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균주 황벽운선사 1) 시중
대중들아, 너희들이 만약에 미리 칠통 2) 을 철저히 타파하여 놓지 않으면 납월 30일 3) 을 당하여는 정녕 열뇌(熱惱)하고 황란(惶亂)할 것이 분명하니라.
어떤 외도들은 공부하는 것을 보면 "아직도 저러고 있다" 하며 냉소하지만 내 그대들에게 묻노니, 홀연 죽음이 닥치면 너는 무엇으로 생사를 대적하겠느냐. 모름지기 평상시에 힘을 얻어 놓아야 급할 때에 다소 힘을 더는 것이니, 마땅히 목마르기를 기다려 샘을 파는 따위의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마라. 죽음이 박도하여서는 이미 수족이 미치지 못하니 앞길이 망망하여 어지러이 갈팡질팡 할 뿐이니, 가이 딱하고 딱하도다.
평시에 다만 구두선(口頭禪) 4) 만 익혀서 선(禪)을 설하고 도(道)를 말하며 불을 꾸짖고 조사를 욕하여 제법 모두 해마친 듯하나 여기에 이르러서는 아무 용처 없으니, 평시에 남은 속여왔으나 어찌 이때에 당하여 자기마저 속이랴.
형제들아, 권하노니 신체가 강건한 동안에 이일을 분명히 판단해 두라. 대개 이 문제 5) 는 풀기가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닌데 목숨을 떼어 놓고 힘써 공부 하려고는 아니하고, 다만 어렵고 어렵다고만 하니 만약 진정한 대장부라면 어찌 이와 같으랴. 모름지기 저 공안(公案) 6) 을 간(看)하되,
승이 조주에게 묻되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니
답하되 "무(無)!" 하였으니,
다만 26시중에 이 "무(無)" 자를 참구하여 밤이고 낮이고 가나 오나 앉으나 서나 누우나 옷 입으나 밥 먹으나 변소에 가나, 생각생각 끊이지 아니하고 맹렬히 정신을 차려 저 "무" 자를 지켜갈 것이다. 이리하여 날이 가고 해가 가서 공부가 타성일편(打成一片) 7) 이 되면 어느듯 홀연히 마음빛이 활짝 밝아 불조의 기틀을 깨달아 문득 천하 노화상의 혀끝에 속지 않고 스스로 큰 소리를 치게 될 것이다.
알고 보면 달마 8) 가 서쪽에서 왔다는 것도 바람 없는데 파도를 일으킨 것이오, 세존이 꽃을 들어 보이신 것 9) 도 오히려 한바탕 허물이라 할 것이라, 여기에 이르러서는 천성(千聖)도 오히려 입을 떼지 못하거든 하물며 어찌 염라노자(閻羅老子) 10) 를 말할까 보냐.
대중들아, 이 사이에 기특한 도리가 있다고 생각하느냐? 이런 생각 하지마라. 매사에 일이란 마음있는 사람을 두려워 하느니라. 11)
《평》
이것이 후대에 화두를 가져 공부하게 된 시초가 된다. 그러나 반드시 "무(無)" 자 만으로 한정할 것은 아니니 혹은 "만법귀일(萬法歸一)" 12) 혹은 "수미산 (須彌山)" 13) 혹은 "사요소요(死了燒了)" 14) 혹은 "참구염불(參究念佛)" 15) 도 좋으니, 한개의 화두만을 지켜서 오직 크게 깨치기만 기약하라. 비록 의심하는 바는 같지 않으나 깨침인즉 둘이 없는 것이다.
▒ 용어정리 ▒
[1] 황벽(黃檗) :
(?~850) 법명은 희운(希運), 남악(南嶽)하(下) 4세(世). 백장회해(百丈懷海)선사의 법을 이었다. 일찌기 출가하여 여러 곳을 유력하였는데, 이마에 자그마한 혹이 돋혔고 음성이 우렁차고 키는 7척에 의기가 충담하였다고 한다.
천태산과 경사에서 배우다가 마조(馬祖)를 찾아가니 벌써 입적한 뒤였다. 그래서 법을 받은 제자인 백장(百丈)을 찾아가 마조의 평일 기연(機緣)을 물었더니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한번은 방장에 들어가니 화상이 선상에 놓여있는 불자(拂子)를 들어 보이기에 내가 '다만 그것 뿐이지 딴 것이 있습니까?' 하니, 화상이 불자를 도루 선상에 놓으시면서
'네가 이후에 후래를 가르친다면 무엇으로 어떻게 하겠느냐?' 하시더라.
내가 그때 선상의 불자를 들어 보이니 '다만 그것 뿐 딴 것이 있느냐?' 하시기에
내가 불자를 도로 선상에 놓고 자리에 앉으려 하니
화상이 벽력 같은 '할'을 하셨는데 그때 내가 사흘이나 귀가 먹고 눈이 캄캄 하더라."
황벽이 이 말을 듣고 불각 중에 토설(吐舌)하고 대오하였다.
하루는 백장이 물었다.
"어디를 갔다 오느냐?"
"대웅산 밑에 가서 버섯을 따옵니다."
"범을 안 만났더냐?"
황벽이 "으흥!" 하고 범이 물려는 형세를 지으니
백장이 도끼로 찍는 시늉을 하는 것을 황벽이 덤벼들어 한번 쥐어박았다.
백장도 한 차례 쥐어박고 크게 웃으며 돌아갔다.
그날 백장스님이 상당설법에서 말하기를,
"대웅산 아래 큰 범이 있으니 대중은 조심하라. 내가 오늘 한번 물렸다." 하였다.
그후 백장의 법을 받아 가지고 여러 곳으로 다니며 형적을 숨기고 지냈다.
한번은 용흥사(龍興寺)에 와서 쓰레질이나 하면서 머물고 있었는데 홍주자사(洪州刺史) 배휴(裵休)가 왔다. 배휴는 법당 벽 그림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것이 무엇이요?"
안내하는 스님이
"고승의 상(像)입니다." 하니,
"형상인즉 볼 만하나 고승은 어데 있소?" 하였다.
스님이 머뭇거리며 대답을 못하니,
배휴가 "이 절에 선승(禪僧)이 없소?" 하고 물었다.
"근자에 한 중이 와 있는데 선승같이 보입니다."
배휴는 그 중을 불러오라 하였는데, 그가 바로 황벽이다.
배휴는 다시 앞서의 말로 물으니,
황벽이 즉시에 큰 목소리로 "배휴!"하고 불렀다.
배휴는 엉겁결에 "네!"하니,
"어느 곳에 있는고?" 하는 데서 배휴가 활연 계합하였다.
배휴는 그 자리에서 제자의 예를 드리고 사제에 모시고 조석으로 문법하였다.
그 후 배휴의 청으로 완능(宛陵)의 개원사(開元寺) 홍주 대안사(大安寺)에 있으면서 크게 교화하니, 법중이 항상 천여명이 넘었다. 법을 이은 제자가 12 인이 있는데 그중에 임제(臨濟)스님이 있다. 지금 여러곳에서 성행하고 있는 완릉록(宛陵錄)과 전심법요(傳心法要)는 선사법어를 배휴가 기록한 것이다. 시호(諡號)는 단제(斷際)선사다.
[2] 칠통(漆桶) :
어두운 중생심을 가리키는 말. 본래 밝은 이 마음이 미혹, 착각, 전도하여 이른바 무명이 덮여 어둑하기가 옷(칠)을 담은 통 속과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칠통은 무명(無明)과 같은 말로 쓰인다.
[3] 납월 30일 :
임종시, 숨질 때
[4] 구두선 :
입에 붙은 선이라는 말이다.
참선은 오직 실다이 공부하고 실다이 깨칠 따름이요, 아무런 글도 말도 지식도 당한 것이 아닌데, 실다운 깨침은 없으면서 입으로만 선이니 도니 법이니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이런 것을 구두선이니 구두삼매니 한다.
[5] 문제 :
여기서는 관렬자(關렬子)의 번역인데, 관렬자란 올개미, 함정, 혹은 장치의 뜻을 가진 중국고어다. 여기서는 조사 공안을 말하고 있다.
[6] 공안 :
화두라고도 하며 도를 판단하는 법어다. 공안이라 하는 것은 본래 관청의 "공변된 문서" 라는 의미를 갖는 말로써 "공정하여 범치 못할 법령" 이라는 것이다. 대개 공부하는데 있어 올바르게 깨치는데는 불조의 바른 이치를 직절(直截) 설하신 조사의 말씀이나 몸짓이나 그밖에 모든 방법은 그것이 다 깨치는데 있어 바른 법령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부인은 반드시 이 공안을 요달하여야 한다. 고래로 조사공안은 천7백칙이 된다고 하나 어찌 조사 공안을 수로 헤아리랴! 이 숫자는 아마도 전등록에 실린 불조사의 수효가 천7백1인데 이 수효에 기인한 것인 듯하다.
[7] 타성일편 :
화두가 순숙하여 끊일 사이가 없어져 듣지 않아도 저절로 들리어 언제나 화두가 현전하는 경지. 오직 화두를 들고 간절히 꾸준히 그리고 힘차게 밀고 나가면 이 경지가 된다. 참으로 공부인의 득력 시절은 이때부터다.
[8] 달마(達磨) :
(?~528)범어로 보오디 다르마. 선종의 중국 초조로 세존 가섭 아난으로 전하여 내려오는 불조법통의 제28대 조사가 된다. 남인도 향지국 제3왕자로 본명은 "보리다라" 라 하였다.
반야다라 존자에게 도를 배우며 40년 동안을 섬기다가 반야다라가 죽은 뒤 본국에서 크게 교화하여 당시 성행하던 소승선관의 육종(六宗)을 굴복시켜 전인도에 그 이름을 떨치고 60여년을 교화하였다.
반야다라가 법을 전할 때 "내가 죽은 후 67년이 되면 네가 동방으로 가서 대법을 선양하라. 부디 속히 가려고 서두르지를 마라. 남방에는 유위공업(有爲功業)이나 좋아하고 불리(佛理)는 보지 못하니 그곳에는 머물지 마라. 동토에는 보리를 이룰 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을 것이다." 하셨는데, 사조카 이견왕(異見王)을 교화하고는 마침내 바다길로 중국을 향하여 3년만에 양(梁)나라 보통(普通)1년(서기520) 9월 광주(廣州)에 이르러, 10월에 금릉(金陵)으로 가서 무제(武帝)와 만났다.
무제가 묻기를,
"화상은 서천에서 무슨 교법을 가지고 오셨습니까?"
"한가지의 교법도 가져 오지 않았습니다."
"내가 많은 절을 짓고 탑을 쌓고 중을 득도시켰는데 어떤 공덕이 있습니까?"
"조그마한 공덕도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인천(人天)의 작은 복이니 유루(有漏)공덕이 될 뿐입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참 공덕입니까?"
"맑은 지혜는 묘하게 밝아 뚜렷이 비치어 있을 뿐이라
세상의 함이 있는 일(有爲之事)로는 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거룩한 법의 첫째가는 도리입니까?"
"훤칠하여 거룩한 것이라곤 없는 것입니다."
"나를 대하고 있는 이는 누구입니까?"
"모르겠습니다."
무제는 이 문답에서 알아듣지 못하였다. 달마는 양자강을 건너 위(魏)나라 숭산(嵩山)으로 갔다. 사(師)가 떠난 뒤에 무제는 지공대사에게 "그분이 바로 관음보살이라" 는 말을 듣고 급히 뒤쫓아 모셔 오라고 하였으나, 지공대사는 온나라 사람이 다가도 오지 않을거라고 말렸다. 그뒤 사(師)는 소림사(少林寺) 석굴에 9년동안 면벽하고 있었으므로 세상에서는 벽관바라문(壁觀婆羅門)이라고 불렀다.
이락(伊洛)에 있던 신광(神光)이 도를 구하여 소림굴 밖에 이르렀다. 신광은 박학군람(博學群覽)하고 불·유·선의 깊은 이치를 통달한 이름난 달승(達僧)이었다. 물론 달마는 면벽단좌하고 만나주지 않았다.
신광은 "옛 사람은 도를 구하기 위하여 뼈를 부수고 골수를 내며, 피를 뽑아 굶주림에 먹이고, 머리를 풀어 진흙을 덮었으며, 절벽에서 몸을 던져 호랑이에게 먹였는데 나는 또한 무엇하는 거냐!" 하고 마침내 눈이 펑펑 내리는 12월 9일밤, 무릎을 넘는 눈속에 합장하고 서 있었다. 날이 밝아 해가 높이 떴을때야 달마와 이야기할 수 있었다.
달마가 신광을 돌아 보고
"네가 밤새 눈 속에 서 있어 무엇을 구하는 것이냐?"
신광은 눈물을 비오듯 흘리며 말하였다.
"원하옵건데 화상이시여, 자비를 베푸시어 감로문(甘露門)을 열어 주십시요."
"제불(諸佛)의 무상묘도(無上妙道)는 광겁으로 정근하여 행하기 어려운 것을 능히 행하고 참을 수 없는 것을 능히 참아야 하는 것인데, 너는 어째서 소지소덕(小智小德)과 경만심(輕慢心)으로 대법을 바라보고 헛고생이나 하는 것이냐!"
신광은 즉시에 자기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허물을 통절히 뉘우쳤다. 그리고 즉시에 칼을 빼어 왼쪽 팔을 탁! 치니 팔은 동강 잘라졌다. 이 순간 홀연히 눈 속에서 파초가 솟아올라 그 팔을 바쳤다고 한다.
달마 이것을 보고 "제불의 최초구법이 모두가 법을 위하여 몸을 돌보지 않았는데, 네가 또한 이러하니 가히 도를 구할 만하다." 하고, 드디어 이름을 혜가(慧可)로 고치게 하였다.
혜가가 "제불의 법인(法印)을 얻게 하여 주십시요." 하자
달마는 "제불의 법인은 남에게서 얻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그 당시 혜가는 과연 알 수 있는 것은 다 알고 배울 수 있는 것은 다 배웠으나 마음 속에 차지하고 보채고 있는 인간 불안은 어떠한 지식이나 배운 것으로도 해결은 커녕 더욱 더하여 갔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 지혜총명과 박학강기로는 어찌할 수 없는 마음 속 "한 물건" 의 해결을 구하고자 물었다.
"화상이시여, 저의 마음이 아직 편안치 않습니다.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 주십시요."
"좋다, 그러마. 너의 마음을 이리로 가져오너라."
"마음을 찾아보아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내 너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마쳤다."
위(魏)나라 효명(孝明)황제가 사의 이적을 듣고 크게 경앙하여 세번이나 청하였으나 굳이 사양하였고, 예물도 세차례나 사양하였으나 마침내 막지 못하고 마납의(摩衲衣) 가사(袈裟) 두벌, 금발우(金鉢) 은수병(銀水甁)과 비단만은 받았다. 소림사에서 9년동안 있다가 하루는 문인을 불러서
"이제는 내게 때가 왔다. 너희들은 각기 소득을 말해보라." 하시니 이미 사의 세연이 다하여 온 것이다.
그때 도부(道副)가 나와서
"문자는 취할 것도 없고 버릴 것도 없다고 생각합니다."하니
"너는 나의 가죽을 얻었다."하고,
다음에 비구니 총지(總持)가 나와서
"제가 본바로는 아란이 아촉불국을 한번 보고는 다시 보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하니,
"너는 나의 살을 얻었다."하고,
도육(道育)은
"사대(四大)는 본래 공했고 오온(五溫)도 본래로 있는 것이 아니오니 제가 본 바로는 한법도 가히 얻을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너는 나의 뼈를 얻었다." 하였는데,
혜가는 나와서 다만 예배하고 물러가 제자리에 서니,
"너는 나의 골수를 얻었다. "하고, 이어 말하기를
"여래께서 정법안장(正法眼藏)을 가섭(迦葉)존자에게 전하신 후 전전히 전하여 내려와 지금 나에게 와 있다. 이를 이제 너에게 부치니 잘 호지하라. 그리고 가사를 너에게 전하니 법의 신(信)으로 삼고 그 뜻을 잘 알아 두어라. 의발은 내가 죽은지 2백년 뒤에는 전하지 마라. 그때는 법이 천하에 퍼져 도에 밝은 자는 많고, 도를 행하는 자는 적으며, 이치를 말하는 자는 많고 이치를 통한 자는 적을 것이며, 비밀한 이치에 계합하고 도를 통한 자가 천만인이 넘을 것이니, 너는 마땅히 이 법을 천양하되 깨치지 못한 자를 가벼이 여기지 마라. 그들이 한생각 기틀을 돌이키면 본래로 도를 얻은 자와 같은 것이다." 하고 게송으로 이르기를,
"내가 이땅에 온것은 법을 전하여 중생을 제도하려는 것이니,
한 꽃이 다섯잎이 피면 결과가 자연히 이뤄지리라
(吾本來玄土 傳法救迷情 一華開五葉 結果自然成)" 하고,
또 이르기를,
"나에게 능가경(楞伽經) 4권이 있으니 이를 너에게 부친다. 경은 곧 여래심지(如來心地)의 요문이니 여러 중생을 가르쳐 깨달아 들어가게 하라." 하였다.
그 당시 광통율사(光統律師), 보리류지(菩提流支) 3장등 집상(執相) 학자들은 사를 시기하고 법을 이해하지 못하여 다섯번이나 음식에 독약을 넣었으나, 그 때마다 번번이 토하여 무사하였는데, 여섯번째는 법은 이미 전했고 때는 왔다 생각하고 그대로 두어 마침내 앉으신 채 입적하니 웅이산(熊耳山)에 매장하였다. 위나라 효장제(孝莊帝) 영안(永安)원년 10월 5일이다.
그 후에 위나라 사신 송운(宋雲)이 서역(西域)에 갔다 오다가 총령(蔥嶺)에서 달마대사가 맨발로 신 한짝을 들고 가는 것을 만나보고 와서 그 묘를 파보니 신 한짝만 남기고 전신 탈거하였더라고 한다.
사의 저술이라 전해지는 혈맥론(血脈論), 파상론(破相論), 사행론(四行論), 오성론(五性論), 심경송(心經誦), 안심법문(安心法門)등이 있어 지금의 종문교전으로 널리 쓰이고 있다. 이 달마전에는 이설이 있다.
[9] 세존이 꽃을 들다(拈花微笑) :
세존께서 영축산에서 설법하실 때 한번은 대법천 왕이 꽃비를 분분히 내려 세존께 공양하였다. 세존은 그중 금색파리와 한 송이를 들어 대중에게 보이시나, 아무도 그 뜻을 알지 못하여 어리둥절 하는데 오직 가섭만이 빙그레 웃었다. 이에 부처님은,"나의 '정법안장 열반묘심' 을 가섭에게 전한다." 하였다. 이것이 교외별전(敎外別傳)으로써, 이밖에 다자탑전(多子塔前)에서 설법하실 적에 가섭과 자리를 나누어 앉은 것과, 열반에 드신 뒤 가섭에게 곽밖으로 두발을 내어 보인 것을 합하여 종문에서 삼처전심(三處傳心)이라 한다.
[10] 염라노자 :
이른바 '염라대왕' 이다. 범어로 '야마라야지' 이니 박(縛)·차지(遮止)·정식(靜息)·가포외(可怖畏)라 번역된다. 귀신세계의 수령으로 사후에 유명계를 지배하는 왕이다. 범부가 죽어서 보(報)를 받아갈 때 염라왕이 이를 판단한다. 오직 화두만 간절히 지어가는 사람은 설사 깨치지 못하더라도 스스로 광명을 발하는 사람이라, 이런 어두운 문이 상관 없는 것이다.
[11] 일은 마음있는 사람을 두려워 한다 :
"세상사 어려울 것 없으니 오직 마음만 있으면 된다." 는 말과 같다.
[12] 만법귀일(萬法歸一) :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니 하나는 어디로 가는가?" 하는 것이다.
조주의 기연이다.
[13] 수미산 :
한 중이 운문에게 묻기를,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을 때 허물이 있습니까?" 하는데
"수미산!" 하였다.
[14] 사요소요(死了燒了) :
"죽어서 태워져 한줌의 재가 되니 너의 주인공이 어느 곳에 있는가?"
하는 말인데, 철산경이 항상 이 말로 찾아오는 납자를 다루었다.
[15] 참구염불(參究念佛) :
염불하면서 "이 염불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고 의심을 지어가는 공부법이다.
2. 조주심 선사 1) 시중
너희가 다만 이 도리를 궁구하되 혹 20년 30년을 참구하여도
만약 계합하지 못하거든 노승의 머리를 끊어 가라.
노승은 40년을 잡된 마음을 쓰지 않았느니라.
다만 하루 두 때의 죽반(粥飯)시는 제하니, 이때는 잡용심을 하는 때니라.
▒ 용어정리 ▒
[1] 조주(趙州) :
(778-897) 남악하 4세. 남전보원(南泉普願)의 법을 이었다. 법명은 종심(從心), 속성은 확씨, 산동성조주부에서 출생. 어려서 출가하여 계는 받지 않고 있다가 한번은 남전스님에게 갔는데 남전스님이 물었다.
"너는 어디서 왔느냐?"
"서상원(瑞像院)에서 왔습니다."
"네가 스승이 있는 사미냐? 없는 사미냐?"
"네! 스님이 계십니다" 하고 곧 자리에서 일어나 남전에게 절하면서,
"엄동설한에 화상 존체 만복하십니까?" 하고 문안하니, 남전이 기특히 여겨 입실을 허락하였다.
하루는 묻기를 "어떠한 것이 도입니까?" 하니,
남전스님이 "평상심이 도니라" 하였다.
"그러면 어떻게 공부하면 됩니까?" 하니,
"도라는 것은 알고 모르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안다는 것은 망각(妄覺)이요, 알지 못한다는 것은 무기(無記)니 참 도는 허공과도 같아서 탕연히 비고 통한 것이다." 하는 데서 곧 깨쳤다.
숭악(嵩嶽) 유리단(瑠璃壇)에가서 계를 받고 이내 남전 회상에 돌아와 지내다가 그후 제방을 유력하고 80세에 조주의 관음원(觀音院)에서 크게 교화하였다. 이곳에서 조주고불(趙州古佛)의 이름이 천하에 떨쳤는데 지금의 조주 무자(趙州無字), 정전백수자(庭前栢樹者), 청주포삼(靑州布衫)등 허다한 공안이 법기에서 나왔다.
한번은 설법하기를,
"손에 잡은 밝은 구슬과 같아야 호인이 비치고,
어떤 사람이 오면 장육금신을 가져 한 풀잎을 삼아 쓰기도 한다.
불(佛)은 번뇌요 번뇌는 곧 불이라." 하니,
한 중이 나와 말하였다.
"불은, 이것이 누구의 번뇌입니까?"
"일체인의 번뇌니라."
"어떻게 하면 이것을 벗어날 수 있습니까?"
벗어나서 무엇하려느냐!" 하고 마당을 쓸었다.
한 중이 물었다.
"어떤 것이 불입니까?"
"법당 안에 안 계시더냐?"
"법당의 부처님은 흙으로 뭉쳐 깎아만든 것이 아닙니까?"
"그렇지!"
"그러니 어떤 것이 불입니까?"
"법당 안에 계시지!"
"학인은 미혹해서 모르겠사오니 알도록 가르쳐 주십시요."
"네가 아침 죽을 먹었느냐?"
"네! 먹었습니다."
"가서 바루를 씻어라!"
이에 그 중이 홀연히 깨쳤다.
한 중이 와서 문안하니 스님이 물었다.
"여기 온 적이 있던가?"
"아니, 처음입니다."
"차 한잔 들게!"
또 한 중이 왔다.
"여기 와 본적이 있던가?"
"네! 벌써부터 자주 옵니다."
"차 한잔 들게!"
원주가 와서 묻기를,
"화상께서는 어째서 처음 온 사람에게도 일향차 한잔 들라 하시고 자주 오는 사람에게도 차 한잔 들라 하십니까?" 하니,
"원주!"하고 불렀다.
원주가 "네!"하니,
차 한잔 들게!"하였다.
이것이 조주 끽다거(喫茶去)기연이다.
당나라 소종(昭宗) 건녕(乾寧)4년, 1백20세로 입적, 시호는 진제대사(眞際大師)이시다.
3. 현사비 선사 1) 시중
대개 반야 2) 를 배우는 보살은 큰 근기를 갖추고 큰 지혜가 있어야 한다.
만약 근기가 옅고 둔하거든 모름지기 힘써 괴로움을 참으며
밤낮으로 피로를 잊고 정진하기를 흡사 친상(親喪)을 당한 듯이만 하라.
이와 같이 급하고 간절히 지으며 다시 선지식 3) 의 도움을 받아 뼈저리게 실다히 궁구하면, 비록 둔근일지라도 또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 용어정리 ▒
[1] 현사(玄沙) :
(835-908) 호는 종일(宗一), 법명은 사비(師備)다. 청원 하(靑原下) 7세가 된다. 설봉의존(雪峰義存)선사의 법을 이었다. 속성은 사(謝)씨. 어려서부터 낚시질을 좋아하여 복주(福州) 남대강(南臺江)에 배를 띄우고 지냈다. 나이 30세가 되어 문득 세속 생활에 싫증이 나서 부용산(芙蓉山) 영훈(靈訓)선사에게 가서 축발하고 개원사(開元寺) 도현(道玄) 율사에게서 계를 받았다.
처음부터 의식(衣食)을 극히 절제하고 극단으로 고행하며 진종일 정진하였다. 설봉스님은 사를 비두타(備頭陀)라고 부르고 지도하였다. 설봉스님을 따라 상골산(象骨山)에 가서 밤낮을 이어가며 입실 결택(決擇)하더니, 하루는 능엄경을 보다가 크게 깨치고 이로부터 응기(應機)민첩하고 모든 경에도 또한 확통하여 제방 현학(玄學)이 답지하였다.
설봉선사를 도와 지내다가 매계장(梅谿場) 보응원(普應院)에 출세하고 얼마 있다가 현사산(玄沙山)으로 옮기어 여기서 종신하였다.
시중일단(示衆一段) -
"이제 너희들은 이일(一大事)을 마쳤느냐? 안심입명(安心立命)도리를 얻었느냐? 이 도리를 판단하지 못하였다면 너희들이 보고 듣는 산하대지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모두 광로화상(狂勞華相)인 것이다.
무릇 출가인은 마음을 밝혀 근본을 요달하는 것이 사문인데 너희들은 이제 머리 깎고 가사를 입어 겉모양만 사문 모양을 하고 자리리타(自利利他)의 분을 하는 것처럼 차렸으니 이제 알고보니 모두가 캄캄하기가 그야말로 먹통이로구나.
제 치닥거리도 못하는 위인들이 무슨 남을 돕는다 하느냐? 인자(仁者)야! 너희들은 이 일이 참으로 큰 것임을 알아야 한다. 아예 한가하게 모여 앉아 어지러히 잡된 이야기나 희롱하면서 세월을 보내지 마라. 참으로 세월은 빠르고 시간은 귀한 것이다.
아깝다. 대장부들아! 어찌하여 스스로 살피고 이 일을 밝혀내려 하지 않는가! 하루 아침에 무상살귀(無常殺鬼)가 덮치면 그런 구물구물 졸던 살림으로는 터럭끝 만큼도 속일 수 없는 것이다.
업식이 망망하여 아무것도 빙거할 것이 없으니, 나귀배나 소배에 쑥 들어가기도 하고 쟁기를 끌거나 길마다 안장을 지기도 하고 지옥멧돌에 들어가거나 화탕노탕에 굽고 져지기도 하리니 어찌하여 사문이 이꼴이 된단 말이냐?"
후량(後梁)태조 개평(開平) 2년 74세로 시적(示寂)하였다. 그의 법을 받은 제자가 13인이 있는데, 그중에 나한원(羅漢院) 계침(谿琛)선사가 있다. 저술로는 현사어록(玄沙語錄) 3권, 현사광록(玄沙廣錄) 3권이 있다.
[2] 반야(般若) :
중생이 중생된 연유가 오직 미혹으로 인한 착각으로 말미암아 지견이 전도하여 본래의 자기 즉, 부처와 더불어 지혜와 덕상과 위력이 자족한 자기를 한정 상태로 결박지워진 까닭이니, 실은 한정 결박된 것이 아닌 것을 그렇게 착각하고 망견을 집착하고 있는 것이지만 그러므로 결박 부자유에서 해탈하는 길은 그 첫째가 어떠한 역량이나 복을 구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보다 바른 지견 즉 이 바른 종사를 만나는 것을 첫째가는 큰 복으로 치는 소이가 있다.
공부인은 밝은 지혜에 의하여 비로소 정지견을 얻는 것이다. 그래서 종문을 '반야문'이라고 하기도 하고 공부인의 지혜를 '반야'라고도 한다. 반야는 범어의 "푸라쥬냐" 인데 반야는 팔리어를 음대로 적은 것이다. 일체 사물의 도리를 밝게 사무쳐 보는 깊은 지혜를 말한다.
[3] 선지식(善知識) :
또는 도사(道師)라고도 한다. 사람에게 능히 생사가 없는 도리를 설하고 학인을 이끈다.
4. 아호대의 선사 1) 수계
공부를 짓되, 다만 몸을 잊고 생각을 없애는 것으로 능사를 삼지 말아야 하니
이것이 공부인의 고치기 어려운 병통 2) 중의 가장 큰 것이다.
단연 날카로운 칼날을 빼어든 듯 맹리한 정신으로
기어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 3) 을 밝혀 내도록 하여야 하니,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반복하여 공안을 드리지 않고서야
어느 때에 마음이 공하여 4) 급제하랴!
▒ 용어정리 ▒
[1] 아호대의 :
(735-818) 남악하 3세. 마조의 법을 이었다. 형주(衡州)수 강(須江)에서 출생. 속성은 서(徐)씨다.
당나라 현종 친림하 제법사와의 문답일단-
법사가 묻기를 "어떠한 것이 선(禪)입니까?" 하니,
사(師)가 손가락으로 허공에 점을 치셨다.
법사가 알아듣지 못하니, 현종이 말하기를
"법사는 그 허구 많은 경을 강하면서 다만 이 일점도 모르시오?" 하였다.
사(師)가 이어서 현종에게 말하였다.
"순종(順宗)이 시리선사에게 묻기를
'대지중생이 어떻게 견성성불 하겠습니까?' 하니, 시리선사는
'불성은 물 속에 있는 달 그림자와 같아서 볼 수는 있으나 잡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라고 말한 바와 같이, 불성은 봄이 없는 마음으로 가히 보는 것입니다."
현종이 묻기를
"어떠한 것이 불성입니까?" 하니,
"폐하께서 물으시는 바를 여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현종 원화(元和) 3년 시적. 향수 74세. 시호는 혜각(慧覺)선사.
[2] 병통 :
공부를 잘못 지어가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대주해(大珠海)선사는 '무자화두' 를 지어가는데 열 가지 병통을 경계한다. 그러나 이것은 "무" 자에만 한한 것은 아니다. 보조지눌 선사도 대혜종고 선사가 공부인에게 다음 열 가지를 경계한 것을 거울삼아 공부하여 대오하였다. 오직 의정을 지어 나갈 줄만 알면 되는 것인데, 다들 꾀를 내고 치구심(馳求心)을 버리지 못하여 온갓 병통에 마구 떨어지는 것이다. 열가지는 다음과 같다.
1. 이근하복탁(耳根下卜度) - 꾀를 내어 생각하여 알아 마치려는 것.
2. 양미순목처타근(楊眉瞬目處楕根) - 눈썹을 오르내리고 눈을 껌벅거리는 곳에 들어앉았는 것.
3. 어로상작활계(語路上作活計) - 말길에서 알아 마침을 삼는 것.
4. 문자중인증(文字中引證) - 글에서 끌어다가 인증을 삼으며 알려하는 것.
5. 거기처승당(擧起處承當) - 들어 일으키는 곳에서 알아 마치려는 것.
6. 양재무사갑리(양在無事甲裡) - 모든 것을 다 날려버리고 일 없는 곳에 들어앉았는 것.
7. 작유무회(作有無會) - 있는 것이라거나 없는 것으로 아는 것.
8. 작진무회(作眞無會) - 참으로 없는 것으로 아는 것.
9. 작도리회(作道理會) - 도리가 그렇거니 하고 알음알이를 짓는 것.
10. 장미대오(將迷待悟) - 깨치기를 기다리는 것.
[3]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 :
교외별전(敎外別傳)을 말한다. 이 말은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이냐는 말이다. 달마조사가 인도에서 오시어 처음으로 동토에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의 선법을 전하시니, 그 문하에 많은 도인이 나왔고 그때 사람들이 많이 이 선법을 배웠는데, 여기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란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전하여 온 특별한 법, 비밀한 도리 곧 불법의 똑바른 이치(佛法的大意)는 무엇이냐는 말이다. 이 조사서래의를 밝히려는 데서 수많은 조사 공안이 나오게 되었는데, 여기 한 예를 들어본다.
한 중이 조주에게 묻기를,
"어떠한 것이 조사서래의 입니까?" 하니,
"뜰 앞의 잣나무니라[庭前栢樹者]."하였다.
중이
"경계를 가지고 말씀하지 마십시요." 하자
"내가 경계를 가져 말하지 않았느니라."하였다.
중이 다시
"어떠한 것이 조사서래의 입니까?" 하자
"뜰 앞의 잣나무니라." 하고 대답하였다.
이 일단의 문답에서 알아듣지 못한 것을 참구하는 것을 "정전백수자 화두" 라고 한다.
[4] 마음이 공(空)하여 :
방거사(龐居士, 마조의 법을 얻다)의 게송에서 취한 말이다.
"시방의 모든 납자 함께 모여서, 모두가 함이 없는 도를 배우니,
이곳은 부처 뽑는 과거장이라, 마음이 공(空)하니 급제하더라.
[十方同聚會 個個學無爲 此是選佛場 心空及第歸]"
5. 영명수 선사 1) 수계
도를 배움에는 기특한 것이 따로 없다.
다만 마음 속에 무량겁으로 내려 오면서 익히고 쌓인
업식(業識) 2) 종자를 씻어 없애는 것이 요긴하다.
너희들이 능히 일체 망상을 털어버리고 망년된 인연을 끊어 없애어,
세간의 모든 오욕 3) 경계를 대하더라도 마음이 마치 목석과 같게 4) 만 되면,
비록 너희가 아직 도안(道眼)이 밝지 못하더라도 자연히 청정신을 성취할 것이다.
만약 진정한 선지식 5) 을 만나거든
모름지기 간절한 마음으로 부지런히 친근하라.
설사 참구하여도 깨치지 못하여 배워도 원만히는 못 이루더라도
묘법은 이근(耳根)에 남아 있어,
길이 무상도리의 종자가 되어 세세생생 악취(惡趣) 6) 에 떨어지지 않고
사람 몸을 잃지 않을 것이니,
한 번 사람 몸을 받아 태어나게 되면 그때는 하나를 듣고 천을 깨칠 것이다.
▒ 용어정리 ▒
[1] 영명(永明) :
(904-875) 항주 혜일 영명연수지각(抗州 永明延壽智覺) 선사다. 청원하(靑原下) 11세가 된다. 천태덕소(天台德韶) 선사의 법을 이었다. 법안종(法眼宗)에서는 제3조가 되고 정토종(淨土宗)에서는 제6조로 잡는다. 속성은 왕(王)씨, 절강성 항주부 여항에서 출생, 소년시절부터 불법에 뜻이 컸고 특히 법화경을 수지독송하여 들에서 암송하면 양떼가 감응하여 엎드려 들었다고 한다.
벼슬을 하여 28세때는 화정진장(華亭鎭將)이 되었더니 그때의 오월(吳越) 문목왕(文穆王)이 그의 도심(道心)이 큰 것을 알고 그의 뜻대로 출가하게 하였다. 처음 취암영명(翠巖永明)을 섬기어 온갖 대중시공을 갖추 받들었고, 그후 천태산 천주봉에 가서 석달 동안을 지냈는데 날짐승이 머리를 앉고 옷소매에 둥지를 쳤다고 전한다.
천태산 덕소(德韶) 국사를 뵈오니, 곧 큰 그릇임을 알아보고 법을 전하면서 이르기를 "너와 왕과는 인연이 있으니 앞으로 크게 불사를 지을 것이다." 하였는데 후에 과연 그와 같았다.
처음에 명주(明州) 영명사(永明寺)에 있었는데 대중이 항상 2천명이 되었다. 영명사에 15년 있는 동안에 제자 천7백인을 제도하였고 천태산에 들어 가서는 1만명에게 계를 주었으며, 저녁에는 귀신에게 시식하고 아침에는 방생하기를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이 하였다.
매일 백여덟 가지 일과 조록을 정하고 지켰는데, 그 중에는 염불만도 10만번이다. 생전에 법화경을 1만3천번을 외웠고, 종경록(宗鏡錄) 백권, 만선동귀집(萬善同歸集) 6권, 유심결(唯心訣) 1권 등 60여부 외에도 수백권의 큰 저술을 남겼다. 고려 광종(廣宗)과는 서신 거래가 많았는데 고려스님이다.
송 태조 개보(開寶) 8권, 대중에게 설법하고 가부좌한 채 입적하셨다. 향수72세.
[2] 업식(業識) :
중생심이 밝지 못하여 망념이 일어나 업이 움직이는 첫모양을 업식이라 한다. 이 업식과 전식(轉識), 현식(現識),지식(智識), 상속식(相續識)을 오식이라 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중생심이 근본무명으로 인하여 망념이 일어나고 거기서 대상이 생기고 다시 그것을 인정하고 집착심을 내며, 그 집착에서 다시 가지가지로 분별교량하는 총체적 상태를 말하고 있다.
[3] 오욕(五慾) :
중생의 욕망 다섯 가지니 물욕(財慾), 색욕(色慾), 식욕(食慾), 명예욕, 수면욕이다.
본래 한물건 없는 가운데에서 무단히 상(相)을 보며, 다시 생명을 보며 분별하고 호오를 보며 취사 집착하여, 본래 걸림없이 자유스럽고 스스로 원만한 자기의 본 곳을 등지고 항상 바깥으로 달리어 얻기에 허덕이는 것이 중생인 것이다.
이 밖으로 얻고져 구하고 치달리는 중생의 마음 취향이 곧 욕심인데 이 욕심을 크게 다섯가지로 나누어 오욕이라 한다. 이 오욕의 근본은 곧 탐(貪)이며 탐의 근본은 애(愛)며, 애의 근본은 우리 본성(本性)의 활성(活性)이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해서 이 오욕자체의 근본은 정추(淨醜)를 떠난 것이라 하겠다.
범부는 전도된 지견으로 애와 탐을 착각된 방식으로 작용시키므로, 우리의 본성이 가지는 전성적(全性的)인 활성(活性)의 역능(力能)은 그 기능이 감소되고 제약되고 비뚤어지므로 여기에서 분별취사의 중생심은 더욱 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부인은 오욕의 근본을 요달하여 다시 취할 것도 없으며 버릴 것도 없어야 한다.
만약 이 오욕의 근본을 요달하지 못하였다면 이 오욕은 인간의 무한 자재 원만성을 좀먹는 도적으로 작용하므로, 반드시 억지 마음을 지어서라도 오욕을 억제하고 없이하여야 하니 그러면 자연 심신이 청정하여지며 오복이 따르게 된다. 계를 가져 천생에 나고, 선행을 닦아 복을 받는 도리가 여기에 있다.
[4] 마음이 목석과 같이 :
백장해(百丈海)선사에게 한 중이 묻기를
"어떻게 하면 일체 경계에 대하여 마음이 목석과 같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일체제법이 본래로 그 스스로가 공이라 하지 않으며 또한 옳으니 그르니 청정하니 하지 않으며, 또한 어떤 마음이 있어 사람을 결박하는 것도 없다. 다만 사람이 스스로 분별, 계교, 사량, 집착하고 알음알이를 내며, 가지가지 지견을 일으키며 애착도 하며 또한 두려운 생각도 내는 것이다.
오직 제법이 본래로 남이 없는(不生)것임을 알며, 자기의 한생각 망상전도로 인하여 상(相)을 취함에서 있게 되는 것을 요달하면 마음이나 경계라는 것이 도무지 실다운 것이 되지 못하는 것임을 알게 되어 즉시 해탈할 것이다" 하였다.
[5] 선지식(善知識) :
앞서 선지식은 생사 없는 도리를 설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공부인은 반드시 선지식을 의지해야 한다. 고인은 모두가 한 표주박 한벌 누더기로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선지식을 구하고 신명을 버려 친근 공양하였다.
경의 말씀에 "말세중생이 선지식을 만나면 도를 이룰 수 있다." 하였고, 또한 말세 선지식의 요건으로 "오직 지견이 바른 사람(正知見人)"을 말씀하고 있다.
[6] 악취(惡趣) :
중생이 지은 업의 경향을 대충 여섯으로 나누어 육취(六趣)라고 하는데, 이 육취에 의하여 육도에 나는 것이다. 육취란 천취, 인취, 수라취, 아귀취,축생취, 지옥취(천취,인취,수라취,아귀취,축생취, 지옥취)를 말하는데 이 중 삼악도에 나는 지옥취, 아귀취, 축생취를 악취라고 한다. 지혜가 없이 악한 업을 많이 지어, 극단으로 고통스럽고 어리석고 복이 없는 보나 따르게 된다.
6. 황룡 사심신 선사 1) 소참 2)
제상좌들이여,
사람 몸은 얻기 어렵고 불법은 참으로 만나기 어려운 것인데
이몸을 금생에 제도 못하면 다시 어느 생을 기다려 제도하겠느냐!
대중들이여, 참선을 하고저 하거든 모름지기 모든 것을 놓아 버려라. 3)
무엇을 놓아 버릴고 하면 이 사대오온 4) 의 심신을 놓아 버리며,
무량겁으로 익혀온 허다한 업식을 놓아 버리라는 것이니,
그리하여 자기의 발밑 5) 을 향하여
"이것이 무슨 도리일고?" 하고 추궁하고 추궁하면
홀연 마음 빛이 활짝 밝아 시방세계를 비추게 될 것이다.
그때는 가이 마음에 맞고 손에도 어울려
능히 대지(大地)를 변하여 황금을 만들고
큰 내를 저어서 소락(酉+禾酪)을 만들 수 있게 될 것이니,
이 어찌 평생이 유쾌하고 시원하지 않으랴.
부디 책자상으로 글귀를 더듬어 선을 찾고 도를 구하는 것을 삼가라.
선은 결코 책자상에 있는 것이 아니니,
설사 일대장교(一大藏敎)와 제자백가(諸子百家)를 다 외운다 하더라도
이것은 다만 한가로운 말뿐이라 죽음에 임하여는 아무런 응처도 없는 것이다.
《평》
이러한 말을 듣고 교법을 훼방하지 마라.
이것은 말이나 문자에만 국집하고 실지 수행을 힘쓰지 않는 것을 경계한 것이요,
글 한 자도 모르는 자를 위하여 붉은 깃대 6) 를 세운 것은 아니다.
▒ 용어정리 ▒
[1] 황룡 사심오신(黃龍死心悟新) :
(1044-1115) 남악하 4세, 황룡조심(黃龍祖心)선사의 법을 이었다. 송나라 인종때 소주(韶州) 곡강(曲江)에서 났다. 속성은 왕씨.
28세에 출가하여 제방을 행각하다가 황룡보각(黃龍寶覺) 선사에게 갔더니 사의 변론이 장한 것을 보고 "이 재주대로 둔다면 마치 말로 음식을 말하는 것과 같으니 어찌 배가 부르겠느냐?" 하였는데, 사가 과연 공부에 진취가 없으므로 하루는 보각스님에게 나아가서 "오신은 이제 활도 부러지고 화살도 다 했습니다. 원컨데 화상께서는 자비를 베푸시어 안락처를 가르쳐 주십시요" 하였다.
보각은 "먼지 하나가 하늘을 덮고 띠끌 하나가 땅을 덮는다. 안락처는 상좌의 그 허다한 골동 살림살이를 가장 꺼리는 것이니, 당장 무량겁래의 온갖 마음을 죽여 없애버려라. 그러면 가히 안락처를 얻을 것이다." 하였다.
이후 사의 공부가 한층 더 간절하여 주야로 정진하였는데 하루는 선실에서 좌선 중에 마당을 지나가는 사람의 지팡이 소리를 듣고 크게 깨치고, 신 벗는 것도 잊고 방장실에 뛰어들어가 보각에게 자랑하기를 "천하 사람들은 모두가 배워 얻었지만 이 오신은 깨쳐 얻었습니다." 하니 보각은 "부처를 고르는데 장원으로 뽑히니 어찌 무슨 말이 당하랴!" 고 칭찬하였다. 이후로 자호를 사심수(死心수-마음이 죽은 사람)라 하고 방에 패 붙이기를 사심실(死心室)이라 하였다.
어떤 사람이, "어떤 것이 말후구(末後句)입니까?" 물으니, 게송으로 답하기를
"말후일구는 마음길 끊어야지, 육근문 공했으니 만법이 생멸 없네,
근원을 사무쳤거니 해탈 구해 무엇하리,
평생을 욕질하기 즐겨하니 이것이 단지 길이 쾌락함인저.
末後一句子 直須心路絶 六根門旣空 萬法無生滅
於此微其源 不須求解脫 生平愛罵人 只爲長快活" 하였다.
송 휘종(徽宗) 정화(政和) 5년 평상시대로 병 없이 앉아서 입적, 향수 72세.
[2] 소참(小參) :
총림에서 새벽상당을 조참(早參)이라하고, 저녁 해거름의 염송을 만참(晩參)이라하고, 그밖의 설법을 소참이라 한다.
[3] 놓아 버려라 :
방하착(放下着). 이 "놓아 버려라."는 말은 종문 중에서 많이 쓰인다. 마음에 있는 소득심(所得心) 번뇌망상 일체를 쉬라는 의미를 가진 것인데 그 유래는 다음과 같다.
한번은 흑씨범지(黑氏梵志)가 신력으로 좋은 오동나무 꽃을 나무채 뽑아서 좌우 손에 한 그루씩 들고 와서 세존께 공양하니,
세존이 "선인아, 놓아라." 하시었다.
범지는 왼손의 꽃을 땅에 놓았다.
세존은 다시 "놓아라." 하시니,
이번에는 바른손의 꽃을 땅에 놓았다.
세존은 또 "놓아라." 하시니,
범지가 말씀드리기를
"세존이시여, 내 이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사온데 다시 무엇을 놓아라 하시나이까?"
"선인아, 내 너에게 그 꽃을 놓아라 함이 아니니라. 너 마땅히 밖으로 육진(六塵)과 안으로 육근(六根)과 중간의 육식(六識)을 일시에 놓아버려 다시 더 가이 버릴 것이 없게 되면, 이곳이 곧 네가 생사에서 벗어나는 곳이니라." 하셨는데, 범지는 언하에 대오하였다.
[4] 사대오온(四大五溫), 사대환신(四大幻身) :
사대는 이 몸과 자연계의 기본 구성요소 4종이니, 지,수,화,풍(地.水.火.風)이다. 오온은 오음(五陰)이라고도 하니 다섯가지의 모아 쌓인 것이라는 뜻으로 색, 수, 상, 행, 식(色.受.想.行.識)이다.
색은 물질이니 우리의 육신과 환경의 전체를 말함이요, 수란 우리의 환경을 받는 감각이요, 상은 접촉할 대상을 분별한 생각이니 곧 표상(表象)이다. 행은 대상에서 얻은 감각에서 좋으니, 나쁘니, 기쁘거나, 성내거나 하는 등 단순한 감각에서 취사분별하는 마음의 움직임이니, 모든 정식(情識)작용을 의미하고 특히 의지나 의욕도 이 속에 든다. 식은 모든 사물에 대하여 생각하고 기억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마음의 주체니, 순수관념(純粹觀念)이다. 이것을 심왕(心王)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이 사대오온이 이 육체와 정신과 세계의 전체다.
그러나 이들 사대오온 이라는 것은 중생의 망견으로 인하여 실다운 것으로 착각할 뿐이지 실상인즉 인연따라 일어나는 환(幻)에 불과하다. 그런고로 이 몸을 4대환신이라고도 한다. 그러면 이 몸도 세계도 생각도 중생도 모두가 환일 바엔 그 무엇이 환이 아닌 것일까?
[5] 발밑(脚下) :
온건착실한 입각처를 말한다.
[6] 붉은 깃대 :
특별히 표한 것이라는 뜻.
한나라 한신(韓信)이 조(趙)를 칠 때 날쌘 기병 2천명을 뽑아서 각각 붉은 깃대를 갖게 하고 이르기를, "내가 싸우다가 달아나면 적은 성을 비우고 나를 쫓을 것이니 그때 성을 들이쳐 조나라 기를 뽑고 이 붉은 기를 쫓아라" 하였다. 붉은 깃대는 여기서 나온 말이다.
7. 동산연선사 1) 제자의 행각에 부침
반드시 "생사" 두 자를 이마 위에 붙여두고 이 일을 분명히 판단하도록 하라.
만약 무리들을 따라 떼를 지어 헛된 이야기로 날을 보낸다면,
후일에 염라노자가 밥값을 추심할 것이니,
그때를 당하여 내가 너에게 미리 일러주지 않았다고 말하지 마라.
만약 공부를 하고저 할진대 항상 간단없이 지어가되
어떤 곳이 힘을 얻는 곳이고 어떤 곳이 힘을 얻지 못하는 곳이며
어떤 곳이 잘못된 곳이고 어떤 곳이 잘못되지 아니한 곳인가를 때때로 점검하라.
혹 어떤 자는 포단에 앉아 마냥 졸기만 하다가,
졸음에서 깨어서는 어지러히 망상만 하며,
포단에서 내려오면 곧 잡된 이야기만 치중하는 것을 보니
이와 같이 공부하여서는 비록
미륵하생(彌勒下生) 2) 에 이르더라도 마침내 얻지 못할 것이다.
모름지기 용맹히 정신을 차려 화두를 들되 밤이나 낮이나
오직 힘써 밀어나갈 것이요, 일 없는 집(無事甲) 3) 에 들어 앉았거나
포단 위에 정신없이 주저앉아 있지 말아야한다.
혹 잡념이 일어 힘써 버려도 더욱 일어나거든
모두를 활활 놓아버리고 조용히 땅에 내려와 한바퀴 거닐은 다음,
다시 포단에 앉아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주먹을 불끈 쥐고
척양골(脊粱骨)을 바르게 세워 다시 전과 같이 화두를 들면
문득 시원함을 느끼는 것이 흡사 끓는 물에 한국자 냉수를 부은 것과 같을 것이다.
이와 같이 공부하면 결정코 집에 돌아갈 4) 시절이 있을 것이다.
▒ 용어정리 ▒
[1] 동산연(東山演) :
오조법연(五祖法演) (?-1104)선사, 남악하 14세. 백운수단(白雲守端) 선사의 법을 이었다. 송나라 면주(綿州)에서 출생, 속성은 등(鄧)씨.
35세에 출가하여 성도에 가서 유식(唯識) 백법론(百法論)을 연구하다가 한번은 "물을 마셔봐야 차고 더운 것을 안다" 는 구절에 이르러 생각하기를 "차고 더운 것을 알기는 하나 이 스스로 아는 물건은 무엇인가" 하고 의심이 나서 강사에게 여러 가지로 물어보아도 아무 말이 없으므로 마침내 말하기를, "스스로 아는 이치를 모르면서 어떻게 강의를 하십니까?" 하니 강사 한참만에 하는 말이 남방으로 불심종(佛心宗)을 찾아가 보라는 것이었다.
이에 여러 선지식을 찾아뵈온 끝에 원조본(圓照本)에게 참예하여 의심을 파하긴 하였으나, 아직도 미진한 바가 있어 부산원(浮山遠)에 참예하였다가 다시 원의 권유로 백운단(白雲端)에게로 갔다. 백운을 뵈어서 조주(南泉?)의 "마니주(摩尼珠) 화두" 를 물으니 백운이 되게 꾸짖는데서 곧 깨치고 게송을 지어바쳤는데,
"산 밑의 한뙈기 밭,
몇 번 팔고 다시 산 그 이유를 노인에게 은근히 물었더니,
송죽(松竹)을 이웃하여 밝은 바람 분다.
山前一片閑田地 又手町영問祖翁
幾度賣來還自買 爲隣松竹引淸風" 하였다.
백운은 "옳다" 하시고 방앗간 일을 맡아 보게 하였다. 얼마 후 백운이 "여러 선객이 노산(盧山)에서 왔는데 다 깨친 바가 있어 저에게 '말하라' 하면 제자가 내유를 말하고, '인연을 들어 말하라' 면 또한 밝게 말하고, 또한 '할 말 일러라' 하면 또한 이르나, 그러나 아직 멀었더라." 하는 말을 듣고, 크게 의심이 나서 혼자 생각하기를,
"이미 깨쳐서 말할 것도 잘하고 밝을 것도 또한 밝은데 화상께서는 어찌하여 아직 멀었다 하실까?"
하고, 마침내 참구하기를 여러 날만에 깨치고 종전에 보배같이 아끼고 간직하던 것들을 일시에 다 놓아 버리고 백운에게 달려가 뵈오니 백운이 춤을 추었다 한다.
한번은 백운이 대중에게 이르기를,
"고인이 말씀하기를 '거울로 모양을 만들 때에 모양이 다된 후에는 거울이 어느 곳에 있느냐?' 하였으니, 대중은 일러라."
하시는데 대중은 아무도 계합하지 못하는데 사에게 물으니
사는 백운에게 나아가 인사하고
"너무도 많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백운은 웃으면서
"도자(道者)만이 아는구나!"하고 이후부터 백운과 같이 죽비를 들고 대중을 지도하였다.
한 사람이 묻기를,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어떻게 더 나아갑니까?" 하니
"빨리 달려야된다" 하였다.
사는 임제종(臨濟宗)의 대종장으로 사면산(四面山) 백운산(白雲山) 태평산(太平山), 오조산(五祖山) 동선사(東禪寺)등에서 크게 교화하여 많은 제자가 나왔다. 사의 법을 이은 이가 이른바 오조문하 삼불(五祖門下三佛)이라고 일컫는 불과(佛果圓悟), 불감(佛鑑慧勤), 불안(佛眼淸遠)등을 위시한 22인이 있다. 송 휘종(徽宗) 숭녕(崇寧)3년, 법문을 마치고 산내 토목 역사를 돌보고는 "너희들 잘들 힘써라. 나는 다시 오지 않는다" 하고 돌아와 삭발 목욕 후 앉아서 갔다.
[2] 미륵하생(彌勒下生) :
당래에 이 사바세계에서 성불할 부처님이 미륵불인데, 미륵하생이란 "오는 세상에 미륵 보살이 도솔천에서 강탄하시어 용화수 아래에서 성도한 뒤 3회 설법으로 모든 중생을 제도하신다" 는 경의 말씀에서 나온 말. "미륵하생까지" 라 하면 흔히 "멀고 먼 미래, 미래가 다한 미래"라는 뜻으로 쓰인다. 여기서도 그 뜻이다.
경에 이르기를 미륵불은 정명(定命) 8만4천세시에 출현하신다 하였고, 석가세존이 열반에 드신 후 8백만 9천2백년에 탄생하신다는 설도 있다.
[3] 일 없는 집 :
무사집(無事甲)을 옮긴 말인데, 화두를 알뜰히 궁구하지는 않고 모든 것을 다 털어 버리고 "도무지 아무 할 일 없다" 하고 멀건히 지내면서 "본래 일 없는 것이다" 라는 알음알이를 짓고 지내가는 것을 "무사갑에 들어 앉았다" 고 한다. 무사갑은 당후(堂後)의 소실(小室)인데 무용처(無用處)라는 말에서 온 말이다. 화두 십종병의 하나.
[4] 집에 돌아간다 :
중생은 제 본곳을 모르고 무지(無知)와 불안 속에서 허둥지둥 눈물과 웃음과 기대와 탄식의 범벅을 먹고 사는 것이니, 이것이 착각(錯覺)의 구름다리를 서성대며 생로병사(生老病死)라는 인생선(人生線)을 어지러히 방황하는 중생살이의 전부이다. 말하자면 본집은 잊어 버리고 객지에서 고생하는 것이니 그 원인은 다름아니고 망견으로 인한 착각이 원인일 뿐이다. 그 망견만 버리면 즉시에 대안은지(大安은地)인 자기 본집에 돌아오게 된다.
그러므로 공부인은 이 도리를 궁구하는 공부가 생사윤회고해삼계(生死輪廻古海三界)인 객지살이에서 사덕(四德) 원만한 대해탈지인 본집에 돌아가는 가장 지름길임을 확신하여야 한다. 공안이야말로 중생을 본집으로 이끄는 가장 빠르고 확실하고 안전한 큰 수래인 것이다.
8. 불적 이암진 선사 1) 보설
믿음이 십분이면 의정이 십분이요,
의정이 십분이면 깨침이 십분이니라.
평생에 본 것 들은 것이나, 그릇된 알음알이나 기특하고 묘한 말귀나,
선도(禪道)니 불법이니와 자기를 높여 아만을 부리는 마음씨 등을
철저히 털어버려라.
오직 요달하지 못한 공안을 향하여 가부좌를 결하고 척량골을 바로 세우고 밤이나 낮이나 동서남북을 분별하지 말고 궁구하여 흡사 숨이 남은 사람같이 되면, 이때에 마음이 경계를 따라 전하여 혹 경계에 부딪치면 지각은 있으나 안으로 자연히 분별하는 생각이 없어지고 마음길이 끊어져서 문득 칠통을 타파하게 될 것이다.
이 사이 소식은 원래 딴데서 오는 것이 아니니, 어찌 어느 때이고 평생이 기쁘고 쾌활하지 않으랴. 중생은 제 본곳을 모르고 무지(無知)와 불안 속에서 허둥지둥 눈물과 웃음과 기대와 탄식의 범벅을 먹고 사는 것이니, 이것이 착각(錯覺)의 구름다리를 서성대며 생로병사라는 인생선(人生線)을 어지러히 방황하는 중생살이의 전부이다.
▒ 용어정리 ▒
[1] 이암진(이庵眞) :
남악하 27세. 법을 소암전(素庵田)대사에 이었다.
9. 경산 대혜고 선사 1) 답함
근일에 자기 안목도 밝지 못하면서 다만 사람으로 하여금 맥없이 "쉬어 가라" 하며, 또한 이르기를 "인연을 따라 마음을 잡으며 생각을 잊고 잠잠히 비추라" 하며, 또한 "모든 것을 상관하지 마라" 하니, 이와 같은 병든 소견으로는 설사 힘써 공부한다 하더라도 마침내 이 일은 마칠 날이 없게 된다.
단지 마음을 한 곳으로만 지으면 아무도 얻지못할 자가 없는 것이니 시절인연이 도래하면 저절로 축착합착 2) 하야 분연히 깨칠 것이다.
항상 세간 육진(六塵) 망상경계로 딸려가는 자기 심식을 잡아서 반야 위에 돌이켜 놓으면 비록 금생에 마치지 못하더라도 임종시에는 결코 악업에 끌리지 않을 것이니 오는 생에는 반드시 반야 중에서 분명히 수용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결정된 사실이라 조금도 의심할 것이 없느니라.
다만 항상 화두를 들어야 하니, 설사 망념이 오더라도
생각으로 막거나 제하려고 하지 말고 오직 힘써 간절하게 화두만을 들어라.
가나 오나 서나 앉으나 항상 화두를 들어,
화두로 오고 화두로 가면 아무 재미도 없게 될 것이니
이때가 참으로 좋은 시절이라 부디 놓아 지내지 말라.
일조에 홀연 마음빛이 활짝 밝아 시방세계를 비추면
능히 한 터럭 끝에 불국토를 나투며 3)
가는 먼지 속에 앉아서 대법륜을 굴릴 것이다.
《평》
사께서 "타인은 정(定)을 앞에 하고 혜(慧)를 후로 한다하나
나는 혜를 먼저하고 정을 후로 하겠다" 하신다.
그러나 화두만 타파하면 이른바 "쉬어가고 쉬어가라" 하는 것은
하려하지 않아도 그대로 되는 것이다.
▒ 용어정리 ▒
[1] 대혜고(大慧고) :
(1089-1163) 임제종의 대종장이다. 남악하 16세, 원오근(圓悟勤)선사의 법을 이었다. 송 철종(哲宗) 원우(元佑) 4년에 선주의 영국(寧國, 지금의 安微省寅城)에서 출생. 속성은 해(奚)씨, 12세에 향고에 글을 배웠는데 장난하다가 벼루를 던진 것이 선생의 모자에 맞아 돈으로 변상하고 돌아와서 생각하기를 "대장부가 세간의 글을 배우느니 출세간의 도를 배움만 같지 않다."하고 출가하여, 동산(東山) 혜운사(慧雲寺)에 가서 혜제(慧濟)스님을 섬기다가 축발하고 종문 제어록을 널리 보았다. 그중 운문(雲門), 목주(睦州) 어록을 가장 좋아하였다 한다. 부모의 권유로 제방에 유학하여 조동종 여러 종사를 섬겨 그 종지를 남김없이 요달하여서 깨친 바가 있었으나 만족하지 아니하고, 여러 종장에 참예하고 담당준(湛堂準) 회상에 시자가 되어 깨친 바가 있었다.
하루는 준(準)이 말하였다.
"너는 이치를 일일이 다 알아 듣느냐?"
"예, 다 압니다."
"네가 말로 할 것은 다하고, 지으라 하는 것은 다 짓고, 고금 선지식의 모든 법문은 다 안다마는 다만 한 가지만이 덜 됐다. 네가 이것을 아느냐?"
"무슨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네가 다만 왁! 한소리(도地一聲) 하나만이 모자란다. 그 까닭에 말할 때는 있고 말하지 않을 때는 없으며, 방장 안에서는 있고 방장 밖에서는 없고, 깨었을 때는 있으나 잠들었을 때는 없으니, 이러고서야 어찌 생사를 당적하겠느냐!"
사 말씀이
"고가 의심하고 있는 곳이 바로 그곳입니다. 앞으로 누구를 의지하면 되겠습니까?" 하니
"극근(克勤)이 하나 있다. 내 그를 만나보지는 못했으나, 네가 찾아가 보아라. 마땅히 너의 일을 판단하여 줄 것이다. 만약에 네가 거기서 판단 짓지 못하거든 저 부처님의 일대장교를 보며 수행하라. 내생에는 결코 참선하여서 이 일을 결정내고 훌륭한 선지식이 될 것이다." 하고 얼마 안가서 준이 열반에 드니, 원오극근(圓悟克勤)을 찾아 갔다.
이곳에서 조석으로 참정하는데 한번은 극근이 말하기를,
"한 중이 운문에게 묻되 '어떤 곳이 제불이 나온 곳입니까?' 하니, 운문 답하기를 '동산이 물 위로 간다.' 하였으니 너 한마디 일러봐라." 하는데 계합하지 못하여 1년을 참구하면서 49회나 대답하였으나 다 인가를 받지 못하고 있더니, 하루는 한 거사집에서 극근이 설법하는데 "한 중이 운문에게 묻기를 '어떤 곳이 제불이 나온 곳입니까?' 하는데 운문은 '동산이 물 위로 간다.' 하였지만, 천녕(天寧)은 그렇지 아니하여 누가 와서 '어떤 곳이 제불이 나온 곳이냐?' 하면 '훈풍이 남쪽에서 불어오니 집안이 시원해진다.' 할 것이다." 함을 듣고 활연히 깨쳤다.
깨친 바를 극근에게 말하니 가지가지로 시험하여 보고는
"아직 멀었다. 네가 비록 얻은 바는 없지 않으나 아직 대법 밝지 못했다." 하고 하루는
"너의 그 경지에 이르는 것도 쉽지는 않은 일이지만 다만 죽기만 하고 능히 살아나지 못했으니, 언구를 의심치 않는 것이 큰 병통이다. 낭떠러지에서 손을 놓고 뛴다고 하는 것은 스스로 승당할 수 있으나, 죽었다 다시 살아나는 것은 남을 속이지 못한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느냐! 모름지기 이런 도리가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였다.
사 말이 "고는 지금의 얻은 것으로 이미 쾌활하니 다시 더 알아 얻을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으나, 근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후는 매일 서너번씩 입실하는데 근은 매양 "있으니 없느니가 나무에 의지한 등넝쿨과 같다(有句無句如藤기樹)" 는 공안을 가지고 힐난하면서 입실하여 입을 열기만 하면 "틀렸어! 틀렸어!" 하여 이러기를 반년이 넘도록 인가를 받지 못하고 생각 생각에 잊지 않고 지내는데, 하루는 관객들과 식사를 하다가 사가 손에 수저를 들은 것도 잊고 멍멍히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근이 웃으면서
"저 놈이 황양목선(黃楊木禪,진취가 없는 공부)을 하여 도리혀 쭈그러지는구나." 하는데
사가 비유를 들어 말씀드리기를
"화상이시여, 이 도리는 흡사 개가 뜨거운 기름가마를 본 것과 같아서 핥을려야 핥을 수도 없고 버리고 갈려야 버리고도 못가는 것과 같습니다." 하였더니
근이
"그 비유가 극히 좋다. 단지 그것이 금강석으로 된 밤송이다." 하였다.
또 하루는 근에게 묻기를,
"화상께서 오조에 계실 때 오조화상께서 이 공안을 들으셨다 하온데, 그때 오조화상에게 어떻게 대답하였는지 가르쳐 주십시요."
하였으나 근이 묵묵히 응하지 않으니, 사가
"그때 대중 앞에서 말씀하셨을 터인데 이제 다시 말씀 하셔서 안될 것이 있겠습니까!" 하니, 근이 드디어,
"내가 그때 묻기를
'있느니 없느니가 나무에 의지한 등넝쿨 같은 때는 어떠합니까?' 하니 오조말씀이
'말로 형용할 수도 없고 그림으로 그릴 수도 없느니라' 하시기에 또 묻기를
'문득 나무도 쓰러지고 등(藤)도 말라 죽었을 때 어떠합니까?' 하니
'서로 따라 오느니라' 하시더라." 하는데,
사 곧 깨치고 근에게 "제가 이제 알았습니다." 하니 근은 "아직 네가 저 공안을 뚫지 못하였을까 걱정이다." 하고 여러가지 까다로운 공안을 들어 대어도 조금도 걸림이 없으니 이에 근은 손벽을 치며 기뻐하였다.
이후로는 병의 물을 거꾸로 세운 것 같고 둥근 바위를 천길 언덕에서 내굴리는 것과 같아서 아무도 그 기봉을 당하는 사람이 없으니 혹 근에게 누가 와서 참문하면 "나의 저 선자(禪者)가 마치 큰 바닷물과 같으니 너희들은 저 큰 바닷물에 가서 물어 가라." 하였다. 이때부터 극근과 분좌설법하고 낙자를 제접하니 그 이름이 총림에 떨쳤다.
극근이 운거사(雲居寺)에 옮기자 거기서 제일좌(第一座)가 되고, 극근이 성도(成都)로 떠난 뒤는 여러 곳을 거쳐 경산(俓山,절강성 여항현)에 있었는데 낙자 도속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대중이 항상 2천명이 넘어 종풍을 크게 떨치니, 세상 사람들은 임제(臨濟)의 재흥이라 하였다. 소흥(紹興) 11년(서기 1141년 송 고종때) 진회(秦檜)의 모함으로 제자 장구성(張九成)당으로 정사를 비방하였다는 구실로 의첩(衣牒)을 빼앗기고 형주(衡州)로 귀양갔다.
여기서 10년 있는 동안, 고인의 기연(機緣)을 모으고 염제(拈提)를 가하여 정법안장(正法眼藏)을 썼고, 다시 매주(梅州)로 옮겼다. 이곳은 기후가 불순하고 악병이 돌고 약이라고는 아주 없는 곳이었으나 여기서도 한여름에 13명의 큰 법 그릇을 만들어 내기까지 하였다. 이곳에서의 신고는 말할 수 없었으니 사가 귀양갈 때 사를 따라갔던 제자가 백여명이었는데 이 지방의 풍토병에 걸려 반수 이상이 죽었다. 가히 고인의 위법망구(爲法忘軀) 정신을 엿보게 한다.
여기서 5년만에 소흥 26년 효종(孝宗)의 특사를 받고 북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68세였다. 사방에서 청하여도 가지 않더니 칙명으로 명주(明州) 아육왕산(阿育王山) 광리선사(廣利禪寺)에 갔다가 곧 다시 칙명으로 경산에 돌아왔다. 효종은 보안군왕(普安君王)때부터 사의 가르침을 받은 바 있었으므로 사를 극진히 공경하였다.
만년에 묘희암(妙喜庵) 명월당(明月堂)에 퇴거, 여기서 입적하였다. 효종 융흥(隆興) 원년이다. 향수 75세. 사의 저술로는 앞서 말한 정법안장(正法安藏) 6권, 대혜어록(大慧語錄) 30권, 법어(法語) 3권, 종문무고(宗門武庫) 1권, 서장(書狀) 2권, 대혜선사보설(大慧禪師普說) 5권이 있고, 법을 이은 제자가 94인이 된다. 가이 가풍의 성한 것이 짐작된다.
사가 교화한 가운데 특히 힘써 주장한 것은 천동정각(天童正覺)이 주장한 묵조선(默照禪)을 타파하고 활구선(活句禪)을 강조한 것이다.
임종에 당하여 시자가 유게(遺揭)를 청하니, "송 없이 갈 수 없다." 하고 붓을 들어 큰 글자로
"생(生)도 다만 이러하고 사(死)도 다만 이러한데,
게송이 있던 없던 이것이 무슨 큰 일이냐?" 쓰고는 붓을 던지고 갔다.
[2] 축착합착 :
속이 그대로 "척척" 들어 맞는다는 뜻.
[3] 터럭 끝에 불국토 :
능엄경에서 "하나가 무량이 되고, 무량이 하나가 되며,
적은 것으로 크게 나투고 큰 것으로 적게 나투며
도량을 움직이지 않고 시방세계에 두루 하고,
한 몸속에 시방 무진 허공을 머금으며
한터럭 끝에 보왕찰(寶王刹)을 나투고
가는 먼지 속에 앉아서 대법을 굴린다." 하고 있다.
10. 몽산이 선사 1) 시중
내 나이 20에 이 일을 있음을 알고, 32세에 이르도록 십칠팔의 장로에게 참예하여 법문을 듣고 정진하였으나 도무지 적실한 뜻을 알지 못하였었다.
후에 완산(脘山)장로께 참예하니 "무" 자를 참구하라 하시며 말씀하시기를,
"12시중에 반드시 생생한 정신으로 지어가되,
마치 저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와 같이 하고
닭이 알을 품듯이 끊임이 없이 하라.
만약 투철히 깨치지 못하거든 취가 나무궤를 썰듯이
결코 화두를 바꾸지 말고 꾸준히 지어가라.
이와 같이 지어가면 결정코 발명할 시절이 있을 것이다." 하시더라.
그로부터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부지런히 궁구하였더니 18일이 지나서 한번은 차를 마시다가 문득 "세존이 꽃을 들어 보이심에 가섭이 미소한 도리" 를 깨치고 환희를 이기지 못하여 34장로를 찾아 결택 2) 을 구하였으나 아무도 한 말씀 없으시더라.
어떤 스님이 이르시기를,
"다만 해인삼매 3) 일인으로 인정하고 다른 것은 모두 상관하지 마라."
하시기에 이 말을 그대로 믿고 두 해를 지내갔다.
경정(景定) 4) 5년 6월에 사천의 중경(重慶)에서 이질병에 걸려 밤낮 백번 위극이 극심하여 곧 죽을 지경에 빠졌으나 아무 병거할 힘도 없으며 해인삼매도 아무 용맹없고, 종전에 좀 알았다는 것도 또한 아무 쓸데가 없어, 입도 달삭할 수 없고 몸도 꼼짝할 수 없으니 남은 길은 오직 죽음 뿐이라, 업연 경계가 일시에 나타나 두렵고 떨려 갈팡질팡 할 뿐 어찌할 도리없고 온갖 고통이 한꺼번에 핍박하여 오더라.
그때에 억지로 정신을 가다듬어 가족에게 후사를 분부하고, 향로를 차려놓고 좌복을 높이 고이고, 서서히 일어나 좌정하고 삼보와 용천에게 묵도하기를,
"이제까지의 모든 불선업(不善業)을 지심회과 하옵나니
원하옵건데 이몸이 이제 수명이 다 하였거든
반야의 힘을 입어 정녕대로 태어나서 일찌기 출가 5) 하여 지오며,
혹 병이 낫게 되거든 곧 출가하여 중이 되어 속히 크게 깨쳐서
널리 후학을 제도하게 되어지이다."
이와같이 하고 저 "무" 자를 들어 마음을 돌이켜 6) 스스로를 비추고 있으니 얼마 아니하여 장부(贓腑)가 서너번 동하는 것을 그대로 버려두었더니 또 얼마 있다가는 눈꺼풀이 움직이지 않으며, 다시 얼마 있다가는 몸이 없는 듯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화두만이 끊이지 아니하더라.
밤 늦게서야 자리에서 일어나니 병이 반은 물러갔기에 다시 앉아 3경 4경에 이르니 모든 병이 씻은 듯이 없어지고 심신이 편안하고 아주 가볍게 되었다.
그리하여 8월에 강릉에 가서 삭발하고 일년 동안 있은 후 행각을 나섰더니 도중에 밥을 짓다가 생각하기를, "공부는 모름지기 단숨에 해마칠 것이요, 단속(斷續)이 있으면 아니될 것이라" 깨닫고, 황룡에 이르러 당으로 돌아 갔었다.
첫번째 수마(睡摩)가 닥쳐 왔을 때는 자리에 앉은 채 정신을 바짝 차려서 힘 안들이고 물리쳤고 다음에도 역시 이와 같이 하여 물리쳤으며, 세번째에 수마가 심하게 닥쳐왔을 때는 자리에서 내려와 불전에 예배하여 떨쳐 버리고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앉으니 규식이 이미 정한지라 그때그때 방편을 써서 수마를 물리치며 공부하였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목침을 베고 잠깐 잤고 뒤에는 팔을 베었고 나중에는 아주 눕지를 아니하였다. 이러히 하여 23일이 지나니 밤이고 낮이고 홀연 눈앞의 검은 구름이 활짝 열리는 듯하고 몸이 흡사 금방 목욕에서라도 나온 듯 심신이 청쾌하며 마음에는 의단(疑團)이 더욱 더욱 성하여 힘들이지 않아도 끊임없이 현전하며, 일체 바깥경계의 소리나 빛깔이나 오욕 팔풍(八風) 7) 이 모두 들어 오지 못하여 청정하기가 마치 은쟁반에 흰눈을 담뿍 담은 듯하고 청명한 가을 공기와도 같았다.
그때 돌이켜 생각하니 공부경계는 비록 좋으나 가히 결택할 길이 없어서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승천(承天)의 고섬(孤蟾)화상 회상에 이르러 당에 돌아와 스스로 맹세하기를, "확연히 깨치지 못하면 내 결코 단(單)에서 일어나지 않으리라" 하고 배겨냈더니 월여에 다시 공부가 복구되었다.
그 당시 온몸에 부스럼이 났는데도 불구하고 목숨을 떼어놓고 공부를 지어 자연히 득력하여 병중 공부를 지어 얻었으며, 재에 참여하려고 절에서 나와 화두를 들고 가다가 재가(齋家)를 지나치는 것도 알지 못하고 하니 이러히하여 다시 동중공부(動中工夫)를 지어 얻으니 이때의 경계는 마치 물에 비친 달과도 같아 급한 여울이나 거센 물결 속에서 부딛쳐도 흩어지지 아니하며 탕연히 놓아 지내도 또한 잊혀지지 아니하여 가히 활발한 경지였느니라.
3월 초6일 좌선중에 바로 "무" 자를 들고 있는데 수좌가 당에 들어와 향을 사르다가 향합을 건드려 소리가 나는데 "왁!" 한 소리 8) 치니 이윽고 자기 면목을 요달하여 조주를 착파하였던 것이다.
그때 게송을 짓기를
"어느덧 갈 길 다 하였네
밟아 뒤집으니 물결이 바로 물이로다.
천하를 뛰어 넘은 노조주(老趙州)
네 면목 다못 이뿐이런가" 하였다.
그해 가을 임안(臨安)에서 설암(雪巖) 퇴경(退耕) 석범(石帆) 허주(虛舟)등 여러 장로를 뵈었더니 주장로는 완상장로께 참청하기를 권하시기에 이윽고 산장로를 뵈오니 묻기를, "'광명이 고요히 9) 비춰 온 법계에 두루했네' 의 게송은 이것이 어찌 장졸수재(張拙秀才) 10) 가 지은 것이 아니냐?" 하시는데 내가 대답하려하자 벽력같은 "할" 11) 로 몰아치셨다.
이로부터 서나 앉으나 음식을 먹으나 아무 생각이 없더니, 그로부터 6개월이 지난 다음해 봄, 하루는 성을 나왔다가 돌아오는 길에 돌층계를 올라가다가 홀연 가슴 속에 뭉쳤던 의심 덩어리가 눈 녹듯하니, 이 몸이 길을 걷고 있는 줄도 알지 못하더라.
곧 산장로를 찾으니 또 먼저번 말을 하시는 것을 언하에 선상을 들어 엎었고 다시 종전부터 극히 까다로운 수칙의 공안을 들어대시는 것을 거침없이 확연히 요달하였느니라.
여러 인자들이어, 참선은 모름지기 자세히 하여야 한다. 산승이 만약 중경에서 병들지 않았던들 거의 평생을 헛되이 마쳤으리라. 참선에 요긴한 일을 말한다면 첫째 정지견인(正知見人)을 만나는데 있다 하겠다. 이 까닭에 고인은 조석으로 참청하여 심신을 결택하고 쉬임없이 다시 간절히 이 일을 구명하였던 것이다.
《평》
타인은 병으로 인하여 퇴타하나, 이 장로는 도리어 병을 가지고 더욱 정진하여 마침내 큰 그릇을 이뤘으니 어찌 이를 덤덤히 보아 지내랴. 참선인은 병이 있거든 마땅히 이를 거울삼아 간절히 힘써야 한다.
▒ 용어정리 ▒
[1] 몽산 :
남악하 21세. 완산정응(脘山正凝) 선사의 법을 이었다. 이름은 덕이(德異)인데, 때로는 고균비구(古鈞比丘) 또는 전산화상(殿山和尙), 휴휴암주(休休庵主)라고도 한다. 강서성(江西省) 여릉도(廬陵道) 시양(時陽)에서 출생.
사가 교화한 시기는 원나라 세조(世祖)때이며, 우리나라 고려 충렬왕 때로 우리나라 고승들과 문필거래가 많았고 특히 사의 저서 법어략록(法語略錄) 수심결(修心訣)등은 이조때에 와서 우리글로 번역되기까지 하였다.
[법어일단]
마땅히 조주의 면목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하니,
저 "無" 자의 뜻이 무엇인가를 일러내어야 한다.
준동함령(蠢動含靈)이 모두가 불성이 있거늘
조주는 어째서 "없다" 하였는가?
필경에 저 "무" 자는 그 의미가 어느 곳에 있는 것일까? 본래로 밝은 이 도리를 아직 밝혀내지 못하였으면 모든 것 하나하나가 의심감일 것이니 참으로 큰 의정 하에서 큰 깨침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깨치기를 기다리는 생각이 있어서는 아니되며,
또 한 생각에 깨치기를 구하지 말며,
있는 것이나 없는 것으로 알지 말며,
텅 비어 아주 없는 것으로 알지 말며,
쇠 빗자루로 쓸듯이 짖지 말며,
나귀를 매는 말뚝같이 의정없이 화두에 매어있지 말고,
저 의단(疑團)을 26시중 사위의(四威儀) 내에 더욱더욱 성성하게 하여
다만 "無" 자 만을 들어서 빈틈없이 마음을 돌이켜 스스로를 살펴,
가나 오나 서나 앉으나 의정으로 오고 의정으로 가면 온갖 재미가 없게 되리니
그때에 조금이라도 재미를 내면 이때에 도리어 번뇌가 생기는 것이다.
이와 같이 지으면 화두에 의정이 커져서 화두를 들지 않아도 자연히 현전하게 될 것이니 이때를 당하면 환희한 마음을 내지 말고 좋고 나쁘고 괘의치 말고 마치 늙은 쥐가 나무를 썰듯이 한결같이 "無" 자를 들고 나아가야 한다.
좌선중에 묘하게 정력(定力)을 얻으면 공부에 도움이 되나 이런 때는 부디 정(定)의 묘한 것에 힘을 두지 말아야 하니, 만약 정력에 힘을 쓰면 오히려 정의 경계가 흩어지는 것이다.
혹 능히 마음을 잘 지어 정(定)에 들었다 하더라도, 정을 탐하여 화두를 잊으면 아니되니 만약 화두를 잊으면 공(空)에 떨어지고 묘오(妙悟)는 얻지 못한다.
정에서 일어날 때 또한 반드시 정력을 잘 간직하여 동정(動靜)중에 항상 한결같이 하여 혼침이나 산란심을 아주 끊어야하며 또한 환희한 생각을 내지 말아야 하니, 이중에 홀연 "왁!" 한소리(방地一聲) 쳐, 조주의 관문을 뚫고 지나가 낱낱 공안에 모두 밝고 조사기붕에 일일이 다 계합하여 조주를 감파하고 생각으로 이룰 수 없는 곳에 이르러 모든 법에 뚜렷이 통하여 가지가지 차별인연에 모두 밝으며, 깨달은 후 일용 생애가 또한 그러하지 않으면 어찌 법그릇을 이루었다 하랴.
마땅히 먼저 지나가신 성인들의 표준될 격도를 잘 살려서 부디 소홀하게 알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2] 결택(決擇) :
의심을 결단하여 이치를 분별하는 것인데, 이것이 종문에서는 극히 중요시 된다. 그것은 공부인의 안목을 검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개 공부를 지어 깨치는 정도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선지식이라야 그 정부(正否)와 심천(深淺)을 가려보고 판단하여 삐뚤어졌으면 올바르게 잡아주고 얕게 깨쳤으면 깊게 인도한다. 스승없이 혼자 깨친 것은 혹 없지 아니하나 이때에도 반드시 선지식을 찾아 인가를 받는 것이다.
[3] 해인삼매(海印三昧) :
해인정(海印定)이라고도 한다. 일체번뇌가 끊어져 맑은 마음이 현전하여 진여법이 명랑히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기신론(起信論)에는, "무량공덕을 갖춘 법성진여의 바다라, 소이로 해인삼매라 한다" 고 하고 있다.
[4] 경정(景定) :
송나라 제13대 이종(理宗)때의 년호, 5년은 서기 1264년.
[5] 출가(出家) :
수도를 위하여 가정을 나오는 것을 말하는데 흔히 중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신출가(身出家)에는 반드시 정신적으로 번뇌망상 사견(邪見) 삼독(貪心,성냄, 어리석음)의 불집에서 뛰어 나오는 이른바 심출가(心出家)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러한 출가를 진출가라 할 것이지만 이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부용개(芙蓉槪)선사 시중에 "무릇 출가라 하는것은 진로 망상을 멀리하고 생사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마음을 쉬고 생각을 식혀 모든 반연을 끊기 때문에 출가라고 말하는 것이다. 어찌 한가한 것에 재미를 삼아 매몰할까 보냐" 하고 있다.
[6] 마음에 돌이켜 :
불법은 밖에서 구하여 얻는 것이 아니고 자신에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법의 모든 공부 방식은 마음을 돌이켜 자신의 마음을 살피는 것이니 이것을 회광반조(廻光返照)라하여 공부의 기본 방식이 된다. 앞서의 경산 대혜선사의 법어에도 "항상 세간 육진망상 경계로 달려가는 자기의 심식을 잡아서 반야위로 돌이켜 놓아라" 하심을 본다. 이때의 반야는 정념(正念)을 말한다.
[7] 팔풍(八風) :
"여덟가지 바람" 이란 말이니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서 어지럽게 동하게 하는 여덟가지다.
1. 이(利) - 나에것 이익 되는 것,
2. 쇠(衰) - 세력이 줄어드는 것.
3. 훼(毁) - 나를 비난하는 것.
4. 예(譽) - 이름이 좋게 드러나는 것.
5. 칭(稱) - 마음에 맞는 것.
6. 기(기) - 비웃는 것.
7. 고(苦) - 고생되는 것.
8. 락(樂) - 즐거운 것 등이다.
[8] 왁! 한소리 (방地一聲):
의정이 타파되는 형용인데 칠통이 탁! 터질 때를 형용하는 말이다. 이말은 무거운 물건을 들때 얼결에 오!하는 소리에 서 취해온 것.
[9] 광명이 고요히 :
장졸수재(張拙秀才)의 게송이다.
"광명이 고요히 온 법계를 두루 비춰
성현 범부 중생으로 한 집을 이루었네
한 생각 잠잠하면 온 몸이 드러나나
한 생각 움직이자 구름 속에 파묻히네
번뇌망상 끊을지면 더욱 더욱 어긋나며
참 이치를 찾는다면 삿된 길에 빠짐이라
세상인연 수순하여 가나오나 걸림없고
성불이나 지옥고나 한가지 헛것일세"
[10] 장졸수재(張拙秀才) :
성은 "장", 이름은 "졸" 이다. 당시 선비를 뽑는데 효렴(孝廉) 수재(秀才)의 두칭이 있었는데, 졸은 이 수재에 뽑힌 것이다. 청원(靑原行思)하 6세로 석상경제(石霜慶諸)선사의 법을 이었다. 처음 석상에게 참예하니 묻기를
"네 이름이 무엇이냐?"
"성은 장이고 이름은 졸입니다."
"공교한 것도 오히려 얻을 수 없는데 졸이 어데서 왔느냐?" 하는데서 홀연히 깨치고 위의 게송을 지어 바쳤다.
[11] 할(喝) :
종문에서 법을 문답하는데 쓰는 한 법어인데 큰소리로 "엑!" 하고 꾸짖는 형세를 짓는 것. "할" 을 처음 쓴 것은 마조인데, 임제가 많이 써서 지금에 "임제할" 이라는 말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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