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사자후 품
Majjhima Nikàya I 2. 1. Cålasãhanàdasuttaü
MN 11. 사자후의 작은(짧은) 경cūḷasīhanādasuttaṃ)
140.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사왓티의 제따 숲에 있는 아나타빈띠카 승원에 머물고 계셨다. 거기에서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라고. 그러자 비구들도 받들었다. "세존이시여."라고.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오직 여기에만 사문이 있다. 여기에먄 두 번째 사문이 있고, 여기에만 세 번째 사문이 있고, 여기에만 네 번째 사문이 있다. 다른 [외도들의] 교설에는 사문들이 비어 있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이 바른 사자후를 토하라.
*'사자후(sihanada)'는 siha(사자) nada(소리)의 옮긴 말이다. 주석서는 '다른 교설에 의해서 깨뜨려지지 않고 자신의 교설을 명쾌하게 발기는 두려움 없는 소리'(DA.iii.844)로 설명하기도 하고, '뛰어난 소리이며 우둔하지도 않고 포악하지도 않은 사자가 내는 최상의 소리'(DA.iii.879)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자후라는 제목이 붙은 경은 모두다 다른 종교나 다른 사상에서는 존재하지 않음, 그들이 결코 따를 수 없고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세존과 승가에만 있는 뛰어난 가르침을 뜻한다. 그렇기 때문에 마치 뭇짐승들이 사자후를 듣고 두려워하듯이 세존의 이러한 사자후를 듣고 외도들은 두려워하고 자취를 감추게 된다.
*"'사자후(sinhanada)'란 ①수승한 소리(settha-nada)이고, ②두려움 없는 소리(abhita-nada), ③논박할 수 없는 소리(appati-nada)이다. 이런 네 부류의 사문들이 오로지 이 교법에만 있기 때문에 이 소리를 수승한 소리라고 최상의 소리라 한다. '이들이 오로지 이 교법에만 있다.'라고 말할 때 다른 사람들로부터 두려움이나 의심을 받지 않기 때문에 두려움 없는 소리이다. 이렇게 말할 때 어느 누구도 일어서서 논박하지 못하기 때문에 논박할 수 없는 소리이다. 그래서 수승한 소리이고 두려움 없는 소리이고 논박할 수 없는 소리라고 하는 것이다."(MA.ii.7)
* 네 부류의 사문이란 각각 예류자, 일래자, 불환자, 아라한을 뜻한다. (MA.ii.4-5)
141. 비구들이여, 외도 유행승들이 이렇게 말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그대 존자들에게 어떤 위안과 어떤 힘이 있기에 그것에 의해서 그대 존자들은 이렇게 말합니까? '오직 여기에만 사문이 있다. 여기에만 두 번째 사문이 있고, 여기에만 세 번째 사문이 있고, 여기에만 네 번째 사문이 있다. 다른 [외도들의] 교설에는 사문들이 비어 있다.이렇게, 비구들이여, 이 바른 사자후를 토하라.'라고.
비구들이여, 이렇게 말하는 외도 유행승들에게 이렇게 말해야 한다.
'도반들이여, 그 분, 아시는 분, 보시는 분, 아라한·정등각에 의해 선언된 네 가지 법이 있습니다. 그 법을 스스로 보고 있는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여기에만 사문이 있다. 여기에만 두 번째 사문이 있고, 여기에만 세 번째 사문이 있고, 여기에만 네 번째 사문이 있다. 다른 외도들의 교설에는 사문들이 비어 있다.'라고. 어떤 네 가지입니까? 도반들이여, 스승에 대한 [깨끗한] 믿음이 있고, 법에 대한 믿음이 있고, 계들에 대한 완성이 있고(계행을 원만하게 갖추고), 재가자와 출가자로 구성된 좋아하고 마음에 드는 동료 수행자들이 있습니다. 도반들이여. 이것이 그 분, 아시는 분, 보시는 분, 세존·아라한·정등각에 의해 선언된 네 가지 법들입니다. 그 법을 스스로 보고 있는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여기에만 사문이 있다. 여기에만 두 번째 사문이 있고, 여기에만 세 번째 사문이 있고, 여기에만 네 번째 사문이 있다. 다른 외도들의 교설에는 사문들이 비어 있다.'라고.
*'위안'으로 옮긴 원어는 assasa이다. 주석서에서는 avassaya(버팀, 지주, 보호), patittha(근거, 토대),upatthambha(도움)의 뜻이라고 설명하고 있다."(MA.i.7)
141. 비구들이여, 외도 유행승들이 이렇게 말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도반들이여, 우리도 우리의 스승에 대한 믿음이 있고, 우리의 법에 대한 믿음이 있고, 우리의 계들에 대한 완성이 있고, 재가자와 출가자로 구성된 좋아하고 마음에 드는 동료 수행자들이 있습니다. 도반들이여, 여기 그대들과 우리 사이에 어떤 차이, 어떤 특별함, 어떤 다름점이 있습니까?'라고.
"비구들이여, 이렇게 말하는 외도 유행승들에게 이렇게 말해야 한다.
'도반들이여, 구경의 경지는 하나입니까, 아니면 구경의 경지는 여럿입니까(제각각입니까)?'라고.
비구들이여, 바르게 설명하는 외도 유행승이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도반들이여, 구경의 경지는 하나입니다. 구경의 경지는 여럿이 아닙니다.'라고.
*각각의 종교마다 구경의 경지를 천명하지 않는 곳이 없다. 하지만 이 교법에서는 아라한과가 구경의 경지이다. 이들 모두는 오직 아라한과를 구경의 경지라고 말해야겠지만 사견으로 인해 범천등을 천명한다. 그러므로 각자 자기의 신념에 따라 오직 하나의 구경의 경지를 천명한다. 세존께서는 그것을 보이시기 위해서 '바르게 설명하는(samma byakaramana)'이라고 말씀하셨다.(MA.ii.9-10)
'도반들이여, 그 구경의 경지는 탐욕이 있는 자에게 있습니까, 아니면 탐욕이 없는 자에게 있습니까?'
비구들이여, 바르게 설명하는 외도 유행승이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도반들이여, 구경의 경지는 탐욕이 없는 자에게 있습니다. 구경의 경지는 탐욕이 있는 자에게 있지 않습니다.'라고.
'도반들이여, 그 구경의 경지는 성냄이 있는 자에게 있습니까, 아니면 성냄이 없는 자에게 있습니까?'
비구들이여, 바르게 설명하는 외도 유행승들이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도반들이여, 구경의 경지는 성냄이 없는 자에게 있습니다. 구걍의 경지는 성냄이 있는 자에게 있지 않습니다.'라고.
'도반들이여, 그 구경의 경지는 어리석음이 있는 자에게 있습니까, 아니면 어리석음이 없는 자에게 있습니까?
비구들이여, 바르게 설명하는 외도 유행승이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도반들이여, 구경의 경지는 어리석음이 없는 자에게 있습니다. 구경의 경지는 어리석음이 있는 자에게 있지 않습니다.'라고.
'도반들이여, 그 구경의 경지는 갈애가 있는 자에게 있습니까, 아니면 갈애가 없는 자에게 있습니까?'
비구들이여, 바르게 설명하는 외도 유행승이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도반들이여, 구경의 경지는 갈애가 없는 자에게 있습니다. 구경의 경지는 갈애가 있는 자에게 있지 않습니다.'라고.
'도반들이여, 그 구경의 경지는 집착이 있는 자에게 있습니까, 아니면 집착이 없는 자에게 있습니까?'
비구들이여, 바르게 설명하는 외도 유행승이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도반들이여, 구경의 경지는 집착이 없는 자에게 있습니다. 구경의 경지는 집착이 있는 자에게 있지 않습니다.'라고.
'도반들이여, 그 구경의 경지는 현명한 자에게 있습니까, 아니면 현명하지 못한 자에게 있습니까?'
비구들이여, 바르게 설명하는 외도 유행승들이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도반들이여, 구경의 경지는 현명한 자에게 있습니다. 구경의 경지는 현명하지 못한 자에게 있지 않습니다.'라고.
'도반들이여, 그 구경의 경지는 순응하고 저항하는 자에게 있습니까, 아니면 순응하지 않고 저항하지 않는 자에게 있습니까?'라고.
비구들이여, 바르게 설명하는 외도 유행승들이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도반들이여, 구경의 경지는 순응하지 않고 저항하지 않는 자에게 있습니다. 구경의 경지는 순응하고 저항하는 자에게 있지 않습니다.'라고.
*"순응하고 저항하는(anuruddha-ppativiruddhassa)'라는 것은 욕망(raga)으로 순응하고, 성냄(kodha)으로 저항한다는 말이다."(MA.ii.10)
'도반들이여, 그 구경의 경지는 희론을 기뻐하고 희론을 좋아하는 자에게 있습니까, 아니면 희론 않음을 기뻐하고 희론 않음을 좋아하는 자에게 있습니까?'
비구들이여, 바르게 설명하는 외도 유행승들이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도반들이여, 구경의 경지는 희론 않음을 기뻐하고 희론 않음을 좋아하는 자에게 있습니다. 희론을 기뻐하고 희론을 좋아하는 자에게 있지 않습니다.'라고.
142. 비구들이여,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존재 있음의 견해(有. 상견.常見)와 존재 없음(無. 단견.斷見)의 견해이다.
비구들이여, 존재 있음의 견해를 고수하고, 존재 있음의 견해로 가까이 가고, 존재 있음의 견해에 묶인 사문이나 바라문은 누구든지 존재 없음의 견해에 대해 저항하는 자이다. 비구들이여, 존재 없음의 견해를 고수하고, 존재 없음의 견해로 가까이 가고, 존재 없음의 견해에 묶인 사문이나 바라문은 누구든지 존재 있음의 견해에 대해 저항하는 자이다(견해를 배척한다).
비구들이여, 이 두 가지 견해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맛과 위험(잘못됨)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는 사문이나 바라문은 누구든지 '탐욕이 있는 자이고, 성냄이 있는 자이고, 어리석음이 있는 자이고, 갈애가 있는 자이고, 집착이 있는 자이고, 현명하지 못한 자이고, 순응하고 저항하는 자이고, 희론을 기뻐하고 희론을 좋아하는 자이다. 그들은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과 그리고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괴로움의 영역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라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이 두 가지 견해의 일어남과 사라집과 맛(달콤함)과 잘못됨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아는 사문이나 바라문은 누구든지 탐욕이 없는 자이고, 성냄이 없는 자이고, 어리석음이 없는 자이고, 갈애가 없는 자이고, 집착이 없는 자이고, 현명한 자이고, 순응하지 않고 저항하지 않는 자이고, 희론 않음을 기뻐하고 희론 않음을 좋아는 자이다. 그들은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과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다. 괴로움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다.'라고 나는 말한다.
*"'일어남(samudaya)'이란 순간적인 일어남(khanika-samudaya)과 조건으로서의 일어남(paccaya-samudaya)이다. 순간적인 일어남이란 견해들의 생성이고, 조건으로서의 일어남이란 여덟 가지가 있다. 이와 같은 말씀이 있다. "무더리도 견해의 조건이고, 무명도 ... 감각접촉도 ... 인식도 ... 일으킨 생각도 ... 이치에 맞지 않게 주의를 기울임도 ... 나쁜 친구도 .... 다른 사람의 소리도 견해의 조건이다. 무더기는 일어난다는 뜻에서 견해가 일어나는 원인이고 조건이다. 이와 같이 무더기는 견해가 일어나는 조건이다. 무명 ... 감각접촉도 ... 인식도 ... 일으킨 생각도 ... 이치에 맞지 않게 주의를 기울임도 ... 나쁜 친구도 ... 다른 사람의 소리도 일어난다는 뜻에서 견해가 일어나는 원인이고 조건이다. 이와 같이 다른 사람의 소리는 견해가 일어나는 조건이다."(Ps.I.138;MA.ii.11)
*'사라짐(atthangama)'도 두 가지이다. 순간적인 사라짐과 조건으로서의 사라짐이다. 순간적인 사라짐이란 '다함, 사그라짐, 부서짐, 파괴, 무상함, 자취를 감춤'을 말한다. 조건으로서의 사라짐이란 예류도를 말한다. 예류도는 모든 사견들을 근절하기 때문이다."(MA.ii.11)
*'맛(달코함, 매력, assada)'이란 견해에 뿌리 박은 이익이다. 그것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스승이 어떤 견해를 가지면 제자도 그와 같은 견해를 가진다. 그런 견해를 가진 스승을 제자들은 존경하고 존중하고 공경하고 숭배한다. 그로 인해 제자들은 옷과 음식과 거처와 의약품의 네 가지 필수품을 얻는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견해로 인한 금생의 이익이다."라고.(MA.ii.11)
*"'위험(재난,adinava)'이란 견해를 움켜쥠에 뿌리박은 위험이고, '벗어남(nissarana)'이란 견해에서 벗어남이 열반을 말한다."(MA.ii.11)
143. "비구들이여, 이런 네 가지 집착이 있다. 어떤 넷인가?
"비구들이여, 감각적 쾌락에 대한 집착[욕취.欲取], 견해에 대한 집착[견취.見取], 계행과 의례의식에 대한 집착[계금취.戒禁取], 자아의 교리에 대한 집착[아어취.我語取]이다. 비구들이여,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들은 모든 집착에 대해 철저히 안다고 천명하더라도, 그들은 모든 집착을 철저히 안다고 바르게 천명하지 못한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집착을 철저히 안다고 천명하더라도 견해에 대한 집착을 철저히 안다고 천명하지 못하고, 계행과 의례의식에 대한 집착을 철저히 안다고 천명하지 못하고, 자아의 교리에 대한 집착을 철저히 안다고 천명하지 못한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그 사문·바라문 존자들은 이런 세 가지 경우를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한다. 그로 인해 모든 집착에 대해 철저히 안다고 천명하는 그 사문·바라문 존자들은 모든 집착을 철저히 안다고 바르게 천명하지 못한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집착을 철저히 안다고 천명하더라도 견해에 대한 집착을 철저히 안다고 천명하지 못하고, 계행과 의례의식에 대한 집착을 철저히 안다고 천명하지 못하고, 자아의 교리에 대한 집착을 철저히 안다고 천명하지 못한다.
비구들이여,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들은 모든 집착에 대해 철저히 안다고 천명하더라도, 그들은 모든 집착을 철저히 안다고 바르게 천명하지 못한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집착을 철저히 안다고 천명하고, 견해에 대한 집착을 철저히 안다고 천명하더라도 계행과 의례의식에 대한 집착을 철저히 안다고 천명하지 못하고, 자아의 교리에 대한 집착을 철저히 안다고 천명하지 못한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그 사문·바라문 존자들은 이런 두 가지 경우를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한다. 그로 인해 모든 집착을 철저히 안다고 천명하는 그 사문·바라문 존자들은 모든 집착을 철저히 안다고 천명하지 못한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집착을 철저히 안다고 천명하고, 견해에 대한 집착을 철저히 안다고 천명하더라도 계행과 의례의식에 대한 집착을 철저히 안다고 천명하지 못하고, 자아의 교리에 대한 집착을 철저히 안다고 천명하지 못한다.
비구들이여,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들은 모든 집착에 대해 철저히 안다고 천명하더라도, 그들은 모든 집착을 철저히 안다고 바르게 천명하지 못한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집착을 철저히 안다고 천명하고, 견해에 대한 집착을 철저히 안다고 천명하고, 계행과 의례의식에 대한 집착을 철저히 안다고 선언하더라도 자아의 교리에 대한 집착을 철저히 안다고 천명하지 못한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그 사문·바라문 존자들은 이런 한 가지 경우를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한다. 그로 인해 모든 집착에 대해 철저히 안다고 천명하는 그 사문·바라문 존자들은 모든 집착을 철저히 안다고 바르게 천명하지 못한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집착을 철저히 안다고 천명하고, 견해에 대한 집착을 철저히 안다고 천명하고, 계행과 의례의식에 대한 집착을 철저히 안다고 천명하더라도 자아의 교리에 대한 집착을 철저히 안다고 천명하지 못한다.
비구들이여, 이런 법과 율에서 스승에 대한 믿음을 가진 자를 바르게 간 자라고 선언하지 않는다(말하지 못한다). 법에 대한 믿음을 가진 자를 바르게 간 자라고 선언하지 않는다. 계들에 대한 완성이 있는 자를 바르게 간 자라고 선언하지 않는다. 동료 수행자들에 대해 좋아하고 마음에 들어하는 자를 바르게 간자라고 선언하지 않는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이렇게, 비구들이여, 잘못 선언되고, 벗어남으로 이끌지 않고, 가라앉음으로 이끌지 않고, 정등각에 의해서 선언되지 않은, 잘못 설해진 법과 율에 그 원인이 있다.
144. 비구들이여, 모든 집착을 철저히 안다고 천명하는 여래‧아라한‧정등각은 모든 집착을 철저히 안다고 바르게 천명한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집착을 철저히 안다고 천명하고, 견해에 대한 집착을 철저히 안다고 천명하고, 계행과 의례의식에 대한 집착을 철저히 안다고 천명하고, 자아의 교리에 대한 집착을 철저히 안다고 천명한다. 비구들이여, 이런 법과 율에서 스승에 대한 믿음을 가진 자는 바르게 간 자라고 선언된다(말한다). 법에 대한 믿음을 가진 자는 바르게 간 자라고 선언된다. 계들에 대한 완성이 있는 자(계행을 원만히 갖춘 자)는 바르게 간 자라고 선언된다. 동료 수행자들에 대해 좋아하고 마음에 들어 하는 자는 바르게 간 자라고 선언된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잘 선언되고 벗어남으로 이끌고 가라앉음으로 이끌고 정등각에 의해 선언된, 잘 설해진 법과 율에 그것이 있다.
145. 그러면 비구들이여, 이런 네 가지 집착은 무엇이 인연이고, 무엇 때문에 자라나며, 무엇에서 생기고, 무엇이 기원인가? 이들 네 가지 집착은 갈애가 인연이고, 갈애 때문에 자라나며, 갈애에서 생기고, 갈애가 기원이다. 비구들이여, 이 갈애는 무엇이 인연이고, 무엇 때문에 자라나며, 무엇에서 생기고, 무엇이 기원인가? 갈애는 느낌이 인연이고, 느낌 때문에 자라나며, 느낌에서 생기고, 느낌이 기원이다. 비구들이여, 이 느낌은 무엇이 인연이고, 무엇 때문에 자라나며, 무엇에서 생기고, 무엇이 기원인가? 느낌은 감각접촉[觸]이 인연이고, 감각접촉 때문에 자라나고, 감각접촉에서 생기고, 감각접촉이 기원이다. 비구들이여, 이 감각접촉은 무엇이 인연이고, 무엇 때문에 자라나며, 무엇에서 생기고, 무엇이 근원인가? 감각접촉은 여섯 감각장소[六入]이 인연이고, 여섯 감각장소 때문에 자라나고, 여섯 감각 장소에서 생기고, 여섯 감각장소가 기원이다. 비구들이여, 이 여섯 감각장소는 무엇이 인연이고, 무엇 때문에 자라나며, 무엇에서 생기고, 무엇이 기원인가? 여섯 감각장소는 정신‧물질[名色]이 인연이고, 정신‧물질 때문에 자라나고, 정신‧물질에서 생기고, 정신‧물질이 기원이다. 비구들이여, 이 정신‧물질은 무엇이 인연이고, 무엇 때문에 자라나며, 무엇에서 생기고, 무엇이 기원인가? 정신,물질은 의식이 인연이고, 의식 때문에 자라나고, 의식에서 생기고, 의식이 기원이다. 비구들이여, 이 의식은 무엇이 인연이고, 무엇 때문에 자라나며, 무엇에서 생기고, 무엇이 기원인가? 의식은 형성(의도적 행위들.行)이 인연이고, 형성 때문에 자라나고, 형성에서 생기고, 형성이 기원이다. 비구들이여, 이 형성[行]은 무엇이 인연이고, 무엇 때문에 자라나며, 무엇에서 생기고, 무엇이 기원인가? 형성은 무명이 인연이고, 무명 때문에 자라나고, 무명에서 생기고, 무명이 기원이다.
비구들이여, 비구에게 무명이 제거되고 명지(明知)가 일어날 때, 무명이 사라지고 명지가 일어났기 때문에 그는 더 이상 감각적 쾌락에 대한 집착도 움켜쥐지 않고, 견해에 대한 집착도 움켜쥐지 않고, 삿된 계행과 의례의식에 대한 집착도 움켜쥐지 않고, 자아 교리에 대한 집착도 움켜쥐지 않는다. 움켜쥐지 않을 때 동요하지 않고 동요하지 않을 때 스스로 열반에 든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안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그 비구들은 즐거워하면서 세존의 말씀을 기뻐했다.
Cūḷasīhanādasuttaṃ niṭṭhitaṃ paṭhamaṃ.
사자후의 짧은 경(M11)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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