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야단법석

행복의 언덕님에게 - 불교의 12처

실론섬 2015. 10. 2. 12:45

불교의 십이처

   

불교는 신이나 조물주를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들이 살아가는 현실세계를 바라보고 관찰하는 관점이 타종교와 180도 다르다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불교의 진리는 우리들이 인식할 수 있는 구체적인 현실세계의 관찰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렇다면 그 구체적인 현실세계란 과연 어떤 구조와 성질을 가진 것인가. 


경전의 문구에서 살펴보자.

한 때 생문(生聞)이라는 바라문이 붓다를 찾아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 일이 있다. 

"일체(一切)라고 하는 그 일체란 도대체 어떤 것입니까?" 

(참고로 당시의 인도에서 일체(一切,sarvam)라는 말은 '모든 것(everything)'을 의미하는 말로서 우리들이 살고 있는 우주 전체를 가리키는 대명사였다. 세계(世界)나 세간(世間,loka)이라는 말과도 같은 개념이다. 이런 일체에 대해서 붓다의 견해는 다른 외도들과 어떻게 다른지를 알아보고자 질문을 했던 것이다)


이 질문에 붓다는 생문 바라문에게 다음과 같은 대답을 하고 계신다. 

"바라문이여, 일체는 십이처(十二處)에 포섭되는 것이니, 곧 눈과 색,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촉감, 의지와 법이다. 만일 이 십이처를 떠나 다른 일체를 설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다만 언설일 뿐, 물어 봐야 모르고 의혹만 더할 것이다. 왜 그러냐면 그것은 경계(境界)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에는 삼라만상이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열 두 가지에 거뜬히 포섭(包攝)된다는 것이요, 그 열 두 가지 이외의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그래서 그 열 두 가지를 모든 것이 그 속에 '들어간다'는 뜻을 취하여 처(處,ayatana)라고 부르고 이 교설을 

십이처(十二處)이라고 부른다. 


불교에서 말하는 십이처는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세계관이며 일체 존재에 대한 일종의 관찰법/분류법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언뜻보면 너무 쉽고 간단한듯 보이나 불교의 십이처는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첫째로, 우리는 십이처의 구성이 눈·귀·코·혀·몸·의지라는 여섯 개의 인식기관(六根)과 색·소리·냄새·맛·촉감·법이라는 여섯 개의 인식대상(六境)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모든 존재를 인간의 인식을 중심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에 의해 인식되지 않는 것은 일단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봐야 한다는 기본적인 입장을 명확하게 표명하고 있다. 이러한 인간중심의 인식론적 입장은 훗날 인도 대승불교의 양대산맥중의 하나인 유가행파에 의해서 철학적/심리학적으로 심도있게 전개된다.

   

타 종교에서는 인간의 인식/관찰 범위를 넘어선 초월적인 실재를 설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그러한 초월적인 실재가 종교적인 수행(修行)을 통해서도 끝내 인간에게 증명되거나 볼 수 없는 것이라면, 그런 것의 실재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불교의 십이처는 그러한 문제에 대해 명쾌한 해답을 내리고 있다. 


붓다께서 바라문들에게 다음과 같이 묻고 계신다. 

"삼명(三明)을 갖춘 바라문으로서 일찍이 한 사람이라도 범천을 본 자가 있는가? 만일 본 일도 없고 볼 수 없는 범천을 믿고 받든다면, 마치 어떤 사람이 한 여인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의 얼굴을 본 일도 없고, 이름도 거처도 모른다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둘째로, 불교의 십이처는 인간을 중심으로 한 세계관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십이처에서 인식 주체가 되고 있는 여섯 개의 감관 즉 육근(六根)은 그대로 인간존재를 나타내고, 인식객체가 되고 있는 여섯 개의 대상 즉 육경(六境)은 그러한 인간의 주변환경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주체(主體)적 인간의 특질을 의지(意志,manas)'로 파악하고, 객체적 대상의 특질을 '법(法,dharma)'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불교에서 의지라는 것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와 능동적인 힘이 있는 것을 의미한다. 법(法)은 어떤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그에 상응한 결과를 나타내는 '필연성을 지닌 것'을 가리킨다.

그래서 불교는 의도된 행위만이 업을 낳는다고 한다. 자업자득이고 인과응보인 것이다. 그러한 뜻의 의지와 법이라는 개념으로 인간과 주변의 세상을 규정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당시 인도에서는 바라문교에 의하면 세계의 중심은 창조주인 범(梵)이며,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存在)는 그 종속적 피조물에 불과하다. 세계를 지배하고 인간에게 길흉화복을 가져오는 것도 범(梵)의 의지에 의한다. 또한 6사 외도들을 중심으로 인간은 인간의 의지대로 생사(生死)의 코스를 바꿀 수 없다는 무작용론(無作用論:決定論)과 단멸론 영원론등 수많은 사상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하지만 불교는 신이나 조물주를 부정하고 대신에 오온 - 십이처 - 십팔계의 진리를 펴면서 모든 것을 인간중심적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는 종교를 떠나서 세계 철학사상사에서 아주 중요한 의의를 갖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더불어 말하자면 윤회라는 것은 불교만의 독특한 진리가 아니다. 당시 인도에서는 이미 윤회론이 일반화 되어 있었다. 하지만 불교에서는 윤회론을 차용하며서 숙명론이나 운명론 영원론 단멸론등을 전부다 부정하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천명했다. 여기서 일일이 6사 외도들의 주장을 일일이 반박하여 놓은 경전문구를 옮겨올 필요는 없을 것이다. 불교의 윤회는 "자업자득" 이라는 것이다. 내 의지가 내 업을 만들고 그 만든 업을 당사자가 받는 것이지 절대적 신이나 제삼자가 개입하여 왈가불가하는 것이 아니다. 불교는 스스로가 지은 업에서 도망갈 곳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고 천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