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야단법석

초기불교에 대한 불타관 확립하기

실론섬 2015. 11. 26. 12:40

똑같은 이야기를 여러번 되풀이 합니다만...

많은 한국불자분들이 초기불교와 빠알리어 경전에 약간씩은 오해를 하는 부분이 있는듯해서 늘 안타깝습니다.


우리가 지금 접하고 있는 빠알리어 경전을 한마디로 말하라고 한다면 "출가한 수행승들을 위한 수행교리 지침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좀더 좁게 말씀드린다면 기본적으로 재가자들을 위한 수행교리 지침서가 아닙니다. 다시말씀드려서 설법의 대상자들이 "출가승"이라는 것입니다.


45년의 붓다의 행적을 생각해 본다면 출가승 못지않게 재가자들을 위한 가르침이 많았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결과적으로 경전을 전승한 분들이 재가자가 아니라 수행승들이다 보니 재가자들에 대한 부분이 상당히 빠졌고 출가승의 위상을 높이기 위하여 출가승 위주로 경전을 전승하고 편집했다고 보는게  일반적인 시각입니다. 물론 초기경전에도 재가자들을 위한 설법의 부분이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초기불교 = 출가승 위주의 불교" 입니다. 


경전을 접한 분들은 모두다 아시겠지만 정말 지겹도록 같은 부분들이 반복되고 있으면서도 그것 모두다 출가승것 일뿐 재가자들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경전을 공부하실 때 경전의 설법대상자가 누구인지 그리고 내용이 무엇인지 잘 살펴보시면 재삼 느낄 것입니다.(반면에 대승불교의 경전은 설법대상자가 출가승이 아닙니다. 대부분 선남자 선여인이거나 성중이라는 표현으로 모든 중생들을 대상으로 합니다. ^^)


또한 붓다의 가르침의 특징은 특히 재가자들에게 행한 설법은 한마디로 말한다면 (수십번은 더 말씀드렸고 글들도 올려져 있지만) "점진적/단계적 설법" 입니다. 온갖 세파에 휩쓸리고 먹고 살기 바쁜 무지한 중생들이 연기 사성제등의 교리를 받아 들이기는 어렵고 또한 이는 출가를 하여 전문적인 수행이 필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첫 설법부터 대중들에게 이런 설법을 하지 않고 대신에 자비 보시 계율 출가의 공덕등등을 이야기한 후에 그들의 마음이 열리고 보다 높은 정신적 향상을 위한 가르침을 받아 들일 준비가 되었다고 판단된다면 그때사 사성제등의 교리로 옮겨 갔던 것입니다. 


이러한 초기불교가 한국에 전파가 되고 경전도 번역이 되고 다양한 논문들도 나와서 과거에 비해서 많이 활성화되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첫 도입부터 뭔가 단추를 잘못 끼운듯 합니다. 


첫 번째는 초기불교를 너무 수행적인 부분부터 도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미얀마등지에서 사띠를 공부하신 분들이 조금은 무분별하다 싶을 정도로 사띠수행과 위파사나 수행을 들고 나왔습니다. 물론 한국불교가 선불교 위주의 깨달음을 추구하고 간화선 수행이 성행하다 보니 이에 맞서서 대응하는 성격으로 다시말씀드려서 간화선 수행을 반대하고 전혀 새로운 수행법인 사띠 위파사나 수행을 초기불교의 알맹이인냥 내세운 측면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간화선 불교 못지않게 초기불교의 위파사나 사띠등의 수행으로 깨달음을 얻을려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두 번째는 빠알리어 경전이 한글로 번역이 되면서 마치 새로운 장르의 소설책이나 수필집을 읽는듯 경전을 읽고 공부하는 풍토입니다. 물론 대승경전도 상당부분 번역이 되어 시중에 나와 있습니다만 한문용어와 장황한 형용사적 표현 그리고 문어체식의 나열등으로 일반인들에게 쉽게 다가오지 않는 구성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대승경전에 익숙한 상황에서 구어체와 간결한 문장 그리고 붓다의 원음이라는 요인등으로 쉽게 일반인들에게 다가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2500년이라는 장구한 세월동안 전해져 온 경전이라는 사실을 간과한 채 마치 소설책이나 수필집을 읽듯이 읽고 있거나 또는 너도나도 단순히 경전상의 문구만 인용하여 '이것이 붓다의 원음이다'라고 주장하면서 너무나도 쉽게 타 승가를 비난하고 타 승가의 출가승들을 비난하는 수단이나 잣대로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너도나도 경전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거나 또는 출가승 못지않은  전문가 행세를 하는 풍토가 만연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세 번째로는 경전을 너무 단순하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경전은 45년의 붓다의 가르침을 축약시켜 놓은 것이고 그 바탕은 인도라는 땅이며 당시 인도사회의 전반적인 생활상이나 사상 풍습 민간신앙등이 다양하게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경전에 나오는 신들은 인도의 고유민간신앙이나 브라만교등에서 인용하여 온 것이지 불교가 특허를 내어 만들어 낸 신들이 아닙니다. 만약에 붓다께서 한국에서 탄생하시고 한국인들을 위해서 설법을 했다면 아마도 성황당이나 달걀귀신 또는 백개의 꼬리를 가진 여우등이 경전에 등장했을 것입니다. 무엇을 말씀드리고자 하느냐 하면, 이렇듯 경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먼저 경전이 설해지게 된 배경이나 목적등을 분명히 먼저 파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아가서는 인도의 사상사 불교사상사의 변천에 대해서는 기초적인 지식을 깔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 법구경을 예를 들어 설명을 드리자면 법구경은 네 소절의 게송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내 소절의 게송만을 보면 그 가르침이 품고 있는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상당합니다. 그래서 법구경은 그러한 게송이 설해진 배경이나 목적 설법대상자들의 인연담과 함께 읽어야 그때사 제대로 이해가 됩니다. 네 개의 니까야로 이루어진 경전의 분량은 상당하지만 반복 중복된 부분을 제외하면 한 권의 책으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경전의 가르침에 대해서 수십배 수백배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논서들과 주석서 복주석서(주석서에 다시 주석을 단 것)이 있습니다. 그만큼 경전의 가르침에 대해서 다양하고도 정확한 이해를 앞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숲만 보고 나무를 못 보든가 아니면 나무는 보되 숲을 못 보든가 그저저도 아닌 숲도 나무도 못보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로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우리들이 너무나도 쉽게 간과하는 것이 있습니다. 즉 불교는 사부대중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겠지만 사부대중들에게는 출가승은 출가승대로 재가자는 재가자대로 각자의 삶의 방식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재가불자들은 경전을 무조건적으로 출가승의 눈길로 볼려고만 하는 경향이 강한듯 합니다. 그러다보니 너도나도 깨달음의 환상에 빠져 있고 너도나도 전문 수행승인냥 행세할려고 합니다. 출가승에 대한 가르침을 재가자들에게 들이대어 그 잣대로 평가할려면 재가자들도 모두다 출가하여 250여개의 계율을 지키며 살아야 합니다. 


여섯 번째로 붓다의 가르침은 사부대중 모두에게 통용되는 가르침들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재가자들에게는 재가자들의 삶과 불교의 가르침이 있고, 수행승들에게는 수행승들의 삶과 가르침이 있습니다. 따라서 수행승이 재가자처럼 행동해서도 안되며, 재가자가 수행승처럼 행동해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실천 덕목을 열심히 지키는 것이 불교의 기본적 자세입니다. 수행승은 재가자들의 스승으로써 역활에 충실하고 또한 불법을 보호전승하는 것입니다. 재가자들은 수행승들이 수행에 전념할 수 있도록 좋은 환경을 마련해주고 또한 불교를 외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각자의 역활은 서로 기대어 서 있는 갈대단처럼 어느 하나라도 잘못되면 다른 상대방도 올바르게 서 있을 수 없는 상관관계에 있습니다.


일곱번 째로 재가자들이 불교를 믿는 목적이 뭐냐 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재가자들의 불타관이 뭐냐 하는 것입니다. 왜 불교를 믿는지요? 자신의 불타관을 재삼 숙고해 볼 일입니다. 붓다의 삼대서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중생들이여 행복하라 편안하라 안녕하라" 입니다. 붓다의 가르침에 교화되어 자신의 삶을 바꾸는 기적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붓다께서는 신통력이 기적이 아니라 자신의 가르침을 받아서 사람들의 삶이 향상되고 바뀌는 것이 불교의 기적이라고 했습니다. 세간의 삶에서 행복을 찾고 도덕적으로 올바른 삶의 길을 찾고 평화롭게 공존공생하는 것이 붓다께서 재가자들에게 주신 첫번째이자 마지막 가르침입니다. 


여덟번째로 초기불교는 깨달음이란 환상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에서 유행하고 있는 사띠나 위파사나 수행은 외국의 예와 많이 다릅니다. 너도나도 선원을 만들어서 사띠 위파사나 수행을 하지만 모두다 깨달음이란 환상을 가지고 선원에 다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재가자들에게 있어서 사띠나 위파사나 수행은 외국의 예에서 보듯이 마음의 평화와 안정 편안함을 갖고자하는 것입니다. 명상을 통해서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이고 아픈 마음을 치유하는 것입니다. 여기도 명상센터가 여러곳 있지만 재가자들은 틈틈이 가서 마음을 치유하고 새로운 활력을 얻는 장소로 활용합니다. 


아홉 번째로 정말로 재가자에게 있어서 초기불교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2000년이상을 초기불교를 신봉하면서 살아 온 남방권을 여행하시면서 직간접적으로 피부로 느껴 보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그곳의 불교의 모습을 보고 또한 불자들의 생활을 보면서 직접 눈으로 확인하라는 것입니다. 설마 그분들이 한국분들보다 초기불교 못하겠는지요? 2000년 이상을 쌓아온 노하우가 상당합니다. 그런데 너무 선입견을 갖고 가거나 또는 너무 초기불교에 대한 환상을 갖고 가시지는 마십시오. 한국불교와 초기불교는 180도 다릅니다. 한국불교의 시각으로 초기불교를 볼려고 한다면 백전백패입니다. 어떠한 선입견도 없이 완전 백지상태에서 새로 시작해야 합니다. 또한 


열번 째로 정말로 불교하고 싶다면 오계부터 지킬려고 노력하시고 그리고 재가자의 16가지 덕목부터 제대로 갖출려고 노력해 달라는 것입니다. 대나무는 위로 자라지만 땅에 뿌리를 박고 그리고 첫 마디를 위지하여 두 번째 마디가 생기고 두 번째 마디를 의지하여 세 번째 마디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튼튼하지 않으면 중간에서 뿌러집니다. 대나무가 위에서 아래로 자라지 않습니다. 


왜 초기불교를 믿는가와 경전을 대하는 재가자의 자세등에 대해서는 여러번 글을 올렸지만 다시한번 저의 생각을 옮겨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