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 논문및 평론/교리 및 수행

사성제와 연기법의 결합에 대하여

실론섬 2015. 6. 19. 14:22

사성제와 연기법의 결합에 대하여

__초기불전을 중심으로__

김홍미/원과(圓果) 스님. 동국대학교 대학원, 철학박사

 

Ⅰ 문제제기, 그리고 불교 해탈도에서 반야의 위상. 

Ⅱ 사성제는 어떻게 도출되고 응용되는가. 

Ⅲ 사성제에 대한 다른 응용은 어떤 형태인가. 

Ⅳ 사성제와 연기법은 어떻게 결합되는가. 

Ⅴ 나오는 말.

 

요약문 

초기불전에서 사성제의 틀에 연기법의 구성요소들을 대입한 유형은 붓다가 깨달은 것이면서 해탈체험을 원하는 제자들이 반드시 여실지견해야 할 보편적인 진리들 가운데 하나로 제시된다. 본고는 사성제와 연기(=12연기)의 구성요소들이 이와 같은 방식으로 어떻게 결합되었는지에 대한 검토이다. 이것은 마치 재건된 옛 도시처럼 옛 길(=팔정도)을 따라가면서 발견한 옛 틀을 의지하여 만든 새로운 유형이며, 이러한 결합의 근거는 사성제에 함축된 보편성 때문이다. 이를 해명하기 위해 먼저 붓다의 정각과 관련된 루진지와 초전법륜의 기술을 비교분석하여 중도를 바탕으로 사성제와 정각사이에 전제된 정형적 관계를 확인했다.

 

다음으로 사성제의 도출과정을 탐색하여 그 틀 속에서 응용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적절한 이유와 그에 따른 다양한 응용 사례들을 찾아보고, 그것을 기초로 연기법의 구성요소들이 적용된 경우를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사성제는 고통을 일으킬 수 있는 요소들을 반야에 의해 여실지견하는 틀이고, 이 유형은 연기법으로 사성제의 내용을 보완하기 위해 결합되었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Ⅰ. 문제제기, 그리고 불교 해탈도에서 반야의 위상

 

불교의 해탈도에서 사성제(caturariyasacca)와 연기(paṭiccasamuppāda)는 고따마 붓다가 혹은 그 제자들이 올바른 반야(paññā)①에 의해 여실하게 알고(ñāṇa) 본(dassana) 지식들로서 객관적인 진리이면서 동시에 반드시 통찰해야만 하는 다르마들(dhammā) 가운데 하나이다. 붓다의 정각 기술에서 반야는 진리를 있는 그대로 알고 보는 여실지견(yathabūthaṃ ñāṇadassana)②과 ‘나는 해탈되었다’는 것을 명료하게 인식하는 해탈적 통찰로 나타난다. 이를테면 먼저 사성제나 십이연기 등의 진리에 대한 여실지견이 있고나서야, 그것을 통해 마음을 속박하고 있던 번뇌들이 모두 뿌리 뽑혀 ‘마음이 해탈되었다’는 해탈적 통찰이 뒤따른다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붓다가 제시한 다르마에 따라 해탈을 도모하는 자는 그 누구든지 반드시 시급하게 진리에 대한 여실지견으로서 반야를 갖추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반야라는 이 단어는 한마디로 명확하게 ‘이것이다’라고 정의하기 어렵다. 지나치게 의미영역이 넓고 설해진 맥락도 함축적이기 때문이다.

① 올바른 반야(paññā) : 이 논문에서 반야는 훼터(Vetter, 1988, 29-44)의 분석을 참고하여
   식별적 통찰(paññā)과 해탈적 통찰(ñāṇa)을 모두 포괄하는 의미로 사용할 것이다. 이를테
   면 일체 종류의 앎[一切種知]이라는 일반적인 의미 중에 직접적으로 해탈에 영향을 미치는 
   부분에 한정하여 그 의미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반야와 관련된 표현은 붓다의 정각이나 제
   자들의 해탈 체험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며, 직접적으로 ‘여실하게 올바른 반야에 의해
   (yathābhūtaṃ sammāppaññāya)’, ‘여실한 지견을(yathābhūtaṃ ñāṇadassanam)’, ‘반야
   에 의한 현관(paññāya abhisamayo)’이라 기술되기도 하고, ‘분명하게 안다(pajānāti)’, 
   ‘철저하게 안다(abhijānāti; 주로 1인칭 아오리스트형 abbhaññāsiṃ로 사용)’는 동사 형태
   로 사용되지만 해탈적 통찰의 맥락에서는 모두 있는 그대로 진실을 알고 본다는 의미이므
   로 동의어로 간주해도 될 것이다.(西義雄, 1978, 132)
② 여실지견(yathabūthaṃ ñāṇadassana) : 초전법륜(Vin Ⅰ, 11)에서 붓다는 자신의 
   해탈을 제자들에게 설명하면서 “나에게 이와 같은 방식으로 세 번 돈 12가지 측면을 
   지닌 사성제에 대해 매우 청정한 여실지견이 있고 나서야 … 바르고 완전한 깨달음을 
   완전히 깨달았다’라고 알 수 있었다고 술회하고, ‘나의 마음의 해탈은 흔들림이 없다. 
   이것이 마지막 생(jāti)이다. 지금, 더 이상의 존재(有)는 없다’라는 지견이 일어났다고 
   선언하고 있다. 이 구절을 근거로 여기에서는 여실지견을 ‘나에게 예전에 전해 내려오
   지 않았던 법들에 대하여 눈(cakkhu)이 일어났고 해탈지(ñāṇa)가 일어났고, 반야
   (paññā)가 일어났고, 명지(vijjā)가 일어났고, 빛(āloka)이 일어났다’는 표현과 동일한 
   의미로 간주할 것이다.

 

초전법륜의 문맥에 따라 반야에 포함된 의미를 대략 유추해 보면, 붓다는 그 제자들에게 먼저 자아(attā)라고 집착된 대상으로서 오온(五蘊, pañcakkhandha), 각각에 대해 질병으로 이끌고 마음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자아가 아니라고 선언한 다음, 그 각각에 대해 무상(無常, anicca)과 상(常, nicca), 고(苦, dukkha)와 락(樂, sukha), 무아(無我, anattā)와 아(我, attā)라는 상반된 개념을 제시하여 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게 한다. 마지막으로 그 어떤 것이든지 모두 올바른 반야에 의해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바로 내가 아니다. 이것이 나의 자아가 아니다(n' etaṃ mama, n' eso 'ham asmi, na me so attā)’라고 여실하게 보아야 한다고 설하고 있다. 이를테면 반야는 집착된 대상에 대한 분석을 기초로, 논리적 이유를 들어 그 진실은 자아가 아니라고 선언한 다음, 문답을 통해 올바른 것을 선택하게 하는 동시에 그른 것을 제거하여그 대상이 무아라는 결론을 도출하게 하며, 그것을 기준으로 모든 측면에서 관찰하는 대상마다 무아라고 있는 그대로 알고 보게 하는 과정 전체를 포괄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반야는 분석, 선택(옳음)과 제거(그름), 모든 방식으로 성취된 진리를 적용하여 있는 그대로 알고 보기라는 가장 넓은 의미가 내포된 여실지견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반야가 불교 해탈도에서 중시된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해탈에 가장 직접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붓다의 정각에서부터 그 제자들의 해탈체험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반야에 의해 진리를 여실하게 알고 보는 순간, 즉각적으로 집착하고 있는 대상으로부터 벗어나 마음이 해탈된다는 등의 서술을 통해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관련된 구체적인 해탈 과정은 다음과 같다. 먼저 올바른 반야에 의해 집착된 대상이 무상하고 고통스럽고 변화를 속성으로 하는 것이고 따라서 무아라고 있는 그대로 알고 본 수행자는 그 대상에 대해 염리(厭離, nibbinda)

하게 되고, 그 염리를 이욕(離欲, virāga)하게 되며, 이욕으로부터 해탈(vimutti)을 성취한다. 곧이어 그에게 그 해탈된 곳에서 ‘해탈되었다’는 해탈적 통찰이 일어나게 되며, ‘태어남은 부서졌고 범행은 완성되었고 해야 할 일은 마쳤고 더 이상 이러한 상태는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안다고 하는 아라한의 정형구가 뒤따른다. 즉 반야로써 무명이든 갈애이든 재생(再生)을 초래하는 가장 미세한 원인을 완전하게 제거하여 재생으로 인한 모든 고통으로부터 해탈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반야는 불교 해탈과정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러므로 전체 해탈도에서 그에 대한 중시는 어쩌면 매우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이러한 관점에서 어떤 경우에 반야가 일어나고, 그 반야에 의해 알려지고 보여진 진리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이 붓다시대 이래 줄곧 초미의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①. 특히 전자는 반야가 작용할 때 어느 정도의 집중 상태가 필요했는지가 그 논의의 중심이 되었고, 후자는 전개된 내용의 다양함과 불일치에 대한 해명이 그 주류를 이루고 있다②. 다른 것은 차치하고 사성제와 십이연기의 기술만 참조해도, 반야가 일어나는 바탕은 여리작의(yonisomanasikāra), 철저한 숙고(parivimaṃsana), 바른 삼매(sammāsamādhi) 등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하지만 지면 관계상 선정과 반야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여기에서 하지 않을 것이다. 이 논문에서 다룰 주제가 해탈적 통찰로서 여실지견에 의해 알려지고 보여진 진리 혹은 여실지견해야 할 진리로서 사성제와 연기법의 결합관계이기 때문이다③. 특히 제자들이 반드시 여실지견해야 할 해탈적 통찰의 토대로서 제시된 둘의 결합 형태가 얼마나 개연성이 있는지의 여부에 관심을 둘 것이다.

① 선정과 반야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할지의 문제는 오랫동안 불교도들의 핵심이슈가 
   되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이에 대해 인도 철학의 전반적인 이해를 토대로 그 둘의 
   관계를 해명하고자 한 시도는 푸생(1936-37)의 논문에서 볼 수 있고, 반야가 일어
   나기 위해 선정이 반드시 필요한지에 대한 긴밀한 논의는 슈미트하우젠(1981)의 
   논문에서, 그 선정을 수습하기 위한 예비적인 단계로서 다양하게 설해진 계의 중
   요성과 중도의 실질적인 내용에 대한 숙고는 훼터(1988)의 연구에서 자세한 논의
   를 엿볼 수 있다. 
② 붓다의 정각 기술에서 여실지견된 진리는 초기불전에서부터 매우 다양하게 기술되고 
   있고,[宇井伯壽(1965) 394-414 참조] 붓다가 제자들에게 설한 해탈도에서도 마찬가
   지이다. 하지만 이것들 모두가 동일한 연대에 형성된 것도 아니고 심지어 붓다의 설이 
   아닌 것도 섞여 있는 실정[Frauwallner 1953 ; Bareau, 1968 ; Schmithausen, 1981 ; 
   Vetter,1988 등에서 참조]이기 때문에 그 진위여부를 가리는 일도 결코 만만치 않다. 
   또한 현존하는 부파들의 문헌에 대해 그 소속조차도 모두 해명하지 못한 시점에서 붓
   다나 그 제자들의 해탈체험과 관련된 기술을 다루는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③ 반야에 의해 알려지고 보여져야할 진리로서 사성제와 십이연기의 결합은 매우 오랜 
   시기를 걸쳐 광범위하게 다양한 방식으로 결합되고 전개된다. 즉 루진지의 기술에서 
   단순히 둘을 병렬적으로 결합하는 형태(MV, LV,『불본행집경』,『방광대장엄경』등), 
   사성제라는 큰 테두리 속에 고통의 일어남이라는 진리를 십이연기의 순관으로, 고통의 
   소멸이라는 진리는 십이연기의 역관으로 응용하는 형태(AN 3:61), 여실한(yathābhutaṃ) 
   해탈지(ñāṇa)의 토대(vatthu)로 제시된 형태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김홍미(2010) 
   146-153, 188-195를 참조] 이 가운데 이 논문에서 검토할 부분은 마지막 형태에 대
   한 보충의 차원이다. 이 작업이 필요한 이유는 2010년 논문이 단순히 내용을 분류하
   고 정리하는 수준에서 그쳤다는 반성에서이다.

 

우선 모든 짐승의 발자국을 포섭하는 코끼리의 발자국처럼, 모든 선법(善法)을 포섭한다는 측면에서 사성제를 조망하여 그 틀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적절한 응용을 유추해보고, 그것을 기초로 연기법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支, aṅga]가 적용된 사례를 살펴볼 예정이다. 이를 위해 검토할 자료는 일차적으로 붓다의 정각과 관련된 기술에 한정되며, 그것을 기초로 다양하게 응용된 유형들을 비교분석할 것이다. 불교의 해탈도가 고따마 붓다의 정각으로부터 시작되고,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붓다란 실질적으로 자신도 재생으로 야기된 모든 형태의 고통으로부터 해탈하였으며, 아울러 그 제자들도 그와 같이 해탈하게 할 수 있었던 존재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논의에 앞서 붓다의 정각과 제자들의 해탈 체험을 모두 불교 해탈도라는 동일한 범주 속에 포함시킬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그들 사이에 객관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어떤 공유된 내용이 있었다면, 기본적으로 그것은 반드시 불교 해탈도에서 필요한 부분이어야 할 것이다. 물론 여기에 오를 최고의 후보는 진리를 여실지견하는 것과 자신이 완전히 해탈되었다는 것을 아는 해탈적 통찰이다. 하지만 후자는 개인적 특성과 연관된 체험 그 자체를 기술하고 있기 때문에 수행자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을 것이라는 예상이 가능하다. 그럼에도 해탈적 통찰임을 지시하는 내용은 대체로 일정한 형태를 지닌 구절로 나타난다①. 반면 한 치의 오류도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여실지견된 진리는 초기불전② 에서 고따마 붓다의 정각에서뿐만 아니라 그 제자들의 해탈도에서도 매우 다양하게 제시되고 전개된다. 게다가 그 형태도 단순한 나열에서부터 복잡한 응용까지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물론 대기설법이라는 고따마 붓다의 교화방식과 맞물려 그러한 응용을 용인하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 공유된 것이 유일한 진리가 아니라 얼마든지 표현할 수 있는 다양성이 내재된 진리였을 가능성도 여전히 배제할 수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해탈적 통찰로서 여실지견된 것이라는 정형구가 뒤따르는 사성제와 연기법의 결합을 이해하려는 시도가 이 논문의 출발점이다.

① 붓다의 경우 아라한의 정형구 또는 “나에게 매우 청정한 여실지견이 있고 나서야
   ‘나는 천신과 마라와 브라흐마를 포함한 세상 중에서, 사문과 바라문과 천신과 인
   간을 포함한 존재들 중에서 바르고 완전한 깨달음을 완전히 깨달았다’라고 알 수 
   있었다”는 등으로 나타나고(Vin Ⅰ, 11) 그 제자들은 주로 아라한의 정형구로 기
   술된다. 
② 여기에서는 결집이라는 승가의 표준화된 합의아래, 공동적인 전승이 이루어졌다고 
   간주되는 경전으로서 니까야(Nikāya)와 아가마(Āgama), 그리고 그에 대응되는 한
   역들을 포함하고, 율장은 팔리 비나야(Vinaya)와 그와 대응되는 한역율장을 지칭할 
   것이다.

 

그러면 붓다와 제자들 간에 세대를 뛰어넘어 오랫동안 공유된 진리는 어떤 특성을 지니고 있는가? 일단 그 진리는 반야에 의해 여실하게 알려지고 보여진 지식이라고 전제되어야 한다. 동시에 그것은 여래가 출현하든 출현하지 않든지 항상 머문 것으로서 고따마 붓다가 발견한 것이지만 그 제자들도 발견할 수 있는 보편성을 띤 것이어야 한다. 덧붙여 불교적 해탈에 필수적인 것으로서 그 제자들이라면 반드시 학습해야 할 교리이어야 할 것이다. 만약 그것이 보편성을 띤 것이 아니라면 붓다가 아닌 다른 자는 그것을 깨닫거나 발견할 수 없을 것이며, 또한 해탈에 필수적인 것이 아니라면 오랜 시간을 걸쳐 여러 지역에 보급되는 과정에서 명백히 각 지역에서 흥망성쇠를 겪는데다가 기존의 문화와 섞여서 전승되고 전파된 불교의 특수성을 감안할 때, 핵심적인 교리로 공유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들이 고따마 붓다에 의해 단지 선언하기만 하려는 목적으로 정립된 이론적인 진리가 아니라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①. 이런 입장에서 이것은 붓다가 발견한 객관적인 진리이며, 자신과 동일한 해탈 체험을 원하는 제자들이 반드시 실천해야 할 실질적인 수행규범이라 할 수 있다. 초기불전에서 이러한 조건을 충족하고 있는 대표적 진리가 바로 사성제와 십이연기이다.

① 설법을 망설이면서 일으킨 붓다의 사유에서 자신이 얻은 법이 심오하고 보여지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다는 등(Vin Ⅰ, 4)의 표현이 있는데, 이것을 통해 붓다는 처음
   부터 자신과 동일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가정아래 제자들에게 법을 설하였을 
   것이다.

 

사성제가 보편적인 것으로서 반야에 의해 알려진 진리라는 것은 초전법륜의 기술, 즉 붓다가 그것에 대한 여실지견이 일어난 것을 예전에 전해 내려오지 않았던 법에 대해 눈이 일어나고 해탈지, 반야, 명지, 빛이 일어난 것에 견주어 설명하는 것으로 확인된다. 뿐만 아니라 그 제자들의 경우 ‘해탈도의 정형적 기술’에 포함된 루진지(누진지. āsavānaṃ khayañāṇa) 기술에서 증명할 수 있다. 그리고 붓다의 정각 기술에서 태어난 중생이라면 그 누구든지 경험하는 늙어가고 죽는 불가피한 상황이 무명(avijjā)이라는 특정한 원인과 결합되는 재생으로부터 일어난다는 전제 아래, 그와 같이 반복적 재생으로 이끄는 원인과 선행조건의 연쇄에 대해 반야에 의해 여실하게 현관된 것이 십이연기[=연기]이다.① 이것 역시 무실라(Musīla)와 나라다(Nārada)와의 대화, 쑤씨마(Susīma)의 사례를 통해 그 진리의 보편성은 확인된다. 이를 근거로 사성제와 십이연기의 결합 형태도 해탈에 필수적인 동시에 보편적인 진리로서 설해졌을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가정하면서 이 논문에서는 특히 다음과 같은 형태에 주목할 것이다.

① 반야에 의해 여실하게 현관된 십이연기 : 고통의 무더기가 일어나고 소멸하는 과정을 
   무명(avijjā), 행(saṅkhāra), 식(viññāṇa), 명색(nāmarūpa), 육입처(saḷāyatana), 촉
   (phassa), 수(vedanā), 애(taṇhā), 취(upādāna), 유(bhava), 생(jāti), 노사(jarāmaraṇa)
   라는 요소들의 인과관계에 의존한 조건적 발생과 그 소멸이라고 여리작의를 통해 반야에 
   의해 현관한 것은 SN 12.10에서 살펴볼 수 있다.

 

노사를 분명하게 알고, 노사의 일어남을 분명하게 알고, 노사의 소멸을 분명하게 알고, 노사의 소멸로 이끄는 길을 분명하게 안다, … 행들을 분명하게 알고, 행들의 일어남을 분명하게 알고, 행들의 소멸을 분명하게 알고, 행들의 소멸로 이끄는 길을 분명하게 안다.

 

이 기술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특징은 사성제의 ‘고통(dukkha)’ 대신 ‘노사(jarāmaraṇa)’에서 ‘행들(saṅkhārā)’까지의 요소들이 적용된 것이다. 즉 사성제의 체계 속에 연기법의 구성요소를 대입하여 그와 같은 방식으로 분명하게 안다는 것이다. 또한 ‘분명하게 안다’는 뜻을 지닌 ‘pajānāti’가 반야의 유사 동의어 가운데 하나이므로 이것을 여실지견이라 할 수 있으며, 당연히 여실지견 된 대상은 반야에 의해 분명하게 통찰해야 할 진리가 될 것이다. 따라서 독립적으로 설해진 사성제, 십이연기와 그 위상이 동등한 것으로서, 이 형태를 사성제의 틀 속에 연기법의 구성요소가 적용되어 새롭게 재구성된 또 하나의 해탈적 진리라고 간주할 수 있다. 그러면 이와 같은 방식으로 진리를 새롭게 재구성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이에 대한 실마리를 붓다의 정각과 관련된 사성제의 기술, 특히 그 도출과정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Ⅱ. 사성제는 어떻게 도출되고 응용되는가

 

붓다의 정각과 관련하여 알려지고 보여져야 할 진리로서 사성제는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초전법륜에서 타인에게 설해진 것으로서①, 자신의 실제 해탈 경험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한 이론을 포함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루진지 기술에서처럼 붓다의 실제 해탈 체험을 곧바로 언어화한 것이다. 물론 이 둘 모두 적정, 최상의 앎, 정각, 열반으로 이끄는 중도라는 범주아래 사성제에 대한 여실지견을 포함한 해탈도라고 할 수 있다.

① 붓다가 처음 법을 설한 것에 대한 에피소드는 Vin(I, p.10 ff.)와 SN 56.11에서 기술된다. 
   그러나 후자는 율장에 삽입된 서사 구조를 포함하고 있는데다가 내용도 꼰다냐
   (Koṇḍañña)가 법안이 열리는 부분까지만 기술되기 때문에 율장의 자료를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할 것이다. 붓다의 정각과 관련한 루진지 기술은 MN 27, 38, 39, 112에서 
   볼 수 있다. 반면 SN에서 그것은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는다. 더 정확하게 후라우발너가 
   주장한 ‘해탈도의 전형적인 기술’(1973, 127ff)을 SN에서는 볼 수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AN의 4:198에서는 동일한 구조 속에 루진지만 나타난다. 한편 AN의 5:75와 76, 그리고 
   8:11에서도 ‘해탈도의 전형적 기술’과 완전히 동일하지 않지만 그와 유사하게 사선정에서 
   해탈적 통찰의 토대가 되는 진리로서 루진지가 기술되고 있다.

 

루진지 기술                                                                  초전법륜 기술

중도(밭고랑 가는 행사에서의 기억을 떠올림                중도=팔정도

→그 길을 따라 가면서 사선정을 성취)                                               

이전 생에 대해 관찰하는 지혜                                       -

중생들의 태어남과 죽음에 대한 지혜                                                    

루들이 소멸하는 지혜(사성제와 그 응용에 대한           <사성제의 의미 해설> 

지혜) ; 이처럼 알고 보는 동안, 3루(漏)들로부터          붓다의 완전한 정각(3가지로 사성제를   

마음이 해탈→해탈한 곳에서 해탈되었다는                 굴림; 사성제에 대한 여실지견을 통해

해탈지가 일어남→아라한의 정형구)                            무상정등각을 성취했다고 확신함 →

                                                                        해탈에 대한 지견이 일어남)                    

 

이 두 기술에 따르면 사성제에 대한 여실지견의 공통된 기반은 중도(majjhimā-paṭipadā)이다. 훼터(Vetter)가 경장에서 발췌하여 요약한 팔정도의 내용을 참조하면, 이것은 바른 삼매를 정점으로하는 8가지 개념이고, 그 실질적인 내용이 사선정이기 때문에 사성제에 대한 여실지견은 중도, 즉 사선정에서 일어난 것이라 할 수 있다①. 붓다의 정각 기술에서 중도는 고행의 과정에서 일어난 어떤 극적인 사유의 전환과 맞물려 나타난다. 즉 우루벨라 세나 마을에서 고행에 전념하는 것을 통해 인간의 법을 넘어선 성자들이 지녀야할 뛰어난 지견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한 붓다가 깨달음을 위한 다른 길을 모색하던 중에, 어린 시절 밭고랑 가는 행사에서 경험했던 어떤 것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면서이다. 

① 이것을 MN 36(Ⅰ, 246) 등에서는 ‘감각적 욕망의 대상들과 분리되고 불선법과 분리되고 
   심(尋)과 사(伺)를 지닌 떠남으로부터 생긴 기쁨과 즐거움을 지닌 첫 번째 선정’이라는 
   정형적 기술로 표현하고 있지만 유년 시절에 이대로 경험했다기보다 극단적인 고행의 
   맥락과는 다른 그 어떤 기쁨과 즐거움을 수반하고 사물을 평정하게 관찰할 수 있는 상
   태를 경험했었다는 내용일 것이다.(Vetter, 1988, 3)

 

것은 몇 년 동안 지속했던 고행과 다른 방식의 해탈도를 모색하는 계기가 된다. 이를테면 감각적 욕망의 대상(kāma)이나 불선법(akusala-dhamma)와 상관없는 즐거움(sukha)에 대해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사유가 기존의 길과는 다른 차원의 해탈도로 전환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는 것이다.① 환언하면 고행을 실천하면서 언젠가 내세에 해탈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바로 지금 현재에서 그것을 얻고 싶고, 그것을 위해 모든 즐거움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감각적 욕망의 대상이나 불선법과 상관없는 즐거움이라면 그것을 따라 새로운 길을 가겠다는 것이다.

① MN(Ⅰ, 247) ; ‘감각적 욕망의 대상들과 다른, 불선법들과 다른 그 즐거움, 그 즐거움에 
   대해 나는 두려워하지 않는다(na kho ahaṃ tassa sukhassa bhāyāmi yan-taṃ sukhaṃ 
   aññatr'eva kāmehi aññatra akusalehi dhammehīti)’

 

그 즐거움을 따라 도달한 깨달음을 위한 길(bodhāya maggo)은 여러 단계를 거쳐 사띠와 평정이 청정한 상태(upekhāsatipārisuddhi)①만 남겨두고 일단락된다. 또한 이 길은 성스럽지 않고 쓸모없는 두 가지 극단을 버렸기 때문에 도달한 것이다. 그 두 극단은 감각적 욕망의 대상들에 대하여 감각적 욕망에 의한 즐거움에 탐닉하는 것과 자신을 괴롭히는 것에 몰두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이 길은 이전과 다른 제3의 가능성을 제공한 것으로서 중도②이다. 붓다의 정각에서 이것의 실질적인 내용은 사선정으로 기술되는데, 엄밀하게 말하면 네 번째 선정 가운데 사띠와 평정이 청정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즉 집중되고 청정하고 순백색이고 청명하고 더러움이 없고 유연하고 적응성을 지닌 것이고 확립되고 흔들림이 없는 상태에서 붓다는 자신의 이전 모든 생, 중생들의 생사(生死) 차별, 그리고 사성제에 대해 있는 그대로 직관적으로 보았고 명확하게 이해했다. 이것이 붓다가 중도를 열반으로 이끄는 것이라고 설했던 근거일 것이다.

① ‘upekhāsatipārisuddhi’라는 복합어는 ‘upekkha-pārisuddhi’와 ‘sati-pārisuddhi’로 
   분석되며, 구체적으로 “집중되고 청정하고 순백색이고 청명하고 더러움이 없고 유연
   하고 적응성을 지닌 것이고 확립되고 흔들림이 없는 상태에서(samāhite citte parisuddhe 
   pariyodāte anaṅgaṇe vigatūpakkilese mudubhūte kammaniye ṭhite ānejjappatte)”
   라는 구절로 묘사된다. 이 중에 특히 완전히 특별한 유연성과 능력(kammaṇṇatā)을 
   지닌다는 표현에 대해 후라우발너는 “그것이 하나의 대상으로 주의 기울일 때에 직
   접적으로 그리고 직관적으로 그 주제를 볼 수 있도록 하고, 완전한 명료함과 증거로 
   그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또한 4가지 단계의 선정에 수습하는 동안 무엇보다 
   더 그것과 결합된 심(尋)과 사(伺)와 감수와 경험들이 모두 소멸되지 않았지만 의식
   의 모든 내용들은 소멸된 것과 일치하는 상태(1973, 136)”라고 해설하고 있다.
②초전법륜에서처럼 붓다가 불사(amata)를 발견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중도로서 
   팔정도가 내포된 사성제를 설한 것이라면 중도는 관념적으로 극단을 피한다는 의미
   라기보다 바른 삼매를 성취하기 위한 잠재성이 내재된 길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붓다에게 이전의 고행과 다른 깨달음을 위한 길이 있을 것이라는 직관이 일어났고, 
   그 길을 따라가면서 사선정을 발견했기 때문이다.(MN 36 참조)

 

하지만 이 중도의 내용에서는 고통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라는 진리만 그 연관성이 확인될 뿐, 나머지 고통, 고통의 일어남, 고통의 소멸이라는 진리가 이로부터 직접 도출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그것보다 중도의 유일한 잔존물인 사띠와 평정이 청정한 상태를 통해 사성제라는 진리를 발견했고, 그 상태가 진리를 여실지견해야 할 바탕임을 밝히기 위해 초전법륜에서 사성제보다 먼저 중도를 설했을 것이라고 유추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더군다나 이 맥락에서 붓다는 사성제의 의미는 자세히 해설하면서도① 그것이 어떤 과정을 통해 도출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따라서 사성제의 도출에 대한 필요한 가정은 중도를 설한 붓다의 정각 기술이라는 점에서 동일하지만 이와 다른 맥락, 즉 루진지 기술에서 세워야 할 것이다.

① 여기에서 붓다가 해설한 사성제의 의미를 요약하면, 고통이라는 성스러운 진리
   (ariyasacca)는 태어남, 늙어감, 아픈 것, 죽는 것,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나 사물
   들과 결합하는 것, 좋아하는 사람이나 사물들과 분리되는 것, 비록 원할지라도 
   그것을 얻지 못하는 것, 요약하여 말하자면 집착된 오온이 고통이라고 설명된다. 
   그리고 고통의 일어남(dukkhasamudaya)이라는 성스러운 진리는 재생으로 이
   끌고 즐거움과 탐욕을 수반하고 여기저기에서 즐거워하는 갈애(taṇhā)로 정의
   되며, 고통의 소멸(dukkhanirodha)이라는 성스러운 진리는 바로 그 갈애의 남
   김없는 이욕에 의한 소멸, 버림, 포기, 풀려남, 붙잡지 않음으로 제시되고, 고
   통의 소멸로 이끄는 길(dukkhanirodhagāminipaṭipadā)이라는 성스러운 진리
   는 바른 견해, 바른 결심,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노력, 바른 사띠, 
   바른 삼매라는 팔정도로 설명된다.(Vin Ⅰ, 10-11)

 

위의 표에서 보듯이 루진지 기술에서 사성제에 대한 여실지견은 대체로 이전 생에 대해 관찰하는 해탈지[숙명지, pubbenivāsān-ussatiñāṇa]와 중생들의 태어남과 죽음에 대한 해탈지[천안지,sattānaṃ cutūpapātañāṇa] 다음에 이어서 설해진다①. 하지만 사성제에 대해 3가지 방식으로 여실지견한 이후에 무상정등정각(anuttara-sammāsambodhi)의 성취를 확신할 수 있었다는 붓다의 술회를 감안할 때, 앞의 두 가지는 루진지만큼 해탈에 필수 요소는 아닌듯하다②. 그렇다면 순차적으로 이 둘을 루진지 앞에 배치한 이유는 무엇일까?

①) DN에 기술된 제자들의 해탈도에서 이것은 주로 신통(Abhiññā)으로 범주화되며, 
   신족통, 천이통, 타심통을 첨가하여 6가지로 분류화된다. 그러나 DN과 다른 니까
   야의 동일한 문맥에서는 숙명지, 천안지와 달리 누진통은 루진지 기술과 다르게 
   “루들의 소멸로부터 무루의 심해탈과 혜해탈을 바로 지금 여기에서 스스로 최상
   의 지혜로 현증하고서 성취해 머룰 것이다(āsavānaṃ khayā anāsavaṃ cetovimuttiṃ 
   paññāvimuttiṃ diṭṭhe va dhamme sayaṃ abhiññāya sacchikatvā upasampajja 
   vihareyyanti)”라고 기술되어 있다.(MN 6,12,53,54,73,77,119 ; SN 16:9-11, 51:11 ; 
   AN 5:23, 5:68, 6:2, 7:71-75, 7:77-78을 참조)
②) MN 112에서는 삼명(tisso vijjā)이 아닌 루진지만 기술된다.

 

이전 생에 대해 관찰하는 숙명지는 붓다가 자신의 모든 전생에 대해 태어날 때마다 이름, 종성, 외모, 음식, 고통이나 즐거움의 향수, 수명의 한계 등의 구체적인 특징들까지 전부 기억하여 철저하게 인식하는 것이다①. 그리고 중생들의 생멸에 대한 천안지는 마치 청정한 하늘의 눈으로 세상을 내려다본 것처럼, 업의 소속에 따라 죽어가고 다시 태어나는 동안 우열(優劣)과 미추(美醜) 등의 다양성을 나타내는 중생들을 모두 분명하게 알고 보는 것이다. 이를테면 전자를 통해 윤회하는 동안 모든 생에서 자신이 경험한 고통에 대해 철저하게 인식했고, 후자를 통해 그 고통이 모든 중생의 보편적인 속성임을 철저하게 인식했다는 것이다. 즉 붓다는 윤회의 모든 영역에 대한 직관을 통해 재생에 수반되는 고통의 보편성을 완전하게 이해한 것이다.

① 이것은 사띠와 평정이 완전한 제4선정 속에서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고통이다’
   라는 등을 언어로 기술된 형태의 인식이라 할 수 없다. 아마도 초전법륜의 눈 등이 일어
   났다는 표현을 참조하면 그것은 시각적이고 지적인 것이 결부된 직접적이면서 직관적인 
   통찰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자연스럽게 재생으로 이끄는 갈애(taṇhā)를 그 고통의 원인으로 인식하는 계기를 마련했을 것이며, 동시에 갈애의 남김 없는 이욕에 의한 소멸을 붓다 자신이 이미 해탈체험을 통해 현증했기 때문에 고통의 원인이 갈애라는 진리와 고통의 소멸이 곧 갈애의 소멸이라는 진리를 정립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사성제 가운데 고통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라는 진리는 중도, 즉 사선정으로부터 도출된 것이고, 고통이라는 진리는 숙명지와 천안지를 통해 완전하게 이해된 것이며, 고통의 일어남이라는 진리는 고통에 대한 직관적인 확인이 보완된 것이고, 고통의 소멸이라는 진리는 자신의 해탈 체험에 기반을 두어 정립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도출된 것이었기 때문에 붓다는 사성제에 대한 여실지견을 예전에 전해 내려오지 않았던 법들에 대해 눈이 일어났다고 설했을 것이다.


그러나 루진지의 기술에서 사성제에 대한 여실지견은 중심테마로 제시된 것이 아니다. 도리어 이것은 핵심에 접근하기 위한 관문의 성격을 띠고 있다. 이에 대해 슈미트하우젠(1981, 206)은 오직 보충될 수는 있어도 대체할 수 없는 해탈적 통찰이나 정각에 대한 기술로서 정각과 사성제의 여실지견 사이에 정형화된 관계가 이미 ‘해탈도의 정형적 기술’이 편집되기 전부터 전제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아마도 이와 같이 사성제를 하나의 틀로 세워두고 거기에 여러 요소를 적용할 수 있었던 것은 사성제에 함축되어있는 보편성 때문일 것이다. 왜냐하면 루들(āsavā)에 대해서만 그런 응용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실례가 충분히 제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은 고통이다’라고 여실하게 알았다. 나는 ‘이것은 고통의 일어남이다’라고 여실하게 알았다. 나는 ‘이것은 고통의 소멸이다’라고 여실하게 알았다. 나는 ‘이것은 고통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다’라고 여실하게 알았다. 나는 ‘이것들은 루들이다’라고 여실하게 알았다. 나는 ‘이것은 루들의 일어남이다’라고 여실하게 알았다. 나는 ‘이것은 루(漏)들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다’라고 여실하게 알았다. 그것에 대해 내가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는 동안 감각적 욕망의 대상들에 대한 루들로부터 마음이 해탈되었고 존재에 대한 루들로부터 마음이 해탈되었고, 무명의 루들로부터 마음이 해탈되었다. 해탈된 곳에서 ‘해탈되었다’라는 해탈지가 있었다.

 

여기에서 사성제의 서술구조는 ‘고통’과 ‘루들’을 주제로 한, 두 세트로 구성되어 대칭을 이룬 것처럼 보인다. 이 둘의 관계를 전자가 기준이 되고, 그 기준을 후자에 적용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여실지견의 최종목적이 고통에서 루로 옮겨갔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이것을 병렬 구조로 간주했다면 초전법륜에서부터 위에서처럼 나란히 사성제와 배대되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성제에 대한 여실지견은 루들의 제거에 반드시 필요한 선행조건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루들을 단절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 가운데 봄으로부터(dassanā) 성취된 것으로서, 사성제에 대한 여리작의가 설해지고 있는 MN2에서처럼①, 단지 사성제에 대한 여실지견만으로는 루들의 완전한 소멸을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에 대해 후라우발너(1973,170-171)는 갈애와 무명을 포함한 오래된 개념인 루를 통해 고통의 원인을 더 상술하려는 이론적 이유 때문에 이러한 대칭구조로 배대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슈미트하우젠(1981, 213)은 정각의 재생산으로서 해탈적 통찰뿐 아니라 정각의 내용에 근본적인 것이거나 구제론적인 진리를 포함해야 하는 필요성으로 그러한 보완이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 결과 즉각적으로 3가지 루들로부터 마음이 해탈되고, 아라한의 정형구가 서술되는 것으로 이 과정은 마무리된다.  

① MN2
   모든 루들에 대해 자신을 보호한다는 측면에서, 봄으로부터(dassanā) 단절되는 
   루들(āsavā) 이외에 단속(saṃvarā), 수용(paṭisevanā), 인내(adhivāsanā), 피함(parivajjanā), 
   제거(vinodanā), 수습(bhāvanā)으로부터 단절되는 루들을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봄으로부터 단절되는 루들은 사성제를 여리작의함으로써 단절되는 유신견(sakkāyadiṭṭhi), 
   의심(vicikicchā), 계금취(sīlabbataparāmāsa)라는 결박(saṃyojana)이다.(MN Ⅰ, 6-12)

 

아무튼 정각과 사성제의 정형적 관계가 이미 정립되어 그 서술 구조가 어떤 주제에 대해 여실지견할 수 있는 틀을 마련하고 있었다는 것은 개연성이 있어 보인다. 그렇다면 이러한 정형적 관계가 다른 해탈도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었는지에 대한 검토가 먼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더욱이 이것은 다른 해탈도와 사성제가 결합된 근거이면서, 그 결합된 형태가 사성제에 대한 여실지견과 동일한 결과를 산출할 수 있는 기반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일종의 여실지견의 틀로서 사성제의 다양한 응용 형태가 보편적인 진리로서 모두에게 적용되었다는 것은 붓다도 이에 대한 여실

지견을 통해 정각을 성취했고 그 제자들도 이를 통해 해탈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런 측면에서 사성제는 붓다가 깨달은 혹은 발견한 보편적인 진리이면서도 동시에 그 제자들이 재생산해야 할 객관적인 진리로 간주되었을 것이다①. 그러므로 고통을 일으키는 요소들을 제거할 수 있는 여실지견의 틀로서 ‘고통’ 대신 ‘루들’ 등을 적용했을 때, 그 둘은 동일한 결과로서 고통을 소멸시킬 수 있다. ‘루들’이 적용된 루진지 기술 대부분이 고따마 붓다의 정각에서 여실지견된 것과 제자들에게 설해진 ‘해탈도의 전형적 기술’에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비구로 만들고 사문으로 만드는것 가운데 하나(MN 39)로서 설명되기도 하고, 수행규범에 대한 스승의 가르침을 충실히 지킴으로부터 성취할 수 있는 것(MN 65)으로 제시되기도 한다②.

① DN 16(Ⅱ, 9) ; “비구들이여, 사성제를 깨닫지 못하고 통찰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나와 
   그대들은 이처럼 긴 시간동안 치달리고 윤회하였다. … 나는 이제 고통이라는 성스러운 
   진리를 깨닫고 통찰했고, … 고통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라는 성스러운 진리를 깨닫고 
   통찰했다. 그리하여 존재에 대한 갈애가 절단되었고, 존재로 이끌려짐이 파괴되었고 
   지금 후유가 없다.”
②) 붓다의 해탈체험으로 기술된 것은 MN 4, MN 19, MN 36, MN 85이고, 제자들의 
   ‘해탈도의 정형적 기술’[이것은 후라우발너가 MN과 DN에서 발췌하여 ‘불교 해탈도’
   로서 정립한 것임(1973, 127-135)]에서 제시된 것은 MN의 경 번호 27, 51, 60, 76, 
   79, 94, 101과 DN의 경 번호 2, 3, 4, 5, 6, 7, 8, 10, 11, 12이다. 그러나 DN은 MN의 
   정형적 해탈도의 기술이 확대된 형태라 할 수 있다. 전체 기술을 계온(戒蘊)․정온(定蘊)․
   혜온 (慧蘊)으로 분류하고, 재차 계온에서는 매우 상세하게 그 계의 목록을 소개하고, 
   정온에서는 사선정의 상태에 대한 비유가 첨가되며, 혜온은 삼명이외에 반야에 대한 
   지견, 정신으로 이루어진 몸에 대한 해탈지, 다양한 신통에 대한 해탈지로 그 내용이 
   확장되고, 그 각각의 단계에 대해 모두 비유적인 묘사가 덧붙여 있기 때문이다. 한편 
   넓은 의미에서는 정형적 해탈도의 기술에 속하지만 약간 변형이 있는 MN 125에서는 
   사념처를 통해 심(尋)과 사(伺)를 멈춘 뒤 제2선정, 제3선정, 제4선정을 거쳐 삼명을 
   얻어 마음이 루들로부터 해탈되는 과정이 설명된다. 나머지 MN 39, MN 65에서는 
   해탈도 기술 전체가 아닌 사선정에서 삼명만 제시된다.

 

Ⅲ. 사성제에 대한 다른 응용은 어떤 형태인가

 

사성제의 틀에 ‘고통’ 대신 다른 요소를 적용한 사례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오온과 연기법의 구성요소가 결합된 두 형태이다. 전자가 ‘고통’ 대신에 색(色, rūpa), 수(受, vedanā), 상(想, saññā), 행(行, saṅkhāra), 식(識, viññāṇa)을 적용한 것이라면, 후자는 십이연기의 구성요소 가운데 무명을 제외한 11가지를 사용한 것이다.[다음 장에서 설명함] 이 가운데 무명지가 빠진 것은 ‘행들의 일어남’에 이미 그것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편 이러한 결합 형태는 MN 9를 제외하고는 모두 SN에서 기술되고 있다.①

① DN와 MN에서는 루진지 유형만 나타남. 각주 29 참조. 한편 SN 12.23에서 루들의 
   소멸을 위한 여실지견은 “색은 이와 같고 색의 일어남은 이와 같고 색의 사라짐은 
   이와 같다. … 식의 사라짐은 이와 같다.”라고 설해진다.

 

이밖에 ‘고통’ 대신 세계(loka), 견해(diṭṭhi), 자양분(āhara), 유신(有身, sakkāya)을 적용한 형태도 나타나는데, AN, SN, MN에서만 볼 수 있다. 그 서술구조도 붓다의 정각에서처럼 ‘이것은 고통이다’는 형태가 아니라 ‘고통, 고통의 일어남, 고통의 소멸, 고통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라는 축약형으로 나타난다. 해탈체험을 그대로 기술하는 문맥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설법하기 위한 차원에서 응용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 축약형은 대체로 대입 요소마다 그 각각에 대한 자세한 정의를 덧붙이고 있다. 그 가운데 오온의 구성요소가 대입된 유형는 다음과 같다.

 

색을 분명하게 알고, 색의 일어남(rūpasamudaya)을 분명하게 알고, 색의 소멸(rūpanirodha)을 분명하게 알고, 색의 소멸로 이끄는 길(rūpanirodhagāmini-paṭipada)을 분명하게 안다. 수를 … 상을 … 행들을 … 식을 분명하게 알고, 식의 일어남(viññāṇasamudaya)을 분명하게 알고, 

식의 소멸(viññāṇanirodha)을 분명하게 알고, 식의 소멸로 이끄는 길(viññāṇanirodhagāmini-paṭipada)을 분명하게 안다.

 

붓다의 정각과 관련하여 사성제의 틀에 오온의 구성요소를 적용한 형태는 오취온(五取蘊; pañcupādānakkhandha)의 4가지 굴림(parivaṭṭa)으로, 그 각각의 정의와 함께 설명된 것이다.① 또한 ‘나는 철저히 알았다(abbhaññāsiṃ)’는 동사를 사용하여 이것도 여실지견의 대상임을 밝히고 있으며, 초전법륜에서처럼 이와 같은 방식으로 여실하게 알았기 때문에 무상정등정각을 완전하게 깨달았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는 붓다의 설명도 포함되어 있다. 한마디로 이 유형 역시 붓다가 깨달은 진리라는 것이다.

① SN 22:56(Ⅲ, 59-61) ; 색은 4대와 4대소조색이다. 자양분이 일어남으로부터 색의 
   일어남이 있다. 자양분의 소멸로부터 색의 소멸이 있다. 팔정도가 색의 소멸로 이끄
   는 길이고, 또한 팔정도는 수의 소멸로 이끄는 길, 상의 소멸로 이끄는 길, 행들의 
   소멸로 이끄는 길, 식의 소멸로 이끄는 길로도 정의된다. 수는 안촉에서부터 의촉으
   로 일어난 6가지 수의 모음이고, 접촉의 일어남으로부터 수의 일어남이 있고, 상의 
   일어남, 행들의 일어남, 식의 일어남도 동일한 방식으로 기술된다. 접촉의 소멸로
   부터 수의 소멸이 있고, 상의 소멸, 행들의 소멸, 식의 소멸이 있으며, 상은 색성향
   미촉법(色聲香味觸法)이라는 6가지 상(想)의 모음이고, 행들은 색성향미촉법(色
   聲香味觸法)이라는 6가지 의도의 모음이고, 식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라
   는 6가지 식의 모음이다.

 

그러면 제자들의 경우는 어떠한가? 붓다는 제자들에게 오온의 구성요소가 대신 적용된 진리, 그 각각에 대해 철저하게 알기 위한 길을 따라가야 하고, 그 길을 따라가면서 재차 그것에 대한 염리, 이욕, 소멸을 위한 길을 따라가야 하며, 이와 같이 따라간 자들을 ‘길을 잘 따라가는 자’라고 명명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진리에 대해 여실지견한 자는 ‘이 법과 율에서 견고하게 머무는 자’라고 할 만하며, 그와 같은 방식으로 색 등에 대해 염리, 이욕, 소멸로부터 남김없이 해탈된 자를 ‘잘 해탈된 자’라고 할 수 있고, 그가 바로 시설할 윤전이 없는 완전한 자[=아라한]라고 설한다. 즉 붓다는 사성제의 틀에 오온의 구성요소를 대입하여 재구성된 진리를 반드시 여실지견해야 할 목록으로서 제자들에게 제시하여 그 실천을 독려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사성제의 틀에 수(vedanā)만 적용된 사례(SN 36:24-25)①에서는 내용적 확장도 엿보이는데, 이를테면 수, 수의 일어남, 수의 소멸, 수의 소멸로 이끄는 길뿐만 아니라 그것의 유혹(assāda), 위험(ādinava), 벗어남(nissaraṇa)을 한 범주로서 설명한 것이다. 그럼에도 이 확장 역시 “나에게 ‘이것은 수(受)이다’라는 예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에 대한 눈 등이 일어났다(SN 36:25)”는 정형구가 뒤따르고 있기 때문에 여실지견된 진리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유형의 진리에 대한 여실지견을 사문이나 바라문의 목표를 바로 지금 현세에서 스스로 알고 깨달아 성취할 수 있는 방법으로 제시하기도 한다.[SN 22:50, SN 36:26은 vedanā만 적용됨]

① SN 36:24(Ⅳ, 219)에서는 수(受)의 일어남으로 이끄는 것으로서 갈애가 제시되고, 
   수를 조건으로 즐거움과 만족이 일어나는 것을 수의 유혹으로, 수는 무상한 것이고 
   괴로운 것이고 변화하는 것이라는 것을 수의 위험으로, 수에 대한 욕망과 탐욕을 
   제거하고 욕망과 탐욕을 끊는 것을 수의 벗어남으로 정의하고 있다. 붓다의 정각 
   기술이외에 이와 같이 여실지견해야 할 7가지가 제시된 경전으로 SN 36:15-18과 
   SN 36:23이 있는데, 전자는 아난다가 설한 것이고, 후자는 어떤 비구의 질문에 
   붓다가 설명한 것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이 유형으로 재구성된 진리에 대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현관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꿰뚫지 못하고, 관찰하지 못하고, 분별하지 못하고, 구별하지 못하고, 탐구하지 못하고, 자세하게 검토하지 못하고, 직접적으로 확인하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은 영원하다’는 등의 잘못된 견해를 일으킬 수 있다고 설해지기도 한다①. 이것은 오온에 대해 일으킬 수 있는 잘못된 견해를 제거하기 위해 사성제의 틀에 오온의 구성요소를 적용하여 그에 대한 여실지견을 강조한 경우이다. 이런 차원에서 그 위상은 해탈적 통찰로서 사성제와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붓다가 설한 ‘색, 색의 일어남, 색의 소멸, 색의 소멸로 이끄는 길’에 대한 가르침을 들은 후, 빈집으로 가서 그 방식에 따라 오온의 생멸에 대해 여실지견한 우다이 존자에게 “이것은 고통이라고 분명하게 알았고, … 이것은 고통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라고 분명하게 알았다”라는 진리(dhamma)가 현관되는 동안 아라한의 해탈지가 성취되었다(SN 46:30)라고 하는 구절을 통해 확인된다.

① (SN 33:1-55(Ⅲ, 258-261) ; ‘세상은 영원하다’는 것이외에 ‘세상은 영원하지 않다’, 
   ‘세상은 유한하다’, ‘세상은 유한하지 않다’, ‘지바(jīva)와 육체(sarīra)는 같다’, ‘지
   바와 육체는 다르다’, ‘여래는 사후에 존재한다’,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지 않는다’,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가 제시되며, 이 경전들은 하나의 경에 한 
   요소가 적용된 유형이다. 한편 SN 44:4는 동일한 내용이지만 사리뿟따와 마하꼿띠따의 
   대화로 설해진다.

 

다음으로 이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사성제의 틀에 적용된 다른 요소들의 사례를 살펴보자.

 

ⓐ 여래는 세계를 바르게 깨달았고 세계로부터 벗어났다. 여래는 세계의 일어남을 바르게 깨달았고 세계의 일어남을 제거했다. 여래는 세계의 소멸을 바르게 깨달았고 세계의 소멸을 현증했다. 여래는 세계의 소멸로 이끄는 길을 바르게 깨달았고 세계의 소멸로 이끄는 길을 수습했다.

 

ⓑ 그는 유신(sakkāya)은 이와 같고, 유신의 일어남은 이와 같고, 유신의 소멸은 이와 같고, 유신의 소멸로 이끄는 길은 이와 같다는 다르마를 가르친다.

 

ⓒ 나는 지각하고 사유하는 육신의 몸 안에서 세계, 세계의 일어남,세계의 소멸, 세계의 소멸로 이끄는 길을 가르친다.

 

ⓓ 견해(diṭṭhi)를 분명하게 알고 견해의 일어남을 분명하게 알고 견해의 소멸을 분명하게 알고 견해의 소멸로 이끄는 길을 분명하게 아는 잘 배운 성제자에게 ‘여래는 사후에 존재한다’ 등의 여러 견해가 증장되지 않고, 그들은 태어남, 늙음, 죽음, 슬픔, 비탄, 육체적인 고통, 정신적인 고통, 괴로움들로부터 해탈된다.

 

ⓐ와 ⓒ는 '고통' 대신 '세계'를 적용한 경우로서, ⓐ는 이 유형이 붓다가 정각한 내용임을 밝힌 것이고, ⓒ는 신체가 항상하는 것이고 단일체로 존재한다는 자아관념을 제거하기 위한 것으로서, ⓑ와 동일한 관점에서 설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의 유신이라는 자아관념은 담마딘나 비구니가 설하듯이 대체로 오취온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엄밀하게 오취온에 대해 자아 혹은 자신의 것이라는 집착까지 포괄하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유신견과 같다는 뜻이다. 이런 차원에서 이 유형은 '견해'가 적용된 ⓓ와 어느 정도 상통한다. 다만 ⓓ는 배우지 못한 범부와 달리 이것을 분명하게 인식한 성제자가 여실지견해야 할 진리로서 제시된 것이기 때문에 그 맥락이 일반론에 가깝다.

 

이와 같이 사성제의 틀에 ‘고통’ 대신 오온의 구성요소가 적용되든 ‘세계’ 등의 요소들이 적용되든 그 모든 유형은 사성제와 마찬가지로 붓다의 정각 기술로서 설해지거나 제자들의 해탈도에서 여실지견해야 할 대상으로 설명되고 있다. 하지만 정형화된 기술에 의존하고 있는전자와 달리 후자에서는 오온과의 상관성으로 인해 자아관념과 결부되며, 그와 관련된 잘못된 견해를 일으키지 않기 위해 혹은 그 유신견 등을 타파하기 위한 방법으로 제시되고 있다.

 

Ⅳ. 사성제와 연기법은 어떻게 결합되는가

 

크게 사성제의 응용이라는 측면에서 사성제의 틀에 연기법의 구성요소가 적용된 유형은 AN 3.61 제외하면 대체로 ‘고통’ 대신 노사, 생, 유, 취, 애, 수, 촉, 육입처, 명색, 식, 행들이라는 11가지 요소를 대입하고 있다. 즉 외형적 서술구조는 오온의 구성요소 등을 적용한 경우와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용적으로는 붓다의 정각과정으로 사성제와 연기법의 결합에 대한 논리적인 근거를 유추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앞에서 살펴본 유형들과 달리 크게 주목할 만하다.

 

SN 12.65에 따르면 이 유형은 예전 사람들이 거닐었던 길을 따라가면서 발견한 옛 도시를 재건한 것처럼, 예전 정등각자들이 거닐었던 팔정도라는 길을 따라가면서 발견한 결과, 즉 사성제의 틀에 재구성된 연기법의 구성요소라는 또 하나의 여실지견된 진리이다. 이와 같이 재구성된 연기법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에 대해 철저하게 알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범행을 널리 퍼지게 할 수 있었다는 붓다의 설명에서 그것은 자신의 해탈체험을 타인에게 이해시키고 일반화하기 위한 차원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붓다는 예전의 정등각자들이 발견한 길인 팔정도, 포괄적으로는 사성제를 따라가면서 성취했던 것으로서 오래된 길이지만 새롭게 재구성한 다음과 같은 유형의 진리를 설했을 것이다.

 

이것은 실로 그 예전의 정등각자들이 따라갔던 옛 길이고 옛 지름길이다. 나는 그것을 따라갔다. 그것을 따라가는 동안 나는 노사를 철저하게 알았고, 노사의 일어남을 철저하게 알았고, 노사의 소멸을 철저하게 알았고, 노사의 소멸로 이끄는 길을 철저하게 알았다. 그것을 따라가는 동안 생을 철저하게 알았다. … 유를 … 취를 … 애를 … 수를 … 촉을 … 육입처를 … 명색을 … 식을 … 나는 그것을 따라갔다. 그것을 따라가면서 행들을 철저하게 알았고, 행들의 일어남을 철저하게 알았고, 행들의 소멸을 철저하게 알았고, 행들의 소멸로 이끄는 길을 철저하게 알았다.

 

이 문맥에서 연기법, 즉 ‘일어남(samudaya)’과 ‘소멸(nirodha)’이라는 진리는 붓다가 깨달은 것으로서 초전법륜에서 사성제에 대한 여실지견에 비견되는 정형구로 표현된다. 예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해 눈 등이 일어났다는 동일한 구절로 이러한 깨달음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팔정도를 따라가면서 발견했다는 측면에서 사성제의 틀 속에서 재구성된 이 새로운 진리는 어떤 식으로든지 사성제의 내용을 보완하고 심지어그 위상을 대체하려는 의도를 지닌 것으로 보인다. 또한 팔정도의 중심 내용이 사선정임(MN 36)을 고려할 때, 그것을 ‘철저하게 알았다’는 것은 사띠와 평정이 청정한 상태에서 그것을 여실지견했다는 의미를 함축한 것이고, 그 때문에 이 진리 역시 일반적인 사유나 관찰을 통해 유비적으로 도출된 것이 아니라 사성제처럼 직관된 진리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방식으로 사성제와 연기법을 재구성한 의도는 무엇인가? 이를 위해 먼저 이 맥락(SN 12:65)에서 소개된 연기법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 연기법에 대한 깨달음은 붓다가 노사라는 고통에 빠진 중생을 그로부터 벗어나게 하겠다고 사유한 결과이다. 붓다의 사유는 노사가 일어난 원인과 그 소멸을 찾으려는 여리작의로 연결되고, 그 작의를 통해 붓다는 생과 노사의 인과적 생멸 관계를 반야에 의해 현관하게 된다. 점차 이것은 생-유-취-애-수-촉-육입처-명색-식의 상호 의존적 관계에 대한 여리작의로 진행되며, 붓다는 그 작의로부터 반야에 의해 그들의 연쇄적인 인과관계의 생멸을 현관하게 된다. 그렇지만 이에 그치지 않고 붓다는 재차 이 모든 과정을 통합하여 인과적으로 연결하고 전체적인 관점에서 ‘일어남’과 ‘소멸’이라는 진리로 정립한다. 이를테면 고통의 생멸에 대한 여실지견이라는 점에서 이것은 사성제와 동일한 의의를 지녔다는 것이다. 또한 내용적으로도 노사 등의 요소들은 사성제의 첫 번째 진리와, 고통이 일어나는 연쇄는 두 번째 진리와, 고통이 소멸하는 연쇄는 세 번째 진리와, 예전 정등각자들이 거닐었던 팔정도를 따라갔다는 부분은 네 번째 진리와 상응한다. 실제로 이와 유사한 유형이 AN 3.61에서 설해지고 있기 때문에 이 주장은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런 차원에서 산기슭을 방황하던 자가 우연히 옛 길을 보고, 그 길을 따라 옛 사람들이 세운 도시를 발견하고 그곳을 다시 번영하는 도시로 재건한 것처럼, 이 둘의 결합 그 자체가 옛 틀에 새롭게 재구성한 것임에도 그와 상응하는, 심지어 그보다 더 유용할 수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사성제와 연기[=십이연기]의 결합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고통의 원인이 갈애와 무명으로 다르게설정되어 있고, 그에 따라 그 소멸 상태도 다르게 묘사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한 나름의 해결점을 찾으려고 시도한 경전도있다.(SN 12:19)

 

하지만 여기(SN 12:65)에서 이 둘을 결합하려는 의도는 이 문제와는 사뭇 다르다. 왜냐하면 그 초점이 재생에 있어서 인도적 사유의 오랜 관념이었던 식(識)이 윤회의 주체가 아니며, 그것이 명색과 상호 의존해 있다는 것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일어남’이라는 진리는 ‘이 식은 다시 돌아온다. 명색으로부터 다른 것으로 가지 못한다. 여태까지 늙어가고 태어나고 죽어가고 옮겨가고 재생하는 한, 곧바로 명색을 연하여 식이 있고, 식을 연하여 명색이 있고, 명색을 연하여 육입처가 있고, 육입처를 연하여 촉이 있고, … 이와 같이 이 모든 고통의 무더기가 일어난다’는 것에 대해 여실지견된 것이고, 그 ‘소멸’이라는 진리도 식과 명색의 상호 의존적 소멸을 기점으로 고통의 무더기가 소멸한다는 것에 대해 여실지견된 것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사성제의 틀에 고통 대신 연기법의 구성요소를 대입하고 그에 대한 여실지견을 설한 것은 다르게 설정된 고통의 원인과 그 소멸에 대한 해명이라기보다, 윤회의 주체와 관련된 오래된 관념을 올바르게 통찰하기 위한 시도임을 알 수 있다. 그 때문에 이 유형 역시 붓다의 정각 기술뿐 아니라 제자들의 해탈도에서도 다양하게 응용되었을 것이다.

 

먼저 SN 12.51에서 그것은 제자들의 해탈체험과 관련하여 ‘모든 측면에서 올바르게 고통을 파괴하기 위해(sabbaso sammādukkha-kkhayāya) 얼마만큼 철저하게 숙고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제시된 것이며, 그와 같이 철저하게 숙고하는 동안 분명하게 알아야 할 해탈적 통찰의 토대(vatthu)로서 설명된 것이다. 말하자면 ‘이 세상에서 다양하게 여러 가지로 일어나는 고통으로서 노사는 무엇을 원인으로 하고, 무엇으로부터 일어나고, 무엇으로부터 생기고, 무엇으로부터 나오는가, 무엇이 있을 때 노사가 있고, 무엇이 없을 때 노사가 없는가’라는 관점에서 그것을 철저하게 숙고하는 동안 그 숙고를 통해 여실지견된 내용이라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그 제자들은 노사-행들의 원인과 조건이 생-무명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할 뿐만 아니라, 노사-행들을 분명하게 알고, 노사-행들의 일어남을 분명하게 알고, 노사-행들의 소멸을 분명하게 알고, 노사-행들의 소멸에 적절한 길을 분명하게 알게 될 것이다. 더욱이 붓다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여실지견한 자를 ‘법을 따라 실천하는 자(anudhammacārin)’라고 명명한다. 다시 말하면 제자들에게 반드시 실천해야 할 수행규범으로서 이것을 강조한 것이다.

 

하지만 SN 12.65에서와 달리, SN 12.51에서 이것은 연기법과 병렬적으로 배대된다. 예를 들면 “행들은 무명을 원인으로 하고, 무명으로부터 일어난 것이고, 무명으로부터 생긴 것이고, 무명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무명이 있을 때 행들이 있고, 무명이 없을 때 행들이 없다”라는 구절과 나란히 “행들을 분명하게 알고, 행들의 일어남을 분명하게 알고, 행들의 소멸을 분명하게 알고, 행들의 소멸에 적절한 길, 그것을 분명하게 안다(Ⅱ, 80)”라는 구절이 제시된 것이다. 이와 같은 병렬적 배대가 연기법을 보완, 특히 연기법의 구성요소들에 대한 여실지견을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졌다면, 사성제를 보완했을 것이라고 여겨지는 유형과 더불어 다양한 응용의 또 다른 사례로 이것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수행자의 근기에 따라 여실지견하는 방법에 대한 실질적인 응용이 다양해졌다는 의미일 것이다.

 

다음으로 해탈체험을 기술하는 맥락이 아니라 초보 수행자가 반드시 인식해야 할 주제로서 이 유형이 설해진 경전들도 있다. 그것들 가운데 연기나 해탈적 통찰의 토대라는 주제아래 그 각각의 구성요소에 대한 설명을 부연한 경우가 있는데, SN 12.27에서는 연기와 동일한 의미로 간주되는 십이연기에 대한 여실지견의 관점에서 제시되고, SN 12.33에서는 현재의 법에 대한 해탈지(dhamme ñāṇa)뿐만 아니라 과거와 미래까지 미루어 철저하게 아는 유비적 해탈지(anvaya ñāṇa)를 일어나게 하는 근거로서 설해진다. 그가운데 행이라는 구성요소(saṅkhārāṅga)가 다음과 같이 적용된경우(Ⅱ, 59)이다.

 

① 이 행들은 신행(kāyasaṅkhāra), 어행(vacīsaṅkhāra), 심행(cittasaṅkhāra)이다.

② 무명의 일어남으로부터 행이 일어난다(avijjāsamudayā saṅkhāra-samudayo).

③ 무명의 소멸로부터 행이 소멸한다(avijjānirodhā saṅkhāranirodho).

④ 행의 소멸로 이끄는 길은 바른 견해, … 바른 삼매라는 성스러운 팔정도이다.

 

초전법륜에서 설명된 사성제와 견주어 이것을 살펴보면, 고통이라는 첫 번째 진리에 대응하는 것으로 ①은 노사에서부터 행들까지를 모두 고통과 동의어로 간주하여 그 의미를 정의한 것으로 보이며, 그 구체적인 내용은 SN 12.2(Ⅱ, 2-4)에서 설한 것과 같다. ②와 ③은 각기 두 번째 진리와 세 번째 진리에 대응하는 것으로서, 고통의 생멸에 대한 인과관계로 내용을 바꾼 것이다. 따라서 순서대로 설해진 모든 구절을 합하면 ②는 십이연기에서 ‘고통의 무더기가 일어난다’는 연쇄, ③은 그것이 소멸한다는 연쇄에 해당되며, SN 12.65에서 보았듯이 일어남과 소멸이라는 예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이라는 범주 속에 포함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네 번째 진리에 대응하는 ④는 논리적 구조와 무관하게 모두 팔정도로 설해진다. 팔정도의 실질적인 내용이 사선정임을 감안한다면 이것은 노사 등이라는 고통, 그것이 일어나고 소멸하는 인과관계에 대한 여실지견이 바른 삼매 속에서 통찰된 것임을 명시하기 위한 배려일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내용적 확장이 보이는 이 유형은 해탈도에서 여실지견할 수 있는 실제적 방법으로 제시된 것이라기보다 입문한지 오래되지 않는 초보자들에게 그것에 대한 이론으로서 설명된 것이라는 가정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이것을 여러 경전들(SN 12.27, 28, 33)에서 이와 같이 연(緣, paccaya), 연의 일어남, 연의 소멸, 연의 소멸로 이끄는 길을 분명하게 아는 자, 혹은 청정한 법지와 류지가 일어난 성제자를 ‘바른 지견(diṭṭhidassana)을 갖춘 자, 정법(saddhamma)에 도착한 자, 정법을 본 자, 유학의 지혜나 명지(vijjā)를 갖춘 자, 법의 흐름(dhammasota)에 들어간 자, 성스러운 결택(nibbedhika)에 의해 반야를 지닌자, 불사의 문(amatadvāra)을 두드리고 서 있는 자’라고 명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보다 더 외연을 확대하여 출가한 사문이나 바라문이라면 그 누구든지 자신이 올바른 사문이나 바라문이 되기 위해, 혹은 자신들의 목표를 현세에서 스스로 알아 현증하기 위해 노사-행들, 노사-행들의 일어남, 노사-행들의 소멸, 노사-행들의 소멸로 이끄는 길에 대해 여실지견해야 함을 역설하는 경전들도 있다. 여기에서 주체가 되는 사문이나 바라문은 비구뿐 아니라 출가 유행자를 포괄하는 넓은 의미이다. 게다가 붓다는 제자들에게 이 유형에 대한 여실지견을 반드시 실천해야 할 필수적인 조항처럼 제시하고 있다. 그런 까닭에 많은 경전(SN 12.82-93)에서 노사-행들, 노사-행들의 일어남, 노사-행들의 소멸, 노사-행들의 소멸로 이끄는 길을 여실하게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자들은 그것에 대한 여실한 해탈적 통찰을 위해(yathābhūtaṃ ñāṇāya) 스승(satthā)을 찾아다녀야 하고, 훈련해야 하고, 요가를 행해야 하고, 의욕을 일으켜야 하고, 노력해야 하고, 불퇴전해야 하고, 열중을 행해야 하고, 부단히 행해야 하고, 사띠(sati)를 행해야 하고, 완전한알아차림을 행해야 하고, 불방일해야 한다고 그에 대한 실천을 권유하고 있을 것이다.

 

한편 이 유형이 출가한 사문이나 바라문이라면 누구나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바른 견해를 얻기 위한 방법 중의 하나로서 설해진 경우(MN 9)①도 있다. 거기에서 사리뿟따는 성제자가 ‘어느 정도까지의 정견을 지녀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서, 다른 요소들과 병렬적으로 이것을 제시하며, 그 내용도 설법을 목적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여실지견의 강조와 더불어 그 각각에 대한 구체적인 해설도 덧붙여져 있다.

① MN 9(Ⅰ, 48-55)의 내용을 간추리면, 먼저 사성제에 대한 여실지견을 제시하고 차례대로 
   사성제와 유비적 방식으로 자양분, 무명을 포함한 12가지 연기법의 구성 요소, 루를 적용
   하여 설한 다음 “그것, 그것의 일어남, 그것의 소멸, 그것의 소멸로 이끄는 길에 대해 분명
   하게 안다면 모든 측면에서 탐욕의 잠재적인 경향을 제거하고, 분노의 잠재적인 경향을 
   제거하고, ‘나는 있다’라고 하는 자아의식의 잠재적인 경향을 제거하고, 무명을 버리고 
   명지를 일으키고서 현세에서 고통의 끝을 짓는 자가 될 것이다”는 정형구가 뒤따르고 
   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자양분과 갈애의 인과관계, 그리고 무명과 루의 상호 
   의존관계를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무명의 일어남을 무명루가 포함된 루와의 
   상호 의존관계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무명이 무한순환하게 되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와 같이 사성제의 틀에 ‘고통’ 대신 연기법의 구성요소가 적용된 유형도 다른 유형과 마찬가지로 붓다의 정각 기술에서 여실지견된 내용으로서 설해지며, 제자들의 해탈도에서도 여실지견해야 할 진리로서 설명되고 있다. 또한 산기슭의 옛 길을 따라가면서 발견한 옛 도시의 재건이라는 비유를 통해 해탈적 통찰로서 사성제 응용의 단초를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고통의 생멸에 대한 인과관계를 전제로, 사성제의 틀 속에서 고통과 그것을 일으키는 원인으로 간주되는 노사 등을 차제대로 적용하여 여실지견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Ⅴ. 나오는 말

 

이 논문은 붓다의 정각이나 그 제자들의 해탈도에서 반야에 의해 여실지견된 진리들 가운데 하나로서 연기법의 구성요소를 사성제의 틀에 적용한 유형이 어떻게 성립될 수 있는지에 대한 해답을 탐색하는 작업이다. 불교 해탈도에서 사성제, 연기법의 위상을 감안할 때 사성제의 ‘고통’ 대신 ‘노사’에서 ‘행들’까지의 요소들이 적용된 이 유형은 옛 틀을 의지하여 새롭게 재구성된 또 하나의 해탈적 진리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마치 팔정도의 길을 따라가면서 사성제라는 옛 도시를 발견하고 돌아온 수행자가 그 옛 도시에 연기의 구성요소라는 새로운 요소들을 가지고 가서 재건을 이룬 후에 그 도시가 다시 번영을 구가하는 것과 같다. 다시말하면 해탈적 통찰로서 사성제를 응용할 수 있는 기준을 마련하고, 그에 따라 응용된 사례들도 사성제를 여실지견했을 때와 동등한 결과를 산출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사성제와 연기법을 재구성할 수 있는 근거는 해탈지견으로서 사성제에 함축되어 있는 보편성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즉 이 결합의 중심키를 연기법이 아닌 사성제가 쥐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사성제가 기본 틀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붓다의 정각과 이것 사이에 정형적 관계가 이미 초전법륜이나 루진지기술에서부터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차원에서 정각이나 해탈체험과 관련된 기술을 중심으로 사성제를 조망하여 그 틀 속에서 응용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적절한 이유와 그 다양한 응용의 사례들을 살펴보고 그것을 기초로 연기법의 구성요소들이 적용된 경우를 살펴보았다. 이에 대해 먼저 붓다의 정각과 관련하여 사성제에 대한 여실지견의 공통적 기반으로서 중도가 설명된 맥락, 즉 초전법륜과 루진지의 기술을 비교분석하여 사성제의 도출 과정을 검토하였다. 이를 통해 네 번째 진리는 중도(=사선정)로부터 도출된 것이고, 첫 번째 진리는 숙명지와 천안지를 통해 철저하게 이해된 것이며, 두 번째 진리는 고통에 대한 직관적인 확인이 보완된 것이고, 세 번째 진리는 붓다 자신의 해탈 체험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보편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것이 붓다나 그 제자들이 사성제를 공유할 수 있는 근거이면서도 다른 교리와 결합할 수 있는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그만큼 불교 해탈에서 사성제에 대한 여실지견이 기본적으로 필요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다음으로 그 보편적 특성으로 인해 가능했을 사성제의 다양한 응용사례를 두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첫째는 여실지견의 대상으로서 연기법의 구성요소이외 다른 요소들이 사성제의 틀에 적용된 경우이다. 이 가운데 사성제의 틀에 ‘고통’ 대신 ‘루들’을 적용한 유형은 직접적으로 그것이 붓다의 정각에 필수적이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으며, 그밖에 오온의 구성요소, ‘세계’, ‘견해’, ‘자양분’, ‘유신’ 등이 적용된 유형들은 대체로 간략하게 초보 수행자가 여실지견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둘째 연기법의 구성요소들이 사성제의 틀에 적용된 경우는 팔정도를 따라가면서 발견된 것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사성제의 내용을 보완하거나 심지어 그 위상을 대체하려는 의도를 지닌 것으로 파악되며, 그 실질적인 내용은 윤회의 주체와 관련된 오래된 관념으로서 식을 올바르게 통찰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이 유형은 해탈적 통찰의 토대로서 제자들에게 다양한 관점에서 제시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