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 논문및 평론/논문·평론

사리 숭배의 발달과 그 고원성/원혜영

실론섬 2016. 12. 1. 17:07

사리 숭배의 발달과 그 고원성

-사리 정의와 숭배에 관한 연원을 추적하며-

이 논문은 (사)한국불교학회 2013년 하계워크숍 ‘오대산 적멸보궁과 사리신앙의 재조’에서 

발표된 내용을 수정ㆍ보완한 것임

원 혜 영/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박사후과정

 

Ⅰ. 사리 정의와 숭배의 역사

Ⅱ. 사리 숭배에 관련된 성스러운 신세계

Ⅲ. 무불상의 상징과 스뚜빠의 위상

Ⅳ. 불상의 데뷔, 출현, 새로운 시작

.

[ 요 약 문 ]

사리 숭배 및 공양에 대한 수요는 아주 이른 시기부터 있어왔다. 사리 숭배는 언제 어디서나 대규모의 장엄한 모습으로 공동체나 개인에게 복덕을 내릴 수 있다는 명목 아래서, 그 우주적이고 존재론적인 기능을 가진채 구현되었다. 사리(sarīra)는 ‘신체적 구조인 살아있는 몸과 죽은 몸 모두를 의미한다’는 경전의 기술이 존재하지만, 초기 열반경(Mahāparinibbāna-suttanta) 텍스트에서는 붓다의 사리에 공양하는 과정들로 인하여 불교 전반에서 사리는 붓다의 유골로 인식된다.

 

스뚜빠는 열반을 상징한다. 붓다의 유골을 안치해서 그 위에 벽돌이나 돌을 반구 형태로 쌓아올린 것이 ‘스뚜빠(stūpa)’이다. 살아있는 존재에게도 이 숭배와 공양은 가능하지만, 그들이 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그들과 동일시되는 스뚜빠의 건립이 그것을 대신한다. 숭배와 공양의 역사는 붓다에 의해서 주목받았고, 열반 당시에 유해에 가해지며 상징적인 건축물이 되었다. 스뚜빠는 육신과 감각의 세계를 초월하게 하고 대중들로 하여금 친밀함을 느끼게 만든다. 스뚜빠를 향한 소박한 추모나 사리 숭배는 그 자체로도 충분한 자격을 갖추며 공동체에 강한 정신적 유대감으로 이어진다.

 

반면, 불상의 출현은 초월적인 존재를 세속화시키려는 대중들의 의도로 인해 조성되었다. 불상의 실제 형상은 인도적인 관념을 따르고 있으며 붓다의 위풍당당한 체구와 더불어 경이로운 위엄과 힘을 느끼게 해 준다. 간다라 불상이 마치 가면과 같은 차가움을 소유하고 있다면, 마투라 불상은 온기와 풍성함을 느끼게 한다. 불상의 출현은 깨달음의 세계를 대중화하기 위한 일환으로 보인다. 불상의 데뷔, 출현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였다.

 

붓다의 열반은 새로운 공동체의 시작으로 해석될 여지를 충분히 남겨두면서도 그 상황들은 사리 공양 및 숭배에 집중시킨다. 사리 공양의 의미는 미래 지향성과 함께 부인할 수 없는 심오한 종교적 영감을 지녔다. 사리 숭배가 그 고원성에 근거를 두고 있는 이유는, 붓다의 열반 스토리가 총체적인 공동체의 축제였고, 붓다의 사리는 공동체의 확산에 기여하였기 때문이다.  

 

Ⅰ. 사리 정의와 숭배의 역사

 

사리 숭배를 고원함이라 규정하는 것은 지역과 역사적인 상황에 따른 수많은 차이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이고 기본적인 기반을 가지고 불교 안에서 효과적인 형태로 그 명맥을 이어왔기 때문이다. 사리 숭배및 공양에 대한 수요는 아주 이른 시기부터 언제 어디서나 대규모의 장엄한 모습으로 공동체나 개인에게 복덕을 내릴 수 있다는 명목 아래서, 그 우주적이고 존재론적인 기능을 가진 채 구현되었다. 우리는 그 성스러운 존재에 관해서 언제부터 주목하기 시작했을까? 그리고 그 우주적이고 존재론적인 구현은 불교 문헌에서 어떻게 재현되었을까?

 

사리 숭배는 그 공양물을 받는 주체로서 지상에 재현되는 헌신적이고 신비적인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다. 성스럽고 장엄한 과정들은 붓다의 열반 이후, 창조적인 활동으로 부여되면서 성장하고 대중들을 자극하였다. 붓다 사리에 숭배하고 공양하고 존경을 표하는 일련의 행동들은 시주자의 공덕을 향상시키고 그들을 구제한다는 목적으로 믿어졌다. 사리(sarīra)는 “신체적 구조인 살아있는 몸과 죽은 몸 모두를 의미 한다”1)는 경전의 기술이 존재하지만, 초기 열반경(Mahāparinibbāna-

suttanta) 텍스트에서는 붓다의 사리에 공양하는 과정들로 인하여, 불교 전반에서 사리는 붓다의 유골로 인식된다.

1) DN. ⅱ, 141 ; Rhys Davids, T.W. Anāgatavaṁsa, Journal of the Pali Text Society, 
   (London:1886), p. 36.

 

불교에서 말하는 공양(pūjā) 또는 숭배란 ‘열반한 붓다와 그 제자들이 집착을 떠나 청량해짐으로 인해 평화를 얻었고 그들에게 올리는 공경, 예식’ 등이다.2) 여래가 살아있을 때나 돌아가셨을 때, 향, 꽃, 의복, 음식, 깃발 등을 가진 사람들이 여래를 숭배하여 무한한 공덕을 얻는다. 살아있는 존재에게도 이 숭배와 공양은 가능하지만, 그들이 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그들과 동일시되는 스뚜빠의 건립이 그것을 대신한다. 초기 텍스트에서 규정하고 있듯이, 스뚜빠를 세울 수 있는 성인들은 ‘붓다와 그의 제자들인 성문, 그리고 연각, 전륜성왕’으로 한정한다.3) 그들의 강렬하고 순수한 정신성, 우월성을 드러내는 작업이 스뚜빠의 건립이다.

2) Dhp.195,196 ; Milin. 179.
3)『遊行經』(T1), 20b-c ;『大般涅槃經』(T1),200a ; MPS Ⅱ.142 ; ANⅡ,245.

 

스뚜빠는 열반을 상징한다. 붓다의 유골을 안치해서 그 위에 벽돌이나 돌을 반구 형태로 쌓아올린 것을 ‘스뚜빠(stūpa)’라고 한다.4) 반구형의 돔은 ‘알(aṇḍa) 또는 자궁(garbha)’을 상징한다. 알이나 자궁은 베다시대 이래 인도 신화에서 시원적 형상으로, 또 풍요의 상징으로 쓰였다. 인도에서는 ‘모든 것이 무(無)로 돌아가 오랜 암흑의 시간을 지나 새로운 세계가 다시 생겨날 무렵, 출렁이는 어둠의 물 위에 홀연히 빛을 발하며 떠다니는 금빛 알이 있다’며 창조신화에서 나옴직한 익숙한 광경을 설명하기도 한다. 이러한 상징은 불교 스뚜빠의 돔에도 투영되었다.5) 스뚜빠의 돔을 동아시아에서는 엎어진 발우 같다고 하여 覆鉢이라 부르는데 이런 용어는 인도에서도 알려져 있다.6) 

4) 스뚜빠는 thuba, thūpa라고도 불린다.
5) Adrian Snodgrass, The Symbolism of Stūpa(Ithaca, 1985), pp.189-195; 杉本卓洲, 
  「インド佛塔の硏究」(京都, 1984), pp. 205-222.
6) 望月信亨,「佛敎大辭典」, 제 4권(世界聖典刋行協会, 1936), 3835c.

 

스뚜빠의 숭배가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은 기원전 3세기 아쇼까(Aśoka)왕 때이다. 산치(Sāñcī) 대탑이 만들어진 것도 아쇼까가 만든 것이다. 아쇼까는 통치책의 일환으로 불교를 이용하면서 스뚜빠 숭배를 처음으로 확립한 것으로 보인다. 기록에 의하면 아쇼까는 그의 영토 전역에 있는 주요 도시에 스뚜빠를 세우고 붓다의 유골을 나누어 그곳에 봉안하였다. 붓다의 유골에 신통한 영험이 있었을 뿐 아니라, 그에 대한 숭배는 불교도들로 하여금 붓다의 유해에 귀의와 경배를 바침으로 오래전에 열반의 세계로 사라진 붓다의 실재성을 믿게끔 하였다. 스뚜빠 자체가 붓다의 외적인, 그리고 시각적인 현현물들로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왕들에게 쓰이던 봉본에 붓다의 유골을 봉안함으로 인해 아쇼까는 붓다가 곧 전륜성왕, 즉 세계의 제왕이라는 관념을 퍼뜨렸다.7) 스뚜빠 주위를 태양의 방향, 다시 말해서 시계 방향으로 돌며 경배하는 모습은 확고한 관습에 의한 것이다.

7) 벤자민 로울랜드,「인도미술사」, 이주형 옮김 (예경, 1999), pp. 67-68.

 

숭배와 공양의 역사는 붓다에 의해서 주목받았고 열반 당시에 유해에 가해지며 상징적인 건축물이 되었다. 붓다의 열반에 관련된 이야기와 불교 미술품 등에서 보인 섬세함은 사리 숭배에 관련된 분석을 명쾌하게 하는 틀을 제공한다. 초기 열반경 텍스트에서 보인 붓다의 이야기는 집중력 있게 불교미술에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이야기와 건축물, 그리고 미술의 독자성이 사리 숭배라는 공양의례에 적절하게 이해시킨다. 이국적일 수도 있고 이질감 있는 인도 문화의 시각적 양상은 다시 말해서, 사리 숭배라는 의례를 붓다의 열반이라는 상황과 맞물려 극적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그래서 특유한 문화적 상황이나 역사적 상황이 초기불교 텍스트와 무관하지 않음을 인지하게 하여 자연스럽게 흡수시킨다.

 

특히 붓다 자신도 살아있을 때, 스뚜빠의 아름다움에 대해 피력한 내용은 불교 전통의 틀 안에서 우리에게 이야기와 건축물, 또는 미술품들을 대함에 흥미로움을 일으킨다. 또한 감탄하는 붓다의 말 속에서 우리는 스뚜빠에 더욱 주목하게 됨을 발견한다. 스뚜빠는 붓다의 사리를 모신 상징성으로 유명하지만 이전부터 존재했던 인공물이다. 탑묘(cetiya)8)는 스뚜빠의 다른 형태의 이름으로 존재하는데, 과거불을 숭배하는 탑묘를 보기 위해 붓다는 열반 직전에 아난다를 대동한다.9)

8) Percy Brown, History of Indian Architecture, (D B Taraporevala Sons & Co. Bombay, 
   1942) Ⅰ:4 ; Cetiya는 엄밀하게 말하면 스뚜빠와는 좀 다른 형태로 기술되어 있어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관련성을 언급하고 있다. 불교 스뚜빠에 있는 토로나(toraṇa)는 원래 
   문이다. 나무 또는 대나무로 된 기둥을 양쪽에 세우고 그 위쪽에 긴 나무를 가로 방향으로 
   연결한 형식이다. 이것은 후대 산치나 바르후뜨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정교한 형식으로 발달
   하였다. 성스러운 나무나 봉분을 둘러싸기 위해 나무 기둥과 가로대로 구성된 울타리들이 
   만들어졌다. 이들은 뒤에 불교 스뚜빠를 둘러싸는 베디까(vedikā), 즉 울타리로 발전하였다. 
   많은 학자들이 지적하듯이 서인도의 불교 석굴사원에서 볼 수 있는 Cetiya 당의 둥근 천창은, 
   나무를 엮어 둥근 모양의 서까래를 만들고 그 위에 짚을 덮은 목조건물의 둥근 천장을 모방한 
   것이다. 퍼시 브라운은 Cetiya의 아치는 베 다 시대에 기원했던 것으로 보며, 후대 불교석굴
   사원에서는 나무로 된 아치가 석굴 정면 윗부분에 있는 말발굽 모양의 창에 가죽 끈으로 고정
   되었다고 설명한다. 
9) DNⅡ102-107. 10 DNⅡ103.

 

“아난다여! 베살리 시는 아름답다, 우데나 탑묘도 아름답다. 고따마까 탑묘도 아름답다. 쌋땀바 탑묘도 아름답다. 바후뿟따 탑묘도 아름답다. 싸란다다 탑묘도 아름답다, 짜빨라 탑묘도 아름답다”

DNⅡ103.

 

붓다는 열반 직전에 자신의 운명을 예감했던 것으로 보이며, 주변의 아름다운 광경을 눈 속에 모두 담아가려는 듯이 간절하게 탑묘를 둘러 보았다. 우데나(Udena) 탑묘는 약샤(Yakṣa) 우데나의 탑묘가 있는 장소에 만들어진 승원이다.11) 고따마까(Gotamaka) 탑묘는 베살리 시의 남쪽에 위치해 있으며 붓다는 이곳에서 몇 차례 지냈다. 이 탑은 고따마 붓다 이전에 고마까 약샤에게 받쳐진 곳이다.12) 쌋땀바(Sattamba)탑묘는 베살리 서부에 있는 탑으로 까씨(Kāsi)국의 왕인 끼끼(Kīki)의 7공주가 라자가하를 떠나 그곳에서 정진했다. 그래서 ‘일곱 망고 탑’이라고 불린다.13) 바후뿟따(Bahuputta) 탑묘는 베살리 시 근교 북쪽의 탑으로 고따마 붓다 이전부터 있었다. 원래 바후뿟따는 많은 가지를 갖고 있는 니그로다 나무를 두고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다. 많은 사람들이 그 나무에 신들이 산다고 믿었으며 자식을 위한 기도를 했고 그래서 그 탑이 지어졌다.14) 싸란다다(Sārandada) 탑묘는 고따마 붓다 이전의 탑으로 싸란다다 약샤에게 받쳐진 것으로 나중에 여기에 건립되었다.15) 탑묘에 약샤라는 이름이 언급된 것은 후대 힌두교의 숭배와 관습이 흡수된 것이다. 장소와 관련된 신들, 또는 각종 수호신들과 자연신들이 인격화되어 섬겨졌으며, 대표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이 약샤이다. 약샤는 나무신이고, 지하에 묻힌 광물들을 지키는 신이며, 부와 풍요를 가져다주는 신이다.16) 인도인들 신앙에 심층에 뿌리를 내리고 있던 이와 같은 전통 신들이 발달하여 불교에 흡수되었다.

11) Srp.Ⅲ.251.
12) Ppn.Ⅰ.811.
13) Ppn.Ⅱ. 1010 ; 자따까에 의하면(Ja.Ⅳ.241), 그들은 케마(Khemā), 우빨라반나
    (Upalavaṇṇa), 빠따짜라(Paṭācārā), 고따마(Gotamā), 담마딘나(Dhammadiṇṇā), 
    마하마야(Mahāmāyā),비싸까(Visākhā)로 태어났다.
14) Ppn.Ⅱ.273.
15) DN.Ⅱ.75 ; AN.Ⅲ.167.
16) 벤자민 로울랜드, 위의 책, p. 45․ 48 ; 아쇼까는 약샤들의 도움을 받아 하룻밤 사이에 
    팔만사천의 스뚜빠를 세웠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초기 열반경 텍스트에서 언급한 이 문장들에서 베살리의 탑묘는 많은 것들을 상징한다. 붓다의 눈에 비친 아름다운 베살리는 그 자신이 죽음을 직감하고 바라 본 풍경이다. 붓다는 베살리 도시 전체를 아우르고 있는 탑묘를 통해 자신의 심정을 암시적으로 드러낸다. 위의 인용문이 과거불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탑묘라는 점에서도 주목받지만, 잇따라 나오는 스토리로 인해 유명하기도 하다. 붓다의 수명에 관련된 유명한 이 에피소드는 붓다의 열반 상황 직전에 붓다가 원한다면 일 겁이나 머물 수 있음을 설한 내용이 들어있다. 그러나 아난다가 더 오래 사시라는 간청을 하지 않았기에 붓다가 열반에 들 수밖에 없었다는 상황으로 결론 내려졌다.17) 아름다운 탑묘를 둘러보고 붓다가 살 수 있는 기간을 언급한 것은 역설적이기도 하지만, 붓다는 과거불의 탑묘와 미래에 세워질 자신의 스뚜빠도 예감했던 것으로 보인다. 과거불을 신앙하는 탑묘의 거론은 또 다른 사리 숭배의 신앙을 자연스럽게 연결한다. 붓다의 사리 숭배 이전부터 인공의 건축물은 인도인들에게 익숙하고 친근한 것이 되었다. 붓다가 생전에 베살리 탑묘를 둘러보는 이 에피소드는 스뚜빠를 주목하게 하는 요소를 지녔다.

17) DNⅡ102-107. 이 스토리는 나중에 아난다에게 죄목을 묻게 되는 조항의 하나로 
    유명하다. ‘아난다는 마치 마라의 마음이 사로잡힌 듯하다’는 경전의 서술이 그를 
    변호하듯이 전해진다. 아난다의 간청이 있었다면 붓다의 열반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견들도 있다.

 

흥미로운 점은 붓다의 열반 상황에서 사리 숭배는 미래 공동체의 주요한 원동력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사리 숭배의 과정에서 오는 의례는 고전적인 패턴을 소유하고 있으며 재가자들이 붓다 사리에 숭배하는 상황들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사리 숭배의 취향은 초기 열반경 텍스트를 통해서 그 상황들을 직접 본 듯이 풍부하다. 사실적이며 세부적 묘사는 지역적이고 문화적인 영감까지 덤으로 얻게 한다.

 

이 에피소드에서 붓다의 열반 후에 오는 현상계의 재현들은 초경험적으로 묘사되며 이상화되고 상징적으로 승화되어 인간, 신, 그리고 붓다의 제자 등을 포함해서 삼차원의 공간과 정신의 세계까지 거론된다. 붓다의 열반이 직면한 문제들이 엄청나고 그의 사리에 공양하고 숭배하는 사건들은 두고두고 역사적인 인물인 붓다의 스토리에서 회자된다. 붓다만이 역사성을 갖고 있는 인물이기에, 제석천이나 범천등에서 얻을 수 있는 상상력, 그리고 창조성에서 더 나아가 신뢰감을 얻고 있다.

 

엄격한 질서를 부여하는 붓다의 열반 상황들은 세부적으로 절제되더라고 탁월한 성과를 거둔다. 붓다의 열반은 새로운 공동체의 시작으로 해석될 여지를 충분히 남겨두면서도 그 상황들은 사리 공양 및 숭배에 집중시키는 미래 지향성과 함께 부인할 수 없는 심오한 종교적 영감을 지녔다. 붓다의 열반 스토리는 총체적인 공동체의 축제였으며 붓다의 사리는 공동체의 확산에 기여한다. 그 공동체의 확산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한 것이 스뚜빠이다.

 

초기 스뚜빠가 가진 창조적인 힘이야 말로 자연과 맺는 독특한 관계를 규정해주며, 자연의 자리에 무던하게 존재하면서 끊임없이 모방의 저력을 이어왔다. 자연과 연결된 스뚜빠는 초창기에 미적으로 화려함을 갖고 있었고 후대로 갈수록 자연에 거스름이 없는 단순미로 향해 간다.18)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 근원성에 대한 물음일 것이다. 앞으로도 새로운 스뚜빠의 출현은 붓다의 근원성에서 연결고리를 찾을 수 있다. 그것은 매우 강력하고 자유로운 산출물을 낳는 에너지이다. 스뚜빠는 고대인들의 창조물이지만 초기 모델에 안주하지 않고 자신이 속한 사회와 문화에 맞게 자유롭고 예술적인 경지로 창조해 나간다.19)

18) 스뚜빠의 변화과정에서 등장한 모든 형태들 중에서, 중국의 탑의 원형이 우리나라에 
    미친 영향은 크다. 중국에 따르면 그들의 취향에 맞도록 탑이 변형되어야 했다. 5-8
    세기 사이 중국의 탑은 한국이나 일본에서 만들어진 탑의 원형이 되었다. 그래서 
    중국의 탑보다는 한국과 일본의 탑들이 더 단조롭고 단순미로 향하여 간다. 
19) 원혜영, 「스뚜빠의 변화된 모습에서 보인 생명성」,「철학」제97집(한국철학회, 
    2008), p. 50

 

그렇다면 이런 자유로운 창조물의 근원은 어디에서 시작되어 발달되어 온 것일까? 붓다의 열반 상황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문헌학적 조사를 토대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는, 그것을 파생하여 생긴 건축물이 붓다의 사리와 동격으로 강조되고 있기 때문이다. 붓다의 사리는 논리적 연장선상에서 숭배라는 광범위한 역사와 배경을 그 건축물에 고스란히 재현한다. 그것을 배경으로 하는, 붓다의 열반 에피소드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Ⅱ. 사리 숭배에 관련된 성스러운 신세계

 

‘사리 숭배에 관련된 성스러운 신세계’는 초기 열반경 텍스트에서 보인 붓다의 열반 당시의 상세한 에피소드에 근거한다. 붓다의 유체에 가해진 상황들은 전륜성왕의 유체 방식을 다루는 것과 닮아있으며, 거기에 신들의 공양이 조화롭게 이루어져 있고 대자연의 현상인 대진동으로 인해 사리 숭배의 성스러운 신세계는 펼쳐졌다. 신화적이고 축제적인 성향은 붓다의 사리를 통해 경험되며 이러한 신세계를 독자들에게 전하면서 감흥으로 이끈다.

 

특히 붓다의 입멸 상황에 관련한 ‘대진동 에피소드’에서 붓다의 정신세계를 경험할 수 있게 된 것은 새로운 신세계를 경험함이다. 붓다는 입멸 직전에 ‘초선, 2선, 3선, 4선의 사선정을 거쳐, 4등지, 상수멸까지 들어간 것’20)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거꾸로 출정하여 ‘4등지를 거쳐, 다시 4선, 3선, 2선, 초선, 그리고 다시 초선, 제 2선, 제 3선, 제 4선에서 출정하여 반열반’21)에 들었다. 붓다의 정신세계는 침묵하는 듯, 정적을 표면화하면서도 역동성을 내면화한다.22) 이런 정신세계는 대진동이라는 신세계에 반응을 유도했으며 대자연은 그것에 화답한다. 

20) MPS[DN.Ⅱⅹⅵ 6.8-10] 참조.
21) MPS[DN.Ⅱⅹⅵ 6.8-10] 참조.
22) 원혜영, 「대진동」,「한국불교결집대회논문」(한국불교결집대회 조직위원회, 2004).

 

우주와 교감하는 대 사건을 ‘대진동’으로 표현한 것은 내면의 작고 정교한 정신세계가 외부 장엄하고 숭고한 사건으로 펴진 것이다. ‘대진동’은 붓다 입멸에 대한 우주와 소통이며 성인의 입멸에 대한 우주의 반응이다. 한 개인의 입멸이 아니라 공동체의 입멸이며 다른 변화된 공동체를 예견하는 우주적 반응이다.23) 우주의 기운이 붓다의 열반이라는 사건을 계기로 일대 변화를 겪으며 완벽한 형태와 완벽한 상황으로 입멸의 정신세계를 ‘대진동’을 통해서 전환한다. ‘대진동의 에피소드’는 두 개의 관심 세계, 즉 공간적 세계와 시간적인 세계가 역사라는 개념 속에서 적절히 배분된다. ‘땅이 진동하고 하늘이 변화하고 바닷물이 출렁이고 우뚝 선 수미산이 흔들리는 광경’은 이전에 보았던

장면이 아니다. 바람이 지나가는 장면을 볼 수는 없지만 ‘수목이 꺾어지며 눈으로 으스스한 기운’을 느끼게 하는 공간적인 변화에 큰 충격을 준다. 이런 마술적 능력, 비상한 것들은 인간을 정서적으로 매혹시킨다.24) 텍스트에서는 대진동 후에 뒤 이어져 나오는 게송들로 차분하게 붓다의 열반을 음미할 수 있게 한다.25) 게송들은 ‘별, 달, 쌓인 눈’등의 자연적 표현과 ‘법의 바퀴, 중생들의 괴로움’ 등을 적절하고 매끄럽게 처리하여 비통함을 비유적으로 나타낸다. 붓다의 정신세계, 대자연의 반응인 대진동, 그리고 미학의 정점인 게송들의 연결은 클래식 음악을 듣는 것처럼 길고도 장중함을 지녔다. 붓다의 열반 자체가 우주적인 것들과의 소통의 장치처럼 많은 것들을 제시한다.

23) 원혜영, 「대진동」, 위의 책, 참조.
24)『大般涅槃經』(T1) 205a29-205b03 ; 원혜영,「아름다운 공동체, 붓다의 열반 
    에피소드」 (경서원, 2009), p. 303.
25)『遊行經』(T1) 26c16-27b14.

 

세속적인 붓다의 장례 절차로 돌아가 보자. 그들은 어떻게 붓다의 장례법을 실현했는가? 여기서 그들은 누구일까? 붓다의 입멸은 신들도 참여하였기에 세속의 범주를 넘어서 신화적 이미지를 담고 있다. 천신들은 무상성을 알고 있기에 붓다의 죽음에 냉담한 듯 보이는 경전들의 서술들로 인해, 비구들이 슬피 곡하고 부르짖으면서 스스로 억제하지 못하는 것을 지적해서 대비를 이루기도 한다.

26) 반면, ‘천신들이 머리를 헤쳐 풀고 팔을 들어 울며, 땅에 쓰러져 앞으로 뒤로 구르면서 울고 있는 장면’27)들도 일부 초기 열반경 異本에 존재한다. 신들이 붓다의 입멸에 반응하는 것에 차이가 있지만 그들이 열반 상황을 함께한 것에는 일치를 보인다. 신들이 벌린 사리공양의 상황은 더욱 신비적이고 축제적이다.

26)『遊行經』(T1) 027b24.
27) MPS[DN.Ⅱⅹⅵ]p.158. 11 ; 원혜영,「아름다운 공동체, 붓다의 열반 에피소드」, 
    위의 책, p. 320.

 

놀라운 것은 초기불교에서 사리 공양의 주도적 집행은 재가자들에게 부여되었다. 이것은 초기 불교가 수행에 전념하고 출가자들의 우월한 특권의식이 어느 시대보다도 강력한 시점에서 당황스러운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말라족이 주도한 사리 공양은 재가집단의 위상을 말한다. 초기 열반경에서 출가자 및 붓다의 제자들인 성문들이 제외된 상황이 주목되는데, 그 이유와 근거를 밀란다팡하

(Milindapañha)28)는 거론한다. 이 텍스트에서 승자의 아들은 성문을 의미한다.

28) Milindapañhapāil, Pāil Series 28, Romanized from Myanmar version published in 1999,
    (Ministry of Religious Affairs, Buddhasāsana Society, 2008).

 

“아난다여! 여래의 사리 공양하는 일을 너희들이 점유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대왕이여, 왜냐하면 승자의 아들들에게 있어서 이 공양하는 것은 그들의 본래 행해야 할 일이 아닙니다. 형성된 것들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如理作意, 마음 집중을 세운 관찰, 대상의 본질에 대한 파악, 번뇌와의 싸움, 최고선 획득에 경주하는 것, 이것은 승자의 아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공양은 나머지 신들과 인간들이 해야 하는 일입니다”

Milindapañhapāil, 위의 책, p. 177 ; … abyāvaṭātumhe ānanda hotha tathāgatassa sarīrapūjā yāti. 

akammaṃ h'etaṃ mahārāja jinaputtānaṃ yad idaṃ pūjā; sammasanaṃ sankhārānaṃ, yoniso manasikāro, 

satipaṭṭhānānupassanā, ārammaṇa-sāraggāho, kilesayuddhaṃ sadatthamanuyuñjanā, etaṃ jinaputtānaṃ 

karaṇīyaṃ karaṇīyaṃ; avasesānaṃ devamanussā naṃ pūjākaraṇīyā.

 

초기불교시대의 성문과 비구들의 위상이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리 공양의 중대사를 재가자들에게 넘기는 초기 열반경 텍스트의 전거들에서 사실상 많은 의문점을 제시한다. ‘밀란다팡하’는 그 의문점을 해결해 주었으며 공양의 몫은 신들과 인간들이 행하는 일임을 강조한다. 고전의 의문점을 다른 고전의 텍스트가 해결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초기 열반경 텍스트에서 보인 사리 공양의 형식, 규모 그리고 종류는 어떠했을까? 갖가지 꽃들과 그윽한 향 등으로 공양은 이루어졌으며 다양한 맛과 향, 질감을 가지고 있는 좋은 음식들이 제공되었다. 12종류의 악기를 동원한 음악이 흐르고 천막을 둘러 설치한 뾰족한 원형의 원옥을 지어 한 공간에 공동체가 모일 수 있도록 하였다.30) 붓다의 유해에 다가가서 춤과 노래와 연주와 화환과 향으로 존경하고 공경하며 공양했다. 그들은 그렇게 원옥에서 하루를 보내며31) 성스러운 사리 공양을 축제처럼 즐겼다. 축제는 인간들 사이에 드리워진 모든 차별을 잊고 유대와 일체감을 되찾는 사건일 뿐만 아니라 인간에 의해 소외되고 억압되고 적대시되었던 자연과 화해하는 잔치이다.32) 축제기간은 7일간 동안 지속되었으며 이 기간은 공동체의 유대감과 결속을 다지는 신세계의 길로 이어졌다.

30) SV. p. 596 ; MPS[DN.Ⅱⅹⅵ] p. 159 ;『佛般泥洹經』(T1) 173a14.
31) 원혜영, 「이야기 형식으로 표현된 붓다의 축제적인 장례」,「교불론논집」제14권
    (한국교수불자연합회, 2008), p. 407.

32) 이승종, 「축제로서의 삶」,「축제와 문화」,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3), p. 21.

 

붓다의 유해에 가해진 방식, 다시 말해서 유체 처리 방식은 색다른 이미지를 부여한다. 사리 공양이 붓다의 유해에 공양하는 방식이라면, 이 유체에 가해진 처리 방식은 ‘붓다에 몸에 베어들게 함’이라는 고급스러움을 뜻한다. 유체에 이러한 과정들이 가해진다는 사실은 놀랍다. 놀랍고 경이로운 과정을 이색적이거나 이질적이지 않게 하기 위해 경전들은 붓다와 전륜성왕의 유체 처리방식을 닮았다고 서술한다.

 

붓다의 유체에 가해지는 행위는 다음과 같다. ‘향탕으로 몸을 씻으며 500장의 모직으로 몸을 감싼 다음, 황금관 안에 넣고 삼씨기름을 쏟는다.’33) ‘전단향나무와 침향나무와 가래나무와 녹나무 땔감을 관 위아래에 덮고 좋은 4면의 높이와 넓이를 30길이로 하여 불을 붙여 화장하고 12부의 풍악을 울리며 향과 꽃으로 그 위에 모두 흩고서 재와 숯은 골라 버리고 좋은 향수로 깨끗하게 씻어 금 단지 속에 넣고 탑을 세워 비단과 번을 달아 꽃과 향을 뿌리며 풍악을 울린다.’34)

33)『遊行經』(T1) 28b10-28b12.
34)『佛般泥洹經』(T1) 173a18-173a26

 

붓다와 전륜성왕과의 유체 처리방식이 닮았다는 사실은 후대의 첨가 내지 삽입으로 보는 경향이 없지는 않지만,35) 그 방식은 인도 고전에서 제왕의 이미지를 소유한 전륜성왕의 장엄함과 그것으로 인해 불사리의 공덕과 위신에 가피를 받고자 하는 믿음이 당시 불교도들에게 팽배해 있었기에 가미된 것이다. 세속을 떠난 붓다와 ‘세계 정복’ 또는 ‘세계 군주’라는 이상을 가진 전륜성왕과는 서로 상반되는 이미지를 가졌었지만, 두 개념이 합쳐지면서 붓다의 위상은 높아졌다. 전륜성왕의 개념은 초기 베다뿐만 아니라 아리안 이전부터 있었으며 불교적 개념에서 함께 거론되면서 붓다의 다른 세속의 짝으로 자리 매김한다.36) 전륜성왕의 장례법을 붓다의 장례법에 비유하여 거론되는 경전의 서술들은 전설적이고 신화적인37) 붓다의 장례법을 더욱 상징적이면서도 세속과 거리감을 좁히게 만든다. 

35) 원혜영, 「붓다와 전륜성왕에게 행한 유해 방식은 닮았는가」,「인도철학」제23집
    (인도철학회, 2007), p. 78 ; 전륜성왕에 대한 언급은 전륜성왕의 관념과 기원이 
    이전부터 있어 왔다는 주장을 표면적으로 뒷받침하면서도, 초기 열반경의 편찬자
    들이 붓다 입멸 이후라는 입장을 든다면, 아쇼까왕이 모든 종파를 총괄하는 이상적인 
    행적을 누군가 기리기 위해 보편자인 전륜성왕을 첨가했을 가능성도 남겨두어야 한다. 
36) Zimmer, Hernrich, Philosolphies of India, (New York, Meridian Books, 1957), pp. 129-130. 
37) 고대 인도문헌에서는 태양의 바퀴가 이끄는 대로 세계를 통치한다고 하여 전륜성왕 
    (Cakravartin)이라 한다.; 木村泰賢ㆍ平等通昭, 「梵文佛典文學の硏究」(東京, 1930) ; 
    신화적인 서술들은 율장 등을 통해 붓다의 생애에 대한 관심들이 가해지면서 신비적인 
    형태로 꾸려지게 되었다. 붓다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가면서 불전문학이라 불리는 형태가 
    이루어졌는데,『랄리따비스따라』,『마하바스뚜』,『붓다차리따』,『니다나까따』 등이 
    여기에 속한다. 

 

Ⅲ. 무불상의 상징과 스뚜빠의 위상

열반한 붓다의 본질을 드러낸다는 것은 최상의 정신성을 표현해야 하는 작업이다. 붓다의 존재에 걸 맞는 형상이나 관념은 사실상 어떤 표현으로도 불가능하다. 붓다를 인간으로 표현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것은 인도 문화의 역사적인 기류에 기인한다. 인도 문화의 기저에 잠복해 있던 상 숭배 의식과 관습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인도에서 인더스 문명기(B.C 2500~1800)에 상을 만드는 관습은 있었지만, 베다시대(B.C 1500~600)에 새로이 유입한 아리아인들에게는 인간적인 형상의 상을 조성하거나 숭배하는 관습은 없었다.  

상의 숭배가 뚜렷하게 보이기 시작한 것은 마치 인간처럼 열정적으로 상을 숭배하는 박띠(bhakti) 경향이 인도 전반에 대두된 기원전 2~3세기부터이다.38) 종전의 박띠 숭배는 자기 신뢰와 통제를 통해 자기 계발에 이를 수 있다는 엄격한 테라바다 가르침을 대신하면서 신적인 존재에 인간의 형상을 대입해서 숭배하기 시작한 역사를 기반으로 한다. 토속적인 풍요의 신들이 이 당시에 출현했다.  
38) Coomaraswamy, Ananda Kentish, “The Origin of the Buddha Image”, The Art 
    Bulletin, Vol.9, No.4. Jun. (Colleqe Art Association, 1927), pp. 287-317 ; 이주형, 
    「쿠마라스와미의 불상기원론」,「강좌미술사」11, (한국미술사연구소, 1998), pp. 49-76.

붓다의 열반 후에 약 500년간은 불상이 존재하지 않았다. 붓다의 열반 수 세기동안 스뚜빠의 건립과 숭배는 ‘스뚜빠가 곧 붓다이고 붓다가 곧 스뚜빠’라는 공식에서 그 신성함과 강한 매력으로 인해 고조되는 재가자들의 염원을 담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사까 오사무(高田修)는 붓다가 살아 있던 당시 불상이 조성되었다는 텍스트상의 문헌이 존재함39)을 제시한다. 붓다가 죽어서 도리천에 태어난 어머니에게 설법하기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코샴비국의 아다야나왕과 코살라국의 쁘라세나지뜨왕이 붓다의 상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후대 불교권에서 알려졌다. ‘優塡王像’이라고 불리는 상들이 전해지기도 한다.40)  
39) 高田修,「佛像の起源」(東京, 1967), pp. 9-19 ; 이주형, 「불상의 기원-쟁점과 과제-」 
   「미술사논단」3, (1996), pp. 365-396.
40) Martha L. Carter, The Mystery of the Udayana Buddha, Supplemento n. 64 agli Annali,
    vol.50 (Napoli, 1990).

붓다를 직접적으로 형상화하기 전까지 많은 것들이 붓다를 대신한다. 붓다를 상징하는 것으로는 보리수, 법륜, 불족적, 스뚜빠 등이 있다. 이것들은 깨달음의 나무, 진리의 수레바퀴, 붓다의 발자국, 열반의 상징이라는 면에서 우주의 기원에서 나온 것으로 신성시된다. 특히 스뚜빠가 우주를 형상화한 것이라는 생각, 또 그 안에 사리를 봉안함으로 스뚜빠가 생기를 띠게 된다고 하는 생각은 아마 베다 시대의 제단에서 기원한 듯하다. 베다 시대의 제단은 마하푸르샤(Mahāpuruṣa)를 상징하는 사람을 희생제물로 봉헌함으로 생기를 띤다고 여겼다.41) 무불상의 상징을 대신하는 이런 것들의 의미는 붓다를 직접 인간적으로 형상화한 것보다 어쩌면 더 깊이 있는 신뢰감을 대중들에게 심어줄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붓다의 인간 형상을 삭제하거나 비워두는형식은 붓다의 면전에서 행한 행위들에 근엄함과 조심스러움 등을 자아낸다. 붓다는 인간적인 형태로 묘사되지 않았고 상징적인 존재로 암시되었어도 위상은 컸으며 또한 도상학적인 상상력은 크게 자극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41) 벤자민 로울랜드, 위의 책, p. 68

인간의 형상은 세간 속에서 그려지고 형상화시켜 존재하지만 존엄하고 귀한 존재는 세속 세계에서 표현하지 못할 접근 불가능성을 지녔다. 무불상의 이미지는 인위적이지 않고 본면목을 드러내는 최상의 방법이다. 상징과 은유로 표현되는 것들 가운데, 가장 멋진 불교미술학적 상징은 ‘무불상의 상징’일 것이다. 붓다의 존재를 표현한다는 것 자체는 초기에 금기시되는 상황들이였으며, 초기불교 시대의 스뚜빠 벽면에 드려진 붓다의 존재는 표현되지 않고 그 존재를 상징처럼 빈 공간으로 대신한다. 무불상은 무위적인 것을 그대로 드러냈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존재의 위상은 높았고 주변에 새겨진 조각들로 하여금 이야기는 유추되고 구성되었다. 무불상의 시대에 사리 숭배의 위상도 그 만큼이나 함께 커갔다.    

사리 숭배가 곧 스뚜빠의 숭배로 이어진 것은 필연적이다. 왜냐하면 인도 수행자들이 ‘깨달은 자’라고 하는 것은 스뚜빠를 증거로 내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붓다의 전유물이 아니라 다른 모든 독각과 아라한에게까지 그 범위는 넓어졌다. 당시 대중들은 생존하고 있던 수행자를 보는 것은 간절한 기원에 속하는 것이었고, 이것은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다. 세월이 흘러 붓다와 그 유명한 제자들이 세상을 떠나자 그들의 숭배는 스뚜빠를 경배하는 의식으로 자연스럽게 옮겨갔다. 결과적으로 이 모든 의식은 스뚜빠를 숭배의 대상으로 삼게 만들었다. 바로우는 스뚜빠 숭배의 역사를 초기부터 현재까지로 추정한다.42) 데피세는 ‘붓다의 스뚜빠가 다른 수행자들의 스뚜빠와는 달리 번호로 계정되어있다’43)고 말한다. 그의 이러한 언급은 사리 분배를 통해 넓게 퍼진 스뚜빠가 확산되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42) 원혜영,「아름다운 공동체, 붓다의 열반 에피소드」, 위의 책, pp. 399-400
43) De Visser, The Arhants in China and Japan (Berlin, 1922-1923), p. 80.

반드시 유명한 수행자이기 때문에 광대한 스뚜빠가 지어진 것은 아니다. 특정한 사회집단의 평판만으로도 스뚜빠는 지어졌다.44) 이러한 현상은 인공물이 종교 집단의 결속을 가져오는 결과를 가져왔다. 스뚜빠의 이런 확산은 불교 수행자들의 위대함보다는 불교도들의 숭배자적 생활방식과 더 밀접한 관련이 있다. 쇼펜은 일반적으로 붓다와 유명한 수행자의 스뚜빠는 같은 종교적 현상에서 특화된 실례들이라고 말한다. 다시말해서, 같은 믿음, 같은 태도, 같은 건축학적 구조, 같은 상징, 그리고 같은 종교적 의례행위들이 스뚜빠와 관련 있다. 쇼펜은 “역사적 유물의 숭배와 역사적인 붓다의 스뚜빠는 인도 불교 안에서 수행자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일반적인 일이고 고정된 믿음과 관습들에 의해서 단지 특별하고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실례의 일종이다”45)라는 가설에 무게를 싣는다. 초기불교에서 존경받는 것은 고정된 관습들에 따른 일종의 공동체 의식으로 인해 굳어진 것들이다. 붓다의 스뚜빠와 다른 수행자의 스뚜빠가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은 같은 구조의 인공물이라고 하더라도 두 인공물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다른 것이지, 초기불교 공동체 안에서 그들의 위상은 똑같다.  
44) Lamotte, Etienne(E), History of Indian Buddhism, (Université catholique de Louvain, 
    Institut orientaliste, 1988), pp. 333-334. 
45) Schopen, Gregory, “An Old Inscription from Amarāvati and the Cult of the Local 
    Monastic Dead in Indian Buddhist Monasteries” (Journal of the International Association 
    of Buddhist Studies 14, no. 1991c, 2), p. 302.

Ⅳ. 불상의 데뷔, 출현, 새로운 시작

붓다 열반 후, 수세기 동안 스뚜빠 건립과 예배를 통해 붓다의 유골에 대한 숭배가 확고하게 자리 잡는 것은 사실이다. 붓다가 남긴 유골은 붓다와 직접 연결된 것으로서 그를 대신할 만한 충분한 자격과 신성함을 갖추었다. 이에 비해 불상, 즉 인간의 형상은 보는 사람들에게 나름대로 강한 정서적 힘을 발휘하지만 그 원형인 붓다의 존재와의 관계가 모호하고 언제든지 그러한 모호성에 대한 의구심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특정한 상이 어떻게 붓다를 대신할 수 있는지에 관련하여 분명하게 입증할 수는 없다.46) 하지만 사리 숭배, 즉 스뚜빠에 대한 숭배는 불상과 비교되는 권력의 경쟁구도에 있었다는 사실도 부인할 수 없다. 불교라는 범주 안에서 스뚜빠와 불상의 숭배가 대중들의 공양과 존경의 대상임에는 분명하지만 역사적 의미, 텍스트상의 전거들, 미술사적인 고찰 그리고 불교도들이 느끼는 감흥에 차이가 생기면서 불상은 조성되었다. 기원후 1세기에 간다라와 마투라, 두 곳에서 처음으로 불상이 만들어졌다.47)  

46) 이주형, 「인도초기 불교미술의 불상관」,「한국미술사교육학회지」15(한국미술사교육학회, 
    2001), pp. 85-126.
47) Coomaraswamy, Ananda Kentish, “The Origin of the Buddha Image,” Art Bulletin 
    9-4(1927), pp. 287-328.

 

특히 마투라는 다양한 문화가 꽃피운 지역이었다. 이곳에는 여러 종교가 융성하여 ‘신들의 도시’로 묘사되기도 한다.48) 힌두교, 자이나교, 불교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마투라에 종교적 의미를 부여했다. 힌두교에서 마투라는 비슈누의 화신인 크리슈나의 탄생지로 알려졌다.49) 일부 힌두교도들은 마투라에서 하루를 보내는 것이 바라나시에서 일생을 보내는 것보다도 더 많은 공덕을 쌓은 것이라고 선전하면서 마투라의 성스러움을 알렸다.50) 당시에 공덕에 관련한 이런 언급들은 다른 종교뿐만 아니라 마투라가 불교의 중심지로 거론되면서 힘을 얻게 되었다. 

48) Cunningham, Alexander, The Ancient Geography of India, (New Delhi: Numshiram 
    Manoharlal Publishers, 1871), p. 429.
49) Coomaraswamy, Ananda Kentish, Myths of the Hindus and Buddhist, (New york :
    Dover Publications, 1967), pp. 217-244.
50) Growse, F.S. Mathurā: A District Memoir, (New Delhi: Asian Educational Services 
    1882),pp. 50-70ㆍpp. 126-158.

 

마투라의 불교조각은 양적으로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매우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곳은 간다라와 다른 양상의 불상으로 구별된다. 간다라 양식은 헬레니즘에 영향 받았다. 그 근거로 기원전부터 이 마투라 지역에서 제작되어 온 불상이 약샤(Yakṣa)상이 지니는 육중하고 생명감 넘치는 모습을 계승했음을 들고 있다. 마투라 불교조각의 전성기인 쿠샨시대에는 이곳에서 만들어진 불상이 사르나뜨, 쉬라바스띠, 꼬샴비 등지로 옮겨졌고 그 양식적 특징은 간다라와 펀잡까지 영향을 미쳤다.51) 마투라에서 만들어진 불상은 간다라에서 도입된 것으로 보이는 옷 주름의 형태 등이 보다 더 자연스럽고 리듬감 있게 표현되었으며, 불상에서 나타난 위풍당당한 체구와 경이로운 위엄과 힘을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초인적인 신성을 부여하고 있어서 붓다의 대인상들에서 규정된 여러 비유적인 특징들52)도 나타난다. 간다라 불상이 마치 가면과 같은 차가움을 소유하고 있다면, 마투라 불상은 온기와 풍성함을 느끼게 한다. 불상의 데뷔, 출현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였다. 

51) Sharma, R.C. Buddhist Art, Mathurā School, (New Delhi: Wiley Eastern. 1995), 
    pp. 119-120 ; 약샤의 상들은 마투라의 스뚜빠들에서도 울타리에 둘러져 있고 
    기둥들에도 새겨졌다. 특히 약샤 상들은 불교 스뚜빠에 조각되어 현란하고 관능적으로 
    표현되어 있기도 하다. 마치 娼婦처럼 거리낌 없이 도발적인 아름다움과 환락을 드러내고 
    있다. 평화로운 붓다의 세상 바깥에 세속의 무상함을 신랄하게 표상하는 것으로, 인도적
    이라는 할 수 있는 것들로 철저하게 신체적 미묘한 표현에 충실하였다. 
52) 32신상 80종호를 말한다.

 

초기 불상의 출현은 현대 불상과도 위상이라는 측면으로 본다면 다르다.53) 현대 불상은 사리를 직접 안치하고 있는 스뚜빠보다 대중들에게 더 인기가 있다. 그렇지만 그 당시에 불상이 출현함에도 불구하고 붓다의 유골을 안치한 스뚜빠가 성스러움을 대변하며 사원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초기 열반경 텍스트에서 붓다가 열반 후, 중재 끝에 유골을 팔등분하여 인도의 여덟 곳에 스뚜빠가 세워졌고54) 이것을 기점으로 해서 붓다의 스뚜빠는 팔만 사천 개로 늘어나게 되었다. 불교도들이 붓다의 사리에 손쉽게 숭배할 수 있도록 한 아쇼까 왕의 업적도 이러한 스뚜빠의 대세에 편승한다. 

53) 원혜영, 「스뚜빠의 변화된 모습에서 보인 생명성」,「철학」제97집(한국철학회, 2008) ; 
    대중 적 관점에 입각한다면, 연구자는 현대 스뚜빠는 불상에게 권위를 내어준 상태로 본다. 
54 원혜영,「아름다움 공동체, 붓다의 열반 에피소드」, 위의 책, pp. 349-395 ; 빨리본에 의하면, 
    위제희의 아자따사뚜 마가다왕, 외살리의 리차비족들, 알라캅파에 사는 부리 족들, 라마가마에 
    사는 콜리아족들, 파와에 사는 말라족 등은 자신들도 붓다와 같은 끄사뜨리야인이므로 사리 
    탑을 세워서 공양할 것이라 약속한다. 한편 까빌라바스뚜 의 석가족들은 붓다가 그들의 친척
    이라는 이유를 들어 사리를 분배받았다는 점에서 앞의 부족들과 구별된다. 위타디파까 바라문은 
    “세존은 끄사뜨리야이고 나는 바라문 이기에 유골 일부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해서 사리를 
    분배받았다. 그들은 붓다의 유골 8분의 1을 요구해서 그들의 나라에 스뚜빠를 세웠다. 후대 
    주석서는 사리 분배 가 공동체 화합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음을 역설적으로 부각
    시켰다. 

 

사리 분배가 화합을 촉진할 수 있다는 사실은 붓다의 사리분배에서 명확하게 나타난다. 분배가 화합이라는 상반된 등식이 성립하는 경우는 붓다의 사리분배에서 나타난다. 이것은 비논리적인 형태로 새롭다. 왜냐하면 분배는 다른 방향으로 발전할 가능성과 이전의 상황을 배제하는 형식을 띠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초기불교의 공동체에서 사리 분배는 화합과 연결된다. 초기불교 공동체가 가진 권위나 권력이 없는 자유로운 토대가 붓다의 사리 분배에도 이어졌기 때문에 가능하다.

 

한편, 당시 스뚜빠의 위상에 비해 상대적으로 불상의 입지는 작았지만, 마투라 지역에서 성스러운 불상은 완벽한 비례를 가져야 한다는 인도인들의 조형관을 반영하듯이 축적되는 기술적 역량이 정점에 이르렀다. 마투라의 불상은 붓다의 신비적 성향이 한층 강조되면서 더이상 인간의 차원에 있지 않고 세계를 압도하는 초월적인 존재임을 암시한다. 두 눈은 반쯤 감아 보는 사람과 시선을 교환하지 않았으며 섬세하고 아름다운 곡선은 매우 감각적이었다. 이러한 감각성이 엄격한 초월성과 묘한 긴장관계를 이루고 있다.55) 이러한 상들은 특히 감동적인 위엄과 정적을 함께한다. 철저하게 자기 몰입과 정적의 느낌을 가진 이런 불상들은 완벽하게 삼매에 들어 있다는 단순화된 구성을 제공한다. 그래서 그런 불상을 접한 대중들은 안정감을 전달받는다. 불상이 가진 전체적인 이미지는 스뚜빠 만큼 육중함을 표현하면서도 인간의 형상이 가진 묘한 매력이 주는 느낌에서 아름답다는 인상을 지울수 없다는 점에 있다. 스뚜빠보다 적극성을 띠었다고 보는 것은 이러한 점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55) 이주형,「인도의 불교미술」(한국국제교류재단, 2006), pp. 31-32.

 

특이하지만, 간다라의 부조에 있는 불상에서는 세속적인 복장의 형태로 망토나 꽃 모양의 장식이 부착된 것도 보인다. 어떠한 장식도 배제한 출가 수행자의 복장으로 불상을 만드는 것은 불상 조상사의 초창기부터 지켜온 확고한 원칙으로 간다라 불상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러한 불상들이 늘어남으로 인해 붓다에 대한 관념의 변화를 반영한 현상으로 보인다. 이러한 화려한 치장은 붓다가 깨달음에 이른 단순한 수행자 이상의 신적 존재로 형상화되었음을 나타내며, 인도불교사에서 중요하게 대두된 밀교적 경향도 재개되었을 것이다. 동시에 이러한 차림새를 한 불상의 등장은 왕의 복장과 관련된 것으로 붓다가 군주 숭배와 결합되어 불상을 왕처럼 표현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56) 사실상 불상의 출현은 엄격하게 신비적이고 초월적인 존재를 세속화시키려는 대중들의 의도에 의한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것이며 깨달음의 세계를 대중화하기 위한 일환으로 보인다.

56) 宮治昭, 「バーミヤンの‘飾られた佛陀’の系譜とその年代」 「佛敎藝術」 137
    (佛敎藝術 學會, 1981), pp. 11-34 ; 5세기경부터 옷이나 머리에 장식을 한 불상이 
    만들어진 것을 탁실라의 조울리안이나 가즈니 근방의 타파 사르다르에서 극소수이지만 
    볼 수 있고, 바미얀 벽화에서는 이러한 불상이 제법 늘어난다.; ‘소조불상’으로 폰두키스탄 
    출토 된 것으로 7세기로 추정되며 카불박물관에 구장된 것, 또 다른 ‘소조불상’으로 
    폰두키스탄에서 출토된 것으로 7세기 것으로 추정되며 기메 미술관에 있는 것, 그리고
    ‘각이 진 망토를 입은 인물’ 타칼에서 출토된 것으로 라호르박물관에 있는 것들이 이것들을 
    대변한다.

 

무불상 시대에 인간의 형상이 제외된 도상학적인 표현들에서 전달되는 서사적 구조가 어색하고 비합리적으로 느껴졌을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의미 전달 체계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상징성을 의미한다. 스뚜빠의 역할은 이러한 무불상의 의미체계와 유사한 전달체계를 대중들에게 심어주었으며 스뚜빠 안에 경전을 넣고 그것을 붓다만큼이나 동일시하여 숭배하는 경향들도 사리 숭배가 주는 고원함이 스뚜빠로 이행되었기에 가능하다.

 

마투라 지역에서는 불상만큼이나 스뚜빠들에 대한 에피소드들도 함께 한다. 법현이 마투라에 들러서 중인도 불교풍습을 이야기 했다고 전해진다. 승려들은 붓다의 으뜸가는 제자인 사리불의 스뚜빠를, 비구니들은 여성의 출가를 도와준 아난다의 스뚜빠를, 아직 정식 승려가 되지 못한 사미들은 붓다의 아들인 라훌라의 스뚜빠를, 아비담 논사들은 아비담 스뚜빠를, 율사들은 율 스뚜빠를 공양하고 숭배했다고 한다.57) 대승을 따르는 사람들은 반야바라밀과 문수보살, 관세음을 공양했다고 한다.58) 스뚜빠에 관련된 기록들에서 흥미로운 점은 여러 종류의 스뚜빠가 존재했다는 것이다. 다양한 숭배 대상에 따라 다른 형태의 스뚜빠가 존재했을 가능성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많았다.

57) 법현,「법현전」이재창 옮김,『한글대장경 고승전 외』(동국대학교 역경원, 1980), 
    p.508 ; 탁실라에서는 스뚜빠를 방 안에 세운 경우도 있다. 이런 스뚜빠는 그곳에 
    기거하다 열반한 승려를 추모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Marshall, John Hubert, 
    A Guide to Taxila, (Calcutta; India, 1918), p. 17 ; 이주형, 「간다라 미술」(사계절, 
    2003), p. 111.
58) 법현, 위의 책, p. 52 ; 法顯, 「高僧法顯傳」(T51) 859b ; 법현전에서 마투라에 관련된 
    이 언급은 대승과 소승 구분의 명확한 기준을 알기 어렵게 한다. 그 당시까지 대부분의 
    대승불교도들이 기존의 부파 내에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독립하지 않는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부파 불교는 사회적으로 반드시 대승불교와 對蹠的인 
    관계에 있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Heinrich Bechert, “Note on the Formation of 
    Buddhist Sects and the Origins of Mahāyāna,” German Scholars on India, vol.1
    (Varanasi, 1973), pp. 11-14.

 

붓다의 제자들의 숭배는 유골을 안치한 모습의 스뚜빠였을 것이다. 아비담ㆍ율ㆍ경을 숭배하기 위한 스뚜빠의 경우는 법사리로 인식된 경전을 스뚜빠 안에 안치하는 형태로 추정된다.59) 경전을 스뚜빠 안에 안치하는 형식을 배제한다면, 중국의 新疆省과 甘肅省 지역에서 발견되 소위 ‘北涼塔’이 좋은 예가 된다. 북량탑은 중국 5세기 것으로 보이며 현재 베를린아시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원추형에 가까운 傘蓋부분과 기중 형태의 탑신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와 같은 형태는 인도나 중앙아시아의 스뚜빠에서 보편적인 것이지만, 아래에서 두 번째 단에『十二因緣經』이 새겨져 있다는 점에서 다른 스뚜빠에서 찾아볼 수없는 특징을 가졌다.60) 경전을 스뚜빠 안에 보관하는 형태가 존중되면서 스뚜빠 외관에 새겨놓은 형태는 스뚜빠가 단순한 유골을 안치하는 장소 이상의 것들을 요구한다고 할 수 있겠다.

59) 이주형,「동아시아 구법승과 인도의 불교 유적」(사회평론, 2009), p. 150 ; 이런 
    기록들은 법현의 기록에서 보이지만 7세기 현장의 기록에서는 사라진다. 보편적인 
    스뚜빠의 형태와는 다른 형식이었으며, 5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유행한 것이라는 
    가설을 세울 수 있다.
60) Tsiang, Katherine, “Embodiments of Buddhist Texts in Early Medieval Chinese 
    Visual Culture.” In Body and Face in Chinese Visual Culture, ed. Wu Hung and 
    Katherine Tsiang, (Cambridge and London: Harvard university Asia Center, 2005), 
    pp. 103-117; 殷光明, 「北京石塔損軀」, (新竹: 覺風佛敎藝術文化基金會, 1999) ; 
    Wang, Eugene, “What Do Trigrams have to Do with Buddha? The Northern Liang 
    Stupas as a hybrid Spatial Model” Res 35: (1999), pp. 70-91.

 

하지만 스뚜빠라는 건축물에는 공통된 형식원리가 존재하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성스러운 숭배로 내재되어 대중들에게 반영된다. 성스러운 존재로 부여된 스뚜빠는 초월성을 적절하게 부각시키기 위해, 또는 위치 지워지는 공간이 이상적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도상학적이며 의례적인 기능까지 재현한다. 그것은 대칭성, 중심축의 중시, 집중성, 정면성 등으로 압도적인 크기를 부여하며 존재감을 가지고 신성함을 드러낸다. 불상의 출현을 제외하고는 그 유명세를 강력하게 각인시킨 것은 불교 역사상 일찍이 없었다.

 

현대에는 불상이 보이지 않으면 무엇인가 결핍된 것 같은 부정적인 느낌이나 심각한 현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상이 배제된 상징적 표현 너머의 초월적인 고원성에는 붓다 및 성인들의 사리 숭배를 행할 수 있게 하는 스뚜빠가 존재한다. 스뚜빠는 육신과 감각의 세계를 초월하게 하고 대중들로 하여금 친밀함을 느끼게 만든다. 스뚜빠를 향한 소박한 추모나 사리 숭배는 그 자체로도 충분한 자격을 갖추며 공동체에 강한 정신적 유대감으로 이어진다. 사리 숭배의 역사는 불교 공동체의 결집이며 화합이고 고원함을 존속하려는 열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