有餘涅槃에 대한 설일체유부의 아비달마적 해석
황 순일/충북대학교 인문학연구소 전임연구원
1. 서 언
2. 대비바사론에 나타난 upadhi의 의미
3. 다섯 감각기관(pañcindriya)과 수명(āyus)
4. 명근(jīvitendriya)과 중동분(nikāyasabhāga)
5. 결 어
1. 서언
초기 인도불교에서는 일반적으로 열반(nirvāṇa)을 'upadhi가 남아있는 열반' (sa-upadhiśeṣa-nirvāṇa, 有餘依涅槃)과 'upadhi가 없는 열반'(nir/an-upadhiśeṣa-nirvāṇa, 無餘依涅槃)의 두 가지1)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비록 대승불교에 오면서 '머무름이 없는 열반'(apratiṣṭhitanirvāṇa, 無住處涅槃)2)과 '본래부터 자성이 깨끗한 열반'(anādikālikaprakritiśuddha-nirvāṇa, 本來自性淸淨涅槃)이 추가되면서 열반이 세 가지 또는 네 가지로 분류하여 설명하기도 하지만, 인도 부파불교를 대표하는 학파인 설일체유부(Sarvāstivādins), 경량부(Sautrāntikas) 그리고 테라바다(Theravāda)는 열반을 두 가지로 분류하고 'upadhi가 남아있는 열반'를 통해서 붓다가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설명하고 'upadhi가 없는 열반'을 통해서 붓다가 윤회하는 세계에서 마지막으로 떠나가는 것을 설명한다는 점에서 대체로 일치하고 있다.
1. 두 가지 열반은 불교혼성범어에서 sopadhiśeṣanirvāṇadhātu와 nir/an-upadhiśeṣanirvāṇadhātu로
표기되고 빨리어에서 saupādisesanibbānadhātu와 anupādisesanibbānadhātu로 표기된다.
2. 무착의「섭대승론」(Mahāyānasaṃgraha)에서는 ‘머무름이 없는 열반’ (apratiṣṭhitanirvāṇa,
無住處涅槃)을 부파불교와 대승불교를 구분하는 열 가지 차이점 중의 하나로 언급하고 있으며
(Lamotte 1973: 8), 『성유식론』(Vijñaptimātrarāsiddhi)에서는 ‘머무름이 없는 열반’에 ‘본래
부터 자성이 깨끗한 열반’ (anādikālikaprakritiśuddha-nirvāṇa, 本來自性淸淨涅槃)을 추가하여
열반을 네 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La Vallée Poussin 1928: 670-676).
하지만 이 설명은 두 가지 열반을 구분하는 열쇠로서 불교혼성범어 전통에서 upadhi로 표기되고 빨리 전통에서 upādi로 표기되며3) 현장에 의해 ‘依’로 번역된 용어가 가지는 중요한 주석적인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3. 빨리어의 upādi와 범어의 upadhi는 어원적으로 완전히 다른 용어로서 의미적으로도 조금씩
다르게 사용되고 있다. 한편 Norman (1992: 144)은 이러한 차이로부터 이 용어에 대한
새로운 어원을 제시하고 있다.
빨리 전통에서 upādi는 주로 ‘나머지, 잔여’ 등을 의미하는 sesa와 함께 복합어의 형태로 나타나는데, 독립적으로는 upa ā √dā(to give)란 동일한 어원에서 파생된 upādāna의 형태로 나타나며, 불교혼성범어 표기와의 유사점에도 불구하고 upa √dhā(to put)를 어원으로 하는 빨리 upadhi와는 구분되고 있다. 이 용어는 기본적으로 객관적 주관적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객관적으로는 어떤 활발한 작용이 계속 진행되도록 하는 물질적인 토대란 어원에 기초한 ‘연료, 공급, 제공’ 등을 의미하고 주관적으로는 불이 계속 타오르기 위해 연료에 의지한다는 관점으로부터 ‘의지하다, 잡다, 지탱하다, 집착하다’ 등의 의미를 지닌다. 사람이 계속 살아가기 위해 먹을거리 등에 의지한다고 말할 수 있듯이, 윤회의 과정이 계속 진행되기 위해서 이것에 의지해야 한다는 점으로부터 때때로 이 용어가 윤회의 원인을 지칭하는 것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불교가 체계화 되어 가면서 upādāna는 주로 이러한 주관적인 관점에서 사용되었는데 애욕에 대한 집착(kāmupādāna), 잘못된 견해에 대한 집착(diṭṭhupādāna), 규칙과 제식에 대한 집착(sīlabbatupādāna), 그리고 자아의 믿음에 대한 집착(atta-vādupādāna)의 네 가지 집착을 지시하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하지만 부파불교 시대에 일반적으로 통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집착’이란 주관적인 의미를 두 가지 열반 개념에 적용하면 'upadhi가 남아있는 열반'은 아직까지 집착이 남아있다(saupādisesa)는 점으로부터 아직까지 번뇌의 찌꺼기들이 조금은 남아있는 상태인 불환(anāgāmin)으로 그리고 'upadhi가 없는 열반'은 더 이상의 집착이 남아있지 않다(anupādisesa)는 점으로부터 모든 번뇌의 찌꺼기들이 소멸한 상태인 아라한(arahant)으로 해석되어 버리는 문제점이 생기게 된다.
다시 말해서 upadhi란 용어를 통해서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과 마지막 열반에 이르는 과정이 구분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양자 모두가 이미 모든 집착 또는 번뇌와 같은 심리적인 불안정 상태에서 떠나가 있는 상태라는 점에서 집착이란 주관적인 의미를 통해 더 이상 두 가지 열반 사이의 차이를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사실상 설일체유부(Sarvāstivādins)의 아비달마 논서인『발지론』(Jñānaprasthāna)의 방대한 주석서인『대비바사론』(Mahāvibhāṣāśāstra)에서는 이러한 문제점에 대한 고민의 흔적이 발견되고 있다.
2. 『대비바사론』에 나타난 upadhi의 의미
설일체유부의 아비달마 전통에서 두 가지 열반에 대한 언급은 일곱 아비달마 논서들 중에서 가장 후대에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발지론』(Jñānaprasthāna)에 이르러 처음으로 언급되고 그 주석서인 『대비바사론』(Mahāvibhāṣāśāstra)에 상세하게 나타나고 있다.『대비바사론』에서는 설일체유부의 존재론적 체계 하에서 『발지론』에 나타난 두 가지 열반에 대한 언급을 해석하면서 문제가 되는 용어인 upadhi 즉 ‘依’에 대해 각각 다음과 같이 주석하고 있다.
‘upadhi가 남아있는’(saupadhiśeṣa) 이라고 했을 때, upadhi에는 ‘번뇌’(kleśa, 煩惱)로서의 upadhi와 ‘태어날 때 받은 몸’(janmakāya, 生身)으로서의 upadhi란 두 가지 종류가 있다. [upadhi가 남아있는 열반을 얻은] 아라한에 있어서 ‘번뇌’로서의 upadhi는 없지만 ‘태어날 때 받은 몸’으로서의 upadhi는 아직 남아 있다. 또한 upadhi에는 염오된(kliṣṭa) upadhi와 염오되지 않은 upadhi란 두 가지 종류가 있다. [upadhi가 남아있는 열반을 얻은] 아라한에 있어서 염오된 upadhi는 없지만 염오되지 않은 upadhi는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다.
‘upadhi가 없는’(anupadhiśeṣa)이라고 했을 때, 두 가지 upadhi 모두 없다. [upadhi가 없는 열반에는] ‘번뇌’(kleśa, 煩惱)로서의 upadhi도 없고 ‘태어날 때 받은 몸’(janmakāya, 生身)으로서의 upadhi도 없다. 또한 [upadhi가 없는 열반에는] 염오된 upadhi도 없고 염오되지 않은 upadhi도 없기 때문이다.
언 듯 보기에 첫 번째 설명에서 당시 upadhi의 일반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집착’과 유사한 용어인 ‘번뇌’가 사용되어 두 가지 열반이 설명되고 있는 듯하지만, 양자 모두에서 ‘번뇌로서의 upadhi’가 없는 것으로 설명된다는 점에서 upadhi의 주관적인 의미는 두 가지 열반의 구분에 있어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두 번째 설명에서 upadhi 자체를 염오된 것과 염오되지 않은 것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지만 여기에서도 양자를 구분하는 기준이 되는 것은 ‘염오된 upadhi'가 아니라 ‘염오되지 않은 upadhi’라는 점에서 번뇌 또는 집착과 같은 주관적이고 어떤 심리적인 불안정 상태를 지시하는 것으로 upadhi를 해석하기는 어렵게된다.
다시 말해서 『대비바사론』은 두 가지 열반의 해석에 있어서 기존의 upadhi의 주관적 의미를 포기하고 ‘태어날 때 받은 몸’(janmakāya, 生身)이란 새로운 의미를 추가하여 사실상 이를 통해 양자를 구별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비바사사(Vaibhāṣikas)의 논사들은 ‘태어날 때 받은 몸’을 두 가지 열반이란 맥락에서 upadhi가 사용되었을 때 이 용어가 지시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바로 이것이 ‘upadhi가 남아있는 열반’에서도 파괴되지 않고 남아있는 것으로 본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upadhi를 기존의 의미와는 다른 ‘태어날 때 받은 몸’이란 해석이 설일체유부의 체계에서 어떻게 가능하게 된 것일까? 어떤 과정을 거쳐서 이러한 설명이 합리화 되었을까? 여기에서는 그 해답을 ‘upadhi가 남아있는 열반’의 해석을 둘러싼 초기 인도불교의 교리적 주석적 문제점들과 그 해결책들을 『이티부타까』(Itivuttaka)로부터 설일체유부의 아비달마 논서인 『발지론』과 그 주석서인 『대비바사론』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통해 교리 발전사적 관점에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How Buddhism began에서 곰브리치는 초기 경전에서 upādi가 두 가지 열반의 맥락에서 사용되었을 때 이 용어는 불의 소멸이란 이미지를 통해 열반을 설명하는 메타포의 일부로서 주관적인 의미가 아니라 객관적인 의미로 땔감 등과 같은 연료를 지시한다고 주장하고 있다12). 이때 땔감이란 의미는 다섯 집합체(五蘊)와 연결된다. 초기 빨리 경전에서 종종 나타나는 upādāna-kkhandhā란 표현은 한역 경전에서 주로 五取蘊으로 번역되고 있다. 하지만 주관적으로 사용된 ‘取’란 의미를 살려서 이 용어를 이해하려고 하거나 한글로 번역하는 것은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다. 곰브리치는 여기에서 upādāna는 열반을 포함하는 커다란 비유적인 맥락에서 사용되었으며 ‘取’로 번역된 것과 같이 어떤 심리적인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의미로서 연료 또는 땔감이란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보아야 하며, 따라서 upādāna-kkhandhā는 ‘연료으로서의 다섯 집합체’으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한다. 사실상 Saṃyuttanikāya의 Ādittasutta에서는 다섯 집합체(五蘊)를 연료 또는 땔감으로서 애착(rāga) 혐오(dosa) 우둔함(moha)란 세 가지 불꽃의 연료로 함께 타오르는 것으로 비유적으로 설명되고 있다.
그렇다면 연료라는 upādi 또는 upadhi의 객관적인 의미를 두 가지 열반에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Upādi가 남아있는 열반'(saupādisesanibbānadhātu)은 탐 진 치라는 세 가지 불은 꺼졌지만 아직까지 그 연료가 되는 다섯 집합체(五蘊)가 남아있는 상태로서 모든 번뇌의 소멸(kilesa-parinibbāna)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것이 되고, ‘upādi가 없는 열반’ (anupādisesanibbānadhātu)은 애착(rāga) 혐오(dosa) 우둔함(moha)과 같은 번뇌들이 이미 소멸된 상태에서 아직까지 남아있던 다섯 집합체(五蘊)가 마지막으로 소멸(khandha-parinibāna)하는 상태로 윤회하는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떠나가는 것을 지칭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이 설명은 upādi가 집합체(蘊)를 지시하는 것으로 보면서 두 가지 열반을 붓다의 일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사건인 깨달음과 마지막 열반에 해당되는 것으로 해석하는 테라바다(Theravāda)의 주석전통과 일치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은 초기 경전에서 메타포를 통해 간접적으로 추정되고 있을 뿐 직접적으로 설명되고 있지 않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비록 두 가지 열반이 용어로서 현존하는 네 가지 한역 아함경과 빨리 니카야(nikāya)에서 언급되고 있지만, 이들을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은『이티부타까』
(Itivuttaka)4)에서 처음으로 나타난다. 이 경에서는 모든 불순한 찌꺼기들이 소멸된(khīṇāsavo) 아라한으로 ‘upādi가 남아있는 열반’을 설명하면서 그에게는 다섯 감각기관이 아직 파괴되지 않고 남아 있어서 이를 통해 즐거움과 괴로움 등을 느끼게 된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초기 빨리경전은
‘upādi가 남아있는 열반’에서도 파괴되지 않고 남아있는 것을 다섯 집합체(五蘊)라기 보다는 다섯 감각기관(pañcindriya,五根)으로 보고 있다는 할 수 있다.
4.『이티부타까』(Itivuttaka)가 비록 다섯 감각기관(pañcindriya, 五根)을 ‘upādi가 남아있는
열반’에서도 파괴되지 않고 남아있는 것으로 언급하지만 계속되는 설명이 어떤 인식 현상이
계속해서 지속된다는 것을 설명한다. 해밀턴(Hemilton 2000: 30, 78)에 의해 지적되었듯이
우리의 인식현상은 다섯 집합체(五蘊)의 상호 관련 속에서 설명되고 있다는 점에서 양자는
서로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Hwang 2002: 32-37)
한편 두 가지 열반은 설일체유부의 초기 중기 아비달마 논서에서 거의 언급되거나 설명되지 않다가 마지막 아비달마 논서인『발지론』에서 최초로 구체적으로 설명되고 있다. 여기에서는 ‘upadhi가 남아있는 열반’에서도 파괴되지 않고 남아있는 것을 다섯 집합체(五蘊)도 다섯 감각기관
(pañcindriya, 五根)도 아닌 수명(āyus)으로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Upadhi가 남아있는 열반’이란 무엇인가? 모든 불순한 찌꺼기들이 소멸(kṣīṇāsrava)된 아라한에게 수명(āyus)만은 남아 있다. 아직까지 upadhi가 남아 있음으로 [네 가지] 미세한 요소(mahābhūtāni)와 이차적 물질(upādāyarūpa)의 흐름이 끊어지지 않았고 다섯 감각기관에 의지하고 있는 정신적인 흐름이 계속된다. [이 아라한에게] 모든 속박(saṃyojana)의 완전한 소멸이 얻어지고(prāpta), 소유되고(pratilabdha), 체득되고(spṛṣṭa) 실현됨으로(sakṣākṛta) ‘upadhi가 남아있는 열반’이라한다.
비록『이티부타까』(Itivuttaka)에서와 같이 다섯 감각기관이 언급되고 있지만 이 설명에서 처음으로 언급되는 것은 수명(āyus)이다. 그렇다면 수명은 어떻게 두 가지 열반의 맥락 속에 들어오게 된 것일까? 아마도 이점은 빨리 소부 경전에 포함되어있는『빼타꼬빠데사』(Peṭakopadesa)의 언급을 통해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수명(āyus)이『발지론』에서와 같이 ‘Upadhi가 남아있는 열반’의 설명에서 나타나지 않고 ‘upadhi가 없는 열반’의 설명에서 나타나고 있다.
상식적으로 보았을 때 ‘upadhi가 없는 열반’이 윤회하는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떠나가는 것으로 간주된다면, 수명(āyus)이 완전히 파괴되거나 정지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이 될 것이다. 따라서 처음에 수명은 ‘upadhi가 없는 열반’에 드는 과정이 처음에 어떻게 시작되는가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빼타꼬빠데사』(Peṭakopadesa)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수명(āyus)의 있음과 없음이 당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던 두 가지 열반의 차이를 간단명료하게 잘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이 용어가 점차 ‘upadhi가 남아있는 열반’에까지 확대되어 사용되었으며 설일체유부에서 적극적으로 체택되어 발지론에 수록 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바수미트라의 『이부종륜론』(Samayabhedoparacanacakra)에 언급되듯이 설일체유부(Sarvāstivādins)는 때때로 원인을 이야기하는 사람들(hetuvāda, 設因部)로 불렸는데21) 현상을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통해 설명하는 것에 익숙한 이들의 성향 또한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사실상 수명(āyus)은 Majjhimanikāya의 Mahāvedallasutta에 나타나는 마하고티히따(Mahākoṭṭhita)와 사리푸따(Sāriputta)의 대화에서 다섯 감각기관(indriya)의 안정성을 담보해 주는 토대로서 언급되고 있다.
또한 초기 경전의 여러 부분에서 수명(āyus)과 체온(usmā)과 의식(vijñāna)이 신체를 떠나면 이것은 다른 동물들의 먹이나 나무 막대기에 불과할 것이라고 설명하는데『구사론』(Abhidharmakośabhāṣya)은 이 계송을 근거로 이들 셋이 상호 의존하는 관계에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수명과 상호 의존하는 관계에 있는 의식이 그 대상(viṣaya)과 기관(indriya)을 조건으로 한다는 점으로부터 수명은 자연스럽게 다섯 감각기관과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발지론』의 저자는 『이티부타까』(Itivuttaka)의 다섯 감각기관을 통한 ‘upādi가 남아있는 열반’에 대한 설명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이 수명(āyus) 만으로는『대비바사론』의 주석에서 두 가지 열반의 맥락에서 upadhi가 지시하는 것으로 앞에서언급된 ‘태어날 때 받은 몸’(janmakāya, 生身)이란 의미를 구체화시키지 못하고 있다.
4. 명근(jīvitendriya)과 중동분(nikāyasabhāga)
『발지론』(Jñānaprasthāna)에 나타난 두 가지 열반에 대한 설명은 『대비바사론』(Mahāvibhāṣāśāstra)에서 본격적으로 설일체유부의 아비달마적 체계에 따라 구체적으로 해석 되는 데, 수명(āyus)은 여기에서 좀더 설일체유부의 전문 아비달마적인 용어인 命根(jīvitendriya)과 衆同分(nikāyasabhāga)5)으로 해석되면서 다음과같이 다시 주석된다.
5. 衆同分(nikāyasabhāga)설일체유부의 아비달마에서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
(cittaviprayuktasaṃskāra) 14가지 요소 중의 하나로서 존재들의 특별한 재생의 상태를
결정하는 작용을 하는 것으로 설명 된다 (Cox 1995: 107-112).
수명이라 했을 때, 命根(jīvitendriya)을 지시한다. 그렇다면 [『발지론』에서] 衆同分(nikāyasabhāga)은 왜 언급되지 않았는가? 아마도 저자가 그렇게 의도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남아 있는’(sa-śeṣa)이란 용어로부터 그 의미가 알려지기 때문에 언급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命根
(jīvitendriya)과 衆同分(nikāyasabhāga) 모두는 새로운 생을 산출하는 업(ākṣepakakarman)5)의 결과이다. 命根은 전적으로 다르게 성숙(vipāka, 異熟)하기 때문에 그 [수명] 만이 홀로 설명되었다.
5. 설일체유부와 비바사사에 의하면 이 새로운 생을 산출하는 업(ākṣepakakarman)은 태아가
수정되는 순간에 命根(jīvitendriya)과 衆同分(nikāyasabhāga)을 산출하는 것으로 설명된다.
한편 경량부에서는 命根과 衆同分이 실체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하고 이 업에 의해 한
집합체(蘊)의 흐름이 일정한 시간동안 계속되게 하는 힘(āvedha)이 일어난다고 설명한다.
설일체유부의 아비달마적 체계화란 관점에서 보았을 때 수명을『품류족론』과『구사론』에서 ‘三界의 수명(āyu)’으로 정의되는 命根(jīvitendriya)을 지시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우며 앞에서 언급한『빼타꼬빠데사』(Peṭakopadesa)에서도 두 가지 열반의 맥락에서 命根(jīvitindriya)이란 용어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당시의 일반적인 경향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衆同分(nikāyasabhāga)의 경우는 여기에서도 보듯이 세 가지 다른 설명들을 통해 합리화 하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이러한 설명은 사실상 설일체유부에 국한된 것으로서 이들의 아비달마적 체계화가 어떻게 이루어 졌는가를 잘 보여주는 실례가 된다.
命根(jīvitindriya)은 원래 빨리 경전에서 남성기관(purisindriya) 여성기관(itthindriya)과 함께 언급되었는데, 이 셋 모두는 인도불교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22가지 지배기관(indriya)에 포함되어 나타난다. 초기 아함 전통에서 命根(jīvitendriya)의 특성과 역할은 명확하게 설명되어 있지 않지만 주로 죽음과 주어진 삶의 중단과 관련하여 종종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설일체유부의 초기 아비달마 논서인『법온족론』(Dharmaskandhapādaśāstra)에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데 여기에서 命根은 의식이 있는 존재가 유지되고 계속되고 지속되고 살아가고 작용하도록 하는 기관으로 해석되고 있다.
命根(jīvitendriya)을 수명(āyu)과 연결시키려는 시도는 설일체유부의 중기 아비달마 논서인『품류족론』에서 命根(jīvitendriya)을 ‘三界의 수명(āyu)’으로 정의하면서 처음 나타나고 있다. 비록『구사론』과 동일한 정의가 여기에서 사용되었지만, 후자에서와 같이 22가지 지배기관 중의 하나로 정의된 것이 아니라 14가지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 작용(cittaviprayuktasaṃskāra)들 중의 하나로서 언급되는 차이가 있다. 한편『대비바사론』에 오면 이 ‘三界의 수명(āyu)’이란 정의가 22가지 지배기관들에 대한 설명과 14가지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 작용(cittaviprayuktasaṃskāra)들에 대한 설명 모두에서 나타난다. 다시 말해서 『대비바사론』에 오면 命根(jīvitendriya)과 수명(āyu)이 완전히 통합되면서 命根(jīvitendriya)의 특성과 역할을 수명(āyu)의 특성과 역할로 설명하게 된다. 命根(jīvitendriya)의 특성과 역할에 대해서『대비바사론』은 다음의 두 가지 설명을 제시하고 있다.
먼저 命根은 나머지 21가지 지배기관(indriya)을 가지고 있다는 우리의 앎에 대해 지배적인 힘을 가지며 나머지 21가지 지배기관들이 중단되지 않도록 하는 것에 지배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설명되는데, 이 설명이 비바사사(Vaibhāṣikas)의 정론으로 언급된다. 아마도 이 설명은 앞에서 언급한 Mahāvedallasutta에 나타나는 마하고티히따(Mahākoṭṭhita)와 사리푸따(Sāriputta)의 대화에서 수명(āyu)이 다섯 감각기관(indriya)의 의지처가 된다는 것에 기초하여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 설명에서 命根은 衆同分(nikāyasabhāga)과 연결을 만드는 것과 衆同分을 돕고 보호하고 키우는 것과 衆同分이 중단되지 않도록 하는 것에 지배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설명된다. 이 두 번째 설명은 命根의 특성과 역할이 나머지 21가지 지배기관(indriya)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14가지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 작용(cittaviprayuktasaṃskāra)들 중의 하나인 衆同分(nikāyasabhāga)에 대한 것으로 한정되고 있다. 비록 『대비바사론』에서는 이 설명이 하나의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지만 『구사론』(Abhidharmakośabhāṣya)에서는 22가지 지배기관들을 설명하면서 命根을 이렇게 衆同分과 관련하여 이야기 하는 두 번째 설명이 채용되고 있다.
따라서『대비바사론』과『구사론』을 거치는 시기에 命根(jīvitendriya)의 역할에 대한 일련의 변화가 일어났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초기의 다른 21가지 지배기관들에 관련된 역할이 후에 설일체유부만의 독특한 14가지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 작용(cittaviprayuktasaṃskāra)에 관련된 역할로 변화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두 번째 설명에 따르면 衆同分(nikāyasabhāga)없이 命根(jīvitendriya) 만이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사실상 무용한 것이 되어 버리기 때문에 이 양자는 종종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비록 앞에서 인용한『대비바사론』의 수명(āyu)에 대한 주석에서 세 가지 다른 이유들이 제시되고 있지만 ‘upadhi가 남아있는 열반’에서 파괴되지 않고 남아있는 것에 命根(jīvitendriya) 이외에 衆同分(nikāyasabhāga)을 추가한 진짜 이유는 설일체유부의 아비달마적 체계화 과정에서 생긴 命根의 역할의 변화 때문일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추가된 衆同分(nikāyasabhāga)을 통해서 비바사사(Vaibhāṣikas)들은 두 가지 열반의 구분에 있어서 upadhi란 용어를 통해서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과 마지막 열반에 이르는 과정이 구분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집착 또는 번뇌와 같은 당시 일반적으로 통용되던 이 용어의 주관적인 의미를 통해 양자의 차이를 설명하지 못하는 문제점의 해결을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설일체유부의 아비달마 논서들에서는 衆同分(nikāyasabhāga)이란 용어가 선호되며 그 역할도 전적으로 새로운 생을 받는 과정과 관련되어 있으며 윤회하는 존재들의 특별한 재생의 상태를 결정하는 요소로서 설명 된다41). 비록 좀더 경량부의 입장에 가까울 것으로 추정되는『구사론』(Abhidharmakośabhāṣya)의 2장에서 同分(sabhāga)이란 용어를 사용하여 보편이나 동질성을 담보하는 추상적인 요소로서 이를 통해 어떤 요소들이 동일한 범주나 부류의 일원으로 인식되는 것으로 설명되지만 『구사론』의 4장에 나타나는 ‘하나의 업(karma)이 하나의 생을 산출하는가 여러 생들을 산출하는가?’에 대한 토의에서 衆同分(nikāyasabhāga)이란 용어가 사용되며 원래 설일체유부의 아비달마적 의미를 유지되고 있다.
이 질문에 대한 설일체유부의 공식적인 입장은 “하나[의 업은] 하나의 생을 산출한다.”(ekaṃ janmākṣipatyekam)인데『구사론』에서 이 생(janma)을 바로 衆同分(nikāyasabhāga)으로 주석하고 있다. 동일한 입장이 앞에서 인용한『대비바사론』의 수명(āyu)에 대한 주석의 세 번째 이유에서 “命根(jīvitendriya)과 衆同分(nikāyasabhāga) 모두는 새로운 생을 산출하는 업(ākṣepakakarman)의 결과이다.”라는 주석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다시 말해서 이렇게 추가된 衆同分(nikāyasabhāga)을 통해『대비바사론』에서 upadhi가 두 가지 열반의 맥락에서 지시하는 것을 ‘태어날 때 받은 몸’(janmakāya, 生身)으로 해석할 수 있게 되었고 이를 통해 양자의 차이점을 설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5. 결 어
이상으로 두 가지 열반의 맥락에서 upadhi란 용어에 대해 기존에 일반적으로 통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집착 등과 같은 주관적인 의미와는 전혀 다른 ‘태어날 때 받은 몸’(janmakāya, 生身)이란 해석이 설일체유부의 체계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서 어떻게 합리화 되었을까 하는 것을 ‘upadhi가 남아있는 열반’의 해석을 둘러싼 초기 인도불교의 교리적 주석적 문제점들과 그 해결책들을 통해서 『이티부타까』(Itivuttaka)로부터 설일체유부의 아비달마 논서인『발지론』과 그 주석서인 『대비바사론』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통해 교리 발전사적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이러한 새로운 해석이 가능하게 된 배경에는 14가지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 작용(cittaviprayuktasaṃskāra)을 중심으로 설일체유부의 아비달마 교학이 체계화 되면서 생긴 命根(jīvitendriya)의 역할 변화가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upadhi가 남아 있는 열반’에서도 파괴되지 않고 남아있는 것으로 기존의 命根(jīvitendriya)에 더하여 추가된 衆同分(nikāyasabhāga)을 통해서 두 가지 열반의 해석을 둘러싼 주석적인 문제점들을 upadhi란 용어의 의미에 ‘태어날 때 받은 몸’(janmakāya, 生身)을 부가하여 해결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비바사사(Vaibhāṣikas)들의 노력은 곧 경량부(Sautrātikas)의 거센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14가지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 작용(cittaviprayuktasaṃskāra) 모두의 실체성을 부정하는 경량부는 새로운 생을 산출하는 업(ākṣepakakarman)에 직접적으로 한 집합체(蘊)의 흐름이 일정한 시간동안 계속되게 하는 힘(āvedha)이 산출되어 새로운 생이 시작된다고 설명한다. 命根과 衆同分이 실체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하면서 비바사사와 대립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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