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 논문및 평론/논문·평론

무아․ 윤회 논쟁에 대한 비판적 검토/임승택

실론섬 2016. 1. 21. 04:06

무아․ 윤회 논쟁에 대한 비판적 검토

-초기불교를 중심으로-

* 이 논문은 2014학년도 경북대학교 연구년 교수 연구비에 의하여 연구되었음

임승택

경북대학교 철학과 부교수

 

I. 시작하는 말

II. 무아와 ‘무아 윤회’

III. 연기설에 대한 오해

IV. 마치는 말

 

[요약문]

무아와 윤회의 문제를 둘러싼 논쟁은 한국불교학계에서 학술적 담론의 분위기를 활성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필자는 그간 이 논쟁에 가담했던 연구자들의 열의와 진정성에 대해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이제까지의 논의에 전제되어 있는 문제의식과 해결방안이 정당한가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갖는다. 무아설은 윤회로부터 벗어난 해탈의 경지를 지향하는 반면에 윤회설은 괴로움의 유전 양상을 밝힌다. 두 교설은 각기 다른 경지를 나타내는 까닭에 서로는 대립한다거나 충돌한다고 보기 힘들다. 무아와 윤회가 다른 것은 해탈의 경지가 괴로움의 현실과 다른 차원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무아와 윤회의 모순적 성격을 해소하고자 했던 그간의 시도는 타당하지 못하다. 필자는 초기불교 경전에 대한 분석을 통해 붓다의 가르침을 새롭게 규명함으로써 이제까지의 논의에서 노출된 교리적 오해와 문제점을 들추어낸다. 필자는 무아와 윤회의 문제에 관한 논의를 원점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I. 시작하는 말

 

무아(無我, anattan)이론과 윤회(輪廻, saṁsāra)이론은 불교라는 건축물을 세우고 있는 두 개의 큰 기둥에 비유된다. 그런데 무아란 ‘나’ 혹은 자아에 대한 부정을 의미하며 윤회란 그러한 ‘나’ 혹은 자아가 생사를 반복하면서 지속됨을 뜻한다. 따라서 이 둘은 모순적 관계에 놓인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실제로 많은 연구자들이 이 둘의 관계에 당혹감을 느끼는 듯하다. 만일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윤회가 가능하겠는가. 혹은 윤회가 사실이라면 윤회의 주체인 자아가 전제되는 셈이 아닌가. 그렇다면 무아는 포기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당혹감은 붓다의 가르침에 중대한 문제점이 내포되지 않았는가 하는 조바심으로 연결되었던 것 같다. 바로 여기에서 한국불교학계를 뜨겁게 달구었던 ‘무아․ 윤회 논쟁’이 시작되었다.

 

‘무아․윤회 논쟁’은 한국불교학계에서 학술적 담론의 분위기를 활성화했다고 할 수 있다. 최초로 윤호진이 무아․윤회문제의 연구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논의의 불씨를 지핀 이래,2) 김진은 새로운 q불교해석과 칸트와 불교라는 단행본으로 이 문제를 다루었고,3) 정승석 또한 비슷한 시기에 작성된 수편의 논문을 엮어 윤회의 자아와 무아라는 제목으로 출판하였다.4) 이후 김호성, 김종욱, 이덕진, 조성택, 최인숙, 이병욱, 안옥선, 방경일 등이 논평과 소논문을 통해 논의에 가세하였고, 또한 한자경과 정세근 등이 각기 단행본을 통해 독자적인 입장을 밝혔다.5) 이들의 논쟁은 장구한 세월에 걸쳐 다양한 방식으로 펼쳐진 불교교리사의 축소판을 보여주는 듯하다. 서로의 학문적 배경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무아와 윤회는 모두를 하나의 관심사로 묶어주는 역할을 하였다.

2) ‘무아․ 윤회 논쟁’은 윤호진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많은 연구자들이 
   윤호진의 무아․ 윤회문제의 연구를 논의의 기점으로 삼는다. 그러나 이 문제를 다룬 국
   내의 최초 연구자로는 고익진을 꼽을 수 있다. 고익진은 불교의 무아설을 중도(中道)의 
   연기무아로 규정하면서 바로 이것은 윤회설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기술한다. 이러한 주
   장에 대해서는 별도의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되지만 본 고에서는 일단 유보한다. 
   고익진, 「아함의 무아윤회」, 동국사상제6집, 동국대학교 불교대학학생회, 1971, pp.
   79-85.
3) ‘무아․ 윤회 논쟁’을 활성화시킨 연구자로는 단연 김진을 꼽을 수 있다. 그는 무아와 윤
   회가 서로 충돌하는 것을 칸트의 요청이론에 의해서 해결할 수 있다고 보고, 이 입장에 
   근거하여 윤호진과 정승석 등의 견해를 비판함으로써 ‘무아․ 윤회 논쟁’을 본격적으로 
   개시하였다. 김진,「새로운 불교 해석 -칸트의 시각에서 본 철학의 문제들」, 서울: 철학과 
   현실사, 1996; 김진,「칸트와 불교」, 서울: 철학과 현실사, 2004.
4) 정승석,「윤회의 자아와 무아」, 서울: 장경각, 1999.
5) 그간 진행된 ‘무아․ 윤회 논쟁’의 경과는 아래에 제시하는 김진의 논문에 잘 정리되어 있
   다. 그러나 김진은 안옥선과 방경일의 견해에 대해서는 미처 언급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 중에서 방경일의 시각은 기존의 논의 전반에 대한 비판으로 확대될 여지가 있다는 점
   에서 주목할 만하다. 김진, 「칸트와 불교: 무아․ 윤회 논쟁을 중심으로」, 동서사상제12집, 
   경북대학교 동서사상연구소, 2012, pp.39-68; 안옥선, 「초기불교에서 본 ‘무아의 윤회’:
   업의 자아의 윤회」, 불교평론20호, 만해사상실천선양회, 2004, pp.218-249; 방경일,
   「무아를 체득하면 윤회는 없다」, 불교평론36호, 만해사상실천선양회, 2008, pp.153-173.

 

이들의 논쟁은 비단 한국불교학계의 울타리에 한정되지 않는다. 윤호진은 André Bareau라든가 La Vallée-Poussin 등 서구권 연구자들의 견해를 끌어들이면서 이 문제에 대한 국내 불교학 연구자들의 관심을 증폭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또한 정승석은 水野弘元, 宇井佰壽, 中村元 등의 일본권 연구자들을 비롯하여 Walpola Rahula, Varma, Rhys Davids 등 영어권 연구자들의 견해를 광범위하게 참고․수용하면서 무아와 윤회의 문제를 둘러 싼 논의에 종합적인 정리를 시도하였다. 한편 김진은 Glasenapp, Schrader, Kurt Laider 등 칸트와 불교의 비교연구에 성과를 낸 학자들의 견해를 비판적으로 다루면서 논의의 범위를 불교학 너머로까지 확장시켰다.

 

필자는 ‘무아․윤회 논쟁’에 가담했던 연구자들의 열의와 진정성을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그간의 논의에 전제된 문제의식과 해결방안이 정당한가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갖는다. 유감스럽게도 ‘무아․윤회 논쟁’은 윤호진에 의해 시작될 당시부터 중대한 결함을 안고 있었다. 무아와 윤회는 각기 다른 차원을 지시하는 교설들이다. 따라서 서로는 충돌한다고 보기 힘들다. 무아와 윤회가 서로 다른 것은 해탈의 경지가 괴로움의 현실과 다른 차원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무아와 윤회의 모순적 관계에 곤혹스러워 하는 것은 피안(彼岸)과 차안(此岸)이 다르다는 사실을 수긍하지 못하는 것에 다름이 아니다. 무아와 윤회의 모순성을 극복하려는 시도는 피안과 차안을 대립하는 관계로 간주하고서 서로를 지양(止揚)하려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무아와 윤회를 모순으로 바라보는 시각에 대한 이견(異見)은 이미 논의의 초기에 등장하였다. 예컨대 정승석은 무아설과 윤회설을 ‘모순인 채로 공존하는 교설’에서 ‘병합이 전제되어 공존하는 교설’로 해명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저마다 무아의 세계로 나아갈 수도 있고 윤회의 세계로 나아갈 수도 있는 가능태로서 존재하므로 무아와 윤회는 인간 자체에 양립해 있다. 이러한 언급은 윤호진에 대한 반론으로서의 성격을 띤다고 할 수 있다. 정승석은 무아와 윤회가 무모순적 이유를 밝히면서 “緣起的인 세계의 생성․변화 과정은 어떤 기체로서의 자아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설명이 가능하다.”라고 기술한다. 그러한 이유에서 무아인 상태로 생성․변화하는 윤회가 성립하며 또한 서로는 무모순적인 관계라는 것이다. 정승석은 이것을 집약하는 용어로서 ‘무아 윤회’라는 표현을 채용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정승석의 언급 또한 재검토가 필요하다. 연기적 생성․변화는 무아가 아닌 윤회의 양상에 관련된 묘사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러한 방식으로 무아와 윤회를 병합시키게 되면 극복되어야 할 상태인 윤회와 그것을 넘어선 경지인 무아를 동일한 차원에 배치하는 결과가 초래되고 만다. 무아와 윤회가 공존하는 것이라면 윤회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무아를 깨달아야 할 이유가 희석될 수밖에 없다. 결국 그러한 병합은 각기 다른 차원을 드러내기 위한 교설인 무아와 윤회 모두의 취지를 거스른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김진에 의해 타당하게 지적되듯이 그와 같은 논리의 귀결인 ‘무아 윤회’는 특정한 형태를 가진 또 하나의 형이상학적 태도로 규정할 수 있다. 이것은 형이상학적 문제에 침묵을 지켰던 붓다의 무기(無記, avyākata) 와도 상충한다고 할 수 있다.

 

초기불교 문헌에서 무아는 오온(五蘊, pañcakkhandhā)이라든가 육입(六入,saḷāyatana) 따위의 경험적 요인들에 대한 부정의 형태로 묘사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럼에도 많은 연구자들이 오온이나 육입이 아닌 연기(緣起, paṭiccasamuppāda)에서 무아인 이유를 찾곤 한다. 이 점에서는 김진 역시 예외가 아니다. 그는 붓다의 교설을 연기라는 토대 위에 무아와 윤회라는 모순적 체계가 대치해 있는 구도로 이해한다. 또한 그는 무아를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으로서의 무기(無記)에 연결시키고, 윤회를 실천이성의 요청에 의한 방편(方便, upāya)에 귀속시킴으로써 다른 교설들과의 유기적인 조합을 시도한다. 그러나 김진은 정작 연기로부터 무아가 도출되는 이유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지 못하며, 다른 대다수 연구자들과 마찬가지로 초기불교에서는 용인하기 힘든 연기 해석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따라서 그가 파악하는 붓다의 교설 구도는 매우 취약한 지반 위에 성립해 있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김진은 연기설에 대해 도덕법과 자연법의 구조동일성을 특징으로 한다고 언급함으로써 심각한 문제점을 드러내고 만다. 다시 언급하겠지만 그러한 이해방식은 연기적 순환구조 혹은 윤회로부터의 해탈 가능성을 차단하는 엉뚱한 결과를 야기할 수 있다.

 

본고는 이상에서 언급한 윤호진, 정승석, 김진 등의 견해를 점검하는 데 일단의 초점을 모은다. 그간의 ‘무아․윤회 논쟁’에서 이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압도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후에 등장한 견해들 역시 이들이 논의했던 범위를 크게 넘어선 것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필자는 이들 세 연구자의 견해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통해 그간의 논의가 정당성을 지닐 수 있는지의 여부를 가리고자 한다. 특히 필자는 정승석이 강조하는 ‘무아 윤회’를 집중적으로 점검함으로써 작업의 효율성을 높이고자 한다. 필자의 판단에 따르면 ‘무아 윤회’라는 용어는 그 이전까지의 논의를 집약하는 측면이 있으며, 또한 그 이후의 연구자들에게도 직․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따라서 이것에 대한

비판은 이전과 이후에 제기된 다른 견해들에도 자동적으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그간의 논의들 가운데 조성택과 방경일의 견해에 상당 부분 공감한다. 조성택은 무아의 가르침이란 궁극적으로 깨달음을 통해서만 체득될 수 있으며 서양철학 전통의 절대적 진리와 성격이 다르다는 사실을 환기시켜 주었다.12) 한편 방경일은 무아를 체득하면 윤회란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선행 연구자들을 강하게 비판한다.13) 방경일에 따르면 무아와 윤회의 모순성을 해결하기 위한 시도란 지극히 불필요하며, ‘무아 윤회’라는 용어 자체가 ‘전도된 몽상가들’이 만들어 낸 궤변일 뿐이다. 필자는 이 두 연구자의 견해가 기존의 ‘무아․윤회 논쟁’을 뒤흔드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럼에도 이들의 주장은 그간의 논의를 근본에서부터 돌이킬 만한 파장을 일으키지 못하는 듯하다. 필자는 이제까지의 논의에서 잘못 이해되고 있는 경증과 논거들을 더욱 구체적으로 지적함으로써 ‘무아․윤회 논쟁’에 깔려 있는 그릇된 문제의식 자체를 해소하고자 한다.

12) 조성택, 「불교의 이론과 실천수행: 초기 불교의 무아설을 중심으로」, 오늘의 동양사상
   제8호, 서울: 예문동양사상연구원, 2003 봄․여름, p.164 이하.
13) 방경일, 앞의 논문, pp.155-156.

 

필자는 논의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가급적 초기불교라는 한정된 무대를 중심으로 이 작업을 진행하고자 한다. 따라서 이 논문에서 다루게 될 무아․윤회․해탈 등의 개념은 초기불교의 문헌에 직접적인 근거를 둔다. 붓다의 교설은 부파불교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거쳐 재구성되었고, 또한 중관불교, 유식불교, 여래장사상 등의 여러 구비를 통과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필자는 그간의 논의가 지나친 혼선의 양상을 보인 데에는 각각의 시대적 불교 해석에서 드러나는 차이점이 고려되지 않은 채 서로 뒤엉킨 탓이 적지 않다고 본다. 필자는 교리사적 변천의 과정을 간과한 채 무아와 윤회의 모순 혹은 병합을 거론하는 것에 반대하며, 붓다가 설했던 무아와 윤회의 본래 취지를 되살피는 작업이야말로 무엇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II. 무아와 ‘무아 윤회’

 

붓다의 무아는 형이상학적 견해(見, diṭṭhi)로서 제시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조성택이 지적하듯이 무아의 진리는 이성적 사고를 통해 인식 가능한 것으로 여겨져 왔던 서양철학 전통의 절대적 진리와 성격이 다르다.14) 또한 무아에 대한 통찰은 물림(厭離, nibbidā), 탐냄의 떠남(離貪, virāgā), 해탈(解脫, vimutti), 해탈지견(解脫知見, vimuttamiti ñāṇaṃ) 등으로 이어진다.15) 이와 같은 실천적 과정이 고려되지 않은 순수 이론으로서의 무아는 붓다의 원래 취지에서 벗어난 것일 가능성이 크며, 형이상학적 견해(diṭṭhigata)에 해당하는 것일 수 있다. 붓다에 따르면 사변적인 견해의 추구는 탐냄․의혹․자만․무명 따위의 잠재성향을 부추기고 싸움과 언쟁으로 얼룩진 괴로움의 현실만을 조장하게 된다.16)

14) 조성택, 앞의 논문, pp.166-168.
15) 무아에 대한 통찰을 통해 물림→탐냄의 떠남→해탈→해탈지견 등으로 이어지는 과정에 
    대한 묘사는 니까야 전체를 통해 가장 빈번한 용례로 나타나며, 다음과 같은 일반화된 
    형식으로 기술된다. “비구들이여, 물질현상(色)은 무아이다. 느낌(受)은… 지각(想)은… 
    지음(行)은… 의식(識)은 무아이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보고 듣는 거룩한 제자는 
    물질현상에 대해 물리게 된다. 느낌에 대해… 지각에 대해… 지음에 대해… 의식에 대
    해 물리게 된다. 물리게 되면서 탐냄으로부터 떠난다. 탐냄의 떠남으로부터 해탈한다. 
    해탈했을 때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게 된다. 태어남은 다했고, 청정한 행위는 완성되었
    으며, 행해야 할 일을 마쳤고, 다시는 ‘이러한 상태로 향함’이 없다고 알아차린다.(SN.
    III. p.21, p.22, p.23, p.24 등: Rūpaṃ bhikkhave, anattā, vedanā anattā, saññā anattā, 
    saṃkhārā anattā, viññāṇaṃ anattaṃ, evaṃ passaṃ bhikkhave, sutavā ariyasāvako 
    rūpasmimpi nibbindati, vedanāyapi nibbindati, saññāyapi nibbindati. Saṃkhāresupi 
    nibbindati. Viññāṇasmimpi nibbindati. Nibbindaṃ virajjati, virāgā vimuccati, 
    vimuttasmiṃ vimuttamiti ñāṇaṃ hoti: khīṇā jāti vusitaṃ brahmacariyaṃ kataṃ 
    karaṇīyaṃ nāparaṃ itthattāyāti pajānātīti.)”
16) MN. I. p.109; 임승택, 「인문치료와 불교명상」,「철학연구」122집, 대한철학회, 2012, 
    pp.252 이하.

 

정준영이 정리하고 있듯이 붓다는 경험세계를 이루는 물질현상(色) ․느낌(受) ․지각(想) ․지음(行) ․의식(識) 따위의 오온(五蘊)에 대해 무상(無常) ․괴로움(苦) ․무아(無我)라고 가르쳤다.17) 또한 붓다는 “무아인 그것은 ‘나의 것(mama)’이 아니고, 그러한 ‘나(aham)’는 있지 않으며, 그것은 ‘나의 자아(me attā)’가 아니다.”라고 통찰할 것을 덧붙였다.18) 이와 같이 무아란 무상․괴로움에 대한 자각과 함께 이루어지며 ‘나의 것’ ․ ‘나’ ․ ‘나의 자아’의 허구성에 대한 일깨움과 연결되어 있다. 한편 무아는 오온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며 경험세계의 토대를 이룬다고 할 수 있는 육입(六入, saḷāyatana)의 경우에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적용된다. 예컨대 붓다는 눈(眼) 따위의 감각능력(根)과 시각현상(色) 등의 감각대상(境)에 대해서도 동일한 방식으로 통찰할 것을 권한다.19) 이렇듯이 무아의 교설은 경험세계 혹은 경험세계의 근거가 되는 낱낱의 요인들에 관련하여 제시되며 온(蘊) ․처(處) ․계(界) 모두에 대한 언명으로까지 확대된다.20)

17) 정준영,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있는가」, 나, 버릴 것인가 찾을 것인가, 서울: 운주사, 2008,
    pp.70-89.
18) SN. III. p.22, p.23, p.45, p.46 등. “yad anattā taṃ netaṃ mama, neso' ham asmi, 
    na me so attā ti.”
19) SN. IV. p.1, p.2, p.3 등.
20) SN. IV. p.24. “어떠한 온(蘊)이든 계(界)이든 처(處)이든, 그것에 대해 헤아리지 않고, 
    그것에 빠져 헤아리지 않고, 그것을 통해 헤아리지 않고, 그것은 ‘나에 관련된 것’이라
    고 헤아리지 않는다. 그와 같이 헤아리지 않는 자는 세상에 대해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집착하지 않으므로 동요하지 않는다. 동요하지 않으므로 스스로 완전한 열반에 
    든다.(Yāvatā bhikkhave khandhadhātuāyatanaṃ tampi na maññati, tasmimpi na 
    maññati, tatopi na maññati, tammeti na maññati, so evaṃ na maññamāno na ca 
    kiñci loke upādiyati, anupādiyaṃ na paritassati, aparitassaṃ paccattaññeva parinibbāyati.)”

 

Steven Collins는 초기불교 문헌에서 발견되는 무아 관련 언급들을 세 가지 갈래로 분류한다.21) 첫째 내부의 주재자(主宰者)에 대한 부정을 나타내는 경우, 둘째 무상하고 괴로운 현상을 자아로 간주할 수 없다고 밝히는 경우, 셋째 경험을 배제한 상태에서 자아를 말하는 것의 무의미함을 지적하는 경우이다. 이러한 분류는 무아가 제시되는 내용적 맥락을 구체적으로 확인시켜 준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그런데 이들 모두는 오온이라는 경험적 현실에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할 만하다. 먼저 ‘내부의 주재자에 대한 부정’이란 오온을 지배하는 별도의 주재자를 내세울 수 없다는 의미이다.22) 두 번째 경우 또한 오온 각각에 대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라는 언명과 함께 바로 그것이 자아일 수 없다는 방식으로 설명된다.23) 세 번째 경우 역시 오온으로 이루어진 경험세계를 벗어난 상태에서 별도의 자아를 내세우는 것이란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드러낸다.24)

21) Steven Collins, Selfless Person: Imagery and Thought in Theravāda Buddhism, 
    Cambridge, 1982, pp.97-103.
22) 깨닫지 못한 범부는 스스로가 오온이라는 경험세계를 지배하는 힘(vaso)을 지닌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괴로움의 현실은 자신의 의지나 바람과는 상관없이 닥쳐온다. 이 점
    에서 오온을 이끄는 내부의 통솔자 혹은 주재자 따위는 인정될 수 없다. 이와 관련하여 
    Anattalakkhaṇasutta(SN. III. pp.66)에서는 육체적인 괴로움에 처했을 때 “나의 육체
    (色)에 대해 이렇게 되어라.(rūpe ‘evaṃ me rūpaṃ hotu.)” 혹은 “나의 육체는 이렇게 
    되지 말라.(evaṃ me rūpaṃ mā ahosī.)”라고 하더라도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함으로써 내부의 주재자란 존재하지 않음을 분명히 한다. Steven Collins, 
    앞의 책, p.97 참고.
23) 예컨대 “어떠한 물질현상(色, =오온)이든, 그것이 과거의 것이든 미래의 것이든 현재의 
    것이든, 내부적인 것이든 외부적인 것이든, 거칠든 미세하든, 저열하든 수승하든, 멀리 
    있든 가까이 있든, 모든 물질현상 그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그러한 ‘나’는 있지 않다. 
    그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SN. III. pp.68 등: yaṃ kiñci rūpaṃ atītānāgatapaccuppannaṃ, 
    ajjhattaṃ vā bahiddhā vā, oḷārikaṃ vā sukhumaṃ v   ā, hīnaṃ vā paṇītaṃ vā, yaṃ 
    dūre santike vā, sabbaṃ rūpaṃ, netaṃ mama, neso’ hamasmi. Na me so attāti.)”
    라는 언급이 여기에 해당한다. Steven Collins, 앞의 책, p.98 참고.
24) 만약 오온으로 이루어진 경험 자체가 자아라면 자아란 경험과 더불어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 되며, 반대로 별개라면 자아란 경험과 전혀 다른 무엇이 되고 만다. 이러한 논리적 
    난점을 피하기 위해 ‘오온 혹은 경험을 속성으로 지니는 자아’를 내세울 수도 있다. 그러
    나 그것 역시 특정한 경험으로서의 오온이 부재한 상황에서는 성립조차 불가능하다. 이
    와 관련하여 Mahānidānasutta(DN. II. pp.66 이하)에는 “느낌은 나의 자아다. (vedanā 
    me attāti.)” 혹은 “느낌은 나의 자아가 아니며 나의 자아는 느껴지지 않는다.(Na heva 
    kho me vedanā attā, appaṭisaṃvedano me attāti.)” 혹은 “나의 자아가 느낀다. 나의 
    자아는 느낌이라는 법을 [속성으로] 가졌기 때문이다.(attā me vedayati vedanādhammo 
    hi me attāti.)”라는 방식의 그릇된 주장들을 제시하고, 이들 각각에 대해 상세하게 비판
    하는 내용이 이어진다. Steven Collins, 앞의 책, pp.98-99 참고.

 

오온의 무상․괴로움․무아에 대한 일깨움은 주체로서의 ‘나’와 객관적 대상으로서의 외부 세계가 스스로 지어낸 관념에 불과하다는 자각을 가져온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거나 부정하게 될 때 외부의 세계는 고착화되고 내부의 ‘나’ 또한 절대적 존재로 바뀌게 된다. 그러한 상태에 처한 범부에게 ‘나’ 혹은 ‘나의 존재’는 필연적 사실로 경험되며, 설령 무아를 이해했다고 하더라도 진정한 의미의 무아는 체험되지 못한다.25) 반면에 무아를 실현한 아라한은 ‘나’라는 관념에 매이지 않으며 심지어 있음과 없음이라는 차원마저도 넘어선다.26) 그들에게는 더 이상 윤회가 없다.27) 무아설의 궁극 목적은 ‘나’라는 생각(asmīti māno), ‘나’라는 욕구(asmīti chando), ‘나’라는 잠재성향(asmīti anusayo)을 완전히 끊음으로써 윤회를 멈춘 아라한이 되는 데 있다.28) 오취온(五取蘊)의 일어남과 사라짐에 대한 통찰(pañcasupādānakkhandhesu udayabbayānupassi)은 그것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제시된다.29)

25) 조성택, 앞의 논문, pp.172-173.
26) Sn. 1080게. “[번뇌를] 소멸한 자에 대해서는 [있음과 없음을 헤아릴] 척도가 없다. 
    그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는 아무 것도 없다. 모든 법(法)이 끊어지고 일체의 언어의 
    길(言路) 또한 완전히 끊겨 버렸기 때문이다. (Atthaṃ gatassa na pamāṇam atthi. 
    Yena naṃ vajjuṃ taṃ tassa natthi, Sabbesu dhammesu samuhatesu Samuhatā 
    vādapathāpi sabbeti.)”
27) SN. III. p.59. “잘 해탈한 그들은 완전한 존재들이다. 완전한 그들에게는 드러날 윤회
    가 없다.(yesuvimuttā te kevalino, ye kevalino, vaṭṭaṃ tesaṃ natthi paññāpanāya.)”
28) SN. III. pp.130-131; 이와 관련하여 Anlāyo 또한 영원한 자아에 대한 개념(sakkāyadiṭṭhi)
    은 낮은 단계의 깨달음으로도 제거되지만 자기 자신에 대한 애착의 미세한 흔적은 완전한     

    깨달음으로만 제거될 수 있다고 언급한다. 이필원, 강향숙, 류현정 공역(Anlāyo), 
    Satipaṭṭhāna, 깨달음에 이르는 알아차림 명상수행, 서울: 명상상담연구원, 2014, pp.
    230-231.
29) SN. III. p.131. “그 [비구가] 이들 오취온(五取蘊)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관찰하면서     

     머물면 그에게 오취온에 수반된 ‘나’라는 생각, ‘나’라는 욕구, ‘나’라는 잠재성향이 
    제거된다.(tassa imesu pañcasupādānakkhandhesu udayabbayānupassino viharato 
    yo'pissa hoti pañcasupādānakkhandhesu aṇusahagato asmi'ti māno asmī'ti 
    chando asmi'ti anusayo asamūhato.)”

 

이상과 같이 붓다의 무아는 오온 따위의 경험적 현실과 연관되어 있으며, 무아를 온전히 깨닫기 위한 실천수행 역시 일관된 방식으로 경험적 요인들에 대한 반성적 통찰을 내용으로 한다.30) 그런데 지금부터 살펴보게 될 ‘무아 윤회’는 연기(緣起)에 바탕을 둔 것으로 설명된다. 따라서 무아와 ‘무아 윤회’는 동일한 것처럼 보이지만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무아 윤회’라는 용어를 실질적으로 정착시킨 정승석은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연기법의 근본진리를 고수하는 한, 아트만과 같은 불멸의 존재는 아무데서도 원칙적으로 성립될 수 없다. … [임의 생략] … 연기법은 만물의 인과법칙이다. 연기법의 요지는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인 다수의 원인들이 상호 작용함으로써 만물이 끊임없는 변화의 과정에 있다는 것이다. … [임의 생략] … 아트만이라는 불변 불멸의 주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진실이다. 불교는 그 같은 불변 불멸의 주체가 없이 윤회가 진행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윤회는 무아 윤회라고 불린다."

 

앞서 언급했듯이 붓다의 무아는 경험세계를 이루는 낱낱의 요인들에 대한 부정의 형식으로 묘사된다. 그런데 인용문에 묘사되는 ‘무아 윤회’는 만물의 인과법칙에 관련된다. 즉 인과법칙으로서의 연기와 사실상 동일한 의미이며,불변 불멸의 주체를 배제한 상태에서 윤회가 진행되는 과정을 나타낸다. 바로 이 점은 붓다가 제시한 무아설이 경험세계에 대한 반성적 통찰을 통해 윤회로부터 벗어난 경지를 향한다는 사실과 대조적이다. ‘무아 윤회’는 사물의 운행원리 혹은 법칙성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것이 존속하기 위해서는 윤회의 경험세계가 계속되어야만 한다. ‘무아 윤회’란 ‘만물의 끊임없는 변화’ 혹은 ‘주체가 없는 윤회’로부터 추상된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무아를 실현한 아라한에게는 새로운 태어남이 없으며 윤회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그에게 “불변 불멸의 주체가 없이 윤회가 진행되고 있다.”라는 언급은 적용될 수 없다.

 

인용문 말미에는 “이러한 윤회는 무아 윤회라고 불린다.”라는 기술이 나타난다. 이것은 ‘무아 윤회’라는 것이 붓다의 무아와 다르며 윤회의 양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스스로 드러낸 셈이다. 이와 같이 ‘무아 윤회’와 무아는 완전히 다르다. 서로는 무아라는 명칭을 공유하지만 전혀 다른 방향을 가리킨다. 한쪽은 윤회의 세계를 향해 있고 다른 한쪽은 그것이 없는 경지를 지향한다. 그럼에도 정승석은 ‘무아 윤회’와 무아를 명확히 구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서로를 동일한 것으로 착각하도록 만드는 빌미를 제공한다. 예컨대 “존재의 불변성과 상주성을 인정하는 관점은 유아론으로 전개되며,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관점은 무아론으로 전개된다.”라고 기술함으로써 ‘무아 윤회’를 무아론 일반에 귀속시킨다. 또한 그는 ‘무아 윤회’에 대해 불교 외부의 교설들과 대조를 이루는 불교만의 독자적인 것이라고 강조함으로써 그러한 혼동을 더욱 부추긴다. 필자는 그간의 ‘무아․ 윤회 논쟁’에 가담했던 다른 대부분의 연구자들도 유사한 혼란을 겪고 있으며, 바로 그 중심에 ‘무아 윤회’의 논리가 자리해 있다고 생각한다.

 

한편 정승석이 이해하는 연기법의 요지는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인 다수의 원인들이 상호 작용함으로써 만물이 끊임없는 변화의 과정에 있다.”라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상호의존적 연기 해석의 타당성 여부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검토하기로 한다. 다만 여기에서 우선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그러한 이해방식이 붓다의 가르침을 자연과학적 성찰의 일종으로 간주하도록 만들 위험성이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그는 상호의존적 연기 해석에 근거한 ‘무아 윤회’를 다음과 같이 생명과학의 성과에 비교한다.

 

"자기 동일성을 담보해주는 자아나 영혼과 같은 본체가 없이 자신의 업에 의해서만 윤회가 가능하다는 無我 윤회는 ‘업의 자기 복제’라고 말할 수 있다. 과학 용어를 구사하여 무아 윤회의 의미를 묘사해 보면, 아트만이라는 생식 세포에 의해서만 윤회라는 복제가 가능하다는 고정 관념, 즉 有我 윤회를 깨뜨리고, 업이라는 체세포 DNA에 의해 윤회라는 복제가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무아 윤회이다."

 

인용문은 ‘무아 윤회’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더욱 분명히 해준다. 이것은 불변 불멸의 주체를 배제한 윤회로서 달리 표현하자면 ‘업의 자기 복제’에 해당한다. 생명과학의 눈부신 진전은 체세포에 의한 동물 복제가 아트만이 주체로서 존재해야만 윤회가 성립된다는 기존의 통념을 깨뜨렸다. 이러한 성과는 붓다의 가르침을 새로운 차원에서 재확인시켜 준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필자는 생명 복제 또한 벗어나야 할 윤회의 양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업의 자기 복제’란 업의 이어짐 혹은 상속(相續, santāna)에 해당한다. 바로 그것이 지속되는 상황이야말로 다름 아닌 윤회(輪廻, vaṭṭa, saṁsāra)일 것이다. 결국 ‘무아 윤회’란 무아의 가르침에 의해 극복되어야 할 윤회 자체로 다시 한번 판명된다.

 

어떠한 방식으로든 ‘업의 자기 복제’ 혹은 ‘업의 상속’이 지속되는 구조에서는 진정한 의미의 무아가 실현되었다고 볼 수 없다. 이 점은 ‘무아 윤회’를 상키야(Sāṁkhya)학파의 미세신(微細身, sukuṣmaśarīra) 개념에 연결시킨 사례와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이다.36) 상키야학파는 불교와 경쟁관계에 있었던 인도철학의 한 유파로서, 물질계에 해당하는 쁘라끄리띠(prakṛti)와 정신적 실체인 푸루샤(puruṣa)라는 이원론적(二元論的) 형이상학을 기본 교리로 한다. 그들에 따르면 업력(業力, karmavaśa)은 물질계 안에서 윤회의 축으로 기능하는 미세신을 이끈다. 즉 업력에 지배되는 미세신은 삶과 죽음을 관통하여 계속되는 윤회의 담지자 역할을 맡는다. 물질계 안에서 모든 존재는 업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며 또한 미세신에 의한 윤회의 굴레로부터도 벗어나지 못한다. 따라서 상키야에서는 물질계 바깥의 정신적 실체인 푸루샤에 대한 인식(識別知, viveka-khyātir)을 통해 해탈의 가능성을 모색하였다. 즉 물질계 너머에서 윤회를 초월하여 머무는 푸루샤만이 참된 자아라는 것을 일깨우는 방식으로 업력과 윤회로부터 해탈하는 길을 제시하였다.37)

36) 정승석, 앞의 책, pp.123-151; 정승석, 「무아 윤회의 반불교적 예증」, 인도철학제5집, 
    인도철학회, 1995, pp.11-37.
37) 정승석, 앞의 책, pp.127-143, p.151.

 

정승석은 상키야의 미세신 개념이 푸루샤라는 주체를 개입시키지 않더라도 윤회가 가능하다는 것을 설명한다는 데 주목한다. 그리고 바로 이것을 초월적 자아를 배제한 상태에서 윤회를 설명해 낸 불교 바깥의 사상적 사례로 꼽는다. 또한 그는 이것이야말로 ‘무아 윤회’의 반불교적 예증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필자는 미세신이란 어디까지나 물질계의 굴레에 속한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미세신에 의한 ‘무아 윤회’는 물질계의 유전 양상에 해당하는 것으로, 윤회를 초월한 푸루샤에 대한 인식이 발생하면 그 추동력을 잃게 된다. 푸루샤를 인식하고 나면 물질계의 모든 것은 참된 자아와 관련이 없는 것으로 드러나 의미를 잃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미세신에 의한 ‘무아 윤회’는 윤회를 벗어난 푸루샤로 인해 오히려 그 실재성을 상실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고 만다. 따라서 ‘무아 윤회의 반불교적 예증’ 또한 윤회로부터의 해탈을 지향하는 붓다의 무아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으로 결론지을 수 있다.

 

이상과 같이 ‘무아 윤회’는 스스로의 논리를 확장하면서 자체적인 문제점을 더욱 분명하게 노출하는 아이러니를 보인다. 필자가 파악하는 한 ‘무아 윤회’라는 용어는 시대와 유파를 막론하고 인도철학사의 어느 문헌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이것은 현대에 이르러 비로소 고안된 것으로 여겨지며,39) 국내에서는 고익진에 의해 최초로 언급된 이후 윤호진에 의해 무아와 윤회의 모순성이 제기되면서 본격적인 관심사로 부각되었다. 이들의 선행 연구를 계승한 정승석은 상호의존적 연기 해석에 근거하여 불변 불멸의 주체를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윤회가 가능하다는 의미로 이 용어를 채용하였다. 그런데 이것은 윤호진에 의해 다음과 같이 미리 예고된 것이었다.

39) 아래의 논문은 무아윤회라는 용어가 국내 불교학계에서 논의되기 이전부터 유통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논문 또한 무아를 재생의 과정에 적용한다는 점에서 
    재고가 필요하다. 上野順瑛, 「原始佛敎に於ける無我輪廻說の論理的根據」, 印度學佛
    敎學硏究, 7-1, 日本印度學佛敎學會, 1958, pp.190-193.

 

"연기법에 의하면 우리 존재는 전적으로 상대적이고 相互依存的이고 조건 지워져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고정불변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게다가 존재를 발생시키는 이들 각 요소들은 조건에 의해서 생기고, 동시에 다른 요소들의 조건이 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사실은 우리 존재가 無我的인 존재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종교에서는 윤회의 주체를 인정하고 있지만 불교에서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윤회, 즉 ‘무아윤회’를 가르치고 있다." 

 

확인할 수 있듯이 상호의존에 입각한 연기 해석에서부터 무아의 논리에 이르기까지 윤호진의 관점은 정승석의 그것과 흡사하다. 그러나 윤호진이 생각했던 무아와 윤회는 서로의 모순성을 전제로 하는 까닭에 이들의 병합을 의도하는 정승석의 ‘무아 윤회’와 동일하다고 보기 힘들다. 정승석에 대해서는 윤호진의 문제의식과 해결방안을 계승하여 무모순적인 ‘무아 윤회’로 회통시켰다는 점에서 독자성을 인정할 수 있다. 더불어 생명과학의 논리와 상키야학파의 형이상학을 끌어들이면서 ‘무아 윤회’라는 것이 윤회의 양상에 관련될 뿐이라는 사실을 노출시킨 점 또한 나름의 기여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결과는 붓다의 무아를 규명하고자 했던 원래의 의도와는 배치되는 듯하다.

 

‘무아 윤회’는 윤호진의 견해만이 아니라 이후 ‘무아․윤회 논쟁’에 가담했던 다른 주요 연구자들의 주장까지를 집약하는 듯하다. 예컨대 김진은 ‘세계현상’을 “연기적으로 드러난 것”으로 간주하면서 “연기설에서의 해체적 측면은 무아설의 입지를 강화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반대로 연기설에서의 구성적 측면은 윤회의 주체적 성립을 가능하게 [한다.]”라고 기술한다.42) 이러한 시각은 연기를 ‘세계 현상’의 발생을 설명하는 논리로 파악하고 그 테두리 안에 무아와 윤회를 배치한다는 점에서 ‘무아 윤회’와 기본 맥락을 같이 한다. 한편 ‘무아․윤회 논쟁’의 또 다른 한 축을 담당했던 한자경 또한 “일체는 자기 자성이 있는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연 화합의 결과 연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 [임의 생략] … 업과 보는 있어도 업의 주체로서의 작자(作者)는 있지 않다.”라고 기술한다.43) 이러한 논지의 한자경 역시 연기를 일체의 사물이 존속하는 원리로 파악하고 있으며, 그 전제 위에 무아와 윤회에 관한 논지를 전개한다는 점에서 ‘무아 윤회’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42) 김진, 앞의 책(2004), pp.168-169.
43) 한자경,「불교의 무아론」, 서울: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10, p.71.

 

‘무아 윤회’라는 용어는 날카로운 대립 관계에 있었던 연구자들의 기본 이해가 실상 큰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되짚어 보도록 해준다. 그들은 연기를 ‘만물의 법칙’과 유사한 것으로 파악하고 그 바탕 위에서 무아와 윤회를 논의하는 공통점을 보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와 같은 구도의 ‘무아 윤회’는 붓다의 무아와 상관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이 점에서 ‘무아 윤회’의 논리를 공유하는 여타의 다른 연구자들 또한 원래의 무아와 상관이 없는 주장을 펼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필자는 그간의 ‘무아․윤회 논쟁’에서 윤회의 주체 문제를 ‘자아 통일성의 요청(Postulat der Ich-Einheit)’에 의해 해결될 수 있다고 강변하는 김진의 입장에 주목한다.44) 그에 따르면 붓다의 무기(無記)를 위배하지않으면서 무아와 윤회의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은 칸트식 ‘요청명제’로서의 자아 통일성 이론을 도입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의 주장 역시 윤회하는 범부의 현상세계와 관련될 수 있을 뿐 붓다의 무아와는 직접적인 상관이 없다. 무아를 실현한 아라한에게 더 이상의 태어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새로운 태어남과 관련하여 그 어떤 주체를 요청할 필요도 없다.

44) 김진에 따르면 어떠한 방식으로든 윤회의 주체에 해당하는 무엇인가를 상정한다는 
    것은 붓다의 무기를 위배하는 것이며 또한 무아를 부정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는 조성택이 주장하는 방식의 ‘무아’, 한자경이 언급하는 ‘일심’, 정승석의 ‘간다
    르바’, 유식불교의 ‘아뢰야식’, 여래장사상의 ‘여래장’ 등을 구체적인 사례로 꼽는다. 
    김진은 이러한 스스로의 주장이 한국불교학계에서 정당하게 평가되지 못했다고 
    강변하면서 무아․ 윤회 논쟁은 아직도 진행 중이며 시간이 갈수록 그 전선이 확대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필자는 무기를 위배하지 않고서 윤회의 주체 문제를 다루
    는데에는 김진의 주장처럼 칸트식 요청명제가 유용할 수 있다는 점에 동의한다. 
    그러나 김진은 붓다의 무아가 윤회로부터의 벗어남을 지향한다는 사실을 정확하
    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이 점에서 그의 견해는 스스로가 비판하는 다른 연구
    자들의 견해와 사실상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김진, 앞의 논문(2012), pp.40-44.

 

III. 연기설에 대한 오해

 

“업보는 있지만 짓는 이는 없다(有業報而無作者).”라는 경구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윤호진은 다른 종교에서는 윤회의 주체를 인정하지만 불교에서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윤회를 가르친다고 기술한다. 또한 윤호진은 이 경구에 대해 불교의 윤회는 인도철학의 다른 유파에서 언급하는 그것과 상이하며, transmigration(移住)이나 réincarnation(죽은 뒤 영혼이 다른 육체에 깃듬)보다는 renaissance(再生) 또는 transmission(傳達)에 가깝다는 것을 드러내는 근거로 활용될 수 있다고 기술한다. 앞 장에서 살펴본 정승석의 ‘무아 윤회’는 이와 같은 불교윤회의 독특성을 압축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김진은 이 경구에 대해 무아설과 카르마 이론이 모순된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 준다고 말한다.46) 그는 이 대목을 실체적 주체 개념을 파기하면서 카르마 이론을 수용한 결과 발생한 혼란스러움으로 간주한다.

46) 김진, 「무아설과 윤회설의 문제」, 「철학논총」19집, 새한철학회, 1999, p.14.

 

그러나 조성택이 언급하듯이 이 경구는 행위의 주체를 내세우지 않는 무아설의 한 유형일 뿐이다. 다시 말해서 무아와 윤회 혹은 무아설과 카르마 이론의 상반된 성격을 부각시키기 위한 문맥이 아니라 다만 무아를 실현한 아라한의 경지를 묘사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아라한의 경우 이전에 지은 업보는 남겨지지만 더 이상 스스로 업을 짓는 일은 없다. 필자는 앙굴리말라(Aṅgulimāla)라는 인물을 실제 사례로 꼽고 싶다.48) 극악한 살인마였던 그는 붓다의 교화로 출가하였고 마침내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 아라한의 경지에 이른다.49) 그러나 그는 이전에 저지른 살인의 대가로 다른 사람들에게 구타를 당하여 목숨을 잃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앙굴리말라는 격심한 육체적․정신적 괴로움을 당하면서도 거기에 압도되지 않고 “홀로 물러나 해탈의 즐거움을 느끼며(rahogato paṭisallīno vimuttisukhapaṭisaṃvedi)” 완전한 열반에 이른다.50) 그는 출가 이전에 지은 업보

(kammassa vipākaṃ)는 피할 수 없었지만 새로운 업 지음을 멈춤으로써 윤회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48) MN. II. pp.97-105.
49) MN. II. pp.103-104.
50) MN. II. pp.104 이하.

 

“업보는 있지만 짓는 이는 없다”라는 문제의 경구는 第一義空經에 속한 것으로, 관련된 내용 전체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51)

51) 잡아함경에 수록된「제일의공경」은 서성원에 의해 자세히 규명되었다. 이 경은 Vasubandhu에 
    의해「구사론」에서 3차례나 인용되고 있으며, 因果의 연속성을 가르친 것으로 부파불교사상의 
    형성기에 중요한 계기를 이루었다고 평가된다. 현재 이 경은 E. Lammotte에 의해 산스끄리뜨로 
    복원되어 있다. 서성원, 「제일의공경과 Vasubandhu」, 인도철학3집, 인도철학회, 1993, pp.9-27.

 

눈(眼)은 생길 때 오는 곳이 없고 소멸할 때 가는 곳이 없다. 이와 같이 눈은 진실이 아니지만 생겨나고 생겨났다가는 소멸하는 것으로 업보는 있지만 짓는 이는 없다(有業報而無作者). 이 음(陰, 五蘊)이 소멸하고 나면 다른 음이 이어진다. 단 세속의 수법은 제외된다. 귀․코․혀․몸․마음도 또한 이와 같이 설해진다. 단 세속의 수법은 제외된다. 세속의 수법이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는 것을 일컬으며, 무명(無明)을 연하여 지음(行)이 있고, 지음을 연하여 의식(識)이 있고, 대략적으로 설하여, 또한 순전한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다시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소멸하므로 저것이 소멸한다.’는 것으로, 무명이 소멸하면 지음이 소멸하고, 지음이 소멸하면 의식이 소멸하고, 이와 같이 대략적으로 설하여, 또한 순전한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가 소멸한다는 것이다.

52)「대정신수대장경」2권, p.92 c. “眼生時無有來處 滅時無有去處 如是眼不實而生 
    生已盡滅 有業報而無作者 此陰滅已 異陰相續 除俗數法 耳鼻舌身意亦如是說 
    除俗數法 俗數法者 謂此有故彼有 此起故彼起 如無明緣行 行緣識 廣說乃至 
    純大苦聚集起 又復 此無故彼無 此滅故彼滅 無明滅故行滅 行滅故識滅 如是廣說 
    乃至純大苦聚滅.”

 

인용문에 등장하는 세속의 수법(俗數法)이란 연기에 의한 일어남과 사라짐을 가리킨다. 한편 짓는 이(作者)이란 이전에 소멸한 감각능력(根)이나 오온 따위를 이어받는 행위의 주체를 의미한다. 전체 내용을 풀이하자면 생성․소멸하는 오온을 이어받는 주체란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무명이 있을 때 괴로움의 일어남으로 귀결되는 연기적 과정이 뒤따르고, 반대로 무명이 없으면 그러한 과정 또한 소멸한다는 뜻이 된다. 예컨대 앙굴리말라의 경우 출가 이전의 무명으로 인해 괴로움의 상황에 노출된다. 그러나 무명을 타파한 이후의 그에게는 오온 자체만이 일어나고 사라질 뿐 그것을 짊어진 주체는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 이미 무아를 실현한 그는 괴로움의 악순환으로 이어지는 연기적 과정으로부터 이탈해 있다. “눈은 생길 때 오는 곳이 없고 소멸할 때 가는 곳이 없다.”라든가, “이 음(陰)이 소멸하고 나면 다른 음이 이어진다.”라는 구절은 오온에 대해 자아를 투사하지 않고 그냥 흘려보내는 아라한의 경지를 묘사한다고 할 수 있다.

 

후대의 Vasubandhu는 위의 제일의공경을 근거로 아뜨만이라는 형이상학적 주체를 배제하더라도 윤회가 가능하다는 논리를 펼친다. 예컨대 구사론의 「세간품」에서 “오직 번뇌와 업에 의해 형성된 온(蘊)들만이 마치 등불처럼 중유(中有)의 상속(相續)을 통해 모태에 들어간다.”라고 기술한다.53) 이러한 언급은 아뜨만과 같은 주체를 상정하지 않고서 윤회전생(轉生)을 묘사한다는 점에 특징이 있으며, 마치 무아가 실현된 상태에서 윤회한다는 의미로 오해될 여지를 남기기도 한다. 실제로 정승석은 ‘중유의 상속에 의한 윤회’를 ‘무아 윤회’의 한 사례로 간주한다. 그러나 “오직 번뇌와 업에 의해 형성된 온만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새로운 태어남이 전개되는 상황이란 붓다가 가르친 원래의 무아와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에 주의가 요구된다. 「세간품」에 속한 위의 구절은 “오직 번뇌와 업에 속박된 상태에서만 윤회가 뒤따른다는 것”을 나타내며, 그러한 이유에서 “오직 무아를 실현하지 못한 상태에서만 다시 태어나게 된다는 것”으로 바꾸어 말할 수 있다.

53)「대정신수대장경」29권, p.47 b. “唯諸蘊 煩惱業所爲 由中有相續 入胎如燈焰.”; P. Pradhan(ed),
    Abhidharmakośabhāṣyam of Vasubandhu 2nd ed, Patna, K. P. Jayaswal Research Institute, 
    1975, p.129. “kleśakarmābhisaṃskṛtam antarābhavasaṃtatyā kukṣim eti pradīpavat.”; 
    정승석, 앞의 책, pp.132-133 참고; 서성원, 앞의 논문, p.24 참고.

 

이와 같이 번뇌와 업에 속박된 상태에서만 윤회가 뒤따르며, 또한 윤회를 전제할 때라야 비로소 주체로서의 자아의 문제가 부각된다. 따라서 윤회하는 주체의 필요성은 오로지 번뇌와 업에 속박된 중생들의 차원에 국한되며, 그러한 상태를 초월한 무아의 아라한과는 상관이 없다. 이 점에서 원래의 무아는 중유의 상속에 의한 ‘무아 윤회’와 정반대 위치에 놓인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정승석의 다음과 같은 언급에서도 시사된다. “凡夫가 보는 현상세계의 해명에 초점을 둘 때는 我의 존재가 상정되지만, 그런 세계의 극복에 초점을 둘 때는 我를 부정하는 無我를 설한다.”55) 이 언급은 무아를 윤회하는 현상세계와 대척점에 놓고 있다는 점에서 필자의 입장과 일치한다. 그러나 정승석은 이러한 생각을 끝까지 관철하지 못한 채 깨달음의 여부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중유의 상속에 의한 무아 윤회’를 무아의 한 유형으로 내세우고 말았다. 앞 장에서 논의했던 ‘만물의 끊임없는 변화’로부터 추상된 ‘무아 윤회’ 또한 마찬가지이다.

55) 정승석, 앞의 책, p.38; 다음의 언급 또한 동일한 맥락으로 파악된다. “윤회란 아상
    (我想)의 상속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실체로서 존재하는 아가 아
    니라 범부의 그릇된 인식으로서 존재하는 아일 뿐이다(정승석, 앞의 책, p.79).” 
    그러나 윤회라는 것이 아상의 상속에 불과하며 범부의 그릇된 인식일 뿐이라면 무
    아에 대한 바른 인식은 윤회 혹은 아상의 상속됨이 멈추는 것을 의미해야 한다.

 

한편 제일의공경은 연기설 자체에 대한 잘못된 시각에 대해서도 비판의 계기를 제공한다. 앞 장에서 인용했듯이 윤호진은 “연기법에 의하면 우리 존재는 전적으로 상대적이고 相互依存的이고 조건지워져 있는 것이다.”라고 언급한다. 또한 정승석에 따르면 연기법이란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인 다수의 원인들이 상호 작용함으로써 만물이 끊임없는 변화의 과정에 있다.”라고 요약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연기설은 상호의존이라든가 상호작용 혹은 인연화합 등으로 간주되고 있으며, 바로 그것에 기초하여 무실체성으로서의 무아가 거론된다. 그러나 제일의공경에 묘사되듯이 연기란 십이연기를 가리키며 괴로움이 발생하는 순차적 과정을 드러낼 뿐이다. 이것은 초기불교 경전 전체를 통해 일관된 양상이라고 할 수 있으며, 상호의존이라든가 상호작용 등의 논리를 통해 무아를 내세우는 직접적인 경우는 발견되지 않는다.56)

56) 三枝充悳에 따르면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
    라는 연기의 정형구는 십이연기를 동반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며, 단독으로 묘사되는 경
    우는 Cūḷasakuludāyisutta (MN. II, pp.29-39)의 단 1회에 한정될 뿐이다. 따라서 연기
    의 정형구를 십이연기가 아닌 상호의존이라든가 상호작용 혹은 인연화합 등의 논리에 
    연결시키는 것은 설득력이 약하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후반부에서 더욱 구
    체적으로 다루기로 한다. 三枝充悳, 初期佛敎の思想, 東京: 東洋哲學硏究所, 1978, 
    p.585(p.591 미주 참고).

 

이러한 사정을 반영하듯이 정작 문헌적 근거에 입각하여 연기와 무아의 상관성을 해명해 들어간 사례는 흔하지 않다. 심지어 드물게 존재하는 사례마저 연기에 대한 오해에 그칠 뿐이다. 예컨대 정승석은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즉 緣起說과 관련하여 “비구들이여, 色은 非我이다. 色을 生起하는 因과 緣도 非我이다. 비구들이여, 非我인 [因과 緣]으로부터 생기한 色이 어떻게 我(아트만)일 것인가?”라고57) 설할 경우 … [임의 생략] … 무아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하리라 생각된다.58)

57) SN. III. p.24. “Rūpaṃ bhikkhave, anattā yopi hetu yopi paccayo rūpassa uppādāya, 
    so pi anattā. Anattasambhūtaṃ bhikkhave rūpaṃ, kuto anattā bhavissati.”
58) 정승석, 앞의 책, p.25.

 

인용된 내용은 연기(緣起, paṭiccasamuppāda)의 교설이 무아 혹은 비아(非我)와 상관적이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한 맥락에서 쓰였다. 그러나 정작 해당 경구는 물질현상(色)의 원인(因, hetu)과 조건(緣, paccayo)에 대해 언급할 뿐 연기 자체와는 상관성을 보이지 않는다. 한편 이 경구가 소속된 Khandhasaṃyutta에는 4가지 근본물질(四大)을 물질현상의 원인과 조건으로 풀이하는 내용이 나타난다. 즉 “4가지 근본물질(四大)을 원인(因)으로, 4가지 근본물질을 조건(緣)으로, 물질현상이라는 온(色蘊)이 드러난다.”라고 기술한다.59) 따라서 “色을 生起하는 因과 緣”이란 4가지 근본물질로서 땅(地) ․물(水) ․불(火) ․바람(風)을 지칭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용된 경구는 물질현상의 원인과 조건이 되는 4가지 근본물질마저도 무아임을 나타낼 뿐이라고 보아야 한다.

59) SN. III. p.101. “Cattāro kho bhikkhu, mahābhūtā hetu cattāro mahābhūtā paccayo 
    rūpakkhandhassa paññāpanāya.”

 

초기불교의 연기설은 세계의 생성․변화가 아닌 괴로움의 발생․소멸에 초점을 모은다.60) 초기불교의 다양한 연기 관련 가르침을 한곳에 정리한 모음집으로 Nidānasaṃyutta가 있다. 거기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형태의 연기 유형은 괴로움이 발생하고 소멸하는 계기적 과정을 묘사할 뿐이다.61) 해당 모음집 전체를 통해 상호의존성에 입각하여 무아의 의미를 도출해낼 만한 내용이란 발견되지 않는다. 이와 관련하여 각묵스님은 연기란 괴로움의 발생구조와 소멸 구조를 설명하기 위한 것일 뿐이며, 제법의 상호관계와는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강한 어조로 기술한다.

60) 임승택,「초기불교 94가지 주제로 풀다」, 안성: 종이거울, 2014, p.283 이하.
61) SN. II. pp.1-133.

 

"연기는 괴로움의 발생구조와 소멸구조일 뿐이다. 그리고 이것은 괴로움과 괴로움의 발생구조와 괴로움의 소멸구조와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으로 정리되는 사성제와 그대로 일치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을 망각해버리고 저 밖으로 우주의 구성 원리를 찾고 법계나 제법의 상호관계를 찾고 법계연기나 육상원융을 떠올린다면 연기의 가르침을 호도해도 너무 호도하는 것이 되고 만다."62)

62) 각묵스님,「상윳따니까야」2권, 울산: 초기불전연구원, 2009, p.42.

 

초기불교의 연기에 대한 한국불교학계의 편향된 이해방식은 박경준, 권오민 등에 의해서도 이미 상세하게 비판적으로 검토된 적이 있다.63) 연기의 정형구로서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고 이것이 발생하므로 저것이 발생한다.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고 이것이 소멸하므로 저것이 소멸한다.”라는 구문을 일례로 살펴보자.64) 이것에 대해 현대 한국불교학의 선구자격인 김동화는 “이 우주 간에 森森羅羅한 一切萬有는 서로 서로 相依相資의 聯關的 관계를 갖고 있는 것으로 한 가지도 孤立獨存하는 것이 없다는 의미다.”라고 풀이한다.65) 그러한 언급에는 宇井伯壽라든가 和辻哲郞, 增永靈鳳 등과 같은 일본의 연구자들과, 다시 그 너머의 Max Walleser와 같은 독일 연구자들의 영향이 없지 않다.66) 아무튼 상호의존에 입각한 연기 해석은 김동화 이후 한국불교학계에서 주류적 경향으로 굳어지고 말았다.

63) 박경준, 「초기불교의 연기상의설 재검토 -불교의 사회화를 위한 이론적 정초」, 한국불교학제
    14집, 한국불교학회, 1989, pp.122 이하; 권오민, 「부파불교 散考」,「문학/사학/철학」제36집, 
    한국불교사연구소, 2014 봄, pp.121-123.
64) SM. II. p.28, p.65, p.70, p.95 등. “imasmiṃ sati idaṃ hoti, imassuppādā idaṃ uppajjati, 
    imasmiṃ asati idaṃ na hoti, imassa nirodhā idaṃ nirujjhati.”
65) 김동화「불교학개론」, 서울: 보련각, 1972, p.104; 박경준, 앞의 논문, p.125 참고.
66) 박경준, 앞의 논문, pp.122-127; 이태승 옮김(야마오리 테츠오), 「근대 일본 불교학의 공과」,
    인도철학제5집, 인도철학회, 1995, pp.299-301.

 

그러나 中村元이 지적하듯이 연기의 정형구에 나타나는 이것(此, imasmiṃ, imassa)과 저것(彼,idaṃ)은 상호의존이 아닌 일방적 의존관계에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67) 예컨대 연기의 이치를 12단계의 지분(支分)으로 풀어내는 십이연기(十二緣起)를 연기의 정형구에 적용시켜 보자.

첫 번째 지분인 무명(無明, avijjā)이 있을 때 2번째 지분인 지음(行, saṅkhārā)이 있을 수 있고, 또한 순차적으로 나머지 지분들도 있을 수 있게 된다. 나아가 무명이 발생하므로 지음 이하의 나머지 지분들이 발생하게 되고, 무명이 없으면 지음 이하의 나머지 지분들 역시 있을 수 없게 된다. 마찬가지 방식으로 무명이 소멸하면 나머지 지분들도 소멸하게 된다. 십이연기 전체에 걸쳐 지분들의 순서가 역전되거나 상호의존적인 방식으로 설명되는 경우란 존재하지 않으며, 항상 앞선 지분들을 조건으로 뒤따르는 지분들이 이어질 뿐이다.

67) 中村元,「中村元選集」第16卷, 原始佛敎の思想II, 東京: 春秋社, 1994, p.550; 박경준, 앞의 논문,
    pp.132-133 참고.

 

한 가지 예외적인 경우는 있다. 연기의 교설을 10가지 지분으로 풀이하는 십지연기(十支緣起)의 경우 의식(識)과 정신․물질현상(名色)은 서로가 서로의 조건이 되는 까닭에 상호의존관계에 놓인다.69) 바로 그 경우를 제외하고 연기의 지분들이 상호의존으로 설명되는 경우는 발견되지 않는다. 따라서 박경준, 권오민 등이 강조하듯이 예외적인 관계를 일체제법으로까지 확대시키는 것은 잘못이다.70) 또한 이와 관련하여 각묵스님은 연기(緣起, paṭiccasamuppāda)와 상호의존(緣, paccaya, paṭṭhāna)은 엄격히 구분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71) 초기불교 본래의 연기는 괴로움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계기적 과정을 규명하는 데 오로지 초점을 모은다. 반면에 상호의존이란 아비달마에 이르러 부각된 것으로 일체 사물의 상호의존적 생성․변화 양상을 드러내는 데 주력한다. 상호의존을 연기로 오인한 연구자들의 무아이론이 하나같이 사물의 생성․변화를 언급하는 데에는 이러한 혼선이 내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에 의한 무아이론은 어디까지나 윤회하는 현상세계의 생성과 변화에 관련될 수 있을 뿐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무아는 붓다의 무아와 다르며, 그들의 논리가 근거해 있는 연기마저도 붓다가 가르친 원래의 연기와 관련이 없다.

69) SN. II. pp.114 이하.
70) 박경준, 앞의 논문, p.130; 권오민, 앞의 논문, p.123; 특히 권오민의 연구에 따르면 
    의식(識)과 정신․ 물질현상(名色)의 상호의존성은 깨달음을 얻기 이전의 붓다의 인식 
    수준을 의미할 가능성이 높다.
71) 각묵스님, 앞의 책, p.54.

 

상호의존적 생성․변화와 혼동된 연기는 괴로움의 문제가 아닌 사물의 법칙성에 더 많은 관심을 둔다. 바로 여기에서 연기적 과정을 물리적․기계적 법칙으로 간주하는 또 하나의 심각한 오류가 발생한다. 예컨대 김진은 붓다의 연기설에 대해 도덕법과 자연법의 구조동일성을 특징으로 한다고 주장한다.72) 그러나 Rupert Gethin이 언급하듯이 붓다는 뉴튼의 역학에서와 같은 개념으로 인과적 조건을 다루지 않는다.73) 삶의 현실은 수동적으로 주어진 결과와 능동적․주체적 요인의 반작용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붓다는 무명의 소멸에서 늙음․죽음의 소멸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을 실천수행(paṭipadā) 자체로 언급하기도 한다.74) 이러한 붓다의 연기에 대해 도덕법과 자연법의 구조동일성을 거론하는 것은 중대한 곡해가 아닐 수 없다. 그러한 잘못된 관점은 실천수행을 통한 변화와 해탈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결과를 야기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크다.

72) 김진, 앞의 논문(2009), p.37; 김진, 앞의 책(2004), pp.229-230.
73) Rupert Gethin, The Foundations of Buddhism, Oxford University Press, 1998, p.153.
74) SN. II. p.5. “비구들이여, 바른 실천이란 무엇인가? 무명에서 남김없이 탐냄을 떠나 소멸
    하게 되면 지음이 소멸한다, 지음이 소멸하면 의식이 소멸한다. 의식이 소멸하면 … 태어
    남이 소멸하면 늙음․죽음과 슬픔․근심․괴로움․불쾌․ 번민이 소멸한다. 이와 같이 순전한 
    괴로움의 온(蘊)이 소멸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바른 실천이다.(katamā ca bhikkhave, 
    sammāpaṭipadā? Avijjāya tveva asesavirāganirodhā saṅkhāranirodho. Saṅkhāranirodhā 
    viññāṇanirodho. Viññaṇanirodhā … Jātinirodhā jarāmaraṇaṃ, 
    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 nirujjhanti. Evametassa kevalassa dukkhakkhandhassa 
    nirodho hoti. Ayaṃ vuccati bhikkhave, sammāpaṭipadā'ti.)”

 

십이연기의 계기적․순환적 과정에서 앞선 지분들은 그 뒤의 지분들에 대해 삶의 조건으로 기능한다. 반면에 뒤따르는 지분들은 앞선 지분들에 대해 능동적․주체적 작용으로서의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상좌부(上座部, Therevāda)의 연기 해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75) 상좌부에 따르면 십이연기의 7번째 지분에 해당하는 느낌(受)을 경험하더라도 8번째 지분인 갈애(愛)와 9번째 지분인 집착(取)이 반드시 뒤따르는 것은 아니며, 또한 11번째 지분인 태어남(生)과 12번째 지분인 늙음․죽음(老死)이라는 윤회의 양상이 반복되어야 할 필연적인 이유도 없다. Vedanāsaṃyutta에 기술되듯이 느낌에 대해 적절히 대처하면 태어남과 늙음․죽음이라는 연쇄적 과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76) 이 점을 간과하고서 십이연기를 물리적․자연법적 과정으로간주하게 되면 태어남과 늙음․죽음으로 귀결되는 연기적 순환구조로부터 벗어날 가능성은 사라지고 만다. Paul 

Williams가 지적하듯이 그러한 방식의 십이연기는 폐쇄적․결정론적 체계가 되고, 해탈 또한 불가능한 것으로 바뀌게 된다.77)

75) Rupert Gethin, 앞의 책, pp.151-153.
76) SN. IV. pp.209-210. “그가 만약 즐거운 느낌을 느끼지만 속박되지 않고서 그것을 
    느낀다면, 만약 괴로운 느낌을 느끼지만 속박되지 않고서 그것을 느낀다면,… [그는] 
    태어남(生)과 늙음․죽음(老死), 슬픔․근심․괴로움․불쾌․ 번민에 의해 속박되지 않는다.
    (so sukhañce vedanaṃ vediyati visaññutto naṃ vediyati, dukkhañce vedanaṃ 
    vediyati visaññūtto naṃ vediyati,… visaññutto jātiyā jarāmaraṇena sokehi paridevehi 
    dukkhehi domanassehi upāyāsehi.)”
77) 안성두 옮김(Paul Williams),「인도불교사상」, 서울: 도서출판 씨아이알, 2011, p.98. 
    “수(受)의 생기와 애(愛)의 생기 사이의 관계는 명백히 단일한 원인과 결과의 관계일 
    수 없음이 주목된다. 느낌들이 생겨나고 뒤따라 애가 발생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
    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12연기의 방식은 완전히 폐쇄적인 결정론적 체계가 되고, 
    해탈은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각묵스님에 따르면 제법의 상호의존성과 생성․변화의 법칙적 성격은 아비달마철학에 이르러 24연(緣)이라든가 6인(因)-4연(緣)-5과(果) 등으로 정리되었으며, 또한 이것이 발전하여 후대의 화엄사상에서 법계연기 등으로 승화되기에 이른다.78) 이 주장이 옳다면 상호의존성에 입각한 연기 해석도 나름의 근거를 지닌다고는 말할 수 있다. 더욱이 김동화 이래로 한국불교학계에는 상의․상관적 시각에서 연기를 바라보는 연구자들의 영향력이 여전하다. 그러나 초기불교에 한하는 한 연기에 대한 상호의존적 이해방식은 타당한 근거를 지니지 못한다. 필자는 전거가 불명확한 연기 해석에 동의하지 않으며, 그러한 관점에 바탕을 둔 무아의 해명에도 찬성하지 않는다. 유감스럽게도 필자가 파악하는 한 이제까지 ‘무아․윤회 논쟁’에 가담했던 많은 주요 연구자들이 이러한 문제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이 점에서 그간 진행된 ‘무아․ 윤회 논쟁’은 모래 위에 쌓아 올린 성과 같다고 할 수 있다.

 

IV. 마치는 말

 

무아와 윤회의 문제에 관한 의구심을 촉발시킨 한 계기로서 다음의 경문이 있다.

 

이와 같이 “존자여, 실로 물질현상(色)도 무아이고, 느낌(受)도 무아이고, 지각(想)도 무아이고, 지음(行)도 무아이고, 의식(識)도 무아라면, 무아에 의해 지어진 업들(anattakatāni kammāni)이 어떠한 자아(kam attānaṃ)에게 영향을 미치겠습니까(phusissanti)?”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78) SN. III. p.103; MN. III. p.19. “iti kira bho rūpaṃ anattā, vedanā anattā, saññā 
    anattā, saṅkhārā anattā, viññāṇaṃ anattā anattakatāni kammāni kam attānaṃ 
    phusissantī'ti.”「대정신수대장경」2권, p.15 비교; 이 문장에서 anattā의 서술복합어 
    용도를 살릴 경우 ‘~은 자아가 아니다(非我)’라는 방식으로 번역할 수 있다. 따라서 
    “…물질현상도 자아가 아니고,… 의식도 자아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업들은 자아 
    아닌 것에 의해 지어졌는데, [그들이] 어떠한 자아에게 영향을 미치겠습니까?”라는 
    번역도 가능하다. 그러나 여기에서 수식어 관계인 anattakatāni kammāni는 여전히 
    phusissanti라는 복수형 동사의 주격으로서 kam attānaṃ이라는 목적격을 취한다. 
    따라서 ‘무아’이든 ‘자아 아닌 것(非我)’이든 그러한 오온에 의해 ‘지어진 업들’이 
    “어떠한 자아에게 영향을 미치겠는가?”라는 기본 의미는 달라지지 않는다.

 

이와 관련하여 해당 경전에서는 무명에 싸여 사악한 소견을 일으킨 나머지 이런 의문이 생겨난다고 기술한다. 붓다는 이것에 대한 대답으로 물질현상․ 느낌․지각․지음․의식 따위의 오온이 무상하고 괴로우며 무아라고 반복적으로 확인시킨다. 바로 이 경문에 대해 윤호진은 붓다의 답변이 적절하지 못하며, 어쩌면 이러한 부류의 의문이야말로 붓다 당시부터 ‘타부’로 취급된 것일 수 있다고 기술한다. 무아와 윤회의 문제에 대한 본격적인 탐색이 사실상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과연 자아가 없다면 누가 그 업을 받을 것인가? 이러한 문제의식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윤회를 관통하는 자아를 확보해야 하고, 그러면서도 무아의 교리는 보존해야 한다는 갈등의 상황으로 내몰았다.

 

그런데 자못 심각해 보이는 이 의문에서 놓치고 있는 중요한 사실이 있다. 초기불교에 따르면 아라한을 제외한 모든 범부들은 윤회에 종속된다. 그러한 이유에서 업을 받게 될 미래의 존재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염려는 불필요한 것이다. 깨닫지 못한 한 오온으로 구성된 자아는 당연히 지속되며, 과거에 지은 업을 받게 될 미래의 자아 또한 오온의 상속과 더불어 계속되게 된다. 그러나 오온에 대해 무아라는 사실을 꿰뚫은 아라한에게는 업을 받게 될 새로운 탄생이 더 이상 없다. 따라서 그들의 경우에만 누가 업을 받겠느냐 하는 문제가 부각될 수 있다. 그러나 그 경우 또한 전혀 문제가 될 수 없다. 아라한이란 ‘자아의 해체를 실현한 이’를 가리키며, 이미 무아의 경지에 머물기 때문이다.

 

인용문의 의문은 애초부터 앞뒤가 맞지 않다. ‘무아에 의해 지어진 업들(anattakatāni kammāni)’이란 자아와 별개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오온이 이미 무아이고 ‘자아 아닌 것(非我)’이라면 그것을 이어받을 자아를 상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질문자는 무아로 해체된 오온이 짓는 업과 함께 그들을 짊어지게 될 자아를 가정하고 있다. 또한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과연 그것이 어떠한 자아일 것인가를 묻고 있다. 이것은 마치 꿈속에서 주운 돈을 꿈에서 깬 후 누구에게 되돌려 주어야 하느냐고 묻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잘못된 질문에 대해서는 그냥 그것의 부당함을 지적하는 것 이외에 다른 언급이 필요하지 않다. 굳이 추가적인 설명을 덧붙인다고 하더라도 오온 각각이 무아라는 사실을 되짚어 주는 것 이외에 또 다른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그간의 ‘무아․윤회 논쟁’ 또한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 무아란 윤회하는 자아가 없다는 의미이다. 그럼에도 범부 중생들은 윤회하는 자아 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한 한에서 자아는 지속되면서 무아의 진리를 가로막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이와 같이 윤회에 붙들려 있는 중생들의 입장에서 무아란 요원한 진리일 수밖에 없다. 붓다는 바로 그러한 상황에서 벗어나도록 돕기 위해 무아를 설했다. 무아란 윤회로부터의 벗어남을 의미하는 까닭에 무아를 실현한 아라한에게는 윤회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윤회란 바람직하지 못한 상태에 빠져 있음을 의미할 뿐이다. 무아를 실현한 상태에서의 윤회란 ‘허공에 핀 꽃’ 혹은 ‘토끼의 뿔’과 같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무아 윤회’를 내세우는 연구자들은 모든 사물이 서로 의존하여 발생한다는 사실을 지목하면서 불변 불멸의 주체 없이도 윤회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것을 붓다가 가르친 무아설에 귀속시킨다. 그러나 그러한 ‘무아 윤회’란 체세포 DNA에 의한 ‘업의 자기 복제’에 빗댈 수 있는 것으로 그것 자체가 벗어나야 할 윤회의 양상에 불과하다. ‘무아 윤회’는 윤회하는 현상세계를 설명하는 논리로는 나름의 타당성을 지닐 수 있지만 붓다가 가르친 무아와는 완연히 다르다. 붓다는 오온(五蘊)이라든가 육입(六入) 따위의 경험적 현실에 대해 무아로 통찰할 것을 가르쳤다. 무아설은 모든 사물이 서로 의존하여 발생한다는 논리와 직접적인 상관성이 없다.

 

‘무아 윤회’를 표방하는 입장에서는 스스로의 논리가 연기에 근거해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그것은 연기가 아닌 상호의존(緣, paccaya, paṭṭhāna)에 뿌리를 둔다고 할 수 있다. 연기와 상호의존은 구분될 필요가 있다. 초기불교의 연기란 괴로움의 발생과 소멸 과정을 드러내기 위한 것인 반면, 아비달마에서 부각된 상호의존은 사물의 생성․변화를 설명하기 위한 성격이 강하다. 이러한 차이를 간과하고서 서로를 동일시하게 되면 연기는 곧 자연과학적 생성․변화의 논리로 오인되기 십상이다. 실제로 이렇게 해서 연기에 대해 자연적․물리적 법칙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연기적 과정이 물리적 법칙과 동일하다면 의지적인 노력의 개입 여부에 상관없이 생성․변화는 지속되게 될 것이다. 결국 늙음․죽음으로 귀결되는 연기의 순환구조로부터 벗어날 가능성은 요원해지고 말 것이다.

 

‘무아․ 윤회 논쟁’에 가담했던 대다수 주요 연구자들이 이상에서 언급한 타당하지 못한 관점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해 보인다. 유감스럽지만 이상과 같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 그간의 논의는 정당하다고 보기 힘들다. 초기불교 경전에 근거하는 한 이와 같은 결론은 불가피하다. 이제 ‘무아․윤회 논쟁’은 문제 해결(solution)의 모색이 아닌 문제 자체의 원천적 해소(dissolution)라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듯하다. 무아와 윤회의 의미와 의의에 대해 원점에서부터 되짚어 보아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