原始禪의 생명윤리주의
김 형 준/위덕 대학교 겸임교수
차 례
Ⅰ.들어가는 말
Ⅱ. 原始禪의 의미와 내용
Ⅲ. 禪수습법으로서의 慈悲觀
Ⅳ. 四無量禪의 수습구조
Ⅴ. 禪수습의 윤리적 구조
Ⅵ. 맺는말
Ⅰ. 들어가는 말
현존하는 아함․니카야에서 보아도 선은 명백히 원시불교의 수행 그 자체를 상징하고 있다. 단적으로 표현해, 적어도 최초기불교에 있어서의 수행자는 선수행자를 의미하며, 또한 수행자의 해탈, 혹은 깨달음이란 어디까지나 선이라는 매개를 통해 비로소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같은 사실은 고오타마 붓다의 깨달음을 전하는 전승이나, 성도 이후의 제자들의 수행양상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이와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이제 막 깨달음을 얻으신 세존께서는 우루베라 마을 네란자와강 기슭의 보리수 나무 아래에 앉으셨다. 저때 세존께서는 칠일간 오로지 결가부좌 한 채 해탈의 즐거움에 들어 있었다. (Udāna. Ⅰ-1, p.1.)
이와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우루베라 교외 제타숲 아난다핀디카 장로의 동산에 머물고 계셨다. 저때 사리풋타장로는 세존에게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결가부좌하고 몸을 세우고 念을 눈앞에 둔채 앉아 있었다.(Udāna.Ⅲ-4, p.27.)
이처럼 고오타마 붓다나 그의 제자에 비추어보아 선은 항상 「수행의 요체」이자 「해탈도」로서 일관되게 기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선은 어디까지나 수행자의 깨달음의 심경, 곧 그 어떤 수습법에 의해 도달된 경지를 나타낼뿐 구체적인 방법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선은 어떻게 해서 얻어지는 것일까? 원시불교에서는 선을 얻는 방법으로서 다양한 觀法이 설해지지만, 그 중에서도 慈悲사상은 그 어떤 관법에 비해 대단히 실천적이면서도 사회윤리적인 측면을 지닌 독특한 수습법으로, 어떤 면에서는 佛敎禪의 특징을 그대로 드러낸다고도 볼 수 있다.
본고에서는 일견 평범한 교리처럼 보이는 이 자비사상이 禪心을 얻는 수습법의 한 측면으로 설해지고 있는 점에 주목해, 그 구체적인 수습구조와 함께 원시선의 윤리적인 측면을 고찰하고자 한다.
Ⅱ. 原始禪의 의미와 내용
선은 빠리어 jhāna(싼쓰끄리트어dhyāna)의 음사어로, 이밖에 「禪定」,「禪那」,「定」,「靜慮」,「思惟修」등으로 한역된다. 선과 더불어 일반적으로는 禪定이라는 용어가 주로 쓰이고 있다. 선정은 팔리어로는 jhāna-samādhi가 되겠지만, 실제로 팔리니카야에서는 그 용례가 발견되지 않는다. jhāna의 어근은 √dhyai로「to think」, 「to imagine」, 「to meditate」의 의미를 지닌다. 한편, 삼매(samādhi)는 어근 √dhā에서 파생한 남성명사로, 「마음을 어떤 대상에 집중시키는 것」, 혹은 「집중된 상태」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본다면, 선이 곧「사유」자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내용상 선은 오히려 사유작용이 그친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에, 선은 「사유」나「관찰」에 의해 도달되는 심적경지라고 해야 할 것이다. 곧, 원시불교의 선은 그 방법으로서 「사유」를 전제로 하면서도 그 내용은 사유작용이 그친 상태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사유」는 다시 「고찰」이나 「관찰」이라는 말로 대치되기도 한다. 어떤 대상을 바라본다는 것과 사유한다는 것이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기 때문이다.
결국, 선은 사유나 정려에 의해 도달된 마음의 경지, 곧 「평온심」이나 「적정심」의 상태를 가리킨다. 이런 점에서 「사유수」라는 한역은 원시선의 특징을 잘 나타내주는 번역예라고 볼 수 있겠다.
한편 상(saññā)․분별(viññāṇa)․감수작용(vedanāna)의 지멸을 적정의 상태로 보기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원시불교에 있어서 수행의 주된 목적이 「감관의 제어」와 「想의 통어」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禪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마음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일까? 이른바 선이란 수행자가 도달한 어떤 마음을 상징하는데,비교적 초기의 전승이라고 일컬어지는 Sutta-nipāta(이하,Sn.)에서 는 이같은 마음이 어떤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일련의 게송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성냄(kodha)․탐(rāga)․갈애(taṇhā)․자의식(māna)․분노(kopa)․심(vitakka)․사(vicāra)․욕심(lobha)․진(dosa)․치(moha)․수면(middha)․애욕(kāma)․오개(nīvaraṇa)등이 바로 수행자가 단절시켜야만 하는 심리(不善法)라는 것이다.
이는 실로 원시불교에 있어서 수행의 대의를 시사하는 것으로, 적어도 당시의 수행자에게 있어서 수행의 의미는 이같은 심리적 부조화를 근절하는 것이었으며, 선이란 바로 이러한 심리적 부조화가 해결된 경지, 다시 말해 깨달은 자가 가져야 할 마음의 상태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삼독심이 제거된 마음이 곧 禪이라고 설하기도 한다. 이는 전술한 Sn에서의 제 심리적부조화가 삼독심으로 설명되는 경우이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法의 수지이자 현재의 줄거음이며, 미래의 줄거움이 되는 과보인가? 비구들이여, 이 세상에서 어떤 이들은 스스로 격한 욕망(貪)을 일으키지 않아 항상 탐에서 생하는 괴로움과 근심을 감수하는 일이 없다. 스스로 격한 분노(瞋)를 일으키지 않아 항상 분노에서 생하는 괴로움과 근심을 감수하는 일이 없다. 스스로 격한 어리석움(痴)을 일으키지 않아 항상 어리석움에서 생하는 괴로움과 근심을 감수하는 일이 없다. 그는 제욕을 떠나 …初禪…(Majjhima-Nikāya.I, pp.308-309)
이 경에서는 三毒(rāga,dosa,moha)에 의해 생하는 괴로움과 근심을 감수하지 않는 것이 법의 수지에 있어서의 현재락이자 미래락이라고 한다. 이어서 사선의 정형구가 이어지는데, 여기에서도 선이란 삼독이 멸한 마음의 상태를 가리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곧 삼독의 지멸이 선에 드는 조건이 되는데, 자비등의 사무량은 여기에서 瞋을 다스리는 업처인 것을 Sn.의『慈經』이나, 《중부경전》『降魔經』등의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이다.
Ⅲ. 禪수습법으로서의 慈悲觀
수행관으로서의 자비사상은 그 기원을 이미 古우파니샤드 가운데에서 엿볼 수가 있다. 게다가 바라문의 수행덕목으로서, 혹은 최고의 이상계(범천)에 도달하게 하는 수단으로서 설해지고 있다. 곧, 불교발생 이전부터 수행의 한 덕목으로 여겨져 오던 것으로 불교에서는 보다 적극적인 선수습법으로 채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와같이 慈悲(mettā, karuṇā)는 실천수행의 중심이 되는 덕목으로, 그 의미를 보면 慈가「우정」이라면, 悲는「연민」을 뜻한다. 곧, 본래 慈와 悲는 분리된 말로서 그 의미에 있어서 약간의 상위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전술했듯이, 자비관은 삼독 가운데에서도 특히 瞋의 소멸을 목적으로 행해지는데, 원래는 선수습법의 하나로 쓰여지고 있었다는 것은『慈經』(Metta-sutta)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慈란 온갖 생명이나 세간, 그리고 온갖 방향을 향해 한없이 慈心을 일으키는 구체적인 수습법을 말한다. 또한 수행자에게 일어나는 공포심을 없애기 위한 護呪로서 권해지기도 한다.
주석서인 Paramattha-jotikā(이하,Pj.)에서는 이『자경』이 설해지게 된 동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듣는 바에 의하면, 히말라야의 기슭에서 신들에게 억압받던 수행자들이 세존을 찾아 사위성으로 왔다. 그들을 위해 세존께서는 보호의 주문으로서, 또한 업처수행법(관상법)으로서 이 경을 설했다.
곧, 慈의 가르침이 업처수행법(관상법)을 설한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그 구체적인 사연을 본다면 다음과 같다.
한 때 세존께서는 雨期가 가까워질 때 사위성에 머물고 계셨다. 또한 그 때 여러나라에 있던 많은 비구들이 세존밑에서 관념수행법을 습득하고 나서는 그곳에서 우안거에 들고자 세존을 찾아왔다. 여기에서 실로 세존께서는 貪慾을 지니고 행한 자들에게는 유의식과 무의식에 의한 열한가지의 不淨觀念修行法을, 분개심(瞋)으로써 행한 자들에게는 慈등의 네가지 관념수행법을, 어리석음으로써 행한 자들에게는 念死觀念修行法등을, 사유로써 행한 자들에게는 출입식념과 地遍등을, 믿음으로써 행한 자들에게는 念佛觀念修行法등을, 覺智로써 행한 자들에게는 사대의 식별등, 이같은 방법으로 팔만사천종의 관념수행법을 설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원래 慈등의 사무량관은 瞋심을 다스리기 위한 觀想法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수습법이 보다 구체적으로 정비되어 뒤에는 남방아비달마의 집대성이라고도 할 수 있는 Visuddhimagga(이하, Vism.)(第九品 梵住의 解釋)에서 보듯이 선수습의 한 유형으로 간주되기에 이르는 것이다.
Ⅳ. 四無量禪의 수습구조
Ⅳ-1. Sn.에서의 慈觀
그렇다면, 원시불교에 있어서 사무량의 수습구조는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Sn.의 일례와 Vism.를 통해 살펴보겠다.
또한 다른 식자들에게 비난받는
그 어떤 못난짓을 해서는 안된다네.
단지 모든 유정들은 즐겁고,
안락해지지기를. 또한 마음행복한 자들이기를.(Sn.145)
보이는 존재이든, 아니면 보이지 않는 존재이든
멀리에 사는 자이든, 아니면 가까이에 사는 자이든
이미 태어난 자이든, 아니면 태어나고자 하는 자이든
온갖 유정들은 마음행복한 자들이기를.(Sn. 147)
예를들어, 어머니가 외아들을
목숨을 걸고 보호하듯이
그와같이 온갖 생명에 대해
무량한 〔慈의〕마음을 일으켜야 하나니.(Sn. 149)
또한 온갖 세상에 대해서
무량한 慈의 마음을 일으켜야 하나니.
위로도 아래로도 또한 옆으로도
장애없고 원한없고 적의없는〔마음을 일으켜야 하나니.〕(Sn. 150)
서 있거나 걷거나 혹은 앉아 있거나
혹은 누워있거나, 잠자는 때를 제하고는
이〔慈라는〕念을 확고히 해야 한다.
이것을 숭고한 머뭄(梵住)이라고 하나니.(Sn. 151)
Sn.에서 보이는 이같은 慈의 관법은 뒤에 四無量禪이라는 독특한 선관이 되고 있으며, Vism.에서는 四禪을 얻는 업처로 간주되기에 이른다.
Ⅳ-2. Vism.에서의 四無量觀
Vism. 제9품「梵住의 해석」에서는 자․비․희․사의 수습구조가 구체적으로 술해지고 있다. 이하, 그 수습구조를 보면 다음과 같다.
<慈의 수습>
慈를 수습하고자 하는 초학의 유가행자는 10장애를 끊고 업처를 파지하며, 식후 수면기를 제거하고 멀리 떨어진 곳에 安坐해 먼저 성냄의 과환과 인욕의 공덕을 관찰해야만 한다고 한다.
<悲의 수습>
悲의 수습을 원하는 자는 無悲의 과환과 悲의 공덕을 관찰해 비의 수습을 시작해야만 한다. 또한 그 수습을 시작하는 자는 처음부터 사랑하는 사람 등으로부터 시작해서는 안된다. 단지 愛子는 애자로서만 드러나고, 極愛의 벗은 극애의 벗으로서만 드러나며, 무관계한 자는 무관계한 자로서만 드러나고, 원적은 원적으로서만 드러나게 된다. 이성과 죽은 자는 영원히 悲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喜의 수습>
희를 수습하고자 하는 자는 처음부터 사랑하는 자등으로부터 시작해서는 안된다. 愛子는 단지 愛子가 될 뿐으로 희의 足處가 되지는 못한다. 하물며 무관계자나 원적에 관해서는 말할 나위도 없다. 이성과 죽은자는 절대로 그 대상이 되지 못한다. 오직 매우 사랑하는 친구만이 희의 족처가 되어야 한다. … (略)… 혹은 사랑하는 자가 행복으로 충만하고, 기뻐하는 것을 보거나 듣고 ?실로 이 사람은 기뻐하고 있구나. 아아! 참으로 즐겁구나.?라고 희를 일으켜야만 한다. 이같이 해서 사랑하는 자에 대해 희를 일으킨 뒤에는 다음으로 무관계한 자와 원적에 대해 차례로 희를 일으켜야만 한다.
<捨의 수습>
다음으로 捨를 수습하고자 하는 자는 慈등에 있어서 三禪 혹은 四禪을 얻고는, 다시 숙달된 제3선(혹은 5종선의 제4선)으로부터 나와 앞의 〔자비희의〕과환을 보고 捨의 공덕을 보아 본래 무관계한 자를 捨置해 捨를 생기시켜야만 한다. 그로부터 愛子등에 대해 수습해야만 한다.
여기에서 본다면 사무량 각지분마다 수습의 대상과 그 순서를 상세히 구분해 설정하고 있는 것이 특징으로, 우선 사무량에 있어서의 所緣(對象)과 그 순서를 보면, 慈와 悲는 각각 自己→愛者→無關係者→怨敵의 순으로 닦으며, 喜는 愛者→無關係者→怨敵의 순으로, 그리고 捨의 경우는 無關係者→愛者→怨敵의 順으로 觀想을 행한다고 한다. 그리고 또한 所緣이 되어서는 안되는 대상으로는 異性과 死者를 든다. 그 이유로서는 異性에 대한 慈의 수습은 탐심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며, 死者의 경우는 安止도 近行도 절대로 얻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쨌든 이들 단계를 거쳐 禪心은 얻어지는데, 특히 怨敵에 대한 수습을 열가지 단계에 걸쳐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원적자에 대한 慈의 수습-제1단계〕
만약에 또한 원적자에 대해서 〔禪〕心을 일으키는 그에게 이전에 받은 해악을 수념해서 분한이 생긴다면, 그는 앞의 〔愛子, 極愛子, 無關係者등의〕사람들 중 어느 한 대상에 대해 누누이 慈〔禪〕에 入定한뒤 出定해 누누이 그에 대한 분한을 제거해야만 한다.
〔원적자에 대한 慈의 수습-제2단계〕
만약에 이같이 정진함에도 분한이 없어지지 않는다면, 譬喩의 가르침을 수념해 분한의 사단을 위해 누누이 노력해야만 한다.
〔원적자에 대한 慈의 수습-제3단계〕
이같이 노력하고 정진하는 그에게 분한이 멸한다면 그만이지만, 멸하지 않는다면 그는 그 어떤 법일지라도 어떤 이에게 그것이 적정해지고 두루 맑아지고 그가 그 법을 수념해서 그에게 信樂을 가져오는 가르침을 수념해 분한을 조복시켜야만 한다.
곧, 怨敵에게 身·口·意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바른 구석이 있다면 그것을 수념한다. 하지만, 이 가운데 어느 하나도 지니고 있지 못한 원적에게는, ?비록 그는 지금 인간계에 살고 있지만, 언젠가는 八大地獄․十大小獄에 떨어지리라?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일으킨다.
〔원적자에 대한 慈의 수습-제4단계〕
만약에 이같이 정진하고 노력해도 분한이 일어난다면, 분노가 얼마나 헛된 것인지를 생각한다.
〔원적자에 대한 慈의 수습-제5단계〕
만약에 이같이 자기를 훈련시켜도 분한이 수그러지지 않는다면, 자기와 남이 모두 업을 소유하고 있음을 관찰해야만 한다.
〔원적자에 대한 慈의 수습-제6단계〕
만약에 이같이 自他가 업을 지니고 있음을 관찰해도 분한이 수그러들지 않는다면, 그 때는 스승의 숙행의 덕을 수념해야만 한다. 그 관상법이란 곧 다음과 같다. "그대, 출가자여! 그대의 스승은 아직 정각을 이루기 이전에, 미등정각의 보살로서 4아승지 10만겁중에 제바라밀을 완성하면서, 여기저기에서 갖은 살해자와 적들에게 죽임을 당하면서도 분한을 일으키지 않으셨네."라고.
〔원적자에 대한 慈의 수습-제7단계〕
만약에 이같이 스승의 숙행의 덕을 수념해도 오랫동안 번뇌에 말려 그 분한이 가라앉지 않는다면, 끝없는 윤회를 관찰해야만 한다.
〔원적자에 대한 慈의 수습-제8단계〕
만약에 이같이 해도 마음이 수그러지지 않는다면, 그때는 세존께서 설하신 慈의 공덕을 관찰한다.
〔원적자에 대한 慈의 수습-제9단계〕
이같이 해도 소멸하지 않는다면, 그 다음에는 界의 간별을 행한다.
〔원적자에 대한 慈의 수습-제10단계〕
다음으로 계의 간별을 행할 수 없는 자는 施物의 증여를 행해야 한다. 곧, 자신의 소유물을 타인에게 주어야만 하며, 타인의 소유물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이같이 한다면 그에 대한 분한은 그 자리에서 적멸한다.
여기에서 주목해야만 하는 것은 瞋을 소멸시키기 위한 마지막 수습으로 보시를 들고 있다는 점이다. 곧 보시에 의해 자신의 분한은 물론이거니와 상대방의 원한 역시 사라진다고 하니, 이는 실로 자기외적인 완성이야말로 自他가 禪心을 얻는 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Ⅳ-3. 사무량수습의 증과
慈수습의 증과에 대해 Pj.에서는, "慈를 닦는 자는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非人들에게 사랑받는 자"라고 하며, 다시 ‘그것은 유정들에게 행한 mettā에 의해 大果를 지니는 것이며, 내지 佛地에 이를수 있기에, 그 때문에 그 복덕의 완성을 만들어 냄을 보이기 위해서이다.’라고 해 그 수습의 과가 이윽고는 佛地에 까지 이르게 함을 밝히고 있다. Vism. 『업처파취품』에서는 수습법과 그에 의해 도달되는 계온의 성취도, 곧 선의 깊이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구분하고 있다.
安般念과 十遍은 四禪 전체에 속하며, 身至念과 十不淨은 初禪에 속한다. 初三梵住(자․비․희)는 초선 내지는 제3선에 속하며, 제4범주와 四無色은 제4선에 속한다. 이와 같이 禪의 區分에 의해 〔업처의 결택을 알아야만 한다.〕
이는 수습법에 의해서 도달되는 경지의 차별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여기에서 흥미를 끄는 것은 사무량의 수습에 의해 제4선이라는 최고의 경지를 얻는다고 하는 점이다. 이는 원시선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지향하는지를 알려주는 매우 중요한 사항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사무량은 그 내용상, 身至念이나 不淨觀과 같은 소극적인 수습법과는 달리, 自己外적인 혹은 대사회적인 의미를 내포하는 것으로, 이를 통해 선의 최고의 경지를 얻는다고 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인식되어 온 선과는 대단히 다른 차원의 禪觀이 되기 때문이다.
Ⅴ. 禪수습의 윤리적 구조
삼독이 제거된 심경을 禪의 경지라고 보고, 또한 사무량이 삼독의 지멸을 위해 사용되는 수습법이라고 한다면, 불교의 선은실로 대사회적인 혹은 대생명윤리의 입장을 나타낸다고도 볼 수 있다. 나아가 선은 살생․도둑질등의 비윤리적․비종교적인 행위에 대한 불교의 입장을 표명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또한 춘다여, 외도의 수행자는 이와같이 얘기할지도 모른다. '샤카의 사문들은 安樂行에 專心해 머문다'라고. 춘다여, [만약에] 외도수행자가 이같이 말한다면, 다음과 같이 그에게 대답해야만 한다.'친구여, 어떤 안락행이 있다는 것인가? 안락행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네'라고. 여기에 네가지 안락행이 있으니, 저열하고 천하고 범부적인 것이며, 성스럽지 못하고 도리에 맞지 않아 遠離로 이끌지 못하고, 離慾으로 이끌지 못하고, 滅로 이끌지 못하고, 적정으로 이끌지 못하고, 지혜로 이끌지 못하고, 깨달음으로 이끌지 못하고, 열반으로 이끌지 못한다.
무엇이 넷인가?
춘다여, 여기에서 어떤 어리석은 자는 생명있는 것을 죽이고는 스스로 즐거워한다. 이것이 첫 번째 안락행이다. 다시 춘다여, 어떤 자는 주어지지 않은 것을 취하고는 스스로 즐거워한다. 이것이 두 번째 안락행이다. 다시 춘다여, 여기에 어떤 자는 헛된말을 하고는 스스로 즐거워한다. 이것이 세 번째 안락행이다. 다시 춘다여, 여기에 어떤 자는 오욕락에 빠져 만족해 한다. 이것이 네 번째 안락행이다. 춘다여, 이들 네가지 안락행은, 저열하고 천하고 범부적인 것이며, 성스럽지 못하고 도리에 맞지 않아 遠離로 이끌지 못하고, 離慾으로 이끌지 못하고, 滅로 이끌지 못하고, 적정으로 이끌지 못하고, 지혜로 이끌지 못하고, 깨달음으로 이끌지 못하고, 열반으로 이끌지 못한다.
다시 춘다여, 외도의 수행자가 이와같이 말할지도 모른다. '샤카의 사문들은 안락행에 전심해 머문다'라고. 춘다여, [만약에] 이와같이 외도수행자가 말한다면, '그렇지 않소'라고 그에게 대답해야만 한다. 그는 올바로 얘기하지 않고, 사실이 아닌 것을 들어 그대를 비방하리라. 춘다여, 여기에 네가지 안락행이 있으니, 반드시 遠離로 이끌며, 離慾으로 이끌며, 滅로 이끌며, 적정으로 이끌며, 지혜로 이끌며, 깨달음으로 이끌며, 열반으로 이끈다.
넷이란 무엇인가?
춘다여, 여기에서 수행자는 ․․․ 초선에 도달해 머문다. 이것이 첫 번째 안락행이다. 다시 춘다여, 수행자는 ․․․제2선에 도달해 머문다. 이것이 두 번째 안락행이다. 다시 춘다여, 수행자는 ․․․제3선에 도달해 머문다. 이것이 세 번째 안락행이다. 다시 춘다여, ․․․ 제4선에 도달해 머문다. 이것이 네 번째 안락행인 것이다. 춘다여, 이들 네가지 안락행은 반드시 遠離로 이끌며, 離慾으로 이끌며, 滅로 이끌며, 적정으로 이끌며, 지혜로 이끌며, 깨달음으로 이끌며, 열반으로 이끄느니라."
Dīgha-Nikāya III, pp.130-132
곧, 여기에서 선의 경지란, 살생, 도둑질, 망어, 쾌락 등의 비인간적․비도덕적인 행위를 떠난 순수정신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고오타마 붓다가 바라문의 동물희생제를 비난하면서 사선을 설하는 것은 바로 불교에 있어서 선의 정신을 명백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원시불교의 자비관은 단순한 불살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남의 마음을 해하는 것 조차 그 범주에 넣고 있다. 이는 자칭「害하지 않는 자」라고 부르는 바라문과 고오타마 붓다의 대화에서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자칭〕해하지 않는 자인 바라드와자 바라문이 세존께 다가갔다. 다가가서는 세존께 인사하고, 즐거운 인사말을 나눈뒤 한쪽 구석에 앉았다.
한편에 앉은 바라드와자 바라문은 세존을 향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오타마여, 나는〔남을〕해하지 않는 자입니다. 고오타마여, 나는〔남을〕해하지 않는 자입니다.”〔그러자 세존께서 말씀하셨다.〕“이름대로라면 그럴지도 모르겠소. 하지만, 몸에 의해서나 말에 의해서나 마음에 의해서나〔남을〕해하지 않는다면, 그야 말로 진정 해하지 않는 자인 것이오.”
Saṃyutta-Nikāya VII.1.5.2-4, vol.I, pp.64-65.
이같은 원시선의 생명윤리적인 성향은 Sāmañña-phala-sutta에서 보는 선의 수습구조를 통해 확연히 드러난다. 본 경에서 보는 한, 선은 반드시 戒를 전제로 해서 얻어진다고 규정되고 있는데, 여기에서 戒란 수행자의 자기외적인 혹은 대사회적인 청정의 완성을 뜻한다.
비구들이여, 만약에 비구가 제증상심의 현법락주인 사선을 원하는 대로 얻고, 용이하게 얻고, 간단히 얻을 수 있기를 원한다면, 戒를 성취하고, … 乃至 …만약에 비구가 色을 초월해 무색의 적정해탈에 도달해 머물고 싶다고 원한다면, 戒를 성취하고 …Majjhima-Nikāya.I, p.33. No.6
곧, 사선은 물론이거니와 사무색정을 얻기 위해서도 계가 전제되고 있다는 것이다. 계 외에도 감관의 통어․정념정지․만족을 더해 계온의 성취가 요구되기에 이르는데, 同經에서는 이들 계온을 어떻게 성취하는지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戒의 구족〕
이 세상에서, 대왕이여, 수행자는 생명을 해치지 않습니다. 채칙과 무기를 들지 않으며, 참회하는 마음으로 온갖 생명에게 연민을 기울입니다. 이 또한 그가 지니는 계 가운데 하나입니다. …주어지지 않는 것을 취하지 않으며, …性的인 타락에 빠지지 않으며, …헛된 말을 하지 않으며, …남을 중상하지 않으며,…거친 말을 삼가고, …희언을 삼가며, … 씨앗이나 풀, 혹은 나무를 해하지 않습니다. 하루 한끼만 먹으며, 밤에 식사를 한다거나 정해진 시간 외에 식사를 하지 않습니다. 무용, 노래, 음악 따위의 오락을 즐기지 않습니다. 꽃장식, 향료, 향수, 장식을 삼갑니다. 높은 침대나 커다란 침대를 삼가며, 金銀을 받지 않습니다. 날곡식이나 생고기를 받지 않으며, 남녀노비를 받지 않습니다. 山염소나 암염소, 새, 돼지, 코끼리, 소, 암말을 받지 않습니다. 경작지나 미경작지를 받지 않습니다. 하인을 부리거나 혹은 심부름을 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장사를 하지 않으며, 무게를 속이거나, 가짜돈을 쓰거나, 길이를 속이거나 하지 않습니다. 거짓을 꾸미거나 사기치는 삿된 행위를 삼갑니다. 남에게 상처를 입히는 일, 남을 죽이는 일, 감금, 박탈, 강도질, 폭행등을 삼갑니다. 이 또한 그에게 있어 지녀야 할 계 가운데 하나인 것입니다.
〔감관의 문을 보호함〕
이 세상에서, 대왕이여, 수행자는 눈으로 형태(色)를 보고는 모습이나 부분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이 안근이 통어되지 않은 것이 원인이 되어 그에게는 애착과 근심이라고 하는 착하지 못한 법들이 들어오게 될지도 모릅니다. 때문에 안근을 지키고, 안근의 통어를 달성하는 것입니다. 귀로 소리를 듣고는 … 코로 냄새를 맡고는 … 혀로 맛을 보고는 … 몸으로 촉감을 접하고는 … 마음으로 현상을 분별하고는, 모습이나 부분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이 심근이 통어되지 않은 것이 원인이 되어 그에게는 탐욕과 근심이라고 하는 착하지 못한 법들이 들어오게 될지도 모릅니다. 때문에 안근을 지키고, 안근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 성스런 감관의 통어를 구족하게 되면, 내면으로 무너짐이 없는 즐거움을 감수하게 됩니다. 대왕이여, 이와 같이 수행자는 감관의 문을 지키는 것입니다.
〔바른 염과 바른 앎〕
이 세상에서, 대왕이여, 수행자는 나아가거나 돌아 올때에도 바르게 알고 행동합니다. 앞을 보거나 뒤를 보거나 할 때도 바르게 알고 행동합니다. 팔을 뻗거나 오무릴 때에도 바르게 알고 행동합니다. 걷옷을 걸치거나, 바루를 들거나, 법의를 걸칠 때에도 바르게 알고 행동합니다. 먹거나 마시거나 씹거나 맛을 볼 때에도, 혹은 소대변을 볼 때에도, 걷거나 서거나 앉거나 잘 때에도, 눈을 뜨거나 얘기하거나 침묵의 상태에도 바르게 알고 행동합니다. 대왕이여, 이와 같이 수행자는 바른 념과 바른 앎을 구족하는 것입니다.
〔만족〕
대왕이여, 이 세상에서 수행자는 몸을 보호할 정도의 옷(법의)과 배를 채울 정도의 탁발식에 만족해 합니다. 그는 어디에 가든 그것들을 지니고 갑니다. 대왕이여, 예를 들어, 날개달린 새가 어디로 날아가든 날개와 함께 하듯이, 그와 같이, 대왕이여, 수행자는 자신의 몸을 감쌀 정도의 옷과 배를 채울 정도의 탁발식에 만족해 합니다. 그는 어디에 가든 그것들을 지니고 갑니다. 대왕이여, 이와 같이 수행자는 만족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해서 계온을 갖춤에 의해 비로소 수행자는 禪에 들 조건이 구비된 셈이다. 이로부터 수행자는, 寂靜閑處로 가서 앉아 염을 집중하는데, 이후 다섯 마음의 장애가 없어지고 비로소 初禪에 들게 되는 것이다.
〔적정한처〕
그는 이 성스런 청정을 갖추고, 또한 이 성스런 감수작용에 대한 통어를 갖추고, 이 성스런 정념․정지를 갖추고, 이 성스런 만족을 갖추게 되면, 멀리 떨어진 坐處, 곧 숲이나 나무 밑, 산, 계곡, 동굴, 묘지, 황무지, 露地로 갑니다. 그리고 걸식에서 돌아온 뒤, 얻어온 음식을 먹고는, 결가부좌를 틀고 몸을 똑바로 세우고는 念을 정면에 집중해 앉습니다.
〔다섯 덮개의 사단(捨斷)〕
그는 세간에 대한 애탐을 버리고, 애탐을 떠난 마음으로 머물며, 애탐으로부터 마음을 정화합니다. 성냄을 버리고, 성냄이 없는 마음으로 머물며, 일체의 생명에 대해 연민의 마음을 기울여 성냄으로부터 마음을 정화합니다. 昏沈과 수면을 버리고, 혼침과 수면을 벗어난 마음으로 머물며, 光明想있으며, 바른 염과 바른 앎으로 혼침과 수면에서 마음을 정화합니다. 들뜸과 후회를 버리고 가라앉은 마음으로 머물며, 내면은 적정해져 들뜸과 후회로부터 마음을 정화합니다. 의심을 떨치고 의심을 초월해 머물며, 착한 법에 대한 의혹을 버리어 의혹으로부터 마음을 정화합니다.
이후 수행자의 노력에 의해 정화된 마음이 진행하는 과정이 곧 禪이며, 그 구체적인 심화과정을 나타내는 것이 바로 사선인 것이다.
사선의 각 단계는 정화된 마음이 일으키는 집중도가 심화되어 가는 과정을 네 단계로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
So vivicc?eva kāmehi vivicca akusalehi dhammehi savitakkaṁ savicāraṁ vivekajaṁ pītisukhaṁ
pṭhamaṁ jhānaṁ upasampajja viharati.
그는 諸慾에서 떠나고, 諸不善法에서 떠나 거친 생각 있고(有尋), 미세한 생각 있으며(有伺), [障碍를] 떠남에서 생하는 기쁨(喜)과 즐거움(樂)이 있는 초선에 도달해 머문다.
Vtakka-vicārānaṁ būpasamā ajjhattaṁ sampasādanaṁ cetaso ekodibhāvaṁ avitakkaṁ avicāraṁ
samādhijaṁ pītisukhaṁ dutiyaṁ jhānaṁ upasampajja viharati.
거친 생각과 미세한 생각이 그치고, 내면은 적정하며 마음이 전일하게 되어, 거친생각 없고 미세한 생각 없어 삼매에서 생하는 기쁨과 즐거움 있는 제2선에 도달해 머문다.
Pītiyā ca virāgā ca upekhako ca viharati sato ca sampajāno, sukhaṁ ca kāyena paṭisaṁvedeti
yan taṁ ariyā ācikkhanti: upekhako satimā sukhavihārī ti tatiyaṁ jhānaṁ upasampajja viharati.
기쁨을 여의고 무관심해지며, 바른 念(正念)과 바른 앎(正知)으로, 이른바 聖人들이 '무관심하며 念있는 즐거운 머뭄(捨念樂住)'이라고 하는 즐거움을 몸으로 느끼는 제3선에 도달해 머문다.
Sukhassa ca pahānā dukkhassa ca pahānā pubbe va somanassa-domanassānaṁ atthagamā
adukkhaṁ asukhaṁ upekhāsatipārisuddhiṁ catutthaṁ jhānaṁ upasampajja viharati.
기쁨을 여의고 괴로움을 여의며, 이전의 희열이나 근심을 멸해,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이(不苦․不樂) 무관심한 염으로 청정해진(捨念淸淨) 제4선에 도달해 머문다.
이상, 선을 얻게 되는 구조를 간략하게 나타내면, 「수행을 통해 계온의 성취→맑게 사는 즐거움을 온몸으로 감수하기 위해 한적하고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서 앉음 (結跏趺坐)→念의 집중(호흡의 관찰) →다섯 마음의 덮개가 사라진 즐거움을 感受 (초선)→제2선→제3선→제4선으로 표현할 수 있겠다.
이같이 원시불교의 戒를 우선하는 수습구조는 인도의 정통요가에서도 마찬가지로, 그 예를 요가수트라의 八支요가(aṣṭāṅ-gayoga)에서 볼 수 있다. 요가수트라에서 요가란 「심작용의 抑制」(citta-vṛttinirodha)라고 정의되고있다. 곧 심작용을 억제함으로써 사마디에 도달하고, 이윽고 해탈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 내용은 (1)制戒․(2)內制․(3)坐法․(4)調息․(5)制感․ (6)凝念․(7)禪定․(8)三昧로,이들 여덟단계의 수행에 의해 識別知를 얻게 되면, 순수정신과 근본원질은 완전히 분리되고 이윽고 해탈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실로 이러한 구조는 원시불교에서의 禪수습구조와 상통하고 있다.
① yama ; 불살생, 진실, 不盜, 성적욕구의 억제, 무소유의 오계를 의미.
② niyama ; 청정, 만족, 고행, 학습, 최고신에 대한 專心
③ āsana ; 연화좌등의 십여종의 좌법
④ prāṇāyāma ; 체내조식, 체외조식, 정지식
⑤ pratyāhāra ; 제감관이 대상을 여읜 상태
⑥ dhāraṇā ; 마음을 어떤 장소에 묶어 두는 것
⑦ dhyāna ; 통일된 관념의 지속
⑧ samādhi ; 관념은 공허해지고 대상만이 빛나는 상태
이는 불교의 선정사상이 불교 이전의 인도의 실천원리에 그 뿌리를 두며, 다시 불교이후의 정통사상에 영향을 끼쳤음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요가야 말로 그 근원이 되는 개념으로 볼 수가 있으며, 불교에서는 주로 禪(jhāna)이라고 하는 형식으로 전개되었다고 말 할 수 있겠다. 의식의 평온이라고 할 수 있는 불교의 선정은 sāṅkya-yoga에서의 순수하고도 초인적인 의식의 합일, 곧, 절대적인 브라흐만과의 합일을 목표로 하는 후기의 요가적 수단과 같은 성질의 것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선은 계온의 성취도를 재는 척도일 뿐이지 그 자체는 그 어떤 방법이나 대상을 내포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선수행에 있어서 계온의 성취는 그 전제 조건이 되며, 완성된 계온은 그대로 선이라는 증과로서 진행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五蓋의 사단→환희→身안락→樂의 기억→心삼매→초선」이라는 초선도입의 전단계가 상세히 설해지기도 하는 것이다.
Ⅵ. 맺는말
이상으로 자비등으로 대표되는 사무량선의 수습구조와 함께 원시선의 윤리적인 입장에 대해 살펴보았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불교의 선은 지극히 실천적인 수습방법을 요한다는 것이며, 원시불교의 선이란 계라는 자기외적인 완성을 통해 도달한 경지를 이름한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그 경지란 다름 아닌탐·진·치 삼독이 지멸한 심경을 가리키고 있으며, 다시 이 삼독의 지멸도, 즉 계온의 성취도를 세분한 것이 바로 사선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원시선은 계온성취를 위한 다양한 수습구조를 필요로 하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사무량이야말로 원시불교의 이념을 드러내는 독특한 선관이 되고 있다. 사무량은 선의 최고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 수습업처로서, 처음부터 이는 단순한 교의의 차원을 넘어 선의 주된 업처로 간주되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내용이다.
곧, 사무량은 분노(瞋)의 지멸에 유효한 수습법으로, 그 취지는 사랑, 연민, 기뻐함이라고 하는 생명에의 관심을 통해 차별심 없는 평등의 마음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다. 나아가 Vism.에서보듯이 瞋을 소멸시키기 위한 최후의 수습법으로서 보시를 들고 있다는 점은 원시불교의 선이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베품에 의해 자신의 분노는 물론이거니와 상대방이 품고 있던 원한 역시 사라진다고 하는데, 이른바 사랑과 연민에 의해 自他가 더불어 禪의 경지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원시불교의 禪이란 개아의 대사회적, 혹은 대생명적 완성을 뜻하며, 「坐」란 바로 그 성취의 기쁨을 감수하는 행위에 해당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원시불교에 있어서 선은 개인의 도덕적․종교적 성취도를 가늠하는 척도이며, 나아가 생명에 대한 사랑과 조화가 이루어 내는 이상적인 마음이 무엇인지를 잘 알려 주고 있다. 특히 뭇 생명의 행복을 바라고, 이를 실현시킴으로써 비로소 자신 역시 마음의 이상경에 도달한다고 하는 사무량선은 불교수행의 구체적 대상이 다름아닌 나를 둘러싼 현실세계일 수밖에 없음을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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