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관책진(禪關策進)

선관책진(禪關策進) - 어록 모음(4)

실론섬 2015. 8. 28. 10:06

31. 천목 중봉본 선사 1) 시중


   형제들, 입만 열면 곧 내가 선화(禪和)라 하나

   혹 사람이 묻기를 "어떤 것이 선인고?" 하면,

   어름 어름 하다가 마침내 입이 흡사 목두대(扁擔) 2) 같이 되고 마니

   이 어찌 딱한 일이 아니며 굴욕이 아니랴!


   버젓이 불조의 밥은 처먹고 본분사는 까맣게 알지 못하면서,

   다투어 말귀나 세속 지식을 가지고 조금도 기탄 없이 큰 소리로 떠들며,

   그러고도 온전히 부끄러운 줄을 모르며,

   또 어떤 자는 포단에 앉아 "부모가 낳기 전 면목" 은 구명하려 하지 않고

   부질없이 품팔이 방아 3) 나 찧으면서 복이 되기를 바라며 업장을 참회한다 하니

   참으로 도와는 10만 8천리로구나!


   혹 마음을 한 곳으로 굳히고 생각을 거두어서,

   사(事)는 잡아 공(空)으로 돌리며, 생각이 겨우 일기만 하면 곧 늘려 막는다면,

   이러한 견해는 공에 떨어진 외도며 흔히 돌아오지 않은 죽은 사람이다.


   혹 어떤 자는, 망녕되이 능히 성내고 기뻐하며 보고 듣는 물건을 가져

   명백히 알아 마친 것으로 삼고 일생 공부 다 해마쳤다 하니,

   내 잠깐 그대에게 묻겠다.


   "문득 죽음이 닥쳐와 불구덩이 속의 한줌 재가 되면

   저 능히 성내고 기뻐하고 보고 듣는 물건이 어느 곳에 있느냐!"


   이와 같이 공부를 짓는 것을 "약홍 은선(藥汞銀禪)" 4) 이라 하는 것이니

   이 은(銀)은 원래 참 은이 아니므로

   한 번 불에 달이면 곧 흘러내리고 마는 것이다.


   혹 묻기를 "너 평시에 어떻게 공부를 짓느냐?" 하면

   대답하기를 "어떤 스님이 이르시기를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니 하나는 어디로 가는가?' 를 간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며


   또는 "나로 하여금 다만 이러 이러하게 알라 하시오나

   금일에야 비로소 이런 것이 아닌 것을 알았아오니,

   청하옵건데 화상께서는 화두를 일러 주옵소서" 한다.

   

   내 말하기를 "고인의 공안에 어찌 잘못이 있으랴.

   너의 눈이 본래 바르건만 스승으로 인하여 그릇되었구나!" 하니

   거듭 화두 이르기를 청하여 마지 않기에 내 이르기를


   "너 '개는 불성이 없다' 는 화두를 참구하라.

   만약 홀연히 칠통을 타파하더라도 다시 돌아와 산승 손에 방망이를 맞으라"

   하였느니라. 


《평》


천여(天如) 이하는 모두 원말(元末)과 명초(明初)의 존숙(尊宿)인데 저 걸봉(傑峰), 고졸(古拙), 초석(楚石)같은 분은 즉 원명 양대를 지낸 분이다. 초석은 묘희(妙喜-大慧)의 5세손인데 그 견지는 해가 빛나고 달이 밝은 것과 같으며, 그 기변은 우뢰와 같이 맹렬하고 바람과 같이 빨라서 근원을 바로 끊고 5) 곁가지를 쳐버리는 것이 참으로 묘희노인에 부족함이 없느니라.

   

천여는 금일에 이르도록 그 아름다움을 짝할 사람이 없으니 그의 말은 모두가 향상(向上)의 극칙사만을 들어 말하였으므로 초학인으로 하여금 공부짓기를 가르친것은 극히 드물어 여기에는 그 하나 둘을 얻어 위와 같이 적는다.


▒ 용어정리 ▒


[1] 초석범기(楚石梵琦) :

(1296-1270) 남악하 20세, 법을 경산(徑山) 원수단(元수端)선사에 이었다. 명주(明州) 상산(象山)에서 출생. 속성은 주(朱)씨. 그의 모 장씨가 꿈에 해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회임하였고, 낳아서 아직 감보 속에 있을 때 어떤 스님이 와서 아기의 이마를 만지면서 "이것이 불일(佛日)이니 후일에 능히 어둠을 파할 것이라" 하였다 하여, 어려서 이름은 담요(曇耀)라고 하였다.

   

7세에 독서하니 한번 읽고 대의를 통했고, 9세에 출가하고 능엄경을 보다가 깨친 바가 있었다. 그 후 원수단 선사에 참예하여 계합하지 못하고 하루는 성루의 북소리를 듣고 홀연 땀을 비오듯 흘리더니, 마침내 깨치고 말하기를

"이제야 경산의 콧뿌리를 손에 잡았다" 하고, 게송을 짓기를


"활활 타는 화로 속에 한 점 눈을 버리고 나니,

이것이 황하(黃河)의 유월 얼음이라" 하였다.

다시 경산으로 단화상을 찾으니 단은 한 번 보고 "서래밀의(西來密意)를 네가 알았구나!" 하고 인가하였다. 그후 출세하여 대보사(大寶寺)를 창건하였는데, 거기에는 천불성상과 25 장(丈)의 7층부도, 그리고 만불각(萬佛閣)등 그 웅려하기가 천궁을 옮겨논 것과 같았다고 한다. 그때에 나라(元)에서 불일보조혜변(佛日普照慧辯) 선사의 호를 드렸으니, 앞서의 예언이 적중하였다.


임종계에


"진성이 뚜렷이 밝아 본래로 생멸 없으니,

목마(木馬)가 밤에 울고, 서쪽에서 해가 뜬다

(眞性圓明 本無生滅 木馬夜鳴 西方日出)."


하고 곁에 있던 몽당(夢堂)화상에게

"나는 이제 가렵니다."

"가면 어디로 가시오?"

"서방(西方)으로 가지."

아! 서방에만 불이 있고 동방에는 불이 없소!" 하니,

사 큰 목소리로 한 "할" 하고 그만 갔다.


명태조 3년이다. 향수75세. 저서로 육회어록(育會語錄), 정토시(淨土詩), 상생게(上生偈), 북유집(北遊集), 봉산집(鳳山集), 서재집(西齋集), 화천태삼성집(和天台三聖集) 등을 남겼다.


[2] 목두대 :

목두대는 배가 부르고 양쪽 끝이 가느르니, 이것은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못하는 모양에 비한 것이다.


[3] 품팔이 방아 :

진실한 뜻은 알지 못하고 "예불" 만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꾸벅 꾸벅 방아를 찧으나 그것이 자기의 방아가 아니고 품삯을 받고 찧는 남의 방아라는 것이다. 오대(五臺) 무상(無相)선사 시중에

"너희들은 흙덩이 부처(泥佛)만 보면, 흡사 방아를 찧는 것과 같이 하고 일찌기 그 뜻은 없구나!" 하고 있다.


[4] 약홍은선 :

공부는 모름지기 실다워야 하니 반드시 명안종사의 감변(堪辯)을 거쳐야 한다. 고래로 스승없이 깨치기는 만중희유라고 하고 있다. 여기 약홍은선이란 실지가 없는 거짓 공부란 말인데, 수은을 홍(汞)이라 한다. 이것은 금이나 은을 제련할 때 불에 달리면 금이나 은은 달리면 달릴수록 더욱 분명하여지나 수은이면 단번에 흘러 버리는 것이니, 이것을 명안종사의 감변을 견디어 내지 못하는 실없는 공부에 비한 것이다.


[5] 근원을 끊고 :

증도가에 "근원을 바로 끊음을 불이 인가하시는 바요, 가지를 더듬고 잎을 따는 것은 나로선 못하는 일이라" 하고 있다.


32. 고려 보제선사 1) 이상국에게 답함


   이미 일찌기 "無" 자 화두를 들었을진대 반드시 화두를 고칠 것이 없느니라.

   더우기 다른 화두를 들어도 어느덧 "無" 자가 들린다 하니,

   이는 반드시 "無" 자에 이미 적지않이 익음이 있음이니,

   부디 뜻을 옮기지 말며 화두를 바꾸지 마라.


   다만 26시 중 4위의(行住坐臥)내에 한결같이 화두를 들지니,

   어느 때에 깨치고 못깨칠 것을 생각하지 말며

   또한 재미가 있고 없고 득력하고 득력 못하고에 개의하지 말고

   오직 생각이 미치지 못하고 분별이 끊어진 곳에 밀어대어 이르러야 하니

   이곳이 즉 제불 제조사가 신명을 버린 곳이니라.


《평》


이 어록은 만력 정유년에 복건(福建)의 허원진(許元眞)이 동정(東征) 2) 하였을 때 조선에서 얻어온 것이라, 중국에는 아직 없는 것이기에 그 요점만을 적어서 이에 알게 한다.


▒ 용어정리 ▒


[1] 보제(普濟) :

(1320-67) 우리나라 조도(祖道) 중흥조인 고려의 나옹(懶翁)스님이다. 위는 혜근(慧勤). 고려 충숙왕 7년에 영해에서 출생. 속성은 아(牙)씨. 사의 모 정씨 꿈에 금빛 매가 와서 그의 머리를 쪼고 알을 품에 떨어뜨리고 간 것을 보고 잉태하였다 한다.

   

어려서 출가하고저 하는데 부모가 허락하지 않더니, 20세에 이르러 이웃 동무가 죽는 것을 보고, 죽으면 어디로 가느냐고 사방에 물어 보았으나 시원한 대답을 들을 수 없으므로 비통한 생각이 들어 마침내 사불산 묘적암 요연(了然)스님에게 출가하였다.

   

요연이 묻기를 "너 왜 머리를 깎고저 하느냐?"

"삼계를 뛰어나 중생을 이익하고져 합니다."

"여기 온 것이 무슨 물건이냐?"

"말하고 듣고 하는 것이 능히 왔습니다마는 보려고 하여도 볼 수 없고 찾으려 하여도 찾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공부하면 되겠습니까?"

"나도 너와 같아서 알 수 없으니 다른 스님을 찾아 물어라."

   

이에 사는 그곳을 떠나서 여러 곳을 다니다가 1344년 양주 회암사(檜巖寺)에 이르러 여기서 4년동안 주야 장좌하고 극진히 좌선하여 마침내 깨친 바가 있었다. 그후 원(元) 북경에 가서 지공(指空)스님을 찾아갔다. 지공은 서천(西天) 제108대 조사다.

   

지공 묻기를

"네가 어디서 왔느냐?"

"고려에서 왔습니다."

"배로 왔느냐, 육지로 왔느냐, 신통으로 왔느냐?"

"신통으로 왔습니다."

"신통을 나투어 보라."

가 차수하고 가까이 가서 서니, 다시 묻기를

"네가 고려에서 왔다니 동해는 다 보았느냐?"

"아니보았던들 어찌 여기를 왔겠습니까?"

"무슨 일로 왔느냐?"

"후대를 위하여 왔습니다." 이에 지공스님이 입실을 허락하였다.


하루는 게송을 짓기를

"산하 대지는 눈앞의 헛꽃이요, 삼라만상이 또한 그러하네.

이제야 자성이 원래로 청정한 것을 아니,

진진찰찰(塵塵刹刹)이 법왕신이라" 하였다.


지공이 말하기를

"서천 20여인이나 동토 72인들이 다 지공에 있어서는 한 물건도 아닌데

지공이 출세하여 사는데 법왕인들 어디 있으랴! " 하니,


   "법왕신이여, 삼천(三天)의 주인되고 모든 백성 이익하네.

   천검(千劍) 잡아 들고 불조를 내려치니,

   백양(百陽 - 지공의 方丈이름)이 널리 퍼져 모든 하늘을 비춘다.

   내 이제 소식을 알아 얻음에 흡사 내집의 정혼(精 魂)을 희롱함이라.

   기특하다 기특하다 크게도 기특하다.

   부상(扶桑-海東)의 일월이 서천을 비추누나!" 하였다.

   

지공이 "애비도 개(狗)고 어미도 개고 너도 또한 개다" 하는데, 이에 사가 곧 예배하고 물러섰다.

   

그 후 다시 게송을 짓기를

"미한 즉 산과 물이 경계가 되고, 깨친즉 온 세계가 온전히 내 몸이라,

미(迷)거니 오(悟)거니 모두 다 쳐부수니

아침마다 오경(五更)에는 닭이 우누나" 하니,


지공이

"나도 아침마다 새소리를 듣는다" 하고 사의 법기(法器)됨을 인정하였다.


그후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 평강(平江)의 휴휴암(休休庵)과 정자선사(淨慈禪寺)를 거쳐 평산처림(平山處林)선사에게 가니, 평산은 마침 승당에 있었다.

   

사가 곧장 승당에 들어가 방안을 왔다 갔다 하니 평산이 묻기를,

"대덕은 어디에서 왔는가?"

"대도(大都)에서 왔습니다."

"이제까지 누구를 만났는가?"

"서천 지공을 뵈었습니다."

"지공의 일용이 어떠한가?"

"하루에 천 검(千劍)을 씁니다."

"지공의 천검은 그만두고 너의 한 칼을 가져오라."

사가 좌구(座具)를 들어 평산스님을 치니

평산은 쓰러지면서 큰 소리로

"이 도적놈이 사람을 죽인다! "하니

사가

"저의 칼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합니다."

하면서 부축하여 일으키니, 평산은 크게 웃으면서 사의 손을 잡고 방장으로 들어갔다.


평산스님의 법의를 받아가지고 보타낙가산 등 여러 곳을 지나 고목영(枯木榮)선사에게 갔는데 한참만에 고목이 말하기를

"수좌는 좌선할 때 어떻게 용심하는가?"

"가히 쓸 마음이 없습니다."

"이미 마음이 없을진대 12시 중에 누가 너를 가져 운동하는가?"

사가 눈을 들어 바로 쳐다보니, 고목이 말하기를

"그것은 부모가 낳은 눈이 거니와 부모가 낳기 전에는 무엇으로 보는가?" 하자,

사가

"엑!" 한 할하고 "무슨 낳고 안 낳고를 말하는거요?" 하니,

고목이 사의 손을 잡으면서

"누가 고려가 바다 건너에 있다하랴!" 하는 것을

손을 뿌리치고 나와 복룡산(伏龍山) 천암장(千巖長)선사에게 갔다.

   

마침 그때는 강호선객 천여명이 모였었다.

천암이 묻기를

"대덕은 어디서 왔는가?"

"정자(淨慈)에서 왔습니다."

"부모가 낳기 전 어디서 왔는가?"

"오늘 아침이 4월 2일입니다."

"눈 밝은 사람은 속일 수 없구나!" 하고 입실을 허락하였다.


여기서 한여름을 지내고 다시 북경으로 돌아와 지공의 법의와 불자를 전해받고, 공민왕 7년에 귀국하여 여러 곳에 있으면서 가는 곳마다 크게 종풍을 현양하였다. 공민왕이 청하여 내전에서 법요를 듣고 신광사에 있게 하였고, 공민왕 20년에는 왕사가 되고 대조계선교도 총섭근수본지 중흥조풍복국우세 보제존자(大曹溪禪敎都總攝勤修本智 重興 祖風福國佑世 普濟尊者)라 호를 받았다. 희암사를 크게 중건하고, 고려 우(禑)왕 2년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


임종을 당하여 한 중이 묻기를

"이 때를 당하여 어떠합니까?" 하니,

사가 주먹을 번쩍 들어 보였다.

다시 묻기를

"사대가 각각 헤어지니 어느 곳을 향하여 가시렵니까?"

"따로 기특한 도리가 없다"

"어떠한 것이 기특한 도리입니까?"

사 눈을 들어 중을 바로 쳐다 보면서

"내가 너와 만났을 때 무슨 기특한 것이 있느냐!" 하고 대중을 불러서

"너희들은 제각기 잘 공부지어가라. 노승은 오늘 너희들을 위하여 열반불사를 지어 마쳤다" 하고 조용히 시적하였다.

   

향수 57세. 시호는 선각(禪覺)선사. 사리를 나누어 신륵사와 희암사에 부도를 세워 봉안하였다.


[2] 동정(東征) :

임진왜란 때 명군(明軍)이 우리나라에 출동하였던 것을 말한다. 만력 정유는 선조 30년, 왜군이 제차 침공하였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