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 논문및 평론/논문·평론

업과 윤회 사상의 일상적 수용 태도/허남결

실론섬 2016. 12. 27. 16:51

「인도철학」제26집(2009), 125~149쪽

업과 윤회 사상의 일상적 수용 태도

삶과 죽음의 윤리적 극복 가능성

허남결/ 동국대학교 윤리문화학과 교수

 

Ⅰ 머리말; 업과 윤회를 보는 윤리적 시각. 

Ⅱ 업과 윤회는 숙명론적인가?

Ⅲ 업과 윤회는 선악의 문제를 설명할 수 있는가? 

Ⅳ 업과 윤회를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Ⅴ 맺음말; 업과 윤회사상을 어떤 관점에서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요약문]

실천윤리학의 입장에서 보면 업과 윤회는 불교적인 삶의 방식을 일

상적인 의미로 알기 쉽게 풀어 놓은 것에 불과하다. 물론 이와 관련된

다양한 논의들이 오랫동안 있어 왔으며 불교적 전통들마다 약간씩 해석

을 다르게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 시점에

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것의 형이상학적 논의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현대윤리적인 행위원리로 새롭게 가다듬을 수 있겠는가라는 윤리학적

고민이라고 본다. 말하자면 필자는 업과 윤회의 원리를 사후의 세계까

지 확장하지 말고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삶의 현장에 곧바로 적용

해 보자는 제안을 하고 싶은 것이다. 그럴 때 업과 윤회라는 사고방식

은 우리를 둘러싼 자연의 섭리를 겸손하게 받아들이도록 할 것이며 또

한 행위의 선택과 그것이 도덕적 성품의 형성에 미치는 결과도 숙연하

게 인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보이지 않는 업력이 언제나 우리 주

변에 머물고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윤리적인 인간이 될

수 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업과 윤회라는 불교윤리적 사고방식은

과거반성적인 숙명론이 아니라 미래지향적인 윤리성을 듬뿍 함축하고

있는, 말 그대로 싱싱한 도덕적 에너지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라고 본다.

이 논문은 업과 윤회사상의 그와 같은 현대윤리적 측면들을 한 번 다루

어 본 것이다.

 

Ⅰ. 머리말; 업과 윤회를 보는 윤리적 시각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도 이른바 업(業; kar

man)과 윤회(輪廻; saṃsāra)란 말을 들으면 곧바로 불교를 떠올

릴 정도로 이 두 개념은 불교사상을 특징짓는 핵심적인 요소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엄격하게 말하면, 유무형의 모든 행위들을

일컫는 ‘업’과 그것의 과거 및 현재, 그리고 미래의 삶과의 도덕적

연관성을 강조하는 ‘윤회’는 불교 고유의 종교적 신념이라기보다

는 불교가 성립되기 이전부터 이미 인도인들의 사고방식을 지배

하고 있던 전통적 생사관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이

러한 발생적 연원을 가지고 있는 업과 윤회란 개념이 불교의 중

심교의 가운데 하나로 포섭되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복잡한 논의

과정을 거쳤고, 이후에도 불교 내부의 여러 학파들에 의해 그 의

미가 조금씩 달리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업과 윤회사상

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종교적 관심을 끌고 있을

만큼 독특한 매력을 간직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특히, 자기

중심적이고 소비지향적인 현대인들의 윤리적 삶과 관련하여 업과

윤회는 서구인들에게도 큰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으로 보

인다. 뿐만 아니라 아직도 다양한 측면에서 새로운 해석의 여지를

듬뿍 함축하고 있는 미래 윤리학의 잠재적 원천으로도 많은 사람

들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기도 하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행위이론인 업과 이에 따른 직·간접적인 과보를 뜻하는 윤회란 도

덕적 사고방식이 단순명료하면서도 우리의 가슴을 직접적으로 파

고드는 감동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현재 나의 삶이 고통스럽다면 그것은 전생에 저질렀

던 나의 잘못, 즉 내가 지은 나쁜 업 때문이며(반성하고 참회해야

할 부분) 반대로 오늘 내가 향유하는 행복은 과거에 지은 좋은 업

때문이라고(자기 자신을 더욱 되돌아 봐야 할 부분) 생각하면 윤

리적 합리화 내지는 정당화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공식

은 미래의 삶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이 곧 업과 윤회의 함축

적인 의미이다. 이처럼 과거와 현재 및 미래는 중단 없이 이어지

고 있는 것이다. 업과 윤회란 관념이 그토록 오랫동안 지역과 계

층을 불문하고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와 같은 지적이면서도 정서적인 영향력 덕분이었다.1) 반드시 그

런 것은 아니겠지만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규정하는 윤리이론은

간단하면 간단할수록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마련이라는 생각

을 해 본다.

1) Kaufman(2005). p. 18.

 

이 논문은 업과 윤회의 문제를 둘러싼 여러 가지 쟁점들, 예컨

대 업과 윤회의 형성 배경이나 윤회의 주체 논쟁, 그리고 업과 윤

회의 종교적 지향점 등에 대한 다양한 논의들은 일단 배제한 채

오직 업과 윤회 사상이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일상적 삶

속에서 어떤 윤리적 메시지를 던져 줄 수 있는가에 대해서만 논

의해 보기로 한다. 말하자면 업과 윤회의 실천윤리적 의미를 다시

한 번 살펴보자는 취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일

상생활 속에서 짓는 업과 그것의 윤리적 결과인 윤회를 개인적

경험의 차원이나2) 종교철학적인 관점에서3) 다루는 것은 또 다른

형이상학적 물음들을 새롭게 제기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기 때문

이다. 그와 같은 주제를 다루는 것은 필자의 능력을 벗어나는 일

이기도 하거니와 윤리학을 공부하는 입장에서는 일차적으로 실천

적인 문제가 화두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자는 이

어지는 논의에서 다음과 같은 문제, 즉 <첫째, 업과 윤회는 숙명

론적인가?> <둘째, 업과 윤회는 선악의 문제를 설명할 수 있는

가?> <셋째, 업과 윤회를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라는 물음들

에 대한 윤리적 답변을 시도해 보기로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업과 윤회사상은 우리의 윤리적 관념과 이를 구체적 행위로 표현

하는 실천적 동기로 작용할 때에만 비로소 현대사회적 의미를 확

보할 수 있을 것이란 점을 감히 강조해 보고자 했다. 그것은 윤리

가 처음에는 관념적 사고로부터 출발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어떤

종류의 행동으로 현실화되지 않는 한 사실상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말 것이라는 윤리학적 판단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윤리는 관념적

이상이 아니라 현실적 목적을 반영하고 있는 행위전략인 것이다.

2) 이와 관련해서는 티베트의 불교전통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실제로 환생의 사례들도 많이 보유하고 있다. 보다 자세한 것은
   소걀 린포체(2005) ; 알폰스 데켄(2002) ; 오진탁(2004) ; 이이다
   후미히코(2007) ; 파드마삼바바(1995) ; 프란시스 스토리(1992) ;
   최준식(2005). pp. 213-250 등을 참조할 것.
3) 업과 윤회의 문제를 종교철학적인 입장에서 접근하고 있는 논의들은 수
   없이 많으나 필자가 참고한 자료는 다음과 같다. 김진(2005) ;
   김진열(1990) ; 김형준(2001) ; 박경준(2003) ; 안옥선(2006) ; 이종희(2000)
   ; 이찬수(2000) ; 임승택(2005) ; 정승석(1994) ; 정승석(1995) ;
   조용길(2003) ; Oestigaard(2005) ; Ryan(1999) ; Coseru(2005) ;
   Deitrick(2005) ; Anand(2006) 등.

 

Ⅱ. 업과 윤회는 숙명론적인가?

 

불교에서 말하는 업과 윤회를 따르고자 할 때 우리가 부딪히는

첫 번째 문제는 이를 결코 피할 수 없는 어떤 운명과 같은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일상적 행위를 도덕적으로

가꾸는 하나의 윤리적 상징이자 교훈적 방편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라는, 불교신자로서의 인간적 고민과 갈등을 야기한다는

사실이다. 전자의 입장에 서자니 숙명론자가 되어 이 세상에서는

아무 것도 할 일이 없을 것 같고, 후자의 입장을 고수하자니 종교

인으로서 어딘가 아쉽고 허전한 구석이 남을 것 같다는 걱정이

앞선다. 지금처럼 생활여건과 교육수준 및 사회의식 등 모든 측면

에서 부처님 당시와는 현저하게 다른 환경 속에 살고 있는 우리

는 과연 어느 쪽의 입장을 선택하는 것이 보다 현명하고 또 바람

직한 신행자세일까?

 

흔히 사람들은 업과 윤회란 말을 떠올릴 때마다 거기에 무작정

빠져 있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하여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는, 어

떤 인과성(causality)을 포함하고 있는 사상으로 이해하려는 경향

이 있다. 그래서 혹자는 불교의 업과 윤회를 가리켜 도덕과 무관

한 자연주의적 인과관계를 지칭하는데 지나지 않으며, 결과적으로

불교는 어떠한 윤리나 도덕적 책임감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주장

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업과 윤회의 관계를 일종의 운명이나 숙

명, 또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섭리(theodicy)와 같은 것으로

파악하고, 이는 종교 형이상학적인 차원에서 다루어질 문제라고

치부해 버리기도 한다. 이렇게 되면 불교의 업과 윤회사상은 무심

하기 짝이 없는 신이나 자연 그 자체, 혹은 다른 어떤 형이상학적

인 필연성의 의지에 의해 지배되는 냉혹한 결정론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따라서 여기에는 우리의 의지가 작용하여 그것의 내용을

변형시키거나 다른 상태의 업과 윤회를 획득할 희망의 여지가 원

천적으로 차단되고 만다. 이는 우리가 어떤 사람의 불행한 삶을

보고도 자비의 손길을 내밀어 돕기보다는 그 사람은 그럴만한 업

을 지었을 뿐이라고 여기고 그냥 지나치는 행위를 정당화하거나

합리화할 수 있는 그럴듯한 근거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업과 윤

회의 의미가 그와 같은 방식으로만 해석될 수 있다면 어딘가 잘

못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런데 업과 윤회와 관련된 언급을 다루고 있는 대부분의 불교

경전들은 한편으로는, 자신의 행위에서 비롯된 서로 다른 존재양

식들, 예컨대 고통이나 쾌락의 삶 또는 이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

는 그 외의 삶을 기술하고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전과

다르게 행동하고 말하거나 생각함으로써 앞으로 발생할 미래의

결과들에 어떤 영향을 미치거나 그것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도 있

다는 점 또한 강조하고 있다. 이는 업과 윤회의 관념이 우리의 행

위를 안내하고 지도하는 도덕규범적인 차원도 가지고 있음을 강

력하게 시사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업과 윤회가 우리의 삶에

있어서 도덕심리학이나 윤리적 삶의 현상학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고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4) 이처럼 업과 윤회는 윤리적인 차

원을 가질 수밖에 없는 현실 속의 실존적 물음들과 밀접하게 연

관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이 세상의 이모저모에 대한

설명과 함께 더 나아가 사회의 고통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반응을

보일 이론적 토대를 제공할 수 있다고 본다. 만일 우리가 업과 윤

회를 이런 방식으로 해석하고 수용한다면 일부의 사람들이 우려

하는 것처럼 업과 윤회는 하나의 숙명론에 불과하다는 오해로부

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자유의지를 가지고 태어난 인간존재가

스스로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운명이나 사회적 희생의

피해자가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

터 조건 지워진 어떤 환경의 영원한 포로가 아니라 그것을 바꾸

기 위해 생각할 수 있고 말할 수 있으며 또한 행동할 수 있는 윤

리적 존재들인 것이다.

4) Nelson(2005). pp. 2-6 ; Harvey(2000). pp. 23-31 등 참조. 특히 피터
   하비는 초기경전 속의 풍부한 사례들을 통해 업과 윤회가 숙명론적으로
   해석되는 것을 경계하며 이의 긍정적 측면을 적극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예컨대, 업과 이에 따른 윤회의 삶은 직접적인 인과관계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시차를 두고 나타나기도 하며 악행에 대한 참회를 통해 그 업이
   없어질 수도 있음을 강력하게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인 깨달음을 성취하는데 가장 유리한 지위인
   만큼 그것의 의미를 깊이 자각하고 자비행을 베풀어 선업을 쌓을 것을
   강조한다.

 

하지만 업과 윤회를 현대적인 시각에서 이해하는 데에도 한계

는 분명히 존재한다. 최근 들어 업과 윤회를 개인의 자유의지에

따른 윤리적 선택행위에 대해서만 적용될 수 있다는 견해가 많으

나 그와 같은 점이 지나치게 부각될 경우 업과 윤회의 본래 취지

가 희석되거나 부정될 위험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

면 인도적 인 의미의 업과 윤회사상에는 자유의지의 요소와 함께

숙명론적인 요소도 엄연히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유

의지에 의한 도덕적인 선악행위와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처음

부터 존재하고 있던 자연적인 선악 또는 정의와 부정의의 관계를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라는 문제도 발생한다. 말하자면 업과 윤

회는 종교적인 차원의 인과적 결정론과 자유로운 도덕적 책임 사

이의 논리적 갈등들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가

보기에 업과 윤회는 이 세상의 악과 고통에 대한 완벽한 인과적

설명이거나 혹은 그렇지 못한 것이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우리의 현재적 삶의 상태가 이전에 있었던 사

건들에 의해 인과적으로 충분히 설명되든가 아니면 이에 미치지

않거나 둘 가운데 어느 하나란 말이다. 만일 업과 윤회가 이를 완

전하게 설명한다면 이 세상에는 어떠한 진보나 변화도 있을 수

없게 된다. 이 때 우리의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적 행위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 과거의 악이 현재의 악을 낳고, 현재의 악이

다시 이에 상응하는 미래의 악을 낳을 수 있을 뿐이다. 반대로, 만

일 변화의 가능성이 존재한다면 업과 윤회는 더 이상 완벽한 인

과적 설명이 되지 못한다. 다시 말해 업과 윤회는 하나의 체계적

종교이론으로서는 실패한 것이 되며, 결과적으로 그것은 사실상

악의 문제를 설명하거나 해결하지 못하게 되고 만다. 이 세상에는

업과 윤회의 인과성을 벗어난 자연발생적이고 우연적인 악들도

얼마든지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5) 그렇다면 우리들은 업과

윤회사상으로부터 더욱 합리적이고 실천적인 윤리의식의 고양을

주문받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5) Kaufman(2005). pp. 24-27 ; Wright(2004). pp. 82-87 등.

 

Ⅲ. 업과 윤회는 선악의 문제를 설명할 수 있는가?

 

사람들은 살면서 누구나 다음과 같은 의문을 품을 때가 있을

것이다. “인간은 왜 똑같은 조건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는가?”, “왜

착한 사람들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는데 비해, 사악한 사람들

은 떵떵거리고 잘 사는가?”, “세상은 왜 더 나아지거나 정의로운

곳이 되지 않고 예나 지금이나 그 모양 그 꼴인가?”, “이 세상에

는 왜 고통과 죽음이 존재하는가?” 등과 같은 물음말이다. 그렇다

면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업과 윤회는 바로 이와 같은 실존적 물

음들에 대한 불교적 답변이어야 한다고 본다. 언뜻 보기에 업과

윤회는 이러한 문제들을 완벽하게 해결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

다. 왜냐하면 어떤 현상의 원인과 결과를 개인의 행위와 결부시키

는 업과 윤회는 우리들의 행, 불행이나 선악이 초래된 이유를 논

리적으로 밝혀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인간

들이 겪게 되는 삶의 모습들을 그럴듯하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

다. 이 이론은 인과성의 원리를 인간의 행위영역으로 확장하고 있

는데, -물질적인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반드시 선행 원인을

가지고 있듯이- 도덕적인 영역에서 발생하는 모든 결과들도 그전

에 일어난 행위, 즉 업에 의해 미리 규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함의

한다.6)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해야 할 점은 필자가 사용하고 있는

업과 윤회의 개념은 논의의 편의를 위해 복잡하고 구체적인 세부

사항이나 다른 관점의 설명을 가급적 생략한, 가장 상식적인 수준

에서 이해되고 있는 단순형식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런 전제를

염두에 두고 필자의 글을 읽었으면 한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넘어

가야 할 것 같다.

6) Kaufman(2005). pp. 15-19.

 

비단 불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종교들도 선하거나 악한 삶은
어느 시점에선가 그것에 합당한 도덕적 결과로 보상받게 마련이
라는 점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종교적 약
속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상황들과 반드시 일치하지 않으며 때
로는 모순되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착한 마음씨를 가진 사람들도
여느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각종 불행한 사고를 당해 심각한
부상을 입거나 죽기도 하고 불치병 때문에 일찍 사망하는가 하면,
악한 심성을 가지고 정의롭지 않게 살았거나 떳떳하지 못한 방법
으로 성공한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그들의 삶이 당장 어떻게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엄연한 현실이다. 우
리는 세상 속의 이런 부정의와 모순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어
떤 사람들은 자기가 지은 공덕만큼 보상을 받지만, 다른 사람들은
반드시 그렇지 않은 경우도 허다하다. 그들이 당연히 받아야 마땅
한 만큼 받지 못한 사람들 중에서도 다시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한 것에 비해 더 많이 받는 것 같고, 다른 사람들은 그나마 더 적
게 받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세상의 이치가 우리에게
놀랍지 않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선행과 보상 사이의 논리적 필연
성에 대해 의문을 품게 만든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한 가지
방식은 적어도 잠정적으로나마 우주의 질서는 우리가 바라는 정
의의 기대에 대체로 무관심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도덕적 선행
분야에서도 냉담한 것으로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도덕적으로 건
전한 사람이 그렇지 않은 다른 사람들과 별반 다를 바 없이 몹쓸
병을 얻어 일찍 죽는다면, 이 문제를 바라보는 우리들의 솔직한
심정은 이제 세상에는 도덕적 정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자포자
기의 심정이 되지 않을까? 어쨌든 우리가 아무리 정의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불완전한 인간의 존재론적 한계
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그와 같은 종류의 관심을 갖게 되는 이유
와 이에 대한 속 시원한 답변의 궁극적 근거는 영원히 발견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다른 한편, 도덕적인 선행과 궁극적인 운명 사이에 초자연적인
연관성이 존재한다는 종교적 주장은 그와 같은 관계가 없어서는
안 된다는 우리들의 도덕적 기대와 염원으로부터 나오는 것인지
도 모른다. 우리 모두는 정의가 살아 있어야만 한다고 느끼고 있

으며, 이와 같은 생각은 정의가 부족한 것처럼 보이는 환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범죄자들은 어떤 형태로든 처벌받아야 한다는 것과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은 순진무구한 아이는 치명적인 질병

으로 고통을 받는 대신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살 권

리가 있다는 것, 그리고 어떤 모습들은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양

상과 달리 실제는 다르다는 것이 언젠가 반드시 밝혀져야 한다는

사실 등은 모두 한 결 같이 우리들의 뿌리 깊은 정의감의 표현들

인 것이다. 유덕한 행위와 이에 따른 적절한 보상이나 악에 대한

응분의 처벌 등은 상호 체계적인 관련성을 지녀야 한다고 믿으며,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들은 그것이 옳지 않다고 느끼게 될 것이

다.7) 이처럼 업과 윤회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선악의 문제를 설명

하는 불교적 사유방식이기도 하다.

7) 이 부분은 Wright(2004). pp. 81-82의 내용을 요약, 각색한 것임.

 

그러나 불교적인 의미의 업과 윤회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자연

적인 선악을 설명하려고 하기보다는 나 자신의 행위에서 비롯되

는 도덕적인 인과성을 상대적으로 더 강조하고 있다는 점을 기억

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업과 윤회를 거창한 형이상학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나 자신의 자유의지가 발휘되는 범위 안에

서만 작용하는 윤리적 인과관계로 이해하면 충분하다고 본다. 그

이상은 학문적 논의의 대상이 아니라 종교적 믿음의 차원이기 때

문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업과 윤회가 기독교에서 말하는 선

악의 기원설보다 별로 나을 것이 없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8) 기

독교에서는 여호와를 믿기만 하면 영생을 누릴 수 있는 하늘나라

로 갈수 있다고 가르치는 반면, 불교는 끊임없이 나고 죽는 과정

을 되풀이 해야만 하며 이러한 윤회의 사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서는 또 다른 수행을 해야만 하는 번거로움이 있기 때문이다.9)

8) Kaufman(2005). p. 24
9) Nelson(2005). pp. 6-10.

 

그 외에도 세상에 존재하는 선악의 원인이 개인적인 차원의 업

에서만 기인하는 것인지, 아니면 집단적인 업의 결과인지에 대해

서도 따져 보아야 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업은 대부분 개인을 단

위로 이루어지는 일체의 행위를 지칭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은 특정한 개인만이 아

니라 개인들로 구성된 집단의 업이 빚어낸 결과라는 설명도 가능

할 것이다. 하지만 불교의 전통적인 해석은 전자에 무게가 실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훗날 대승불교의 보살도윤리에 이르게 되면

나와 남의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가 강조되면서 타인

중심의 자비행이 적극 권장되기도 하지만, 업과 윤회에 대한 불교

의 기본적인 입장은 어디까지나 행위 당사자인 개인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 나머지 대승불교에서는 업과

윤회의 원리가 종종 자기모순에 빠지기도 한다. 예컨대, 내가 마

음 속으로 다른 사람의 행복을 간절히 염원한다고 해서 다른 사

람들이 실제로 그런 공덕을 받게 되리라는 보장이 없다. 왜냐하면

업과 윤회의 관계는 일차적으로 본인의 행위가 그 과보에 대한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하는 것으로 설명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정작 자신은 다른 사람들 보다 두 배의 선업을 쌓았다

고 자랑하는 마음을 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 업과 윤회는

무상, 연기와 공, 무아 사상 등과 같은 다른 불교교의와 사상적 연

관성을 맺게 된다.10) 이 과정에서 업과 윤회는 매우 현학적이고

관념적인 논리로 변형되며 결과적으로 간단명료하면서도 소박한

본래의 윤리적 의미를 많이 상실하고 말았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

가이다.

10) Wright(2004). pp. 85-87 참조.

 

Ⅳ. 업과 윤회를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일상의 모든 행위는 그에 상응하는 어떤 과보를 받게 되고 이

것이 다시 새로운 삶의 성격과 내용을 규정한다는 것이야 말로

업과 윤회에 대한 가장 간단명료한 정의일 것이다. 이와 같은 사

고방식이 오랫동안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었던 배경에는 전생

과 현생 및 내생이라는 독특한 세계관이 자리 잡고 있다. 전생의

업과 현생의 과보 및 현생의 업과 내세의 과보라는 순환론적인

등식, 즉 윤회의 삶이 설득력 있게 설명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와 같은 상식적인 사유방식으로부터 힘입은 바 크다. 그러나 전

생과 내생이라는 관념은 흥미로운 주제이기는 하나 그 존재여부

를 실제로 확인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아무도 죽었다가

다시 돌아온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연 이를

입증할만한 과학적인 증거를 발견할 수 있을까? 힌두교도들이나

티베트인들은 업과 윤회의 원리에 따라 새로운 삶으로의 환생이

실제로 일어나는 것으로 굳게 믿고 있다.11) 문제는 이들의 종교적

신념과 현대인들의 과학적 지식 사이에 인식의 차이가 매우 크다

는 점이다. 예컨대, 티베트인들이 환생의 사례로 제시하는 증거물

들에 대해 서구의 과학자들은 차가운 반응을 보인다. 한 마디로

말해 윤회와 환생에 대한 과학적인 증거는 없다고 보는 것이다.12)

그러나 윤회와 환생이 존재한다는 과학적 증거를 찾을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이 곧 윤회와 환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직접적인 근거

가 되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 과학적 검증방법이 어떻게 발달하는

가에 따라 얼마든지 상황은 역전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다만 우

리는 사후의 세계에 대해 현재로서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재차 확인할 수 있었을 따름이다. 그것은 업과 윤회와 같

은 형이상학적인 주제의 속성이자 한계이기도 하다.

11) 보다 자세한 논의에 대해서는 소걀 린포체(2005). pp. 145-178, pp.
    513-634 ; 최준식(2005). pp. 213-250 ; 파드마삼바바(1995) 등을 참조할 것.
12) Wright(2004). p. 88.

 

여기서 우리는 ‘종교적인 주장이 과학적인 주장과 똑같은 수준

의 경험적인 증명을 반드시 필요로 하는가?’ 라는 반문에 직면할

수 있다. 한 마디로 말해 그것은 서로 다른 범주의 물음이라는 문

제제기인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면 답변하는 방식도 이전과 동일

한 기준의 적용을 받을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이런 지적에도 불

구하고 업과 윤회사상은 한번쯤 그것의 존재 유무에 대해 엄격한

검증 절차를 거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주지하다시피 업과 윤회사

상은 이 세상의 불공평한 현실과 억압을 정당화하거나 합리화할

수 있는 논리로 악용될 수도 있다. 인도인들은 업과 윤회사상을

기계적으로 이해한 나머지 불합리하기 짝이 없는 신분제도를 아

직도 큰 불만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실제로 하층민으로 태어나

교육도 받지 못한 채 고통스러운 삶을 근근이 이어가고 있는 사

람들조차 신을 원망하거나 이웃을 탓하는 법이 거의 없다고 한

다.13) 대신 그들은 전생의 업과 그 과보인 현재의 삶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면서 내생에서는 제발 다른 모습으로 태어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업과 윤회가 결코 실재하는 현

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들의 삶은 과연 어떻게 바

뀌게 될까?

13) Kaufman(2005). p. 27.

 

일반적인 의미의 상식에서 생각할 때, 만일 전생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 때의 일을 조금이라도 기억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드

문 일이긴 하지만 자신의 전생을 기억한다는 사람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현상을 일반화해도 좋을 지에 대

해서는 솔직히 말해 확신이 서지 않는다. 한 마디로 말해 그들의

경험담을 있는 그대로 믿을 수 없다는 뜻이다. 전생에 대해 아무

런 기억도 갖고 있지 않다면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고통이나 불행

을 업과 윤회의 관점에서 수용하기는 힘들 것이라고 본다. 또한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지금 당신이 겪고

있는 고통은 당신이 지은 과거의 업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도 설

득력이 떨어지긴 마찬가지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업과 윤회사

상은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도덕교육이론으로서도 제 기능을 다

하지 못할 위험성이 있다. 그리고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현재 당하고 있는 고통이나 불행이 전생에서 자기

가 저지른 악업과 정확하게 얼마나 일치하는지에 대해서도 의구

심을 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현생의 모든

사람들이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은 그들이 전생에서 한 결 같

이 다른 사람들을 해친 살인자였기 때문일까? 라는, 다소 엉뚱한

생각도 떠올려 볼 수 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지는 않겠

지만 말이다. 나아가 설사 업과 윤회의 원리를 인정한다고 하더라

도 어떤 사람의 현재를 있게 한 최초의 원인을 어디까지 소급할

것인가? 와 같은 문제도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모르긴 몰라도

그 원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그렇게 되

면 업과 윤회는 막연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논리적 구조가

취약하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만다. 이를 감지한 우리들은 자신의

운명에 드리워진 신비스럽고 알 수 없는 무게감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더 이상 전생이나 내생에 대해 궁금증을 갖지 말아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업과 윤회는 보이지 않는 어떤 우주의 원리

로 오늘도 어김없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라고 믿어야 할까? 두 가

지 물음 모두 결코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으로 우리 인간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나고 죽음이 반복

되는 현장인 삶 자체로부터 영원히 벗어나는 일이라고 보는 윤회

관은 마치 갓난아기를 더러워진 목욕물과 함께 강물에 내다버리

는 꼴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싶다. 목

욕물이 더럽혀졌다고 해서 애지중지하던 자기 아기를 강물에 던

져버릴 수 있는가? 삶을 포기하는 생명체는 어떤 의미에서 더 이

상 생명체라고 볼 수 도 없다. 불교의 열반이라는 관념은 종종 삶

속의 악 뿐만 아니라 좋은 것과 나쁜 것이 뒤섞여 있는 삶의 모든

측면들까지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 십상이다.

하지만 우리가 속한 삶 자체가 문제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세상

에 존재하는 부정의와 악의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이러한 접근방

식은 오히려 악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기보다는 회피한다는 선

입견을 낳을 위험성이 크다. 왜 우리의 삶은 즐겁고 좋은 것이 아

니라 오직 극복의 대상인 괴롭고 나쁜 것으로만 인식되어야 하는

가? 그것은 흔쾌히 환영할만한 주장이 못된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현실적인 삶은 노력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유쾌하고 즐거운 것이

될 수 있음을 우리 모두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종교를 소비하는 계층의 의식

도 급변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대부

분의 사람들이 세속적인 의미의 감각적 행복을 찾고 있는 현대사

회 속에서 너무 무겁게 느껴지는 전통적인 의미의 업과 윤회의

관념은 보다 산뜻한 모습으로 거듭 태어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것은 업과 윤회사상이 함축하고 있는 은유적 메시지를 부담스

럽지 않은 일상생활 속의 소박한 윤리적 비유로 읽어낼 수 있는

종교적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저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나의

모든 행위는 반드시 그것에 상응하는 결과를 가져 온다는 평범한

진리로 받아들여도 되지 않을까? 그것도 내세가 아니라 바로 내

가 서 있는 이 자리에서 업보를 받는다고 생각하면 우리들은 지

금 당장 스스로 옷깃을 여밀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개

인적으로 필자는 업과 윤회를 그 정도로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충

분하다고 본다. 적어도 윤리적인 차원에서는 그렇다는 뜻이다. 그

이상의 복잡한 논의는 부처님께서도 그러셨듯이 무기(無記)로 간

주해 버리자. 그것이 대부분 중생심으로 살아가기 마련인 우리들

에게 오히려 속 편한 일일지도 모른다. 물론 업과 윤회가 갖고 있

는 종교윤리적 뉘앙스는 가슴에 고이 간직해야 되겠지만 말이다.

 

Ⅴ. 맺음말; 업과 윤회사상을 어떤 관점에서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불교에서 말하는 업과 윤회사상은 무엇

보다도 목적지향적인 자기변화의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다는 점에

서 높은 평가를 받을만하다. 내가 행한 만큼 과실을 얻을 수 있다

는 도덕적 추론방식은 개인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현대인들에게도

충분히 호소력을 가질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업은 곧바로 어떤

형태의 과보로 나타날 수도 있지만 좀 더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

면 나의 도덕적 성품을 형성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고, 행위의 속

성을 규정할 어떤 잠재적인 힘(saṃskāras)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그래서 불교학자들 사이에서는 업과 윤회의 관점을 이전과는 다

르게 결과주의가 아니라 덕의 윤리로 해석하려는 움직임도 있었

다.14) 이에 반해 위대한 철학자 칸트가 자신의 윤리적 입장을 정

당화하는 수단으로 초자연적인 신을 요청했듯이, 불교윤리에서도

업과 윤회를 실천적인 차원에서 요청하자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

도 있다. 이렇게 되면 업과 윤회는 그것의 사실 여부와는 관계없

이 우리들의 윤리적 사고와 행동에 긍정적인 기여를 할 수 있다

고 판단하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업과 윤회가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도덕적 필요에 의해 업과 윤회라는 관념을

거꾸로 요청하자는 제안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15)

14) Keown(2005). pp. 329-349.
15) 구체적인 논의에 대해서는 Cokelet(2005). pp. 1-13 ; 김진(2005). pp.
    35-59 등 참조.

 

이 외에도 불교의 업과 윤회를 서양윤리학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는 방식이 있을 수 있다고 본다. 이른바 ‘파스칼의 내기’ 이

론도 그 한 예에 속한다.16)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들은 신의 법

칙에 복종하면서 신이 존재하는 것처럼 행동할 수도 있고, 반대로

신의 명령을 무시하면서 신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할 수도

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업과 윤회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고 본다. 즉, 우리는 업과 윤회의 법칙을 수용하면서 업과 윤

회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행동할 수도 있고, 반대로 업과 윤

회의 진리를 비웃으면서 업과 윤회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할 수도 있다. 이는 세상을 사는 방법과 그 도덕적 결과를 염

두에 두고 일종의 내기를 하고 있는 것과 유사하다는 의미에서

‘파스칼의 내기’란 이름이 붙여졌다. 아무튼 이것이 글자 그대로

내기라면 우리는 당연히 그 결과를 요모조모 따져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만일 신(업과 윤회)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내기에서

이길 것이라고 생각했을 때 결과적으로 내가 얻는 것은 무엇일

까? 그것은 신의 율법, 즉 십계명(업과 윤회의 필연성)을 지키지

않고 지상의 쾌락을 추구할 수 있는 자유일까? 반대로 만약 신(업

과 윤회)이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에 내기에서 진다면 내가 잃을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신의 저주(업과 윤회의 과보)를 받아 끊임

없는 고통 속에서 영원히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될 위험을 감수하

는 일일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신(업과 윤회)이 존재한다는 데에

내기를 걸었는데 실제로 신(업과 윤회)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내가

잃을 것은 무엇일까? 그래봤자 나는 신(업과 윤회)의 율법을 따라

살려고 한 나머지 기껏해야 지상의 쾌락과 행복을 얻지 못했을

뿐이다. 즉, 나는 실제로 크게 잃을 것이 별로 없는 셈이다. 왜냐

하면 본질적으로 인간은 끊임없이 실망과 고통 및 질병의 노예라

는 비참하기 그지없는 삶의 멍에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기 때

문이다. 그렇지만 신(업과 윤회)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

혀져 내기에서 이긴다면 내가 얻게 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어

쩌면 천국에서 환희와 열락이 가득한 영생(업과 윤회를 벗어난 깨

달음의 경지)을 누리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내기의 두 가지 가능성이 갖는 이해의 득실은 결코 동일하다고

볼 수 없다. 다시 말해 신(업과 윤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데 내

기를 걸었다면 내가 얻을 것은 작으나 잃을지도 모르는 것은 매

우 크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신이 존재한다는 데 내기를

걸었다면 잃을 것은 별로 없는데 반해, 얻을 것은 엄청나게 클 수

도 있다는 가능성이 확인되었다. 이처럼 내가 선택한 내기, 즉 사

고와 행동의 방식에서 얻을 것과 잃을 것의 비율은 실로 유한과

무한을 넘나들 정도로 근본적인 차이가 날 수도 있는 것이다. 그

렇다면 우리의 선택은 주저 없이 두 번째 방식이 되어야 하지 않

을까? 이는 업과 윤회를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에도 무엇인가 의

미심장한 바를 암시해 주고 있는 듯하다.

16) 필립 반 덴 보슈(1999). pp. 136-138.

 

그리고 다소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업과 윤회의

문제를 헤어(R. M. Hare)가 말하는, 이른바 직관적인 수준(intuiti

ve level)과 비판적인 수준(critical level)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윤회와 환생을 글자 그대로 믿어야 한다고 생

각하는 것은 우리들의 상식이나 직관과 어긋나는 일일지도 모른

다. 그러나 곰곰이 따져 보면 업과 윤회의 원리는 종교적 진리일

수도 있고 연기나 공, 무아와 같은 불교의 다른 교의들과 밀접하

게 연관되어 있기도 하다. 업과 윤회가 거짓이라면 연기나 공도

거짓일 수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 헤어는 전자와 같은 도덕적 추

론방식을 직관적 사고라고 부르고 후자와 같은 논리적 분석을 비

판적 사고라고 부른바 있다.17) 업과 윤회에 관한한 우리 불자들은

직관적 사유를 넘어 비판적 사유의 결과를 조용히 기다리는 마음

의 여유를 누릴 줄 알아야 한다. 그 결과가 어떻든 간에 우리들은

업과 윤회가 이 시대에 던지는 윤리적 함의를 거듭 되새김질할

필요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17) Hare(1981). 제1부 2장 ; 그리고 보다 자세한 논의에 대해서는
    류지한(2004). pp. 201-233을 참조할 것.

 

개인적으로 보기에 업과 윤회는 불교윤리적인 삶의 방식을 일

상적인 의미로 알기 쉽게 풀어 놓은 것에 불과하다. 물론 이와 관

련된 다양한 논의들이 오랫동안 있어 왔으며 불교적 전통들마다

약간씩 해석을 다르게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

러나 지금 시점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것의 형이상학적 논

의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현대적인 행위원리로 새롭게 가다듬을

수 있겠는가라는 윤리학적 고민이라고 본다. 말하자면 필자는 업

과 윤회의 원리를 사후의 세계까지 확장하지 말고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삶의 현장에 곧바로 적용해 보자는 제안을 하고

싶은 것이다. 그럴 때 업과 윤회라는 사고방식은 우리를 둘러싼

자연의 섭리를 겸손하게 받아들이도록 할 것이며 또한 행위의 선

택과 그것이 도덕적 성품의 형성에 미치는 결과도 숙연하게 인정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보이지 않는 업력이 언제나 우리 주변

에 머물고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윤리적인 인간이

될 수 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업과 윤회라는 불교윤리적 사

고방식은 과거반성적인 숙명론이 아니라 미래지향적인 윤리성을

듬뿍 함축하고 있는, 말 그대로 싱싱한 도덕적 에너지로 간주되어

야 할 것이다. 끝으로 다소 불편할 수 있는 비유 하나를 통해 업

과 윤회의 상징적 가르침을 곱씹어 보기로 한다. 어제 저녁 친구

들과 함께 웃고 떠들면서 먹은 치킨과 삼겹살이 십 수 년 전에 돌

아가신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이 세상에 남기고 간 윤회의 흔적이

라고 한 번 생각해 보라. 그러면 우리는 썩은 고기 냄새로 찌든

자신의 모습에 하루 종일 기분이 우울할 것이다.18) 이것은 업과

윤회가 던지는 윤리적 메시지의 한 사례에 불과하지만 이와 같은

사고방식은 우리 주변의 모든 인간관계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고 본다. 자, 여러분들은 업과 윤회의 교설을 그저 믿는 것만으로

만족하겠는가, 아니면 조그만 일에서부터 그것의 윤리적 의미를

되새기고 지금 당장 실천할 것을 발원하겠는가? 우리의 현재적

삶이 누가 보더라도 만족스럽다면 죽음의 문제는 이미 극복된 것

이나 다름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죽음이란 것은 당사자가 죽는 순

간까지 어떻게 살았는가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는 인생의 생활

기록부이자 성적표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18) 다미엔 키온(2007). pp. 74-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