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벽두 현응스님을 비판한 수불스님의 기고문으로 촉발된 ‘깨달음 논쟁’이 점입가경이다.
미국 미네소타주립대 철학과 홍창성 교수의 ‘현응스님 옹호’ 기고문 - 김용태 청운대학교 외래교수의 수불스님 기고에 대한 비판성 글 - 김홍근 동국대 불교학과 겸임교수의 수불스님 지지와 홍창성 교수 비판의 글에 이어 이번엔 이화여대 철학과 한자경 교수의 글이 미디어붓다에 전달됐다. 지난 1990년 이후 본격적으로 벌어진 돈점 논쟁 이후 최대의 논쟁이 되어가는 분위기이다.
미디어붓다는 이같은 생산적인 논쟁에 글을 올리는 공간을 아낌없이 개방한다. 학문적 바탕에 기초한 비판과 체계적인 비평의 글이라면 누구의 글이든 환영한다. 강호제현(江湖諸賢)의 동참을 기다리며 한자경 교수의 기고문 전문을 싣는다. 편집자
한국의 토론문화를 보면 대부분 무언가 휭하니 구멍이 뚫히고 그리고 앙코없는 진빵만을 물고 늘어지는 경우가 많다고 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간화선의 깨달음에 대해서 어떤 토론이 진지하게 진행이 될려면 1) 한국불교란 무엇인가 2) 간화선이란 어떤 종파의 수행법인가... 등등에 대한 기본적인 바탕이 깔려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렇지 않으면 논쟁은 날밤을 세우는데 결론은 나지 않습니다.
불교는 흔히들 초기불교 부파불교 대승불교 밀교등으로 나누고 그 주장하는 사상들이나 경전도 다릅니다(물론 깨달음이란 하나는 같겠지만 디테일하게는 전혀 다른 종교인냥 느껴집니다). 그리고 불교는 각 나라로 전파되면 고유의 풍습이나 사상등을 포용했고 더우기 시간이 지나면서 사상적 교리적 철학적으로 상당히 발전되어 왔습니다.
이렇게 복잡다난하다보니 서로 상투 높다고 주장하니 ... 그러면 애초의 오리지널은 무엇인가? 라고 해서 붓다의 원음에 눈을 돌리고 스스로 이성적으로 판단한다고 생각합니다.
중국화된 불교는 중국불교, 한국은 한국불교, 일본은 일본불교, 남방은 남방불교, 서구는 서양불교식으로 불교는 나뉘어 집니다. 간화선은 중국식 불교의 수행법입니다. 불교가 중국으로 건너가 당시 이미 고착화된 유교나 도교의 사상과 융화 포용 수용화 과정을 거친것은 상식입니다. 중국불교의 수행법이 간화선만 있는게 아닙니다. 여러종파중에서 선불교의 수행법이며 선불교는 도교와 많이 상호 융합되었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붓다는 결코 간화선 수행법을 말한 적도 없으며 "깨달음 = 사성제를 아는 것" 이라고 확실하게 밝혀 놓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가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화 되고 여러 종파중에서 선종의 간화선 수행법이 성립되고 그것을 한국의 불교종파중에서 가장 큰 세력을 가진 조계종이 수용함으로써 널리 인정받게 된 것 뿐입니다. 마음을 닦고 집중하고 번뇌를 없애고 지혜를 드러내는 방법이 간화선만 있는게 아닙니다. 오히려 다른 수행법이 더 효과적일 수도 있습니다. 수행승 입에서 "이것만이 최고다" 라는 그 말이 풍기는 아집과 아견을 보는 것은 정말 서글픕니다. 버리라고 하면서도 꽉 움켜쥐고 있는 그 답답함. 간화선은 훙륭한 수행법이긴 하지만 결코 그것이 최고나 최상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불교는 해탈하고 열반을 획득한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지요. 해탈을 하고 그리고 열반을 획득 합니다. 해탈은 보통 8 해탈이라고 해서 여덟가지를 나열합니다. 해탈이란 족쇄나 매듭에서 풀려난 것이고, 열반이란 불이 꺼진 상태를 말합니다. 엄연히 다릅니다.
해탈은 불교의 고유의 용어가 아닙니다. 인도의 전통적인 수행법에서 체계화 된 것을 불교가 수용했습니다. 당연히 외도들도 해탈을 합니다. 천주교의 명상만으로도 해탈은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간화선도 해탈을 합니다. 각자 주장하는 내용을 보면 전부다 해탈이나 지혜의 드러남이지 결코 열반은 아닌것 같습니다.
불교는 사성제의 진리를 보는 눈(지혜의 힘)을 얻는게 궁극의 목적이고 그 힘을 얻기 위한 수단/방편이 위파사나니 간화선입니다. 수행법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따라서 수행과 지혜가 비례하면서 함께 자라야 합니다. 어느것 하나만 자라면 절름발이가 됩니다. 그래서 무수한 스승님들이 두 가지를 함께 수행하라고 했습니다. 두 가지가 뭔가..??
간화선은 정신적 수행만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정신/마음의 경지는 상당히 높을지 모르지만 절름발이 입니다. 한국의 고승들의 이해하지 못하는 언행들이 왜 나오느냐 하면은 바로 정신적 경지는 도교의 도사들처럼 높을지 모르지만 결코 진리를 보는 지혜가 함께 자라지 않았기 때문일 것 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높은 정신적 경지에서 희안한 말장난을 주고 받을지는 몰라도 그분들은 늘 분별심을 보입니다.
마음은 마음이 일어나게끔 하는 대상이 있어야 일어납니다. 대상이 없으면 마음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또한 대상을 보고 일어난 마음에 번뇌가 없다면 보석을 보더라도 돌처럼 보이고 그러니 마음이 출렁일 수가 없습니다.
열반이 무엇인지요? 탐진치 삼독심을 없애면 됩니다. 그걸 몰라서 몇십년간 산속에서 화두들고 있나요? 그리고 책을 안보면 그런것도 모르고 무작정 화두들고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많을 것입니다. 내가 가는 길이 옳은지 틀린지는 스승님도 중요하지만 경전을 통해서 얻어야 합니다. 잘못된 길인줄 모르고 가다가는 끝내 낭패를 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당연히 교학이 바탕이 된 수행이 되어야 합니다.
교학이라고 하면 굉장히 우습게 보고 폄훼하는 경향이 많은데 공부라는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학교 다닐 때 공부들 해봤죠? 그것 이해하고 체득하고 문제 푸는게 쉽든가요? 화두깨치는 것보다 더 어려운게 공부수행입니다. 공부할 때 정신집중 안하고 하나요? 간화선만 정신집중하나요? 죽을 힘을 다하여 교리이해하고 깨치고 그리고 정리정돈하여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 쉽게 보이나요? 제대로 알아야 제대로 된 불교할 수 있는 것 아닌가요?
불교는 8 해탈과 그리고 열반으로 가는 단계로 네 가지로 나뉩니다. 또한 각 단계에서 깨부수어야 할 족쇄들을 10가지로 나열해 놓습니다. 좋든 싫든 그게 불교의 수행의 단계이고 깨달음의 단계 입니다.
현응스님의 지적은 여러모로 옳습니다. 왜냐하면 한국불교의 간화선에서 성불한 분들이 있나요? 제가 봤을 때는 8해탈중에서 어느 단계에 이른 수준일 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해탈은 타종교에서도 얼마든지 얻을 수 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도 상당한 수준의 해탈에 이른 분입니다. 테라사 수녀는 말할 것도 없고요. 타종교의 수많은 성인들도 일정부분 해탈을 한 분들입니다. 해탈이 불교만의 것인줄 아시는지요?
간화선으로는 타종교처럼 해탈을 할지 모르겠지만 결코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은 획득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해탈에서 해탈로 끝나버리는게 간화선 수행이고 도교의 수행입니다.
불교가 타종교와 다른 것은 열반이라는 궁극적 목적을 설정해 놓았고 그 열반이라는 궁극적 목적에 다다르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해탈했다고 해서 모두다 열반에 이르는게 아닙니다.
붓다께서는 해탈한 후에 열반에 이르는 길을 제자들에게 자세히 일러 주었습니다. 간화선이 아닙니다. 카톨릭에서 하는 명상도 아닙니다. 그건 사념처 수행입니다.
이왕에 이런 논쟁이 일어났으니 이제라도 한국불교는 중국식의 중국화 된 불교에서 벗어나 붓다의 불교를 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간화선을 옹호할 것이 아니라 이제라도 간화선을 버리고 올바른 방법으로 즉 붓다께서 일러주신 수행법으로 돌아가는 운동을 펼치는게 어떤지요?
그리고 남방권 불교에서 "마음이란 무엇인가" 를 어떻게 설법하고 교리적으로 설명하고 있는지도 한번 살펴보길 권합니다. 마음.. 그것 이해하고 알기 쉽습니다. 행이 따르지 않으니 문제일 뿐입니다.
예쁜 여자가 눈 앞에 보입니다. 붓다나 범부나 여자를 보고 여자라고 분별하는 것은 모두다 같습니다. 하지만 붓다는 안그러는데 범부들은 여자를 보고 갈애를 일으키고 움켜쥘려고 합니다. 그게 붓다의 마음과 범부의 마음의 차이입니다. 무지 쉽습니다. 여자보고 일어난 마음에 파도가 치지 않게 하는 지혜 파도를 억누르는 힘 ... 그런게 부족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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