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는 바라문의 행실을 비판했을 뿐이지 바라문 계급을 부정하지 않았다.
담마파다나 숫타니파타의 경문을 한번 살펴보자.
「가문을 묻지 말고 행실을 물어라. 천한 가문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도 믿음이 견고하고 참회의 마음을 지녀 행동을 조심한다면 고귀한 사람이 되느니라」 숫타니파타 249
「가문에 의해 천한 자가 되는 것이 아니며 가문에 의해 바라문이 되는게 아니다. 스스로의 행실에 의해 천한 자가 되며 스스로의 행실에 의해 바라문이 된다.」 숫타피타 136
「바라문이란 소라처럼 튼 머리라든가 태생에 의해 되는 것이 아니다. 진실과 진리를 지닌 자, 그는 행복하며 그가 바라문이다.」담마파다 393
위에서 인용한 경전상의 문구 이외에도 수많은 곳에서 바라문을 비난하고 있다. 그 내용은 바라문의 행실 즉 개개인의 행위에 대한 비난이지 결코 바라문 계급을 부정하거나 바라문 계급 자체를 비난한 적은 없다. 오히려 청정하고 진리를 추구한다면 그가 바로 고귀한 사람이며 인도 사회 최고 계급이었던 바라문이라고 불리운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붓다 당시에 인도대륙은 여러 왕국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들 왕국은 각각의 정치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좋은 왕도 있었고 폭정과 억압정치를 펴는 왕도 있었다. 하지만 붓다는 결코 세속적인 왕권을 무시하거나 폭정에 반대하여 궐기하라고 민중들을 설득한 적이 없다. 폭력을 철저히 배격하고 평화를 이루고자 했던 붓다의 염원도 있었겠지만 한편으로는 당시의 정치나 사회의 계급사회를 그대로 인정했던 것이다. 다만 붓다는 열 가지의 기준을 제시하면서 정법으로 나라를 다스리기를 말했을 뿐이다.
불교의 평등은 승가안에서
불교의 승가는 귀한 가문이나 천한 가문을 가리지 않고 조건만 충족되면 출가를 받아 주었다. 그리고 승가 안에서는 율에 의해서 질서가 유지되고 스승과 제자와 승랍에 따른 위계질서가 있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승가라는 단체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지 결코 귀족 하인 노예와 같은 계급제도는 아니었다. 그런 측면에서 승가는 평등했으며 고귀하거나 천한 사람이 별도로 구분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출가승들로 이루어진 승가안에서의 일이지 결코 이러한 승가의 평등성이 인도의 세속적 사회에까지는 미치지 않았다. 경전은 천민으로 출가하여 아라한이나 고귀하고 청정한 수행생활을 한 분들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경전문구에는 "고귀한 가문의 아들로 태어나 집 없는 곳으로 출가..."라고 하여 고귀한 가문이라는 것을 적극 강조하는 부분이 상당하다. 붓다 또한 자신은 태양의 후예이며 석가족의 왕족출신이라는 것을 떳떳하게 밝히고 있다.
승가안에서조차 이런 고귀한 가문이라는 계급과 특권의식은 훗날 승가내에서 분란을 일으키고 또한 분열의 촉매제가 된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경전에는 마하 캇사파 존자가 석가족인 아난존자를 엄하게 힐난하는 장면도 나온다. 1차 경전결집 당시에도 아난 존자가 소소계에 대해서 붓다에게 자세히 묻지 않은 사항등 몇 가지 이유를 들어서 아난 존자를 힐난하고 있다, 그리고 이후에는 마하 캇사파와 아난 존자는 결국 별도의 길을 가서 상호 교류를 끊고 각자의 지역에서 불교를 포교하기도 한다.
여성 출가는 불교의 전유물이 아니다
흔히들 붓다가 여성에 출가를 허락한 것이 마치 인도사회의 계급을 혁파하거나 당시의 남녀간의 불평등을 개혁한 일인냥 말하는 불자들을 보는데 이는 실로 슬픈 오해이다. 당시 인도에서는 이미 자이나교가 여성에게 출가를 허락하고 있었고 일부 외도들도 여성들에게 출가를 허락하고 있었다.
불교는 여성에게 출가를 허락했지만 팔경계를 제정하여 비구에게 종속되도록 했으며 승가는 철저한 비구 중심이었다. 물론 이러한 팔경계를 제정할 수 밖에 없는 외부적인 요인들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를 율로 제정하여 엄수토록 한 것은 아니러니컬 하게도 팔경계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붓다의 인간평등 사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다.
인간의 불평등이 곧 평등
불교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중생들의 삶의 불펴등이 곧 평등이다. 자신이 행한 행위에 대한 결과물을 받는데 모두다 같을 수는 없다. 선인선과 악인악과 자업자득인 것이다. 이 말은 곧 불평등한 만큼 평등하다는 것이다. 자신이 행한 것 만큼 받으니 이것만큼 평등한 것도 없는 것이다.
불교는 결코 만인에 의한 만인의 절대적 평등을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만인에 의한 만인의 상대적 불평등이 곧 평등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착한 일 한 사람과 악한 일 한 사람의 삶의 모습이 같다면 이것만큼 불평등한 것은 없을 것이다. 불교의 평화와 평등은 중생들의 불평등이 어디서 오는가를 알아채고 그 해결 방법을 지혜롭게 헤쳐나가는 것이다.
5시간 일한 사람과 10시간 일한 사람의 빵의 무게가 같다면 이것이 바로 불평등이지 평등이 아니다. 5시간 일한 사람이 10시간 일한사람보다 왜 빵이 모자라냐고 머리 삭박하고 머리때 둘러매고 웃통벗고 시위한다면 이건 도둑놈 심보이고 천한 짓거리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서 사회 정의나 부의 불평등 해소를 위해서 적게 받는 사람과 많이 받는 사람과의 간격을 지혜롭게 조정하고 균등하게 배분하는 지혜를 필요로 하는 것이지 결코 그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생떼나 어거지에 불과한 것이다. 불교의 업의 가르침도 이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잘못 이해하는 불자들
흔히들 불자라는 사람들의 글을 보면 붓다는 인간평등과 계급을 타파한 혁명가처럼 묘사된다. 여성들에게 출가를 허용했다고 하면서 남녀간의 불평등을 혁파한 것처럼 호도한다. 하지만 이건 크게 잘못된 견해이다. 붓다는 결코 무정부주의자도 아니었으며 계급타파를 주장했던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다만 중생들이 모두다 서로서로 자비를 베풀고 보시를 하며 평화롭고 안락하고 편안하게 사는 사회를 이루기를 염원했다. 훗날 대승불교에서는 이를 불국토 불국정토라고 표현했지만 붓다는 사회의 각 계층들이 조화롭게 살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 방법으로 그는 오계를 세웠으며 또한 비폭력을 주장했던 것이다. 우리 사회가 오계만 제대로 지켜지고 폭력만 사라져도 사회계급과 상관없이 얼마나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지는 굳이 두 말할 필요가 없다.
붓다의 인간평등 사상의 핵심은 무엇인가
붓다는 사람들의 얼굴이 다른만큼 각 중생들의 삶의 모습이 천차만별인 것을 철저하게 인정하고 있다. 잘나고 못생기고 건강하고 아프고 부자이고 가난한 중생들의 삶을 불평등하다고 한 적이 없다. 하지만 붓다가 위대한 것은 이러한 중생들의 불평등에 대한 이유와 그 치유책을 명쾌하게 밝히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아닌 업에 의해서 중생들의 삶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즉 선인선과 악인악과 자업자득이라는 진리를 명쾌하게 제시함으로써 중생들의 불평등의 이유와 그 해결방법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경전에는 곳곳에서 중생들의 행위에 의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습을 밝혀주고 있다. 지금 잘 산다면 왜 잘 사는지, 지금 못살면 왜 못 사는지를 업의 교설로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붓다는 중생들을 네 가지로 분류하면서 "어둠에서 어둠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빛에서 어둠으로, 빛에서 빛으로 가는 행위"를 밝히고 있다.
남방권 불교국가들을 보면 계급간의 갈등이 거의 없다. 현재의 삶이 과거의 행위에 대한 결과를 것을 믿기에 부자들에 대한 맹목적인 분노도 없다. 이 몸이 무너져 저 세상으로 갈 때 가져갈 것은 오직 현생에서의 공덕뿐이라는 것을 철저하게 믿기에 현실에 충실하고 열심히 살아갈 뿐이다. 잘살고 못사는 것에 대해서 모두다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불교이고 그것이 불교의 평등이다.
이렇게 말한다고 하여 물질만능이나 치열한 경쟁의 자본주의적 시각에서 보면서 이들 국민들이 삶을 포기하거나 매우 소극적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큰 오산이다. 위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어둠에서 어둠으로 가질 않고 어둠에서 빛으로 가거나 빛에서 빛으로 가는 삶"이 말처럼 쉬운게 아니다. 집착을 여의고 분노를 버리고 현실에서 주어지는 것에 만족하고 큰 욕심 부리지 않는 삶이 말처럼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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