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 논문및 평론/교리 및 수행

ekayano margah(一趣道)의 해석에 관하여

실론섬 2015. 6. 25. 15:49

ekayano margah(一趣道)의 해석에 관하여

-분석과 비유를 중심으로-

이 영진/금강대학교 불교문화연구소 HK연구교수

 

국문요약

초기 불교가 연구된 이래로 국내뿐 아니라 서구의 학자들도 사념처를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유일한 길’로 인식해 왔었다. 이러한 인식의 배경에는 사념처를 ekāyano maggo (ekāyano mārgaḥ : 一趣道)로 정의한 디가 니까야 등에 나타난 ‘ekāyana 공식'이 있었다. 그렇지만 게틴[2001(초판

1992)]의 연구를 필두로 한 나티에르(2007), 쯔어푸(2008) 등의 연구를 통하여 “ekāyano maggo는 ‘유일한 길’이 아니라 ‘홀로 가는 길’, ‘하나로 가게 하는 혹은 결합한 길’, 그리고 ‘곧바로 가는 길’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에, 사념처만이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유일한 길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그들의 주장에는 붓다고사의 주석서를 기반으로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본 논문은 남전 아비달마 전통의 이러한 해석이『대비바사론』과『순정리론』 등의 북전 설일체유부의 전통에도 유효한지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다양한 문헌들에 나타난 비유를 통하여 ‘ekāyana 공식’과 결합하지 않은 ekāyano mārgaḥ의 본래 의미를 조사하여 이러한 용어의 의미를 심화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다음과 같은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첫째, 북전 아비달마 전통의『대비바사론』에는 붓다고사가 거부하였던 ‘유일한 길’이라는 해석의 가능성을 받아들였다. 다만『대비바사론』의 경우 현장이 ekāyano mārgaḥ (혹은 ekāyanamārgaḥ)를 번역할 때 사용한 일취도(一趣道)는 사념처가 아니라 성도(聖道: āryamārga)로 정의되고, 사념처를 포함한 37보리분법은 ‘열반을 향해 나가는 길’이라는 관점에서 ‘하나의 도’ 즉 유일한 길에 포함될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중현도『순정리론』에서 일취도를 ‘유일한 길’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 경우 일취도는 사념처의 자성인 혜(慧: prajñā)로서 ‘가장 뛰어나다’는 의미에서 ‘유일한’ 길이 된다.

 

둘째, ekāyano mārgaḥ의 해석은 ekāyana라는 복합어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부류는 ekāyana를 수사 한정복합어로 해석하는 것으로, ‘한 갈래 길’과 ‘하나의 길=유일한 길’의 의미를 지닌다. 다만 후자는 앞서 설명했던 바와 같이 ‘사념처만이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유일한 길이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수 없다. 둘째 부류는 ekāyana를 2격 한정복합어로 해석하는 것으로 ‘하나로 가게 하는 길’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특히 ‘ekāyana 공식’과 결합한 남전 아비달마의 경우, 이러한 해석은 ‘사념처가 다양한 수행법을 결합하여 열반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독특한 특징을 가능하게 하였다. 셋째 부류는 ekāyana를 2격 한정복합어로 해석하는 것으로 ‘홀로 가는 길’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동안 국내외 학자들이 언급하지 않았던 대승 논서 중 보리심과 관련하여 ekāyanamārgaḥ를 논의하고 있는 Abhisamayālaṅkāra[kārikāśāstra] vṛtti는 이러한 해석 중 첫 번째의 ‘한 갈래 길’을 지지하고, 벽지불과 관련하여 ekāyanamārgaḥ를 논의하고 있는 Āryākṣayamatinirdeśaṭīkā는 세 번째 부류 ‘홀로 가는 길’을 지지하고 있다는 점 또한 이 논문이 기여할 수 있는 바라고 생각한다.

 

I. 들어가며

 

근래 활발하게 논의된 ‘사띠(sati) 논쟁’에서 국내의 초기불교를 전공하는 학자들은 위빠사나를 우위에 두는 수행론 더 나아가 위빠사나야 말로 열반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1) 이러한 인식의 가장 큰 근거는 빨리 니까야들에서 사념처를 서술한 이후에 나오는 ‘ekāyana

공식(formula) 혹은 후렴구(refrain)’로 불리는 다음과 같은 구절 때문으로 보인다.

1) cf. Nattier(2007: 191): 정형적일 수도 있지만, 꽤 많은 수의 20세기 불교를 근대화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염처경의 권위를 − 위빠사나는 열반을 성취하기 위해 “오직 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하도록 고취한 것은 바로 이 반복구이다. (Atypical as it may be, however, 
   it was this very refrain that inspired a number of twentieth-century modernizers of 
   Buddhism to make the claim −based on the authority of the Satipaṭṭhāna-Sutta−the 
   vipassanā practice is the “one thing needed” for the attainment of nibbāna) Nattier
   (2007: p.191, n. 37)에 따르면, 이러한 점이 좀 더 강조된 Nyanaponika(1962:85)의 
   견해는 경전적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테라바다 불교를 연구하는 연구자의 그룹에서 
   권위를 획득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Nyanaponika(1962)가 1999년 한글로 번역되어 
   초기불교의 지침서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냐나포니카, ?불교선수행의 핵심, 
   송위지 옮김, 서울: 시공사, 1999), 국내 초기불교 학자들 또한 이러한 영향 아래서 자유
   로웠다고 말하기 힘들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ekāyano maggo는 중생들을 청정케 하기 위한, 슬픔과 비탄을 극복하기 위한, 고통과 근심을 사라지게 하기 위한, 바른 방식을 획득하기 위한,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길]로서 곧 사념처이다.

(Ekāyano ayaṃ bhikkhave maggo sattānaṃ visuddhiyā sokapariddavānaṃ samatikkamāya 

dukkhadomanassānaṃ atthaṅgamāya ñāyassa adhigamāya nibbānassa sacchikiriyāya, 

yad idaṃ cattāro satipaṭṭhānā.)

 

이러한 인용문의 ekāyano maggo를 ‘유일한 길’로 이해한다면, 사념처만이 열반에 이르는 유일한 길로서 이는 사념처로 대표되는 위빠사나 이외의 모든 불교 수행법의 효용을 부정하는 배타주의적 태도를 지니는 것이다. 이러한 배타 주의적 태도에 반발하여 김준호와 권오민은 이러한 용어를 - 필자가 이해한 바가 맞는다면, 열반에 이르는 여러 길 가운데-‘하나의 길’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필자가 이러한 용어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앞서의 연구자들과 같이 위빠사나의 위상에 관한 수행론의 문제로부터 출발한 것은 아니다. Abhisamayālaṅkāra[kārikāśāstra]vṛtti라는 문헌을 연구하다 성자 비묵띠세나(ĀryaVimuktiṣeṇa)가 ekāyanamārga라는 복합어를 ‘유일한 길’도 아니고 ‘여러 길 가운데 하나의 길’도 아니게 주석하는 것을 보고 나서, 비로서『염처경』에 나타난 ekāyano maggo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관심 하에 국내가 아닌 해외의 학자들, 특히 서구의 학자들은 이러한 용어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았다. 1990년대 까지 대부분의 서구 학자들은 ‘ekāyana 공식 혹은 후렴구’에 나타난 ekāyano maggo를 ‘유일한 길 (the only or sole way)’로 해석하였다. 그렇지만 게틴<Gethin(2001)>은 붓다고사의『염처경』에 대한 주석을 살펴본 후 ekāyano maggo를 유일한 길로 해석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ekāyana가 기술되어 있는 니까야와 불교 이외의 문헌들을 조사하여, ekāyana를 ‘홀로 가는(going alone)’과 ‘하나로 가는(going to one)’으로 해석한다. 그에 따르면, ‘ekāyana 공식’에서 의도하는 것은 사념처가 ‘최종 목적까지 곧바로 그리고 직접 이끄는 길(a path that leads straight and directly all the way to the final goal)’임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다.

 

나티에르<Nattier(2007)>는 아함경에 나타난 一乘道의 용례를 중심으로 조사하였다. 그녀는 해리슨이 편집한『증일아함경』 사본의 단편을 통해 一乘道가 ekayāno mārgaḥ의 번역어가 아닌 ekāyano mārgaḥ의 번역어임을 확증하였다. 그리고 아함부에 나타난 일승도의 용례들에 대한 조사와 게틴의 연구에 기반하여, ekāyano mārgaḥ를 ‘통일된(unified) 혹은 통합된 길(integrated way)’과 ‘직행의, 목표로 곧장 향하는(direct, going straight to the goal) 길’의 두 측면으로 모두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쯔어푸<Tse-fu(2008)> 역시 나티에르와 마찬가지로 게틴의 연구에 기반 하여 ekāyano maggo를 ‘포괄적인 혹은 모두를 포함하는 길

(a comprehensive or all inclusive path)’로 번역하며, 사념처를 다양한 수행법의 흐름들이 만나는 길로 이해한다.

 

이와 같이 서구에서는 게틴 이후로 ekāyano maggo에 대해 유일한 길이라는 배타적인 해석을 배제하고 좀 더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이러한 연구들에서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모두 남전 아비달마의 해석에 집중하였던 것이다. 실제로 북전 아비달마전통에 속한『대비바사론』에서 ekāyano mārgaḥ의 번역어인 ‘一趣道’의 해석에 대해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고 있으며, 『순정리론』에서 중현이 짧게나마 일취도에 대해 주석을 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앞서 언급했던 Abhisamayālaṅkāra[kārikāśāstra]vṛtti와 Āryākṣayamatinirdeśaṭīkā의 대승의 논서 들에서도 또한 ekāyanamārga : gcig pu bgrod pa'i lam에 관한 짧은 주석이 존재한다. 지금부터 필자는 기존 연구자들이 사용한 자료에 북전 아비달마와 대승 논서에 나타난 주석과 비유 등을 더하고자 한다. 이를 통하여 ekāyano mārgaḥ에 대한 해석의 논의를 좀 더 풍부하게 할 수 있고 기존 연구자들에 의해 간과된 점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감에서 본 논문을 출발한다.

 

II. 분석: 남 ・북전 아비달마를 중심으로

 

1. 남전 아비달마: 붓다고사의 주석을 중심으로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게틴을 비롯한 연구자들은 붓다고사의 주석서에 기반하여 ekāyano maggo를 연구하였다. 실제로 붓다고사의 주석서를 제외하고 남전의 주석문헌에서 이러한 용어를 해석하는 예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그렇지만 Mahāniddesa와 Cullaniddesa에 공통적으로 기술된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인용하는 것은 이후의 논의를 위하여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세존은 ekāyanamagga를 가셨기 때문에 eka이다’라는 것은 무엇인가?

ekāyanamagga는 사념처, 사정단, 사신족, 오근, 오력, 칠각지, 성스러운 팔정도이다.

 

태어남의 소멸과 끝을 보고 [모든 중생들의] 행복을 바라는 그 [세존]은 ekāyana라는 길을 아신다.

 

[붓다]들은 과거에도 이 길로써 폭류를 건너셨고 앞으로도 건널 것이고 [현재도] 건너고 있다.

이와 같이 ‘세존께서는 ekāyanamagga를 가셨기 때문에 eka이다.'

 

이러한 인용문은 ekāyano maggo가 어떻게 해석될 수 있는지에 대한 뚜렷한 전거가 될 수 없지만 다음과 같은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첫째, ekāyano maggo가 ekāyanamagga라는 복합어로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둘째는 디가 니까야, 맛지마 니까야 등에서 4념처에 적용되었던 ‘ekāyana 공식 혹은 후렴구’가 소부 니까야에 속한 양 문헌에서는 37보리분법 모두에 적용된다는 사실이다.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사실은 Cullaniddesa에서 게송을 제외한 동일한 구문이 벽지불(paccekabuddha)에 적용되었다는 점이다.

 

그럼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붓다고사의 주석으로 들어가 보자. ekāyano magga를 사념처에만 한정한 디가 니까야와 맛지마 니까야에 관한 주석서에서 붓다고사는 이 용어에 대해 6종의 해석을 제시하지만, 이중 마지막 6번째 해석의 가능성을 부정한다. 붓다고사가 찬성한 5종의 해석을 하나하나 나누어 살펴보자.

 

(A) 그 중에서 ekāyana는 ekamagga이다 왜냐하면 magga는 다음과 같이 다양한 이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magga, pantha, patha, pajja, añjasa, vaṭuma, ayana, nāvā, uttarasetū, kulla, bhisi, saṅkamo. “비구들이여, 이러한 길은 ekāyana이다”는 이 [구절]에 대해서는 ‘비구들이여, 이러한 하나의 길은 양 갈래의 길로 작용하는 길이 아니다’ 라는 식으로 그 의미를 이해해야만 한다.

 

붓다고사는 첫 번째 해석에서 ayana를 ‘길(magga)’의 여러 가지 동의어중의 하나로 파악한다. 그리고 ekāyana라는 복합어를 ‘하나의 길’이라는 수사 한정 복합어(digu samāsā)로 본다. 그렇지만 이러한 복합어를 ‘유일한 길’로 해석할 가능성을 막고자, 양 갈래 길로 작용하는 것

(dvedhāpathabhūta)이 아니라고 부연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해석에서 ekāyano maggo는 유일한 길도 아니고 여러 길 가운데 하나도 아닌, 갈래가 없이 목적지(중생들의 청정... 열반의 실현)로 곧장 향하는 ‘한 갈래길(a direct path)로 이루어진 길’이다.

 

(B) 혹은 홀로 가야만 하기 때문에 ekāyana이다. ‘홀로’란 ‘무리와 접촉하는 것을 떠나서 은둔하고 [욕망의 대상으로부터] 떠난 마음으로’이다. ‘가야만 한다'는 것은 ‘수행해야만 (혹은 걸어야만) 한다’이다. 혹은 [사람]들이 이러한 [마음?](etena)]을 지니기 때문에 ayana이다 : 윤회로부터 열반으로 간다는 의미이다.

 

두 번째 해석은 ekāyana를 3격 한정복합어(tatīyā-tappurisa)로 해석하는 것이다. 여기서 ekena는 무리를 떠나 홀로 거주하며 욕망의 대상으로부터 떠나려고 하는 사문(samaṇa)을 의미하며, ekāyano maggo는이러한 사문이 마땅히 가야할 길이다. 붓다고사는 이러한 엄격한 해석에 여지를 주고자 실제로 무리를 떠나 홀로 거주하며 욕망의 대상으로부터 마음을 염리한 자만이 아니라 이러한 마음을 지니고 가는 것 또한 ekāyano maggo로 보고 있다. 그리고 무리로부터 떨어지거나 그렇지 않거나 수행자들이 이 길을 따라 윤회로부터 열반으로 나아간다고 해석하고 있다.

 

(C) ekāyana는 ‘한 사람의 길이다’는 6격 한정복합어이다. ‘한 사람의’는 ‘가장 뛰어난 자의’이고, 모든 존재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자는 세존이기 때문에 ‘세존의’ 라고 말해진다. 비록 다른 사람들 역시 그 [길로] 가지만, 이와 같다고 할지라도 이 길은 다름 아닌 세존의 길이다. 왜냐하면 그 [세존]께서 [이 길을] 만드셨기 때문이다. [중부 니까야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바라문이여, 실로 세존은 이전에 없었던 길을 새로 만드신 분이다” 등이라고.

 

세 번째 해석은 ekāyana를 eka의 6격(속격)인 ekassa와 ‘길’이라는 의미의 명사 ayana가 결합한 6격 한정복합어(Chaṭṭī-tappurisa)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eka를 가장 뛰어난(seṭṭha)의 의미로 받아들여 세존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해석은 사념처가 다른 아닌 세존이 발견하신 혹은 만드신 수행도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D) 혹은 ayati이기 때문에 ayana로서 ‘간다’, ‘앞으로 나아간다’는 뜻이다. 한곳에서 나아가기 때문에 ekāyana이다 [즉 7격 한정복합어이다]. 다름 아닌 이러한 [붓다의] 법과 율에서 앞으로 나아가지 다른 곳에서는 [나아가지] 못한다고 말해진 것이다. [장부 니까야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실로 수바다(Subhadda)여, 이러한 [붓다의] 법과 율에서 여덟 지분으로 구성된 길(팔정도)을 획득한다”라고. 이러한 것은 [사념처가 아닌 팔정도라는 점에서] 가르침의 차이가 있지만, [한 곳에서 나아간다는] 의미로부터 보자면 동일하다.

 

이러한 7격 한정 복합어(Sattamī-tappurisa)에서 ayana는 처음으로 간다’는 행위명사(Active noun)로서 해석되고 있다. 또한 이 경우 eka는 ‘유일한’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지만, 유일한 길이 아닌 ‘[붓다의 법과 율이라는] 제한된 곳’을 의미한다.

 

(E) 또한 한 [장소]로 가기 때문에 ekāyana이다(즉 2격 한정복합어이다). ‘과거에는 다양한 방식(문)을 지닌 수습의 방식에 의해 시작한 사람일지라도 미래에는 한곳 즉 열반으로만 간다’고 말해진 것이다. 이것은 브라흐마 사함빠띠가 다음과 같이 [노래한 것과] 같다: 

 

태어남의 소멸과 끝을 보고 [모든 중생들의] 행복을 바라는 

그 [세존]은 ekāyana의 길을 아신다.

[붓다]들은 과거에도 이 길로서 폭류를 건너셨고 

앞으로도 건널 것이고 [현재도] 건너고 있다.

 

붓다고사는 5번째 해석에서 ekāyana를 ‘eka의 2격(목적격)인 ekaṃ과 ayati(가다)의 의미를 지닌 행위명사 ayana가 결합한 형태로 파악하고 있다. 또한 부연설명에 따르자면, 사념처는 ‘과거에 다양한 수행을 하고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미래에 열반이라는 한곳으로 가게 하는 길’이 된다. 이는 쯔어푸가 ekāyano maggo의 번역어로 제시한 ‘포괄적인 혹은 모두를 포함하는 길’과 일치한다. 또한 게틴과 나티에르의 두 가지의 번역 중 각각 ‘하나로 가는(going to one)’과 ‘통일된(unified) 혹은 통합된 길(integrated way)’에 해당한다. 이러한 해석은 사념처를 우위에 두고 다른 수행방법을 하위로 포섭하려고 하는 혹은 사념처의 범주에 다른 수행법을 포함하려고 하는 포괄주의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주석을 통해서 살펴볼 때, 붓다고사는 ekāyano maggo가 수식하는 대상을 4념처만으로 한정하며 ‘4념처만이 유일한 길이다’는 배타적인 태도를 거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선행 연구자들이 어떠한 해석을 선호하는지 또한 알 수 있다. 게틴의 경우에는 (B) ‘홀로 가야만 하는 길’과 (E) ‘하나로 모이게 하는 길’을 선호하며, 나티에르는 (A) ‘한 갈래 길’과 (E)를, 쯔어푸는 (E)를 선호하고 있다.

 

2. 북전 아비달마

빨리어 ekāyano maggo에 해당하는 북전 아비달마의 용어는 산스끄리뜨 ekāyano mārgaḥ로서, 현장은『대비바사론』과『순정리론』에서 이를 일취도(一趣道)로 번역하고 있다. 이 두 논서 이외에 야소미트라의『구사론』에 대한 주석 Abhidharmakośavykhyā (AKVy)에서 ekāyano mārgaḥ가 나타나 있다. 이러한 세 북전 논서들에서 ekāyano mārgaḥ는 모두 ‘ekāyana 공식 혹은 후렴구’와 연관하여 논의된다. 

 

먼저『대비바사론』에 나타난 일취도의 논의를 살펴보자.

 

우선『대비바사론』에서 까쉬미르 유부 논사들은 일취도를 ‘ekāyana 공식 혹은 후렴구’의 맥락에서 논의하고 있음을 밝힌다.

 

수트라(契經: sūtra)에서 [세존은] 다음과 같이 설하신다: “일취도가 있어서 능히 유정으로 하여금 

청정하게 하니, 말하자면 4념주(=념처)이다. … ”라고.(如契經説: “有一趣道能令有情清淨 謂四念住” 乃至廣説)

 

한 가지 의문스러운 것은 빨리어 ‘ekāyana 공식 혹은 후렴구’에 기술된 “슬픔과 비탄을 극복하기 위한 …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이라는 기술이 생략되었다는 사실이다.38) 실제로 아함경들 ―까쉬미르 유부 논사들이 인용하였으리라 추측되는―에 나타난 ‘ekāyana 공식 혹은 후렴구’의 기술은 

ekāyano mārgaḥ가 4념처인지 아닌지에 이견들이 있지만 이러한 기술이 생략되지는 않는다.

 

『대비바사론』에서는 이와 같이 수트라를 인용한 후 “무엇 때문에 일취도라 이름 하는가”에 대한 문답을 주고받는다. 이 중 첫 번째 문답을 요약하여 정리하자면,

 

질문: 일취도는 능히 ① 하나의 계(一界: ekadhātu) ② 하나의 취(一趣:ekagati) ③ 하나의 태어남(一生: ekajāti)를 초월하기(atikramaṇa) 때문에, 혹은 ④ 하나의 진리(一諦: ekasatya)를 통달하기

(prativedha) 때문에, 혹은 ⑤하나의 구경(ekaniṣṭhā)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혹은 ⑥ 단지 하나의 도만이 존재하기 때문에(ekamārga[mātra]) ‘일취도’라고 이름 하는가?

답: 계에는 3계가, 취에는 5취가, 태어남에는 4태어남이, 진리에는 4진리가, 구경에는 두 종류 즉 

事究竟(arthasiddhiḥ)과 功用究竟(sāmarthyasiddhiḥ)가, 도에는 隨信行道(śraddhānusārimārgaḥ)로부터 不時解脱道(asamayavimuktamārgaḥ)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도가 있기 때문에 앞서 네가 질문한 해석들은 모두 과오(doṣa)가 있다.'

 

이러한 문답 후에 까쉬미르 유부논사들은 앞서 설명한 연유<(F)(G)>와 그 밖의 다른 연유로 말미암아(H) ‘일취도’라고 명명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편의에 따라 나누어 인용하자면, 

 

(F) 즉 앞서 설명한 [6가지] 연유와 아울러 그 밖의 다른 연유로 말미암아 ‘일취도’라고 말하게 된 것이다.

 

‘앞서 설명한 연유’라고 함은 [다음과 같다] : ① [앞서 네가 질문한] “하나의 계를 능히 뛰어넘을 수 있기 때문에 일취도라고 이름 한다”라면, [이때 하나의 계는] 무색계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무색]계를 초월하면 다시는 삼계에서 태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② 또한 “하나의 취를 능히 뛰어 넘을 수 있기 때문에 일취도라 이름 한다”라면, [이때 하나의 취는] 천취(devagati)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천]취를 초월하면 다시는 오취로 가지 않기 때문이다. ③ 또한 “하나의 태어남을 능히 뛰어 넘을 수 있기 때문에 일취도라 이름 한다”라면, [이때 이것은] 화생(aupapādaka)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화]생을 초월하면 다시는 네 가지 태어남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④ 또한, “하나의 진리를 능히 통달하기 때문에 일취도라고 이름 한다”라면, [이때 하나의 진리] 도제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진리는 시작이 없는 이래로 증득하지 못했던 것이기 때문에 (anādikālikam aprāptam?) 혹은 과거에 통달하지 못했던 것(apratividdhapūrvam/aprāptapūrvam)이기 때문이다. ⑤ 또한 “하나의 구경으로 능히 나아가기 때문에 일취도라고 이름 한다”라면, [이때 하나의 구경은] 事究竟(arthasiddhi)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공용 구경을 닦는 다면, 사구경을 얻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F)의 다섯 해석은 그 각각의 내용은 다르지만 ekāyana를 ekaṃ과 ayati (혹은 ayate)가 결합한 2격 복합어로 보고 있는 것이다. 앞서 인용한 수트라에서 일취도가 사념처를 지칭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사념처는 ‘하나의 장소를 뛰어넘게 하는42) 길(①②③)’이고 ‘하나의 진리(도제)를 통달하게 하는 길(④)’이고 ‘하나의 구경(⑤)으로 나아가게 하는 길’이 될 것이다. 이러한 복합어의 분석 형식은 붓다고사의 주석 중 (E)와 동일하지만, 붓다고사가 주석한 ‘서로 다른 것들을 한 장소에 모이게 하는 길 혹은 서로 다른 것들을 통합한 길’의 의미는 보이지 않는다.

 

G) ⑥ 또한 “다만 하나의 도가 존재하기 때문에 ‘일취도’라고 말한 것이라면, [이때 하나의 도는] 성도(聖道)가 될 것이다.

 

문: [그대는] 수신행의 도로부터 불시해탈의 도에 이르기까지 이와 같이 다양한 도가 있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답: 일체의 [도]들은 모두 고통의 소멸로 나아가는 길(duḥkhanirodhagāminīpratipat)43)이기 때문에 ‘하나의 도’라고 이름 한다. 고통의 소멸로 나아가는 길과 동일하게 유의 소멸・세간적인 것의 소멸 ・생사의 소멸 ・윤회의 소멸 ・생로병사의 소멸로 나아가는 길들 또한 이와 같이 [‘하나의 도’라고] 설명한다. 이상이 바로 앞서 설한 [6가지] 연유로 말미암아 ‘일취도’라 이름 하는 것이다.

 

(G)에서는 ekāyana를 ekam ayanam으로 분석할 수 있는 수사 한정복합어(dvigu)로 풀고 있다. 이는 붓다고사의 (A)의 복합어 분석방식과 동일하지만, 붓다고사가 거부한 ‘유일한 길’로 해석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그렇지만 이것이 ‘사념처만이 열반을 획득하기 위한 유일한 길이다’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여기서 ‘유일한 길’로 이해할 수 있는 일취도는 사념처가 아니라 설일체유부의 수행도에서 순해탈분과 순결택분 이후의 무루도인 성도(聖道)로 정의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대비바사론』에서 ‘ekāyana 공식’은 사념처뿐만이 아니라 37보리분법 모두에 적용된다.2)

2)『대비바사론』 943c15-20. 질문: [37보리분법에서 4념주를 제한 나머지][4]정단, 
   [4]신족, [5]근, [5]력, [7]각지, [8] 도지와 같은 것들은 일취도가 아닌가? 만약 
   [일취도라]한다면 무엇 때문에 [앞서 인용한] 그러한 경전에서는 다만 [4]념주 
   만을 일취도라 이름하고 나머지 [37보리 분법]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는가? 
   만약 [일취도가 아니라고 한다면] 무엇 때문에 오직 [4]념주만이 일취도이고 
   나머지는 아닌가?
   답: 마땅히 이러한 것들 역시 일취도라고 말해야 한다.
   질문: 만일 그와 같다면, 무엇 때문에 [앞서 인용한] 그 경전에서는 설하지 않았는가?
   답: 이와 같이 마땅히 설해야 하지만 설하지 않은 것은 [특정한] 다른 뜻을 가지고 있다고 
   (arthāntara[viśeṣa]) 알아야 한다.)

 

이러한 점을 미루어볼 때, 일취도는 ‘유일한 길’로 이해할 수 있지만, 이 ‘유일한 길’을 사념처와 동일시 할 수는 없다. (일취도=유일한 길=성도≠사념처).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난점이 남는다 : 독립적인 수행법으로 작용하는 사념처를 포함한 다양한 수행도들의 집합인 37보리분법이 어떻게 유일한 길이 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까쉬미르 유부 논사들의 설명은 ‘유일한 길과 수신행의 도 등의 다양한 수행도들은 서로 모순된 주장이 아니냐’ 반론에 대한 답변에 있다. 즉 ‘수신행도 등의 모든 수행도들은 고통의 소멸, 유의 소멸 등의 열반으로 나아가는 길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하나의 도라고 하더라도 이치에 벗어나지 않는다’고 답변한다.

 

이상의 인용(G)를 통해서 보자면, ‘일취도(ekāyano mārgaḥ)’에서 일취(ekāyana)는 수사한정복합어인 ‘하나 즉 유일한 길’로 해석할 수 있으며 이는 열반을 향해 나아가는 길이라는 관점에서 4념처 뿐만이 아니라 37보리분법 모두를 포함한다.

 

『대비바사론』에는 ekāyana를 수사 한정복합어로 풀 경우 ‘유일한 길’ 이외의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설명이 있다.

 

(H) 혹은 ‘그 밖의 다른 연유’라고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다른 길이 없기(無異趣) 때문에, 되돌아오지 않기(不退還) 때문에, 물러나지 않는 해탈에 도달하기 때문에, 다섯 가지 취를 등지고 하나의 취로 나아가기 때문에 [일취도라고 이름한다. 이는] 마치 ‘열반은 아라한의 취이다’라고 설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뜻으로 말미암아 일취도라고 이름 한다.

 

인용에서 ekāyana의 뜻을 가장 잘 설명해 주는 것은 無異趣와 不退還이라고 생각한다. 전자는 현장이 산스끄리뜨어 agatika를 번역할 때 사용한 용어로서 ‘다른 길(course)이 없는’을 의미한다. 이는 ‘되돌아오지 않는’을 의미하는 不退還과 더불어 ekāyana가 ‘일단 이 길에 들어서면 목적지에 도달할 수밖에 없는 直道(a direct path)’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말해준다. 특히 이러한 점은 열반이 아라한의 취라는 비유를 통해 더욱 명백해진다. 일단 모든 번뇌가 소멸하여 해야 할 일을 다 마친 아라한에게 남은 목적지는 열반이외의 다른 곳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H)의 이러한 해석은 붓다고사의 (A)의 해석과 동일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H)의 無異趣는 붓다고사가 (A)에서 “ekāyana’를 한 갈래 길(a directpath)로 이해해야만 한다”고 주석할 때 사용한 na dvedhāpathabhūto 즉 ‘양 갈래 길로 작용하는 것이 아닌’과 동일한 의미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대비바사론』에 나타난 ekāyano mārgaḥ의 어의분석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까쉬미르 유부논사들은 ekāyana를 2격 한정 복합어와 수사한정 복합어로 분석하여 각각 ‘하나로 나아가는 (하나를 초월하는/통달하는) 길’<(F)>과 ‘하나의 길’<(G)와 (H)>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이러한 복합어 분석방식은 각각 붓다고사의 주석 (E)와 (A)와 동일하다. 그렇지만 (A)와 동일한 의미에서 사용하고 있는 (H)를 제외하고는, (F)에서는 (E)와는 달리 ‘하나로 모이게 하는 길’이라는 의미가 없으며, (G)에서는 붓다고사가 (A)에서 피하고자 하였던 ‘유일한 길’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해석의 경우에 붓다고사가 ekāyano mārgaḥ를 사념처의 범주에 한정하는 반면, 『대비바사론』의 까쉬미르 유부논사들은 이를 37보리분법 전체에 적용하는 점에서 커다란 차이점이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이제 까쉬미르 유부의 정통을 이은 중현의『순정리론』에 눈을 돌려보자.『순정리론』에는 다음과 같은 ekāyano mārgaḥ에 대한 해석이 있다.

 

(J) 이러한 4념주에는 각기 세 종류가 있으니, 자성(自性)과 상잡(相雜)과 소연(所緣)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자성념주(自性念住)는 혜(慧)를 본질로 하니, 계경에서 [그것을] 설하여 ‘일취도(一趣道)’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① ‘일’이란 ‘홀로[獨]’의 뜻이다. ② 즉 싸움에서 승리를 추구하는 자는 이에 따라 “이것은 번뇌라는 원적(怨敵)을 해치는 것이다”고 주장하고, 이에 근거하여 능히 원적(圓寂,열반)으로 나아가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취도’라는 명칭으로 설정하였으며, ③ 오로지 이것만이 독존(獨尊)하는 것이기에 ‘일취도’라고 이름 하였다. 즉 여기서 ‘이것’은 바로 ‘혜’이니, 번뇌를 끊고 열반으로 나아가는 것 중에서 ‘혜’가 가장 뛰어난 것이기 때문으로, 계경에서 “자매여, 마땅히 알라. 모든 성 제자들은 지혜의 검(劍)을 빼들고 능히 일체의 결(結)과 박(縛)과 수면(隨眠)을 끊고서 바로 열반으로 나아가니, 걸림이 없기 때문이다.”고 설한 바와 같다.

 

이러한 인용에서 일취도를 설한 계경(sūtra)은 『대비바사론』에서 인용한 것과 동일한 것으로 보여 지기 때문에, 중현 역시 일취도를 ‘ekāyana 공식’의 맥락에서 논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대비바사론?과는 달리 일취도를 37보리분법 모두에 적용하기 보다는 사념처, 보다 정확하게는 자성념주의 본질(svabhāva)인 혜(慧: prajñā)와 관련하여 논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상세히 논의해 보면, 중현은 일취도(ekāyanamārgaḥ)에서 ① ‘一(eka)’을 獨으로 풀고 있다. 그리고 ② ‘취도(ayanamārga)’를 혜(prajñā)라고 이해하고 있으며, 그 이유로 ‘[번뇌와의] 싸움에서 승리를 추구 하는 자가 ‘혜(prajñā)’에 근거하여 원적으로 나아가려 하기 때문에(能趣圓寂)’라고 설명한다. 마지막으로 ③ ‘일취도(ekāyanamārgaḥ)’를 오로지 혜(prajñā)만이 독존(獨尊)하는 것으로 풀고 있으며, 그 이유로 번뇌를 끊고 열반으로 나아가는 것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最勝)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와 같이 중현의 해석에서 중심의 추는 ‘혜(prajñā)’이다.

 

중현의 이러한 설명에는 일취도의 ‘일’에 대한 두 가지 어의 해석(①과③)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첫 번째 해석(①과 ②)에서 중현은 eka를 獨 즉 kevalam으로3) 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혜로 정의된 ayanamārga(취도)의 ayana를 ‘가다(ayati)’의 뜻을 지닌 행위 명사로 열반(nirvāṇa)이라는 2격(목적격)을 취하는 것으로 보고 있으며, 이를 ‘반열반(원적)으로 가기 때문에(parinirvāṇagamanāt)’로 부연 설명해 주고 있다. 따라서 혜는 ‘열반으로 가게 하는 길’이 된다. 문제는 獨(kevalam)을 어떻게 이해해야만 하는가이다. 이를 only라는 의미를 지닌 ‘홀로’라고 번역한다면, 혜인 일취도는 ‘홀로 열반으로 나아가는 길’이 되며 (G)의 ‘但有一道’를 연상시켜 ‘유일한 길’이 될 것이다.4) 그렇지만 중현에게 있어 ‘유일한 길’은 단순한 ‘유일한 (only)’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중현은 ③에서 獨으로 풀이한 一을 ‘오직 이것만이 독존(唯此獨尊)한다’고 풀이하며 이를 ‘가장 뛰어난(最勝)’으로 부연 설명한다. 여기서 독존을 śreṣṭha의 번역어로 최승을 agra의 번역어로 본다면, ③은 ‘오직 혜(prajñā)만이 번뇌를 제거하고 열반을 향해 가는 것 중에서 가장 뛰어난 길’5)이 된다. 이와 같이, 중현은 ‘유일한 길(the only way)’을 ‘유일하게 최상인 길(the only best way)’로 풀이하고 있다.

3) 다른 가능성은 獨(kevalam)을 ‘오로지(exclusively)’의 의미로 본다면 ekāyanamārgaḥ는 
   ‘오로지 열반으로[만] 나아가게 하는 길’이 될 것이다. 그 강조점이 혜에 있다는 차이점이 
   있지만, 이러한 해석은 ?대비바사론?의 (H) 그리고 붓다고사의 (A)와 동일할 것이다.
4) 혹은 역으로 독존을 agra(혹은 kevalam agratā?)로 최승을 śreṣṭha의 번역어로 볼 수도 
   있다. 필자는 구사론 색인이나 유가론 색인을 통해서 현장이 번역한 ‘독존’의 산스끄리뜨 
   용어를 찾지 못했다. 다만 붓다가 태어난 처음으로 읊었다고 전해지는 게송 중 ‘천상천하
   유아독존’에 해당하는 빨리어가 “aggo 'ham asmi lokassa, jeṭṭho 'ham asmi lokassa, 
   seṭṭho 'hamasmi lokassa”(MN III 123)임에 착안하여 독존이 agga (Skt. agra) 혹은 
   seṭṭha (Skt. śreṣṭha)의 번역어가 아닐까 추리하였다. 이 두 단어는 ‘가장 뛰어난’이라는 
   의미를 공유하고 있으며, 현장은 구사론에서 이 둘 모두를 最勝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cf.「아비달마구사론 색인」 I p.4 (agra를 尊으로도 번역함), 359) 이 두 가지 용어 중 
   śreṣṭha로 결정한 것은 붓다고사의 (C)에서 eka를 seṭṭha로 풀고 있는 주석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5) 이중 ‘열반으로 가게 하는 가장 뛰어난 길’이라는 해석은 붓다고사의 주석이나 『대비바
   사론』에서 나타나지 않는 독특한 해석으로 보인다. 이러한 해석은 ?대비바사론?에서 
   까쉬미르 유부 논사들이 사실상 설명하기를 거부한 “무엇 때문에 계경에서 37보리분법 
   중에서 4념처만을 일취도라고 설하는가?”에 대한 중현의 대답으로 보여 진다. 그리고 
   중현의 이러한 설명은 계경에서 사념처만을 일취도라고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다른 부
   파의 이설 들 중 마지막 다섯번째의 견해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을 수 있다. <다
   른 사람들은 말한다: “[4]념주는 마치 시각 능력을 지니고 있는 자와 같이 나머지 시각 
   능력을 상실한 자들인 보리분법들을 능히 이끌어 열반이라는 궁전으로 가지만 잘못 감
   이 없다. 마치 눈 밝은이가 맹인들을 이끌어 바른 길을 따라가도록 하고 길이 아닌 곳으
   로 가지 않게 하는 것처럼 [4]념주도 이와 같다. 이 때문에 [앞서 인용한] 경전에서는 
   다만 [4]념주 만을 일취도라고 설하고 나머지 [보리분법들을 일취도라고] 설명하지 
   않는다. : 有説. 念住如有目者能將導所餘如盲菩提分法趣 涅槃宮而無異趣. 如明眼者引
   諸盲人令隨正路不行非道. 念住亦爾. 是故. 彼經唯説念住名 一趣道 而不説餘.>?대비
   바사론 pp.943c26-944a01.)

 

마지막으로 비록 북전아비달마의 문헌은 아니지만 대승의 주석 문헌인 Āryākṣayamatinirdeśaṭīkā에는 ekāyanamārgaḥ (gcig pu bgrod pa'i lam)에 대한 다음과 같은 설명이 보여진다.

 

(K) [세존께서 Akṣyamatinirdeśa(無盡意經)에서] 말씀하신다: “대덕(Bhadanta) Śāradvatīputra여! 게다가 보살들은 ekāyanamārga (gcig pu bgrod pa'i lam)를 마르[게 하]지 않는다”라고.

이것에 의해서 ‘홀로 깨달은 자(pratyekabuddha)’라는 요약된 의미가 가르쳐 진다. ekāyana란 다른 사람들에 의지하지 않고 그 스스로가 위가 없는 깨달음을 증득하는 것이다 … 

 

이 인용에서 ekāyanamārga는 ‘ekāyana 공식’과 연관되어 나타나지 않는다. 여기서 ekāyanamārgaḥ의 eka는 다른 사람들[의 가르침]에 의지하지 않고(gzhan la mi ltos par : aparapratyayena) 즉 ‘홀로’로, ayana는 ‘위가 없는 깨달음(bla na med pa'i byang chub: anuttarabodhim)을 증득하는 것(thob par byed pa : adhigacchati, upalabhate)’로 주석된다. 따라서 ekāyanamārgaḥ는 ‘다른 사람에 의지하지 않고 홀로 위가 없는 붓다의 깨달음을 증득하게 하는 길’을 의미한다. 또한 이러한 해석은 앞서 살펴보았던 Cullanidessa와 동일하게 ekāyanamārga를 벽지불(paccekabuddha)과 연관시키고 있으며, 붓다고사의 주석 (B)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III. 비유

 

앞서 살펴본 어의를 분석하는 것만이 ‘ekāyano mārgaḥ’가 어떠한 의미인가’를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니까야와 아함의 초기 경전, 그리고 반야경의 주석문헌인 Abhisamayālaṅkāra[kārikāśātra]vṛtti 등에는 ‘ekāyano mārgaḥ (혹은 복합어로서 ekāyanamārga)’의 의미를 추론할 수 있는, 때때로 좀 더 분명하게 밝힐 수 있는 비유들이 나온다. 이러한 불교 문헌들뿐만 아니라 ―이미 게틴의 연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 우파니샤드와 서사시에도 이 용어와 관련한 구문들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비유들은 앞서 살펴보았던 붓다고사의 주석과 설일체유부의 주석서들(즉 『대비바사론』과 『순정리론』)이 ‘ekāyano mārgaḥ (혹은 ekāyanamārgaḥ)’를 ‘ekāyana 공식’의 맥락에서 논의한 것과는 달리, 그 용어 자체의 일상적인 의미를 다루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자료들을 사용하여 용어의 뜻을 분명히 파악한다면, ‘ekāyana 공식’의 맥락에서 논의된‘ekāyano mārgaḥ’의 의미를 좀 더 명확히 변별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필자는 앞서 언급한 자료들을 크게 바다의 비유 ・강의 흐름의 비유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1. 바다의 비유

가장 먼저 살펴볼 비유는 우파니샤드에 나타난 바다의 비유로서, 이는 사념처 ekāyano maggo로 한정하는 붓다고사의 주석 중 (E)와 관련이 깊다. 상세히 설명하자면, (E) “한 [장소]로 가기 때문에 ekāyana이다”에서는 붓다고사의 부연 설명58)에 의해 사념처가 다음과 같은 이중의 역할을 하게 된다 : ① ‘사념처 자체가 하나의 장소가 되어 다양한 수행법들을 포함 혹은 결합하는 것’과 ② ‘사념처가 수행자로 하여금 열반이라는 하나의 장소로 가게 하는 것’. 이러한 두 의미 중 나티에르와 쯔어푸는 사념처의 ①의 역할에 좀 더 초점을 맞추어 각각 ‘통일된(unified) 혹은 통합된 길

(integrated way)’과 ‘포괄적인 혹은 모두를 포함하는 길(acomprehensive or all inclusive path)’로 번역하고 있다. 특히 이중 쯔어푸는 Bṛhadāraṇyaka Upaniṣad 2.4.11(= 4.5.12)의 ‘아트만을 바다에 비유하는’ 구절을 이러한 전거로 꼽고 있다.

 

(L) 그 [아트만]은 모든 물들이 하나로 모이는 장소(ekāyana)61)가 바다인 것처럼 그러한 방식으로 모든 접촉의 감각들이 하나로 모이는 장소인 피부이고, 모든 냄새들이 하나로 모이는 장소인 두 콧구멍이고, 모든 맛들이 하나로 모이는 장소인 혀이고, 모든 [볼 수 있는] 형태들이 하나로 모이는 장소인 눈이고, 모든 소리들이 하나로 모이는 장소인 귀이고, 모든 생각들이 하나로 모이는 장소인 마음이고, 모든 학문들이 하나로 모이는 장소인 심장이고, 모든 행위들이 하나로 모이는 장소인 두 손이고, 모든 기쁨들이 하나로 모이는 장소인 성적 기관이고, 모든 배설들이 하나로 모이는 장소인 항문이고, 모든 길들이 하나로 모이는 장소인 두 발이고, 모든 베다들이 하나로 모이는 장소인 말이다.

 

이러한 비유에서 아트만은 물 등이 한 곳에 모이는 혹은 결합하는 장소(ekāyana)인 바다로 비유되고 있다. 이러한 바다 등에 사념처를 대입한다면, 사념처는 어떠한 것들이 한 군데 모이는 혹은 결합하는 장소를 의미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떠한 것들이 모여들거나 결합하는 것일까? 이를 위해서 쯔어푸가 인용한 니까야의 구절을 살펴보자.

 

(M) 비구들이여, 어떠한 사람일지라도 kāyagatā sati를 수습하고 반복하여 수행하였다면, 그에게는 명(明)에 도움이 되는 모든 유익한 다르마들이 포함된다.

비구들이여, 마치 어떠한 비구에게 마음을 가지고 확장한 거대한 바다가 있다면, 그에게는 모든 바다로 흘러가는 작은 강들이 포함되듯이, 이와 동일한 방식으로 비구들이여, 어떠한 사람일지라도 kāyagatā sati를 수습하고 반복하여 수행하였다면, 그에게는 명(明)에 도움이 되는 모든 유익한 

다르마들이 포함된다.

 

여기서 ‘경험주체로 향하는 염(kāyagatā sati)’65)은 바다로, 이러한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작은 강들은 ‘명(明)즉 지혜[의 증득]에 유익한 다르마(dhammā vijjābhāgiyā)’로 비유되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지혜[의 증득]에 유익한 다르마(dhammā vijjābhāgiyā)’인가? 앙구따라 니까야에는 두 종류의 지혜[의 증득](明)에 유익한 다르마들이 기술되어 있다. 이 중 하나는 “ ‘무상하다’는 생각, 무상에 대해 ‘괴롭다’는 생각, 괴로움에 대해 ‘내가 아니다(혹은 내가 없다)는 생각, 포기 ・이욕 ・소멸에 관한 관념”이라는 3법인을 포함한 6종의 관념(想)이고, 다른 하나는 ‘사마타와 위빠사나’이다. 야소미트라가 인용한 수트라에서 4념처는 또한 ‘선들의 모임(kuśalarāśiḥ)’이다. 만약 선(善)을 ‘[해탈에] 유익한 다르마’로 바꿀 수 있다면, ‘경험주체로 향하는 염’으로부터 시대를 거쳐 발전되어 완성된 형태인 4념처는 37보리분법을 대표로 하는 유익한 다르마들 혹은 위빠사나와 사마타의 수행도를 포함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유익한 다르마들 혹은 위빠사나와 사마타가 결합한 사념처는 수행자를 열반이라는하나로 이끄는 역할(②)을 할 것이다.

 

2. 강의 흐름의 비유

이 비유는 사념처만을 ekāyano maggo로 한정한 붓다고사의 주석 중 (A)와 37보리분법 모두를 일취도의 범주에 포함한 『대비바사론』의 (H)와 관련이 깊은 것으로, Abhisamayālaṅkāra[kārikāśāstra]vṛtti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를 보기에 앞서 (A)등의 ‘한 갈래 길(直道: a direct path)’이라 명명할 수 있는 분석이 초기 경전에서는 어떤 의미로 사용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맛지마 니까야의 한 경에서는 ekāyano maggo가 수행론의 맥락을 벗어나 일상적인 문맥에서 사용된다. 게틴에 따르면, 이러한 경전은 주요 네 니까야(SN, DN, MN, AN)에서, ekāyana 공식(formula)을 제외한다면, ekāyano maggo를 찾아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라고 한다.

 

(N) 사리풋타여! 나는 마음으로써 마음을 지각하고서 어떤 사람을 다음과 같이 안다: ‘이 사람은 몸이 부서진 이후에 죽음 이후에 불행한 상태, 악취(惡趣), 파멸의 상태, 지옥에 태어나게 될 그러한 [길에] 들어섰고 [그러한 길을 따라] 움직이고 그러한 길에 올라탔다.’ 나는 시간이 흐르고서 청정하고 인간을 넘어선 천안(天眼)으로 그가 몸이 부서진 이후에 죽음 이후에 불행한 상태, 악취, 파멸의 상태, 지옥에 태어나 매우 고통스럽고 타오르고 날카로운 느낌을 경험하고 있는 것을 본다.

사리풋타여! 비유하자면 다음과 같다: 길이가 사람의 키를 넘는, 불꽃이 없고 연기가 나지 않는 숯들로 채워진 숯 구덩이가 있다고 하자. 그리고 더위에 짓눌리고 더위에 지치고 탈진하고 목마르고 물을 마시고 싶어하는 [어떤] 사람이 한갈래 길(直道)을 따라(ekāyanena maggena) 바로 그러한 

숯 구덩이로 향하여 오고 있다고 한다면, 현자는 그를 보고서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이러한 그대라는 사람은 바로 이러한 숯 구덩이로 오게 될 그러한 [길에] 들어섰고, 그러한 [길을 따라] 움직이고, 그러한 길에 올라섰다”라고. 시간이 흐르고서 [현자는] 그러한 숯 구덩이에 빠져 매우 고통스럽고 타오르고 날카로운 느낌을 경험하고 있는 그를 볼 것이다.

MN I 74 ff. : Idāhaṃ Sāriputta ekaccaṃ puggalaṃ evaṃ cetasā ceto paricca pajānāmi:

Tathāyaṃ puggalo paṭipanno tathā ca iriyati tañ ca maggaṃ samārūḷho yathā kāyassa

bhedā param maraṇā apāyaṃ duggatiṃ vinipātaṃ nirayaṃ upapajjissatīti: tam enaṃ

passāmi aparena samayenadibbena cakkhunā visuddhena atikkantamānusakena

kāyassa bhedā param maraṇā apāyaṃ duggatiṃ vinipātaṃ nirayaṃ upapannaṃ

ekantadukkhā tippā kaṭukā vedanā vediyamānaṃ. Seyyathāpi Sāriputta aṅgārakāsu

sādhikaporisā pūr'aṅgārānaṃ vītaccikānaṃ vītadhūmānaṃ, atha puriso āgaccheyya

ghammābhitatto ghammapareto kilanto tasito pipāsito ekāyanena maggena tam eva

aṅgārakāsuṃ paṇidhāya. Tam enaṃ cakkhumā puriso disvā evaṃ vadeyya:tathā 'yaṃ

bhavaṃ puriso paṭipanno tathā ca iriyati tañca maggaṃ samārūḷho yathā imaṃ yeva

aṅgārakāsuṃ āgamissatīti. Tam enaṃ passeyya aparena samayena tassā aṅgārakāsuyā

patitaṃ ekantadukkhā tippā kaṭukā vedanā vediyamānaṃ.

 

이러한 인용에서 ekāyano maggo는 다른 곳으로 빠질 갈래길이 없기 때문에 반드시 그러한 목적지에 도달할 수밖에 없는 길을 의미하고, 이는 붓다고사의 주석 중 (A)와 완전히 일치한다. 그리고 이를 ‘열반을 실현한다’는 수행론에 적용한다면, 북전 아비달마의 (H)의 “[열반으로 향하는] 다른 길이 없는 [도중에] 되돌아오지 않는, 물러나지 않는 해탈에 도달하는, [때문에] 다섯 취로 다시 태어나지 않는(無異趣․ 不退還․ 至不退解脱․背五趣之一趣)”의 묘사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살펴보게 될 Abhisamayālaṅkāra[kārikāśāstra]vṛtti의 비유 역시 이러한 수행론의 맥락을 적용한 해석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O) ekāyanamārga를 수반한 스물한 번째 [발심]은 [비유하자면] 강의 흐름과 같다. [이에 관하여 2만 5천송 반야경에서] 세존은 말씀하신다: “시방 각각의 무한한 세계에 살고 있는 눈과 귀가 멀고 정신적으로 아프고 벌거벗고 배고프고 목마른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이러 저러한 고통들을 치료하는 것들을 얻게 하고자 하고, 악처(惡處)들에 태어난 중생들로 하여금 인간의 몸을 얻게 하고자 하고, 그러한 중생들을 바른 행동(戒) ・삼매 ・반야 ・해탈의 지혜와 봄의 모임들에 확립하고자 하는 보살들은 [반야바라밀에서 훈련해야만 한다]”라고.

ⓐ 무생법인(생겨남이 없음이라는 가르침들에 대한 수용)을 획득함에 따라 그것(발심)이 자연스럽게 흐르기 때문에 [ekāyana이다]. 그렇지만 ⓑ 이러한 단계에 이른 보살들은 타인을 위해 행동하는 것이 단절되지 않기 때문에, ekāyana이다.

 

이 인용은 반야경 계열의 24종류의 발심(cittotpāda)의 설명 중 21번째에 해당하며, 이러한 발심은 ekāyanamārga를 수반한 것으로 ‘강물의 흐름’에 비유되고 있다. 편의를 위하여 25,000송 반야경의 인용을 제외하고 살펴본다면, ⓐ에서 ekāyana는 발심에, ⓑ에서는 그러한 종류의 발심을 일으킨 주체인 보살의 행위에 적용되고 있다. 이중 ⓑ의 경우는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즉 ‘이러한 단계를 획득한 보살들에게는 타인을 위해서 하는 행동들이 강물의 흐름처럼 끊어지지 않고 부단하게 흐르기 때문에’ ekāyana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의 경우는 그 의미가 그다지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즉 발심이 강물의 흐름처럼 자연스럽게(svarasena 혹은 svarasataḥ) 흐르기 때문에 ekāyana라는 점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쉽지 않다. 이는 (L)과 (M)의 비유처럼 강물이 모여 바다로 흘러가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필자는 불교 문헌 내에서 ‘강물의 흐름’과 관련된 구절을 찾아보았지만 찾기가 쉽지 않았다. 다만 마음(citta)을 강에 비유하고 이것의 흐름에 대하여 설명하는 Pātañjalayogaśāstra(I. 12)의 내용을 찾을 수 있었다.

 

반복된 수습과 [대상에 대한] 이욕(離欲)에 의하여 그것(마음의 작용들)은 종료된다(I. 12).

[주석:] 마음의 강이라고 불리는 양 방향으로 흘러가는 [강]이 있는데, [하나는] 선을 향하여 흐르고 [다른 하나는] 악을 향하여 흐른다. 그 [둘] 중에서 선을 향해 흐르는 [마음의 강]은 독존을 향하고 [순수자아가 마음의 작용들과 다르다는] 구별로 내리 흐른다. 악을 향하여 흐르는 [마음의 강은] 윤회를 향하고 구별이 없음으로 내리 흐른다. [대상에 대한] 탐욕을 떠남에 의해서 감관의 대상으로 향하는 흐름은 막힌다. [순수자아가 마음의 작용들과 다르다는] 구별을 보는 반복적 수습에 의해서 선으로 향하는 흐름은 열려진다. 이와 같이 마음 작용들의 종료는 [이] 양자에 의지한다.

 

여기서는 선과 악으로 대표되는 두 강의 흐름이 각각 독존 ・구별지 /윤회 ・구별지의 결여라는 종착지로 흘러가는 것임을 설명하고 있다. 이중 악의 흐름은 이욕이라는 수단으로 막지 않으면 그 본성상 ‘순수자아가 스스로를 마음의 작용들과 구별하지 못하여 즉 동일시하여’ 윤회라는 종착지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 또한 순수자아가 마음의 작용들과 다르다는 구별지를 반복 수습한다면, 반드시 독존(kaivalya)이라는 최종 목적지로 흘러갈 수 있다.

 

이러한 점을 (O)의 ⓐ에 적용시킨다면, ‘보살이 무생법인을 획득하였을 때, [붓다가 되겠다고] 마음을 일으킨(발심) 마음의 흐름은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오직 무상정각 혹은 불성(Buddhatva)으로만 흐른다’라고 이해할 수 있다. 즉 여기서 ‘자연스럽게(svarasena 혹은 svarasataḥ) 흐른다’는 것은 ⓑ의 ‘단절되지 않고 혹은 부단하게(abhinna)’와 동일한 의미를 지닌 것으로 파악해야 한다. 이처럼 강물의 흐름의 비유는 ekāyanamārga가 끊어지지 않고 부단하게 목적지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N)에서 살펴보았던 ekāyano maggo의 일상적인 용례 즉 하나의 목적지로만 향할 수밖에 없는 한 갈래 길과 그 의미를 함께한다.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수행론에서 한 갈래 길과 관련이 있는 해석들 즉 (A), (H), (O)는 일상적인 의미에서 사용되었던 한 갈래길이 수행론에 커다란 의미의 변화 없이 그대로 적용되었다는 사실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IV. 나가며

 

앞서 살펴본 문헌들에서 ekāyano mārgaḥ는 ‘ekāyana 공식’과 관련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구분하여 살펴볼 수 있다. 이중 ‘ekāyana 공식’과 연관한 ekāyano mārgaḥ는 붓다고사의 주석과 『대비바사론』・『순정리론』의 남북전 아비달마 주석서들에서 나타난다. 그렇지만 ekāyano mārgaḥ가 적용되는 대상은 서로 다르다. 먼저 붓다고사의 주석{(A)~(E)}은 [37보리분법을 포함한] 사념처에, 『대비바사론』{(F)(G)(H)}은 [사념처를 포함한] 37보리분법에, 『순정리론』(J)은 사념처 중 자성념주의 자성인 혜(prajñā)에 ekāyano mārgaḥ의 의미를 적용하고 있다. ‘ekāyana 공식’과 연관되지 않은 ekāyano mārgaḥ는 주로 일상적인 맥락과 사념처 혹은 37보리분법 이외의 수행론의 맥락에서 사용된다. 이 중 일상적인 맥락은 우파니샤드의 바다의 비유(L)과 니까야의 숯구덩이의 비유(N)이, 다른 수행론의 맥락은 Āryākṣayamatinirdeśaṭīkā(K)와 반야경의 주석서의 강의 흐름의 비유(O)에서 사용 된다. 

 

그리고 이러한 ekāyano mārgaḥ의 해석은 간략히 3계통으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ekāyana를 수사한정 복합어로 푼 ekāyano mārgaḥ의 해석이다. 이러한 해석에는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진 두 군이 존재한다. 하나는 ‘한 갈래 길인 길’로 명명할 수 있는 해석군이다. 이에는 붓다고사의 주석(A), 『대비바사론』의 분석 (H), 숯 구덩이의 비유(N)과 강물의 흐름(O)이 속한다. 이러한 ‘한 갈래 길’은 일상적 의미(N)가 4념처, 37 보리분법 등의 수행론에 적용된 것으로, ‘하나의 목적지 ― 그것이 열반[(A)(H)] 혹은 보리(O)―를 향해 되돌아오지 않고 앞으로 나가게 하는 길’을 의미하게 되었다.

 

또 다른 하나는 동일한 수사한정 복합어로 풀은 ‘유일한 길인 길’로 명명할 수 있는 군으로 『대비바사론』의 (G)와 『순정리론』의 (J)가 이에 해당하며, 이는 붓다고사가 실제로 거부한 해석이다. 그렇지만,『대비바사론』의 경우 ‘유일한 길’은 사념처가 아니라 무루도인 성도(āryamārga)이며 37 보리분법 등의 다양한 수행도는 열반을 향해 나아간다는 관점에서 하나의 길 (즉 유일한 길)에 포함시켰다는 점과 『순정리론』의 경우 ‘유일한 길’은 ‘유일하게 가장 뛰어난 길’이라는 점을 반드시 명심해야 한다. 

 

둘째는 ekāyana를 2격 한정 복합어로 푼 ekāyano mārgaḥ의 해석으로 ‘하나로 가게 하는 길’을 의미한다. 이러한 해석에는 우선 ‘하나로 나아가게 하는 길’ 혹은 ‘하나를 초월/ 통달하게 하는 길’로 변형한 의미를 지닌 『대비바사론』의 (F)가 있다. 그리고 37보리분법 혹은 위빠사나와 사마타 등의 다양한 수행법들이 “결합하게 하는 길”로 명명할 수 있는 남전 아비달마의 특징적인 해석군이 있다. 후자에는 붓다고사의 주석 (E), 바다에 비유되는 아트만과 경험주체로 향하는 염(kāyagatā sati)을 하나로 묶은 (L) ・(M)이 해당한다. 이는 니까야에서 다양한 수행법을 포괄하여 일종의 지침서로 볼 수 있는『염처경』에 기술된 ‘ekāyana 공식(formula) 혹은 후렴구(refrain)’과 가장 어울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남전 아비달마의 특징적인 해석은 다음과 같은 일련의 변형과정을 겪은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 먼저 바다에 비견되는 아트만의 비유가 사념처의 가장 초기 형태인 kāyagatā sati에 적용되어 후자가 삼법인을 비롯한 다양한 관념(saññā) (혹은 위빠사나와 사마타)를 포함하는 수행이 되었다. 그리고『대념처경』 등의 사념처로 정형화된 단계에서는 이러한 수행도가 사마타와 위빠사나가 결합한 혹은 다양한 수행법을 포함하여 열반을 실현하는 길이 되었다.

 

세 번째는 ekāyana를 3격 한정 복합어로 푼 ekāyano mārgaḥ의 해석으로 ‘홀로 가는 길’ 즉 “좁은 길”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 이에는 붓다고사의 (B), Akṣayamatinirdeśaṭīkā의 분석(K)이 해당한다. 이러한 해석에는 “공동체를 떠나 홀로 열반을 실현하기 위해 외로운 길을 간다”는 사문 전통의 측면과 “다른 사람들의 가르침에 의지하지 않고 홀로 열반을 향해 걸어갔다”는 붓다(와 벽지불)의 입장이 포함된다. 필자는 이러한 해석이 ‘ekāyana 공식 혹은 후렴구’와의 결합 여부를 떠나 ekāyano mārgaḥ가 불교수행론에 적용된 ‘원형적인 해석’이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불교 역시 사문의 전통으로부터 출발하였고, ‘홀로 가야만 하는 길’이란 해석이야 말로 이러한 사문의 전통을 가장 잘 반영한 해석이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ekāyano mārgaḥ는 다양한 대상에 대해 다양한 의미에서 해석될 수 있지만, 이러한 의미 중 “오직 사념처만을 통해서 열반을 실현할 수 있다”는 관념은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누군가가 이와 같은 주장을 한다면 이는 문헌의 근거를 결여한 것이다. 그리고 이미 선행학자들에 의해 지적되었듯이, 20세기 이후 불교 근대화의 산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