을 지니지 못하고 있다. 태국의 수행 역시 빠알리니까야를 기반으로 『청정도론』에 의지하여 진행된다. 태국출신의 수행지도자로 구성된 전통적인 수행처들이 대부분이지만, 1950년대 이후에 미얀마 마하시 위빠사나 수행의 영향을 받아 설립된 수행처들도 많다.

 

⑴ 동북지역은 우본 라차타니(Ubon Ratchathani)를 중심으로 발달되었다. 1975년에 설립된 ‘왓 파 나나차(Wat Pah Nanacha ; International Forest Monastery)’는 숲속의 수행처로 수행자 대부분이 각자의 구띠에서 수행한다. ‘왓 농 파 퐁(Wat Nong Pah Pong)’은 아잔차(Ajahn Chah)에 의해 1954년에 설립되었다. 그 외에도 왓 파 와나 포티얀(Wat Pah Wana Potiyan)’ 등의 수행처가 있다.

 

⑵ 북부지역은 치앙마이(Chiang Mai)를 중심으로 ‘왓 람 펑 북부 위빠사나 수행 센터(Wat Ram Poeng Northern Vipassanā Meditation Center)’,‘왓 프라 탓 촘 통(Wat Phra Tat Chom Thong)’, ‘왓 탐 통 수행 센터(Wat Tham Tong Meditation Center)’, ‘왓 우몽(Wat U Mong)’[2005] 수행처가 있다.

 

⑶ 남부지역에는 1932년 아찬 붓다다사(Ajahn Buddhadāsa)에의해 설립된 ‘수안 목(Suan Mokkh)’, ‘말레이시아 불교 수행 센터(Malaysian Buddhist Meditation Center-MBMC)’ 등이 있다.

 

⑷ 방콕 및 중부지역에는 18세기에 설립된 ‘왓 마하 타트(Wat Maha That, Section 5)’, ‘왓 팍 남(Wat Pak Nam)’, ‘담마카야 사원(Dhammakāya Foundation, Wat Phra Dhammakāya)’, ‘왓 아소카람(Wat Asokaram)’[1955], ‘위웨크 아좀 위빠사나 수행 센터(Wiwek Asom Vipassanā Meditation Center)’[1953], ‘왓 사이 감(Wat Sai Ngam)’[1970년대] 등의 수행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